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홍상수 감독, 김상경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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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그리고 박하사탕 - 순수와 생활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

 

 

  경쾌하고 화려한 예고편 그리고 홍삼수 감독의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른 유명 배우들의 출현 (오! 수정!을 제외하고), 하여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다소 빠른 박자의 스피디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의 홍상수만의 독특한 풍자 혹은 뉘앙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나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혀지고 말았다.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느릿하고 나른한 이야기 구성과 화면전개, 그리고 역시나 모든 흥미진진한 불륜의 소재를 아무런 미사어구 없이 지겨운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만의 저속한 언어 구사력과 표현력 등등... 그럼에도 무언가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든 건, 그가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 말, '우리 사람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춘천의 명소 회전문에 관한 설화가 다소 색다르게 가미되어, 기억에 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홍삼수 감독 그 인간이 어떤 예술가들처럼 화려하게 신화와 일상을 대비시키지 않고, 너무 뻔히 보이게,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툭 던진 것이지만, 이 상황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청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의 명대사, '아직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니?'라는 말과 함께 대비되어,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지면을 빌려, 먼저 홍상수 감독이 어떻게 신화에서 생활을 발견해 내는 지를 살펴보면서, 차후에 박하사탕의 이야기를 약간 가미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는 그의 전 작품 '오! 수정!' 때와 같이 자막을 통해 진행될 이야기의 결과를 미리 툭 던져지고 나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줄거리의 핵심인 자막은 7번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경수, 성우, 명진, 선영 이렇게 네 명으로 압축된다. 또 내용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해서 웬만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난히 이해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그러하기에 우선, 간단 간단하게 해서, 부제 1번에서 7번까지의 줄거리를 차례대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아마 글을 쓰는 걸로 추정되는 경수의 학교 선배 성우가 경수에게 전화를 건다. 이유인 즉, 연극배우였던 경수가 영화배우로 전향을 하면서 유명해짐에 따라,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그의 주변사람들도 그를 보고 싶어 하니, 한 번 춘천으로 놀러 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피곤한지 별로 흥미 있어 보이진 않는다.

 

2.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영화로 전향한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진 않는 듯하다. 출연했던 영화가 흥행이 안 되어, 예정되었던 후속작품의 배역도 취소되고, 자신이 소속한 소속사에서 개런티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려 소속사에 가서, 그는 그의 잘 아는 선배라 추종되는 어떤 사람과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그 선배로부터 자신의 돈과 입장만 생각하는 옹졸함을 질책당하며,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듣는다.

 

3.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경수는 갑자기 어딘 가로 떠나고 싶어졌나보다. 그런데 문득, 춘천에 사는 선배 성우가 자신에게 전화했던 걸 기억하고서, 그날로 바로 춘천에 당도한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첫날 창녀촌에 가서 밤을 지새우는데, 그곳에서 경수는 갑작스레 역겨움을 느낀다. 그리고 선배 성우에게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둘은 춘천의 명소 회전문으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 와중에 우연히 경수는 이제 갓 대학 초년생으로 보이는 혼자 여행 온 여자에게서 어떤 아련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회전문에 당도하여, 성우에게서 회전문에 관한 전설을 듣는다. 회전문에서 돌아와 성우의 소개로 경수는 평소 영화 속 자신을 동경하던 명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명진은 대담하게도 만나자마자 경수를 은근히 유혹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만난 지 이틀 만에 여관으로 끌고 가, 둘은 관계를 맺게 된다.

 

 

*회전문 전설 이야기

 

=>옛날에 한 공주와 한 남자가 사랑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왕이 그 남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남자를 죽여 버렸다. 때문에 미련이 남은 남자의 혼은 뱀으로 환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사모하던 공주에게로 가, 공주의 온몸을 칭칭 휘감아, 공주를 괴롭힌다. 이에 왕의 청탁으로 등장한 어떤 영험한 도사가 공주에게 뱀을 떨쳐내는 법을 가르쳐 준다. 공주는 그 영험의 도사의 말대로 춘천의 한 절로 가서, 뱀에게 거짓말을 한 후, 절 안으로 숨어 버린다. 뱀은 그 앞에서 공주를 기다렸지만, 내리치는 천둥 번개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뱀이 돌아섰다고 하여 회전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 관계를 맺은 다음 날, 경수와 명진은 성우에게 밤새 어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성우는 뭔가를 직감한 듯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명진은 어이없게도 만난 지 이틀 만에, 자꾸 경수에게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조른다. 하지만 경수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런데 다시 어이없게도 명진은 성우와 같이 여관으로 들어가서, 경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즉 경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성우와 명진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경수는 너무나 황당하여, 명진에게 다시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고 이야기하고, 다음날 곧장 춘천을 떠난다.

 

5. 경수는 춘천을 떠나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옆자리에 우연히 앉은 선영이 경수가 배우임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경수에게 은근한 관심을 표명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경수는 선영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부산으로 가지 않고서, 선영을 따라 경주에 내린다. 그리고 몰래 선영의 뒤를 미행해, 선영이 살고 있는 집까지 알아내어, 그 근처에서 숙박할 장소까지 정한다. 그리고 급기야 선영의 집에서 선영을 불러 내, 선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선영의 어머니의 약간은 엄중한 경계 때문에 제대로 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연락처만 받게 된다.

 

6. 전화 연락을 했는지 경수와 선영은 경주 시내에서 다시 만난다. 그러면서 경수는 선영이 자신의 고등학교 적 첫사랑인 것을 뒤늦게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선영이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둘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고, 선영은 관계 후 경수에게 다시 호텔로 오겠다고 거짓말하고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7. 호텔에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놓고선 돌아오지 않은 선영에 대한 미련을 경수는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몰래 선영의 집으로 들어가 선영을 불러내, 다시금 관계를 맺는다. 관계 후 대화를 하다, 선영이 대학 초년 때 혼자 춘천 회전문까지 여행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성우와 함께 황홀히 쳐다본 회전문에서의 여대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더욱 선영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렇지만 남편이 있는 선영은 계속 거짓말을 하며, 경수를 따돌린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서 경수는 선영의 집 앞까지 다시 찾아간다. 그렇지만 계속 내리치는 빗속에 들리는 천둥 번개 소리에 회전문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선다.

 

 이쯤하면 벌써 대강 눈치 챘겠지만, 이 영화는 회전문이라는 곳에 얽힌 신화를 통해 우리의 아름다웠던 첫사랑에 대해 잊지 않고서 집착했을 때, 어떻게 처참하게 부셔지는 데에 대해 은근히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집착이 우리를 사람이 아닌 뱀이라는 괴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홍상수는 다시 별로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신화의 발견이 아니라 생활의 발견이 되는 것이고,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사랑이 아니라 유부녀와의 짧은 치정극으로 끝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홍상수식의 무언가 씁쓸한 뒷맛은 영화를 다시금 바라다보게 한다.

 

  먼저, 왜 경수는 자신이 그토록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성우와 명진에게 외쳤음에도, 선영에게 뱀이라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 속에서 경수는 마치 바람둥이처럼 보이면서도 매우 어수룩하고, 진지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명진의 대담한 유혹에 성우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쉽게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명진에게 아주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선영에게는 귀신에라도 홀린 양,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동경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순진남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록 경수는 바람둥이이기는 하여도, 아직 사람이 되고픈 순수한 의식을 버리지 않은 우리네 평범한 보통 남자인 것이다. 사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아도 경수의 여행은 순수를 되찾기 위해 떠난 여행처럼 보이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다시 영화 속에선 경수의 이런 순수한 의식 때문에 뱀이라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선영은 자신의 잃었던 가장 순수할 적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자신이 춘천의 소양호에서 본, 늘 동경해 오던 여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표명하고, 은근히 계속 유혹의 향기를 드리운 것은 분명히 선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남자가 선영을 내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부녀라는 상황과 성인 된 남녀 사이에 이제 피할 수 없는 섹스라는 욕망, 그리고 경수의 선영에 대한 지나친 동경은, 결국엔 경수를 자신도 모르게 선영을 칭칭 휘감아 괴롭히는 뱀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선영의 집을 돌아서는 경수의 모습을 통해, 너무도 간단하게 순수를 내치고서, 거기서 인간과 괴물의 중간쯤으로 여겨지는 생활(현실)을 발견해 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순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순수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그린 영화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수에서 생활,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 괴물로 변해간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면에선 합리화하고, 어떤 면에선 동정을 자아낸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론 그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순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박하사탕은 영화 내내 아리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간에 우리에게 쉬 건너 띌 수 없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물음을 하나 던지고 있다.

 

  "인생이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니?"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이청동 감독과 같은 순수로의 회귀를 바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을 한다. 당연히 그것은 각자의 색깔이고, 각자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뉘앙스의 차이에 있어서, 어떤 여운도 거부하고서, 인간과 순수 그리고 생활과 신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함과 더불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비록 홍상수 감독이 ‘회전문’이라는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신화를 통해 ‘신화’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부인을 표명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신화의 기능은 생활을 발견해내기 위한 과거의 어리석은 우리의 자화상일 뿐, 신화 그 자체로써의 기능과 유용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서구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 그들의 모든 신화를 부인하고서 생겨난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신화가 담고 있는 인간의 공통적인 무의식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시적인 인식의 시선을. 아니, 신화 속에 담긴 우리 인간의 강렬한 순수에로의 회귀라는 욕망과 비원을! 그러하기에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록 경수가 뱀이 될 수 없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리고 오직 생활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만이 우리의 버거운 순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일지라도, 우리의 생활에 어떤 신화와 신비도 없다면, 그리고 어떤 가능성으로의 여운조차 없다면, 각박한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물론 참으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람이 되기 위한 집착은 홍상수 감독 말대로 신화적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 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임을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니, 사람이 되기가 불가능하기에 꿈꿔보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열망, 그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모든 질문들을 내쳐야만 한단 말인가? 설령, 그의 말대로 그 중간지점인 생활을 발견해 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박하사탕의 그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오금을 저리거나, 그 질문을 한 설경구처럼 섬뜩한 건조함만이 남아, 아무런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신화적이고 동화적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순수에게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인생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닌지 되물어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을 것만 같다. 비록 단 두 시간 정도에, 길어야 며칠 만에 사라질 여운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쩌면 아직도 내가 이렇게 신화적 괴물에 진저리치면서도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생활을 발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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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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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마파람을 맞으며

 

 

  우리에게 시인 그 자체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동양인의 사고구조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외침이거나 사회적 개혁을 위한 울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프랑스 시인들, 특히 이 발레리의 사변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시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게다가 이 종자들은 어떻게 된 게 사변을 그냥 사변으로 말하지 않고 풍경을 빌려 사변을 표현한다던가, 갑자기 전혀 이해도 되지 않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한 후,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해변의 묘지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바다’는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아주 흔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과 어울려져 세세히 표현한 상징들과 흐름들을 잡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중략)....................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비단,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고, 자신도 묻혔다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해변의 묘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득 사유로 가득한 삶에 지쳐 바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바다가 무엇을 줄 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지, 기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고요해 진다. 그리고 바다의 풍경 앞에 매료된다. 시인은 여기 3연까지 그러한 시인의 마음과 바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연에서 그는 불현듯, 그 계속되는 파도의 잔잔함에 경멸을 뿌린다. 왜? 대체 바다의 무엇이 그에게 어떤 경멸을 품게 만든 것일까?

 

 

 

  과일의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미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중략)......................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그렇다! 우리의 벅찬 가슴으로 달려간 바다에서 우리는 때론 신물을 느낀다. 비단, 그것은 우리가 전날 얼굴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여행객과 밤새 술을 마시며, 자기도 모를 가슴 속의 말들을 지껄이며 회포를 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 생선의 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때론 욕지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욕지기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튕겨져 나온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며, 우리의 그 음울한 내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중략)...................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중략).................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잠에,

  나무뿌리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바다가 주는 근원적 고요함 속에서 명상에 잠긴다.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헛된 열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나태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그 말, 그 자체는 어쩌면 향수적인 언어이다. 고향을 그리고 있는 과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근원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숙연하다. 그리고 명료해 진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있는 깊이는 때론 우리를 너무 휘감아 우리는 산 자의 편이 아닌 죽은 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중략)...................

 

  간지린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중략)......................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

킬레스여!

 

 

 

  시인과 우리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는 제논의 화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심지어 이미 우리는 그것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한 시시포스 신화의 마치 다른 버전처럼 매일 구더기에게 갉아 먹히고서 다음 날은 새로운 육체로 또 갉아 먹히기 시작하거나, 혹은 매일 제논의 화살을 맞고서 심장의 구멍이 났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화살을 맞기 위해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속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서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서,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근원의 공간, 그래서 죽음과도 너무 닮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론 너무 고요하여,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이미 바다 속에 있거나, 아니면 태초에 바다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 나오기 전, 그 생물이 지느러미 같은 형상도 갖추기 전, 그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노라고. 그러나 진짜 바다를 겪어 보게 되면 안다. 바다는 그런 추상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거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맞부딪쳐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곳의 시간은 결코 미래일 수 없지만, 결코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다의 표상을 우리는 쉬 죽음으로만은 단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시인은 이제 그러했던 바다의 표상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바다는 결코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몸부림의 공간이다.

 

 

 

 

P.S.

 

  여름부터 가을 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봉착했다. 처음으로 느낀 거 같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삼 시 세 끼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봐도, 그 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외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된, 사춘기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파도가 거꾸로 들이치는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열망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나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이러한 나를 극복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글을 써내려가느라 정작 내 자신에 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는지 아무런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이제 기대는 것은 이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다. 볼 살로 느껴지는 이 겨울의 느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본다.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렇다! 볼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분다! 어떡하든 살아내야 할 겨울이란 이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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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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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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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아이들 1 천국의 아이들 1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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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국의 아이들 - 웃기고 슬픈 아동의 세계로의 초대장

 

 

  만일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아마 이런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아주 작은 물건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바로 이런 영화이다. 신발이라는 아주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로 삶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성찰하고, 더불어 유쾌한 행복까지 전해주고.. 물론 아마 내 기질 상 영화 찍으면 난잡한 내용에 판금 조치될 확률이 더 크겠지만-.- 뭐, 여하튼... 그럼에도 사람이 한 번쯤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꿈꿔 본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간혹 글을 쓰지만... 아주 어둡고 칙칙한... (소설이나 시 경우;;) 사실 정말로 한 번 쯤 써보고 싶은 글은 난 ‘어린 왕자’ 같은 글이다. 그렇지만 아마 이 정도 되려면 인생을 한참 달관하고 나서 모든 것들을 하나로 오롯이 녹여낼 수 있는 황혼의 나이쯤이 아닐지...

 

 

  그럼 이제 삼천포는 이 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잘 접하기 힘든 아랍 영화이다. 일단 먼저 여기서 떠오르는 건 아마도 ‘빈 라덴’과 무시무시한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후세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영화를 조금 본 사람이라면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체리향기’같은 영화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와는 역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영화이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러한 아랍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사건의 전말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신발 하나로 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주 작은 꼬까신^^; 하나를 요모조모 수선하는 데부터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좀 있으면 한 귀여운 남자아이가 그 신발 수리에 대한 가격을 치르고서 다시 야채 가게로 가, 감자를 외상으로 사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지레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나와 여동생의 신발을 수선하고, 감자를 사러 나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돌연 여기서 발생한다. 이 귀여운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과도한 심부름에 들 것이 하도 많아 깜빡했는지 동생의 신발을 야채가게에 놔두고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발만 고쳐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여동생을 집에서 마주쳤을 때, 그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야채가게로 달려가, 야채가게 아저씨의 눈치를 봐가면서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이미 신발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잃어버린 여동생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지고,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착하디착한 소년은 여동생에게 집안의 가난을 설명하면서,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을 간청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분간 그 둘은 소년의 신발을 함께 쓰기로 한다. 아직 저학년인 동생이 어차피 오전반이고, 오빠인 소년은 고학년이기에 오후반이니, 시간만 잘 맞추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연일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수업이 ‘땡’하고 끝마치자마자, 여동생은 그 조금만 몸짓으로 사력을 다하여 뛴다. 빨리 오빠에게 신발을 건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그만 걸음으로 아무리 뛰어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오빠는 초조하게 어서 동생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겨우 도착하여 이제 신발을 체인지할 시점, 오빠인 소년은 화를 미처 내기도 너무 바빠 부랴부랴 학교로 미친듯이 뛰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찌해도 지각을 면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몰래 학교로 들어가는데.. 왠지 학생주임 같은 표정 뚱한 선생 하나가 소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단히 주의를 주며, 다음부터 그러면 학교에 못 오게 하겠다고 엄포를 한다. 하여, 다음부터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은 더욱 정신이 없다. 학교 시험을 치는데도 전속력으로 문제를 풀어 남들이 채 반도 풀기 전 나와 집으로 열심히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너무 빠른 속력을 주체하지 못하는데다, 신발은 자신의 고사리 발에 비해 왜 이리 큰 지, 그만 발을 헛디뎌, 신발이 개울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물이 흐르는 속도를 따라 신발을 잡아보려 애쓰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처절한 몸짓...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오빠의 신발... 것도 모자라, 어느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으니... 그만 이 귀여운 소녀는 엉엉 울어버리고, 보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벱! 이를 지켜보던 한 정의의 할아버지가 긴 막대를 들고 와 오빠의 신발을 꺼내주는 것이 아닌가? 비록 물에 젖고, 형편없이 헤진 신발이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학교에 신고 갈 신발도 없는 절실함에 소녀는 죽었다 살아나는 심정으로 신발을 신고서 다시 아장아장 오빠에게로 뛰어간다. 그러나 오빠 측에선 다시 늦는 여동생 때문에 속이 타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마구 화를 내는데, 귀여운 여동생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오빠 신발이 너무 커서 그렇단 말이야. 그리고 너무 지저분해서 창피해 죽겠어. 오늘 다 아빠한테 일러 버릴 거야."

 

 

  이 말에 다시 미안해진 오빠는 동생을 달래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 부랴부랴 학교로 뛰어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시험 성적 100점을 받아 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여동생에게 고스란히 헌사하며, 다시 동생을 달랜다. 이렇게 다시 몇날 며칠이 지나고...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 ‘자라"-’(여동생의 이름^^)는 우연히 자신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누군가 신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신발은 보이는데, 신고 있는 주인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쭈뼛쭈뼛..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펴보지만..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 때 부터 쉬는 시간마다 ‘자라’의 추적이 시작된다. 얼굴도 필요 없고 오직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발! 그 발만을 바라보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신발을 신은 그 발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도 감동하여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자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여자아이의 집을 추적해 간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집 위치를 확인한 후 오빠에게 부랴부랴 그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서 다음 날, 우리의 귀여운 두 주인공은 다시 그 여자아이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집 앞까지 갔는데, 웬 눈이 먼 장님이 나와 그 여자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눈이 먼 장님은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아버지의 차림새로 봤을 때, 그 집은 형편없이 가난해 보인다. 즉, 여기서 두 착한 아이에게 사태는 애매모호한 해석을 띄게 된 것이다.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고, 우리 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장님인 아버지를 인도하며 같이 일을 돕는다. 이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가? 그만 두 주인공은 풀이 죽어 차마 말 한 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 반복되어진다. 비가 오나, 때론 바람이 휘몰아 쳐도, 두 소년 소녀는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가 그들에게 찾아온다. 바로 무엇이냐면....... 짜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 그것도 엄청난 부상이 주어지는데, 우리의 남자 주인공 ‘알리’(소년의 이름)에게는 3등에게 주어지는 상품에 유독 눈이 확 띄는 것이다.

 

 

  3등 상품- 운동화!!!

 

 

  이게 웬 하늘이 내리신 기회란 말인가? 여기에만 참가해서 3등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밤낮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끝마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학교대표는 다 뽑혔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알리는 학교에 빨리 뛰어오고 가느라 미처 학교대표를 뽑을 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결사적이었기에, 담당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냉담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아이의 서러운 눈물 앞에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랴? 하여, 어쩔 수 없이 1000미터 기록을 재기로 하고, 측정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알리가 누군가? 밤낮으로 지각하지 않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속력으로 학교로 달리기를 하였던 아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자연 남들 보다 눈에 띌 정도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알리는 당당히 학교 대표로서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에게 알림으로써 둘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게 되고, 드디어 운명의 아침이 밝아온다.

 

 

  구간은 4km.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그런데 우리의 알리가 여기서 과연 3등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아는 일. 경기는 시작되고, 알리는 힘에 겹지만 여동생의 귀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결승점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선두권을 형성하여 몇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런데, 너무 여동생의 목소리의 힘이 컸을까? 알리의 스피드를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알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일등도 보내고... 이등도 보내고... 삼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속력이 모두 엇비슷한 대여섯의 아이가 몰려 있어, 자칫하면 삼등도 어려운 판국이 아닌가? 이에 다시 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안간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고... 영화의 영상은 여섯 아이가 거의 동시에 결승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슬로우 비디오로 잡는다. 과연 알리는 삼등을 할 수 있을까?

 

 

  아주 느리게 온갖 힘을 다해 여섯 아이가 결승 테이프로 다가가고, 결승 테이프가 끊기는 순간. 그만, 알리는 놀라 버리고 만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 것이 그만 일등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주위에선 난리가 나고, 우리의 주인공 알리를 얼싸안으며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고, 여기저기 사진 플래시가 터지는데, 알리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는 일등을 했기에 여동생에게 신발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고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 자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가 신발을 가져 오겠지?’, 마치 서울 가신 우리 오빠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노래처럼 자라의 표정은 들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들어오는 오빠의 모습은 개선장군이 아닌 패잔병의 모습이 아닌가? 사태를 파악해 버린 자라는 그만 실망해 버리고, 알리는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퉁퉁 붓고 피나는 발바닥의 상처를 물로 씻는다. 이제 이렇게 영화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려는 찰나... 다시 장면이 바뀌어, 두 소년소녀의 아버지의 자전거 뒷모습이 포착된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예쁜 여자애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제 다시 대충 영화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너무나 재밌게 본 영화였기 때문인지 글을 쓰는 내내 흥겨운 기분이 가시질 않는 거 같다. 그리고 연신 우리의 귀여운 ‘알리’와 ‘자라’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3등을 위해 목숨 건 알리... 그러나 1등이 되어버려, 1등이 되고도 패잔병처럼 눈물을 삭히어야 했던 그 장면은, 보는 이들 모두에게 눈물과 함께 웃음을 선사하는 어이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앞에서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처럼. 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영화를 잘 모르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듯이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는 건 이런 양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동시에,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포착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아주 가장 작은 일상 하나를 포착하여 그를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할 만한 찐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전해 줄 수 있는 것! 만일 이것이 글로 쓰여 졌다면 너무나 관념적인 언어의 현란한 잔치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여자아이의 발을 바라다보는 자라의 표정 그 하나만으로 우리는 신발이 지니고 있는 온갖 은유와 상징을 직감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는 작업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삶의 애환, 그리고 아이들의 순진무구함, 그런 것들이 혼연일체 되어, 우리를 그리움을 넘어, 감정의 정화와 이입이라는 신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결코 간접적 체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생생히 체득한 하나의 삶처럼 자신을 고스란히 그 속으로 데려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시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면 이것은 타인이 들려주는 옛날얘기와 같은 그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까닭으로 역시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의 체득을 위해, 난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기억에서 말소시킨 후, 직접 영화를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뭐, 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주백통이 아닌 이상, 기억을 지운다는 건 ㅋㅋ) 그리고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쓰인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다! ㅋㅋ-,-;;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그 자체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해 본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정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한다. 찌든 삶의 때들이 정화되는 그 기분을.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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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첫사랑에 관한 너스레

 

 

 

 세상엔 참 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니,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때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처럼 고통스럽고, 때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처럼 숭고하며, 때론 영화 '몽정기'에서처럼 풋풋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러나 과연 맨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는 그 현상이 첫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갈민휘의 경우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첫사랑은 배가 뒤집혀지도록 보고 싶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그것은 갈민휘 개인적인 정의지만. 여하튼...

 

 

  오랜 왕가위 팬으로써 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보아왔지만, 선뜻 '첫사랑'이란 영화는 손에 가질 않았다. 일단, 소문이 왕가위가 실제 감독이 아니라 제작만 한 거라서 그런 지 영 이상하다는 둥, 내용이 산만하다는 둥, 일반적인 평이 좋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귀여운 금성무와 이유유가 곁눈질로 흘끔흘끔 웃고 있는 비디오 케이스를 고르려 할 때마다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동생이 빌려다 놓은 영화 '첫사랑'을 우연히 보고 난 지금, 나는 내 첫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지울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기본적으로 염두 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실험적인 정신이 투철한 까닭으로 다소 산만한데다, 순전히 농담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구성방식 또한 매우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크고 작은 6가지의 에피소드로 나뉘고 있는데,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뒤에 등장하는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기 전 실패한 시나리오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정말 실패한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전혀 이야기 할 어떤 건더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나는 이 네 가지의 에피소드에 대해선 전혀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 영화의 감독인 갈민휘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왕가위에 대한 갈민휘의 오마주 영화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한에서만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여하튼 처음 영화는 해설자인 갈민휘가 등장하면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남발하는 가운데, 본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있다.

 

 

 

본 에피소드 1. 첫 만남-정신병자와 몽유병자의 세계

 

 

  청소부인 임가동(금성무)은 정신병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몽유병에 걸려 돌아다니는 황유유(이유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매일 밤, 임가동은 황유유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난 3개월 전 만자에서 동니만으로 이전 배치 받았다. 이 3개월 동안 난 매일 밤마다 몽유병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방을 헤맨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가끔은 깨어있는 듯도 하다. 그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임가동은 유유를 깨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가해본다.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간 유유의 머리채를 잡고서 흔들어도 보고, 목을 졸라도 보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도 보고^^;; 그렇지만 유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어나질 않는다.

 

 

  "정말 알고 싶어요. 밤에 무엇을 하는지... 최근에 캠코더를 샀는데 자기 전에 몸에 고정시키죠. 그러면 밤에 한 일을 알 수 있겠죠. 치료가 안 되더라도 뭔가 찍히면 기분이 달라지겠죠."

 

 

  평소, 자신의 몽유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유유는 어느 날 캠코더를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 부착하여, 자신의 몽유 상태에서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임가동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밤, 그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임가동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몽유의 상태 속에서, 자신이 임가동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된 이유로, 몽유병이 완치되게 된다. 그래서 유유는 그 때부터 거짓으로 몽유병 흉내를 내면서, 임가동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둘의 관계는 조금씩 미묘해진다.

 

 

  어느 날 둘은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유유는 흘깃흘깃 눈을 뜨며, 임가동을 훔쳐본다. 왜냐하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임가동이 유유를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언가 유유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임가동의 시선을 유유는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유유 그 자신이 더 이상 몽유병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로 인해 결국, 둘의 눈은 서로 마주치게 되어 버린다.

 

 

 

 

 

 

 

"이런 걸 시작이라 하죠.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작은 끝을 의미하기도 하죠. 모르는 게 약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이 몽롱할 때가 더 행복하죠. 사랑은 그가 보낸 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곁에 있어주고 부드러운 한마디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면,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죠."

 

 

  서로 눈이 마주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감정에 대해 두 사람은 슬며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몽유의 상태 속에서의 밤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낮에서의 만남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급작스럽게 전혀 다른 반전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서툴고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임가동은 매우 조급하게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의 사랑을 유유에게 고백해 버린다. 아니, 너무나 어이없게도 청혼을 신청한다. 그것도 캠코더를 통해 일방적으로. 그리고 것도 모자라, 유유에게 자신의 고백이 담긴 캠코더와 함께 둘의 결혼 청첩장을 보낸다. 어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가 보낸 청첩장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결혼 청첩장에 자신과 유유에 이름을 대신 새겨 넣은 청첩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혼식장의 장소가 잘못 기입된 청첩장이었다. 그러하기에 둘은 엇갈리게 되어 버리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결국엔 만나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날 싫어한다면 얘기 할 텐데... 난 그다지 무지막지하지도 않은데..."

 

 

  그 후, 임가동은 밤마다 유유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오지 않는다.

 

 

 

 

 

본 에피소드 2. 사랑이후 -이일평과 조미나의 사랑이 끝난 이후의 세상

 

 

  이일평(갈민휘)은 조미나(막문위)와 10년 전 결혼을 약속했고, 집안이 부유한 미나가 모든 결혼준비를 다 했었다. 그러나 일평은 그런 관계가 싫었다. 그녀가 이상형이 아니었거나,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장에도 안 나타나고, 그녀가 준 결혼반지만 들고 도망쳐서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무엇이냐면, 그가 10년 동안 거의 날마다 미나에 대한 악몽을 꾸어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도망쳤을 뿐 아니라, 미나가 자신에게 준 결혼반지를 현재의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반지로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악몽은 항상 미나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거나,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결혼반지를 되찾아 가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전 애인이었던 그 공포스러운 미나 아니, 그에겐 사탄 그자체가 찾아오게 된다.

 

 

"콜라 하나 주세요."

 

 

 

 

 

 

 

  아무런 예감도 없이 자신의 가게에서 평화롭게 수박을 자르고 있던 일평에게 미나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등장을 한다. 그래서 순간 놀란 일평은 자기도 모르게 수박을 자르던 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서 쥐어든다. 그러나 미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일평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콜라를 마신 후, 계산을 하고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심정은 사랑을 잊는 술을 마신 기분일 거다. 매정한 애인이 떠났는데, 그녀도 나도 서로 상관 않고, 왜 이리 간단하지? 첫 콜라 병을 시작으로 사탄은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감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게 일에 관심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사랑을 잊는 술을 콜라에 타서 그녀에게 마시게 한다면 그녀가 알아챌까? 그러나 그게 어디서 파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진짜 마신다면 날 무시할까? 세상은 마음처럼 안 되던데 이번에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뒤로 종종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똑같은 방식으로 콜라를 주문하고선, 그 자리에서 다 마신 뒤, 가버리곤 한다. 그리고 오직 일평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아직도 그녀가 그를 잊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며, 일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일평의 아들을 예전에 자신과 일평이 자주 만나던 식당에 데리고 가서, 항상 일평과 자신이 즐겨 먹던 음식을 사주던가, 혹은 일평의 부인과 친해져서, 일평을 위해 만드는 옷 뜨개질 감을 미나 자신의 취향인 노란 조끼로 고르게 하던가... 이런 식으로 일평을 옥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오후, 그녀는 가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일평의 호주머니에 공포스러운 메모 하나를 남겨 놓는다.

 

 

  "오늘 밤 7시 30분 항상 만났던 그 식당에서 만나요."

 

 

  그러나 너무나도 그녀가 두려운 일평은 차마 나가질 못하고, 대신 그녀와 그를 잘 알고 있던 후배를 속여, 그 자리에 내보내버린다.

 

 

  "10년 동안 알고 지내 온 형이 나에게 이럴 줄 몰랐다."

 

 

  식당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일평의 후배와 미나가 앉아있다. 그리고 일평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후배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후배는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미나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일평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미나가 일평을 어느 정도 체념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일평의 공포감은 쉬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공포감의 원인인 결혼반지를 어떻게 하든 미나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의 부인의 손에 꼭 끼어져 있다. 그래서 여기서 영화는 약간의 위트를 발휘해, 일평이 자신의 부인 몰래 강탈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잠들어 있는 부인의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후, 막대기로 내리쳐 정신을 잃게 하게까지 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렇게까지 훔친 결혼반지를 일평은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미나에게로 달려가 되돌려준다. 그러나 며칠 후,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평소처럼 콜라를 마시는 가운데, 일평이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사이에, 가만히 결혼반지를 카운터에 놓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이를 곧 알게 된 일평은 비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나에게 다가간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그 날 밤을 기억한다. 그 날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갑자기 용기가 생겨,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녀 곁에 가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우산이 있는데 차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나중에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의 중요성을 몰랐다. 오히려 엉뚱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기억을 잊는 술, 사랑을 잊는 물, 다리 없는 새 등을 썼는데, 그 순간에는 한 마디 아니, 반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산을 받쳐 든 일평은 미나에게 씌어주며, 택시를 잡아준다. 그리고 미나가 택시에 들어서는 순간,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미나에게 이야기한다.

 

 

  "미안합니다."

 

 

  그 날 이 후, 일평은 자신의 부인에게는 새 결혼반지를 사주고, 미나의 반지는 자신만의 추억의 상자에 넣어둔다. 그리고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생활 할 수 있게 된다. 또,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노란 조끼를 입은 사진을 한 통 찍고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현상을 맡긴다.

 

 

  미나는 현상을 하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평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끝으로, 영화는 다시 처음처럼 갈문휘가 혼자 나와, 첫사랑과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한다.

 

 

  "몇 편의 첫사랑 이야기를 찍고 나서야 내가 첫사랑을 찍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죠. 지금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쳐요. 내게 첫사랑이 주는 것은 눈물하고 과정을 그린 것들이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느낌은 이래요. 힘들고... 2년 동안 알아낸 것이 아! 사랑은 이런 느낌이어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나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죠."

 

  "아 좋다. 아 찡하다. 제 첫사랑의 느낌은 이런 감명 같아요. 냉정히 생각하면 그건 얻기도 힘들고 잊기도 힘들죠. 아무 때나 있지도 않죠. 사람은 이상적인 첫사랑의 느낌을 가질 수 없죠. 인간은 너무 더러운 존재고 조잡스러우니까요. 어느 날 불쑥 나타나고, 정말 그 애가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둘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그 후에도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램인데,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죠. 그러다 보니 나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다 찍었는데 시작할 때와 같은 기분이에요. 알고 보니 숙명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야 천천히 얻을 수 있는 건데..."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보고, 그게 이거였어? 여긴 이렇게 찍었어?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헤어지고 난 뒤, 그녀는 요즘 어때? 잘 있어? 또 뭐해? 이랬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아직 하고 싶은 걸 다 못했는데... 괜찮아요."

 

 

 

  어쩌면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란 것은 심각한 병적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면, 몽롱하면서도 아리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한...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마련이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 첫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순수에로의 집착이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고 싶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세상에 온갖 시간과 물질들로 찌들어버린 우리는 첫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 이미 너무나 멀어져, 다시는 다가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첫사랑에 얽매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러하기에 아마도 갈민휘는 자신의 그 첫사랑에 대한 이러한 집착과 모순을 그 동안의 왕가위를 오마주하면서 왕가위 영화의 내용을 빌려 정리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보았거나,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본 이라면 위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 편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듯이, 첫사랑은 처음부터 병적 증상이며,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며,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오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사랑이후에 관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첫사랑에 대해 터무니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것이며, 오.해.다. 그러하기에 결국, 첫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오해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공포의 대상도, 고통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 그것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추억이란 이름의 보물 상자에 언제나 곱게 접어서 가끔씩 열어보면 그만인...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이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영화는 왜 그토록 부산스러운 너스레를 떨었던 것일까?

 

 

  너.스.레.를. 떨.다... 수다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능청을 떤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바로 이 부분이 내내 걸렸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왕가위가 보여준 영화 속에서의 사랑이야기는 주로 아비정전에서의 '다리 없는 새'와 동사서독에서의 '취생몽사'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의 영화를 빌린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즉, 그 동안의 왕가위 영화 속에선 어떤 너스레가 없었다고 갈민휘는 생각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도 그는 너스레라기보다는 아주 뻘쭘한 대사 한 마디를 던지고 있다.

 

 

  "우산이 있는 데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정말로 엉뚱하기 그지없고,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무언가 너스레다운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일평은 미나에게 아주 뻔한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척, 그리고 그 동안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분명히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능청을 통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모든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때는 분명히 하나의 너스레가 우리들의 그 온갖 공포와 고통을 감추고서도 그것들을 씻어 내리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갈민휘는 너스레를 떨기엔 다소 커 보이는 첫사랑의 문제를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줄곧 너스레를 떪으로써, 씻어내고, 정리해 간 것 같다. 물론, 너스레로만은 부족하기에 영화 속에선 분명히 일평이 미나에게 사죄를 하며, 또 마지막에 이야기의 총 해설자로써 그 스스로 눈물을 뿌리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고수한 이러한 너스레가 그의 첫사랑의 문제를 정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도...

 

 

  어쩌면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한 나는 아직도 너스레를 떨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내게 있어 첫사랑이란 것은 누군가의 말들처럼 명치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저린 기억이며,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런 기억과 고통일지라도, 너스레를 떨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또 나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때는 누군가의 너스레가 참으로 부담스럽고, 측은해 보이기 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론 정도를 지나친 너스레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한 너스레 속에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리 무겁거나 심각하진 않지만, 무언가 분명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스레 그 자체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이지 않도록 하는,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첫사랑과 같은 순수에로의 집착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수에로의 집착은 분명 고귀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똬리를 틀고 감아 들어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혹은 불변할 것이라 믿은 그 모든 것들이 배신하는 것처럼. 그러하기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순수에로의 집착은 언제나 늘 무겁고, 위험해 왔다. 그러나 순수라는 것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동경할 수 있단 말인가?

 

 

  종이를 접는다고 하여, 종이의 부피와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 종이 자체가 다른 물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순수에 대해 다소, 너스레를 떤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너스레를 통해 우리가 부피와 무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기가 다소 작아진, 첫사랑의 문제와 순수의 문제를 대면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그 무서운 첫사랑의 공포로부터, 순수에로의 집착에로부터, 좀 더 한 발짝 나아가, 다시는 대면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또 다른 첫사랑의 순수에게로 데려다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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