리투아니아 여인 - 인터뷰 소설의 의의와 한계 ; 들뢰즈의 개념을 차용하여 해석하면서
왼쪽 관자놀이 쪽이 지끈지끈거린다. 목구멍은 평소보다 약간 더 피운 담배 때문에 가래가 맺혀, 떠놓은 물을 자꾸 홀짝거리게 한다. 뭐, 사실 목구멍의 걸림은 내가 썩 그리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관자놀이의 고통은 내게 있어선 특별히 살아있다는 자각을 일으키기에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건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이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온갖 망상들이라 나는 믿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 옳다 그르다란 관념들, 가족에 대한 환상들, 국가와 역사란 담론들 등등. 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고통은 생생하다. 그리고 생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또, 자연스러움은 자유롭다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물론, 마지막 이 논리들은 다소 불안정하다. 생생하다는 말이 자연스럽다에서 자유라는 개념으로 이전하기엔 불명확한 설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많은 설명들이 불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생하지 못한 것들, 무의식적인 공포들 혹은 그 무엇들은, 모두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그 무언가를 억압한다는 그 이유로. 이렇게 부자연스러움과 자유롭지 못함은 등가를 이룬다.
시작부터 장광설을 늘어놓은 듯싶다. 그것도 어떤 문학적 뉘앙스나 분위기를 담아내기보다는 무언가 철학적인 사설들에 가까운 썰들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나는 골머리 아픈 들뢰즈의 글들을 한 뭉탱이 읽었다. 왜냐하면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에 대한 품평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글을 이런 철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 구분하여 평한다는 자체가 소설의 평과는 다른, 분명 이질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까닭일 게다. 그것도 거의 마지막 부분, 혜련과의 이별에서의 ‘문화적 노마드’라는 그 단 한 마디 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달리 이 글을 이해할 길이 없어서,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왜 굳이 이런 망작을 썼는지 이해할 방법이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글에 들뢰즈의 사상을 대입시킨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의 마지막쯤 왔을 때 확연히 드러난 ‘문화적 노마드’란 어원 때문이었다. ‘문화적 노마드’란 철학자인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자인 펠릭스 가타리가 공동작업을 한 책인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들뢰즈가 그의 대표저서 중 하나인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란 개념을 어느 정도 미리 잡아놓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두 책을 모두 다 제대로 읽지 못했다. ‘차이와 반복’은 읽은 줄 알았는데, 자크 데리다의 다른 책과 혼동한 거 같고, ‘천 개의 고원’은 예전에 불문 스터디를 할 때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중간에 모임 자체가 파토가 나면서, 자연스레 그 책 스터디도 중단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노마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굳이 예전에 읽었던 질 들뢰즈의 논문들을 엮은 책들을 다시 들쳐보았다. 음,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해불능이기는 하다. 그만큼 책들이 어렵고, 번역이 난삽하다. 아니, 체계 자체를 부정하면서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책의 개념이 담아낸 이야기가 줄곧 ‘리투아니아 여인’의 맥락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줄기가 되는 인물은 딱 두 인물이다. 화자인 주인공과 혜련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중심추는 화자 자체보다 혜련 쪽에 더 가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혜련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 이유로 끊임없이 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인터뷰와 가까운 형식으로, 혜련에게 화자는 끈질기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혜련의 근원을 추적해간다. 인종적으로 외가인 리투아니아의 피와 친가인 한국의 피의 혼혈종이란 특수성과 더불어 환경적으로 미국이란 시민권을 가진 다국적 인간에 대한 어떤 동경과 의구심 혹은 호기심이 그 어떤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해도 그녀에게서는 그가 원한 답을 원할 수가 없다. 리투아니아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대탈출을 시도한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과 별 상관없다는 투이다. 아무리 화자가 민족적 정서를 얽어매려 해도 그녀 속에는 한때 그 모든 이민자들의 포용처였던 미국적 정서만 있을 뿐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저 다민족적인 사회 속에서 누구나 가진 비극적 설화이거나 역사의 편린? 사실, 그의 할머니와 이모들의 이야기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산가족적 상봉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30년의 모진 세월을 돌아 돌아서 만난 모녀들의 불편한 이야기, 그 속엔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짠함도 설움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온전히 미국적인 정서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혼 뒤 미국으로 돌아가 마치 미국인처럼 살 것처럼 결심하다가도, 주인공인 화자를 만나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현듯 느끼고서는 다시 생기를 찾은 것처럼, 그녀는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늘 그녀에게 이질적인 생경함을 선물해준다. 그녀 자신이 먼저 그렇게 느끼기 앞서 타인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다. 화자는 그것을 인종적 호기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그것이 아닌 하나의 민족주의라는 마술적 집단의식이 가진 배척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제 생뚱맞게 인도를 가로질러 세계 곳곳으로 유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서가 그런 유랑자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화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유랑자인 그녀가 추구하는 바가 각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분절적이고, 또 동시에 서로가 서로와 맞닿아 있는 그런 바다와도 같은 세계, 굽이굽이 파도가 각자 다르게 치면서도 함께 존재하는 넓은 바다와도 같은, 우리의 작은 품으로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그런 세계로 그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화자는 그 세계와 그 정신에 대해 응원해준다. 그렇지만 글쎄, 그저 관망자일 뿐, 과연 그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을지, 화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이다.
이 글에서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가정과 페미니즘이다. 화자는 책 중반에 자신의 결혼생활과 혜련의 이혼 과정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역시 어떤 의미로 들뢰즈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가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까닭으로 아버지와 원수라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프로이드가 우리 인간 무의식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이끌어낸 중요한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을 지배하는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늘 도모한다. 그 이유로 자신이 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들은 늘 적대시했던 만큼 동경해왔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니이다. 그 까닭으로 아들은 어머니의 다른 대리 표상으로 여자를 취한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 근저에 깔린 가정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프로이드를 비판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가정이란 소꿉놀이에 얽매여 있을 만큼 한정적이지 않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이란 울타리로 한정지음으로써 인간을 그 울타리 속에 억압해놓는다. 그 때문일까? 이 글의 화자 또한 가정은 이래야하지 않을까라는 자문을 늘 하고 있다. 어떤 동지와 함께 연극의 연장선처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이래야하고 부인은 이래야한다는 관념 하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반문한다. 너도 그 지긋지긋한 가정이란 울타리를 나에게 들이미느냐고? 나는 나 자체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없겠냐고? 그렇다면 그런 존재는 무엇이냐고 주인공은 묻는다. 이에 혜련이 보여준 답이 ‘노마드’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들, 가장 큰 욕구를 틀이나 체계와 같은 안정이라고 전제해보자. 아마, 가정도 이 틀과 체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틀들이 다 무너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까? 물론, 들뢰즈가 이 모든 체계의 전복과 기본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결코 한정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철학자로서 그는 한없이 욕망에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적인 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로 체계에 대한 집착이 아닌, 체계와 체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렇게 수 천 개의 욕망이란 이름의 고원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존재하는 유목민의 정신을 그의 철학 세계에 도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속에서 화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유목민 정신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부인과의 결별은 일종의 페미니즘과의 반동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왜 거기서 한 번 더 깊이 들어가 혜련을 통해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언급했음에도 혜련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무슨 상간의 추억이니 하는 돼먹지 않은 소리나 하면서. 왜냐하면 애초에 그 자신이 바뀔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까닭이다. 그 이유로 글속에서 혜련 또한 주인공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해도 또다시 가정이란 소꿉놀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이 글은 애초부터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대화해보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 글엔 그러한 시도로써의 의의와 가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첫째는, 정말 글 자체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소설이 관념적인 구도 하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이야기 자체에서 철학적 함의를 끌어내고, 그 함의를 변주하여 문학적 감수성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내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본 이유도 무시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문열의 화법에 너무 익숙해져 식상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가 빈약해서는 소설적 의의를 찾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애초에 형이상학적 견지 하에서 들뢰즈의 개념을 가져다 쓴 것이 다소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들뢰즈 자체가 거의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형이상학이 가져다 쓴 모든 권력적 용어들, 이데아, 우리말로 아주 변용해서 이상, 신이라는 관념, 국가, 가정 등등, 이 모든 체계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 하에 이런 개념을 혜련에게 반대급부로 주면서 병치시킨 건 무언가 아귀가 맞아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와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런 시도는 좋다고 본다. 하지만 시도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것이 시도이다. 변하지 않을 두 관념을 그저 보여주기 위해 병치시키는 건 누구도 시도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 들뢰즈 자신도 ‘천 개의 고원’에서 노마드의 개념에 대해 인터뷰할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쓰기 어려웠던 부분이 음악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그냥 거의 그대로 차용했을 뿐, 어떤 문학적 변주의 시도 자체도 하지 않고 있다. 거기다 내 입장에서 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들뢰즈가 가장 거부했던 민족주의적 특성으로 혜련을 거의 소설 초반부터 특정 지으면서 노마드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귀결시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혜련의 입을 통해 그 부분을 지적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부터 귀결이 너무 작위적으로 확정되어 있음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봐야겠다. 이 글을 앞에서 나는 감히 망작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거의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내 아쉬운 건 이문열이란 우리 문단의 거장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는 건 아닌가하는 내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완전히 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이라는 범주는, 아니 조금 좁게 소설이라는 장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잘라내 왔기에 존속해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변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이 시대의 거장일지라도. 조금 더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