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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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의 지식인의 절망과 선택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남북 분단이라는 어떤 허리 디스크와 같은 통증이 만성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어떤 고통이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이러한 시점에서 최인훈의 ‘광장’을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등학교 적 뜨거웠던 마음 이 후, 십 몇 년이 흘러 다시금 한 호흡에 ‘광장’을 집어삼킨 후, 먹먹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언가 흠뻑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지만, 여느 때처럼 전철 창문에 부딪치는 내 잔상은 이질적으로 차갑고 날카롭기만 하다. 대체 이제 와서 이런 신파극이 다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책속의 명준을 빌린 저자의 얘기처럼 지금 이 시대는 광장이라는 것이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거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시끄러운 음악에 빠져있는 대학생, 게임 중독인 중고등학생들, 그도 저도 아니면 초조하게 어찌 시간을 때울지 몰라,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폭발할 지경이면서도 이렇게 멍한 표정을 지어낼 수밖에 없는 모두 자기 밀실에 갇힌 무력한 존재의 껍데기들 밖에 없는 것을. 한국 문학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들은 대체 어디서 야기된 것일까?

 

 

  사실,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듯이 난 한국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감히 문학을 논하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런 내가 한국 문학을 제법 읽었다는 것이다. 최인훈의 경우만 놓고 봐도 그렇다. 광장, 구운몽, 화두, 그리고 드라마로 만들어진 상도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하고, 알게 된 그의 소설들. 어쩌면 내게 있어서 한국문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 최인훈이라는 작가일 것이다. 특히, 이 ‘광장’이라는 작품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그의 대표작이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재밌게 읽었던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우리의 한계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명준은 어느 명문 대학에 철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는 해방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고, 어머니는 곧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한 지인에 의해 부족함 없이 보호받으며 자라게 된다. 하지만 그는 무력하다. 해방 후 남한이라는 사회 속에서 너무도 철저하게 그는 무력하다. 자유가 팽배한 사회, 그러하기에 모든 부패마저도 만연한 사회. 그 속에서 그는 젊은 호기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의 현실 속에서 그저 무력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별안간 그에게 예기치 않았던 일이 생겨난다. 북으로 넘어간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하면서, 그는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되어 버려, 빈번하게 경찰서에 끌려가고, 구타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 그동안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성과 각성의 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그에게 윤애라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알아오기는 했지만, 그의 무력함과 변변치 않은 성격 때문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던 여자. 하지만, 경찰서의 그 일 이후,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는 윤애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게 되고, 그 때부터 그는 그 동안의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나와 윤애의 집 식객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둘은 관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윤애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여자이다. 한 번 몸을 섞었기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그 다음엔 다시 그를 거부하여, 그를 힘들게 하고, 되레 그에게 어떤 알 수 없는 죄의식마저 심겨 놓는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갑작스럽게 어떤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북으로의 밀항선! 아버지가 있고, 어떤 마르크스주의라는 뜨거운 열정과 혁명의 정신이 살아있는 장소! 그러나 막상 북으로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혁명의 빈껍데기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어떤 개인적 주석도 불가능한 사회. 그저 당에서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사회. 그와 동시에 당간부로서 남한의 부르주아들과 똑같은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 모든 것은 그를 염증 나게 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뿐이다. 북한 역시, 그가 소리 낼 수 있는 광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그는 다시 은혜라는 한 여자를 통해 밀실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 은혜라는 여성은 윤애라는 여자와는 달리,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거부하지 않고 품어준다. 심지어 발레리나로서 가장 꿈일 수 있는 모스크바행도 포기하고 그를 위해 남아준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를 버리고 떠나간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한다. 남한이라는 광장도, 북한이라는 광장도, 그리고 윤애와 은혜라는 밀실도 잃어버린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광기밖에 없었다. 아니, 주인공인 명준은 그러고 싶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은인이었던 아버지의 친구 아들 태식이 자신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자신이 형사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폭행을 하고,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는 자신의 옛 여자 친구 윤애를 거리낌 없이 윤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끝까지 갈 수 없었던 그는 태식과 윤애를 몰래 탈출시키고, 그 당시 가장 위험했던 낙동강 지역으로 자원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극적으로 은혜를 재회를 한다. 자신을 배신했던 여자, 그렇지만 다시 자신을 찾기 위해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낙동강까지 찾아온 여자. 그 둘은 전쟁이라는 외부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그 둘만의 밀실인 동굴을 만들어 놓고 도피해 들어간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의 마지막 날 은혜는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명준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리하기에 휴정협정 날,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모르고, 자신 또한 이제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런 곳.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이라도 좋다. 그저 여생을 소박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그렇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정말 그런 곳이 있긴 있는 것일까? 한참을 그렇게 표류하던 어느 날, 그는 줄곧 그의 배를 쫓아오던 갈매기 속에서 은혜와 그녀가 어느 날 읊조리던 딸에 대한 소망을 새끼 갈매기 속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실종된 채,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는 캘커타를 향해 항해를 계속해나간다.

 

 

  역시, 억지로 써내려가는 글들이라 짜임새가 없다. 그렇지만 대강의 줄거리를 재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한 호흡으로 읽어내려 간 후의 먹먹한 감정을 재현시켜 본다. 결국 소설은 현실이라는 광장 속에서 남과 북이 하나로 가는 길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아니,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미력하게나마 작가는 하나로의 꿈을 소설이라는 밀실을 통해 바로, 주인공 남녀 명준과 은혜를 통해 꿈꾸었던 거 같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명준은 제 3국, 중립국으로 가는 것조차 포기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도리어 그는 은혜라는 갈매기의 표상을 통해 그들이 꿈꾸고 소망한 딸이 바로 새끼 갈매기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비록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는 순간부터 그 자신의 언저리에서 무언가 귀신처럼 달라붙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여, 총으로 쏘려고 하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내이며, 자신의 딸임을 뒤늦게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갈매기가 되어 그는 지금도 어느 저 바다 위 창공 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밀실이 아닌, 사회적 광장 속에서도 하나 되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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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광장을 읽고
97년 쯤였나..유정.무정 춘원을 떠올렸던 기억이 아련하게 있다고..왜..춘원이 떠올랐나..글의 어디에서..그의 광장은 최인훈 이라는 어떤 브랜드가 쌓아온 뭔가와 다르다 느꼈던..그게 고통스러웠는지..그 글읽고 감상 쓰기 조차 힘들었던 기억만..있다.고...가까운 시일내 다시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또 뵈어요.
 
문둥이에의 키스
프랑소와 모리악 지음 / 지성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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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

- 당신과 나의 허물어진 처녀성을 위해 남겨진 어느 고독한 이의 몸뚱이 하나

 

 

 

  쟝 펠루이에르와 에이미 그리고 기독교적 정념과 육체적 정욕, 연민과 소외, 니체의 선과 악, 그리고 문둥이에게 키스를 하는 성자의 일그러진 표정과 문둥이의 냉소... 너무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대체 어디서부터 이 글을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너무 많은 물음들은 이 글의 자연스러운 구도와 설정, 그리고 상황 그 자체에서 빚어지는 "어쩔 수 없음"을 어색하게 각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 천천히 쟝 펠루이에르를 따라 글을 다시 읽어 내려 가보고자 한다.

 

 

  우리의 쟝 펠루이에르는 비록 좋은 가문에 상속자이지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의 얼굴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형벌의 흔적이 있으며, 그의 전존재는 패배를 위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그런 소외와 절망은 그의 기독교적 정신의 바탕 아래 경도당한 니체의 물음 가운데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양양 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이다. 약자와 낙오자는 멸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멸을 촉진시키도록 힘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악덕 중에서도 가장 유해한 것은 무엇인가? 낙오자나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행위 즉, '그리스도교'이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언제 초인을 꿈꾸어 본 적 있단 말인가? 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믿을 만큼 그는 강인한 존재였던가? 오히려 지독한 패배주의자이며, 끔찍스러운 자기혐오덩어리인 그였건만, 그는 왜 니체의 이 경구들에 경도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바로 그 것, 자기의 나약함과 그 끔찍함, 그러하기에 연민에 목이메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그 종교적 중독성을 그는 철저한 죄악이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자신의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외모를 자신의 원죄라 느꼈고, 그러하기에 그것은 콤플렉스나 소외보다 원죄의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에이미란 존재가 나타난다. 생명에 불타면서 풀잎처럼 싱싱한,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순결한 육체의 소유자, 그리고 지극한 연정의 소유자... 사건의 전말이 어떠했든 간에 에이미는 쟝을 사랑해야만 했고, 쟝은 에이미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매일 밤, 원죄의식에 시달리는 쟝은 에이미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손 끝 닿지 못한 채 돌아눕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철저한 자기소외에 서러워 마른 눈물을 흘리면, 에이미는 벌레처럼 끔찍한 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중간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과연 문둥이들이 그들의 곪은 상처 위에 와서 닿는 성자들의 입김(혹은 키스)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겠는가? 쟝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에이미의 그런 동정의 키스와 포옹을 뿌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침잠의 세계, 죽음으로 내려가진다. 그렇다면 남겨진 에이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녀 또한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끔찍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 처녀가 아닌 그녀의 몸은 이러한 죄의식과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약간 둔중한 이 부르주와 여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녀에게는 체념 이외에는 모든 길이 다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파리가 들끓는 소나무 숲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정절이 자신의 겸허한 영광이 되리라는 것과,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노에미는 히드 숲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달리다가 구두 속에 모래가 괴어 무거워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발을 멈추고 장 펠루에이를 닮은 어느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었으면서도 불같은 태양의 입김에 몸을 떨고 있는 꺼칠한 나뭇잎들을 달고 있는 왜소한 한 그루의 떡갈나무였다."

 

 

  사실, 프랑수아 모리악을 단순히 현대의 가톨릭 작가로 규정한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인 공식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는 떼레즈 떼께루와 밤의 종말, 그리고 이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결코 구원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집착해 왔고, 꾸준히 그 절망적 상황 가운데 구원과 연민의 시선을 펜 끝을 통해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그 자신의 글들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연민의 시선을 매몰차게 거부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모순을 통해 기독교가 이 땅에서 지닌 실존성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끊임없이, 절망을 구원해내려 하고, 거기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절망의 이름은 그 자체로 어떤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절망은 단지 절망일 뿐이지, 구원해야 할 무엇이거나 그러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설령 에이미가 진심으로 쟝을 사랑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쟝이 자신의 원죄의식을 쉬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그런 이유로 가장 본질적인 그 추함을, 그 원죄를 그 자신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기하는 순간 그에겐 아무런 존재 가치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절망 가운데 없다 말할 수 있는가? 쟝은 끊임없이 에이미의 육체를 꿰뚫고, 그녀의 영혼의 한 귀퉁이에서 안착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에이미의 키스를 배신하고서, 단지 에이미의 육체에만 깃들기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오직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절망의 실존적 상황...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는 만큼 배신하는 절망의 본질... 이 소설은,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인 모리악은 늘 여기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기도 하고, 어쩔 땐 고통 속에서 에이미와 같이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도저히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은총이며, 종국엔 구원에 이르는 과정임을... 물론 이 은총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인간은 건드릴 수 없기에, 그가 늘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은총이었으면 하는, 구원의 여정이었으면 하는, 인간의 도저히 풀 수 없는 절망적 상황밖엔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쟝과 에이미의 정념과 정욕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풀지 못하는 신비 자체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며, 바로 그 이유로 구원과 은총의 여정 속에 놓여 있기에... 그 자체로 우리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되어준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 비록, 에이미의 허물어진 처녀성의 버거운 자위의 대상으로써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 밖에 남은 것이 없을 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무언가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무언가에게로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P.S.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는 90년대 후반쯤이었다. 시중에 프랑스 모리악 책 자체가 많이 없었는데, 특히 이 책의 경우가 그랬다. 그래서 성바오로 출판사의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하지만 원제는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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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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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 쌍둥이 빌딩과 함께 추락한 영혼들을 위한 염 혹은 날아오르기 위한 몸짓

 

 

  ‘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제목만큼 화려한 책 표지를 보고서, 처음 안을 대강 훑어 봤을 때, 많은 그림들과 난립하는 글자들을 보고서, 하이퍼텍스트를 떠올렸다. 아마 군대를 제대하고서 복학한 후 98년이던가, 99년이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각 분야의 최고의 문인 50명 이상이 모여서 ‘21세기 문학의 나갈 방향’, 뭐 이런 주제로 포럼을 했었다. 당시, 학교 신문사에 기자로 있던 후배가 문학동아리 회장이었던 내게 초정 티켓을 주어서 나는 우연히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해 들어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니, 자끄 데리다의 ‘해체’, ‘차연’이니 하는 풍월들을 듣기는 했지만, 문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접근에 가까웠고, 그에 따른 철학적 이해에 가까웠다. 여하튼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듯한,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영화와 게임에 뒤처져 소외된 문학의 현실을 토로하며, 책 속에 인물에 따른 스토리 선택을 할 수 있는 설정의 소설이라든가, 문자와 함께 시각적, 청각적 기능을 병행할 수 있는 텍스트의 등장에 대해서 자못 심각하게 논의하였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런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등장이 결국은 영화와 게임에 문학이 스스로 자리를 내어주고,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격분과 토로가 함께 줄을 이었다. 당시 문학에 갓 입문한 나로서는 그 이야기가 자못 충격적이기도 하였고,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시가, 소설이 과연 하이퍼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만, 등단을 했던 내 친동생이 자연스럽게 먹고 살 길을 찾아,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그런 동생을 통해 많은 문인들이 비록 게임의 어법과 문법 구조를 모르지만 그들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기준에 거의 초기 단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막상 소설을 읽어 보았을 때 절감했지만,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그 많은 사진들과 문자들의 배치는 그저 동화책의 그림 대신 넣어진 곁가지 수준이었다. 그러하기에 지금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소설의 하이퍼텍스트 기능이나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문학적으로 이 글의 중심과 전혀 대치되어 있는 나의 중심에 관해, 그리고 역으로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문학적으로 잘 흡수시킨 마지막 몇 장에 관해 잠깐 서술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소설 중반까지 읽어 내려가기 전까지 나는 화자가 아홉 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인 줄 알았다. 개인적인 기질 상 어떤 표지의 내용이나, 역자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소설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고, 아마 역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착각했던 이유는 처음의 몇몇 장의 문체에서 나는 아멜리에 노통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떠올렸던 데다가, 화자의 상상력이 전혀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일찍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반쯤 너무나도 명확하게 소년이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만 어이를 상실해 버렸다. 어떻게 남자 꼬마 녀석이 그렇게 아버지한테 집착을 하고, 스포츠나 개구진 장난엔 도통 관심도 없고, 채식주의자에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일 수 있는지. 그리고 취향은 또 얼마나 소녀다운지... 분홍색을 좋아하고, 노처녀 사감처럼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좋아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쇠의 비밀을 풀기위해 모든 Black들을 찾아다니는 그 모험정신과 엉뚱함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구진 소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 지나친 감성들, 숱한 강박과 두려움들은 소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게다가 사실 문체도 장 콕도의 영화에 나오는 부산한 여인들의 몸짓을 얼마나 닮아있는지, 난 작가도 여자라고 단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소 샌님처럼 생기긴 했지만 분명히 남자였다. 대체 왜 이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내 주의력의 결핍과 사전에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는 나의 습성 탓일 게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잃어버린 내 소년 적의 감수성 탓일 것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남자는 이래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구분해 왔고, 또 그 탓에 난 내게 없는 여성성에 대해 갈구하고 숭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여성을 온전히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이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왔다. 무언가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는 역으로 그것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낳는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그리고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나서였다.

 

 

  ‘금각사’, 그 책은 동생의 소개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소설보다 시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첫 장을 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그만 나는 그 소설에 함몰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전복당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우는 절정의 페이지 속에서, 함께 불살라지고, 내 속에 오랫동안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뫼르소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내 속엔 테러리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내 입가에선 교활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쌍둥이 빌딩에 들이받기라도 한 배후세력인양. 그래서 당시, ‘테러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 부끄럽지만 여기에 잠깐 그 시를 올려보고자 한다.

 

 

서쪽 멀리 먼 나라

여기저기에 테러가 발생했단다.

순간 입가에 드리운 교활한 미소가

동쪽 나라 사람들 피에 흐르는

콤플렉스처럼 번져 지고

힘으로 이루어낸 평화의 상징에

들이받은 배후세력처럼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선

고급 백화점이 무너진 적이 있었단다.

여기저기 기적에 굶주렸던 열망들이

부활한 영웅들에게 그리스도들에게

온갖 뉴스로 난사되어질 때

북쪽 동네에 사는 내 궁핍함은

옹졸하고 한 많은 기도로

전복을 꿈꾸는 찌든 아이처럼

모두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마 위 살짝 번진 미열이

새어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배꼽 한 치 아래 불거진

구멍을 뚫고서 폭발하고 싶단다.

여기저기 비릿한 조명 아래 늘어선

여신들의 자태를 일그러뜨리고

돋아나는 음울처럼

거세된 애욕들이

서쪽 나라와의 거리 때문에

남쪽 동네와의 차이 때문에

소외된 육체의 두려움 때문에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테러를 꿈꾸다

 

 

  그 당시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그만 신호등에서 그 스피드를 멈추질 못하고, 하얀 불로 바뀌어 길을 막 건너려는 소녀를 들이받았다. 순간, 소녀의 육체가 일그러지고, 버스기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스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 순간 모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감히 그 오그라든 육체를 부둥켜 울부짖을 순 없었다. 단 한 사람, 오직 그 무겁고 거대했던 스피드로 소녀를 들이받았던 버스기사를 제외하곤. 그 때, 난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할퀴지 않는다면, 도리질 하지 않는다면 평생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문학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 거라고. 그 무거운 스피드 혹은 부둥켜안은 절규, 무력감.

 

 

  그러나 정녕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떤 하나의 의미가 몸짓이 되어,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염이 될 순 없는 것일까? 소녀의 죽음 없이, ‘그 날 나는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라는 그 하나의 평범한 일상만으로 소설을 말할 순 없단 말인가? 정녕?

 

 

  처음 9살짜리 꼬마의 시선 탓인지 가벼웠던 소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911테러라는 그들의 끔찍했던 현존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선다. 덩달아 비밀의 열쇠도 그 자물쇠의 주인을 찾아간다. 엄청나게 시끄럽게 찾아 헤맸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존재했던 주인에게로.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 자물쇠의 주인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그 열쇠가 들어있던 화분을 팔았었다는 사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화분 속에 아버지의 중요한 유품이었던 열쇠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설정. 그렇지만 그로 인해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찾아 헤맸는지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부재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 거기에 마지막 주인공이 오랫동안 부재했던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관 뚜껑을 열고서 아버지에게 부재했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다는, 어쩌면 거룩한 종교의식 같고, 반대로 부재 속에서 존재를 찾으려 하는 작은 몸짓 같은, 염 혹은 기도. 마지막으로 소설은 모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이브의 시대 이전 부재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표상이 날아오르는 사진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날아오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펼쳐지는 책장의 그 사진들처럼 그 끔찍한 상흔들을 지우려는 몸짓들이 날아오를 수 있는 걸까? 우리의 끝없는 난립하는 이 문자들이 하이퍼텍스트를 넘어서 그렇게 훨훨 비행할 수 있을까? 결국, 소녀의 죽음 대신 소설 속에선 아버지의 죽음이 존재했고, 무거운 스피드의 버스 대신 911테러라는 역사적 사실이 대치된 건 아닐까? 아직도 내게서 쉬 지울 수 없는 테러리스트의 피는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생생하게 찢기며 고통스러워하는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정녕 날아오를 수 있다면, 소녀와 아버지의 죽음을 그런 모든 상실들을 피할 수 있다면, 다시 신앙 없는 이 내 마음으로 기도하고, 염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 있다면, 맘껏 추락해 볼 것이다. 날개가 돋아 오르기를 한량없이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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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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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을 찾아서

 

 

 

  황지우, 후배의 입에서 황지우의 시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인간만큼이나 꽤 난잡한 시들과 그의 육중한 몸뚱이 그리고 그 육중한 몸뚱이가 에로틱하다는 이인성 등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황지우라는 시인은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라는 시로 각인되어 있는.......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

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

태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

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

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분자분 비가 내리고, 날짜를 착각해서 못 본 기말고사에서 F학점을 맞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서 질척질척 몸뚱이를 비벼대며, 그래도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처음 편 첫 장. 어떻게 된 게 첫 장부터 온통 한자투성이의 글귀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이 건 뭐 시를 읽는 것인지, 아니면 한자 찾기를 위한 것인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시와 달리 겸손한 투의 이 시구들이 가슴 속에 무장무장 차오르고.......

 

 

  모든 근경에서 이름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

난 목선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

다로 가는 대신 위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

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

나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

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

 

 

  멀어져가는 섬들, 아버지, 그리고 솔섬의 새울음 소리, 가슴 속에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들 그렇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지독하게 죽음을 닮아있는 듯한 그리움의 그림자들. 그러한 죽음의 그리움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그럴 수 없는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린 것일까? 그렇게 섬이 멀어져가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섬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찬 그리움은 울고, 울고 또 그렇게 울어서 자꾸 자신을 흔들어 놓는데.......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에는 다시 연기가 피

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견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

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

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

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

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

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

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

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밭을 넘어가 인광의 밤바

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

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지독한 죽음과 그리움의 그림자, 그렇지만 거기에 흔들리는 시인을 어머니는 붙들었고, 시인은 건널 수 없는 바다를 건너지 않은 대신 흐릿한 빛이 비추는 인광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는다. 그러고 나서 그제야 그는 그의 아버지를 먼 바다로 떠나보낸다.

 

 

  삭망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

의 사후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들

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

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

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로 가고 여인들은

선생을 위해 저 우기의 청태밭 넘어 재배삼배 흰떡

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그 발음처럼 삭막한 죽음을 닮아있는 음력 초하루의 바람이 불고, 이미 떠나갔지만 다시 환생할 혼들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염을 하고........ 시인은 이제 그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괴로움들을 하나하나씩 뜯어, 깨끗하게 소멸시킨다.

 

 

  내륙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

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

가 그물을 내린 자궁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두 살자고 바다를 배신하고 내지로 돌아갔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내륙에 어떤 나라가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망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앞바다에서는 때 아닌 배추꽃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비 효과? 아니면 어차피 모두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그런 흔한 말? 그렇지만 여기서 시인은 바다로 건너가지 못한 대신 그가 넣었던 인광의 항아리를 다시 갑자기 화두로써 꺼내고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처음, 혼자서 여행을 떠났던 것은 수능이 끝나고, 갓 스무 살이 된 해, 그러니까 아직 대학을 들어가기 전 1월 말쯤의 겨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 외의 모든 친구들이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의 신앙에 대한 포기 선언, 게다가 그 당시 1년 중 가장 중요했던 문학의 밤 행사를 끝내고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 볼 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동해로 가는 밤 기차표를 무작정 끊고서, 홀로 여행을 떠났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당시 나의 돌발적인 행보는 꽤 존재적인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애초에 내 여행의 목표나 어떤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저 떠나야한다는 강박감, 그것이 나를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 혼자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해역이라는 곳에 저녁 5시쯤 당도하였다. 사실, 무작정 동해라고 해서 표를 끊었는데, 그래서 동해에 가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동해역이라는 곳에서 바다까지 가려면 차타고 한 20분 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무대책으로 온 나라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고작 돌아갈 때 차비와 바다로 들어갈 때의 차편 차비 외에는 1000원 남짓한 돈밖에 되질 않았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랴? 내가 ‘죽느냐, 사느냐’라는 문제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30분가량 정류소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당도한 곳이 바로 ‘추암 해수욕장’이었다. 날은 해가 짧은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매서운 칼바람이 달랑 마이 한 장 걸치고 온 내 몸뚱이를 후려쳤다. 그렇지만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정말 묵었던 가슴이 뚫리는 듯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여기에 던져 놓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1시간, 바다를 넋 놓고 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모든 것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점심 이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에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너무 급작스럽게 와서 돈도 못 챙겨 오고, 달랑 마이 한 장 입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후회도 잠시, 밤이 깊어갈수록 견딜 수 없는 추위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그대로라면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로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진 돈 1000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판기 커피에서 100원짜리 유자차를 한 잔, 한 잔 퍼마시면서, 추위를 녹이고, 허기를 달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동차들의 문을 건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그 새벽에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개들이 마구 짓기 시작하고....... 이건 뭐 해도 해도 너무하지? 내가 뭐 자동차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다행히도 깊은 밤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깨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바다로 가 모래를 덮고 잠시 누워서 견디다, 또 그것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어느 자동차 앞에 섰다. 그리고 행여 다시 경보음이 울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차문을 여는데,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 맘 좋게도 문을 잠가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차안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는데, 역시 시동이 걸려있지 않아 그런지, 바람만 막아줄 뿐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행여 차 주인이 올까 하는 심정에 제대로 눈을 부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니 시간이 후딱 1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버티면 그토록 기다리던 동해 앞바다의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심스레 차 밖으로 나와 다시 바닷가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까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내며, 변화무쌍하게 색을 달리하는 바다에 함몰될 듯 경탄하며, 그 새벽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였다.

 

 

  내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라고 하면, 너무 커다랗고, 막연해서, 도무지 와 닿지도 않고, 그래서 표현함에 있어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지 잘난 맛에 사는 시인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 제목부터 죽음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첫 장에 내 놓은 위의 ‘연혁’이란 시는 ‘바다’와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지독한 ‘죽음’의 그림자를 피워대는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역겹기 그지없었다. 맨 처음 그의 다른 시집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를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분자분 내리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내 기억 속 밤바다의 추억 때문인지, 이 시가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마치 어떤 숙제처럼 무언가 풀어내야함을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꺼내 올려 달라고, 아니 그 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의 항아리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뇌리 속에서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시에 짙게 자리 잡은 죽음의 바다가 죽음이 아닌 삶의 자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자리 즉, 삶으로 돌아와져야 하는 자리, 그리고 죽음만큼 거칠고 흉포한 삶의 자리.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

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고 나

타났다. 그 산이 게워낸 이물질인 듯한 하얀 안개꽃

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

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

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동차 부

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했

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

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다시피 우

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뱃속

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

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갔다. 그리고 뒤로 돌아

서서 그녀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

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

식이.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이란 이 시집 가운데 시에서도 그는 5·18에서 죽은 여인을 연상시키면서 지독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의 그 죽음은 그냥 끝나버린 죽음이라고 하기엔 여인의 선생에 대한 욕구는 과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정색하며 말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과한 자의식이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여인에게 하나의 단서를 남긴다. 땅, 몸, 닻.

 

 

  어쩌면 죽음에 관한 깊은 시적 염을 삶이란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과하게 엮어내고자 나는 지금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개인의 어떤 어둔 밤바다에서 인광을 찾아내고자 하는 염과 함께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내 몸부림이 역시 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스무 살 그 때로 돌아가 다시 추위에 바르르 떨며 어둔 밤바다 가운데 흐릿한 빛들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위에 꽃들이 둥둥 떠다니고 어떤 가련한 혼들이 잃어버린 몸뚱이로 땅에 닻을 내리는 환상을 바라다본다. 여전히 내지의 소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나라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굶어 죽어가고, 어디서는 정경들이 줄을 지어 구호를 외쳐대고....... 그런 모든 것들이 상관없다는 듯이 밤바다 위에 꽃이 피고,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1시간, 2시간........ 찬란할 줄만 알았던 일출... 흐릿한 날씨에 그런 일출은 도무지 나타날 기세가 없다. 땅으로 몸뚱이를 닻으로 내리려는 혼들도 이제는 밝아오는 햇살에 흐릿해져 간다. 바로 그 때 먼 구름 사이에서 붉은 햇살이 인광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길은 없다. 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 한 켠에 저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의 자리를 하나 남겨 놓는다. 그리고 이제 나도 환상으로 둥둥 떠다니던 내 몸뚱이를 찾아 땅에 닻을 내린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이제 매일 떠나가는 삶임을 그러한 여정임을 깨달아 안다. 마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새들이 뜨는 이 세상이 여전히 대지의 중력에 묶여 늘 그대로이지만, 그래서 언젠가 새들도 대지의 중력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떠버리겠지만, 하루라도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대지의 중력을 벗어나 떠있는 이 대기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한 번 들이 마셔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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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장...과 연가와 같은 즐거운 편지˝ 사이의 그 거리..란...즐거운 편지로 만난 황지우.를
진정 내 안에 살게한 건..풍장을 알고 이후.부터..연가적 ..편지로는 가 닿지 못했던 그였다면..한 참이나..흘러..풍장을 그리는 그의 시를 알고..이후에는 편지 조차도 모두 그러안을..수있는 시인의 세계.확장.
나머지는 그저 허겁지겁..삼키기..바쁜..허기가되었다.고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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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 변신에 관한 변명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앞서, 보통 변신이 가지는 의미 혹은 목적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고 싶다. 이를 위해 잠깐, 잘 알려진 우습지도 않은 군대개그를 하나 들먹여 보고자 한다.

 

 

  군인의 운전 시, 좌석에 높은 분이 있을 경우 항상 복창 (원래는 명령을 확인했다는 의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라고 해서, 미리 앞으로의 행동을 얘기하는 것이 철칙이다. 즉,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미리 "우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좌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좌회전하는 식의 행동을 의미한다. 기어를 바꿀 때에는 "2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운전병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모 이등병에게 어느 날, 별 두 개짜리(스타=장군)를 태우고 운전을 해야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일개 이등병이 장군을 태우고 운전해야 하니, 그 얼마나 떨리겠는가! 그 옆에 몇몇 대령들도 함께 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모 이등병은 그 시작부터 바짝 긴장했고, 출발하기에 앞서 겨우 떨리는 손으로 차의 핸들을 잡았다. 곧 이어 장군이 뒷좌석에 앉았고, 대령들도 자리에 함께 했다. 이윽고 이등병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부르릉~~

 

 

  그런데 이등병은 갑자기 변속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당장 기어 변속은 해야 하고 또 복창도 해야겠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생각나는 대로 복창을 하기 시작하였다.

 

 

  "2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

 

 

  옆에 탑승했던 조교의 표정은 굳어졌고, 대령들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은 표정 하나 변함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해, 다들 내릴 시간이 되었다. 그때 장군이 조용히 운전병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 합체는 언제하나?"

 

 

  우스갯소리지만 이 개그 가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변신에 대한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합체!! 비단, 어릴 적부터 우리가 즐겨 봐 온 만화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는 늘 이렇게 변신은 합체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변신을 할 경우, 사실 그 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녀 합체이다. 그리고 어린이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변신하는 이유 역시, 그것은 이 사회와의 합체나 혹은 또 다른 의미로써의 합체를 원하기에, 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늘 무언가 변신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와 합체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변신과 합체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또 무언가를 상실하기도 한다. 다시 그러한 예를 들기 위해, 또 우습지도 않은 개그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이 땅에서 선하게 살다 죽어서 천국에 올라간 세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셋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이야기 해보라고 하였다. 첫 번째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별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별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나왔다.

 

 

  "전 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의 차례가 왔다. 그런데 그는 조금 욕심이 많아서인지, 별도 되고 싶고, 또 왕도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하나님께 그 두 가지를 모두 간청하게 되었다.

 

 

  "전 별도 되고 싶고. 왕도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스타킹이 (별=스타, 왕=킹 => 스타+킹=스타킹) 되게 하였다고 한다. -,-;;

 

 

  이 역시 매우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변신을 통한 합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아주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와의 합체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전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괴물로의 변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어릴 적, 가장 증오하고 역겨워하며 두려워했던 존재인 몬스터, 바로 그 끔찍한 몬스터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쉬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카프카의 변신은 어떤 범주에 속한 변신일까? 이제 본 이야기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매 주 독서 토론회 비슷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이 카프카의 변신을 택했고, 그래서 이 '변신'이란 주제를 통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는 그러한 변신에 대한 연민만 앞섰을 뿐, 정말로 카프카의 변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묻거나, 알기는 힘들었던 듯싶다. 그러나 대학 때, 학교에서 문학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변신을 주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변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과 물음들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직도 나는 카프카의 변신이 어떤 변신인지에 대한 물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변신이었을까? 아니, 왜 변신한 것일까?

 

 

  사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보면, 나의 위의 물음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나오고 있지 않다. 아니, 카프카는 그런 물음에 대해 거의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거나, 관심 자체를 두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그레고리는 끔찍한 벌레로 변신이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가정에서 철저히 냉대 받다가 죽어 버리게 될 뿐, 거기에 별반 특이한 물음이라든가 내용은 보태어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흔히 우리 주위의 치매 환자 이야기나 혹은 조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이해해왔고, 사실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그것에 대한 알레고리로 한정짓는 것이 가장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불현듯 내게 그 변신이 그레고리 자신 혹은 카프카 자신이 가장 원하였던 변신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즉, 그 변신을 통해 사회와 가정에 철저히 냉대받기를 그레고리 그 자신이, 혹 카프카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늘 소외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소외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생각할 경우가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때론 소외라는 것은 철저히 내부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타인과 자기 자신과의 분명한 경계를 구분지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는 일, 어쩌면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그 소외감이란 것은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비롯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즉, 소외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철저히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해 내는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왜 그러한 변신의 이유를 숨기고서, 변신을 통한 사회와 가정의 냉대에 더욱 초점을 맞춘 것이었을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합체에 대한 의미를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극심한 경우 타인과의 철저한 결별한 통한, 소외라는 변신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그러한 변신의 이유엔 항상, 그 소외의 이유엔 항상, 합체라는 목마름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철저히 자기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모든 타인들을 지옥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와 실존만을 이야기하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우리 뇌리 언저리에 남아 있는 합체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쉬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변신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는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카프카를 통해서 대변되는, 우리 모든 변신의 목마름에 대한 그 변명을 감히 감행해보고자 한다.

 

 

  카프카 그 자신은, 모두가 잘 알겠지만,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으며, 또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불살라 버리고, 남은 작품들마저 친구에게 불살라 줄 것을 부탁하고 세상에 안녕을 고하였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런 점들만 살펴보았을 때는 분명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변신은 철저히 자기 소외를 위한 변신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글이란 것도 항상 깊은 굴을 파거나, 단단한 성을 지어, 그 속에 갇히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우리는 그의 삶과 그의 글을 통해서 모두, 그의 변신에 대한 이견을 달리 붙여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카프카 그 자신이 그 변신을 끔찍한 벌레로써 밖에 표현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만약 그의 변신이 성공적이었다면 카프카 그 자신이 자신의 변신을 벌레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카프카는 낮에는 법원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철저히 자기 삶을 충실히 이행함과 동시에, 밤이면 밤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서 평생 동안 철저히 지키면서 글쓰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의 변신에 관한 열망은 대단했으며, 치열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변신은 그가 어떤 합체를 꿈꾸었던 간에, 그가 생각한 바와는 달리 전개되어진 듯싶다. 그러하기에 그는 늘 자신의 작품들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변신’이란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끔찍한 벌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들로 인해, 그는 그의 작품 '변신'에서 변신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의 변신은 그가 결코 원하고자 했던 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어느 날 그렇게 변신이 되어져 있었고, 그러하기에 그 어느 날 심판의 형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가 최후에 선택한 죽음과의 합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이 내게 묻는다.

 

 

  "언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지?"

 

 

  "넌 닿을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난 너하고 하나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넌 늘 나에게 닿으려 밤마다 몸짓하며, 기도했잖아."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어. 그건 나 혼자 견디기 위한 자위였을 뿐이야."

 

 

  "그럼 너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니?"

 

 

  "아니... 하나가 되고 싶어..."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가 되었다고 믿으면 돼. 알겠니?"

 

 

  "............"

 

 

 

 

  별이 지고, 나는 다시 밤을 기다려 본다. 카프카가 치열하게 끔찍한 벌레로 변신을 하고, 죽음으로 내려갔던 그 밤을 별과 함께 지새워 보기 위해....... 그리고 내 자신도 언젠가는 어머니 자궁과도 같은 안온한 죽음과의 합체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하지만 만약 치열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죽음과의 합체에서 두려워 이탈해 버릴지도,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 밤, 조금 더 치열해지기를, 조금 더 버거워지기를... 그래서 별과 하나 될 수 있음도 믿어 볼 수 있기를, 두렵게 몸짓하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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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변신을 고등학생때..읽었고..나중에 졸업하고 잠시 서점에서 알바를 하며 다시 ..본 기억이 있어요. 우리의 시간이 겹치지는 않겠지만..저의 글읽기는 누구와 나눌 형편이 못됐었어요.잠시 그런 때가 있긴 했지만 그 반가움..과 설렘이 내내 행복을 준 건 아니어서..그 무렵은 세계문학보단..국내 작가들편에..또..영화와..음악에..위로를 받곤..했어요.영원한 벗은..없을지도 라며..
외로워했고요. 변신에 대한 제 생각은 스스로가 벌레로...더는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기를 꿈꾸며 자유를 갈망한 카프카의 희망으로..가득차 보였어요.미세하여 번식은 끊임없이 이뤄지며..도처에 있으나 그 있음을 들키지 않음으로 생을 살아갈 수 있는게 벌레...
그도 그런 바람을 원하였다고..계속되기를..
아무도 모르게..그의 부스럭거림은 그저 못본척 외면 되어지길..그래야..연장되어갈 테니까..그도 시선에서 벗어나고싶다..한 낱 미물이 되서라도..그랬던건 아닐까..하면..너무 단세포적 접근이라고 할지요..!ㅎㅎㅎ

몽원 2015-01-13 20:52   좋아요 0 | URL

아니오. 무척이나 새로운 시각!! 같습니다. 이 글 역시 오래 전 글이라 지금 다시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저도 어떨지 기실 잘 모르겠어요~ 님의 말씀대로 합체가 아닌 벌레 그 자체에 대한 변신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단세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카프카스러운 느낌처럼 들리네요^^

[그장소] 2015-01-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단.삼단..보면 일단 벌레이길 희망하다.보다..더 근본의 뭔가 있었겠지만..오늘은 일단까지만...합니다.

[그장소] 2015-01-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를 연상케하는 국내 작가들이 간혹 있어요.잠깐씩 비춰지는 광각이긴 하지만.. 그래서 변신은 여러번 곱씹게 되더라고..하지만 이미 제 안에서 변태한 카프카를 그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몽원 2015-01-13 21:12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아직 소천해서 국내작가들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기호의 <수인>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고 서유미의 <당분간 인간>이란 단편집을 보면서 카프카를 떠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님 말씀대로 이 역시 제 마음속 카프카가 변태해서 마음대로 투사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