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텔지아 -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에 대한 고백


 

 설령, 길 위에서만 살다 길 위에서 죽어버릴 구도자일지라도, 혹은 영원히 이방인으로만 살다가길 원했던 까뮈의 뫼르소일지라도, 그리고 빈집을 견딜 수 없어 낡은 외투 하나만을 꼭 부여잡다 겨울 빛깔처럼 투명하게 어느 봄날에 분질러져버릴 젊은 시인일지라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란 것은 늘 있게 마련인 법이다. 비록 그들에겐 돌아가야 할 집도,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의미 없음 너머에 까닭 모를 설움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라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목마름 같은 그 그리움들이 너무나 컸던 그 이유로, 메말라 진 까닭인지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리움 하나쯤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이유를 알고 싶어, 목이 마르고, 그렇게 목마른 이유로, 어떤 이들은 끝내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고, 메말라 간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늘 그 그리움의 이유들을 알고 싶어, 목이 말랐다. 그리고 그런 목마름 가운데 오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한 사람의 목마름과 마주해 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맨 처음 만난 것은 영화 '희생'에서였다.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들과 너무나도 심각한 종교적인 냄새들 그리고 광기와 어우러진 화두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주인공 알렉산더 교수가 자신의 여자 하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후, 깨어나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과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준다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라는 대사는 매우 인상 깊게 각인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이 때문에 그 후, 난 그의 영화들을 다시 어렵사리 구해보기 시작하였고, 그런 와중에 영화 '노스탤지어'를 통해 그의 목마름과 광기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이해가 영화사 속에서 독특하게 '완벽한 영상시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맥을 짚는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잡고서 큰집의 기둥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목마름의 이유들을 그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일 따름이지 해석이 아니라 생각해 보기에, 지금부터 천천히 그의 영화 '노스탤지어'를 따라,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들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영화는 처음 먼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어느 벌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이탈리아로 나와 있어, 쉽게 이탈리아의 어느 벌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타르코프스키라는 인물의 성격상, 개인적으로 여기부터가 분명 예사로운 조짐은 아니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노스탤지어 즉 향수이며, 지평선이라는 것은 닿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들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러면서 영화의 두 주인공 코르차코프와 유제니아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서 영화 화면에 처음 잡히었던 지평선의 풍경을 따라, 어느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장면을 카메라의 시선이 고정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서게 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코르차코는 18세기 러시아의 작곡가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신의 여자 친구이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이탈리아어를 통역해줄 유제니아와 함께, 소스노프스키가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온천 마을 바뇨 비뇨니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뿐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도 매우 복잡하게 영화와 엇물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얽혀 있는 실제 상황이다. 소스노프스키라는 인물의 경우, 18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러시아의 유명한 노예 신분의 음악가였는데, 지주의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왔다가 이탈리아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유 뿐 아니라 부와 명예 그리고 직위까지 그 모든 것을 보장받게 되지만, 고국인 러시아를 잊지 못해, 다시 노예 신분으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러시아로 돌아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소스노프스키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만든 직후, 러시아에서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상황은 미래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게 될 타르코프스키 자신에 대한 진중한 고백이 담긴 예감과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선 내내 향수에 대한 이상스런 이야기들과 더불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마을과 고르차코프의 고향 러시아의 이미지가 몽환적으로 교차되어지면서, 극대화된 그리움의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가 여기서만 머무른다 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러한 향수 속에 숨겨진 궁극적인 그리움에 대해 묻고 있고,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 영화 속에선 전혀 새로운 인물 도메니코가 등장하게 된다.

 

 

  어느 날 유제니아와 함께 온천 주변을 거닐던 코르차코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도메니코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7년간이나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가두고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생각하며 홀로 지내고 있던, 말 그대로 완전한 미치광이였다. 그런데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면들에 대해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심지어 그는 이 때문에 영화 내내 마치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애인 사이로 함께 하던 유제니아와 결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도메니코도 세상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코르차코프는 생소한 이탈리아 마을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스노프스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서 떠나려는 찰나, 우연히 로마에 머물고 있던 유제니아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도메니코가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며칠째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그와 동시에 그(도메니코)가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분신자살을 시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떠나기 전, 코르차코프에게 이야기 한 내용이었다. 무엇이냐 하면, 도메니코는 인류에게 종말이 올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러한 인류의 종말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선 로마와 자신의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코르차코프에게, 자신이 로마에서 분신자살을 할 때,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촛불을 켠 채 꺼뜨리지 않고서, 온천의 맨 처음 위치한 장소에서부터 끝까지 들고 가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말들에 대해 진지하게 듣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여행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유제니아와의 통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코르차코프는 떠나려는 걸음을 멈추어, 다시 마을의 온천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날까지 말짱하던 온천이 완전히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코르차코프는 실제로 도메니코의 말을 믿게 된 듯, 도메니코가 로마의 광장에서 우스꽝스럽게 분신자살하는 그 순간,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마을의 온천에서 촛불을 켜고선 조심스레 걷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러한 코르차코프가 바람에 자꾸 꺼지는 촛불을 다시 켜기를 반복하면서, 온천의 처음지점부터 끝지점까지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성공한 코르차코프의 희망을 발견한 얼굴과 함께, 갑자기 전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궁전처럼 생긴 어떤 커다란 집 가운데 앉아 있는 코르차코프의 모습을 잡으며, 영화를 끝마친다.

 

 

  이제 복잡하고 기괴한 그리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영화의 얘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시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 속에서 시인 코르차코프가 이미 던진 질문이지만, 소스노프스키는 왜 자신이 다시 노예가 될 줄 알면서도 고향인 러시아로 되돌아 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것일까? 대체 고향이라는 것이 어떤 힘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보통 자유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 동안 너무나 많이 접해 왔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되어 졌든, 혹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대리 만족을 주었던 간에,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자유란 것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과연 자유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자유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도달하고파, 자신의 뿌리 깊숙이 박힌 대지를 버리고서, 하늘을 향해 이카로스와 같이 나래를 폈을 때, 태양에 아스러지는 자태와 유사한 문제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뿌리 깊숙이 박힌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무한한 자유로의 상승을 꿈꾸지만, 자유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는 어이하지 못하고, 다시 자유에로의 한없는 비상을 꿈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 자신이기도 한 코르차코프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등지고서, 오직 소스노프스키로 대변되는 자유와 궁극적인 그리움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는 방랑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매몰차지 못하게도,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의 풍경, 가족의 모습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인 샘(온천)과 러시아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유제니아와 같은 존재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망명을 결심하고 있던, 타르코프스키의 미리 예감된 계산과도 같은 복선이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버리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때, 극심하게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완성한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하였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온천 마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향수병에 시달리던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세상의 종말을 믿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결국 왜 그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촛불 하나를 들고, 온천을 걸어간 것일까?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자유에로의 관심이, 그들의 향수의 대상인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고향과 연관되어져 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그 고향이라는 것이 조국 러시아를 넘어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것임을 우린 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떠남이라는 것은 자신의 거추장스런 뿌리를 자르고서 바람을 따라 나래를 펴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깊게 뿌리내리기 위함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저변에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뿌리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그대가 곁에 있다고 해서 그대가 그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대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누구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애초부터 무언가 상실한 채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체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목마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그 대상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그러니 어느 누가 영화 속에 우리의 그리움의 원천인 이탈리아 마을의 작은 온천이 하루아침에 메말라 버리고, 그 때문에 이 세상이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고 하여, 그것이 거짓이고, 가짜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도 모르고 날뛰는 방랑자와 미치광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느 시인은 자신에겐 조국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시인은 자신의 집이 비어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속에서 사랑을 잃었음을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스무 살 적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 보다 귀중한 내 자신의 진실을 찾고자, 집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과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마저 버리고서 길을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 알아졌던 것은, 나에겐 이미 그것들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돌려놓고자 하는 내가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분명히 그랬고, 그러하기에 지금 역시 그러한 나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하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그리고 그 누군가들은 쉽게 발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모든 그리움 끝에서조차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게로 쪼르르 되돌아오거나, 그 목마름 끝에서 견뎌내질 못하고 분질러져 버리는 것일까? 먼 지평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경계는 정녕 우리의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한량없는 질문들 끝에서 도메니코와 같이 스스로 불살라 질 이들을 생각할 때면, 난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껏 고백했던 그 모든 진실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하고만 싶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모든 것들은 희미해져버리지만, 그럴 땐 도메니코를 대신해 불살라질 촛불 하나를 켜고서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코르차코프처럼, 내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돌아갈 집에 밤새 떠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태양 끝에 가 닿고자 나래를 펼쳤던 어느 벼랑에서 되돌아 선 그 걸음으로,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것이라고, 그 품에서 모두 살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나도 아직 꺼놓지 않을 불빛 하나쯤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비록 나 역시 코르차코프처럼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목마른 광기 그 이상 그 무엇도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메니코와 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을 위해 촛불을 켜보고 싶은 것이다. 단 하룻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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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만세 - 자위, 섹스 그리고 그 너머


 

 애정만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9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써 우리에게도 선보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대만 영화인데다, 당시 기준으로 보통 비디오대여점에 들여 놓을 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해서 전혀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영화 꽤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군대를 제대하고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밤마다 학교 주위를 배회할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학교를 자퇴한 괴짜 선배를 알게 되어, 그 선배의 소개를 통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나는 그 선배와 함께 그 때까지 이름만 듣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영화의 평생 분량을 거의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사를 좔좔 꿰게 되었지만, 그런 우리조차도 그 영화를 보고선 머리가 띵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체 이게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유럽 예술 영화처럼 알레고리와 상징이 가득한 관념적인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우리는 갖은 폼 잡으면서 영화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고, 아는 지식 모르는 지식 총 동원해, 피 튀기는 토론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촬영 기법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상이 남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거의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수준... 물론, 장선우 감독의 실험 정신에 대해 내가 평가 절하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그 만큼 허무하고 허탈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는 영화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현재 그 선배도 나도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버둥거리고 있고, 또 그 만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변했을 것이다. 뭐 이젠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굳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자체가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이제 나는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 사회를 배회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뭐랄까..? 제법 고대 하늘나라를 배회하던 신학생의 때깔을 벗고, 현대 사회인 흉내를 낸다고 할까? 그러면서 이제야 나는 이 영화가 이야기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 한 남자가 어느 아파트 열쇠 키를 훔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보아하니 그 남자 행색은 번듯한데, 어디 오갈 때가 없는 모양인 것 같다. 그래서 아직 분양이 안 된 아파트의 열쇠 키를 훔쳐, 잠시 동안 그 집에 기거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제 집 인양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데... 아니, 갑자기 웬 칼? 이 남자 사는 게 힘들었나?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디 자살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눈을 찔끔 감고서 칼을 손목에 가져가 보지만, 쉽게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칼을 손목에 다시 가져가 보지만... 도저히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할 거 같은데...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이 영화 주인공이 아닌가? 하고 잠깐 의문을 달 새, 순식간에 카메라는 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이십대 후반의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사람이 북적대는 어느 밝은 카페, 한 남자가 앉아 느긋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 옆에 마치 중경삼림에 임청하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문다. 보아하니, 섹시한 모양이 보통이 아닌 아줌마!^^;; 그래서 인지 옆에 남자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뗀다. 그리고서 여자가 자리를 뜨니까 웬 미행? 첩보영화인가? 여하튼 조금은 백수건달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갈 길을 가는데... 갑자기 조금 수상쩍은 느낌에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자기도 갈 길을 간다는 듯 자연스럽게 공중전화 박스로 가 전화를 건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첩보영화 공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자가 그 사이에 도망가지를 않고, 남자가 전화를 거는 전화박스 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장면은 바뀌어,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아파트에 들어서더니, 서로 굶주렸던 듯 급하게 옷을 벗으며, 애정행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집은 자살 시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몰래 들어가 있던 집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하던 남자는 깜짝 놀라, 자살하다 말고 옷가지를 급히 챙겨 입고선, 잠시 그 집안에 다른 남녀의 불꽃 튀는 사태를 파악한 후, 몰래 도주를 해버리고.... 두 남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며... 어느새 다음 날 아침...

 

 

  이제 영화는 대충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는 알고 보니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여자고... 그래서 그 아파트도 그 여자가 관리하는 집 중 하나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을 하던 남자는 납골당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인데, 조금 사회 부적응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하나는 밤에는 시장 바닥에서 노상 판매를 하지만, 거의 말 그대로 백수건달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백수건달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갖은 후, 또 몰래 그 아파트 키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꼬셔 보려고 하는 거 같은데... 여자는 뒤가 깨끗한 여자인 듯, 별로 그 백수건달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엔 조금 바빠 보이는 것도 같고... 여하튼 간에 그것은 둘째 치고, 그 백수건달 남자가 열쇠를 훔치게 됨으로써, 이제 그 빈집에 또 다른 기거자인 자살하던 남자와 마주칠 일만 남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처음엔 서로 둘 간의 존재를 몰라, 두려워 하다가, 둘 다 그 집 주인이 아닌 객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둘이 동맹을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래 그 집 주인은 아니지만 임시적으로 그 집의 관리자인 여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둘은 서로 공생하게 된다. 여자의 빈 집에 혹은 여자라는 빈 집에 제 집 양 기생하면서 공생하는 두 남자 이야기... 벌써 이것부터가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집에 기묘한 동거자인 두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한 무언가 알 수 없는 관계의 고리들을 더욱 복잡하게 깔아 놓고 있다.

 

 

  먼저,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자살하던 남자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에서부터 드러나지 않고 중반이 돼서야 드러나는 점으로 보아, 남자는 분명히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고, 또 그로 인해 매우 괴로운 상태인 듯싶다. 특히 게이인 남자의 그런 부분을 영화는 성적인 억압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범한 아시아의 사회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고서, 정상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차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늘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은 게이의 자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는 순간, 분명히 그 남자로부터 버림받거나, 동물 취급받을 것이 뻔한 게이.... 그러니 게이는 같이 동거하게 된 백수건달 남자에 대해서 이상한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표출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끊임없이 자위의 세계로 탐닉해 들어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미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그 특유의 백수건달 끼를 발휘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귀찮다고 하지만, 혼자서 한 밤을 보내기엔 너무 고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빈 집에 대해 어떤 권리도 없는 부동산 중계인으로서 관리자였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는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 불현듯 느낀 공허함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하다가... 남자가 전화로 슬쩍 언급했던, 남자의 일하는 시장 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배회하다가 다시 남자와 마주쳐, 둘은 자연스럽게 첫 날 관계를 가졌던 그 아파트 그 침대로 다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 게이는 전혀 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자연스럽게 누워있었다. 그러니 다시 자살을 시도하던 그 첫 날처럼 도망을 가야하는데... 벌써 남자와 여자는 그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한 김에 게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리고... 이제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극에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관중으로써 참여하게 된다. 심하게 흔들리는 침대... 여자의 숨넘어갈 것 같은 비명소리... 그리고 그 침대 밑에 숨죽여 자위하고 있는 게이....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아직 잠들어 있고, 여자가 먼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그리고 대충 샤워를 하고선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자연스럽게 그 집을 나선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가 완전히 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게이가 기어 나온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데.... 너무나 안쓰러운 그 모습.... 게이는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더블 침대에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남자의 다른 편에 쭈그리고서 누워,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다본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손길로 매만질 수 있다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분명 게이의 몫은 아니다. 아마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척이던 남자가 갑자기 잠결에 게이가 전 날 같이 자던 여자인 줄 알고, 덥석 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게이는 어이할 줄 모르지만, 왠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 된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참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의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고... 다시 몰래 잠들어 있는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여자가 나갔던 그 문으로 그대로 그 집을 나온다. 그리고서 영화는 다시 장면을 바꾸어, 집을 나갔던 여자의 걸음에 시선을 맞춘다.

 

 

  차에서 내려 어딘 가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 여자... 카메라는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서, 그 걸음 하나하나를 지겹게 다잡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지겨운 기다림 끝에 다시 카메라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서러운 울음? 알고 보니 이 당찬 여자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매우 서럽게... 차라리 펑펑 쏟아내면 더 좋을 것을... 훌쩍훌쩍 참는 것이 더욱 서러워 보인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시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그런 훌쩍거리는 모습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잡아내고 있다. 한 몇 분이나 지났을까? 줄곧 흐느끼던 여자가 이제 제법 자신을 추스르고서 담배를 문다. 이제 영화가 끝나려나 보다. 그런데 이 여자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물고서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영화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아니, 이 허무한 영화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에 생기는 의문들에 대해 물음을 가져보아야겠다. 그렇지만 결코 답을 낼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음이란 건 그 자체로 답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너무 이제껏 답을 요구해 왔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허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이 허무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묻는다. 왜 이 영화는 전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앞에서 이 영화가 나는 결코 유럽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와 게이 그리고 여자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알레고리의 속성이 갖는 어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라든가 귀결은 여기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풍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다소 의도적으로 어떤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주인공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마치 가정용 비디오에 담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영화는 사실적인 것이다. 다만 간간이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 매우 길게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주인공 여자가 모기 한 마리에 갑자기 자신의 멍한 상태를 자각하고 모기를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이라든가... 남자가 게이에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고작 게이가 남자와 함께 간 곳이 게이의 직업과 관련된 납골당을 판매하는 곳이라든가... 분명, 이런 장면들은 은근히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풍자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것들은 부차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현대인들의 애정에 대해서 섬뜩하리만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게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게이는 그 특이함으로 인해 쉽사리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정의 형태가 아닌, 다소 특이한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이의 그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의 다른 표현인 성적인 억압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영화의 게이처럼 자신의 성적인 욕망의 정체를 쉽사리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회사나 혹은 동료라는 정상적인 관계 사이에서 간혹 느끼는 성적인 욕망을 우리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가? 결혼한 사람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고, 또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수시로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성적인 욕망을 모두 분출한다면,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가지만... 여하튼 간에, 우리는 제도든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쉽게 발설하고 행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흔히 변태라고 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짐승 보듯이 본다. 왜냐하면 엄연히 사람과 짐승은 욕망을 대함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게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니라고는 말해도 짐승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때론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영화에서의 게이처럼 자위로 분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법 온당해 보인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여자 옷을 입고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다던가, 혹은 수박을 먹다 말고 수박 껍질로 자신의 볼 살을 비비며, 자신의 뜨거운 미열을 시원하게 달래준다던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자신도 짐승 취급당하지 않고...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우리는 외롭다는 사실이고, 또 그것은 왠지 진정한 육체에게로 가지 못하는 자기비하와 수치스러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자는 혼자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 능글맞은 백수건달 남자를 다시 찾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갈했으면 끝이지, 왜 또 서러워서 그렇게 길가다 말고 어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사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조차 성적인 욕망은 쉽게 표출되고 대변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미국의 영화들에서조차 완전한 포르노 급의 XXX등급 영화를 제외하고는 성적인 표현이 자제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위는 죄악시되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슬슬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도 성적인 표현의 수치가 그 강도를 높여가고, 그와 비례해 당연히 자위하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자위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지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위가 이젠 자신의 몸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화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1970년대 어느 영화에선 헬기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대고 자위하는 여자가 등장하게 되고, 90년대엔 영화 클러쉬에서 자동차의 속도감을 통해 자위하는 남녀가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애정만세에서는 수박에게 자위를 하는 우리의 게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의 성적인 욕망의 대상과 깊이는 확장되었으며, 이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의 육체의 소외 현상과 더불어 성적인 억압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심각해졌다는 증거가 되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비해 훨씬 비대해진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우리들의 육체 뿐 아니라 모든 세계로 확장되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가치관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은 전혀 바뀐 것이 없어, 우리는 모두 그 커다란 차이 속에서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우리 자신은 헬기의 표면과 자동차의 속도 혹은 수박에 대고 자위할 만큼 스스로 변태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생각이다. 성적인 욕망만 비대해져 자신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한다면, 아니 책임질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속 편하게 자기 자신은 이런 변태가 아닌 건전한 정상인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들 그렇게 외롭다고들 난리란 말인가? 과연 그 말이 말 그대로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분명, 자기 자신은 변태가 아닌 정상인인데, 그래서 그냥 혼자라서 외로운 것뿐인데도, 자꾸 다른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헬기나 자동차는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표출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표출 시, 자신도 모를 상실감과 수치감에 다시금 자신 앞에 커다랗게 구멍 나있는 성적인 욕망의 크기와 부피를 대면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영화에서의 여자처럼, 그러한 자기 자신의 성적 부피에 비례해, 너무나도 소심한 자신의 결단력을 인정하게 되고, 완전한 백수건달 남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여기서 참고 다시 자위로 함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분명, 자위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자위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어떤 다른 대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혼자 목욕하다 말고, 새벽 거리를 뛰쳐나와 남자와 해묵은 격정을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자는 서럽게 흐느낀다. 대체 왜? 그것이 그녀가 원한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자위로 대충 자기 자신을 달래고 말지, 뭐 하러 서러운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아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냥 애초에 애정이라는 것, 섹스라는 것이 어차피 자위와 비슷한 서러운 것이니까, 그냥 혼자서 외로울 순 없는 것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섹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오직 애정만이, 섹스만이 우리의 권태로운 삶을 구제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여자의 처절한 울음조차도 또 다시 반복되는 그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애정이라는 것도 없으면 너무나도 권태로워 도저히 어떤 의미도 발견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현대인은 이 애정이라는 굴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위의 굴욕감과 도발적인 관계 후 오는 해묵은 육체의 설움 사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아이러니들이란 말인가?

 

 

  군대를 제대하고서 지난 방황의 흔적들을 다 지우지 못하고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른 사람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새벽 그 어두웠던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쳐 흐드러진 정사라도 할 수 있다면... 늘 자위일 수 없는 이유를 묻고, 차라리 그곳에서 안위하기를 바랐지만,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나의 육체와 마음은 그렇게 그 거리에서 서성이다, 아침이면 제풀에 지쳐, 좁은 방안으로 기어들어가, 새우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천천히, 자위 일 수 없는 이유를 포기하고, 자위 밖에 안 되는 내 욕망의 한계에 대해 수치스러워하며,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그 때 섹스 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신학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몰래 담배를 태우러, 지나치던 학교 바로 옆 골목길에서... 나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슬프다는 내 관념보다 앞서, '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양 볼에 까닭 모를 눈물이 떨구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을 차리고서 너무나도 부끄러워,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선, 재빨리 그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당도한 것은 항상 담배를 태우던 놀이터 벤치였다. 그래서 거기서 마음을 추스르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무는데... 다시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마치 해묵은 격정을 풀고서 서러웠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여자처럼... 그러하기에 다시 부끄러워진 나는 겨우 울음을 참고서, 나를 울린 목련 나무 한 그루를 다시금 몰래 올려다보았다. 벌써 봄날이 다 지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기라도 한 듯 목련나무에 잎새들은 다 떨어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새들만 여전히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다만 그 시린 가슴으로... 꽃잎이 다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희망의 가지라도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그런 것이 삶이라고.... 자위가 자위를 넘어선 어떤 그리움일 거라고, 그럴 것이라고... 나는 다시 자위일 수 없는 이유들을 되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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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 루오의 '파랑새'의 거룩함과 광기의 선상에서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어느 해변가,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제 1번 중 "아다지오". 영화의 처음은 이렇게 무언가 절망스러운 전조가 뒤엉킨 듯 메마른 인상과 함께 시작된다.

 

 

  잉마르그 베르히만, 종교 영화의 거장 칼 테어도어 드레이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루이 브뉘엘과 함께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영화감독으로써 우리에겐 ‘제 7의 봉인’,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 연작물인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등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감독이다. 사실 이 사람의 영화를 구해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종교 영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한 논문을 써보고자 했기에, 겨우 구하여서 난 그의 작품들 몇 편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 그의 작품은 매우 지루하였다. 그러니 심각하게 종교로 고민하지 않는 경우나 영화사를 공부하기 위해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 난해함에 미처 영화를 보기 전 질려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의 영화 속의 어떤 발작들은 뇌리에 각인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은 그 전에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전통에 서있던 서구 영화사에 있어서 시각적인 효과에 의해 각인되는 예술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남겨주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새 흔히 말하는 탄탄한 내러티브의 구축 대신, 영상 자체가 남겨주는 시각적 효과의 효시가 되어준 일련의 선각자 중 두드러지는 한 사람이 바로 잉마르그 베르히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또한 매우 조각, 조각난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하나의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면서 어떤 의도도 전면으로 부인한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예술 영화들과 달리 흐릿한 의도를 내세우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흐릿한 의도 혹은 뉘앙스가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의 발단은 어느 불안한 가족의 위장된 평화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작가인 아버지, 종교와 현실 속에서 미친 딸, 그리고 그 딸의 성실한 남편, 끝으로 연극에만 몰두하고 있는 막내. 무언가 벌써 불안하고 불길한 조짐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맨 처음 영화화면 속에선 잘 드러나진 않는다. 오히려 마치 여느 가족들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그들은 해변에서 같이 해수욕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오후 시간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된 평화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작가인 아버지는 이제껏 글을 쓴다는 핑계로 늘 가족을 버려두었었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했다. 그리고 딸은 정신분열이 점점 심해져, 밤과 낮에 다른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성실함의 대명사인 그의 남편은 그것을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다. 게다가 막내는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의사소통이 서로 단절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든 마치 평범한 가족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들의 오후 한 때를 그들은 갖은 연극의 설정으로 견뎌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들의 아버지가 다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사자인 아버지는 떠날 생각을 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의 정신분열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을 글로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여기서 첨가해서, 더 한 가지 어이없는 상황은 이 잘 나가는 작가 양반의 부인 또한, 딸과 같이 똑같은 증세로 괴로워하다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가 늘 자신의 부인을 버려두었기에 나타난 현상으로써, 영화 속에선 남편을 잃은 여자가 종교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귀결을 몇 마디 대사 속에서 은근히 암시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증세가 그 자신의 딸에게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 부인의 경우에는 그는 두려움으로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결국, 부인이 죽자, 그는 그 자신에 대한 비겁함으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 모든 글을 포기하고서 자살 시도까지 하려 하였다. 그런데 돌연 그 순간, 그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이제 또 다시 그의 딸에게서 자신의 부인에게서 보았던 똑같은 증세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두려움에 맞서고자 하지만, 다시 딸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글로 형상화하려는 이기적인 욕구와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처음 영화 속에서 딸은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집안 식구 중 가장 따뜻하고, 정상적인 심성의 소유자처럼 생각이 될 정도이다. 그런데 밤이면 갑자기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던 이부자리를 걷어차고서, 하나님이 계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선 그 방 장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혼자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기도 내용은 장롱 너머의 세계와 이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지고 있다. 그녀는 장롱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시녀로써 시중을 들고 싶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아직 자신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무능한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그 속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기도가 끝마쳐질 때쯤, 그녀는 거의 성적 오르가슴의 모습과 닮아 있는 형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선, 다시 잠들어 있는 남편의 옆자리로 가 잠이 드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분명 그녀는 남편과 잠자리를 가져 본 지는 꽤 오래 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녀는 남편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몸과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곳곳에 숨겨진 가족들의 끔찍한 상황들은 이제 드디어 버텨 내질 못하고, 표면에 드러나 지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다 보고선, 아버지가 자신의 내면적 불안을 글이라는 노리개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가 섬 밖으로 물건을 사러 간 틈새에 다시 분열을 일으켜, 자신의 남동생과 잠자리를 가져버린다. 그리고 순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동생이자 막내는 절망을 표현하기조차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와 매형이 돌아오자마자 이 사실을 알리고선 발작을 일으킨다. 영화는 끝으로 그렇게 분열된 딸과 그녀의 남편이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남은 막내가 정신을 차린 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를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이야기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실타래를 일일이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의 화면과 독특한 이야기가 우리 뇌리에 꽂히는 발작들을 어설픈 심리치료로 정화하고자 하는 유치한 수작일 것이다. 영화는 다만 혼돈을 일일이 해결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채, 심각하게 뭉뚱그려지고, 헝클어진 형상으로 실존하고 있는 삶의 정체 모를 불안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에 대해서 살며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하고, 왜 이렇게 불안하고 기괴한 전조들로 이야기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작가가 명확한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어떤 말이 아닌, 그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 개인은 루오의 '파랑새'를 떠올려 보았다.

 

 


 

 




  일단, 루오의 경우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로써, 유명한 현대 종교 화가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파라 함은 어떤 기존의 회화가 지닌 배경, 구도 그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두고서, 색채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유파라 하면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경우, 유독 어떤 한 색채가 지니는 감각과 정서들에 주목하여, 강렬하거나 세련된 이미지적인 그림들을 자주 선보이곤 하였다. 특히 루오의 경우, 그 자신의 독실한 종교성으로 인해 색채 자체 속에 숨겨진 종교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내었다. 보통 매우 어둡고 침침한 그의 그림들 속에선 고뇌의 형상으로 가득한 그리스도나 창부들 그리고 광대들이 많이 보여 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매우 독특한 '파랑새'라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눈을 살짝 감고서, 고개는 약간 비틀린 채, 반은 하늘에 가 있고, 반은 지상에 닿아 있는 듯한 일종의 성녀상이라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성녀상이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는 일상성을 박탈당한 거룩함으로 인해 어떤 호러틱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루오의 '파랑새'의 경우 도리어 그런 호러틱한 분위기보다 성녀 그 자체가 세상이라는 호러 앞에서 반은 몽환으로, 반은 생의 의지라는 분열된 모습으로 견뎌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즉, '파랑새'의 그녀는 외로움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이 땅의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들의 성녀는 르네상스시대의 그 세상을 품어 안던 대자대비 하던 모습을 버리고서, 이토록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나락해 버린 것일까? 그리고 왜 그녀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서 지상의 발을 반쯤 담그고서, 힘겨워 하고 있는 것일까? 비단 이것은 루오의 그림 뿐 아니라 현대 화가들의 성녀상들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시 영화로 이야기를 넘어와 우리의 주인공인 작가 아버지의 딸, 그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장롱 속의 하나님의 세계로 도피하였던 것일까? 일단 영화 전면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와 남편과의 관계는 단절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로움을 신에게서 채웠다. 이것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도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설정되어져 있다. 즉, 한 마디로 그녀는 심한 욕구 불만의 상태를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장롱 속에 하나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에게서 해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여린 동생을 발작케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게도 여기서 그 아버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삶의 새로운 지표를 자신의 아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도 평생 무신론자였던 그가. 그리고 소년은 아버지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문을 통해 어렴풋이 하늘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알아 가는 건 두 부자이지만, 사랑을 하는 건 바로 하나님이며, 정신분열에 걸린 그들의 딸이자 누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들-남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감히 모른다. 그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글과 연극이라는 하나의 관념이고, 유희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그 속에서 사랑에 가 닿아 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할 대상조차 없이 자신의 똬리 속에서 사랑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들의 딸이자 누나인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사랑해야할 대상인 아버지와 동생은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질 않고, 남편은 성실함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녀를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둬두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늘 굶주려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사랑하고픈 갈망을 채우는 방법을 장롱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그럼에도 그 자신만을 위한 절대적 사랑 속에 함몰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들-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동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했던 동생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동생도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처럼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서, 평생 자신의 똬리 속에 숨겨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연속의 과정을 겪은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감히 고백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하나의 종교적 광기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에, 과연 ‘이것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의 성녀 '파랑새'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왜 반쯤 미치게 보이는가? 그녀는 왜 그러면서도 거룩해 보이고, 또 가련해 보이는가? 혹 누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는 끊임없이 지상을 떠나 하늘을 꿈꾸고 있다. 발꿈치를 들어 가슴을 내밀면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녀를 이 지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순결하면서 가련한 그 형상을 내내 드리우도록 발목을 붙잡고 있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들은 그녀를 미쳤다 하며, 자신이 버린 쓰레기처럼 그 어딘 가로 격리시켜 버리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그녀들은 숨겨져 있는가?

 

 

  남자가 보는 여자에 대한 때론 이런 지나친 종교적 입장은 오히려 여자를 더욱 객체로 보게 함으로써, 종국엔 더욱 그 속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그 관념적으로 지저분해진 남자들 혹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우리의 어머니, 누이 등등의 사람들의 반 미친 사랑-만이 거울을 보듯 어렴풋이 사랑이라는 것들에 대해 배워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신의 커다란 버스의 감당할 수 없는 스피드에 치인 소녀의 오그라든 육체를 다른 누구도 품을 순 없지만, 오직 버스 운전사만이 부둥켜안고, 통곡할 수 있듯이. 사랑을 배워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날카로운 갈퀴를 들고서 우리들의 성녀를 찾아 심하게 할퀴고선,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시대에 루오의 '파랑새'와 같은 성녀가 존재하고 있는가? 아님 존재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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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모리스 피알라 감독, 모리스 피알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사탄의 태양 아래서 - 소녀의 순결한 죽음에 관하여

 

 

 '사탄의 태양 아래서', 스무 살 적 기독교 문학이란 장르에 대해 공부하고자하여, 우연히 듣게 된 이 제목만으로도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을 사탄의 태양이라 하고, 것도 모자라 그 아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사탄이라는 악의 실체를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그 제목으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책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작품이 번역된 적은 있지만, 출판사가 망해서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영화를 보게 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 출판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또 다른 작품들인 '기쁨'과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유독,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많이 영화화했던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게 됨으로써, 대충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윤곽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소설이나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너무나 현란한 관념과 몽상이 뒤섞인 이미지들의 축제이기에, 해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너무나도 신학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로 신학적인 고뇌 속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과 영화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 개인적으론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 중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소녀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무언가 간과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내게 각인되어져, 지금부터 나는 이 뭉뚱그렸게 일그러진 이 형상들의 이미지들을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중심으로 해서 쫓아 가보고자 한다.

 

 

  도니상은 무능한 젊은 신부이다. 신학교 시절부터 형편없는 재능과 의지들로 인해 유독 튀었던 그는, 그렇지만 신과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신부이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깊은 신앙적 고뇌의 한 가운데 던져져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 신부 밑에서 보좌하고 있는 교구 생활조차도 매우 적응해하기 힘들어하며, 늘 수도원에서 은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깊은 신앙의 고뇌로 인해 일반 신도들에게서 신이 날마다 처참하게 외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하.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는 신을 그는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신을 자책하며,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다시 그 때문에, 그의 건강 또한 사제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돕기 위해 늘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자신을 궁지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절망의 궁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 박혀 있던 악의 실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부들이 아닌, 가장 진실하고자 노력했던 도니상에게 왜 그런 악마의 존재가 현현하는가이다. 사실, 이것은 쉬 설명될 수 없는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가 극명하면 극명할수록 악의 실체 그리고 원죄의식에 접근하게 되어, 자신을 구원이 아닌 절망의 늪 가운데로 몰아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주 쉽게 구원의 확신과 타협을 하여, 신을 자신의 욕망의 범주 한 가운데로 예속시켜 버리는 이들에겐, 악의 실체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원어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도니상과 같이 끊임없는 구원의 목마름과 물음 가운데 놓인 이들에겐 꼭 한번쯤은 바로 이러한 악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도니상은 자신의 양심 속에서 현현한 악의 실체와 입 맞추게 되고, 이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옭아매져 들어가는 악의 올무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적... 그러나 기적이란 것은 사실 별 게 아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악의 실체에 대해, 절망해 대해, 깊숙이 내려가게 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악과 절망에 대해서 투시하고,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간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그러한 절망과 악의 실체 그리고 우리 욕망의 근본을 다 파헤칠 수 있다 하여도, 그리고 또 그러한 능력을 아무리 인간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용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것이 다른 이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죄의 구렁텅이 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도니상과 무쉐트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악의 실체의 올무가 얼마나 잔인한 가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무쉐트.. 16살의 무쉐트는 영화 속에서 완벽한 악녀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가녀린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의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그러하기에 그녀는 어쩌면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매우 연약하고,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매우 순결하고 고상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매우 포착하기 힘들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배경이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강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그녀는 일단 자신의 놓인 환경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없이 자유로워지기 원하는 존재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란 존재는 늘 그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의 상징으로써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표출은 영화 속에선 남성편력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특히, 근대라는 시대상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 더군다나 감성이 지극히 예민한 소녀란 존재가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순결이란 처녀성을 무기화 하여, 남자란 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독해질 수 없는 그녀는 한 가난한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 나면서, 다시금 아버지로 인해 강제로 그 가난한 소설가에게로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 그리고 그 마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동경의 도시 파리로 향하고 싶다. 그런데 그 가난한 소설가가 꿈꾸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녀와 함께 그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영영 도망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시에, 그 지역 시의원이면서 의사인 갈레란 남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정부로서 그녀의 모든 고향의 삶을 청산하고 파리로 도망갈 것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사랑하던 그 가난한 소설가라는 걸림돌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살인 충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은 다음 날, 무쉐트는 식탁에 놓인 그의 총을 주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그녀를 억압하려는, 영영 고향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가난한 소설가의 턱에 대고 총성을 울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총에 정말로 총알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충동에 의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 정말로 살인이 일어날 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대로 살인이 일어났고, 이제 그로 인해 그녀는 완전범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낸 후, 그 지역 시의원이자 의사인 '갈레'에게로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진하게 꿈꾸었던 파리로의 여행을 갈레에게 제안하지만, 갈레는 완벽하게 속물인 인간이기에, 여태껏 무쉐트 자신이 오히려 갈레에게 이용되어져 왔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아니, 영특한 그녀는 이미 그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애인이었던 가난한 소설가에 대한 살인의 죄책감으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적으로 공범자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갈레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쉐트는 갈레에게 자신이 살인을 했음을 고백했음에도 전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어, 이제 자신이 사랑하던 소설가와 자주 만났던 마을 외곽 우물가에서 자살을 꿈꾸며 서성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악마에게서 능력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도니상 신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의 키스로 사람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게 된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를 보자마자, 바로 그간 무쉐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기에 급급한 무쉐트는 도니상 신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도니상은 무쉐트에게 이제껏 일어난 그 모든 죄가 무쉐트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닌, 무쉐트와 혼연 되어 섞인, 그의 뿌리부터 그와 가까운 모든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 바로, 그 악의 실체로부터 벌어진 일이며, 무쉐트의 순결한 영혼이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거기에 얽매어져 파괴되어지길 원했음을 밝히게 된다. 그렇지만 오히려 무쉐트는 그러한 원죄의식에서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욕망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음을 그로 인해 깨닫게 되어, 자살을 하게 되고... 도니상 신부는 그 때문에 자신의 교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의 지울 수 없는 형상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팔고서라도 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모든 욕망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악마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죽은 아이를 살려냄으로써, 모든 신의 섭리를 거스른 자신의 파멸을 신에게 고백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다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무쉐트.. 그리고 원죄.. 도니상 신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이 복잡한 관계의 고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학생으로서 젊은 도니상 신부의 고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무쉐트의 경우는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 원작가인 베르나노스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다시금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 무쉐트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의 경우,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의 무쉐트와 달리, 같은 자살의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살이 구원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소설 '기쁨'의 경우에서는 좀 더 확연하게 소녀의 죽음이 갖는 이미지가 구원 쪽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 지게 된다. 왜냐하면 ‘샹탈’이라는 지극히 순결한 소녀의 존재가 지극히 이기적이며, 지극히 비열한 소녀의 아버지와 그의 식구들로 인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어떻게 소녀의 순결이 이 땅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살며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는 비록 소녀는 아니지만, 한 젊은 신부의 고뇌와 죽음을 통해 이러한 모든 소녀의 죽음들에 대해, '그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귀결을 내놓고 있다. 즉, 베르나노스는 소녀란 이미지를 통해 줄곧 순결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여왔음을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이러한 소녀와 순결이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뭉크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흔히 많은 이들에게 '절규' 혹은 '비명'으로 각인되어 있는 뭉크의 경우, 그의 다른 많은 그림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상징주의적 그림 뿐 아니라, 많은 소녀들의 그림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녀의 그림들이 주로 순백이나 빨간 색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다리 위의 소녀들' 그리고 '빨간 색과 흰색'이란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표현이 두드러져 있음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간 색과 흰색으로 대비되어져 있는 소녀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 우울한 소녀의 모습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를 것처럼만 느끼게 된다. 특히, 기묘한 달빛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녀들이 사내들과 뒤섞여 춤을 추고 있는 그의 다른 그림 속에선 하얗던 소녀마저도 빨갛게 변해버리면서, 마치 죽음과 키스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데 소녀는 간 데 없고, 발가벗은 나부의 모습을 한 요염한 여자가 남자의 시신 위에서 일어나, 이상한 해골처럼 변한 남자 혹은 뭉크가 길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대체 소녀는 어디로 가고, 남자의 마른 시체 한 구와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해골만 남아 있단 말인가? 어느새 새하얗게 순결했던 소녀가 붉게 달라올라 요염한 나신의 여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너무나도 보편화된 관념들 속에서, 우리는 뭉크와 같이, 소녀의 순결이 사라져 버리고, 소녀가 여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에 많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결의식이 단순히 성적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 지게 된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의 경우, 오히려 순결은 너무나도 잔혹한 의식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악녀가 되길 원하였고, 가차 없이 자신의 몸을 남자들에게 내맡겼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가난한 소설가와의 사랑을 통해 더욱 명백히 그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 온 족쇄인지는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순결의식을 더럽히기 위해,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자신의 살인충동을 실현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그녀는 소설가와의 추억이 깃든 우물가에서 서성인다. 그런데 이제 타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도니상 신부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녀에게 그러한 진실을 명백히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얼마나 순결하기를 집착하고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엇나가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을 원죄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니상 신부는 과감히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의미하는 바이다. 그녀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증오해왔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대로 혼연 되어져, 평생 그 올무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순결이란 감옥 속에서... 그렇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순결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원죄의식으로 귀결되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우리는 무쉐트를 통해, 도니상 신부를 통해 가늠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쉐트와 같이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말살시킨 남자로 대변되는 우리이기에, 뭉크와 같이 여성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마치 자신이 무쉐트에게 살해당한 가난한 소설가라도 되는 양, 비명을 길길이 지를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인가? 혹은 순결이고, 원죄고, 이러한 관념의 잔치들을 벗어나,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믿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표도로비치처럼 아버지의 살해라도 교사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우리에게 순결이란 건 커다란 족쇄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무쉐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에,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이미 원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인 순결이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돋아 오르는 순결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소녀들의 또 다른 죽음들을 설정하고 있다. 결국, 그 잔혹한 순결의식을 포기하지 않고서, '모든 것은 은총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계속되는 소녀의 죽음을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순결이란 것이 더욱 원죄로, 악의 실체로 옭아매 들어가는 사슬일지라도, 그를 통해서만이 인간 구원이 가능하고 신의 은총을 인간이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그에게서 뭉크와 같이 소녀가 농염한 여자의 나부로서 변신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 조차도 뭉크 그림에서의 남자를 살해하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순결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를 그 원죄의식이란 절망 가운데에서 다시금 구원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쉐트의 죽음을 단지, 또 다른 무쉐트의 죽음을 통한 구원으로 그렇게 쉽게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에선,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와 달리, 순결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가운데, 갑작스레 어느 날 숲 속에서 밀렵꾼에게 겁탈 당하게 되면서, 되려 그 동안 잠재되었던 무쉐트의 순결의 의식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쉐트는 다시 더럽혀 지지 않을 자신의 고귀한 순결을 위해,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가 미처 스스로 떨어지지 못한 마을 외곽 어느 우물가에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로써 영혼의 쌍생아인 두 무쉐트 모두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자살처럼...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무쉐트를 구원하고, 겁탈로써 오히려 새롭게 피어난 자신의 순결을 영원불변하도록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소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구원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소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자살이라는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너무나도 잔혹한 것 아닐까? 그리고 다시 나는 되물어 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토록 순결에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날 이 시대에 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순결이란 족쇄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감히 순결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금기와도 같이 느끼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우리에게 갈증처럼 되살아나는 순결의식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남자와 혹은 어떤 여자와 잤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순결이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정결한 사랑을, 조금 더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 자신에게 가시처럼 돋아난 순결의 보호막을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그 이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닌,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된다. 아니,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순결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배신의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세우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어차피 불결해진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놓아 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그래서 마치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그 잔혹한 원죄 의식에 놓인, 우리의 가련한 무쉐트와도 같이..

 

 

 아마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접하면서 느꼈던 혼돈들을 그대로 느꼈으리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순결이란 것이 이곳에선 너무나도 간단치 않고 복잡하게 엉켜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순결의식은 순결의식이고, 원죄의식은 원죄의식이라고 하면 매우 간단할 것을, 영화는 아니, 베르나노스는 그 둘 사이에 전혀 명확한 구분 없이 헝클어진 경계를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은총이라고 결론짓고,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사탄의 태양이라는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가운데서 정금처럼 정결하게 내어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녕, 그 벗어나기 힘든 순결에 대해 아직 집착하는 이 있다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방이 불길에 아스러지는 그 처참하면서도 황홀한 자태로..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 이들에게 정말로 순결한 사랑의 입맞춤 있기를, 무력하게 바라며 글을 마친다.

 

 

 

 

 

 

 

 

P.S.

 

 글 서두에 '사탄의 태양 아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구해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읽어 보았습니다. 영화와 약간 구성이 다르지만, 맥락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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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장 피에르 주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아멜리에 - 가장 작은 일상에로의 그녀의 침투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머라는 것은 욕이라는 것이 들어가야 제 맛이다. 우리의 가장 간지러운 곳을 살살 긁어 주는 것처럼 욕이란 건 참 묘한 뉘앙스의 매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경우 세계에서 욕에 관한 어휘가 가장 많다고 하니, 우리 민족만큼 그 효용 가치에 대 해 절실히 고민해 본 민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지 얼마 전 한 참 영화극장에서 개봉한 ‘공공의 적’은 그러한 우리의 뉘앙스의 틈새를 잘 파고들어, 통렬하고 시원한 유쾌함을 선사해 준 바가 있다. 사실 강석우식 개그라는 것이 원래 투캅스에서도 이미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졸렬함을 더티하지 않게 섞어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식이도 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말리에를 이야기하려는 찰나, 욕과 ‘공공의 적’을 들먹이면서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느냐 하면, 프랑스식 코미디인 아멜리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우린 가끔 프랑스식의 코미디를 접할 때 조금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이건 완전히 몽상적인 것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개그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같이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리얼리즘이란 코미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참으로 프랑스식 유머는 부르주아하고 느끼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유머가 지닌 어처구니 없는 풍자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라는 그 이유로 우리의 현실을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진 않게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내 개인적으론 이 아멜리에라는 작품이 더욱 요즈음 내 상황과 엇물려 그러한 감성과 단상들을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뭔가 유치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몇 시 몇 분에 몇 번의 날갯짓을 하는 쇠파리 얘기와 뜬금없는 사람들의 우연 속에 누군가의 정자가 누구가의 난자를 침투해 들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아멜리에의 탄생.. 그것도 모질라 이제 아멜리에의 가족에 대한 인물 묘사는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 묘사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히스테리투성의 어머니, 그리고 자기 세계에 옹골차게 빠져 있는 아버지... 특히, 이 집안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의사라는 아버지가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청지기를 대고서 진찰을 하는데, 아버지에게 안기길 원해 심하게 콩닥거리는 딸의 심장 박동 수에 딸을 심장병이라 착각하여, 딸을 일반학교로 보내지 않고 그냥 집안에서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황당한 설정도 얼마 안 가, 어느 성당에서 자살 기도를 하여 떨어지는 사람에 깔려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이제 아말리에는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버린다는 무리한 설정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쯤 되면 보통, 평범한 영화의 분위기라면 무언가 슬픈 사랑의 예감이라든가 인간내면의 깊은 상처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가정 속에서 이 영화는 되려, 고독한 아멜리에의 공상의 순수함과 천진함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여하튼 영화의 서론은 이쯤에서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다 자란 아멜리에라는 처녀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

 

  23세살의 아멜리에는 어느 술집에서 서빙을 하며 혼자 살아간다. 그리고 주말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그밖에 달리 사람과의 접촉은 없어, 주로 사람을 관찰하거나 혼자 공상하기를 즐긴다. 사실 그녀의 이웃들 또한 괴팍하기 그지없어 각자 자신의 똬리 속에서 나오려 하질 않는 인간들이라 그녀가 호기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기도 하다. 예를 들면, 뼈가 약하여 ‘유리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맞은편 밑에 층 노인은 자신의 집안의 모든 물건들에 헝겊을 둘러싸고서 자신 또한 푹신한 헝겊으로 칭칭 감아 외부로 은둔한 채 평생 고독하게 그림만을 그리며 살고 있다든지, 집주인인 듯한 관리인 아주머니는 십 수 년 전 어떤 여자와 눈이 맞아 파나마로 달아난 남편에 대한 집착을 지우지 못하고 평생 자신의 젊을 적에 남편이 자신에게 보냈던 연애편지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고, 아멜리에가 항상 들리는 채소가게에 일하는 청년은 사람보다 채소를 사랑하는 약간은 아둔한 사람이며, 그 주인은 그런 청년을 맨날 못살게 구는 재미로 살고, 아멜리에가 일하는 술집의 단골들 중에는 한 여자를 스토킹 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평생 작가라 하여 실패한 자신의 삶에만 골몰하는 어처구니없는 소설가라든지, 심한 신경쇠약증이 있는 담배가판대의 아줌마라든가... 온통 비정상적이고 괴팍한 사람들만 가득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꼬이고 꼬인 인간군상의 모습 속에서 아주 우연히 아멜리에에게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 눈에 띄게 된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아파트의 한 귀퉁이 속에 십 수 년 전부터 숨겨져 있던, 이젠 다 늙은 중년 노인이 되어 있을 법한 사람의 장난감 상자였다. 그런데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일까? 일단, 이 답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어떻게 이 장난감 상자를 통해 엉켜진 인간군상의 매듭이 풀어져 가는 지를 먼저 지켜보기로 해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우연히 수 십 년 전 어느 소년의 장난감 상자를 아멜리에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이 장난감 상자를 만일 이제는 늙은 중년이 되었을 그 사람이 되찾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돌변하지 않을까? 너무나 천진한 아멜리에는 그리고서 바로 결심하게 된다. 이 보물 상자의 주인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기뻐한다면 자신은 평생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여주인공 아멜리에는 보물 상자의 주인을 수소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닫힌 자신의 세계를 열고서 주위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 왜 자신의 이웃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닫혀 살고 있는 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장난감 상자의 주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는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은 주인공이다. 하여, 보물 상자의 주인에게 상자를 직접 건네주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발휘하여 보물 상자 주인을 감동시킨다.

 

  보물상자의 주인공 "브레또도"씨는 매주 화요일 닭을 사서 푹 삶아서 닭의 안쪽 허벅다리를 골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년의 늙은이이다. 그런데 그 화요일엔 이상하게도 닭을 사지 못하고 어느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멈추게 된다. '따르릉.. 따르릉..' 난데없이 공중전화에서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브레또도씨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에 얼떨떨해 하다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뚜- 뚜-", 전화는 바로 끊겨버린다. 이 게 무슨 상황일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 때, 공중전화 박스 위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조금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름이 써져 있고, 안에는 누군가의 사진과 조금한 장난감 자전거와 몇 개의 작은 장난감들이 담겨 있다. 순간, 브레또도씨는 과거의 모든 일을 기억해낸다. 자신이 사이클 대회에서 일등 했던 일, 숙모의 속치마, 그리고 자신의 딸과 어린 손자... 하염없는 눈물이 새어나오고.. 맞은 편 어느 술집에서 아멜리에는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뚜벅.. 뚜벅..' 까닭 없이 눈물을 참지 못하는 중년의 남자가 아멜리에가 몰래 숨어있는 술집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술을 시키면서 술집 주인에게 감격하여 혼잣말하듯 말한다.

      

  "여보게 술 한 잔 주게.. 참 이상하지.. 누군지 모를 나의 천사가 나의 보물 상자를 찾아 주었어.. 그런데.. 참 인생은 너무나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수 십 년간 살았는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말리에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지고, 이제 아멜리에 삶의 잔잔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다시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 잠깐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인지 생각해 보자. 어릴 적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중한 것들이 있게 마련일 게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 보면 아주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내 경우에는 어릴 적 조금한 고무 인형과 지우개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난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대개의 이름이라는 게 스포츠 선수 이름이거나 어디선가 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이었지만. 여하튼, 난 고무인형과 지우개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나의 큰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그 중학교 시절,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는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어딘가로 버려져야만 했다. 물론, 몰래 동네 쓰레기장까지 뒤져 거의 고스란히 되찾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다시 발각되어 어딘가로 숨겨진 후, 난 그것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난 어떤 만화책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난 알아요.’라는 당시 유명 가수의 히트곡 이름을 제목을 갖다 붙인 해적판 만화책이었는데, 당시 거의 용돈을 타지 못했던 내가 꼬박꼬박 돈을 모아 전권을 다 산 다음 그 책을 얼마나 또 읽고 또 읽었던 지. 그렇지만 결국, 그 책들 또한 어딘가로 숨겨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 동생이 어딘가에서 그 만화의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 놓아, 나는 다시 그 만화를 볼 수가 있었다. 내용의 수준을 떠나, 얼마나 재밌던지.. 나는 수 십 번 보았던 그 만화를 대사까지 외워가면서 자꾸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왜? 왜.......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너무나 많은 기준들과 책임들 속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 또한 그러한 기준과 책임들 따위에 얽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기준과 책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놓여 있지 않을 때는 정말 무가치 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릴 적 자신의 장난감 상자엔 그런 것들이 놓여 있을 리 만무하다. 그네들은 늘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이라는 외부적 요인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아무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아직도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 그리고 만화책은 그 존재 자체로 나를 지탱하고 이루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즉, 실제로 나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이런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닐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 자체로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다. 그 어떤 이유나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 자체!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나중에 아주 나중에 돌이켜 보게 될 때, 혹 가장 생각나는 것은 이런 보잘 것 없고 자잘한 것들이 아닐까? 물론 너무나 오랫동안 묻혀 있어 빛바랜 그 색채를 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여담은 이쯤 해두기로 하고, 다시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에게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는 브레또도씨의 보물 상자를 찾아 준 후 이제 삶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동안 공상의 나래 속에서만 인형과 더불어 살던 그녀의 생을 다소 헝클어진 자신의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성에 갇혀 있던 탓에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가 주위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법은 소리 없이 다가가는 비상한 작전들로 시작된다. 먼저, 앞에서 이야기한 채소가게의 채소를 사람보다 사랑하는 청년과 그 못된 주인아저씨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아멜리아 같이 순박한 처녀에게는 늘 무언가 남다른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보는 시각 또한 매우 다른 것이 통례적이다. 예를 들면, 그 채소 청년의 경우 다소 아둔하기에 일반적인 처녀들의 시각에는 다소 피하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이 채소 청년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걸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해맑기 그지없는 주인공 아멜리에는 채소청년의 그 우둔함 속에서 순수함을 발견해 낸다. 하여,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을 골려주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히다.

 

  어느 날 우연히 채소가게 주인의 집에 들를 일이 있어 들렸던 차에, 아멜리에는 채소 가게의 주인집 열쇠가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착한 마음에 채소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려 채소가게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채소가게 주인이 또 불쌍한 채소 청년을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멍청이가 어떻다는 둥 그렇다는 둥. 아주 개인적인 프라이버시까지 무시해가면서 채소 청년을 모욕하는데... 순간, 분노한 아멜리에는 그 길로 열쇠 집으로 달려가 버린다. 그리고 똑같은 열쇠를 복사하고선 아주 몰래 채소가게 주인집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채소가게 주인의 아주 사소한 일상들을 밉지 않고 귀엽게 망가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계를 앞으로 빨리 앞당겨 채소가게 주인이 새벽에 일어나 일할 채비를 하게 한다든지, 포도주에 소금을 가득 뿌려 맛을 변질시킨다든지, 디자인은 똑같지만 작은 실내화로 바꿔치기를 한다든지.. 아주 사소하지만 삶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채소 가게 주인이 자기 자신이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끔 한다. 더불어, 순박한 채소 청년을 교묘히 이웃에 옹골진 유리인간 노파와 맺어줌으로써 평생 고독하게 살아온 노파의 마음 문을 움직이게 만들고, 또 평생 자신을 배신한 사랑했던 남편 때문에 슬픔으로 살아가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40년 만에 되돌아온 거짓편지를 찾아주어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다시금 행복을 되찾아준다든지...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였던가? 이렇게 주위 이웃의 수호천사처럼 행복의 전령사가 된 아멜리에는 유독 심한 자신의 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다. 아주 우연히 어느 즉석 사진기계에서 두 번 부딪친 남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재밌는 설정은 이 남자 또한 아멜리에 못지않은 공상가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취미는 즉석 사진기계에 사람들이 찢어버린 사진 조각들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스크랩북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를 쫓아가다 그것을 발견한 아멜리아가 습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몽상가의 몽상적 사랑이 우연히 시작된다. 하지만 몽상가가 사랑한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몽상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몽상이란 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몽상가라 함은 현실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늘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목이 메어 있는 종류의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하여, 보통 이런 경우 사랑이란 것은 미지의 대상일 경우 가능할 뿐, 정작 현실에선 사랑을 못하는 것이 공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또 다시 색다른 시각으로 이 두 몽상가의 사랑을 맺어주고 있다. 바로 처음부터 은근히 강조하였던 아멜리에의 몽상의 그 순수성 그 천진난만함이 되려,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의 그 순수성은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다. 이것은 순수하기에 오는 결과이다. 자신의 그 순수함을 지속적으로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그렇다면 역시 몽상가의 사랑은 다가서지 못하는 그 거리에서만이 존재하며 끝이 나야 하는가? 그렇지만 다행히도 영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해피한 분위기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면, 남이 머리를 깎아주면 되는 것이다. 몰래 행복의 전령사 노릇을 하였지만 그것을 이미 그 이 전 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유리인간 노파는 자신의 빚을 아멜리에의 사랑을 맺어줌으로써 갚는다. 그리고 영화는 두 몽상적 연인의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아멜리에의 공상처럼 아름답게 풀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기술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전개와 상관없이 유독 내 자신에게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반대로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 내내 난 우리나라의 코미디처럼 통렬하진 않지만 잔잔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감지하고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그러한 주제로 나는 보물 상자 이야기와 함께 아멜리에의 작은 일상으로의 침투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에 대해 떠올려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 것 같다. 모든 것은 우연에 기인하고 있고, 또 설정 또한 괴팍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사람들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거대한 신념이라거나 혹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되려, 매우 하찮고 비현실적인 공상과 우연들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을 가능하게끔 하며, 우리는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두가 부인하기 힘든 너무나 명료하고 자명한 사실이다!! 일단 영화라는 그 전반적인 분위기를 떠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찬찬히 아주 작지만 익숙하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을 살펴보자. 그다음 자신의 보물 상자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넣어 보자. 그리고 그런 달콤한 몽상들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오롯이 꺼내어 놓고서 남몰래 미소 지어볼 수 있다면, 그래도 삶은 살아볼만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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