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그 씁쓸함에 관하여



단단한 얼음집 지어 놓고

시뻘겋게 타오른 숯덩이

삼키우라고


천천히 녹아질 방울들

찬바람에 식혀

견디웁고

투명한 햇빛 내리 쬐

꽃잎 피어날 제

무너져 내리라고


두둥실 떠나려 가는

꽃잎처럼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라고

날개 잃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처럼

벼랑 위에 서서

바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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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부활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 수 있지만

혼돈에게는 구멍이 없어

일곱 개의 구멍을 뚫으니

칠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혼돈의 전설이 못내 사무쳐

가슴속 미세한 모공을 열어젖혀

한가득 들이킨 바람으로

구멍과 구멍을 합치고

또 구멍과 구멍을 합쳐서

이제 커다란 한 구멍이 되어

사라지려 사라질 때에

끝내 사라지지 못하고

여전히 바람을 느끼는

구멍과 구멍 사이, 바깥 허공의

희미한 경계

-이제 나는 아무런 구멍도 없이

살아있는 하나의 커다란 구멍 같은

혼돈이 되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지니

이제 내게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대들의 밑 모를 블랙홀 같은

목마른 구멍들을 짐 지우기 말기를

나의 매장을 통한

그대들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질서의 음모들을 꿈꾸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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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눈 멀지 않았어도

커다란 어둠 속 촉각

세밀한 그림 만져내는 법

배워

소리 낼 수 있어도

소리 내지 않는 말들

그대 빚어내는 법

배워

단지 그대라는 이유로

눈 멀어 귀 멀어

버둥거리는 몸뚱이

긴 늪에서 헤엄하는 법

배워

절망을 모르는 어설픈 자맥질

낯설어 떠오를 줄 모르고

나락해가는 날들


그대 날 이대로

슬프게 내버려 두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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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 들어가

철썩 미끄러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비록 당신이 한 개 바위처럼 단단하여

그 누구도 꿰뚫을 수 없다 하여도

비록 내가 하얀 거품처럼 연약하여

쉽게 침잠해버릴 수밖에 없다 하여도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들어가

철썩 부서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비록 변덕스럽고 매정한 바람이

어디로 데려갈 지 알 순 없지만

비록 내가 하늘 위의 새처럼

자유로이 나래를 펼칠 순 없지만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들어가

철썩 허물어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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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꿈꾸다



서쪽 멀리 먼 나라

여기저기에 테러가 발생했단다.

순간 입가에 드리운 교활한 미소가

동쪽 나라 사람들 피에 흐르는

콤플렉스처럼 번져가고

힘으로 이루어낸 평화의 상징에

들이받은 배후세력처럼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선

고급 백화점이 무너진 적이 있었단다.

여기저기 평화에 굶주렸던 열망들이

암울한 시대의 징조로 되살아난 영웅들에

온갖 뉴스로 난사되어질 때

북쪽 동네에 사는 내 궁핍함은

옹졸하고 한 많은 기도로

전복을 꿈꾸는 찌든 아이처럼

모두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마 위 살짝 번진 미열이

새어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배꼽 한 치 아래 불거진

구멍을 뚫고서 폭발하고 싶단다.

여기저기 비릿한 조명 아래 늘어선

여신들의 자태를 일그러뜨리고

돋아나는 음울처럼

거세된 애욕들이

서쪽 나라와의 거리 때문에

남쪽 동네와의 차이 때문에

소외된 육체의 두려움 때문에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테러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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