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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과 수작 사이에서 '사랑의 진실'에 관해

 

 

밤새 채팅으로 수작을 오간 여자와

새벽 6시쯤 통화를 하였습니다.

1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코 먹은 소리를

내는 거라며 여간 곰살궂게 굴며

여자는 내게 ‘사랑의 진실’에 관해 말했습니다.

너무 우스워 연방 헛웃음을 쏟아내자

뭐가 그리 우습냐며 타박하며

여자는 내게 ‘사랑의 진실’을 믿어라 말했습니다.

길길이 쏟아지는 웃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는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 내가 원하는 건

그쪽이랑 만나서 맘에 들면 자고 싶은 것

단지 그뿐이라고 하자

여자는 내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 그쪽은 내게

정말 미.안.해.야. 한다고 말하고선

전화를 뚝 끊어버렸습니다.

온종일 아니 며칠 동안

그 말에 가슴이 버성기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꿈꾸던

여자가 아닌,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야. 한다는 '사랑의 진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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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버스 정류소에서

 


길은 오돌토돌 외진 샛길

인적 드물어 고요하기만한 이곳

그대 아시기는 하는 건지

그대 언제 오실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기다림은 나의 몫입니다.

 

돌밭을 밟으며 자분자분

종일 굽은 걸음으로

하루해 땅거미가 질 때

그대 오신다 하여도

그대 어디로 가실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잘못된 길도 나의 몫입니다.

  

해가 지고 깊은 밤이 오고

눈 비 내려 오돌오돌 떨며

기다려 보아도

끝끝내 그대 아니 오시고

내 생에 그대 없다 하여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주저앉아 견디는 것도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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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여는 풍경

 


누군가 야트막한 담장 너머

여닫이창문을 활짝 열고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가서는 이의 걸음에서도

환한 미소가 스며 번진다.

언제였더라? 어머니였던가?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올 때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창문이 그러했을까?

아니다!

우리 집은 다세대 공동주택에

미닫이창문이었다!

아마 알프스 산자락에 걸쳐있는

나라를 배경으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그런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풍경일 게다.

그래도 좋다! 여닫이든 미닫이든

누군가 활짝 창문을 열고서

내가 다가서기를 기다리는 이 있다면

나 아쉬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그대에게 뛰어라도 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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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쯤에

 

지천명이 없는 이에게

불혹이란 없을 줄

어차피 알고 있었다.

한 밤 자고 두 밤 자고

머리터럭 한 가닥 한 가닥

바닥에 수북이 쌓이고

저녁이면 날렵했던 턱 선에

듬성듬성 내려와

퇴근하는 전철 유리창에

푸석하고 덥수룩한 얼굴 하나

전부일 뿐이라고 이제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보지만,

그토록 두려웠던 서른이

몇 해가 훌쩍 지나고

어느 여관방에서 우연히

어느 여자와 헤어진 후

생애 처음으로 외롭다고

혼잣말을 했던 것처럼

이태가 지나고 서 해가 지나고

문득, 사랑하는 이 품에서

나는 생애 알지도 못한

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설움에 그 품에서 펑펑

아이처럼 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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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태평로에서



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온다.

부장님, 과장님, 차장님, 대리님 등등

내 선배, 친구, 후배들의 다른 이름이다.

똑같은 양복을 입고 똑같은 넥타이에

모두 남산만한 배를 방패로 두르고

얼굴에 칼 하나씩 치켜뜨고 있다.

건물 유리창 속 내 얼굴도 똑같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들도 모두 자신의 품속에

자신만의 꽃의 말을 품고서

밤이면 꽃 안에 숨겨둔 벌들의

더듬이로 더듬더듬 분칠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다해 평생 한 번

쓸 수 있는 독침으로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서 더듬더듬

서서히 그렇게 체내의 모든 독들을

씻겨내고 있다는 사실을,

실은 얼굴의 칼들로 배의 방패들로

위장한 꽃과 벌의 노래란 그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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