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7
오정희 외 지음 / 가람기획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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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참회록을 통해 바라본 오정희의 동경

 

 

  처음, 오정희의 ‘동경’이란 제목을 보았을 때, 문득 나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으로 바라 살아 왔던가

 

 

  그렇지만 오정희의 ‘동경’은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자신의 늙은 조부모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과 시선으로 써내려간 노년의 고독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하기에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었다고 해도 이제 갓 24살 된 청년의 눈에 비친 윤동주의 ‘동경’이 오정희의 ‘동경’과 같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년의 눈으로 아직 세상을 쉬 바라보기를 꺼리는 아니, 아직 그럴 수 없는 나는 윤동주의 ‘동경’을 통해 오정희 ‘동경’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오정희의 ‘동경’ 속에서 거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지난날을 바라다보는 자기반성의 의미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반성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삶이 그들에겐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과거를 자꾸 들추는 옆집 계집아이의 거울 빛은 그들에겐 거북스럽고, 두려운 빛일 뿐이다. 왜일까? 그들의 아들인 영노를 자꾸 되새기기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같이 산 지난 세월이 기억이 나질 않아 꿈같다는, 그것도 마치 흉몽스러워 맥을 자꾸 빚어야 잠을 들 것만 같은 이유 때문에? 아니면 아직도 익숙지 않은 자신의 틀니처럼 혹은 아내의 백발처럼, 그렇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미구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어서? 쉬 공감이 가지 않는 이 이유들을 잠깐 접어두고 다시 윤동주의 ‘참회록’으로 넘어가 본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에서 거울은 집안에서 유일하게 닳지 않은 가구로 집안에 놓인 것이 아니라, 마치 모든 집안을 그 속에 넣고 있는 듯 묘사되어지고 있다. 물론, 오정희의 다른 소설에서 ‘거울’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여성 작가인 오정희에게 있어서 ‘거울’은 남다른 의미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가꾸던 공간, 집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물건. 이러한 귀중한 물건이 그렇지만 ‘동경’ 속에선 무덤의 이미지와 엇물려 표출되고 있다. 특히, 영노를 묻었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 속에서 그는 그의 아들의 육체를 묻은 것이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을 묻은 것은 아닌지 반추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도식처럼 그 상징하는 바를 도출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것은 기억이다. 가장 빛났기에 부끄럽고 아팠던 그런 고백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분명, 글 속에서 그는 노인들은 반성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들의 거울을 봐온 것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그 거울 속에서 어떤 찬연한 빛을, 온 집안을 집어 삼킬 듯한 그 빛을 보기보다는 오래 전 그 어느 때부터 그 어느 것도 지속시키지 못한 빛의 속성, 기억이라는 찬란하지만 찬란하기에 순간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런 빛과 같은 기억의 속성들을 이미 깨달아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 강렬한 빛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이젠 자연스럽게 시력을 잃게 되어 거울을 바라볼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 오래 닳고 닳은 거울 속에 묻어버린, 그렇게 사라져버린 어떤 흐릿한 윤곽의 뒷모습이 왜 소설을 보는 내내 아른거렸던 걸까?

 

 

  거울 속 볼 수 없는 뒷모습은 슬프다. 게다가 그 거울이 천연덕스럽게 번들거리는 빛이 아니라 오래된 구리거울이라면 그 흐릿한 윤곽만큼 뒷모습을 슬프게 비출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 오래되고 외로운 그 뒷모습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이라면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아도 이미 어른거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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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劍恩仇錄(上,下冊)서검은구록(상,하책)
김용 지음 / 광주출판사(廣州出版社)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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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도를 통해 바라본 김용의 무협세계

 

 

 

  ‘김용’하면 우선 떠오르는 작품은 ‘영웅문’이다. 중학교시절 쯤, 폭발적인 유행을 했던 그 작품을 나는 어리석게도 고3, 그것도 수능 한 달 앞두고서 읽었다. 사실, 그래봤자 지가 그냥 무협지지라는 생각으로 얕잡아보고 덤볐던 것이 그야말로 낭패를 본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래봤자인 줄 알았던 그 작품이 그때까지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던 삼국지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길이 또한 삼국지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내용은 삼국지보다 더 길었다. 1부 사조영웅문, 2부 신조협려, 3부 의천도룡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각 부가 약 300-400페이지 분량의 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지금도 내용이 너무 길다고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고 있는 판인데, 이 책은 그 당시 어찌나 술술 읽히던지. 수능이 바로 코앞인데 공부는 팽개치고서 새벽 4시까지 몰래 그 책들을 한 번도 아니라 2-3번 읽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러고도 원하는 대학에 붙었으니, 사실 나는 운이 좋은 놈이다.^^:

 

 

  여담은 이쯤으로 해두고, 이제부터 ‘원앙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실, 제목을 듣는 순간 딱 떠올랐던 것은 영화 ‘절대쌍교’였다. 아마 이 작품도 고등학교 때 비디오로 빌려본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다 보고나서 그 당시 홍콩 코미디의 그 유치함에 치를 떨면서 절대 보지 말아야할 영화가 ‘절대쌍교’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문득 세월이 지나 몇 년 전 TV에서 그 영화를 다시 보니 그 유치하게만 느껴지던 코미디가 어찌 그리도 친숙하고 재밌던지. (또 삼천포로 빠졌다.^^;) 그리고 그 당시 정말 유치하게 느껴졌던 것은 코미디도 코미디였지만 ‘남녀합심검’이란 말도 안 되는 무술로 악의 화신인 무림지존을 격파하는 유덕화와 임청하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었다. 그런데 이 역시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보니, 무술에 관한한 밑도 끝도 없는 중국의 어마어마한 뻥들에 비하면 이 무술이 그래도 훨씬 더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음양의 조화와 이치라는 동양의 사상에 입각해 봐도 그렇고, 남녀가 사랑을 하여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싸우는데 어떤 고수가 그 앞을 가로막을 수가 있겠는가? 사랑엔 국경도 시간도 없다고 하는데, 무술 또한 초월 못 할리 없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원앙도는 이미 어느 정도 그 신빙성을 갖추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협이라는 장르가 단순히 이러한 판타지와 비슷한 무협 세계에서만 끝난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뭐? 그냥 무협에 사랑을 짬뽕시킨 이야기인데 대체 뭘 어쩌라고? 그러하기에 지금부터 원앙도 속에 축약된 김용의 세계를 아주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봄으로써 무협이 그러한 판타지 외적으로 어떤 풍자적 기능을 지닐 수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처음에 등장하는 주위신과 태악사협의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듯이 김용의 무협세계는 정과 사의 세계가 불분명하다. 무릇 일반적인 무협 소설에서는 정과 사로 나뉘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주요 골조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김용 소설의 캐릭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파에 유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기꾼에 난봉꾼이고, 아주 거칠고 극악한 캐릭터로 보이는 사파가 기실 알고 보면 정의의 편에 가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이 소설에서도 주위신과 태악사협 뿐 아니라 끊임없이 부부싸움을 하는 임부부를 보아도 이건 영 정파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고 여주인공인 소중혜의 아버지 소반화는 어떠한가? 어떤 무협 소설에서 근엄한 영웅의 상을 태감으로 표현한 적 있단 말인가? 이렇듯 김용 소설의 캐릭터들은 정과 사로 나뉠 수 없는 무언가 인간군상의 모습을 각자 뚜렷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용의 소설 속에는 정의란 것은 없단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분명하게 김용은 나름의 정의를 그의 소설 속에 구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 속의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주인공인 소중혜와 원관남의 첫 등장은 주인공임에도 역시 무언가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소중혜는 왕께 상납하러 가는 원앙도를 훔치려하고 있고, 서생으로 등장하는 원관남 또한 자신의 무공을 숨기면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남녀 둘이 각자 다른 이유로 원앙도라는 천하무적 검을 갖기 위해 싸움을 벌여가는 과정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초반에 무언가 정의의 기세를 역력히 비추던 주위신과 탁천옹 무리는 그들을 억압하는 무지막지한 공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남녀의 사랑이라는 情이란 문제 앞에선 모든 정의는 악으로 평가 받아도 상관없단 말인가? 사실, 그냥 표면적인 부분만 놓고 보아도 황제에게 원앙도를 바치려고 하는 주위신과 탁천옹이 그것을 훔치려고 하는 소중혜와 원관남보다 대의와 명분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결국 공적으로써, 그것도 사파로써 그려지게 되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 이르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그들, 주위신과 탁천옹은 청을 위해 무공을 바친 한족의 배신자들이다. 그러나 소중혜와 원관남은 누구이던가? 그들의 아버지는 원래 각각 원앙도를 지니고 있던 무림고수로서 청 황제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다. 즉, 회자정리와 인과응보의 불교정신과 더불어 중국인들을 지탱하는 역사의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화사상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속에선 나중에 인자무적이라는 유교의 사상을 통해 청과 그의 세력들이 어질지 못했음을 은근히 우회하여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소설 속에선 자연 친화주의에 가까운 도교의 사상도 자주 엿볼 수가 있다. 또, 그의 마지막 대하무협소설인 ‘녹정기’에서는 그의 기존의 모든 중화사상과 유교, 도교 사상을 뒤집는 인물인 ‘위소보’란 일종의 안티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당대에 한족의 세태와 비리를 은근히 풍자하고 있다. 즉, 김용에게는 단순히 무협이 판타지의 기능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탄탄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풍자적인 기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은 역사 소설과는 차별화되어 있지만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가운데, 남녀 간의 정의 문제와 온갖 인간 군상들의 풍경을 화려하고 기치 있는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이 ‘원앙도’는 비록 짧은데다가 그의 초기 작품이지만, 그러한 김용의 세계관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김용의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 하는 문제이다. 2000년대 초반 잠깐 정치를 풍자한 무협 소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 전후로 해서 우리나라의 무협 소설이 과연 우리나라의 역사의식을 담아낸 우리다운 무협소설을 혹은 현실의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내용을 그린 정말 무협소설다운 무협소설을 등장시킨 적 있는지,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개인적으로 김용의 소설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읽은 ‘신조협려’ 가운데 있는 시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왜냐하면 아무리 내가 여기서 판타지적 기능이니 뭐 풍자적 기능이니 떠들긴 했지만, 역시 무협은 재밌어야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미와 감동을 준 작품이 내 개인에겐 ‘신조협려’였고, 그 긴 ‘신조협려’를 여기에 다 쓰기엔 너무 힘에 부쳐서, 그냥 축약된 시로 남겨두는 것이 왠지 운치가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원앙도의 내용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이지만, 왠지 비슷한 맥락도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하느뇨?

천지간을 나는 두 마리 새야

너희들은 얼마나 많은 여름과 겨울을 함께 맞이했는가?

사랑의 기쁨과 고통 가운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인이 있어

임께서 응답해주시면 좋으련만

아득한 만리에 구름 가득하고,

온산에 저녁 눈 내릴 때,

한 마리 외로운 새 누구를 찾아 날아갈지를.......

 

 

 

P.S.

 

 '신조협려'에 나오는 시인 '정한가'는 약간 내 개인적 의도에 따라 아주 살짝 의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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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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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가을이 오면 - 어떤 지옥의 불구덩이 같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권여선의 ‘가을이 오면’을 처음 읽었을 때, 무언가 잔잔한 여운이 있으면서도,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많이 있었다. 대체 어머님의 우아함이란 무엇이며, 모녀지간의 알 수 없는 애증이란 무엇일까? 일단, 모녀지간의 애증이야 남자인 내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고 쳐도, 어머니의 우아함이라니? 그런 어머니가 목사 집에서 얹혀살면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의 급작스런 관계의 진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의 시작에서 여름의 끝쯤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여자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갈 만큼 진전된 어떤 단서가 주어진 곳이 있나? 아니, 그 전개나 흐름이 너무 급박한 거 아닐까? 이런 다소간의 혼돈 속에서 그나마 다행히도 글의 맥을 찾을 수 있었던 부분은 글 속에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아의 열등의식이었다.

 

 

  조교를 통해 건네받은 돈은 한 달 반여의 작업량에 비해 너무도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학교에서 시장을 가로질러 돌아오는 길에 발목이 접질려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입자가 고르지 않은 울렁울렁한 유리가 그녀에게 덮어씌우는 듯했다. 쓰러진 몸 위로 이글이글 노란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쪼였고 사방이 막힌 듯 조밀한 대기가 그녀를 가두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왜 이제껏 매일 시장통을 헤매었는지를 번개같이 깨달은 느낌이었다.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발목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오감은 극도로 민감해졌다.

............................................(중략)..................................................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 그녀를 덮쳤다. 뺨에 닿은 씨멘트가 따뜻했다. 불가사이하게도 그녀는 이 여름의 언젠가부터 자신이 이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초반 그저 담담히 자신의 얘기와 어머니의 얘기를 풀어가면서 자아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던 이야기는 이곳에서부터 급박해진다. 갑작스런 실신 후, 남자를 만나게 되고, 처음으로 어떤 남자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어머니를 함께 보기까지, 빠른 이야기전개만큼 후딱 초여름에서 여름의 끝으로 시간은 내달려 간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 여름의 언젠가부터 그 순간을 그것도 혼절의 그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 왔는지는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난다.

 

 

  남자가 눈가를 실룩거리더니 등을 돌렸다.

  학을 떼겠네.

  남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스물일곱 해 인생이 남자를 이만큼이라도 미동시키기 위해 존재해온 것만 같은, 미칠 듯한 쾌감을 느꼈다.

.............................................(중략)...............................................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이마와 뺨에서 터져 흐른 진물이 꾸덕꾸덕 마르고 있었다. 알레르기가 가라앉는 걸 보니 가을이 오는 모양이었다.

 

 

  때론 알 수 없는 내부의 열등의식이란 괴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갑작스레 튀어 나오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말 그대로 열등의식이며, 괴물 그 자체이다. 그러하기에 타인의 시선으로 여기서 등장하는 내적 자아의 이러한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실상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아한 그렇지만 집요하다고 표현되고 있는 어머니, 피부 트러블이 있는 듯한 그녀의 외모, 거기에 언밸런스한 그녀의 이름, 로라. 깨금발로 디딘 듯 이렇게 불안한 내부의 형상들은 그녀를 점점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종국엔 부재한 아버지의 모습처럼 은근슬쩍 대체된 남자와도 대치의 국면으로 치달아 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왜 그녀는 이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관계를 그르쳐 버린 것일까? 혹 그러한 집착은 기실, 역으로 우아함과 소통에 대한 천착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그러한 여자의 모습은 정확하게 표현할 순 없지만 다소 깨끔스런 모습으로 나온다. 말 그대로 ‘깔끔’을 은근슬쩍 떤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부분은 다소간 여자를 표현해 나아가는 작가의 문장에서 비롯된 내 오인일 수도 있다. 비단, 이 글 뿐 아니라 작가는 그녀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다소간의 결벽증 비슷한 문장력을 내내 구사하고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절망으로 치달을 예감을 복선으로 깔았던 소설 속 주인공의 시장 바닥에서의 혼절과 마지막 여자 스스로 택한 목구멍 속을 타고 들어간 불구덩이 지옥은 그녀의 어떤 천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니, 그녀가 스스로 그러한 절망을 예감하고 선택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녀 속 열등의식이란 괴물을 스스로 마주하지 앉고선 그녀는 그녀의 가을로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아픈 발목을 주무르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떠난 남자를, 끊어진 막차를, 등록도 못한 가을학기를, 그녀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여대생 기숙사 입주권을, 상상의 전령사가 보내올 또 다른 가공할 소식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직 가을이 오기엔 먼 계절이지만, 잠시 내게 있어 그 여름의 끝을 기억해 본다. 그 끈적끈적했던 그 여름의 마지막, 단 하룻밤 만에 귀뚜라미 소리 미친 듯이 여기저기 울어대고, 단 하룻밤 만에 스산한 바람과 함께 모든 별들이 희미해지고, 단 하룻밤 만에 그 뜨겁던 태양은 모든 열기를 잃어버린 듯 이미 시들어버렸거나 혹은 오직 시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모든 생각과 감정의 결들이 결결이 얽히고 물들어 더 이상 방향을 찾지 아니하고, 그대로 맨바닥에 머리 자올 하나하나 길게 늘어뜨리고서 매몰되기를, 함몰되기를 꿈꿨던. 그렇지만 그 밤 누군가의 몸뚱이에 옷을 입히고, 꽃을 달고, 초점을 잃어버린 눈가에 분을 바르고, 별을 뿌리고, 그리고 그렇게 언젠간 시들어버린 청춘에 생채기를 내고 단추를 여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여름의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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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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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그리고 작가 자신이 말하는 누보로망

 

 

  아주 오래 전에 갑자기 한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여자 친구랑 어느 카페에 들어왔는데, 카페 이름이 ‘누보로망’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 여자 친구가 그 의미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영어는 아닌 거 같고, 다른 나라 말 같은데, 왠지 나라면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지만 당시 문학에 대해 겨우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가 그 뜻을 알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대충 아마 ‘새로운 사랑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잘못 가르쳐 주었던 것이 문득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누보로망이라는 그 의미는 전혀 반대인데 말이다.

 

 

  작품 속에 부재한 듯이 보이는 혹은 철저한 보는 자의 시선(블라인드 뒤의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 A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바나나 농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저녁이면 같은 식민지령의 프랑스인이라 추측되는 프랑크와 크리스티앙 부인과 저녁을 같이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늘 그렇게 반복된다. 다만 심상치 않은 것은 A와 프랑크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마치 숨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집요하게 세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변화들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가장 집착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둘이 시내로 장을 보러 가는 일이다. 가는데 4시간, 그리고 오는데 4시간, 아프리카의 고르지 못한 길 사정을 감안하면, A와 프랑크 아침 6시 반쯤 출발해서 자정쯤에나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전조라도 깔듯이 프랑크는 자신이 새로 구입한 엔진이 신통치 않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둘은 그 복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엔진 고장으로 인해, 그 날 밤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몇 번의 그런 일이 있었는지, 단 한 번뿐이었는지, 소설에서는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집요하게 그 둘을 쫓는 화자의 시선만큼 불안정한 그의 시간과 공간 관념은 이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린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그 일이 반복되고 앞으로 반복될 것만 같은 뉘앙스를 띠울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설 속에서 화자가 집착하는 대상은 지네이다. 물론 화자는 지네 뿐 아니라 집안의 구조 부인 A와 관련된 모든 사물들에도 천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독 그는 지네를 무서워하는 아내와 그 아내를 위해 지네를 짓이겨 치우는 프랑크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지네의 죽음에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아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동시에 그 남은 흔적들이 어떻게 집안 천장에 달라붙어 존재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지우기 힘든지 설명하는데 많은 장을 할애한다. 실제로 주인공은 그러한 지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한다. 고무지우개로 지워보기도 하고, 칼로 긁어도 보고,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 노란 페인트칠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내가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집안을 노랗게 단장한다 하여도 지네가 없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프리카이고, 어쩌면 지네는 화자를 은근히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처럼.

 

 

  사실, 스스로 줄거리와 작중 인물의 개성에 대해 철저하게 부인하는 작가인 로브 그리예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 구조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위에서 묘사한데로 소설 속에선 이야기 구조가 부재하다. 그리고 작중 화자 또한 거의 부재하다 말할 수 있다. 이야기라 봤자 지독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마치 사물화 된 듯한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나열하고 반복할 뿐이다. 어떠한 교훈도 감동도 심지어 삼류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사소한 기쁨조차 없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의도들이 곳곳에서 이야기 구조를 파괴한 이 소설의 새로운 형식 속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작가가 의도한-사실 작가는 작가 스스로 그 의도를 부인하고 있을지라도- 그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누보로망에 대한 비평서나 이론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평서나 이론들이 작가 로브 그리예의 소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누보로망이 하나의 이론이기보다는 운동이라고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보로망은 소설에 대한 새로운 탐색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부정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험을 결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서는 로브 그리예가 주창하는 누보로망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의문을 던지는데 한계를 긋고자 한다.

 

 

  첫째, 누보로망은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설을 위한 시대적 탐험과 고뇌이다. 과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 나름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더 이상 교훈으로써 혹은 어떤 재미로써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던 소설의 기능이 기실 유명무실해지면서 소설은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들은 그것을 참여에서 찾으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소설을 통해 어떤 사회적 참여와 동시에 어떤 철학적 고찰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시대적 기능들도 이미 그 밑천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누보로망은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하는 당시 일련의 프랑스 작가들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기존의 소설의 이야기 구조와 작중 인물, 형식과 내용, 그리고 기존의 작가의 역할들을 부인한다. 먼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선 이미 시대적으로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플로베르서부터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이러한 유행은 프루스트에게서 더 자유로워졌고, 포크너나 베케트에 이르러선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미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시점에 맞추어 이야기 구조를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중 인물의 경우, 발자크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인물형이라는 것이 현대에 들어서 그 의미를 상실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혁명과 현대라는 시대에 진입하게 위해 많은 대전을 겪어야 했던 프랑스에서 그러한 전형적 인물들은 무언가 시대를 대변하거나 독자들의 감정을 대리하여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서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절대적인 권력과 영웅이 사라진 지금 그러한 전형적 인물을 묘사하는 자체가 아마도 시대적 착오일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기존의 서구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소설과 예술 전반에 대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한  후, 그들의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라는 진실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소설에 대해 형식주의라 비판하는 경향에 대해 재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은 새로운 탐험이며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비판가들은 좋은 글, 그리고 좋은 소설에 대해 휴머니즘이나 사회주의란 그들의 바탕 아래 예전의 것들에 대한 향수만을 복사하거나 재생시키기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기존의 작가 역할이 너무나 전지전능하고 인본주의적이었음에 대해 로브 그리예는 비판을 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작가들이 ‘날씨가 변덕스럽다’라고 표현한다던가, ‘웅크린 산’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어떤 작가 자신의 시선 속에서 사물을 의인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감정이입이라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동시에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자세와 재창조를 방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는 철저하게 사물과 인간을 분리시켜, 그대로 있음에 대해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설의 예술적인 무용성의 기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예술의 가치는 어떤 실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인은 망치로 못을 박지만, 음악가는 망치를 통해 어떤 새로운 찾으려고 한다. 전자는 실용적이지만 후자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하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예술의 가치는 현존하고 있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어떤 감동과 진짜 인생을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 소설을 봐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소설이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소설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이유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기실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할 수 없다. 그냥 소설 그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창조 그 자체에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하지 않은 로브 그리예의 소설 질투와 누보로망 사상에 대해 너무나 쉽게 접근하고 쉽게 단정지은 작업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저자의 소설과 사상을 통해 소설의 기능에 대해 몇 가지 화두를 던져볼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찾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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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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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 치욕과 절망이란 이름의 계절의 끝자리에서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남해 금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중에서

 

 

 

  치욕의 시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을 통해 기억하는 이성복 시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한 것이었다. 시대의 치욕을 자신의 치욕으로 품는 사내,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내, 고통스럽지만 희망을 노래하는 사내. 이러한 치욕의 변주는 더불어 그의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단단히 구축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름의 끝’을 통해 그는 이제까지 그가 품어왔던 치욕을 무언가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시도하고 있는 거 같다. 사실, 이 시집 속에선 그는 거의 의도적으로 ‘치욕’이란 단어 자체를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주 흐린 날의 기억’이란 이 시 속에서 시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와 무덤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냥 아주 쉽게 이 은유에 접근하자면, 새는 어떤 자유와 동경, 욕망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가 혹은 우리가 바라봐야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것들이다. 끝나버린 희망, 끝나버린 노래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희망과 노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덤과도 같다. 그렇지만 삶은 그렇게 쉽게 놓아지는 희망의 끈이 아니다. 사방을 둘러쌓은 죽음의 냄새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무언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우리의 무력한 육신으로 온 힘을 다해 관 두껑을 밀어제치는 힘으로라도.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 대체 왜 이 시인은 그 이전의 절망들을 그 치욕들을 온전하게 품었던 그 작업들을 뒤로 하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차원은 무엇일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어쩌면 쉽게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은 짙은 기독교적인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집의 첫 시인 ‘느낌’과 마지막 시인 ‘그 여름의 끝’은 교묘하게 운을 마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무리한 상상을 해본다.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처음 꽃나무에 꽃이 필 때, 우리는 돋아나는 생생함으로 처음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느낌은 어떻게 지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그렇게 느낌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두 번째 연의 시구들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릴 것이다.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얼룩처럼 지고 비틀려도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되어 남겨지는 것이다. 시인에게 그렇다면 그 얼룩은 무엇이었을까?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얼핏 시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정리하는 듯한 이 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상기시킨다. 그러난 시인의 얼룩이라는 현재의 맥락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붉은 꽃인 백일홍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시집에서 뿐 아니라, 시인은 전 시집에 여러 시에서도 붉은 꽃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 붉은 꽃들은 분명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 어쩌면 시인의 치욕이거나 혹은 그것의 변주로써 기독교적 사랑일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도 그러한 점은 분명히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다고. 이것은 스스로 그의 진정성에 대해 스스로 책문하려 한다기보다는 스스로의 진정성에 대한 자문일 것이다. 어찌됐든 그의 붉은 꽃잎으로 대변되는 진정성은 여러 폭풍우 속에서도 잘 견디어 냈다. 그런데 그렇게 억세게 버티던 그 꽃잎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그의 절망은 끝나버렸다. 그렇게 그의 치욕을 떨쳐낸 것일까? 아니면, 온전하게 치욕으로 물든 그 자신에 대한 받아들임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실 무엇이 답이라고 규정할 순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동안의 시인의 치욕은 또 다른 차원으로 변주되고자 시도되고 있다는 것밖에. 왜냐하면 시인의 치욕은 한껏 꽃피워 이제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젠 굳이 시인이 스스로 치욕이란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시인은 붉게 물든 얼룩, 치욕 그 자체이고, 그것은 끝난 절망으로써,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니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

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이제 성큼 다가온 겨울, 쉬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가슴 속에 품고서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시인은 다시 봄이 오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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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지사 시선은 다..가져도 더 욕심이날 뿐..
이런걸..갈증이라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