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랭보, 보들레르, 생텍쥐페리, 프랑시즈 잠, 조르주 베르나노스, 모든 문학의 고유어 같은 이름들,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유,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모든 자유롭고 불온한 사상의 대변인 같은 이름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네 마그리트, 모든 예술가가 사랑했던 도시이거나 나라일 것 같은 이름, 네 멋대로 해라, 사탄의 태양 아래서,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모든 예술 영화의 고향이거나 예술로 대접받을 것 같은 장소, 실비 바르탕, 카를라 브루니, 프랑소아즈 아르디, 엘자, 케렌 앤, 이십 대 초반 내 귓가를 간질이던, 아니 심장을 간질이던 노래이거나 마법 같은 주문들, 이 수많은 이름과 주문에 홀려 얼마나 오랫동안 불어불문을 배우길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란 게 늘 녹록지 않듯이 대학을 졸업하고서, 먹고 살기 위해 영어를 선택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모든 직장이 토익과 텝스 점수를 원하니, 신학을 전공한 내가 밥 벌어 먹고살려면, 어떻게든 영어 점수를 올려야 했다. 물론, 남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시작할 순 없었다. 전공도 전공이지만, 졸업하고서도 습관적 방랑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배를 타겠다고 인천에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자취하며 공사판을 떠돌기도 하다가, 결국 주차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들어간 자리인데, 그곳에서 약간의 행운이 따랐다. 단지,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들어가자마자 거의 두 달 만에 반장이란 직함이 주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2시간 근무, 1시간 휴식으로 시간이 남아도는데, 주차 부스 안에서 달리 할 일도 없고, 때마침 일자리 근처가 종로 학원가라, 이래저래 영어 공부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주간 근무를 고정으로 서고서, 오후 3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영어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토익이나 텝스 학원을 선택하지 않았다. 언어라는 게 생각보다 머리로 익힌다고 해서,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학교 때 몸소 체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름 언어의 재능이 있어서 대학 입학시험 때도 언어영역은 거의 만점 가까이 나왔다. 그리고 대학 때도 고스란히 그 재능을 발휘하여, 남들 죽으라고 머리 싸매도 대부분 낙제하는 헬라어, 히브리어 과목을 매우 쉽게 통과했다. 그것도 보는 시험 족족 항상 거의 만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나의 욕망도 일정부분 작용한 바가 있다. 어차피 목회보다는 신학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성서라도 제대로 원어로 보고 싶은 욕심이 나름 있었다. 그래서 오후에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사실 남들 모르게 죽으라고 머리 싸매며,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그 결과로 신약의 경우는 요한복음서와 히브리서, 요한서신 등은 어느 정도 원어로 완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 2년 후 친구들과 자취하는 곳에서 후배가 헬라어 단어를 물어보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것도 정말 쉬운 단어인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헬라어 알파벳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 언어란 말로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3시간 동안 영어로만 대화하는 회화반 초급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학원에서 모든 한글로 된 책을 끊고, 영어로 된 문법책과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 마디로, 영어란 환경의 불모지인 환경에서 어떻게든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읽으면서 살아보려는, 맨땅의 헤딩을 시도한 것이다. 이 맨땅의 헤딩은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2년 후, 한 번도 따로 공부하지 않은 토익과 텝스 시험에서 손쉽게 고득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내 인생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영어 선생의 길로 들어섰다. 영어 선생으로서 자리 잡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처음엔 학원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도저히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여자 선생들끼리의 질투와 기 싸움에 왜 내가 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배척당했다. 아니, 남의 뒷말에 대해 듣기를 꺼리니, 결국 모두 나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그만둘 때, 몇몇 학생들이 따로 연락을 주어, 과외로 전향할 수가 있었다. 처음엔 네다섯 명을 가르치는 과외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다 내게 맞는 일이었다. 네다섯 명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한 달 수입이 족히 200만 원이 넘었고, 시간도 많이 남았다. 드디어 그렇게 내가 꿈꾸던 불어불문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라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불어 공부를 하기 위해 맨 처음 시작한 것은 영어 공부 때 방법과 같았다. 불어 회화 학원을 등록하고서,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영어로 불어를 가르치는 MP3를 다운받아서 매일 15분씩 청취했다. 다행히 영어 공부했던 성과가 있어서, 처음 불어 공부하는데 나름 속도가 붙었다. 일단, 어순에 있어서 어색함이 덜 했고, 어휘가 의외로 발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원이 같은 단어가 많았다. 그렇지만 역시 혼자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것은 방송대 불어불문학과를 지원하기 전 예비단계로 나름의 기초훈련 과정이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내가 1학년부터 다니기는 조금 시간적인 손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2학년 편입을 염두에 둔 나름의 사전계획이었다. 어찌 됐든, 3개월간에 이런 기초 과정을 거치고, 방송대 불어불문 학과 2학년에 편입을 했다. 그 첫 시작은 물론, 12일의 OT였다. 거기서 일단 가장 놀란 것은 의외로 방송대 불문학과 학생들이 젊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방송대라는 이미지가 내게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날 못다 한 학업에 관한 아쉬움으로 늦깎이 공부를 하는 만학도들의 학교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불문과 오리엔테이션 때 학생들 숫자도 30명도 채 안 되는 데다, 모두 얼핏 봐도 파릇파릇한 이십 대투성이였다. 실제로 자기소개를 할 때도 거의 다 이십 대였다. 삼십 대가 나를 포함해 겨우 대여섯 명이었고, 40대부터는 아예 없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조교들의 존재였다. 두 명의 영미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여자 조교가 있었는데, 한 명은 김영미, 다른 한 명은 허영미라는 이름의 조교였다. 두 사람은 이름은 같았지만, 성씨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혀 인상도 성격도 달라 보였다. 먼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인 김 씨인 김영미 조교의 경우, 그 성씨의 대표적 성격대로 평범하고 수더분했다. 그에 반해 조금 특이한 성씨인 허 씨인 허영미 조교의 경우, 외모부터 뭐랄까, 너무 확 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 프랑스적인 사람이라고 표시를 낸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얼굴에 바른 화장만큼 화려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말씨도 어찌나 뉘앙스가 있으신지, 약간 허스키한 톤으로 천천히 발음하는데 무언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둘은 실제로 그렇게 구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업무도 무언가 달라 보였다. 김영미 조교의 경우, 무언가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일을 맡은 듯했고, 허영미 조교의 경우는 친교 담당 느낌이랄까? 밤이 늦어 자연스럽게 나이와 성별로 나누어진 그룹 사이사이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어느샌가 우리 삼십 대 남자 그룹에 끼어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국적 문화의 특성상 동년배끼리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자연스럽게 모인 삼십 대 남자들은 나도 그렇지만 꽤 별종들이었다. 일단, 가장 큰 형님뻘인 이예종이라는 분은 사십을 바로 코앞에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젊어 보였다. 외모도 동안이지만 스타일 자체가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때까지 영화 조감독을 하면서, 여러 스타와 대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스타일보다 그 말씨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깍듯하고, 예의가 있어, 인품이 흔히 우리가 아는 형님이라는 이름의 대명사 꼰대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와 동갑인 이순주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진짜 별종이었는데, 역사학과를 졸업해서, 바둑 선생을 하고 있다는데, 개똥철학이 정말 별스러웠다. 예전 이슬람의 왕조의 이름이 알리인데 여기서 리가 우리 한국의 이씨 성으로부터 왔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눙치는데, 목소리도 조금 음험해서 재밌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서로 친해지는데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모두가 거의 잠들고 새벽 4시까지 이렇게 우리 세 남자와 허영미 조교만 남아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실상 마신 건 우리 셋이고, 허영미 조교는 그냥 우리 보조만 맞추는 척하면서 술은 삼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중요한 첫날 이렇게 네 명이 친해졌다는 사실이다.

 

 짧은 12일 일정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1차가 끝난 뒤 2차로 자연스럽게 첫날 멤버였던 넷이 대학로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모임 한 번 만들면 어떨까요?”

 예종 형님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어떤 모임이요?”

 “당연히 프랑스어 공부죠?”

 “영어 스터디처럼 프랑스어 스터디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우리 같은 한량들이 어떻게 그런 스터디를 해요? 무언가 즐길 수 있는 동호회 같은 클럽뭐 그런 거 말하는 거죠.”

 “클럽이라.”

 “예를 들면, 내가 철학과를 졸업했으니까, 철학이나, 또 하늘 씨가 문학 동아리를 했다고 하니까, 문학이나, 순주 씨가 역사를 전공했으니까, 역사 뭐 그런 걸 다 싸잡아서 넣어 보는 거죠.”

 “, 역사는 빼주세요. 학교 다닐 때도 사이비 역사밖에 관심 없었으니까.”

 “그럼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예술은 어때요?”

 영미 조교가 옆에서 의견을 냈다.

 “, 그거 괜찮은데요.”

 “그럼, 됐네요. ArtA, LittératureL, PhilosophieP, 그리고 모든 복수들을 뜻하는 S를 따와서, ALPS 클럽 어떤가요?”

 “, 정말 괜찮은데요.”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에 모두 격한 환영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모여서 뭘 하죠?”

 “그건 내가 생각해 올게요.”

 “뭘 공부하는지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학교 학생들한테 홍보해줄 테니까.”

 이렇게 일사천리로 예종 형님이 공부할 내용을 정하고, 영미 조교가 홍보를 맡기로 했다.

 “그럼 ALPS 클럽을 위하여

 “위하여


 모임의 공부 내용은 바칼로레아였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 바칼로레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 입시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논술 시험 자료라고 하는데, 사실상 서양철학사였다. 이미 신학을 전공한 탓에 철학사의 경우, 서너 번 넘게 읽어, 조금 식상했지만, 대세에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주에 한 강씩 나눠서 맡기로 했다. , 영미 조교의 경우 학생이 아닌 조교이기도 하고, 자신도 조금 그것이 걸리는지, 가끔 참관하겠다는 의지만 보였다. 사실, 다들 초짜만 모인 곳에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프로가 낀다는 게 다들 걸리기도 했고, 동시에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영미 조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영미 조교는 서너 주에 한 번은 꼭 찾아와 함께했고, 모임엔 참가하지 않더라도 뒤풀이엔 거의 새벽까지 같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영미 조교의 소개로 여성 회원이 세 명이나 들어와, 모임의 분위기는 정말로 남녀 비율적으로도, 실제 화기애애함으로도 최고조였다. 다만,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일단, 바칼로레아의 프랑스어가 너무 고급 언어였다. 원래, 철학 용어라는 게 그렇기도 하지만, 실제 언어와 동떨어진 면이 많다. 그런데 초짜인 내가 따라가려니 이건 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과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한 영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꽤 고급 영어를 독해할 줄 알았던 나는 비슷한 어원들을 영어식으로 해석하면서 겨우겨우 따라가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게 문제였다. 영어를 공부할 때 분명히 나는 회화부터 시작했다. 그래야 언어라는 것이 실제적 효과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쭙잖은 실력으로 독해와 문법을, 그것도 고급 독해와 문법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제대로 된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식의 공부는 전에 신학과를 다니면서도 경험한 것처럼 시험에서는 강점을 드러낸다. 실제로 100% 사지선다 객관식으로 보는 방송대 시험을 나는 전 과목 거의 만점 가까이 받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늘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내 불어 실력은 형편없었고, 모임 멤버 내에서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일단, 여기서 순주 씨는 논외로 치기로 하자. 정말 이 사람은 못 말리는 사람이다. 그래도 반년 이상 모임을 했는데, 불어 발음은 고사하고, 늘 해석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어찌나 늘 당당한지,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건지, 이름대로 순 주당이라 술 마시는 뒤풀이하려고 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짜였다. 예종 형님의 경우, 솔직히 나와 비슷하게 불어 실제적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확실히 독해와 문법에 관해선 우리 중 누구보다 가장 우위에 있었다. 일단, 학년 톱을 놓치지 않았다. 거의 늘 전 과목 만점이거나, 한 개나 두 개 틀리는 수준일 정도로 완벽했다. 게다가 철학 전공자이기도 하기에, 철학을 논함에도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세 명의 여자 회원의 수준이 문제인데, 그게 정말로 내게 절망의 벽과 같은 수준이었다. 일단, 나보다 한 살 많은 이영희 씨라는 사람은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면서 프랑스 남자와 동거까지 한, 유학파라면 나름의 유학파였다. 그러니 발음, 어휘, 회화, 그 모든 면에서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이십 대 후반인 해맑은 영혼의 김나영 씨 역시 2년 동안 프랑스 어학연수를 다녀온 유학파였다. 영희 씨보다는 조금 여러 면에서 실력이 달리기는 했지만, 회화에 있어서 우리 남자들과 수준차는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막내 김보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어불문학과에 들어와서 시작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 천재였다. 이미 들어오기 전 영어, 일어, 중국어, 독어, 스페인어를 섭렵한데다, 불어 또한 어찌나 습득력이 빠른지, 6개월 만에 원어민과 비슷한 발음을 내며, 기본적 회화를 하는 데 전혀 무리함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박학다식한지 나름 철학에 관해서도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친화력도 얼마나 좋은지 허영미 조교와 마찬가지로 거의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뒤풀이에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건 우리의 뒤풀이는 늘 밤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여자 회원들이 1차 이후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름 자기 관리하는 영미 조교도 자정이 되기 전 몰래 발을 빼곤 했다. 하지만 보라는 당최 무슨 배짱인지 다음날 출근날이더라도 우리와 함께 밤새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은근 내 옆에 찰싹 붙어 아양은 아닌 눙 비슷하게 치면서 나를 붕 띄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슬쩍슬쩍 과한 리액션 형식으로 내 등을 터치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취한 척 내 어깨에 기대기도 해서 괜스레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워낙 특이한데다 알 수가 없는 애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함께 어울렸다. 한마디로, 내게 이 모임은 한번 빠지면 쉬 헤어나올 수 없는 독주와도 같았다. 아니, 정말 나도 그렇지만, 어찌나 한량들인지,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서 밤새우는 게 어느샌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술이 술을 먹고, 먹은 술만큼 허세 가득한 친분을 쌓았지만, 그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여름 바다로 MT를 갔다.

 

 한여름 서해 바닷가의 갯벌 축제를 한껏 만끽하면서 우리는 모두 느슨해졌고, 서로의 민낯과 살결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만큼 서로에 대한 무언가 막연했던 감정을 은밀히 드러내게 되었다. 아니, 우리 당당한 막내 보라는 너무나 당당하게 비키니 끈을 풀어 제친 채 보란 듯이 내 옆에 나른하게 엎드려 있었다.

 “오빠, 나 등에 오일 좀 발라줘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지만 자연스럽게 보라 등에 오일을 발라주었다.

 “오빠, 나 남자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처음인데, 무슨 말인지 알죠?”

 “?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죠.”

 “, 농담하지 마라. 너하고 나이 차이가 10년 차이인데 뭔 아저씨한테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왜요? 나이 차이하고 좋아하는 게 무슨 관계라고? 뭐 내가 좋아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처럼 똑똑하고 예쁜 애가 뭐하러 나한테 관심을 가지냐는 거지.”

 “좋아하는 게 뭐 이유가 있나요?”

 한참을 당황하며 어줍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바닷가에 갔던 일행들이 모두 돌아왔다.

 “오빠, 언니들, 내가 하늘 오빠 좋아한다고 했더니, 오빠가 나이 차이가 어떻니, 뭐 이런 소리 하는데 나 차인 건가요?”

 “, 내가 언제 널 찼어? 내가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한 거지.”

 “그러니까 그 핑계로 날 찬 거잖아요?”

 “, 하늘 씨, 잘됐네. 보라가 들이대는데, 한 번 사귀어 보지, 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형님. 나이 차도 나이 차고, 얘가 지금 나 가지고 농담하는 거 가지고, 무슨 말씀이에요?”

 “하늘 씨야말로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듯. 여자가 이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는 정말 진심인 거예요.”

 이번 MT도 객원 회원 자격으로 함께한 영미 조교가 예의 그 화려한 비키니와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서 말을 거들었다. 속에서 은근 부아가 끓어올랐다. 이 여자가 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부아가 끓어오른 나 자신에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보라야 미안하다. 진지하게 말해서 진짜로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조금 그러네. 그리고 나는 네가 조금 더 너와 어울리는 사람하고 만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알았어요. 그럼 지금부터 앞으로 오빠 마음을 어떻게든 바꿔 볼게요. 오빠 생각이 정 그렇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이죠. .”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 그런데 너 내가 왜 좋은 건데?”

 “, 일단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나름 오늘 보니까 근육질이고. 평소 모임 때 이야기하는 내용도 무언가 깊이도 있고. 아니, 솔직히 좋아하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요?”

 “하늘 씨, 좋겠네. 앞으로 보라가 계속 대시한다니.”

 “, 순주 씨도 그렇고, 다들 그만 놀리세요.”

 정말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나는 자꾸 선글라스 안에 눈동자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영미 조교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기애애했던 여름 축제가 끝나고서 며칠 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앞으로 영미 조교가 자리를 잡았다. 평소 오전에는 과외가 따로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거의 방송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시간이 남을 때 영미 조교가 종종 이렇게 내 앞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기에 그날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 날엔 공부하다 지겨우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점심엔 같이 식사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엔 영미 조교가 뜬금없이 오후에 같이 데이트하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그날 오후 과외가 두 개가 잡혀 있어, 실제로는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과외를 미루고, 영미 조교가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기다렸다. 오후 5시쯤 영미 조교가 나와서, 같이 된장 예술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 마들렌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낙산 공원으로 산책을 했다.

 “하늘 씨는 보라 씨 진짜로 어떻게 생각해요?”

 “?”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낙산 공원에서 걷다가 잠깐 쉬기 위해 자리 잡은 카페에서 영미 조교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아니, 뭐 저번에 이야기한 그대로예요.”

 “그대로라니 어떻게 그대로인데요?”

 “그냥 나이 차이도 너무 나고, 사실 어디론 튈지도 모르는 얘인데다가, 너무 당돌한 스타일이 나한테는 안 맞기도 하고.”

 “, 그렇구나.”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보더니 다시 대뜸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럼 나는 어때요?”

 “?”

 “그러니까 나는 어떠냐니까요?”

 “아니, 갑자기 당황스럽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 예쁘고, 세련되고, 쁘띠, 쁘띠한 프랑스 느낌도 나고, 뭐 그렇죠. .”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여자로서 전 어떠냐고요?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은 그런 여자인지 아닌지, 하늘 씨 생각이 궁금해서요?”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가요?”

 “, 나름 진지하다면 진지하죠.”

 “, 누구나 한 번쯤 사귀어 보고 싶은 그런 여자? 뭐 그렇지 않을까요?”

 “하늘 씨는요?”

 “, 저도 그 누구나 중 한 명이겠죠.”

 “그럼 사귀어 볼래요?”

 “에이, 농담하는 거죠.”

 “, 진짠데.”

 “그냥 커피나 마셔요. 이렇게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 충분해요.”

 “바보, 하늘 씨는 아무래도 여자 평생 못 사귀겠네요.”

 “왜요?”

 “여자 마음을 잘 몰라요. 가끔은 농담이라도 장단을 맞춰 줘야, 뭐가 재미가 있는데, 매사에 늘 너무 진지해.”

 “거봐요. 농담일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농담일 줄 알면 안 된다니까요.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죠?”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지금이 제일 좋아요. 이렇게 원했던 불어불문 공부하면서 예상도 못 했던 ALPS란 클럽에서 지인들과 즐기기도 하고, 이렇게 예쁜 영미 씨랑 뜻밖에 데이트도 하고. 이 정도면 뭐, 더 바랄 게 없는 거 아닌가요?”

 “하긴, 그게 하늘 씨 매력이기 하죠. 욕심이 없는 거. 조금 더 욕심내도 되는데.”

 마음속에서 쿵덕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의 농담 아닌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런 여자의 경우 남자들을 그냥 가지고 놀려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왔다. 아니, 마음 가지고 장난친다고 해야 하나, 어디부터 진심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기도 힘들고, 어디가 얼굴이고, 어디가 화장으로 커버한 마스카라인지 확인할 길도 없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예쁜 매니큐어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의 사람,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막의 신기루이거나 연꽃으로 위장한 아름다운 늪, 분명히 이 모든 게 장난일 거라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우리의 이런 만남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주일에 꼭 한 번, 내가 오후에도 수업이 없는 날이면 그녀와 나는 거의 비슷한 코스로 데이트를 즐겼다.

 

 2학년을 마치기까지 1년 동안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었다. , 조금 바뀐 건 내 개인은 영미 씨가 물어다 준 영어영문학과의 영어 논문 대행 일이 새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한 편에 20페이지 정도로 한 편당 거의 100만 원 가까이 받았다. 짭짤한 부수입이었다. 그동안 우리 모임은 바칼로레아를 끝냈고, 새 스터디 교재로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선택했다. 동시에 3학년 편입생인 새 회원이 들어왔다. 이찬휘라는 여성분이었는데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이었다. 프랑스에서 약 6년간 유학 생활을 하고, 실제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한다. 왜 그만두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사람들과 격이 달랐다. 일단, 프랑스어 실력 자체에서 기존 멤버와 하늘과 땅의 격차였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점이 이분이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이다. 사실, 페미니스트 그 자체에 대해 기존 멤버들이 거부반응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어느 정도 현대 철학을 공부한 만큼 다 각자 나름 페미니스트였고, 동시에 남녀 평화 공존 주의자라고 보면 딱 좋을 정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순주 씨의 경우는 예외로 쳐야 할 거 같다. 이 사람은 원래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가끔은 나치나, 마오쩌둥을 찬양하다가도, 온갖 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둥, 마호메트부터 조로아스터교까지 아주 얇고 넓게 해박한 지식을 떠벌리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사람의 나치와 마오쩌둥에 대한 동경이 단순히 재미나 농담이 아닌, 진짜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순주 씨가 그렇게 페미니즘을 혐오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워낙 괴짜라 반은 늘 농담이거나, 거짓과 진실 사이에 걸쳐 있는 색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그냥 별종 취급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진짜 페미니스트였던 이찬휘 씨와 마주하게 되자, 매번 모임은 남녀 간의 성별 토론회로 바뀌게 되었다. 만약에, 텍스트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토론회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말만 가득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는 어찌나 여성 편향적인지, 게다가 순주 씨는 또 예의 그 아무 대책 없는 불성실함으로 텍스트와 전혀 관계없는 맥락에 벗어난 논리를 펼치는지, 그에 반해 찬휘 누님은 어찌나 해박하고 똑똑한지, 어느새 가재는 게 편이라고 예종 형님도 날을 세우는 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천 개의 고원을 약 6개월 만에 끝내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이 다음 텍스트로 정해지고,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는 파국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한 성 역할의 역전, 이건 서로 대놓고 싸워보자는 이야기였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성 회원들의 정말 무언가 벼르고 온 듯한 싸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남자 회원들은 남자 회원들 나름대로 무언가 화가 난 듯 날이 서있었다. 하필 이런 날 들뢰즈 텍스트 이후로 잘 오지도 않던 허영미 조교까지 와 있었다.

 

 “다들 잘 읽어오셨죠? 이번엔 사실 처음이라 분량이 짧았으니까, 다들 읽어오셨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빠르게 독해하고서 토론했으면 좋겠네요.”

 어느새 예종 형님 대신 진행을 맡은 찬휘 누님의 목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전 안 읽었는데요. 아니, 왜 이딴 책을 읽어야 해요?”

 순주 씨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아니, 그러면 텍스트 정했을 때 반대하지, 왜 이제 와서 그래요?”

 보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런 책인지 몰랐으니까 한다고 그랬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적어놓고서 책이라고 써놨는지.”

 “, 꼴에 조금 읽긴 읽었나 보네.”

 “뭐라고? 가만 가만히 있었더니 가마니로 보이나, 보라, 너 뭐라고 했어?”

 “읽긴 읽었나 보네요, 라고 혼잣말했어요. 왜요?”

 “그래, 읽었다. 그런데 도저히 거지 같아서 읽다 말았다.”

 “아니, 사실 나도 이 책에 대해서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이건 좀 심하잖아요?”

 옆에서 점잖게 있던 예종 형님도 조용히 순주 씨를 거들었다.

 “아니, 뭐 심하고 아니고가 어딨어요? 불어 공부하는 텍스트일 뿐인데.”

 “아니, 이 거는 막말로 정말 서로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안 되잖아요?”

 “아니, 왜요? 싸울 게 뭐 있어요? 뭐 찔리는 게 있나 보죠?”

 “뭐라고요?”

 예종 형님과 찬휘 누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조짐이 이미 오늘 모임이 감정싸움 말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남자가 아기를 키우고, 여자가 배를 타고, 사회생활을 하고, 이런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굳이 우리 불어 텍스트로 정한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아니, 왜 억지인데요? 남자만 배 타고, 사회생활하고, 여자는 얘 키워야 한다는 뭐 그런 법 있어요?”

 “아니, 이야기의 본질이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불어 공부를 하는 모임인데, 이렇게 비약적으로 극단적 상황을 가정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냐는 거죠?”

 “왜 비약적으로 극단적인데요? 그리고 우리가 불어 공부를 하니까 더욱더 이렇게 일반상식을 뛰어넘고, 혁명적인 생각들을 적은 글들을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혁명적 좋아하시네? 여자가 밥도 안 차리고 배 타는 게 뭐가 혁명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예종 형님과 찬휘 누님의 언쟁에 다시 순주 씨가 끼어들었다.

 “아니, 오빠는 맨날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요? 여자가 밥이나 차려야 한다니? 자기는 맨날 술이나 처먹으면서, 그리고 뭐 우리는 불어를 공부하니까 불온한 사상을 숭배한다느니 그래 놓고서,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요?”

 “그래, 나 맨날 술 처먹는데 뭐 네가 보태준 거 있냐? 그리고 불온한 사상하고, 어떻게 여성 우월주의가 같을 수 있어? 힘 있는 게 남자고, 현실이면, 거기에 따라야지. 내가 언제 약한 인간들 옹호한 적 있어?”

 “, 웃기고 있네. 잘난 게 있어야 따르지. 맨날 술 처먹는 게 힘인가?”

 순주 씨와 보라가 이제 수위를 넘어 개인적 험담까지 오가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다른 여성 회원들도 합세하여 남자들의 권위주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고, 특히 순주 씨의 평소 말도 안 되는 힘에 대한 숭상과도 같은 우월주의를 비판했다.

 “웃기고들 앉아 있네. 여기서 뭐라고 한다고 뭐 이 사회가 바뀔 줄 아나 본데. 그럼 평소에 남자한테 남자니까 뭐 해달라고 하지를 말아야지. 게다가 힘 있는 사람이 때리고, 힘없는 사람이 맞는 게 자연법칙인데, 그걸 부정한다고 뭐 달라져!”

 순주 씨가 윽박지르자, 여성 회원들 눈에 모두 빨갛게 비상등이 켜졌다. 더 이상 무언가를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순주 씨, 아 그만 좀 해요. 내가 생각해도 좀 도가 지나친 거 같아요. 일단, 다른 분들도 조금만 진정하시고요. 남녀가 같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게 중요한 문제지. 누가 더 힘이 세고, 약하고, 그런 건 두 번째 문제잖아요?”

 “오빠 말이 맞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오빠가 남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몰라요. 여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는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을 거예요.”

 “보라 씨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닌데, 현실적으로도 이야기해야죠. 지금 서로 싸우자고 모인 자리는 아니잖아요. 공부를 하자고 모인 자리지.”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영미 조교가 나를 거들어줬다.

 “, 알아요. 그런데 순주 오빠가 깽판을 놓잖아요. 책도 제대로 안 읽어왔으면 가만히 있지,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뭐라고? 책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깽판을 놓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지. 이건 그냥 서로 싸우자고 정한 책이잖아?”

 이후 더 이상 모임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와 영미 조교가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했지만도리어 입장이 뭐냐는 공격까지 받는 상황까지 왔다. 그렇게 단 한 문장의 독해도 못 하고, 약 1시간가량 서로 간 감정의 소모와 깊은 앙금만 남긴 채 그날 모임은 끝이 났다.


 사실, 처음에 다른 여성 회원들이 이렇게 페미니스트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물듦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새 모두 찬휘 누님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고, 정말 모임 분위기 자체가 일촉즉발의 사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미 조교는 모임에 적을 두지 않게 되었다. 들뢰즈를 하면서부터 그런 내색을 비추기도 했고, 유학하러 가기 위해 남은 1년 동안 반드시 대학원 석사 논술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에 바쁘다고도 했다. 그래도 한 번 시간을 내서 왔는데 하필, 오늘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에 천 개의 고원을 할 때도 가장 서로의 칼날이 맞선 강렬하게 되기, 동물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라는 주제 토론을 할 때 와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동물 되기에서 파급된 남성의 여성 되기에 관한 토론이었다. 왜 이 철학자는 남성의 남성 되기에 대해 전제도 없고, 여성의 남성 되기는 배제했는지, 정말 남녀 간 불화를 위해 이 책을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이럴 때 남녀 모두가 토론이 격화되게 되면, 이성적인 논리에서 감정적인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어려워서 곡해되기 쉬운 이 책에 대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된다는 식으로 순주 씨가 딴지를 걸면서, 동물 되기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던 찬휘 누님의 가슴속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휘발유를 끼얹어버리자, 보라부터 시작해서 영희 씨, 나영 씨 모두 남자들의 역할론부터 권력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폭력성에 대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잠자코 있던 예종 형님도 모든 것을 페미니즘으로 귀착시키는 여자들의 무력함과 피해의식에 대해 건드렸고, 순주 씨는 여기서 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현실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남자에게 의지하면서 권리만 주장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말 그대로 파국의 형상이었다. 그러니 그 꼴을 본 영미 씨가 안 오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모임의 마지막 된 오늘 이갈리아의 딸들에 대한 토론은 이보다 더 심한 감정 소모가 서로에게 오갔다. 사실, 욕만 안 나왔지, 서로 대놓고 상종 못 할 인간들이라고 규정짓는 자리였다. 여기서 또 그걸 어떻게든 중재해보겠다고 나선 내 꼴이나 영미 조교도 결과적으로 조금 우습게 됐다. 어째서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핵심을 피하냐면서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영미 조교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평화 공존 주의자였다. 동시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조금씩 단계를 밟아 생각하자는 평소에 소신이 있었기에, 되도록 이성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든 이성적 판단이 소실되고, 감정의 앙금만 남은 자리에서 이성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꼴이 꼴값 떠는 바와 진배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을 끝으로 예종 형님과 순주 씨는 더는 ALPS 모임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무언가 마지막 미련이 남아있던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음 자리에 나가보았지만, 나 또한 더는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한량들의 모임으로 만든 ALPS는 바야흐로 여성 전성시대로 접어들어, 남자는 그저 호구이거나 실험대상 같은 존재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빌려 쓰던 모임 장소를 바꾸어 찬휘누님 집으로 정해버렸고, 모임이 끝났을 때 이 강력한 페미니스트인 아줌마가 갑작스레 내게 오는 이유가 뭐냐?’라는 소리를 했을 때, 나도 더 이상의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마음에 걸렸던 건 보라였다. 비록 페미니즘에 물들어 다른 남자 회원들과 날카롭게 척지었지만, 보라는 한 번도 내게 고개를 가로저은 적이 없었다. 물론, 여기엔 진심이든 아니든, 보라가 내게 고백했었다는 애틋함이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보다 보라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이기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임을 나간 후 ALPS란 이름이 아마조네스로 바뀌었다는 소리를 예종 형님께 듣고서, 문득 생각이 나, 따로 만났다.

 

 “보라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 오빠도 잘 지내지?”

 “, 잘 지내.”

 “오늘 무슨 일로 불렀어?”

 “일단, 식사부터 하자 그리고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저녁을 함께 먹은 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왔다. 한여름이 지나가고, 초가을 날씨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지금부터 오빠 하는 이야기 고깝게 듣지 말고 그냥 들어줘.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 또 분위기 왕 진지하네.”

 “아니, 그냥 너 그거 아냐? 너는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머리 좋은 얘야. 솔직히 내 머리는 네 머리에 비하면 머리도 아니야. 내 머리 한 열 개 분량이 네 머리 정도 될까? 그렇게 너는 똑똑해. 너도 알지, 그거?”

 “, 나도 어느 정도 내가 확실히 똑똑한 편이라고는 생각해.”

 “아니, 넌 정말 똑똑해.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고마워. 오빠. 그런데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사람을 붕 띄워?”

 “그런데 그거 아니? 똑똑한 거하고, 지혜로운 건 조금 달라. 나는 네가 조금 더 지혜로웠으면 좋겠어. 물론, 네가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야.”

 “,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어.”

 한참 동안 우리 둘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쌀쌀한 초가을 날씨만큼 무언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오빠, 인제 와서 하는 말인데, 나 오빠 정말 좋아했어. 그거 알아?”

 “, 알아.”

 “그리고 이제야 오빠가 왜 나를 찼는지 알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찼다고. 그때도 내가 그게 아니라고 몇 번 설명했잖아.”

 “아니야. 오늘에서야 알 거 같아. 내가 똑똑하기만 하고 지혜롭지 않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맥락이 다르잖아.”

 “알아. 오빠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내가 요즈음 너무 막 찬휘 언니한테 휘둘려서 페미니즘에 급격하게 빠졌으니까. 그런데 원래 내가 좀 그래. 뭐에 빠지면 확 빠졌다가, 금방 식어버려. 그래도 오빠는 사람이 조금 은근하고 뜨뜻미지근한 게 오래 갈 거 같았는데. 오빠 성에 내가 안 찼던 거겠지. 아마.”

 “아니야. 그건 아니고. 정말로 10살 차이 정도 나면, 여자로 보기 조금 힘들어. 그리고 좋은 오빠, 좋은 여동생으로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럼 앞으로 만나기 힘들겠네. 나는 오빠랑 좋은 여동생으로 있기는 싫으니까. 오빠가 모임도 안 나오고, 이게 마지막이겠네.”

 “그래. 그럼 아마 그럴 거 같다. 아쉽네.”

 “나도.”

 또 한참 동안 말없이 자리를 서성였다.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 서로 헤어질 시각도 다가왔다.

 “오빠, 마지막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그냥 마지막으로 한번 가볍게 안아줘.”

 “,”

 “잘 지내

 “오빠도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찰나 보라가 다시 나를 불렀다.

 “오빠. 오늘 고마웠고. 오늘 오빠가 한 말 꼭 명심해 둘게. 조금 더 지혜롭고 멋진 여자가 될게. 그렇게 되면 다시 대시할 테니까 그땐 꼭 받아줘. 알았지?”

 “알았어. 잘 지내. 그럼 진짜 갈게.”

 “. 오빠도. 안녕.”

 

 이렇게 방송대 불어불문과의 거의 내 전부였던 ALPS 클럽과 나는 작별을 고했다. 그래도 나의 방송대 생활은 비슷한 패턴으로 지속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영미 씨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예종 형님과 순주 씨와 함께 날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3학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었을 때 연달아 깜짝 이벤트가 벌어졌다. 첫 번째는 예종 형님의 결혼이었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실 예종 형님은 오래된 연인이 있었다. 그래서 뭐 깜짝 이벤트라고 하기는 뭐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혼전임신으로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순주 씨와 달리 3학년 편입으로 들어온 예종 형님은 이미 졸업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종 형님의 얼굴을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모임의 축인 예종 형님을 보기 힘들어지니, 무언가 서로 친하면서도 데면데면했던 순주 씨와 나 또한 뜸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이벤트는 이 괴짜 순주 씨로부터 벌어졌다. 이 역시 결혼 이벤트였는데, 결혼 대상자가 보라였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무엇보다 이제껏 모임에서 가장 척지던 두 사람이 결혼하다니, 사실 보라가 페미니즘에 빠진 결정적 이유는 내 생각에 거의 전적으로 순주 씨 때문이었다. 물론, 찬휘 누님의 찬바람 휘날리는 카리스마에 보라가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토론 때 만약 순주 씨가 그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보라도 다른 여자 회원들도 그렇게까지 페미니즘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나치를 찬양하고,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괴짜는 권력과 폭력에 대한 이상한 장광설까지 늘어놓으면서, 여성 회원들의 치를 떨게 했다. 가뜩이나 페미니즘의 영향 세가 한랭 고기압으로 찬바람이 생생한데,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어느 누가 화나지 않겠는가? 특히나 보라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모임에서 둘은 늘 으르렁대는 모양새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웃긴 건 당사자인 그 둘 또한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얼버무리는 모양새였다. 상극이 통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음양엔 어떤 법칙도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 남는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그 결혼식으로 현 아마조네스, ALPS 클럽의 모든 멤버들이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서로 데면데면하였고, 그 때문인지 뒤풀이도 어영부영 그냥 끝나버렸다. 정말 어이없기도 했지만, 무언가 정신없던 결혼식이었다. 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2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방향이 같던 영미 조교와 함께 택시를 탔다.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둘이 결혼을 하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순주 씨는 그렇다 쳐도 보라가 무슨 마음을 먹고서 결혼을 한 건지 조금 이해가 안 됨.”

 “, 하늘 씨, 보라 씨 나이 차이 핑계 대면서 거절해놓고서 이제 와 아쉬워요?”

 “무슨 소리예요? 순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영미 씨도 잘 알잖아요.”

 “잘 알죠. 완전 괴짜에, 이상한 개똥 철학자?”

 “뭐 대충 그렇죠.”

 “그러고 보면 사람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 정말 사람 속도 그렇고, 남녀 사이도 그렇고.”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는지 택시 앞 유리 와이퍼가 다소 큰 소리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 유학 준비는 잘 돼 가요? 논문 다 끝났죠?”

 “, 대강. 논문도 이제 담당 교수님 승인만 받으면 돼요.”

 “언제쯤 갈 거 같아요?”

 “한 내년 봄쯤.”

 “. 잘됐네요. 내년엔 정말 친한 사람도 없고 적적하겠네요.”

 “왜요? 순주 씨 있잖아요?”

 “사실 예종 형님 없으면 서로 잘 안 봐요. 무언가 좀 안 맞는다고 할까.”

 “, 이해해요. 그럴 거 같아요. 서로 결이 조금 다른 느낌?”

 “. 조금 그런 거 같아요.”

 “그래도 재밌는 사람이에요.”

 “. 그건 맞아요. 이상한 소리만 안 하면 괜찮은 사람이죠. 사람은.”

 무언가 어색했다.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그날따라 무언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벤트로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너무 갑작스러운 겨울 폭우로 감정선에 이상이 생긴 건지, 끽끽거리는 와이퍼 소리만 택시 안 정적을 채웠다.

 “이런 말 하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오늘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도 여행가시고, 동생도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저 혼자밖에 없어요. 날씨도 춥고, 배도 고픈데, 라면 먹고 갈래요?”

 순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너무나 평범한 이 한 마디가 우리 세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영미 조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와 나의 나이 차이는 겨우 3살 차였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연하인 유지태를 유혹할 때 썼던 말, ‘라면 먹고 갈래요?’. 그 둘은 정말 라면만 먹고 가지는 않았다. 라면 면발처럼 얽혀, 한겨울 내 함께 하고서, 화창한 봄날에 헤어졌다. 내게도 그렇게 한정된 기한의 사랑이 온다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런 사랑이 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일단 같이 내려요.”

 그녀의 집인 장안동 근처 아파트에서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편의점에 산 비닐우산을 나란히 쓰고서 그녀 집 바로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깐만요. 그냥 집에 갈게요. 라면이 지금 너무 먹고 싶기는 한데, 먹으면 심하게 라면에 중독될 거 같아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 바보. 그럼 잘 가요. 잘 지내고요.”

 “. 영미 씨도요. 잘 지내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학교에서 영미 조교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고, 마주쳐도 그냥 가볍게 서로 묵례만 주고받았다. 가슴속에서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기한을 정해둔 연애라는 자체도 그랬고, 영미 씨라는 여자를 만날수록 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란 생각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주 씨의 결혼식 이후 2월쯤 오랜만에 예종 형님과 순주 씨와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뜻밖에 둘에게서 영미 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영미 조교 말이야.”

 “어떤 영미 조교요?”

 “당연히 허지. 우리가 언제 김하고 친하게 지낸 적 있어요?”

 “그런데 왜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사람이 조금 이상해.”

 “혹시 형님한테도 그랬어요?”

 예종 형님과 순주 씨 두 사람 모두 같은 일이 있었다는 듯 서로 입을 맞추었다.

 “그럼 순주 씨한테도 그랬단 말이야?”

 “, 아니 이 여자가 막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트도 하고 그러기에, 한 번 줄줄 알았죠. 지가 또 술 먹자고도 했고. 그런데 아무리 졸라도 한 번을 안 주는 거예요.”

 “순주 씨한테도 그랬어? 나하고도 일주일에 한 번 따로 만났어. 술 마신 날 많이 늦어서 집에 바래다줬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라면이나 먹자고 하더니, 끝까지 나를 내치는 거야. 뭐야, 완전히 나만 나쁜 놈 되고. 이상한 사람이 돼버렸잖아. 혹시 하늘 씨한테는 안 그랬어?”

 “아니, 뭐 전 같이 공부하고, 점심은 종종 먹었는데, 따로 뭐 그렇게까지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여하튼 이상한 여자야. 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여기저기 꼬리를 쳐대.”

 “맞아요. 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4월 중순쯤 가장 화창한 봄날에 그녀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날라왔다.

 

 ‘하늘 씨, 정말 좋아했어요. 거짓말 아닌데. 이렇게 그냥 떠나려니까 섭섭해서 문자 남겨요. 잘 지내요. 그리고 좋은 여자 만나요. 나 같은 여자 말고 정말 좋은 여자요. 꼭이요!’

 

 4학년 1학기를 마저 다녔다. 방송대 21학기 동안 총 평준 학점은 대략 4.25, 믿기지 않는 점수였지만, 그 외향만 화려할 뿐, 실질적으로 나는 프랑스어로 대화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몰랐다. ALPS 클럽 때 텍스트도 천 개의 고원부터는 아예 영어 텍스트로 대체하고, 3학년 동안 영어 논문만 5개를 써야 해서, 대체 나 자신도 방송대에 불어를 공부하러 왔는지, 영어를 공부하러 왔는지,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정도였다. 아예 그래서 3학년 2학기부터는 불어불문 수업 반, 국어국문 수업 반 정도로 비중을 바꾸어버렸고, 4학년 1학기 때는 전공을 제외하면, 거의 다 국어국문 수업으로 채워버렸다. 결론적으로, 방송대를 다니는 내내 나는 프랑스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예의 그 특유의 방랑벽에서 기인한 헛발질만 연발한 셈이다. 거기에 4학년 1학기 때는 이런 헛발질이라도 함께하면서 자위하며 자학 개그를 남발할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종 형님도 떠나고, 순주 씨도 결혼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프랑스로 떠나갔다. 그녀가 솔직히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가 프랑스어에 목멘 실체가 낯간지러운 발음이거나 허세 가득한 철학이었던 것처럼, 내가 그녀를 나와 비슷한 동류의 허영미 가득한 여자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만났어도, 나는 결코 그녀의 그 어떤 부분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나 또한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화창한 봄날에 혼자 서글피 남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둘의 실체는 서로 누군가를 어장 관리하듯 썸타면서, 자신은 어떤 일에든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상처받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서로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로 평화 공존을 주장했던 것처럼, 어느 누군가와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바다 위에 부표와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파도를 함께 타며 흔들리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가깝고 먼 부표 사이.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인지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봄날이 가고, 방송대 불어불문학과 4학년 2학기를 남겨두고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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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뜬 날

 

 

  눈이 부시게 번뜩거리는 용, 어두운 그림자 너머 포효하는 맹수와도 같은 그 무언가, 그리고 그 두 마리 동물과 비견될만한 커다란 쥐새끼 한 마리였던 거 같다. 사실, 이렇게 세 마리의 동물이었는지, 아니면 검은 그림자들을 그렇게 추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동물들이 나와 내 두 친구들의 어떤 운명 혹은 천명을 표징 하는 무언가라고 믿었던 거 같다. 몹시 초조했다. 딱히 운명을 믿는 건 아니지만, 자기 삶의 어떤 단서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이란 감출 순 없으니까. 먼저 한 친구의 운명 전언이 들려왔다. ‘뜨거운 태양을 삼켜라.’ 그 친구의 표징은 아마 용이었던 거 같다. 용과 태양이 어떤 상성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전언은 내 가슴속을 떨리게 했다. 왜냐하면, 이 전언엔 내가 평소 갈구하는 지극한 모순이 담겨있는 까닭이다. 누가 뜨거운 태양을 삼킬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삼킬 수 있다면 그 속은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 가겠는가? 이번엔 내 차례다. 과연 나에겐 어떤 전언이 내려질까? 더욱 커지고 긴 포효 소리와 함께 더더욱 커진 그림자가 길고 짙게 드리워지며 꿈에서 깼다.

 

  6,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이었다. 무언가 꿈속에서 어떤 예지와 전조로 가득찬 계시라도 받은 듯 아련한 떨림이 온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책상 위 모니터 앞에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유년의 뜰’, 유명한 어느 여류 소설가의 단편집이었다. 전에 문학 품평 모임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어서 아는 작가이긴 했지만, 사실 시큰둥했다. 그래서 그 작가의 책을 산 기억이 없다. 모임에서 다룬 단편 하나 고작 읽어봤을 뿐, 그 이상 읽은 기억도 없다. 그때 어머니가 내가 깨어난 기척에 방으로 들어오셨다. ‘벌써 일어났니? 밖에 누가 책을 많이 버려놨더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네가 책을 좋아하니까, 깨끗한 거로 하나 주워왔다.’ 평소 어머니는 내가 책을 사 모으는 것을 마뜩잖게 여기셨다. 방 두 면이 책장으로 가득한 것도 모자라, 내 방 발코니에 또 책장이 두 개나 더 있으니, 어머니로선 책 좀 그만 사라고 성화를 부리는 게, 당연한 일일 거다. 그런 어머니께서 갑자기 책을 구해오시다니, 게다가 유년의 뜰이란 제목이 무언가 꿈속의 풍경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왜냐하면, 꿈속의 두 친구는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않고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고, 친구들과 연관된 동물들의 상징도 두 친구에 대한 내 무의식의 투영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너무나 은처럼 빛나고 강철처럼 늘 당당했던 은철이란 친구, 그리고 공부는 잘했지만 피부질환으로 또래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였던 태근이란 친구, 두 친구는 나와 학교 내에서 성적 라이벌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여기서 다소 비합리적이고 생뚱맞긴 하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조금 도용하면 은철이를 내 양심과 이상의 영역인 초자아로, 그리고 태근이를 내 본능의 영역인 이드로 나름의 해석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자아의 영역인 나의 상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맹수라고 기억을 변조해놓았지만, 실은 어두운 그림자에 가까웠다. 가장 거대하고 가장 짙은 어떤 동물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 커다란 쥐새끼라고 명명한 태근이의 상징보다 오히려 더 감추고 싶은 나의 치부이거나 내가 모르는 나의 본질,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머릿속이 무거웠다. 동시에 무언가 아주 사소한 전조만으로도 이제껏 품어온 나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어 엎어버릴 만큼 뇌파에서부터 시작된 아드레날린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차고 넘쳤다. 뭐랄까? 오늘 무언가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거나 기시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그 반대로 이미 무언가 시작된 실타래 속에 엮어 들어간 기분이었다. 잘 모르겠다. 다만,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평소보다 다소 일찍 은행으로 출근을 했고, 어머니가 주운 유년의 뜰이란 책을 챙겨갔다.

 

  別辭, 왜 생소한 한자 제목의 단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을까? 책 제목인 유년의 뜰은 사실 이른 아침에 읽기엔 조금 어지러웠다. 그런데 잘 모르는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 ‘이별 별자라는 건 아는데. ? 핸드폰 한자 검색 앱을 통해서 말 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별의 말이라. 제목부터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다른 날보다 일찍 온 탓에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글은 그러한 심상치 않은 구석을 전혀 숨길 의도를 감추지 않고서, 묘지를 향해 시나브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멈춘 곳은 딱, ‘신작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정확하게, 그 시각이 은행 영업 시작을 위해 내가 마지막 점검을 하는 시각이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그 지점이 아침부터 마법에 걸린 내게 무언가 앞으로의 새길을 제시할 것처럼 막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장장 칠 일이란 긴 추석 연휴를 앞둔 날이다. 엄청나게 바쁠 거란 사실이 눈에 선했다. 오전 9시 정각, ‘정문 오픈합니다.’란 멘트를 외치고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의 대부분 신권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에서 일 년에 구정, 추석 딱 이 두 번의 명절에만 신권을 배부하는 탓에 오전은 거의 신권 찾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오늘 우리 은행에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만 원짜리 신권이 처음부터 아예 동나있었다. 많은 손님이 헛걸음해야 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더욱 붐빌 수밖에 없었다. 대기표는 계속 열 명, 스무 명을 넘어, 삼사십 명을 웃돌고 있었다. 게다가 기기들은 오늘 내 기분처럼 살짝 미쳐 돌아가는지, 번호표 모니터가 고장 나고, 세금 공과기마저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아마 평소라면 이 대란에 여기저기 불평불만을 토하는 고객들로 넘쳐나고, 나도 쉴 새 없는 고객들의 요청에 정신이 없었을 게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니, 나를 위해서 마치 이 상황이 조성된 것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어떤 고객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장 난 기기 덕에 내 할 일이 줄어버렸다. 사실,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어떤 믿음에 불타오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의 힘을 뛰어넘는 힘과 열정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말을 줄곧 불신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오늘 일은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달리 없다. 그 바쁜 와중에 나는 고객들에게 커피를 타주거나 차 한 잔을 대접하기까지 했다. 원래는 은행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이여서 이제껏 한 번도 그래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하니 손님들이 무언가 여유를 찾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몸이 불편한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그때마다 창구의 한 여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다소 차가운 느낌의 그 아가씨와 그런 눈맞춤에도 별 느낌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때마다 그녀가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처럼, 몸이 불편한 손님들을 자신의 창구로 모셨다. 염치없게도 가슴이 설렜다. 이 역시 며칠 전에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그녀와 나는 은행 CCTV 기기실을 통과하는 조그만 사무실에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녀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하나 정성스레 애무를 해줬다. 하도 정성스러워서 깨고서도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먼저는 내가 이렇게까지 외로웠나 싶어서 가슴이 허했다. 게다가 왜 하필 그녀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종종 물건이 필요하면 서무 담당인 그녀에게 신청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 우린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그것도 그녀의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나는 한 번도 그녀를 성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은행에 처음에 왔을 때 눈에 띄는 미모라 생각은 했지만, 약간의 도도함이랄까, 냉정함이 보여,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차도 거의 열 살 차이 가까이 났다. 오히려 내 자신이 스스로 놀란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 여자들이 이미 다 결혼한 유부녀였다는 사실이다. 하긴, 내 나이가 사십 줄에 들어섰으니 유부녀라고 해도 전부 나보다 어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거의 삼십 대 중후반의 나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나이로 따져도 나랑 맞는 건 그쪽이다. 거기에 솔직히 말하면 무언가 농염함이라고 해야 할까? 삶에 조금은 지친 그늘 속에 가려진 욕망에 대한 선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 조금 더 솔직히 표현해 그동안 봐왔던 AV 동영상의 여인들이 이제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나도 모르게 바뀌었기 때문일 거다. 어느 순간부터 퇴근하고 나서 늘 AV 동영상을 다운받고 편집하기 시작했다. 사실, AV 동영상 다운받는 일이야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런데 편집이라고 하면, 다들 그렇게 말한다. 무슨 편집? 마치 내가 그런 일에 관련이 있지 않는 한, 전혀 할 까닭이 없지 않으냐는 그런 반응이다. 맞다. 일반적으로 그건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맞다. 하지만 아주 우스운 계기를 통해 나는 편집을 하기 시작했다. 하드디스크 용량의 한계, AV 동영상을 하도 숱하게 다운을 받았더니, 용량 초과라는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그래서 용량 확보를 위해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저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매일 쏟아지는 숱한 AV 동영상을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로 다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외장 하드를 사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나의 편집에 대한 집착은 점점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나는 작품명을 반드시 기입한다는 점이다. 거기에 마이너스 표시를 해두면 여자의 성기가 선명하게 보이는 작품이고, 없으면 모자이크 처리된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편집할 때 반드시 처음에 옷을 입은 장면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옷은 또 다른 성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마 여자들도 본능적으로 이를 알기 때문에 화장이 아닌 패션이라는 또 다른 치장이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면 나와 같은 이런 남자들의 욕망의 투사 때문에 생겨났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성욕을 자극하는 부분이 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나는 괜찮은 AV 배우의 경우엔 여러 옷을 입고, 여러 상황 설정을 한 작품을 수집한다. 여기서 여러 설정이란 강간, 비 오는 날, 한여름의 땀나는 장면, 온천, 여러 명에게 당하는 M 성향에서 여자가 우위를 차지하는 S 성향까지의 모든 작품 종류를 아우른다. 물론, 이 역시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처음에 나는 키스 신이 많은 정상적인 체위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소위 가정물이라고 말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옷의 다양성만큼 설정의 다양성이 중요해졌다. 욕망의 범위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넓혀져 갔다. 다만, 내가 그럼에도 가장 꺼리던 건 여자의 S 성향 작품들이었다. 뭐랄까, 기본적으로 나는 내가 수동적인 게 싫었다. 어차피 AV 동영상이라는 게 자위하기 위해 보는 작품인데, 여기서 수동적일 이유도 없을뿐더러, 진짜 성관계에서도 내가 수동적인 건 별로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꿈은 사실 내가 그리 좋아하는 상황도 아니고, AV 동영상에서도 거의 없는 설정이다. 그저 호기심으로 한두 개 정도 있는 정도? 하지만 그날의 꿈은 나의 기본적인 욕망 인식의 틀을 바꿨다. 어쩌면 욕망을 발현하기보다는 지금 나는 욕망이라는 이름을 통해 위로받고 싶은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거기서 아주 살짝만 더 나아가면 연애에 대해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욕망의 변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상황이란 건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형국이 아닌가? 젊을 적부터 다소간의 역마살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던 내가 마흔쯤이 됐을 때 남은 건 빚투성이였다. 그래서 빚도 갚을 겸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 겸, 겸사겸사해서 은행에 들어왔다. 하지만 배운 건 대출하는 방법뿐이었다. 생겨 먹은 게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관심을 가지려 해도 돈에 대한 관심이 생기질 않았고, 빚만 더 늘어났다. 무려 오 년이란 시간을 빚을 갚아야 겨우 지금의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하지만 오 년이란 시간을 이제껏 나는 어느 한 곳에 머물러 본 경험이 없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것이 오랜 시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 믿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고백해본 적도 없다. 동거 비슷하게 지냈던 여자에게 했던 말이란 게 고작 너를 진짜로 사랑하고 싶다.’라는 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말이 내게 있어 최고의 고백이었던 거 같다. 왜냐하면, 사랑을 믿지 않는 내게 있어 최고의 가능성은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이었고, 그 가능성의 시발점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씨앗이었을 테니까. 그 때문인지 여자들은 쉽게 떠나갔다. 사랑을 애초에 믿지 않는 내게 결혼이란 단어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까닭이다. 사실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결혼한다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 하는 은행 창구 여직원에게서 갑자기 연심을 느끼다니, 내 자신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대체 오늘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걸까? 끊임없는 내 사념 탓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그 모든 시간이 준비된 탓인지, 눈 깜짝할 사이 정각 12시 점심시간이 되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중국집에서 간짜장을 먹은 뒤, 커피 한 잔에 담배를 태우면서 시간을 때우다, 1시 정각에 은행에 들어갔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너무 생각들이 뒤엉켜 음식이 잘 목에 안 들어갈 거 같다. 아니, 사실은 아침에 읽다 만, ‘신작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 내내 목에 걸렸다. 결국, 끼니를 거르고, 근처 아파트 단지 내 벤치에서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안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갔다. 낚시하러 가서 사라진 한 남자와 낚시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덤을 방문한 여자의 이야기, 여기서 이야기는 교묘하게도 이야기가 마치 한 날에 벌어지는 것처럼 써서 두 남녀가 전혀 관계없는 듯이 표현하면서도, 두 남녀 이야기의 교합지점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종국엔 그 이야기가 백중에 벌어진 일이라 하면서, ‘우란분재, 망자의 날, 달은 밝아 만월이라 정리하고 있다. 마치 두 남녀 모두 망자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처럼, 덩달아 나도 망자인 것처럼, 혹은 오늘 숱하게 은행을 혼령처럼 떠돌던 손님들과 나와 눈을 맞춘 그녀 역시 내게 있어 망자여도 상관없는 말투로, 그렇게.

 

  ‘별사를 다 읽고서도 시간이 남아, 내친김에 어둠의 집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떤 까닭 모를 공포와 대면했다. 사실, 처음 이 책에 제목을 펼쳤을 때 나는 별사보다는 이 어둠의 집이란 제목에 더 눈이 갔었다. 왜냐하면, 같은 제목으로 쓴 내 시가 있기에, 어떻게 풀어갔을지 궁금함이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 어둠의 집은 나의 어둠의 집과 많이 달랐다. 아니, 완전히 달랐다. 내 경우 어둠의 집을 벽돌은 금강석으로 하고 천장은 특수 알루미늄으로 덮어 빛 하나 새지 않도록 밀봉을 하더라도, 컥컥 숨을 토해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촛불 하나를 숨겨 두고서 그 촛불로 불 지른다면 기꺼이 뜨거운 불구덩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곤 있지만, 그래도 컥컥 숨을 토해낼 거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류 작가의 어둠의 집은 훨씬 더 음험하고 거대한 그림자와 같았다. 마치 내가 오늘 꿈에서 본 알 수 없는 그림자의 형상처럼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 , , 떨어지는 집안의 물 떨어지는 소리, 어떤 면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은 이 소리가 오히려 지난 추억을 지우고, 어둠의 섬광을 뚫고 빛나는 형광등이 유령처럼 살아있는 창백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어디선가 느껴보았던 이 감정,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당혹스러웠다. 어둡고 빨간 조명 속에 물비린내로 가득한 안마방에서의 열패감, 그 어둠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 뇌리를 스치던 수많은 생각들, 왜 갑자기 지금 떠오른 것일까? 사랑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보기로 한 하필 지금, 그리고 또 한 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알던 이 작가의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동경’, 구리거울에 빗대어 흐릿해진 추억과 죽음이 가까운 늙음에 관한 이야기, 물론 맥락상으로는 비슷하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 동경은 윤동주의 참회록동경과 교차하여 혼란스러운 데다, 한 사람의 뚜렷한 이미지와 혼동되어 있다. 3년 동안 같이 문학 품평 모임을 하다가 나간 세월님에 대한 이미지, 그는 참 따뜻한 감성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문학을 선망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실망하여 나갔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바로 이 여류 작가였고, 모임에서 기성 작품 중에서 추천했던 작품이 동경이었다. 당시, 나는 이 작품을 평하면서 내가 함부로 늙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어 윤동주 참회록동경을 비견하여 감상문을 썼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라 나간 것이 안타까워 생각나기도 했겠지만, 그 따뜻한 감성이 오늘따라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나간 지 벌써 3, 갑자기 연락한다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오늘은 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날이다. 전화했을 때, ‘세월님은 다소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모임에 있을 때에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데, 3년이 지나 연락을 받으니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평소 마시지도 않던 술을 마시며, 아침부터 그날 내내 사로잡힌 무섭고 생경한 예감과 예지에 대해 떠들어대질 않나, 그 자신이 좋아하던 여류 작가의 이중성에 대해 내 자신도 이해하질 못할 이야기를 해대니, 그는 적지 않게 당혹해했다. 아니, 사실 그가 거북스러워한 정체는 이미 자신이 뒤돌아선 자리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장광설이었을 것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기에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대기업 직장을 다니면서도 필사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습작을 매달 썼다. 그렇지만 거기엔 어떤 한계가 있었다. 모든 사물을 따뜻하게 바라보려고만 하는 시점이라든지, 혹은 어떤 비일상도 결국엔 일상으로 되돌리는 틀이라든지, 결국 본인 자신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글쓰기를 포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 글쓰기는 글 쓰는 자체에 몰입하는 연극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일상의 범주의 틀을 깨기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선, 아주 가끔은 실제 일상의 틀을 깰 필요도 있다. 하지만 탄탄한 직장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그에게 일상을 깬다는 일은 무리였을 것이다. 아니, 모임에 있는 사람들과 있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부담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심각하게 비일상적인 하루를 겪을 확률이 조금 더 올라가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내 입장에선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세월님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을 수 없었다. 뜬금없이 치솟아 오른 사랑이란 감정과 양가감정으로 안마방이라는 어둠의 집을 향해가는 내 발걸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내 자신도 알 수 없었을뿐더러, 나에겐 누군가 공범자가 필요했다. 아니, 고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떠오른 이가 세월님이었다. 더이상 내 주위에 어떤 접점이 없고, 무언가 이 모든 실마리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 그렇지만 그는 더이상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이 느껴졌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에겐 결국, 허공에 붕 뜬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위가 현재 어떤 합리성도 논리도 없는 모순 그 자체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한 기분에 그렇게 두 시간쯤 혼자 떠들다 9시쯤 그와 헤어졌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나는 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길을 헤매다 결국엔 안마방에 종착하고 만다. 오늘부터 다시 사랑을 믿기로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관성을 나는 이길 수 없음을 이내 깨닫는다.

 

  약간은 어둡고 침침한 붉은 조명, 이곳에 오면 왠지 모를 물비린내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어우러져 포근하면서도 텁텁한 기분이 든다.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대학 졸업쯤이었다. 학교 채플 출석수가 모자라, 기도원에서 1주일 동안 보충하는데, 조교들과 다툼을 벌여, 그냥 중간에 나와버렸다. 기분도 찝찝하고 분도 가라앉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다 이곳에 들어왔다. 그전에 많은 집창촌을 가봤지만, 이런 업소는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여자들이 몸에 로션을 바르고, 몸으로 안마를 해주는데, 기본이 묘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오다가다 이곳을 단골로 삼게 되어, 그냥 주체할 수 없는 날이면 이렇게 나도 모르게 여기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 처음엔 여자들이 그렇게 몸으로 안마를 해주는 게 좋았는데, 점점 귀찮아졌다. 뭐랄까, 애정이란 게 전혀 담겨있지 않은 상업적 느낌이랄까? , 사실 이런 곳에서 애정을 갈구한다는 자체가 웃긴 얘기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조금 진짜처럼 해주는 여자들이 좋았다. 그래서 그런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만 지명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게 또, 이런 곳 여자들의 특징이 한 곳에만 오래 머무를 수가 없는지라, 2, 3년 주기로 지명하는 여자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 한둘은 바깥에서 볼 기회가 없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그냥 이곳에서 보는 거로 내 선을 그어놓는 게, 안전하다고 느꼈던 거 같다. 최근 한동안 빚도 많고, 지정했던 단골녀도 없어, 이곳을 온지 조금 뜸했다. 그래서 무언가 처음 오는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아니, 처음 보는 여자와 바로 옷 벗고 섹스를 한다는 게 얼마나 데면데면한 일인지, 늘 이럴 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섹스를 하는 것보다는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키스도 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렇게 해주면 나는 그 여자를 바로 단골녀로 지정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여기 와서 무슨 이야기고 나발이고, 게다가 웬 키스란 말인가? 그러면 나는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분도 안 되어 찍 사버리고 만다. 그 때문에, 더욱 허무해진 나는 연장을 해서, 조금 더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역시 대부분 똑같은 결말에 허무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래도 오늘 여자는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자신과 연장하지 말고,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테니 한 번 그 여자와 해보라고 권유를 해줬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조금 망설였지만, 마다할 이유도 없어 그냥 받아들였다. 새로 들어간 방에 여자는 여간 곰살맞은 게 아니었다. 조금은 통통하지만, 얼굴은 귀염 끼가 제법 있었고, 말투도 사투리가 약간 있는 게 더 애교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내게 키스를 자연스럽게 허락해주어, 섹스에 몰입할 수가 있었다. 한 이삼십 분쯤 섹스하고서 사정을 하니, 여자가 다소 놀란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자기, 생긴 거랑 다르게 잘하네?’, ‘뭘 잘해? 다들 이 정도쯤은 하지 않아?’,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거의 다 10분도 제대로 못 해.’, ‘나도 원래는 거의 10분 안짝이야. 그런데 자기가 키스도 해주고, 잘 대해주니까 자연스럽게 잘 된 거야.’, ‘정말? 원래 나 키스 거의 잘 안 하는데, 오늘 사실 나 달뜬 거 같아?’, ‘달 떠?’, ‘, 왜 있잖아. 여자 생리가 거시기할 때 막 하고 싶은 그런 거.’, ‘, 또 그런 것도 있었구나. 처음 알았네.’, ‘자기, 여자 안 사귀어 봤어? 그런 것도 모르게.’,‘사귀어 봤지. 그래도 그런 건 잘 안 물어봐서, 잘 몰랐어.’, ‘여하튼 나 완전 달 떴어. 어떻게 할 거야? 자기 때문에 달아오른 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연장할 테니까, 걱정 마.’ 이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리드에 따라 연장을 끊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말 그녀 못지않게 달뜬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정을 하려 해도 사정이 되질 않았고, 발기한 성기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1시간 마감 콜이 울릴 때까지 사정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자기, 진짜 완전 변강쇠네. 안 힘들어?’, ‘몰라, 나도 오늘 왜 이러는지. 오늘 자기가 아니라 내가 달떴나 봐.’, ‘난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자기 괜찮아? 이렇게 가도?’, ‘그럼 어떡해? 자기가 입으로 한다고 해도 나 안될 거야. 얘기했지만 입으로 하면 오히려 내 건 그냥 죽어.’, ‘미안하네. 조금 찝찝하고.’, ‘괜찮아. 다음에 또 올게.’, ‘알았어. 기대할게.’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제 비가 멈추고, 먹구름에 가린 달빛에 조금 어스름했다. 무언가 아직 다 해갈하지 못한 기분이라 답답했지만, 방법이 더 없었다. 나에게 2번의 안마방 연장은 이미 이번 달 생계에 큰 지장을 줄 것이 뻔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연장한다면 또 카드 현금서비스를 이용해야 하고, 그러면 줄지 않은 나의 빚과 함께 더불어, 나는 또 카드 돌려막기까지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잠을 자려 해도 잘 수가 없었다. 아직 해갈하지 못한 욕구로 몸은 뒤척이고, 동시에 은행에서 사랑을 느낀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나 모순된 이 몸과 정신의 분리가 나를 다시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일으켜 세운다. 거기엔 수백 아니 수천 가까운 AV 여배우들이 나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마우스 버튼만 누르면, 나는 언제든지 그녀들을 관음하며, 자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위는 이럴 때 언제나 가장 빠르면서도 안전한 방법이다. 이상하게도 자위할 때면 성행위를 할 때보다 훨씬 빨리 사정한다. 맺혔던 정액을 훌훌 풀어낸다. 그런데도 자꾸 그녀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안마방의 그녀인지 은행의 그녀인지 더 이상 분간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한 명은 바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다른 한 명은 만나고 싶다고 하여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기 나 또 왔어.’, ‘내 이럴 줄 알았어.’,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힘들게 안 할게. 나 집에서 이미 한 번 빼고 왔어.’, ‘아니, 힘든 건 괜찮은데, 나도 오늘 어차피 몸이 달아올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 계속 자기 생각나더라.’, ‘정말?’, ‘.’, ‘그럼 다시 한번 뜨겁게 해볼까?’, ‘에구, 밝히기는.’ 그녀를 품에 안고서 천천히 키스를 한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은 나의 성기의 귀두에 닿아 이제 슬슬 문지르면, 발기가 되어야 할 텐데. 이게 무슨 문제인지 잘 서질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서 자위하고 온 게 영향이 있는 거 같다. ‘, 이상하네. 아까는 그냥 손만 대도 벌떡 서더만, 지금은 왜 그래?’. ‘집에서 하고 와서 그런 거 같아. 괜찮아. 안 해도. 그냥 이렇게 안고 키스만 해도 좋아. 그러다 자연스럽게 서면 하는 거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녀는 내가 하자는 대로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 때문인지 나도 마음이 편해져 술술 이 얘기 저 얘기를 떠벌렸고, 정말로 안 해도 괜찮은 기분까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1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고 이야기만 한 것도 그런데, 다시 연장을 끊으니 무언가 미안하고 찝찝한 기분이 그녀 마음속을 지배한 것 같다. ‘자기, 오늘 보니까 웬만해선 잘 안 될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괜찮아?’, ‘뭔데? 말해 봐?’, ‘그런데 좀 변태 같은 짓인데 괜찮겠어? 솔직히 나도 오늘 정말 하고 싶기도 하고, 자기도 잘 안 되는 거 보니까 좀 그렇기도 하고.’, ‘변태 같은 짓?’, ‘, 좀 말하기 부끄러운데.’, ‘뭐가 말하기 부끄러워. 이미 여기서 서로 볼 장 안 볼 장 다 봤는데, ?’, ‘나 좀 맞는 거 좋아하는데.’, ‘? 맞는 거?’, ‘, 이런 얘기한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나 사실 누가 나한테 막 욕하면서 엉덩이 때리고 하는 거 엄청 좋아해.’, ‘정말? 진짜로?’, ‘.’, ‘그럼 지금 나한테 그거 해달라는 거야!’, ‘,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잘하고 못 하고가 어딨어?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 건데. 일단 조금 상상해 봐.’, ‘상상?’, ‘, 이런 건 익숙해지려면 일단 상상하면서 좀 미리 머리로 연습을 해야 해.’, ‘알았어.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볼게.’, ‘일단 상상해 봐. 처음에 내 엉덩이를 살짝살짝 치는 거야. 그러면서 이 씨발년 엉덩이가 맛있게도 생겼네 하면서 내 엉덩이를 꽉 깨물어 줘. 내가 소리를 지르면 좋아서 지르는 거니까, 바로 자기 자지를 넣어서 뒤치기 해줘. 내 머리카락을 뒤로 확 당기면서 씨발, 죽어, 죽으라고 하면서 계속 세게 넣어.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거야. 평소 안 해봤던 거 중에 뭐 해보고 싶은 거 없어?’, ‘? 해보고 싶던 거?’ 머릿속에 여러 가지 AV 동영상 장면이 맴돌았다. ‘목 조르는 거 해보고 싶어?’, ‘?’, ‘.’, ‘그건 나도 안 해봤는데. 알았어. 그럼 자기가 하고 싶을 때 목을 졸라봐. 대신 너무 힘들면 내가 벽을 칠 테니까, 그때는 살살해.’, ‘알았어.’, ‘그렇게 하다가 내가 달아오르면 자기한테 항문에 넣어달라고 할게. 자기 그렇게 해본 적 있어?’, ‘아니, 없어.’,‘해보면 알 거야. 기분 째질 거야.’, ‘, 나도 그렇게 얘기는 들어봤어.’, ‘자기 또 뭐 해보고 싶은 거 있어?’, ‘안에 싸는 건, 안될 테니까, 내가 하다가 마지막에 자기 입에 싸게 해줘.’, ‘입에? 자기 입으로 하면 금방 죽는다며?’, ‘아니, 자기가 입으로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자기 입에 대고 하다가 싸는 거, 안 될까?’, ‘, 알았어. 또 딴 건 없고?’, ‘모르겠어. 하다가 생각나면 그냥 해볼게.’, ‘상상하니까 어때? 자기 벌써 섰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아주 부드러우면서 농도 있는 톤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 때문인지 이제까지 전혀 꿈쩍도 안 하던 내 성기가 그녀의 이야기 흐름에 따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발딱 섰잖아. 할 수 있겠네.’ 마음이 무언가 찝찝했지만, 이제 와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이미 내 몸이 그녀가 말한 그 모든 것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말한 대로 그녀와 뒤로 하는 자세에서 시작했다. 그녀가 요구한 대로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엉덩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씨발년아! 죽어!’, 발설하며 그녀의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씩 박동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거기에 맞춰 그녀의 신음도 커졌다. 천천히 그녀 목으로 내 손을 가져갔다. 너무 세게는 말고, 그렇지만 약하지는 않게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의 힘겨운 신음이 새어 나오지 못하고 내 움켜쥔 두 손에 진동으로 맴돌았다. 그 진동이 거세질수록 내 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고, 내 피스톤 운동도 거세졌다. 마지막 내 두 손아귀로 그녀의 목울대의 힘줄을 거세게 움켜쥐었지만, 그녀는 힘에 겨운지 몸을 뒤틀다 결국엔 벽을 쳤다. 그대로 엎드려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다시 섹스를 시작했다. 거의 절정에 달했을 쯤 그녀의 항문 속으로 내 성기를 넣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온몸에 저릿하게 느껴졌다. 금세 거의 바로 사정하기 직전까지 갔다. 엎드려 있는 그녀를 급히 돌려, 콘돔을 벗기고, 그녀 목으로 내 성기를 가져갔다. 미친 듯이 그녀 입속으로 내 성기의 피스톤 운동을 하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죽어, 제발 죽으라고. 씨발! 제발 죽어달라고!’ 동시에 내 정액이 그녀 입속으로 넘쳐흘렀고, 그녀는 힘에 겨웠던 듯 살짝 내 성기를 깨물었다. 그리고 조금 역겨웠는지 세면대에 가서 입을 헹궜다. 금세 돌아온 그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을 내 성기로 가져와, 더 나올 것도 없는 정액을 모두 훑어냈다. 머리가 주뼛 서는 기분이었다. ‘, 좋다. 나 처음이야 여기서 이렇게 한 거.’, ‘나도 처음이야. 아니, 이런 식으로 한 자체가 처음이야.’, ‘어땠어?’, ‘솔직히 말하면 너무 좋았는데, 잘 모르겠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좋으면 좋은 거고, 싫음 싫은 거지.’, ‘그러니까 좋았다는 이야기야.’, ‘, 나도 진짜 좋았어.’,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자기는 정말 좋아. 맞고 이렇게 욕 듣는 게?’, ‘.’ ‘?’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말을 삼켰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궁금하구나? 왜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지?’, ‘, 조금.’, ‘그럼 자기한테 다시 물어볼게. 자기는 나 때리고 욕할 때 싫었어?’, ‘처음엔 조금 그랬어. 자기도 느꼈겠지만 그래서 세게 욕하지도 세게 때리지도 않았잖아.’, ‘그런 사람이 그렇게 목을 졸라? 그리고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자기 아직도 나하고 하지도 못했을걸?’ 맞는 말이었다. 그녀와 그렇게 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의 몸은 이미 달아올랐고, 그녀와의 행위는 솔직히 내가 이제까지 맛볼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그런데 왜 자꾸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까? 그리고 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내게 살갑게 굴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이미 나의 마음을 눈치챘으리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벌써 새벽 4시쯤 시간이 되었고, 비는 완전히 그치고 구름이 개어 한가위 대보름을 앞둔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달떴다는 말과 함께 달을 품은 여자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묘하게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뉘앙스의 이야기이다. 하나는 달이 차오르면서 음기가 절정에 달했다는 이야기이고, 하나는 그 음기를 잘 보듬는 어느 여인의 그림을 그려놓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남자인 내게 있어 달이란 무엇일까? 서양 전설에 늘 만월이면 등장하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있다. 그 늑대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때론 할머니로 변장하여 소녀를 잡아먹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달을 품은 남자에 관한 설화나 전설은 없다. 아니, 내 개인은 어디서도 그런 설화나 전설을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남자란 존재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불명확한 구분 속에 놓인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포식하고, 공격해야만 애끓는 피를 잠재울 수 있는 동물이면서도, 인간이고도 싶은, 그런 이유로 자꾸 어이없게도 사랑을 갈구한다. 애초에 키스를 원한다는 자체가, 궁극적으론 사랑을 원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물론, 여기에 덧붙일 변명과 수많은 이론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관계 속에서, 폭력을 행함으로써 희열을 느꼈고,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질내 성교를 벗어나 항문 성교를 함으로써, 남녀 간 사랑의 구분을 스스로 깨뜨렸다. 정작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느니, 성적 소수자를 인정해야 한다느니, 수없이 쉽게 지껄였지만, 당장 내 자신의 문제로 화살이 돌아오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이것이 너무 확장된 해석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 그동안 내가 믿은 사랑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나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AV 동영상을 통해 조금씩 확장된 나의 모든 그 욕망을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거기서 이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폭력이 가미된 사랑도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오늘, 아니 이제는 어제 느꼈던 뜬금없던 가슴속 떨림은 무엇일까? 갑작스럽게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스스로 믿고서,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 재고했던 나의 어이없는 관념들은 다 거짓이 되어버린 걸까? 아니다. 결코,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쾌감에 대해 나는 무어라 내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간과해버린 사실은 무엇일까? 왜 사랑을 추구하는 섹스에서 죽음을 추구하는 폭력으로 나는 극도의 쾌감을 느꼈던 걸까? 생각보다 답은 명확하다. 사춘기 때부터 자위를 하면서 시작된 죄악감, 그 죄악감은 다름 아닌 섹스가 사랑이 아닌 죽음에 가깝다는 인식을 자기도 모르게 가졌기 때문이다. 허공에 흩어지면서 수없이 휴지 속에 파묻힌 정액 덩어리들이 하나의 생명이 되지 못하고, 모두 매장되어버려야 한다는 사실, 여기서부터 나는 섹스에 사랑이 아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인식했다. , 하나의 생명 도달하기까지 숱한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감당하기 위해, 아니 죽음을 포식하기 위해 짙은 그림자의 맹수는 달이 뜨면 늑대처럼 길게 포효하며 몬스터로 변신한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빨간 망토를 둘러싼 차차인지, 아기 돼지 삼 형제인지, 그 누구이든 상관없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포식하는 것만이 맹수의 길이며, 본능이다. 그런데 알고 있는 걸까? 그렇게 득달처럼 먹어 치운 만큼 자신도 죽음과 가까운 형상으로 닮아간다는 그 사실을. 이 불쌍한 맹수는 자신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형상들 가운데 자신의 형상을 본다. 그리고 만월이면 달빛 가득한 혼령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다. 이미 자신도 그 혼령들 가운데 하나임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달이 지고 태양이 뜨는 아침이 되면, 원래대로 돌아와, 전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의 피 묻은 손을 씻고, 또 씻는다.

 

  추석 연휴 동안 나는 깊고 깊은 잠을 잤다. 꿈속에선 은행원 여자인지 혹은 누군지 모를 내 사생아들이 토끼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밑도 끝도 없이 번식해가는 토끼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입을 모아 찍찍 소리를 내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처럼 변하면서, 땅속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무한대로 기어올라 나왔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땅속에서 나오는 두더지를 때리는 게임처럼 쥐새끼들을 지워나갔다. 그렇게 몇 날 며칠 토끼인지 쥐새끼인지 두더지인지, 아니면 내 새끼인지 남의 새끼인지도 모를 새끼들이 수없이 번식하며, 사라져가는 꿈을 꾸다 연휴가 끝났다. 그리고 출근을 했을 때 뜬금없이 사랑을 느꼈던 은행원 여자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이 달밤에 홀린 혼령 이야기처럼 허탈했다. 그렇게 맥없이 은행 정문에 서서 가만히 은행 유리문 사이에 흐릿한 내 형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없이 투명하면서도 나와 비슷한 그 형체는 언젠가 거울을 통해 마주할 내 도플갱어처럼 어렴풋이 나를 마주하며 마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앞으로도 영영 쉬 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투명한 그림자라 명명하기로 하고서, 모든 꿈에서 비로소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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