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프랑스 문학에 대한 추억여행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예감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방송대 불문과의 프랑스 단편이라는 과목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텍스트로 해서 시험을 치룬 적이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이십대 때 대학시절 신학이 전공이었던 탓에 아마 다른 서적으로 얼핏 접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때문에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까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천국으로 간 집달리’의 경우는 거의 종교우화서적에서 본 아슴푸레한 기억이라, 제목만 기억날 뿐 내용 자체가 거의 흐릿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는 읽는 순간,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져, 읽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그 까닭에 원어로 본 이유도 각인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 시험은 기말시험으로 프랑스 단편 과목의 거의 300페이지 분량 가까운 책 전체를 범위로 했는데, 다른 단편은 사실 지금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뭐랄까? 그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아릿한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십대 때부터 줄곧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특히 프랑스 문학에 동경이 강했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삼십대가 넘어서 굳이 방송대 불문과에 들어갔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또 굳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어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과 어둠에 대한 동경이 함께 공존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프랑시스 잠 작품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상상력과 서정성, 동시에 기독교 문학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여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기의 향연들, 이 양극의 기묘한 유혹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채워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한 마디로 기막힌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발랄하고 경쾌한 서곡에서 씁쓸하고 여운이 있는 비극의 전조로 뒤바뀌는 서정적 변주곡! 만약 나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상상력이란 건 고작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AV동영상 수준의 상상력이었다. 몰래 여자의 알몸이나 훔쳐보거나 강간하고 도망가는 그런 식, 혹은 그러다 문득 회의에 빠져 성적인 담론에 대해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나 진부하게 늘어놓을 게 뻔한 졸작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곡으로 따지만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들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곡이었을 것이 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우리를 동화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화적인 세계로까지 데려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구성은 흔한 신화적 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그것을 만용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에서부터 혹은 마이더스 손 이야기와 같은 신화이거나 우화와 같은 구성, 거기에 그 시대의 현대성을 가미시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러한 신화적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 획기적인 상상력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라는 설정과, 둘째로 그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가공하여 새로운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는데 있다. 만약, 작가가 마지막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그저 벽속에 갇혀버린 것으로 끝내고, 교훈적으로 마무리했다든가 혹은 재미를 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비약적인 능력을 한껏 치장했다면, 글은 신화적이도 동화적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졸렬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벽에 가두어 놓고, 또 그 남자를 위해 담벽으로 스며드는 기타의 선율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율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버린 야심한 새벽 홀로 남겨진 이들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질 위로의 선율이 되고, 혹은 누군가를 애타가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속 담벽 안에 가둬버린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슬픈 발라드로 남게 된다.

 

 

  두 번째로 나는 ‘생존 시간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역시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작품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경우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 1946년이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가 1943년이니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는 장편이고, 이 작품은 단편집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상했던 시기는 비슷했을 것이라 예상해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층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상기조가 ‘실존주의’임을 떠올려 볼 때, 그 시기 이런 비슷한 작품이 다수 쏟아졌다고 하더라도 하등 기이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비슷한 소재임에도 이야기의 초점과 중심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실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이유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마르셀 에메는 그 특유의 유머와 함께 시간의 상대성과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연출해야했다고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이 역시 초반 가벼움을 가장하면서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사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에 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상대성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독자에게 준다. 왜냐하면 작가 자체는 글속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어떤 자신의 철학적인 주관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달에 15일을 사는 남자, 혹은 36일 사는 남자와 같이,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객관적으로 표현해내고, 그 속에 처한 작가로 대변되는 주인공 자신의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갈 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좋은 소재가 단편으로 종결된 까닭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개인도 그러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면 작가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그러한 소재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인 사르트르, 알베르트 까뮈 등이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서 마르셀 에메가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우리는 결코 지금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마르셀 에메는 역시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느낌 그대로 내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게는 이 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서정과 더불어 양극에 서있는 어두운 관념에 대한 환상이 아직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 처음 마주했던 ‘어린 왕자’와 같은,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벽을 드나드는 남자’와 같은, 이런 간결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어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런 아름다운 단조의 변주곡을 하나쯤 써내고 싶다. 쓸쓸하지만 여운 있는 서정성 가득한 발라드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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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텔지아 -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에 대한 고백


 

 설령, 길 위에서만 살다 길 위에서 죽어버릴 구도자일지라도, 혹은 영원히 이방인으로만 살다가길 원했던 까뮈의 뫼르소일지라도, 그리고 빈집을 견딜 수 없어 낡은 외투 하나만을 꼭 부여잡다 겨울 빛깔처럼 투명하게 어느 봄날에 분질러져버릴 젊은 시인일지라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란 것은 늘 있게 마련인 법이다. 비록 그들에겐 돌아가야 할 집도,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의미 없음 너머에 까닭 모를 설움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라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목마름 같은 그 그리움들이 너무나 컸던 그 이유로, 메말라 진 까닭인지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리움 하나쯤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이유를 알고 싶어, 목이 마르고, 그렇게 목마른 이유로, 어떤 이들은 끝내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고, 메말라 간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늘 그 그리움의 이유들을 알고 싶어, 목이 말랐다. 그리고 그런 목마름 가운데 오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한 사람의 목마름과 마주해 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맨 처음 만난 것은 영화 '희생'에서였다.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들과 너무나도 심각한 종교적인 냄새들 그리고 광기와 어우러진 화두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주인공 알렉산더 교수가 자신의 여자 하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후, 깨어나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과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준다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라는 대사는 매우 인상 깊게 각인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이 때문에 그 후, 난 그의 영화들을 다시 어렵사리 구해보기 시작하였고, 그런 와중에 영화 '노스탤지어'를 통해 그의 목마름과 광기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이해가 영화사 속에서 독특하게 '완벽한 영상시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맥을 짚는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잡고서 큰집의 기둥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목마름의 이유들을 그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일 따름이지 해석이 아니라 생각해 보기에, 지금부터 천천히 그의 영화 '노스탤지어'를 따라,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들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영화는 처음 먼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어느 벌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이탈리아로 나와 있어, 쉽게 이탈리아의 어느 벌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타르코프스키라는 인물의 성격상, 개인적으로 여기부터가 분명 예사로운 조짐은 아니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노스탤지어 즉 향수이며, 지평선이라는 것은 닿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들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러면서 영화의 두 주인공 코르차코프와 유제니아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서 영화 화면에 처음 잡히었던 지평선의 풍경을 따라, 어느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장면을 카메라의 시선이 고정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서게 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코르차코는 18세기 러시아의 작곡가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신의 여자 친구이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이탈리아어를 통역해줄 유제니아와 함께, 소스노프스키가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온천 마을 바뇨 비뇨니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뿐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도 매우 복잡하게 영화와 엇물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얽혀 있는 실제 상황이다. 소스노프스키라는 인물의 경우, 18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러시아의 유명한 노예 신분의 음악가였는데, 지주의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왔다가 이탈리아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유 뿐 아니라 부와 명예 그리고 직위까지 그 모든 것을 보장받게 되지만, 고국인 러시아를 잊지 못해, 다시 노예 신분으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러시아로 돌아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소스노프스키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만든 직후, 러시아에서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상황은 미래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게 될 타르코프스키 자신에 대한 진중한 고백이 담긴 예감과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선 내내 향수에 대한 이상스런 이야기들과 더불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마을과 고르차코프의 고향 러시아의 이미지가 몽환적으로 교차되어지면서, 극대화된 그리움의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가 여기서만 머무른다 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러한 향수 속에 숨겨진 궁극적인 그리움에 대해 묻고 있고,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 영화 속에선 전혀 새로운 인물 도메니코가 등장하게 된다.

 

 

  어느 날 유제니아와 함께 온천 주변을 거닐던 코르차코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도메니코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7년간이나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가두고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생각하며 홀로 지내고 있던, 말 그대로 완전한 미치광이였다. 그런데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면들에 대해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심지어 그는 이 때문에 영화 내내 마치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애인 사이로 함께 하던 유제니아와 결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도메니코도 세상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코르차코프는 생소한 이탈리아 마을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스노프스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서 떠나려는 찰나, 우연히 로마에 머물고 있던 유제니아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도메니코가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며칠째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그와 동시에 그(도메니코)가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분신자살을 시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떠나기 전, 코르차코프에게 이야기 한 내용이었다. 무엇이냐 하면, 도메니코는 인류에게 종말이 올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러한 인류의 종말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선 로마와 자신의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코르차코프에게, 자신이 로마에서 분신자살을 할 때,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촛불을 켠 채 꺼뜨리지 않고서, 온천의 맨 처음 위치한 장소에서부터 끝까지 들고 가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말들에 대해 진지하게 듣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여행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유제니아와의 통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코르차코프는 떠나려는 걸음을 멈추어, 다시 마을의 온천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날까지 말짱하던 온천이 완전히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코르차코프는 실제로 도메니코의 말을 믿게 된 듯, 도메니코가 로마의 광장에서 우스꽝스럽게 분신자살하는 그 순간,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마을의 온천에서 촛불을 켜고선 조심스레 걷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러한 코르차코프가 바람에 자꾸 꺼지는 촛불을 다시 켜기를 반복하면서, 온천의 처음지점부터 끝지점까지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성공한 코르차코프의 희망을 발견한 얼굴과 함께, 갑자기 전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궁전처럼 생긴 어떤 커다란 집 가운데 앉아 있는 코르차코프의 모습을 잡으며, 영화를 끝마친다.

 

 

  이제 복잡하고 기괴한 그리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영화의 얘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시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 속에서 시인 코르차코프가 이미 던진 질문이지만, 소스노프스키는 왜 자신이 다시 노예가 될 줄 알면서도 고향인 러시아로 되돌아 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것일까? 대체 고향이라는 것이 어떤 힘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보통 자유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 동안 너무나 많이 접해 왔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되어 졌든, 혹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대리 만족을 주었던 간에,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자유란 것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과연 자유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자유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도달하고파, 자신의 뿌리 깊숙이 박힌 대지를 버리고서, 하늘을 향해 이카로스와 같이 나래를 폈을 때, 태양에 아스러지는 자태와 유사한 문제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뿌리 깊숙이 박힌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무한한 자유로의 상승을 꿈꾸지만, 자유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는 어이하지 못하고, 다시 자유에로의 한없는 비상을 꿈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 자신이기도 한 코르차코프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등지고서, 오직 소스노프스키로 대변되는 자유와 궁극적인 그리움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는 방랑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매몰차지 못하게도,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의 풍경, 가족의 모습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인 샘(온천)과 러시아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유제니아와 같은 존재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망명을 결심하고 있던, 타르코프스키의 미리 예감된 계산과도 같은 복선이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버리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때, 극심하게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완성한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하였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온천 마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향수병에 시달리던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세상의 종말을 믿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결국 왜 그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촛불 하나를 들고, 온천을 걸어간 것일까?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자유에로의 관심이, 그들의 향수의 대상인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고향과 연관되어져 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그 고향이라는 것이 조국 러시아를 넘어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것임을 우린 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떠남이라는 것은 자신의 거추장스런 뿌리를 자르고서 바람을 따라 나래를 펴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깊게 뿌리내리기 위함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저변에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뿌리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그대가 곁에 있다고 해서 그대가 그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대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누구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애초부터 무언가 상실한 채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체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목마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그 대상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그러니 어느 누가 영화 속에 우리의 그리움의 원천인 이탈리아 마을의 작은 온천이 하루아침에 메말라 버리고, 그 때문에 이 세상이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고 하여, 그것이 거짓이고, 가짜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도 모르고 날뛰는 방랑자와 미치광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느 시인은 자신에겐 조국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시인은 자신의 집이 비어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속에서 사랑을 잃었음을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스무 살 적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 보다 귀중한 내 자신의 진실을 찾고자, 집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과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마저 버리고서 길을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 알아졌던 것은, 나에겐 이미 그것들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돌려놓고자 하는 내가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분명히 그랬고, 그러하기에 지금 역시 그러한 나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하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그리고 그 누군가들은 쉽게 발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모든 그리움 끝에서조차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게로 쪼르르 되돌아오거나, 그 목마름 끝에서 견뎌내질 못하고 분질러져 버리는 것일까? 먼 지평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경계는 정녕 우리의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한량없는 질문들 끝에서 도메니코와 같이 스스로 불살라 질 이들을 생각할 때면, 난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껏 고백했던 그 모든 진실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하고만 싶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모든 것들은 희미해져버리지만, 그럴 땐 도메니코를 대신해 불살라질 촛불 하나를 켜고서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코르차코프처럼, 내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돌아갈 집에 밤새 떠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태양 끝에 가 닿고자 나래를 펼쳤던 어느 벼랑에서 되돌아 선 그 걸음으로,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것이라고, 그 품에서 모두 살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나도 아직 꺼놓지 않을 불빛 하나쯤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비록 나 역시 코르차코프처럼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목마른 광기 그 이상 그 무엇도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메니코와 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을 위해 촛불을 켜보고 싶은 것이다. 단 하룻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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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만세 - 자위, 섹스 그리고 그 너머


 

 애정만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9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써 우리에게도 선보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대만 영화인데다, 당시 기준으로 보통 비디오대여점에 들여 놓을 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해서 전혀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영화 꽤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군대를 제대하고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밤마다 학교 주위를 배회할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학교를 자퇴한 괴짜 선배를 알게 되어, 그 선배의 소개를 통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나는 그 선배와 함께 그 때까지 이름만 듣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영화의 평생 분량을 거의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사를 좔좔 꿰게 되었지만, 그런 우리조차도 그 영화를 보고선 머리가 띵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체 이게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유럽 예술 영화처럼 알레고리와 상징이 가득한 관념적인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우리는 갖은 폼 잡으면서 영화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고, 아는 지식 모르는 지식 총 동원해, 피 튀기는 토론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촬영 기법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상이 남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거의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수준... 물론, 장선우 감독의 실험 정신에 대해 내가 평가 절하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그 만큼 허무하고 허탈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는 영화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현재 그 선배도 나도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버둥거리고 있고, 또 그 만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변했을 것이다. 뭐 이젠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굳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자체가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이제 나는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 사회를 배회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뭐랄까..? 제법 고대 하늘나라를 배회하던 신학생의 때깔을 벗고, 현대 사회인 흉내를 낸다고 할까? 그러면서 이제야 나는 이 영화가 이야기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 한 남자가 어느 아파트 열쇠 키를 훔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보아하니 그 남자 행색은 번듯한데, 어디 오갈 때가 없는 모양인 것 같다. 그래서 아직 분양이 안 된 아파트의 열쇠 키를 훔쳐, 잠시 동안 그 집에 기거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제 집 인양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데... 아니, 갑자기 웬 칼? 이 남자 사는 게 힘들었나?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디 자살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눈을 찔끔 감고서 칼을 손목에 가져가 보지만, 쉽게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칼을 손목에 다시 가져가 보지만... 도저히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할 거 같은데...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이 영화 주인공이 아닌가? 하고 잠깐 의문을 달 새, 순식간에 카메라는 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이십대 후반의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사람이 북적대는 어느 밝은 카페, 한 남자가 앉아 느긋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 옆에 마치 중경삼림에 임청하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문다. 보아하니, 섹시한 모양이 보통이 아닌 아줌마!^^;; 그래서 인지 옆에 남자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뗀다. 그리고서 여자가 자리를 뜨니까 웬 미행? 첩보영화인가? 여하튼 조금은 백수건달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갈 길을 가는데... 갑자기 조금 수상쩍은 느낌에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자기도 갈 길을 간다는 듯 자연스럽게 공중전화 박스로 가 전화를 건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첩보영화 공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자가 그 사이에 도망가지를 않고, 남자가 전화를 거는 전화박스 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장면은 바뀌어,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아파트에 들어서더니, 서로 굶주렸던 듯 급하게 옷을 벗으며, 애정행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집은 자살 시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몰래 들어가 있던 집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하던 남자는 깜짝 놀라, 자살하다 말고 옷가지를 급히 챙겨 입고선, 잠시 그 집안에 다른 남녀의 불꽃 튀는 사태를 파악한 후, 몰래 도주를 해버리고.... 두 남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며... 어느새 다음 날 아침...

 

 

  이제 영화는 대충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는 알고 보니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여자고... 그래서 그 아파트도 그 여자가 관리하는 집 중 하나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을 하던 남자는 납골당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인데, 조금 사회 부적응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하나는 밤에는 시장 바닥에서 노상 판매를 하지만, 거의 말 그대로 백수건달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백수건달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갖은 후, 또 몰래 그 아파트 키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꼬셔 보려고 하는 거 같은데... 여자는 뒤가 깨끗한 여자인 듯, 별로 그 백수건달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엔 조금 바빠 보이는 것도 같고... 여하튼 간에 그것은 둘째 치고, 그 백수건달 남자가 열쇠를 훔치게 됨으로써, 이제 그 빈집에 또 다른 기거자인 자살하던 남자와 마주칠 일만 남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처음엔 서로 둘 간의 존재를 몰라, 두려워 하다가, 둘 다 그 집 주인이 아닌 객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둘이 동맹을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래 그 집 주인은 아니지만 임시적으로 그 집의 관리자인 여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둘은 서로 공생하게 된다. 여자의 빈 집에 혹은 여자라는 빈 집에 제 집 양 기생하면서 공생하는 두 남자 이야기... 벌써 이것부터가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집에 기묘한 동거자인 두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한 무언가 알 수 없는 관계의 고리들을 더욱 복잡하게 깔아 놓고 있다.

 

 

  먼저,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자살하던 남자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에서부터 드러나지 않고 중반이 돼서야 드러나는 점으로 보아, 남자는 분명히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고, 또 그로 인해 매우 괴로운 상태인 듯싶다. 특히 게이인 남자의 그런 부분을 영화는 성적인 억압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범한 아시아의 사회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고서, 정상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차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늘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은 게이의 자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는 순간, 분명히 그 남자로부터 버림받거나, 동물 취급받을 것이 뻔한 게이.... 그러니 게이는 같이 동거하게 된 백수건달 남자에 대해서 이상한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표출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끊임없이 자위의 세계로 탐닉해 들어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미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그 특유의 백수건달 끼를 발휘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귀찮다고 하지만, 혼자서 한 밤을 보내기엔 너무 고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빈 집에 대해 어떤 권리도 없는 부동산 중계인으로서 관리자였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는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 불현듯 느낀 공허함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하다가... 남자가 전화로 슬쩍 언급했던, 남자의 일하는 시장 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배회하다가 다시 남자와 마주쳐, 둘은 자연스럽게 첫 날 관계를 가졌던 그 아파트 그 침대로 다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 게이는 전혀 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자연스럽게 누워있었다. 그러니 다시 자살을 시도하던 그 첫 날처럼 도망을 가야하는데... 벌써 남자와 여자는 그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한 김에 게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리고... 이제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극에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관중으로써 참여하게 된다. 심하게 흔들리는 침대... 여자의 숨넘어갈 것 같은 비명소리... 그리고 그 침대 밑에 숨죽여 자위하고 있는 게이....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아직 잠들어 있고, 여자가 먼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그리고 대충 샤워를 하고선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자연스럽게 그 집을 나선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가 완전히 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게이가 기어 나온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데.... 너무나 안쓰러운 그 모습.... 게이는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더블 침대에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남자의 다른 편에 쭈그리고서 누워,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다본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손길로 매만질 수 있다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분명 게이의 몫은 아니다. 아마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척이던 남자가 갑자기 잠결에 게이가 전 날 같이 자던 여자인 줄 알고, 덥석 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게이는 어이할 줄 모르지만, 왠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 된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참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의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고... 다시 몰래 잠들어 있는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여자가 나갔던 그 문으로 그대로 그 집을 나온다. 그리고서 영화는 다시 장면을 바꾸어, 집을 나갔던 여자의 걸음에 시선을 맞춘다.

 

 

  차에서 내려 어딘 가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 여자... 카메라는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서, 그 걸음 하나하나를 지겹게 다잡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지겨운 기다림 끝에 다시 카메라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서러운 울음? 알고 보니 이 당찬 여자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매우 서럽게... 차라리 펑펑 쏟아내면 더 좋을 것을... 훌쩍훌쩍 참는 것이 더욱 서러워 보인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시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그런 훌쩍거리는 모습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잡아내고 있다. 한 몇 분이나 지났을까? 줄곧 흐느끼던 여자가 이제 제법 자신을 추스르고서 담배를 문다. 이제 영화가 끝나려나 보다. 그런데 이 여자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물고서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영화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아니, 이 허무한 영화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에 생기는 의문들에 대해 물음을 가져보아야겠다. 그렇지만 결코 답을 낼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음이란 건 그 자체로 답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너무 이제껏 답을 요구해 왔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허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이 허무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묻는다. 왜 이 영화는 전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앞에서 이 영화가 나는 결코 유럽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와 게이 그리고 여자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알레고리의 속성이 갖는 어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라든가 귀결은 여기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풍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다소 의도적으로 어떤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주인공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마치 가정용 비디오에 담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영화는 사실적인 것이다. 다만 간간이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 매우 길게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주인공 여자가 모기 한 마리에 갑자기 자신의 멍한 상태를 자각하고 모기를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이라든가... 남자가 게이에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고작 게이가 남자와 함께 간 곳이 게이의 직업과 관련된 납골당을 판매하는 곳이라든가... 분명, 이런 장면들은 은근히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풍자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것들은 부차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현대인들의 애정에 대해서 섬뜩하리만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게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게이는 그 특이함으로 인해 쉽사리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정의 형태가 아닌, 다소 특이한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이의 그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의 다른 표현인 성적인 억압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영화의 게이처럼 자신의 성적인 욕망의 정체를 쉽사리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회사나 혹은 동료라는 정상적인 관계 사이에서 간혹 느끼는 성적인 욕망을 우리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가? 결혼한 사람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고, 또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수시로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성적인 욕망을 모두 분출한다면,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가지만... 여하튼 간에, 우리는 제도든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쉽게 발설하고 행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흔히 변태라고 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짐승 보듯이 본다. 왜냐하면 엄연히 사람과 짐승은 욕망을 대함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게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니라고는 말해도 짐승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때론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영화에서의 게이처럼 자위로 분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법 온당해 보인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여자 옷을 입고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다던가, 혹은 수박을 먹다 말고 수박 껍질로 자신의 볼 살을 비비며, 자신의 뜨거운 미열을 시원하게 달래준다던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자신도 짐승 취급당하지 않고...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우리는 외롭다는 사실이고, 또 그것은 왠지 진정한 육체에게로 가지 못하는 자기비하와 수치스러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자는 혼자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 능글맞은 백수건달 남자를 다시 찾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갈했으면 끝이지, 왜 또 서러워서 그렇게 길가다 말고 어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사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조차 성적인 욕망은 쉽게 표출되고 대변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미국의 영화들에서조차 완전한 포르노 급의 XXX등급 영화를 제외하고는 성적인 표현이 자제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위는 죄악시되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슬슬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도 성적인 표현의 수치가 그 강도를 높여가고, 그와 비례해 당연히 자위하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자위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지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위가 이젠 자신의 몸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화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1970년대 어느 영화에선 헬기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대고 자위하는 여자가 등장하게 되고, 90년대엔 영화 클러쉬에서 자동차의 속도감을 통해 자위하는 남녀가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애정만세에서는 수박에게 자위를 하는 우리의 게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의 성적인 욕망의 대상과 깊이는 확장되었으며, 이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의 육체의 소외 현상과 더불어 성적인 억압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심각해졌다는 증거가 되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비해 훨씬 비대해진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우리들의 육체 뿐 아니라 모든 세계로 확장되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가치관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은 전혀 바뀐 것이 없어, 우리는 모두 그 커다란 차이 속에서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우리 자신은 헬기의 표면과 자동차의 속도 혹은 수박에 대고 자위할 만큼 스스로 변태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생각이다. 성적인 욕망만 비대해져 자신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한다면, 아니 책임질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속 편하게 자기 자신은 이런 변태가 아닌 건전한 정상인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들 그렇게 외롭다고들 난리란 말인가? 과연 그 말이 말 그대로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분명, 자기 자신은 변태가 아닌 정상인인데, 그래서 그냥 혼자라서 외로운 것뿐인데도, 자꾸 다른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헬기나 자동차는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표출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표출 시, 자신도 모를 상실감과 수치감에 다시금 자신 앞에 커다랗게 구멍 나있는 성적인 욕망의 크기와 부피를 대면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영화에서의 여자처럼, 그러한 자기 자신의 성적 부피에 비례해, 너무나도 소심한 자신의 결단력을 인정하게 되고, 완전한 백수건달 남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여기서 참고 다시 자위로 함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분명, 자위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자위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어떤 다른 대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혼자 목욕하다 말고, 새벽 거리를 뛰쳐나와 남자와 해묵은 격정을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자는 서럽게 흐느낀다. 대체 왜? 그것이 그녀가 원한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자위로 대충 자기 자신을 달래고 말지, 뭐 하러 서러운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아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냥 애초에 애정이라는 것, 섹스라는 것이 어차피 자위와 비슷한 서러운 것이니까, 그냥 혼자서 외로울 순 없는 것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섹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오직 애정만이, 섹스만이 우리의 권태로운 삶을 구제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여자의 처절한 울음조차도 또 다시 반복되는 그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애정이라는 것도 없으면 너무나도 권태로워 도저히 어떤 의미도 발견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현대인은 이 애정이라는 굴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위의 굴욕감과 도발적인 관계 후 오는 해묵은 육체의 설움 사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아이러니들이란 말인가?

 

 

  군대를 제대하고서 지난 방황의 흔적들을 다 지우지 못하고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른 사람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새벽 그 어두웠던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쳐 흐드러진 정사라도 할 수 있다면... 늘 자위일 수 없는 이유를 묻고, 차라리 그곳에서 안위하기를 바랐지만,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나의 육체와 마음은 그렇게 그 거리에서 서성이다, 아침이면 제풀에 지쳐, 좁은 방안으로 기어들어가, 새우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천천히, 자위 일 수 없는 이유를 포기하고, 자위 밖에 안 되는 내 욕망의 한계에 대해 수치스러워하며,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그 때 섹스 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신학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몰래 담배를 태우러, 지나치던 학교 바로 옆 골목길에서... 나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슬프다는 내 관념보다 앞서, '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양 볼에 까닭 모를 눈물이 떨구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을 차리고서 너무나도 부끄러워,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선, 재빨리 그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당도한 것은 항상 담배를 태우던 놀이터 벤치였다. 그래서 거기서 마음을 추스르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무는데... 다시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마치 해묵은 격정을 풀고서 서러웠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여자처럼... 그러하기에 다시 부끄러워진 나는 겨우 울음을 참고서, 나를 울린 목련 나무 한 그루를 다시금 몰래 올려다보았다. 벌써 봄날이 다 지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기라도 한 듯 목련나무에 잎새들은 다 떨어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새들만 여전히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다만 그 시린 가슴으로... 꽃잎이 다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희망의 가지라도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그런 것이 삶이라고.... 자위가 자위를 넘어선 어떤 그리움일 거라고, 그럴 것이라고... 나는 다시 자위일 수 없는 이유들을 되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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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 루오의 '파랑새'의 거룩함과 광기의 선상에서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어느 해변가,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제 1번 중 "아다지오". 영화의 처음은 이렇게 무언가 절망스러운 전조가 뒤엉킨 듯 메마른 인상과 함께 시작된다.

 

 

  잉마르그 베르히만, 종교 영화의 거장 칼 테어도어 드레이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루이 브뉘엘과 함께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영화감독으로써 우리에겐 ‘제 7의 봉인’,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 연작물인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등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감독이다. 사실 이 사람의 영화를 구해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종교 영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한 논문을 써보고자 했기에, 겨우 구하여서 난 그의 작품들 몇 편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 그의 작품은 매우 지루하였다. 그러니 심각하게 종교로 고민하지 않는 경우나 영화사를 공부하기 위해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 난해함에 미처 영화를 보기 전 질려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의 영화 속의 어떤 발작들은 뇌리에 각인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은 그 전에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전통에 서있던 서구 영화사에 있어서 시각적인 효과에 의해 각인되는 예술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남겨주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새 흔히 말하는 탄탄한 내러티브의 구축 대신, 영상 자체가 남겨주는 시각적 효과의 효시가 되어준 일련의 선각자 중 두드러지는 한 사람이 바로 잉마르그 베르히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또한 매우 조각, 조각난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하나의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면서 어떤 의도도 전면으로 부인한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예술 영화들과 달리 흐릿한 의도를 내세우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흐릿한 의도 혹은 뉘앙스가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의 발단은 어느 불안한 가족의 위장된 평화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작가인 아버지, 종교와 현실 속에서 미친 딸, 그리고 그 딸의 성실한 남편, 끝으로 연극에만 몰두하고 있는 막내. 무언가 벌써 불안하고 불길한 조짐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맨 처음 영화화면 속에선 잘 드러나진 않는다. 오히려 마치 여느 가족들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그들은 해변에서 같이 해수욕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오후 시간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된 평화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작가인 아버지는 이제껏 글을 쓴다는 핑계로 늘 가족을 버려두었었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했다. 그리고 딸은 정신분열이 점점 심해져, 밤과 낮에 다른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성실함의 대명사인 그의 남편은 그것을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다. 게다가 막내는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의사소통이 서로 단절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든 마치 평범한 가족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들의 오후 한 때를 그들은 갖은 연극의 설정으로 견뎌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들의 아버지가 다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사자인 아버지는 떠날 생각을 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의 정신분열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을 글로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여기서 첨가해서, 더 한 가지 어이없는 상황은 이 잘 나가는 작가 양반의 부인 또한, 딸과 같이 똑같은 증세로 괴로워하다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가 늘 자신의 부인을 버려두었기에 나타난 현상으로써, 영화 속에선 남편을 잃은 여자가 종교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귀결을 몇 마디 대사 속에서 은근히 암시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증세가 그 자신의 딸에게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 부인의 경우에는 그는 두려움으로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결국, 부인이 죽자, 그는 그 자신에 대한 비겁함으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 모든 글을 포기하고서 자살 시도까지 하려 하였다. 그런데 돌연 그 순간, 그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이제 또 다시 그의 딸에게서 자신의 부인에게서 보았던 똑같은 증세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두려움에 맞서고자 하지만, 다시 딸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글로 형상화하려는 이기적인 욕구와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처음 영화 속에서 딸은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집안 식구 중 가장 따뜻하고, 정상적인 심성의 소유자처럼 생각이 될 정도이다. 그런데 밤이면 갑자기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던 이부자리를 걷어차고서, 하나님이 계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선 그 방 장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혼자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기도 내용은 장롱 너머의 세계와 이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지고 있다. 그녀는 장롱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시녀로써 시중을 들고 싶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아직 자신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무능한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그 속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기도가 끝마쳐질 때쯤, 그녀는 거의 성적 오르가슴의 모습과 닮아 있는 형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선, 다시 잠들어 있는 남편의 옆자리로 가 잠이 드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분명 그녀는 남편과 잠자리를 가져 본 지는 꽤 오래 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녀는 남편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몸과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곳곳에 숨겨진 가족들의 끔찍한 상황들은 이제 드디어 버텨 내질 못하고, 표면에 드러나 지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다 보고선, 아버지가 자신의 내면적 불안을 글이라는 노리개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가 섬 밖으로 물건을 사러 간 틈새에 다시 분열을 일으켜, 자신의 남동생과 잠자리를 가져버린다. 그리고 순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동생이자 막내는 절망을 표현하기조차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와 매형이 돌아오자마자 이 사실을 알리고선 발작을 일으킨다. 영화는 끝으로 그렇게 분열된 딸과 그녀의 남편이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남은 막내가 정신을 차린 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를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이야기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실타래를 일일이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의 화면과 독특한 이야기가 우리 뇌리에 꽂히는 발작들을 어설픈 심리치료로 정화하고자 하는 유치한 수작일 것이다. 영화는 다만 혼돈을 일일이 해결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채, 심각하게 뭉뚱그려지고, 헝클어진 형상으로 실존하고 있는 삶의 정체 모를 불안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에 대해서 살며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하고, 왜 이렇게 불안하고 기괴한 전조들로 이야기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작가가 명확한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어떤 말이 아닌, 그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 개인은 루오의 '파랑새'를 떠올려 보았다.

 

 


 

 




  일단, 루오의 경우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로써, 유명한 현대 종교 화가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파라 함은 어떤 기존의 회화가 지닌 배경, 구도 그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두고서, 색채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유파라 하면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경우, 유독 어떤 한 색채가 지니는 감각과 정서들에 주목하여, 강렬하거나 세련된 이미지적인 그림들을 자주 선보이곤 하였다. 특히 루오의 경우, 그 자신의 독실한 종교성으로 인해 색채 자체 속에 숨겨진 종교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내었다. 보통 매우 어둡고 침침한 그의 그림들 속에선 고뇌의 형상으로 가득한 그리스도나 창부들 그리고 광대들이 많이 보여 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매우 독특한 '파랑새'라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눈을 살짝 감고서, 고개는 약간 비틀린 채, 반은 하늘에 가 있고, 반은 지상에 닿아 있는 듯한 일종의 성녀상이라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성녀상이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는 일상성을 박탈당한 거룩함으로 인해 어떤 호러틱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루오의 '파랑새'의 경우 도리어 그런 호러틱한 분위기보다 성녀 그 자체가 세상이라는 호러 앞에서 반은 몽환으로, 반은 생의 의지라는 분열된 모습으로 견뎌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즉, '파랑새'의 그녀는 외로움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이 땅의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들의 성녀는 르네상스시대의 그 세상을 품어 안던 대자대비 하던 모습을 버리고서, 이토록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나락해 버린 것일까? 그리고 왜 그녀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서 지상의 발을 반쯤 담그고서, 힘겨워 하고 있는 것일까? 비단 이것은 루오의 그림 뿐 아니라 현대 화가들의 성녀상들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시 영화로 이야기를 넘어와 우리의 주인공인 작가 아버지의 딸, 그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장롱 속의 하나님의 세계로 도피하였던 것일까? 일단 영화 전면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와 남편과의 관계는 단절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로움을 신에게서 채웠다. 이것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도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설정되어져 있다. 즉, 한 마디로 그녀는 심한 욕구 불만의 상태를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장롱 속에 하나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에게서 해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여린 동생을 발작케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게도 여기서 그 아버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삶의 새로운 지표를 자신의 아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도 평생 무신론자였던 그가. 그리고 소년은 아버지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문을 통해 어렴풋이 하늘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알아 가는 건 두 부자이지만, 사랑을 하는 건 바로 하나님이며, 정신분열에 걸린 그들의 딸이자 누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들-남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감히 모른다. 그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글과 연극이라는 하나의 관념이고, 유희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그 속에서 사랑에 가 닿아 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할 대상조차 없이 자신의 똬리 속에서 사랑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들의 딸이자 누나인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사랑해야할 대상인 아버지와 동생은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질 않고, 남편은 성실함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녀를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둬두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늘 굶주려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사랑하고픈 갈망을 채우는 방법을 장롱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그럼에도 그 자신만을 위한 절대적 사랑 속에 함몰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들-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동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했던 동생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동생도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처럼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서, 평생 자신의 똬리 속에 숨겨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연속의 과정을 겪은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감히 고백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하나의 종교적 광기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에, 과연 ‘이것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의 성녀 '파랑새'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왜 반쯤 미치게 보이는가? 그녀는 왜 그러면서도 거룩해 보이고, 또 가련해 보이는가? 혹 누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는 끊임없이 지상을 떠나 하늘을 꿈꾸고 있다. 발꿈치를 들어 가슴을 내밀면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녀를 이 지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순결하면서 가련한 그 형상을 내내 드리우도록 발목을 붙잡고 있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들은 그녀를 미쳤다 하며, 자신이 버린 쓰레기처럼 그 어딘 가로 격리시켜 버리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그녀들은 숨겨져 있는가?

 

 

  남자가 보는 여자에 대한 때론 이런 지나친 종교적 입장은 오히려 여자를 더욱 객체로 보게 함으로써, 종국엔 더욱 그 속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그 관념적으로 지저분해진 남자들 혹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우리의 어머니, 누이 등등의 사람들의 반 미친 사랑-만이 거울을 보듯 어렴풋이 사랑이라는 것들에 대해 배워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신의 커다란 버스의 감당할 수 없는 스피드에 치인 소녀의 오그라든 육체를 다른 누구도 품을 순 없지만, 오직 버스 운전사만이 부둥켜안고, 통곡할 수 있듯이. 사랑을 배워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날카로운 갈퀴를 들고서 우리들의 성녀를 찾아 심하게 할퀴고선,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시대에 루오의 '파랑새'와 같은 성녀가 존재하고 있는가? 아님 존재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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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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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통해 다시 읽는 카프카와 글쓰기에 대한 고뇌

 

 

 

  모임에서 이기호의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기성작품 품평작품으로 정해서 이 기회에 나는 그의 소설집 두 권을 읽어 보게 되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고, 다른 하나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제목에서부터 끌린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다. 먼저,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기도 했고, 그 작품 중 그의 등단작품인 ‘버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버니’의 경우는 모임에서 예전에 품평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랩 형식으로 구사한 문체가 과연 시적 담화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버니’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안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산 속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곳에 다녀오면서, 내 안에 많은 자의식이 깨진 부분이 큰 탓일 게다. 뭐, 여담은 이쯤으로 해두고, 어찌됐든 새롭게 읽게 된 ‘버니’는 시적인 담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여전히 모자란 구석이 있었지만, 시적인 시도 그 자체였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울림이 있었다. 단순히 반복되는 순이의 랩이 보도방 아가씨의 절정의 비명에서 성공한 가수의 노래로 표현되었을 때, 그 울림은 짠하면서도 동시에 싸늘한 서글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유머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 전반적으로 나는 그 비슷한 정서를 느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마찬가지였고, ‘국기게양대 로망스’도 그러했다. 거의 무언가 따스한 연민과 더불어 유쾌한 유머가 공존했다. 그런데 그의 글 ‘수인’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경우는 비슷한 뉘앙스의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무언가 글쓰기 자체에 대해 정면 돌파하려는 작가적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수인’을 중심으로 문득 떠오른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살짝 양념으로 곁들여 글쓰기에 대한 내 개인적 고뇌를 살짝 토로해 보고 싶다.

 

 

  ‘수인’을 읽기 전, 미리 줄거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듣자마자 나는 바로 카프카의 ‘소송’과 ‘굴’을 떠올렸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진 후 한반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우리 민족이 유엔에 의해 세계 각지로 타의에 의해 흩어진다는 설정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산속에서 글을 쓰느라 전혀 몰랐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어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심판관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에서,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문화적 보존의 가치로 지하 밑바닥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친 교보문고에 자신이 유일하게 낸 소설책을 찾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건 뭐 카프카 패러디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서도 그런 내 애초의 생각 때문인지, 글 안에 가득 풍기는 카프카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랄까? 훨씬 유쾌하고 가볍다고 할까? 그래서 현대적으로 풀어놓은 기분이랄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카프카 그 자체를 들이밀 때, 현대의 그 독자 중,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지겨운 문장들을 끝까지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특히, ‘굴’의 경우는 카프카의 소설 중에서도 그 끔찍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고민을 했다. 다시 그 끔찍했던 ‘굴’을 그리고 ‘카프카’를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결국, 읽고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말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십대 때 가장 내게 영향을 준 두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를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 작가들이 둘 다 끔찍하게도 지리멸렬한 작가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죄와 벌’에서 노파 하나 죽인 사건으로 빼곡한 글자체로 해서 장장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그나마 짧은 편이다. 보통, 그의 장편들은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다반사다. 그래도 무언가 읽고 나면, 기존의 관념을 도발하고 깨트리는 상쾌함이 있었다. 그런데 카프카의 경우는 남아 있는 글이 몇 있지도 않고, 거의 다 단편이나 중편이다. 장편이라 봤자 단 세 편뿐인데, 그 지리멸렬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히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루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카프카는 지루한 게 아니라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헤매게 만드는 모호한 재주가 있다. 그것도 매우 지루하게, 짧은 단편에서조차. 다만, 그의 글 중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글은 ‘변신’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변신’을 통해 처음 그의 글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후 카프카가 쓴 대강의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미완으로 쓰인 장편, ‘실종자’와 ‘성’ 그리고 유일한 완성작인 장편 ‘소송’과 그의 몇몇 단편에서 중편까지. 그런데 특히, 그 중에서도 내게 지리멸렬함 그 자체로 각인된 작품이 중편인 ‘굴’이다. 물론, 그의 장편 또한 만만치 않지만, 여하튼 ‘굴’을 읽고서 내가 한 마디로 느낀 감정은 ‘이건 대체 뭐지?’였다. 그만큼 글 자체가 이해 불가했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카프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글이라는 ‘굴’을 파야만 하는지 또한 이해 불가했다. 그래서 그냥 그때는 후일을 기약하며, ‘굴’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글쓰기일거라 쉽게 단정 짓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수인’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읽었을 때 아주 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에 근 10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마주한 카프카의 ‘굴’은 그리 녹록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지리멸렬함과 지루함은 여전했지만,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선 ‘굴’ 자체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발톱을 숨겨놓은 채.

 

 

  카프카의 '굴'은 치밀하고, 방대하다. 그렇지만 그의 ‘굴’은 글쓰기라 단정 짓기 힘든 게, 어떤 적의에 대한 방어책으로써의 ‘굴’이란 느낌이 글속에 강하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적의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글 서두에서는 지하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한 동물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동물은 누구도 마주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마주하면 그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늘 굴 깊은 곳에서 소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아주 작은 생물체들이 길을 내는 소리, 바람이 통하는 소리, 지상에서 들려오는 아주 조그만 소음 등등, 그렇지만 보통 굴은 평안하고 고요하다. 주인공은 그 고요를 사랑하며, 그 때문에 굴을 사랑한다. 하지만 치밀한 주인공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에 나름의 여러 가지 방비책을 세운다. 가령, 미로와 같이 얼기설기 얽힌 굴의 중앙에 광장을 만들어, 여차하면 그리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곳에 몇 개월치 먹을 식량을 비축하여,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도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하여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주인공은 굴의 다른 곳에도 조그만 광장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는다. 과연 그의 이런 방비책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왜냐하면 정작 적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광장이든 다 뚫고서, 결국엔 주인공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만 주인공은 굴 중앙에 광장만큼은 튼튼할 거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그 광장에서 무언가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그냥 작은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커져, 주인공의 굴에서의 삶의 고요를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소리는 광장에서 뿐 아니라, 굴 어디에서든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들린다. 만약 광장 가까이에서 땅을 긁는 소리라면 분명 광장에서 떨어진 굴의 입구에서는 그 소리가 작게 들려야 할 텐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땅을 긁는 소리가 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가 어쩌면 애초에 자신이 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 그는 분명 그 비슷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을 처음 만들던 시기였기에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소리는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때 이후로 얼마 후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촉각과 청력이 발달하면 발달했지 퇴보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처음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후로 한참동안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 소리를 내내 들었다면 주인공이 굴을 계속 만들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적으로부터 도망칠 피난처로써의 굴을? 어쩌면 주인공은 내내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굴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땅을 긁는 누군가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소리를 외면한 채 그냥 자신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그 자신의 굴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처음부터 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굴? 광장? 적? 카프카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밑도 끝도 없는 이 알레고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버려, 이 소설을 알레고리가 아니라 어떤 상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믿는 한에서는 알레고리는 어떤 본질에 관해 회귀하는, 그렇게 본질을 상기시키는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이 소설의 굴과 광장 그리고 적은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새로운 해석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좋은 소설이라 말하고, 카프카가 20세기에 가장 연구되는 대표적인 작가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밥을 입에 떠먹여주기를 바라는 독자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실존이란 견지 하에 해석하면 그냥 실존이 되어버리고, 글쓰기란 견지에서 해석하면 그냥 글쓰기가 되어버리는 그의 소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엔, 나는 지금 ‘수인’에서 제기한 글쓰기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단지 카프카의 ‘굴’을 도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하려는 것 아닐까? 많은 의구심 속에 다시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수인’의 굴과 카프카의 ‘굴’을 잠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어차피 카프카의 ‘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내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처럼 작가는 우연에 기인에서 글을 쓰다 ‘의지’를 넣어 글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무리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누군가의 묘비명인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마무리를 낼 수 없는 게 삶이지 않은가? 다만, 그럼에도 글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또 너무 옆으로 샜다. 다 지랄 맞은 카프카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 카프카의 ‘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수인’에서의 굴은 간단명료하다. 글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은 굴을 판다. 거의 모두가 버린 한반도에서, 그렇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낙진이 바람처럼 휑하게 휘날리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로선 그가 소설가임을 필사적으로 심판관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는 무사히 외국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의 서두에서의 설정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게 또 카프카의 ‘소송’을 은근히 패러디한 느낌이다. 그래도 확실히 이 작가가 카프카보다 덜 잔인한 건 황당하긴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라는 그럴 법한 이유와 핑계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도까지 가르쳐주니 얼마나 친절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카프카는 어느 날 주인공을 그냥 끌고 가서, 너는 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는 주인공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 소송을 해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그렇게 자신의 죄도 모른 채 어느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다. 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이기호는 ‘수인’에서 굴이라도 파서 자신이 썼던 책만 찾으면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보내주기까지 하겠다니, 나름 인정이 있는 작가이다. 여하튼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서 굴을 파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툰 곡괭이질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슬슬 곡괭이질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열흘 만에 교보문고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복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심판장에서 보았던 서기와 알고 지내게 된다. 서기는 심판관의 명령으로 최대한 주인공의 편의를 봐주며, 2,3일에 한 번 꼴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러면서 그 둘은 친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주인공의 부탁으로 맥주까지 가져온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주인공은 날마다 교보문구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불안감을 느낀다. 그가 유일하게 낸 책 한 권이 만약 교보문고 진열대에 없다면? 그가 산 속에 들어가 글을 쓰는 사이 만약 누군가가 그 한 권을 사갔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굴을 파기 위해 한 작업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외국으로 가지 못하고 낙진만이 남은 한반도에 남게 된단 말인가? 소설가로서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교보문고 입구 삼십 센티미터쯤 앞을 남겨 두고서, 주인공은 맥주를 가져 온 서기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서기는 말한다. 이미 원하는 곳으로 이주가 진작 결정되었다고. 왜냐하면 그의 굴 파기 그 자체가 그의 형벌이었고, 그에 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두꺼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수고 굴을 팔 수 있겠는가? 벌써, 이로써 그는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가 한 작업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굴을 파고, 밤마다 자신의 책이 없을까봐 두려워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다 마신 맥주병을 서기의 머리에 내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파왔던 굴을 무너뜨린다. 그리고서 삼십 센티 남은 교보문고의 입구 쪽으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그곳은 더 이상 노동이 필요치 않은 존재 그 자체로 소리를 내는 책들의 세상일 거라 꿈꾸며.

 

 

  글을 쓰는 초반에 나는 분명 10년 전쯤 카프카의 ‘굴’을 읽었을 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짓고 그냥 책을 덮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렇게 읽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치열한 글이기에 여러 의문들을 두서없이 던져 놓았다. 그 의문들을 다 주워 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결국, 그러하기에 이렇게 똑같이 10년을 넘어서도 ‘굴’에 관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프카의 ‘굴’이 이기호가 던져 놓은 ‘수인’에서의 ‘굴’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은 너무나 확연하게도 다르다. 이미 내용을 분석하면서도 나는 둘의 분위기가 얼마나 확연히 다른지 은근히 강조하였다. 그러하기에 ‘글쓰기’란 화두에 대해서도 둘이 내어 놓는 입장 차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카프카는 굴 파기를 일종의 글쓰기라고 봤을 때, 스스로 피난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결코 글 속에서 안주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글로 인해 더욱 불안해지고, 더욱 예민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엔 애초부터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즉,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그 불안의 전조는 늘 있어왔고, 때문에 글 자체가 그에게 순간의 피난처가 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는 죽기 전 그가 법률가로서 빠듯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서, 하루에 네 시간씩 꼬박꼬박 쓴 대부분의 글들을 스스로 불태웠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 남은 그의 글들은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친구가 카프카의 사후 세상에 남긴, 카프카 스스로 부인했던 글의 존재가치를 위해. 그런데 이를 뒤집기라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본연의 연민이 발동하여 이기호는 글쓰기에 대해 카프카와 비슷한 설정 속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 글 자체가 내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러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교보문고를 가득 메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곡괭이질 하듯 노동을 해야 한다고, 사뭇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선 분명 이기호의 결론이 이상적이고 온건하다. 어느 누가 카프카처럼 글쓰기를 하고 싶겠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질 않는 굴을 파서 무엇 하겠는가? 그 속에 대피한들 카프카 말대로 결코 피난처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자신을 갉아먹는 굴 파기이며, 똬리틀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카프카의 그런 ‘굴 파기’가 더욱 치열하고, 때문에 ‘글쓰기’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누구나 쉽게 결론은 내릴 수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죽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뻔한 답을 내놓듯, 쉽게 글쓰기란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나는 카프카가 그러한 글쓰기의 꿈을 보여줬다고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 근방에 도달한 글쓰기의 열망으로 그는 치열하게 하루에 주어진 일과가 끝나고서, 밤마다 4시간씩 꼬박꼬박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 아무것도 바꾸어주지 못할지라도. 책이라는 노동 없는 소리에 파묻히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설가라는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그는 글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하기에 내게는 여전히 너무 높고 어려운 카프카이다. 아니, 너무 깊고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굴과 같은 카프카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도저히 그처럼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꿔본다. 카프카와 같은 열망을, 카프카와 같은 치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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