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창녀의 노래 -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하여

 

 

  90년대 중반쯤,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얼마 안 된 그 때, 대학가에선 한 연극 한편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희경이 혼자 나와서 독백으로 연극을 하는 모노드라마인데,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짠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연극 관람 같은 것은 팔자에 없던 탓에, 나는 원작 소설로 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원작자인 송기원에 대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은 도리어, 송기원이란 사람에 대한 끌림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나는 그 후로도 내 마음 속에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쉬 지우지 못했고, 그 소설과 함께 거의 동시에 출간된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이란 시집을 연방 입안으로 되뇌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것이 나의 정직성에 대한 문제와 함께 흐드러지는 꽃잎처럼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쯤에서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그의 고백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10년이란 세월동안 창녀촌을 떠돌며 방황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목포 뒷골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새울 늙은 창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늙은 창녀와 마주하게 되면서, 소설은 늙은 창녀의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애착과 회한에 대해, 그녀의 목소리만을 통해 일방적으로 독백을 시작한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뗌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마로 살붙이 같어라우.'

 

 

  이십 년 동안 창녀 생활을 했으면, 흔히 생각하기를, 닳고 닳은 회한뿐이거나, 삶에 찌든 독기뿐일 것이라고 쉬 단정하기 쉽겠지만, 어이된 게 이 순박한 아짐씨 전혀, 그런 것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모진 삶 가운데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해 낸 모양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많이 배웠지만 10년 동안의 방황에, 허기로 가득 찬 손님인 남자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기위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한다.

 

 

  '열여덟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캤어라우.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간디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제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지라. 아직 누군한테도 뵌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부픈 것이 터질것만 같았서라우. 그래서 손님모양 맘이 허해서 떠도는 사람을 보먼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여덟을 담아주고 싶어라우. 차갑게 식어뿐 젖가심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심을 열어 손님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그렇다고 그녀에게 회한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멋도 모르고 서울로 상경하려다, 중간에 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목포로 끌려가, 강제로 창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성이 워낙 순박했던 그녀는 나중에 자기에게 사기를 쳐, 자신을 창녀로 만든 그 남자마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그 이유로 잠시 창녀 생활을 접고서, 그 남자와 함께 살게까지 된다. 그렇지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그 남자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이만 낳으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고서, 아이 하나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치를 건다. 그렇지만 무슨 놈의 팔자인지, 그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에 그녀는 크게 절망하여 한 동안은 실성기까지 나타내보이게 되지만, 결국은 그것마저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누구도 잘 찾지 않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을 순응하면서, 살아오고 있던 것이다.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지아비도 자석도 없이 몸 폴아 살어온지 벌써 스무 해! 한번도 맘속 옷고름 푼 적 없이 숱한 밤과 숱한 사나들만 먼 강물모냥 흘러왔다 흘러가고 몰라붙는 개울창의 모랫바닥으로 혼자 누워 있제만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사는 일이 추와서 떠는 손님을 만나면 썩은 몸뚱어리 쩌 깊숙이 살어오는 온기... 끝끝내 맘속 옷고름 풀게 함시롱 몰라붙는 모랫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온기...'

 

 

  아니, 심지어 그녀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의 순응을 넘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창녀생활을 통해 몸으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뚱어리도 인자는 어떤 의미가 되고잡어라우.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 말이여라우. 누구를 사랑한다등가 사랑을 받는다등가 그런 의미가 아니고만이라우. 스스로 한번도 아께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제만은, 시방 왜 이리도 소중해진다요? 숨가쁜 어떤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자 없어서, 갈증 땀시 죽어가는 사나가 있을 것만 같어라우.'

 

 

  이제 10년 동안을 방황을 한 그녀의 손님인 남자는 그녀의 이 의미를 향한 몸짓을 통해 하나의 사랑을 깨치게 된다.

 

 

 '맘속 맺힌 매듭 풀지를 못해서, 밤마둥 헤매제만 돌아갈 디가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담도 아득해서, 싸구려 막쇠주에도 취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불빛들이 웬수보담도 짚어서, 내딪는 걸음마둥 끝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게덱기, 짓뭉게덱기, 나라도 기억해라우. 역전 뒤 힛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까장 지달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라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남자는 한 남자가 아닌 그녀를 스치고 간 모든 남자로써, 사랑의 폭과 넓이가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 간 후, 내가 느낀 감정은 글의 서두에 밝힌 욕지기였다. 원작가인 송기원 역시 '마음속 붉은 꽃잎' 이란 시집을 통해서, 자신이 늙은 창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도, 그리고 송기원에게도, 나아가 늙은 창녀를 읽고 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이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은 단순히 역겹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구토라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물 그리고 회한, 나아가 자기 모든 존재의 '토함'이라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나의 감정은 사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역시, 처음 느꼈던 소설 속에 손님인 남자로 대변되는 '송기원'에 대한 역겨움은 쉬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10년 동안이나 창녀촌을 일부러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려 했던 그에 대해 도저히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송기원은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배후세력으로 신군부에 의해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소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다.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월문리에서 자진함으로써, 자신 안에 심각한 어머니의 부재를 창녀들을 통해 찾고 싶었을는지도, 그리고 그 극심한 자괴감에 자신을 밑바닥 진창에 뒹굴도록 놓아버리고 싶었을는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녀를 통해 그러한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했던, 그 행위 자체는 역겹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그가 물랭 루주를 그린 19C 유명한 인상파 화가 로트레크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불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부터 그런 밑바닥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도 아닌데, 일부러 거기로 가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찾는다는 발상 그 자체가 얼마나 치기 어린지....... 게다가 감히 그 치기 어린 어릿광대짓을 통해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밑바닥 인생의 짠한 고백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도용하다니....... 어떻게 그 모든 작태들을 역겹지 않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마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역겨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으로 그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송기원이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듯이, 송기원이란 사람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의 진실과 욕망을 본 까닭이었다.

 

 

  스무 살 적, 친구와 친구의 여자 사이에서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둘을 배신하고서, 친구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나는 결국, 그 친구의 여자와 헤어지게 되면서, 이상스런 체험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아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섞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체험이었다.

 

 

  군대를 조기 제대한 나는 그녀를 만나서 그녀가 다시 나의 친구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늘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나는 서로 친구임을 다짐하던 사이였기에, 나는 그것을 당연한 귀결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간 그 친구를 마음속에 품고서도, 그녀가 나와 일종의 연민 때문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내 자신을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 때문에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에, 그 날 나는 혼자서 술을 들이켰다. 소주 한 반병이나 마셨을까? 원래 주량이 소주 2~3병 가뜬했던 나이기에 전혀 취기도 돌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 지는 것이 더욱 씁쓸한 기분만 가득하였다. 하지만 뭉실하게 헝클어지는 드가의 그림처럼 흐느적거리는 세상의 자태를 보고 싶어, 나는 취한 척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구토가 다소 평소와 그 성격이 달랐던 것은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으로 이어졌고, 내 감정에 따라서 계속되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술을 별로 마신 것도 없었기에 나올 것도 없어, 나는 연방 헛구역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조금만 슬픈 감정이라던가, 이상한 맘이 들면, 계속 구토가 치미는 것이었다.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 끊임없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람이 죽을 때 보인다는, 이제까지의 모든 삶들의 영상들이, 한 찰나에 수십 컷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환영으로 나타나지고, 다시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이 치밀어 올라, 변기통에 헛구역질을 시작하는데, 뚝뚝 피가 떨어졌다. 그리고 변기통에 핏방울이 천천히 스며들면서 나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그 지루했던 몇 시간의 구토를 멈추게 되었다. 훗날 그것이 나의 젊은 날의 나쁜 피가 빠져나간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나는 구토를 참을 수 없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내 자신의 피가 흐르기까지 그 구토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소설 '구토'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한 개인의 구토증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워낙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었기에, 사실 내가 그것을 감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을 수 없는 구토증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를 통해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세계의 본질적 원리로써 제시되어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느끼는 구토증,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배설하고 싶어 하는 구토증 등등. 그러하기에 우리는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이며, 멈출 수 없는 구토증이라고도 한다. 아니, 비단 글쓰기 뿐 아니라, 요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소비라는 구토증 혹은 성적 욕망의 구토증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이 구토증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토증을 불러일으키는 중독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이들은 이런 멈출 수 없는 구토에 대한 염려와 기우로, 그것을 참아내고, 자신에게 하나의 응어리처럼 만들어, 의미가 되어 질 때 구토할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 누가 우리에게 광기를, 그 구토증을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그 구토증을 참아내고, 하나의 의미되는 몸짓으로 토해내어야 한단 말인가?

 

 

  위의 물음들은 나의 오래된 화두들이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구토에 대한 그 괴로움과 역겨움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껏 피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분명 그 이유로, 구토가 아닌 하나의 의미되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간에 구토를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난잡함인지 혹은 아름다움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송기원의 구토에 대한 그 욕망은 사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용감함이었다고 감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구토를 당하는 대상자에 대해선 묵인한 생각임에는 분명하다. 사실 당연히 우리는 송기원의 구토의 행위를 변태적이고, 편협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스스로 수십 번 게워 내면서, 모두에게 감히 보여 준 늙은 창녀를 통한 구토는 결코 추잡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것은 아름다운 구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방 허방을 짚어내며 헛구역질을 하던 나의 구토와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의 '토함'이었고, 그러하기에 늙은 창녀와 함께 어우러진, 멈출 수 있는 구토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늙은 창녀를 처음 보고서 느낀 그 욕지기대로 바로, 조급하게 그녀에게 구토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만 집착했다면, 그는 그녀의 모든 존재의 구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년간 계속 게워 낸 그 구토 끝에, 그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구토를 멈춰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구토가 끝났다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젠 그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참고 견딜 길을, 그리고 그 난자하게 헝클어진 토사물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아름다움이 있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이 감옥에 가 있을 동안 자진한 어머니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씻을 수 없는 恨을 감히,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고 그 늙은 창녀를 통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에 의문은 남는다. 무엇이냐 하면,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구토의 대상이었던 늙은 창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에 대한 철저한 희생의 강요에 관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정직해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스무 살 적 그녀에게 뱉어내고 싶었던 그 구토들을 나는 다하지 못하고, 혼자서 게워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아직도 연방 허방을 짚으며, 헛구역질만을 계속하는 내가 도저히 이 구토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구토에 대한 나의 욕망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토라는 끔찍한 토사물들을 보기엔 나는 그 동안 너무나 아름다움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가 닿지 못하는 이상에 대해 동경한다는 것, 바로 거기서 오는 비극적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상이라 할 때 이데아라는 세계를 떠올려 보곤 한다. 불완전한 이 세계에 완전한 형상이며, 실체, 그리고 완벽함 그 자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이 세계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고결하다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은 그 길을 못 가더라도, 당신들은 그 길로 가서 끝까지 목마르고 비극적이어 달라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하기에 그 길을 가는 당신들은 늘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서, 그 길을 끝까지 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길 위에서 목마름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사라지기까지 당신들은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구토를 하고 싶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당신들의 본질이 정녕 그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 당신들은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신들은 정말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함 가운데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숱한 물음들과 의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지금 나는 다시금 스무 살 때와 같은 구토증을 느껴 보게 된다. 비록 이젠 그녀라는 대상도 없고, 누군가처럼 늙은 창녀라는 대상도 없지만, 구토증은 참을 길이 없고, 그것은 아직까지 내 관념에선 추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헛구역질이라도 나는 이제 구토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다가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모든 토사물을 토해내고 게워내어, 거기서 참고 견딜 길을 배우고,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워서, 나도 누군가의 허기와 토사물들을 받아 낼 수 있는 썩은 몸뚱아리가 될 수 있기를, 그러한 몸짓이라도 될 수 있기를, 염치없게도 자꾸 바래보게 된다.

 

 

 

 

기도

 

 

제 몸뚱어리도 이제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가 아닙

니다.

스스로 한번도 아껴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지만, 지

금 왜 이리 소중해지는지요.

숨가쁜 어느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저 없어,

갈증에 죽어가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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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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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마파람을 맞으며

 

 

  우리에게 시인 그 자체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동양인의 사고구조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외침이거나 사회적 개혁을 위한 울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프랑스 시인들, 특히 이 발레리의 사변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시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게다가 이 종자들은 어떻게 된 게 사변을 그냥 사변으로 말하지 않고 풍경을 빌려 사변을 표현한다던가, 갑자기 전혀 이해도 되지 않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한 후,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해변의 묘지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바다’는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아주 흔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과 어울려져 세세히 표현한 상징들과 흐름들을 잡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중략)....................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비단,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고, 자신도 묻혔다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해변의 묘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득 사유로 가득한 삶에 지쳐 바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바다가 무엇을 줄 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지, 기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고요해 진다. 그리고 바다의 풍경 앞에 매료된다. 시인은 여기 3연까지 그러한 시인의 마음과 바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연에서 그는 불현듯, 그 계속되는 파도의 잔잔함에 경멸을 뿌린다. 왜? 대체 바다의 무엇이 그에게 어떤 경멸을 품게 만든 것일까?

 

 

 

  과일의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미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중략)......................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그렇다! 우리의 벅찬 가슴으로 달려간 바다에서 우리는 때론 신물을 느낀다. 비단, 그것은 우리가 전날 얼굴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여행객과 밤새 술을 마시며, 자기도 모를 가슴 속의 말들을 지껄이며 회포를 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 생선의 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때론 욕지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욕지기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튕겨져 나온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며, 우리의 그 음울한 내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중략)...................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중략).................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잠에,

  나무뿌리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바다가 주는 근원적 고요함 속에서 명상에 잠긴다.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헛된 열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나태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그 말, 그 자체는 어쩌면 향수적인 언어이다. 고향을 그리고 있는 과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근원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숙연하다. 그리고 명료해 진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있는 깊이는 때론 우리를 너무 휘감아 우리는 산 자의 편이 아닌 죽은 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중략)...................

 

  간지린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중략)......................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

킬레스여!

 

 

 

  시인과 우리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는 제논의 화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심지어 이미 우리는 그것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한 시시포스 신화의 마치 다른 버전처럼 매일 구더기에게 갉아 먹히고서 다음 날은 새로운 육체로 또 갉아 먹히기 시작하거나, 혹은 매일 제논의 화살을 맞고서 심장의 구멍이 났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화살을 맞기 위해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속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서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서,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근원의 공간, 그래서 죽음과도 너무 닮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론 너무 고요하여,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이미 바다 속에 있거나, 아니면 태초에 바다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 나오기 전, 그 생물이 지느러미 같은 형상도 갖추기 전, 그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노라고. 그러나 진짜 바다를 겪어 보게 되면 안다. 바다는 그런 추상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거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맞부딪쳐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곳의 시간은 결코 미래일 수 없지만, 결코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다의 표상을 우리는 쉬 죽음으로만은 단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시인은 이제 그러했던 바다의 표상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바다는 결코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몸부림의 공간이다.

 

 

 

 

P.S.

 

  여름부터 가을 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봉착했다. 처음으로 느낀 거 같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삼 시 세 끼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봐도, 그 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외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된, 사춘기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파도가 거꾸로 들이치는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열망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나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이러한 나를 극복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글을 써내려가느라 정작 내 자신에 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는지 아무런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이제 기대는 것은 이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다. 볼 살로 느껴지는 이 겨울의 느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본다.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렇다! 볼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분다! 어떡하든 살아내야 할 겨울이란 이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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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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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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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프랑스 문학에 대한 추억여행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예감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방송대 불문과의 프랑스 단편이라는 과목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텍스트로 해서 시험을 치룬 적이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이십대 때 대학시절 신학이 전공이었던 탓에 아마 다른 서적으로 얼핏 접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때문에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까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천국으로 간 집달리’의 경우는 거의 종교우화서적에서 본 아슴푸레한 기억이라, 제목만 기억날 뿐 내용 자체가 거의 흐릿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는 읽는 순간,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져, 읽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그 까닭에 원어로 본 이유도 각인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 시험은 기말시험으로 프랑스 단편 과목의 거의 300페이지 분량 가까운 책 전체를 범위로 했는데, 다른 단편은 사실 지금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뭐랄까? 그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아릿한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십대 때부터 줄곧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특히 프랑스 문학에 동경이 강했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삼십대가 넘어서 굳이 방송대 불문과에 들어갔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또 굳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어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과 어둠에 대한 동경이 함께 공존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프랑시스 잠 작품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상상력과 서정성, 동시에 기독교 문학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여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기의 향연들, 이 양극의 기묘한 유혹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채워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한 마디로 기막힌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발랄하고 경쾌한 서곡에서 씁쓸하고 여운이 있는 비극의 전조로 뒤바뀌는 서정적 변주곡! 만약 나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상상력이란 건 고작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AV동영상 수준의 상상력이었다. 몰래 여자의 알몸이나 훔쳐보거나 강간하고 도망가는 그런 식, 혹은 그러다 문득 회의에 빠져 성적인 담론에 대해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나 진부하게 늘어놓을 게 뻔한 졸작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곡으로 따지만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들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곡이었을 것이 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우리를 동화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화적인 세계로까지 데려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구성은 흔한 신화적 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그것을 만용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에서부터 혹은 마이더스 손 이야기와 같은 신화이거나 우화와 같은 구성, 거기에 그 시대의 현대성을 가미시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러한 신화적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 획기적인 상상력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라는 설정과, 둘째로 그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가공하여 새로운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는데 있다. 만약, 작가가 마지막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그저 벽속에 갇혀버린 것으로 끝내고, 교훈적으로 마무리했다든가 혹은 재미를 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비약적인 능력을 한껏 치장했다면, 글은 신화적이도 동화적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졸렬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벽에 가두어 놓고, 또 그 남자를 위해 담벽으로 스며드는 기타의 선율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율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버린 야심한 새벽 홀로 남겨진 이들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질 위로의 선율이 되고, 혹은 누군가를 애타가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속 담벽 안에 가둬버린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슬픈 발라드로 남게 된다.

 

 

  두 번째로 나는 ‘생존 시간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역시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작품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경우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 1946년이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가 1943년이니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는 장편이고, 이 작품은 단편집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상했던 시기는 비슷했을 것이라 예상해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층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상기조가 ‘실존주의’임을 떠올려 볼 때, 그 시기 이런 비슷한 작품이 다수 쏟아졌다고 하더라도 하등 기이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비슷한 소재임에도 이야기의 초점과 중심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실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이유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마르셀 에메는 그 특유의 유머와 함께 시간의 상대성과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연출해야했다고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이 역시 초반 가벼움을 가장하면서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사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에 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상대성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독자에게 준다. 왜냐하면 작가 자체는 글속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어떤 자신의 철학적인 주관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달에 15일을 사는 남자, 혹은 36일 사는 남자와 같이,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객관적으로 표현해내고, 그 속에 처한 작가로 대변되는 주인공 자신의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갈 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좋은 소재가 단편으로 종결된 까닭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개인도 그러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면 작가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그러한 소재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인 사르트르, 알베르트 까뮈 등이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서 마르셀 에메가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우리는 결코 지금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마르셀 에메는 역시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느낌 그대로 내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게는 이 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서정과 더불어 양극에 서있는 어두운 관념에 대한 환상이 아직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 처음 마주했던 ‘어린 왕자’와 같은,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벽을 드나드는 남자’와 같은, 이런 간결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어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런 아름다운 단조의 변주곡을 하나쯤 써내고 싶다. 쓸쓸하지만 여운 있는 서정성 가득한 발라드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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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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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통해 다시 읽는 카프카와 글쓰기에 대한 고뇌

 

 

 

  모임에서 이기호의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기성작품 품평작품으로 정해서 이 기회에 나는 그의 소설집 두 권을 읽어 보게 되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고, 다른 하나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제목에서부터 끌린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다. 먼저,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기도 했고, 그 작품 중 그의 등단작품인 ‘버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버니’의 경우는 모임에서 예전에 품평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랩 형식으로 구사한 문체가 과연 시적 담화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버니’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안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산 속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곳에 다녀오면서, 내 안에 많은 자의식이 깨진 부분이 큰 탓일 게다. 뭐, 여담은 이쯤으로 해두고, 어찌됐든 새롭게 읽게 된 ‘버니’는 시적인 담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여전히 모자란 구석이 있었지만, 시적인 시도 그 자체였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울림이 있었다. 단순히 반복되는 순이의 랩이 보도방 아가씨의 절정의 비명에서 성공한 가수의 노래로 표현되었을 때, 그 울림은 짠하면서도 동시에 싸늘한 서글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유머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 전반적으로 나는 그 비슷한 정서를 느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마찬가지였고, ‘국기게양대 로망스’도 그러했다. 거의 무언가 따스한 연민과 더불어 유쾌한 유머가 공존했다. 그런데 그의 글 ‘수인’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경우는 비슷한 뉘앙스의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무언가 글쓰기 자체에 대해 정면 돌파하려는 작가적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수인’을 중심으로 문득 떠오른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살짝 양념으로 곁들여 글쓰기에 대한 내 개인적 고뇌를 살짝 토로해 보고 싶다.

 

 

  ‘수인’을 읽기 전, 미리 줄거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듣자마자 나는 바로 카프카의 ‘소송’과 ‘굴’을 떠올렸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진 후 한반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우리 민족이 유엔에 의해 세계 각지로 타의에 의해 흩어진다는 설정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산속에서 글을 쓰느라 전혀 몰랐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어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심판관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에서,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문화적 보존의 가치로 지하 밑바닥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친 교보문고에 자신이 유일하게 낸 소설책을 찾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건 뭐 카프카 패러디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서도 그런 내 애초의 생각 때문인지, 글 안에 가득 풍기는 카프카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랄까? 훨씬 유쾌하고 가볍다고 할까? 그래서 현대적으로 풀어놓은 기분이랄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카프카 그 자체를 들이밀 때, 현대의 그 독자 중,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지겨운 문장들을 끝까지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특히, ‘굴’의 경우는 카프카의 소설 중에서도 그 끔찍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고민을 했다. 다시 그 끔찍했던 ‘굴’을 그리고 ‘카프카’를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결국, 읽고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말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십대 때 가장 내게 영향을 준 두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를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 작가들이 둘 다 끔찍하게도 지리멸렬한 작가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죄와 벌’에서 노파 하나 죽인 사건으로 빼곡한 글자체로 해서 장장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그나마 짧은 편이다. 보통, 그의 장편들은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다반사다. 그래도 무언가 읽고 나면, 기존의 관념을 도발하고 깨트리는 상쾌함이 있었다. 그런데 카프카의 경우는 남아 있는 글이 몇 있지도 않고, 거의 다 단편이나 중편이다. 장편이라 봤자 단 세 편뿐인데, 그 지리멸렬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히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루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카프카는 지루한 게 아니라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헤매게 만드는 모호한 재주가 있다. 그것도 매우 지루하게, 짧은 단편에서조차. 다만, 그의 글 중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글은 ‘변신’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변신’을 통해 처음 그의 글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후 카프카가 쓴 대강의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미완으로 쓰인 장편, ‘실종자’와 ‘성’ 그리고 유일한 완성작인 장편 ‘소송’과 그의 몇몇 단편에서 중편까지. 그런데 특히, 그 중에서도 내게 지리멸렬함 그 자체로 각인된 작품이 중편인 ‘굴’이다. 물론, 그의 장편 또한 만만치 않지만, 여하튼 ‘굴’을 읽고서 내가 한 마디로 느낀 감정은 ‘이건 대체 뭐지?’였다. 그만큼 글 자체가 이해 불가했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카프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글이라는 ‘굴’을 파야만 하는지 또한 이해 불가했다. 그래서 그냥 그때는 후일을 기약하며, ‘굴’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글쓰기일거라 쉽게 단정 짓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수인’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읽었을 때 아주 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에 근 10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마주한 카프카의 ‘굴’은 그리 녹록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지리멸렬함과 지루함은 여전했지만,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선 ‘굴’ 자체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발톱을 숨겨놓은 채.

 

 

  카프카의 '굴'은 치밀하고, 방대하다. 그렇지만 그의 ‘굴’은 글쓰기라 단정 짓기 힘든 게, 어떤 적의에 대한 방어책으로써의 ‘굴’이란 느낌이 글속에 강하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적의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글 서두에서는 지하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한 동물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동물은 누구도 마주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마주하면 그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늘 굴 깊은 곳에서 소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아주 작은 생물체들이 길을 내는 소리, 바람이 통하는 소리, 지상에서 들려오는 아주 조그만 소음 등등, 그렇지만 보통 굴은 평안하고 고요하다. 주인공은 그 고요를 사랑하며, 그 때문에 굴을 사랑한다. 하지만 치밀한 주인공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에 나름의 여러 가지 방비책을 세운다. 가령, 미로와 같이 얼기설기 얽힌 굴의 중앙에 광장을 만들어, 여차하면 그리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곳에 몇 개월치 먹을 식량을 비축하여,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도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하여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주인공은 굴의 다른 곳에도 조그만 광장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는다. 과연 그의 이런 방비책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왜냐하면 정작 적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광장이든 다 뚫고서, 결국엔 주인공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만 주인공은 굴 중앙에 광장만큼은 튼튼할 거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그 광장에서 무언가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그냥 작은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커져, 주인공의 굴에서의 삶의 고요를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소리는 광장에서 뿐 아니라, 굴 어디에서든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들린다. 만약 광장 가까이에서 땅을 긁는 소리라면 분명 광장에서 떨어진 굴의 입구에서는 그 소리가 작게 들려야 할 텐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땅을 긁는 소리가 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가 어쩌면 애초에 자신이 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 그는 분명 그 비슷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을 처음 만들던 시기였기에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소리는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때 이후로 얼마 후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촉각과 청력이 발달하면 발달했지 퇴보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처음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후로 한참동안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 소리를 내내 들었다면 주인공이 굴을 계속 만들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적으로부터 도망칠 피난처로써의 굴을? 어쩌면 주인공은 내내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굴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땅을 긁는 누군가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소리를 외면한 채 그냥 자신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그 자신의 굴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처음부터 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굴? 광장? 적? 카프카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밑도 끝도 없는 이 알레고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버려, 이 소설을 알레고리가 아니라 어떤 상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믿는 한에서는 알레고리는 어떤 본질에 관해 회귀하는, 그렇게 본질을 상기시키는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이 소설의 굴과 광장 그리고 적은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새로운 해석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좋은 소설이라 말하고, 카프카가 20세기에 가장 연구되는 대표적인 작가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밥을 입에 떠먹여주기를 바라는 독자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실존이란 견지 하에 해석하면 그냥 실존이 되어버리고, 글쓰기란 견지에서 해석하면 그냥 글쓰기가 되어버리는 그의 소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엔, 나는 지금 ‘수인’에서 제기한 글쓰기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단지 카프카의 ‘굴’을 도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하려는 것 아닐까? 많은 의구심 속에 다시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수인’의 굴과 카프카의 ‘굴’을 잠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어차피 카프카의 ‘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내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처럼 작가는 우연에 기인에서 글을 쓰다 ‘의지’를 넣어 글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무리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누군가의 묘비명인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마무리를 낼 수 없는 게 삶이지 않은가? 다만, 그럼에도 글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또 너무 옆으로 샜다. 다 지랄 맞은 카프카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 카프카의 ‘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수인’에서의 굴은 간단명료하다. 글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은 굴을 판다. 거의 모두가 버린 한반도에서, 그렇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낙진이 바람처럼 휑하게 휘날리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로선 그가 소설가임을 필사적으로 심판관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는 무사히 외국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의 서두에서의 설정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게 또 카프카의 ‘소송’을 은근히 패러디한 느낌이다. 그래도 확실히 이 작가가 카프카보다 덜 잔인한 건 황당하긴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라는 그럴 법한 이유와 핑계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도까지 가르쳐주니 얼마나 친절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카프카는 어느 날 주인공을 그냥 끌고 가서, 너는 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는 주인공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 소송을 해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그렇게 자신의 죄도 모른 채 어느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다. 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이기호는 ‘수인’에서 굴이라도 파서 자신이 썼던 책만 찾으면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보내주기까지 하겠다니, 나름 인정이 있는 작가이다. 여하튼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서 굴을 파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툰 곡괭이질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슬슬 곡괭이질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열흘 만에 교보문고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복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심판장에서 보았던 서기와 알고 지내게 된다. 서기는 심판관의 명령으로 최대한 주인공의 편의를 봐주며, 2,3일에 한 번 꼴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러면서 그 둘은 친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주인공의 부탁으로 맥주까지 가져온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주인공은 날마다 교보문구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불안감을 느낀다. 그가 유일하게 낸 책 한 권이 만약 교보문고 진열대에 없다면? 그가 산 속에 들어가 글을 쓰는 사이 만약 누군가가 그 한 권을 사갔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굴을 파기 위해 한 작업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외국으로 가지 못하고 낙진만이 남은 한반도에 남게 된단 말인가? 소설가로서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교보문고 입구 삼십 센티미터쯤 앞을 남겨 두고서, 주인공은 맥주를 가져 온 서기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서기는 말한다. 이미 원하는 곳으로 이주가 진작 결정되었다고. 왜냐하면 그의 굴 파기 그 자체가 그의 형벌이었고, 그에 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두꺼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수고 굴을 팔 수 있겠는가? 벌써, 이로써 그는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가 한 작업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굴을 파고, 밤마다 자신의 책이 없을까봐 두려워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다 마신 맥주병을 서기의 머리에 내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파왔던 굴을 무너뜨린다. 그리고서 삼십 센티 남은 교보문고의 입구 쪽으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그곳은 더 이상 노동이 필요치 않은 존재 그 자체로 소리를 내는 책들의 세상일 거라 꿈꾸며.

 

 

  글을 쓰는 초반에 나는 분명 10년 전쯤 카프카의 ‘굴’을 읽었을 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짓고 그냥 책을 덮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렇게 읽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치열한 글이기에 여러 의문들을 두서없이 던져 놓았다. 그 의문들을 다 주워 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결국, 그러하기에 이렇게 똑같이 10년을 넘어서도 ‘굴’에 관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프카의 ‘굴’이 이기호가 던져 놓은 ‘수인’에서의 ‘굴’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은 너무나 확연하게도 다르다. 이미 내용을 분석하면서도 나는 둘의 분위기가 얼마나 확연히 다른지 은근히 강조하였다. 그러하기에 ‘글쓰기’란 화두에 대해서도 둘이 내어 놓는 입장 차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카프카는 굴 파기를 일종의 글쓰기라고 봤을 때, 스스로 피난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결코 글 속에서 안주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글로 인해 더욱 불안해지고, 더욱 예민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엔 애초부터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즉,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그 불안의 전조는 늘 있어왔고, 때문에 글 자체가 그에게 순간의 피난처가 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는 죽기 전 그가 법률가로서 빠듯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서, 하루에 네 시간씩 꼬박꼬박 쓴 대부분의 글들을 스스로 불태웠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 남은 그의 글들은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친구가 카프카의 사후 세상에 남긴, 카프카 스스로 부인했던 글의 존재가치를 위해. 그런데 이를 뒤집기라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본연의 연민이 발동하여 이기호는 글쓰기에 대해 카프카와 비슷한 설정 속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 글 자체가 내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러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교보문고를 가득 메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곡괭이질 하듯 노동을 해야 한다고, 사뭇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선 분명 이기호의 결론이 이상적이고 온건하다. 어느 누가 카프카처럼 글쓰기를 하고 싶겠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질 않는 굴을 파서 무엇 하겠는가? 그 속에 대피한들 카프카 말대로 결코 피난처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자신을 갉아먹는 굴 파기이며, 똬리틀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카프카의 그런 ‘굴 파기’가 더욱 치열하고, 때문에 ‘글쓰기’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누구나 쉽게 결론은 내릴 수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죽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뻔한 답을 내놓듯, 쉽게 글쓰기란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나는 카프카가 그러한 글쓰기의 꿈을 보여줬다고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 근방에 도달한 글쓰기의 열망으로 그는 치열하게 하루에 주어진 일과가 끝나고서, 밤마다 4시간씩 꼬박꼬박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 아무것도 바꾸어주지 못할지라도. 책이라는 노동 없는 소리에 파묻히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설가라는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그는 글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하기에 내게는 여전히 너무 높고 어려운 카프카이다. 아니, 너무 깊고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굴과 같은 카프카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도저히 그처럼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꿔본다. 카프카와 같은 열망을, 카프카와 같은 치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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