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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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달에 울다 그 시적인 여운에 취해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가슴속에 깊이 남는다. 진한 여운이 남아 지금 내가 사과꽃에 취한 건지, 빨갛게 물든 달에 취한 건지, 흐드러진 야에코의 젖무덤에 취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아직 정리되지 않고 취한 상태에서 품평을 하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주절거리고 싶은 이 기분은 분명, 이 취기 탓이라 여겨본다. 한동안 나는 글쓰기는 재미에 있다고 생각했다. 재밌지 않은 글이, 혹은 본인이 재밌게 쓰지 않는 글이, 무슨 글이겠냐는 간단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본질이 거기에 없음은 내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재밌어도, 무언가 멈추는 지점에 대해 최근 생각했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지점, 그렇게 떨림을 가쁜 호흡을 잠깐 고르고, 진한 흥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달에 울다.’를 보고서 허튼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나의 글쓰기는 시적인 무언가에 대한 추구였다. 시에 대한 집착이 무언가 서사로써 길게 이어져, 깊은 여운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관념이었다. 시로서 무언가 그것을 느껴보았지만, 소설에서 그걸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글쓰기가 무언가 목도하게 되었다. 사실, ‘달에 울다이전에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 밤의 기별을 읽었다. 거기서도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뭐지? 어떻게 이런 시적인 소설이 있지? 무언가 쉬 범접할 수 없는 그의 기법에 충격적인 여운이 컸다. 그리고 아쉬웠다. 만약 내가 일본어를 제대로 알았다면, 더 각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시적인 기법을 소설 속에 녹여 놓은 것일까?

 

 첫째는, 반복되는 풍경의 묘사이다. 사실, 풍경 묘사만큼 소설에서 애매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문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마루야마 겐지는 같은 풍경에 대해 여러 번 묘사함으로써, 그 풍경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이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되는 병풍 속 노사에 대한 묘사, 사과꽃에 대한 묘사, 달에 대한 묘사, 그런데 기묘한 건 그 풍경의 묘사가 조금씩 다르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전이하는 것처럼, 풍경은 조금씩, 조금씩, 차츰차츰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변해간다. 그 풍경처럼 마을의 풍경도, 주인공의 심리도, 야에코도 변해간다. 비단,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밤의 기별에서도 마루야마 겐지의 풍경 묘사는 비슷한 묘사를 택했다.

 

둘째로, 그가 각별한 점은 각 풍경을 묘사할 때마다 쓰는 암시와 상징에 있다. 소설의 병풍 속 노사는 자신의 할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 같으면서도, 결국 주인공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저 산기슭에 숨겨진 주인공만 아는 사과밭은 주인공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 언젠가 그는 야에코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도 없고, 그렇기에 주인공 가슴 속에서만 깊이 간직된 이상향, 몽유도원도이다. 달은 계절과 함께 그 빛깔을 같이 품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사과꽃처럼 은은한 향을 품어내서, 야에코와의 관계와도 묘하게 연관을 가지면서, 결국엔 진다. 야에코처럼 혹은 주인공 자신처럼, 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인 촌장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적인 특별한 기법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막연하다는 점이다. 어떤 것 하나 분명한 선이 없다. 마지막까지 그의 소설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시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그 시적인 암시나 상징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그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모든 불확실성이, 그리고 그 막연한 불안정함이 소설 전반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사람을 홀리게 하고, 취하게 하는 것일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사과꽃 향을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지만 사과꽃 향기에 취했고, 그 취한 달밤의 수많은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 떨리는 이 기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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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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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아버지의 신화화에 관해

 


 박범신 작가의 작품은 은교’, ‘소소한 풍경이후로 이번에 읽은 소금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전에 은교소소한 풍경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감성과 몽환적 풍경에 감동을 받은 탓에 조금 기대를 했다. 다만, 제목이 약간 마음이 걸렸다. 무언가 진부하고 올드한 감성을 풍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철에서 1시간 동안 약 60페이지를 읽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시대가 갑자기 거꾸로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을 읽을 때, 서두가 너무 장황하면 읽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어떤 절실한 화두가 있어서 선택한 책이라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손에 잡은 소설이 초반에 지루하다면, 누가 끝까지 읽겠는가? 그 때문에, 잠시 시간을 두고서, 독한 마음으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나름대로 이야기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긴 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네 소설  대부분은 아버지란 이름에 신화가 덧씌워 있다. 폭군, 책임, 고생, 억압 등등,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단어를 연상시킨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쟁 이후 베트남전 참가, 군부 독재 시대, 중동 파견 사업 등으로 아버지의 이름들이 겹쳐진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오셨고, 그 덕으로 나는 대학을 마치고,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은 내가 신학대를 가겠다는 이유로 가출을 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쓴 17장의 편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도 베트남전에서 군종이었고, 제대 후 바로 결혼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3번이나 다녀온 아버지의 절절한 삶을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접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신화화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미묘한 심리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신화화는 아들이거나 딸 자신의 신화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의 신화화를 통해 아들인 나 또한 신화를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니 그런 심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물론, 이런 심리가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을 삶을 긍정하는 데 있어서, 가족의 영향과 힘이 가장 중요한 자산인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신화는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해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신화를 대물림한, 그 커다란 윤회와 같은 고리를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확립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일단,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 속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예로 선명우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세 딸의 아버지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일생 한 마디 불평 없이 살아온 남자가 아주 우연한 사고로 인해 집을 가출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 췌장암 말기라는 전조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인간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이게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고 당시 주인공이 본 소금에 대한 인상이 바로 자기 아버지와의 연결 매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그가 전신마비가 된 김승민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선명우가 아닌, ‘김승민이 된 것일까? 첫째는, ‘천명우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책임이란 미명에 묶여,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김승민의 삶은 달랐다. 그것은 유랑의 삶이었고, 유랑엔 지금껏 그가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가족을 위해 오직 회사에서 생산성이란 이름 아래 묶여, 그 구조를 평생 못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그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찾고, 동시에 전혀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짜 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설정이고,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원론적으로 그 이전의 가족에 대한 선명우의 책임이다. 그의 이탈로 인해 한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선명우김승민이 됨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버린다. 너무 극단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선명우를 강조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설정들이 너무 길고, 그 설정들이 전부 이제까지 우리 한국 소설에서 오르내린 이야기뿐이다. 게다가 얼마나 중언부언이 많은지, 읽다가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결국 이 소설도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나열함으로써, 아버지에 관한 신화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조금 더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며,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끝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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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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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네 가지 코드로 읽고, 비교해 보는

 

 

 다 읽고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문장도 유려하고, 무언가 여성풍, 그리고 젊은 층을 대변한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델마와 루이스가 생각났다. 물론, 너무 올드하고, 매체 자체도 소설이 아닌 영화이지만, 왜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그런데 중요한 건, 너무 오래전에 보아서, 기억이 희미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다시 보고서, 조금 숙고한 뒤, 이제야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일단은,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을 네 가지 코드로 분석해서 살펴보려 한다. 여성 코드, 동성애 코드, 일탈 코드,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 관한 코드이다. 먼저, 여성 코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누가 봐도 여성의 전유물인 냄새가 풀풀 난다. 문장 하나하나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주인공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라든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 여성 코드를 표현하는 방식이 기존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여성 코드는 남성이라는 주적 하에 이루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만 보아도 마찬가지로, 강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남성은 주적도, 그렇다고 동반자도 아닌, 그저 하나의 도구처럼 설정되었다. 그것도 그나마 아람이 조금 이용하는 도구이거나, 삶은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이 소설에서 다른 부분에서는 그 역할 자체가 너무 미비하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이 소설은 동성애 코드로 성 코드의 전환을 이행한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에서도 미비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동성애 코드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두 여자는 짧은 입맞춤을 하고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를 훌쩍 넘어, 어느덧 2020년대를 넘어서는 지금 동성애 코드는 더욱 적나라해지고, 더더욱 진일보 하였다. 끈적끈적한 여름밤 소영은 벗은 몸으로 주인공 강이에게 똑같이 벗을 것을 강요한다. 그렇게 더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훌훌 모든 실오라기를 털어버리고서 까무룩 잠이 들면 그만인 것을 깨어나 보니, 소영이 어느새 주인공 강이의 가슴을 핥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름 둘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밤이면 서로를 만지며 탐닉해 들어간다. 그런데 이 표현엔 한 가지 어패가 있다. 서로라는 말이 다소 버석거리는 감이 있다. 무언가 탐닉하는 이는 소영이라는 건 확실한데, 주인공 강이의 경우는 조금 두려워하는 느낌이다. 아니, 뭐랄까, 소영을 동경하면서도 무서워한다고 할까? ‘델마의 루이스에서 보여준 평등의식이거나 우정에 가까웠던 동성애 코드는 이렇게 무언가 계급 차이를 보여주는 동성애 코드로 다소 복잡하게 변모했다. 이 때문에 두 세대의 일탈도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남자에 대한 복수로 일탈이 구성되어 있다. 처음 여행을 출발할 때부터 델마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한마디도 없이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루이스가 총을 들어 델마를 강간하는 남자를 죽이는 장면, 그리고 거의 종반쯤 계속 마주치는 화물차 운전자의 성적 희롱과 폭언을 참지 못하고, 두 여자가 총을 들어 화물차를 폭발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왜 남성을 향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지 전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동성애 코드에서 계급 차이를 보여준 이 소설은 그 둘의 대립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누군가는 그 계급을 유지해야 하고, 누군가는 전복해야 한다. 주인공 강이 눈에 어른거리는 하얀 몸의 예쁜 소영은 언제나 자신을 학대할 뿐, 단 한 번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빈부의 차이까지 둘은 양극에 위치에 있다. 만약, 어떤 시발점만 주어지지 않았다면, 착하다 못해 약간 멍청하고 무딘 주인공 강이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읍내동 사는 주제에라는 말에 강이의 방아쇠는 당겨진 것일까? 모두 잘 사는 동네인 전민동에 사는 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혼자만 읍내동에 살았기 때문에, 줄곧 자신도 모르게 콤플렉스로 무의식에 박혀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동경했던 소영에 대한 공포의 근원을 그 말을 발단으로 찾게 된 것일까? 동성애 코드와 엇물려 공포심을 동반한 동경이라는, 경외라는 그 감정이 순식간에 증오와 원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소영을 칼로 찌르고 감옥으로 가는 것이 왜 최선의 삶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이의 일탈은 이렇게 전적으로 소영이라는 대상 하나에 집착하고 있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사실, 마지막 장면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젊은 세대를 보여주는 코드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 코드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내 뇌리를 때리기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로, ‘델마와 루이스가 문득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델마와 루이스가 보여준 일탈은 주적인 남자인 나조차도 전율을 느끼면서, 짜릿함을 느꼈으니까. 동시에, 그 일탈의 코드가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로 충분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여운도 넉넉했다. 그런데 이 최선의 삶이 보여준 청춘 군상들의 일탈 코드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나로선 당최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절망이 청춘이라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기에도, 주인공의 집착 대상은 너무 협소하다. 물론, 여기에 이미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쌓인 계층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화두로 받아들이기에 이 소설이 그만큼 충분한 여운과 감동을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소설이 꼭 어떤 화두를 던져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그저 상황 묘사를 잘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정말 내가 라떼는하는 꼰대로 변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이 소설로서 그 자부심을 잃어가기 때문일까? 여러 생각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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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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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의 중요성 새로운 권력의 탄생과 막장의 지평 확대에 대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에 관련된 병을 얻고 난 후유증 탓인지, 어떤 책이든 읽고 쉬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다. 그래선지 읽는 순간, 무언가 강렬하게 꽂히는 글은 어떻게든 기억에 남기고 싶은 이유로,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이 저절로 끓어오른다. 이 글이 그랬다. 사실, 별 기대 없이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와일드란 작가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란 작품이 내 20대 때에는 분명,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피어오르게 했지만, 지금 다시 봤을 때 너무 과장된 미학이 아닌가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들을 보면서도 너무 감정의 결이 날뛰고, 풍자와 해학이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너무 극에서 극으로 널 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간극처럼, 혹은 이 사람의 무언가 종잡을 수 없는 삶처럼, 불안하게 널 뛰는 대부분 작품을 그냥 대충 흘려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오스카 와일드를 붙잡고 보았느냐면, 또 그 널뛰기의 간극에 대한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견한 작품이 이 진지함의 중요성이다. 일단,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지극히 유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풍자와 해학을 담은 희곡이며, 무언가 절묘한 막장에 대한 재해석으로 내게 읽혔다. 물론, 그 시대에 막장이란 개념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막장은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이복 남매의 사랑, 혹은 드라마의 흐름을 떠나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주인공의 출생 비밀 등이 발견되는 그런 류의 막장이니까, 오스카 와일드의 시대에 더군다나 영국에서 그런 개념이 있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오스카 와일드가 막장의 근원을 건드리고, 통쾌하게 희화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일까? 지금부터 살짝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크게 두 명이다. 한 명은 잭이란 청년으로 시골 태생의 상인에게 길러졌는데, 어니스트 워딩이란 다른 이름으로 런던과 본인이 자란 시골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앨저넌이란 청년으로 런던의 귀족 출신인데, 형식적이고 점잔빼는 귀족 생활의 권태로움에 번버리되기란 놀이로 지방을 다니며, 약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번버리되기란 이 글에서 창조한 언어인데, 지금은 영어사전에 관광여행을 즐기다.’란 뜻으로 등록되어 있다. , 여흥을 즐기는 삶을 어느 정도 표방한 의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서 번버리되기는 앨저넌의 독특한 이중생활을 의미하고 있다. 시골에 아픈 친구인 번버리를 설정함으로써 따분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벗어나는 핑계로 자주 삼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은 교묘하게 이중생활이라는 접합지점이 있다. 하지만 성격적인 차이와 태생의 차이는 무언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잭은 조금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인 반면에, 앨저넌은 다소 자유분방하고 방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신분 구조상으로 볼 때도 잭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신분이 상승한 상인을 대표하고, 앨저넌은 형식만 남은 귀족층을 대표하는 구도를 띠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진다. 사실, 잭이 런던에서 어니스트 워딩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시골의 따분한 생활을 벗어나려는 방편으로도 언뜻 보이지만, 실은 앨저넌의 사촌동생인 그웬델린 양을 열렬히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웬델린 양의 이상은 어니스트란 이름의 청년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 잭은 런던에서 어니스트가 되어 뜻하지 않은 이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청년의 태생은 우아한 귀족과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그냥 부유한 상인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웬델린 양도 어니스트란 이름의 잭을 사랑했고, 흔쾌히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정말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 브랙널 부인이 여기에 딴지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기어이 잭의 태생의 비밀을 파고들어, 잭이 어릴 적 가방 케이스에 넣어져 빅토리아 역에서 발견되어 토마스 에듀라는 상인에게 키워졌다는 사실을 실토하게 하고, 격이 맞지 않다며 사달을 내버린다. 그런데 불 난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그의 친구 앨저넌은 그의 본가에 찾아가 그 주특기인 번버리되기로 그가 후견하고 있는 토마스 에듀의 딸 세실리 양과 새롱거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약혼까지 맹세하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부아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름 그에게도 책임은 있다. 일단, 그가 이중으로 생활하면서 본가인 시골에 자신이 어니스트란 망나니 동생 때문에 런던을 오간다는 핑계를 댔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 사실을 앨저넌에게 들켰다는 점이다. 그러니 번버리되기의 달인인 앨저넌은 급기야 자신이 잭의 동생인 어니스트가 되어 세실리 양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 세실리 양도 이상이 어니스트란 이름의 청년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어떤 면에선 분명 제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긴 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런던에서 생활할 수 있는 모든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그웬델린 양과 결혼할 수 없다는 그 사실로 이미 그는 가상의 동생인 어니스트의 죽음을 설정하고, 상복까지 차려입고 왔는데, 버젓이 앨저넌이 어니스트가 되어 살아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번 번버리되기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게, 그 방탕한 앨저넌이 세실리 양의 미모에 반해 어니스트란 이름의 세례명까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가는데, 여기에 갑작스럽게 그웬델린 양까지 찾아온다. 등장과 동시에 그웬델린 양은 잭과 앨저넌이 없는 상태에서 세실리 양과 마주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바로 여기서 둘은 서로 적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둘이 동시에 약혼한 사람이 어니스트라고 하니, 당연히 서로 아니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둘의 태생도 어찌나 다른지, 한 명은 고상한 귀족 출신의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은 시골에서만 자란 18살의 어린 처녀이니, 서로 비꼬는 방식도 매우 볼만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들의 두 남자가 돌아와 그 둘의 오해는 풀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알고 보니, 두 남자 다, 본명인 잭과 앨저넌이란 이름이 아닌, 어니스트란 이름으로 그동안 자신들을 속여온 것이다. 이에 매몰차게 두 여자는 두 남자를 내쳐버린다. 이제 두 남자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방법은 어떻게든 세례명을 어니스트란 이름으로 받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둘에게는 각자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 하나씩 주어져 있다. 먼저 잭은 그웬델린 양의 어머니 브랙널 부인이다. 아무리 그웬델린 양이 사랑을 찾아 그 시골까지 왔다고 하지만, 그 극성맞은 브랙널 부인이 가만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딸을 찾아 브랙널 부인은 기어이 그의 본가까지 왔고, 이제는 급기야 세실리 양을 탐내기 시작한다. 비록 시골 출신이라도 13만 파운드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시골에 적지 않은 땅과 그 당시 부를 대변하는 상인 계층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잭이 잠자코 가만히 있다면 말이 안된다. 일단, 누구보다 그는 앨저넌이란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다. 그의 번버리되기란 일종의 방탕한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해 왔을지 그가 직접 겪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웬델린 양과의 결혼은 반대하면서, 돈을 이유로 자신이 후견하고 있는 세실리 양을 데려가려고 하는 브랙널 부인의 심보를 어떻게 곱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는 후견인으로서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 일단, 그는 작고한 세실리 양의 아버지로부터 법적 후견인 자리를 양도받았다. 그 권리는 세실리 양이 35살이 될 때까지이다. 다시 말해서, 세실리 양이 35살까지 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결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잭과 앨저넌 둘 다 모두 쫑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급작스런 반전이 등장한다. 잭과 앨저넌 모두 마지막 수단으로 세례를 부탁했던 지역 사제 채저블 신부가 와서 세실리 양의 가정교사 프리즘이란 이름을 우연찮게 흘리는 순간, 브랙널 부인이 격하게 반응하며 반전의 서막이 드리운다. 아니, 막장의 공식이 드리운다. 30년 전 브랙널 가문의 한 여인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서 사라졌는데, 그녀가 바로 프리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을 법한, 브랙널 부인은 소설책이라고 명명하며 이를 가는 3권 분량의 일기가 유모차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불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브랙널 가문을 도망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가방에 담아 빅토리아 역 임시 보관소에 숨겨놓은 후, 발견한 토머스 에듀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어, 먼발치에서나마 늘 아들 곁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 실제로 잭과 앨저넌은 이복형제였고, 잭이 앨저넌의 형이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존 장군의 세례명이 어니스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둘은 어니스트란 이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꿈인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과 짝을 이루며,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글을 다 읽고서 떠오른 문장은 처음에도 밝혔듯이 막장의 새로운 지평이란 생각이었다. 비록 그 당시 그런 개념이 없었을지라도, 서구 사회의 기반이 되는 그리스 신화가 거의 막장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과 친부 살인 등으로 이루어진 설화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서구 사회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신화는 이런 막장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내가 이런 막장이란 개념을 인류학적으로 확장시킨 이유는 그 근간을 분석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막장이란 개념이 이렇게 모든 인류에게 친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보고자 함이다. 이 때문에 모든 문학과 드라마는 막장을 기본으로 하여, 재탄생하고, 또 다시 재해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왔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또 이 때문에 막장이 우리 안에서 진부함이란 등식으로 성립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의 진지함의 중요성은 이 막장 공식을 이용해서 아주 유쾌하게 그 당시 사회계층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앞에서도 줄곧 조금씩 언질을 준 것처럼 이 희곡이 쓰였을 당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서 지위만 남은 귀족과 자본이란 막대한 권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상인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허위의식과 그 당시의 세태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읽는 이에게 통쾌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본질은 매우 씁쓸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희곡이 보여주는 것은 각각 명예이거나 지휘가 필요했던 상인 세력과 돈이란 흐름으로 뒤바뀐 새로운 시대의 이해가 부족한 귀족 계층이 협력함으로써 또 다른 지배권력으로 등장하는 진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도 매우 그럴듯한 합리성을 부여한 것처럼 대중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 이유로 제목을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라고 만들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물론, 이 글에서 그런 합리적인 이유가 드러나는 지점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다. 오히려 어니스트란 이름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는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합리성 혹은 진지함이거나 정직함에 대한 집착이 그 당시 두 계층을 하나로 엮는 명분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제목의 풍자는 결코 해학적이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 소름이 끼친다고 할까? 더 이상 지위가 아닌 돈이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기존의 권력 체제와 새로운 권력이 하나로 될 수 있는 명분은 간단하다. 없는 합리성을 만들면 그만이다. 자본주의란 이름을 빌려서 노력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당연히 일반 사람들에게 그 논리는 통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반노예나 다름없는 농노도 아니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을 갖고 돈을 벌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물론, 실제로 그랬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지금도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합리성이 더 이상 깰 수 없는 구조를 공고히 갖추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 희극에서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이 그토록 비합리적으로 합리와 진지함을 구하는 게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지, 잠깐 생각해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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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김지우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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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오해와 편견 그리고 문학의 세 가지 난제에 대해

 

 

 

  평소에도 한국 소설가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이번에도 역시 이 소설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번에도 대충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면 될 뿐이라고 생각하고서, 김지우란 이름을 도서관 앱으로 검색을 했을 따름이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가 맨 위에 검색창에 뜨고, 다음으로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가 떴다. 둘 다 분명히 김지우란 이름의 작가였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려고 하니, 한 권은 청소년으로 분류되고, 다른 한 권은 소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내 기억이 왜곡된 건지 어떤 건지는 정확지 않지만,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가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라는 책이 소설로 따로 또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깐 소설가의 약력을 살폈다.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문득 선생님보다 작가님이라 불리고 싶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거리낌 없이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를 읽어 내려갔다. 정말 선생님 법한 글이었다. 온갖 토속어에 순우리말들의 잔치, 국어교육을 전공하지 않고서 과연 누가 쓸 법하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오류가 발생했다. 청소년 문학에서 찾은 소설이란 편견에 무언가 비슷한 뉘앙스의 두 제목이 내게 주는 심각한 오류였다. 뭐랄까, 예상과 달리 너무 올드한 느낌에 난문이었다고 말하면 좋을까? 나도 보기 어려워서 사전 찾아가며 겨우 보는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본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작가는 전혀 다른 작가였다. 만약 모임에서 누군가 짚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또 다른 김지우의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를 읽으면서, 헤어나올 수 없는 오류의 덫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두 작가가 이름만 같고, 전혀 다른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또 다른 김지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나는 원래 비평을 하려던 김지우 작가의 소설집에서 무언가 놓쳐 내내 아쉬웠던 질문들을 새삼 다시 들쳐 볼 수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앞서 논외로 다른 김지우 작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겠다.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원래 김지우 작가에 비견해 수준 미달이다. 아무리 좋게 보고,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문학으로 조금은 장난친 기분이 들고, 괜한 사념놀이에 빠져있는 느낌이 과하다. 만약 원래의 김지우 작가를 보지 않고 봤다면, 조금 더 다르게 평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의 겹이 다르고, 무게라 표현하긴 그렇고, 뭐랄까,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진정성이 다르다. 또 다른 김지우 작가는 그저 자기 세계에 몰두해있다면, 원래의 김지우 작가는 다채로운 세계를 다채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드하다고 분명 말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청소년 문학이란 말도 안 되는 편견으로 시작된 오해였다. 둘째는, 초장부터 문학의 뉘앙스와 주제들이 내게 있어 너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올드하다는 것은 문학에서 무조건 나쁜 것일까? 아니다. 결코,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늘 올드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거부반응을 선천적으로 느끼는 걸까? 문학은 늘 새로워야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늘 새로울 수 있는가?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세상 사는 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어떻게 늘 새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문학은 늘 현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일까? 일정 부분 이 사실은 맞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껏 봐온 위대한 소설들은 모두 올드함이란 모태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대에 현재적으로 해석되었을지라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소설도 태반이다. , 올드함은 소설의 기준을 잴 때 결코 잣대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럼에도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올드함에 기대어 우려내고 우려낼 대로 우려낸 진부함이다. 그렇다면 김지우의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란 소설은 과연 진부한 소설집일까? 반은 맞고, 반은 그렇지 않다. 소재적으로 다소 올드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부 올드하다고 폄하하기엔 소설의 전체적인 겹이 남다른 부분이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주제도 난제이긴 하다. 왜냐하면, 이 부분 역시 올드함과 연결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문학이 과연 국어적 사명을 갖고, 순우리말과 토속어에 집중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난제다. 일단, 순우리말과 토속어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글을 올드하다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전히 그런가 하면 또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예를 들어, 이 소설집의 물고기들의 집눈길은 이런 토속어와 순우리말의 집결체이다. 그러다 보니, 쉽게 올드하다고 몰아가기 쉬운데, 찬찬히 읽어보면 주제적으로나 소재적으로 매우 세련된 작품들이다. ‘물고기들의 집에서 모아놓은 온갖 군상들의 이야기는 마지막 며느리의 생리통 이야기로 귀결되면서, 그냥 모두 농지거리가 되어버린다. 전라도 말로 눙친다.’는 표현처럼 그냥 문제 삼지 않고 어물쩍 넘겨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돼버리면 그때까지 벌여놓은 판은 대체 뭔지 조금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낚시 손님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떽떽거렸으며, 엄니는 무신 일 땜시 자기 자식이 업동이란 사실부터 며느리년의 과거사까지 떠벌리면서 오만가지 한풀이를 해댔는지, 대체 이야기의 두서도 없고, 벌려놓은 이야기를 매조지는 어떤 결말도 없다. 그럼에도 며느리의 생리통으로 그 모든 판을 슬쩍 넘겨 버린다. 대체 그 모든 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굿을 하는 마냥 혹은 살풀이 모냥새라도 내는 것처럼, 여하튼 그렇게 어물쩍 넘겨 버린다. ‘눈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판은 이미 다 벌어져 있다. 감방 동기가 와서 같이 금고 문짝만 슬쩍 따버리면 끝인데, 눈은 무장무장 하염없이 내리고, 감방 동기는 올 생각도 없는데, 웬 이발소에서 만난 처녀가 며느리라며 그 눈길 속을 비집고 마을에 들어섰다. , 손이라 한 번 잡았으면 모를까, 그냥 점잔 뺌시로 몇 마디 나눈 게 이 사단이라고 해야 할지, 이 경사라고 해야 할지, 주인공은 스스로도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다만 그 눈길 속에서도 그 종잡을 수 없는 처자는 끝내 자기네 집으로 들어설 같은 예감을 주며 글은 끝난다. 아무런 서사 없이 그저 눈이라는 풍경과 여자와 감방 동기만으로 분위기를 잡아서, 글의 흥취를 더 하고, 그 흥취만으로 이렇게 글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그것이 눈길이고, 삶인 것을.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토속어와 순우리말들의 향연에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올드하다는 선입견을 독자는 바로 갖게 된다. , 왜 소설집 구성을 이렇게 해놨는지, 같은 맥락의 디데이 전날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는 소설집 뒤에 자리잡은 물고기들의 집눈길에 비해 소재적으로나 주제적으로 조금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디데이 전날은 어떻게 보면, ‘물고기들의 집과 비슷하게 무언가 눙치는 느낌이 있긴 하다. 그런데 소재가 조금 무겁다. 그리고 그 소재가 약간은 예전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눙치는 느낌보다는 소재도 자해공갈단이라 그런지, 오히려 더 지랄발광한다는 느낌이 좀 있다. 물론, 이 뉘앙스는 전라도 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는 심각한 소재의 무거움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이 무거운 광주항쟁이란 소재는 우리에게 너무 지난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아니, 솔직히 접근 방식이 너무 무거웠다. 무언가 야단법석을 떨고는 있는데, 제대로 눙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랄 맞게 발광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 있다. 여기에서 오해는 비롯되고, 이제 작가는 순전히 올드하다고 매장된다. 하지만 토속어 사용과 순우리말 사용이 올드한 것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끝까지 눈치채기 쉽지 않다. 그저 그 분위기에 편승해 과한 토속어와 순우리말 사용은 올드하다와 같다는 등호를 성립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등식을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일까? 아니, 머릿속으로 분리하더라도 그 분위기를 따로 떼어놓기가 왜 이리 쉽지 않단 말인가? 결코,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도 그렇다고 등식의 관계도 아니다. 그저 문학의 한 선상에 토속적 소설이란 한 획이 지나가고, 우리말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선상에 문학이란 한 획이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지나갈 뿐인 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이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끝으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실, 모든 오해는 나의 그릇된 편견과 첫 두 작품 때문에 비롯되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을, 그리고 너무 큰 이야기들을 무작정 꺼내는데, 작가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이 소설집은 전혀 상반된 작품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히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무거운 소재와 커다란 주제에 대해 엿이나 먹으라고 장난을 치는 느낌이라면 좋을까? 그런데 이 놈의 출판사이거나 혹은 비평가들이 문제인 거 같다. 책 제목을 제일 무겁고 커다란 소재와 주제로 잡은 소설로 내걸은 것도 모자라, 앞에 그 사흘의 남자까지 세 편을 모두 너무 올드한 소재들로 판을 깔아놓았다. 물론,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가가 잘하는 건 눙을 치고, 산통을 깨고, 그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는데 재능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약간의 허세가 있는 작품들을 맨 앞으로 내세웠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세 소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무언가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 모를 약간의 아쉬움 때문에 끝까지 오롯이 읽고 나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꼭 소설이 무언가 대단한 주제를 다룰 필요도 굳이 없고, 또 반드시 벌여놓은 판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막연하지만 공감하게 된 것이다. 물론, 조금 내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올드하고 실제적으로도 시대에 조금은 역행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존 소설의 작법들을 가볍고 부드럽게 뒤집어엎고, 삶의 소소한 해학들을 펼친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소설가의 이런 글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애달픔을 느끼며 두서없던 비평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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