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인간에 대한 예의 Human Decency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4
공지영 지음,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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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 이제 그만 미안해하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 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란 걸


그가 부르다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 영미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면, 왜 늘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떠올랐던 것일까? 1995년 내가 대학 1학년 때쯤 이 책들이 한참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오늘 두 책의 초판을 검색해보니 똑같이 1994년이었다. 그런데 두 책을 읽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이기 때문에, 그래서 짧다는 이유로, 아마 군대를 제대하고서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오다가다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공지영의 소설은 내가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그토록 선후배들에게 거론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왠지 비슷하거나, 똑같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의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이제야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빌어먹을, 80년대. 한 번도 내가 초대 받지 않은 그들만의 잔치, 그들만의 인간에 대한 예의.


 비록 내가 지금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며 연신 조그맣게 발음하면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의 운동권에 대해 감히 매도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실제로 접해보진 못해 알 순 없지만, 내 부모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이고, 그 때문에 광주혁명 때 위협사격으로 총알 자국이 선명한 집안의 장남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1987년 6월 항쟁 때 아버지는 대학생들의 데모를 내게 옳다고 가르치셨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들도 모두 저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줬는데. 그리고 어느 지방선거 때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기호 2번의 팸플릿만 내게 들이민 적도 있다. 또,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전라민국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신다. 나 또한 그 때문인지 혹은 어릴 적부터 키워온 반골 기질 때문인지, 줄곧 기호 2번만 찍어왔으며, 스스로 약간 좌 쪽이 아닐까하고 의미부여를 종종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복지국가가 되어 잘 규격화된 사회보다는, 분명 부익부 빈익빈의 이 극단적인 사회적 구조가 빗어낸 온갖 구멍들을 더 사랑할 것이며, 이곳에서 더 잘 적응해온 그런 인간인 것을. 그리고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단 말인가?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들과 끝까지 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 그토록 미안했단 말인가? 그들이 단 한 번도 따뜻한 수돗물이 나오는 집에서 살아본 적 없는 것과 자신이 그러한 삶을 누려온 것이 대체 왜 미안한 이유란 말인가? 그래서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온수와 보일러가 죄라도 된단 말인가? 왜 모든 것들에 그렇게 미안해하고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작가 자신도 그리고 나도 우리도 모두 이 사회에서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겪은 그들만의 80년대를 내가 감히 떠나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내 20대를 부인하지 못하듯,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함부로 말살시킬 수 없듯이, 우리 역사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80년대를 지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서 그 80년대에 피해자였던 우리 아버지는 그 시대에 처음으로 가입했던 연금보험을 타면서 기뻐하고 계시며, 우리 어머니는 전라민국이라고 자랑스럽게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말하지만 그것이 남들에겐 쉬 발설해서는 안 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게 사람들은 변했고, 당연히 변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사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마치 내 울분과 짜증을 토하듯 글을 써내려갔다.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이런 말들이 아니었는데, 다시 무언가를 되바라보고자 했는데, 그들의 80년대를 통해 나의 문학에 대해, 그리고 무언가 지워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 그런데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흐릿해져 간다. 공지영이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이민자라는 새 시대의 독특한 인물과 권오규라는 낡은 시대의 민주투사와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듯이, 그렇게 점점 나의 초점은 흐릿해져 간다. 왜 나는 그토록 80년를 쉬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왜 지금도 지나간 우리들의 얼룩에 대해서 쉬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일까?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맞다. 일단은 가장 이 부분이 큰 사실이다. 게다가 나는 공상주의자다. 그러니 과거라는 현실보다는 과거에서 파생된 신화나 상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기질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이러한 80년대이거나 8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 감성 때문에 한국문학 자체를 멀리해왔다. 문제의 발단은 이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었을 때 내가 왜 그토록 그 감성을 멀리해왔는지 스스로 공감했고, 또 나의 20대 때의 판단이 옳았음에 스스로 만족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로. 어쩌면 이 글속에 나는 이민자라는 인물과 나는 비슷한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글이라는 것이 언제나 과장되어 포장할 수밖에 없어 글속에 이민자란 인물은 조금 재수 없게 표현되어있다. 스물하나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전 대상, 대학 졸업 후 뉴욕 등지에서 대성공을 거둔 화가임에도, 갑자기 어느 날 성공의 허망함을 느껴 맨 발로 삼 년 간 인도를 여행하고, 아프리카 스케치 여행 등을 하다가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고국으로 돌아온, 글에서 표현한 그대로 정말 꿈같은 이야기의 대상이니까. 그냥 스물하나의 나이에 신학에 대한 회의로 1년 방황하고 이후 목장, 공장, 배를 탄 내 기행쯤은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맥락은 분명히 같다. 이미 더 이상 투쟁할 대상이 없어진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감성이란 건 배부른 허망함이라든가, 회의라는, 그리고 그 때문에 정말 꿈같은 방황일 뿐이라는.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른다. 배고프다는 절망감과 절실함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사실 여기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배고픔을 모른단 말인가? 어느 시대에겐 삶의 회의와 허무감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것은 왜 삶에 대한 투쟁이 아니고, 삶에 대한 허기진 욕구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며, 그들이 그 큰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음을 잊지 못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해, 마저 정리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분명 그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나라는 하나의 자아에 국한되어 우리라는 커다란 자아를 혹은 우리라는 집단 무의식에 이르지 못하는 개인이란, 결국 사회에서 잉여일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이 그들의 뒷이야기를 정리해가듯, 나라는 개인이거나 우리 속에 속속들이 숨어있는 나 같은 개인들이 각자 나름의 이야기들로 힘겨워하며, 이전에도 지금도 결코 대항할 수 없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때로는 맞서 싸우며, 때로는 억울해하며, 그렇게 발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을.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미안함에 내가 미안해야할 까닭을 느끼지 못하듯, 그들이 스스로 변한 자신에게 백 번 후회한들, 그렇게 미안하다고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이 삶이라는 혹독한 현실인 것을. 그러니 이제 그만 미안해하자. 아니면 그만 미안한 척 하자. 그저 담담하게 앞으로 다가올 현실들을, 진짜 삶의 이야기들을 소리내보자. 천천히 담백하게 그렇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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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 중국인 거리 Chinatown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1
오정희 지음,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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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거리 - 시적인 무엇과 같은 글의 파장이 주는 충격과 여운!

 

 

  이 기묘한 파장과 같은 충격과 여운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근래 청원경찰 일을 하면서 제법 익숙해진 까닭에 나는 오전 9시 이전 그리고 오후 4시 이후 남는 시간에 하루에 단편 두 편 정도를 읽을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그동안 놀려두었던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을 한 권씩 보고 있다. 사실, 처음 이 에디션을 산 이유는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을 읽고서 받은 어떤 여운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 그대로 Bilingual이라는 사실이 영어 과외를 하는 내 입장에선 매력적이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쉬 오래도록 붙잡을 수 없었던 까닭은 한국문학에 대한 내 깊은 불신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재미없고, 진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십대가 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할 만한 견식이 내겐 없었다. 거의 수능 첫 세대였음에도 나는 남들처럼 한국문학 단편집을 제대로 읽은 적조차 없다. 물론, 그렇다하여 남들보다 덜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은근히 내 자랑이지만 이것저것 마구잡이식으로 많이 읽다 보니, 굳이 수능을 대비해 무언가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역으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운 것도 안 것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십대 초반에 지식을 폭식하면서 접하게 된 서양문학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실 여기에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신학을 전공했고, 그 때문에 관념적인 내용이 풍부한 소설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십대 중반쯤 접하게 된 일본문학은 내게 완전히 우리나라 문학에 대한 패배감과 절망감을 가져다주었다. 쪽바리라고 무시하며 깔보았던 그네들은 벌써 20세기 초에 페티시즘에 관한 소설을 쓸 만큼 자유로웠던데 비해, 민주화를 달성한 90년대 중반을 지나서도 여전히 민주화 운동에 대한 후일담 혹은 항상 그 비슷한 패턴들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이런 내 절망감은 아주 쉽게 우리 문학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 나는 거의 한국문학을 보지 않았다. 때문에 실제로 지금 현재 내 한국문학에 대한 수준은 교과서에 실린 소설을 조금 더 아는 수준일 뿐이다. 이로 인해 내가 참여하고 있는 문학 모임에서도 언제나 나는 우리나라 소설가들 이야기나 작품 이야기가 나올 때는 말을 아낀다. 뭐 아는 소설가가 없고, 아는 작품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런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겨우 손에 붙잡게 된 책이 이 에디션에 있는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였다. 그나마 이청준 작가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이나마 접해본 경험도 있고, 나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청준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니, 이제까지 내가 본 그의 작품 중 ‘병신과 머저리’는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었다.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청원경찰이 되면서 남는 시간에 이 에디션에 실린 작품들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알던 한국문학 그대로의 자화상과 마주하는 기분을 지우긴 힘들었다. 만약 내가 오정희 작가의 이 ‘중국인 거리’를 읽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그런 기분 때문에 이 에디션을 읽는 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가 준 기묘한 파장과 같은 충격과 여운을 마주하고서, 그동안 내가 편파적으로 대했던 우리 문학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 설명할 수 없는 여운에 대해 설명하고, 앞으로 내가 편파적이었기에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감정들에 대해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설명해야할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얼마나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끈기 있게 해나갈지 자신은 없지만, 이 과정을 겪어야 내 글이 한 발자국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지금 이 순간은 가득하기에, 가능한 한 이제야 우리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몇 개의 글들을 써내려가고 싶다. 하지만 그 첫 발, 그 첫 발이 오정희란 사실은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한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 없었던 이유로, 나는 지금 서론에서부터 무언가 빙빙 돌려가며 내 망설임을 주절거리고 있는 까닭이다. 왜 하필 오정희일까? 그리고 왜 하필 이 ‘중국인 거리’란 말인가? 또 이 설명할 수 없어 횡설수설하는 기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정희란 작가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지금 속한 모임에서 ‘동경’이란 작품으로 합평을 했을 때였다. 아마 거의 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사실 지금보다 그때는 더욱 한국 작가에 대해 알지를 못해서, 내 한국 문학에 대한 이해수준은 고교생 수준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오정희라고 했을 때, 당연히 누구를 말하는지도 몰랐고, 동경이라고 했을 때 먼저 떠올린 단어는 윤동주의 ‘자화상’의 구릿빛 ‘동경’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이었는지 실제로 품평을 썼을 때 나는 오정희 작가의 ‘동경’을 윤동주 시인의 ‘동경’과 빗대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동경의 이미지는 전혀 공유되지 않는 대칭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다만, 노년의 입장에서 더 이상 무언가 반성할 것이 없어 마주할 수 없는 ‘동경’에 대해 젊은 내가 이러니저러니 쓴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어불성설이라 느껴, 젊은 윤동주의 감성으로 ‘동경’을 이해해보고자 했던 발로였다. 하지만 어찌됐던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오정희란 작가가 무언가 특별한 감성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후 읽어보아야겠다고 속으로 새겨두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마주하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중국인 거리’, 사실 제목 자체에서는 별 기대감이 없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별다른 기대를 갖기엔 무언가 주목을 끌만한 인상적인 요소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졌던 오정희 작가에 대한 기대, 그리고 무언가 한 문장 한 문장 예스럽지만 단아한 느낌이 드는 문장에 홀려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그럼에도 사실 내용은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그 시대의 작가들이 매상 그랬던 것처럼 자기네들만의 추억담일 뿐. 게다가 여성 작가라서 그런지, 어떤 내용의 기승전결도 무언가 뚜렷이 없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도 잘 파악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단 한 문장, 마지막 단 한 문장이 이 모든 소설에 대한 내 인상을 바꾸어 버렸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초조? 초조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제까지 그런 이야기를 쓴 건가? 처음에 나는 한문을 잘 몰라 초조가 초조한 감정을 표현하는 초조(焦燥)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그렇다하기엔 이야기 전체가 버성거리게 느껴져, 허무한 감정까지 들었다. 그래서 한문으로 초조(初潮)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초경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초조라 사전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로 인해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파장 같은 충격과 여운을 갖게 되었다. 대체 왜 초경이라는 그 사실 하나로 이 소설이 내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것일까?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다시 한 번 가지며, 먼저 두 가지 내 개인적 취향을 전제해두고 싶다. 하나는 여류소설에 대한 내 지나친 환상과 호감이다. 이는 아마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에 대한 내 개인적인 목마름과 그리움의 이유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다른 하나는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소설에 대한 내 개인적 선호도이다. 이 또한 사실은 설명하기 애매모호한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처음 글이라는 것을 시작했을 때 시(詩)라는 기반에서 시작했고, (비록 그것이 고교생의 일기장에 서사형식 대체형식으로 쓰인 것뿐에 불과할지라도) 그 때문에 여전히 나는 시적인 글쓰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적인 글쓰기라니? 대체 이것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일찍이 이십대 초에 오에겐자부로를 통해 나는 ‘시적인 무엇과 같은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론적인 열망이었다. 실제로 오에겐자부로 글들은 전혀 시적이다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역작이라 내 개인적으로 평하는 ‘타오르는 푸른 나무’에서는 그러한 열망이 담긴 상징적 요소들이 종교적 코드와 함께 글속에 살며시 비쳐져 있을 뿐이다. 다른 글들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그 열망만은 내게로 고스란히 전이되어 오랫동안 나는 그러한 글들을 찾아 헤매왔다. 그리고 이는 나의 어떤 개인적인 방황과 함께 궤를 같이 하여, 틀이 없고 정형화되지 않은 글에 대한 탐독으로 바뀌어갔다. 더불어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그래서 이제까지 내가 ‘시적인 무엇과 같은 글’이라 느낀 글이나 영화는 몇 편 되지 않고, 그나마도 매우 관념적인 종교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 정서의 시가 아닌 이계의 말로 적혀진 시의 정서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시는 번역이 불가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시의 정서란 언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랭보니 보들레르니 하는 시인들의 시에 경탄하며, 그들의 비극적이었던 삶에 대해 깊이 연민할 수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의 시대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아울러 하나하나 새겨진 그들만의 언어를 우리가 이해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 문화와 시대가 아닌 그들의 시대와 문화로 빗은 시를 더욱 잘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아니, 더 좋아할 수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제까지 내 경우에는 분.명.히.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정희 ‘중국인 거리’를 접한 지금 나는 처음으로 우리 문학에서의 ‘시적인 무엇과 같은 글’을 마주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이제야 ‘시적인 무엇과 같은 글’이 이런 글의 형태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감히 던져본다.

 

  석탄을 나르는 화차가 석탄가루를 바람에 실어 온 동네를 까맣게 만들고, 겨울방학이 끝나면 여선생은 이 거리의 까맣게 화장한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얼굴 화장을 벗긴다. 해안촌 혹은 중국인 거리라 불리는 동네, 아이들 얼굴의 탄가루만큼 아이들 내장에 가득할 회충들을 잡아 없애기 위해 해인초를 끓이는 냄새와 석회 냄새가 뒤섞인 거리, 그 냄새는 이상하게 나도 거리도 모두 노란빛의 회오리 같은 기억 속으로 젖어 들어가게 한다. 그 때문일까? 어렵사리 피난하듯, 트럭 뒤꽁무니 이삿짐들 틈에서 줄줄이 일곱째를 밴 어머니와 나머지 육남매 사이에 끼어 온 동네임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마치 그 몽롱한 노란빛 냄새 때문에 꿈인 뜻 마주한 젊은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집 앞에 사는 치옥이네 이층집엔 매기 언니가 검둥이들과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다. 때문에 아침에 치옥이와 학교 가기 위해 치옥이네에 가면 은빛 가위로 콧수염을 가다듬는 거대한 검둥이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방과 후엔 치옥이네 이층집엔 매기 언니의 딸 제니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치옥이와 나는 매일 그곳에서 매기 언니의 신기하고 예쁜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져보며, 5살이 되도록 말 못하는 인형 같은 제니를 돌본다. 그때마다 치옥이는 말한다. 나는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매기 언니가 미국에 가기 전 자기 물건들을 전부 나한테 준다고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미국 지프차가 치옥이네 집으로 달려왔다. 헤드라이트의 쏟아질 듯 밝은 불빛 속에 매기 언니가 반듯이 누워있었고, 검둥이는 술에 취해 있었다. 단추를 풀어헤치고 검둥이는 낄낄거리며 지프차에 실려 떠났다. 그리고 매기 언니의 모든 물건은 매기 언니 동생이 가져가버리고, 남겨진 제니는 수녀가 죽을 때 유난히 종소리를 크게 울리는 수녀원의 고아원으로 넘겨졌다. 그 때였을까? 아니면, 아이들과 미군의 칼을 장대에 꽂아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꽂고서 긴 행렬을 하던 그때였던가? 아니면, 할머니가 죽은 다음 할머니의 물건들을 맥아아더 장군의 동상에서부터 숲으로 할머니의 나이였던 예순 여섯 발자국 걸어서 닿은 나무 아래 묻었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날들이었을까? 나는 이층의 덧문을 열고 슬픈 듯, 노여운 듯 어쩌면 희미하게 알 수 없는 눈길로 우리를 혹은 나를 바라보던 그를 다시 본 적이 있었다.

  해가 바뀌어 나는 육학년이 되었다. 거리는 많은 집들로 새로워졌지만 해인초 끓이는 냄새는 빠지지 않는 염색물감처럼 여전히 거리를 노랗게 착색시키고 있었다. 제분 공장에 다니던 치옥이의 아버지가 피댓줄에 감겨 다리가 끊긴 후 치옥이의 부모가 치옥이를 미장원에 맡기고 이 거리를 떠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나는 매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미장원 앞에서 유리문을 통해 미장원 바닥 머리카락을 쓸고 있는 치옥이를 보았다. 수천의 깃털이 날아오르듯 거리는 노란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언제였지, 언제였지, 나는 좀체로 기억나지 않는 먼 꿈을 되살리려는 안타까움으로 고개를 흔들며 집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집 앞에 이르러 언덕 위의 이층집 열린 덧창을 바라보았다. 그가 창으로 상체를 내밀어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코허리가 낮고 누런빛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내게 종이꾸러미를 내밀었다. 속에 든 것은 중국인들이 명절 때 먹는 세 가지 색의 물감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 한 등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넣었다. 안방에서는 어머니가 산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몰래 벽장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한낮이어도 벽장 속은 한 점의 빛도 들지 않아 어두웠다. 나는 차라리 죽여 줘라 부르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인가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들어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시적인 요소가 뛰어난 글이기에 문장이 주는 묘미가 커서, 내용을 재구성함에 있어서 될 수 있으면 작가 그대로의 문장을 가져다썼다. 특히 마지막 세 문단은 거의 원본 그대로를 베껴 썼다. 다만, 그 기승전결의 애매함 때문에 내용의 재구성은 다소간 내가 바라본 시적 재구성이 가미되었다. 주로 남자를 의식한 부분에 대한 대목과 노란빛과 냄새에 대한 문장이 나온 부분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사실 그 때문에 중간중간 띄어먹은 중요한 내용들도 꽤 많다. 사실, 이 글은 이야기 자체를 재구성한다는 게 힘들 만큼 어떤 면에선 다소간 산만하고, 방만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모든 문장은 한 소녀의 시선에 집결되어, 그 시선으로부터 발산되고 있다. 그리고 소녀이기에, 아직 소녀는 자신에게 집결된 시선을 이해할 길이 없으며, 동시에 자신이 바라본 풍경들을 이해할 방법을 배우질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은 때문에 매우 당연한 흐름처럼, 어쩌면 그냥 추억담처럼 막연하게 우리에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란빛의 냄새로 가득한 거리에서 몽롱하게 마주한 낯선 남자와의 대면은 어쩐지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인상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동시에 그 거리에서 오래도록 살아서인지 누런빛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건네 준 선물은 왜 이 모든 결말에 대한 예감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노랗게 달떴던 유년의 빛이 붉고 끈적끈적한 풍경으로 바뀌던 날, 소녀는 벌써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덟째를 밀어내는 어머니의 난산의 피비린내를. 혹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석회 냄새와 섞인 해인초 냄새의 노란빛의 회오리와 같은 향수를. 어쩐지 자꾸만 이해해보고 싶어진다. 소녀에서 여자로의 변신에 대해. 그 막연한 끈적끈적하고 후덥덥한 절망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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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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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상징이 되지 못한 코드 속 담론에 관해

 

 

 

 근래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하기 시작한 나는 아침에 지점을 오픈하기 전 30분, 점심시간에 10~20분, 그리고 4시에 지점 문을 닫고서 20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책 읽는 시간에 할애한다. 보통 짧은 단편을 읽을 경우엔 하루면 족히 읽고도 시간이 남지만, 장편일 경우엔 당연히 시간이 며칠 걸린다. 예전에 장편을 읽을 경우,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한 자리에서 서너 시간 읽고, 그 다음날 또 그렇게 서너 시간 읽으며 흐름을 이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내 호흡이 짧아져서인지, 아니면 요즈음 글들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아서인지, 이런 편린의 흐름 속에서 장편을 읽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어졌다. 물론, 더 큰 이유는 근래 읽는 책들이 장편이라고 하더라도 관념적인 글들이 아닌, 관념의 편린들을 다룬 글들이거나, 그저 이야기 중심의 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당분간 이런 글들이 소설계의 주류를 차지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적을 두고서 싸울 거대한 담론과 이상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표백’의 경우도 이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실상은 내가 말한 첫 번째 부류의 소설로 (관념의 편린을 다룬) 분류해야할 것이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어차피 소설이란 것이 관념을 다루는 영역도 아니고, 그러하기에 굳이 관념적일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고서 치열하게 관념적 소설을 써간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왜 우리 세대는 ‘신이 이미 없는 완벽한 세상에서 무엇이 가능한 저항일까?’라는 거대한 질문을 갖고도 관념의 편린을 다룬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이 시대의 십자가이거나 순교로 비견될 수 있는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 시대를 상징하는 십자가나 순교가 아닌 젊은 세대의 비루한 절망과 낙담을 되뇌게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이 흥미를 끄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 캐릭터가 상징하는 코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소 중의적인 단어를 두 번 사용하였다. 상징과 코드, 이 단어들을 사실 이 글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니면 이 시대에 어떻게 구분해서 표현해야할지, 나는 정확하게 그 방법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상징이라는 것이 상징의 원대상과 아무런 비교와 대조지점 없더라도 하나의 표상이 되어, 그 상징을 해석하는 이들에게 상징의 정확한 의미가 아닌 상징의 이미지를 재창출하게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 글의 캐릭터를 상징으로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코드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이 또한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원래, 코드란 의미는 정보를 나타내기 위한 기호체계를 뜻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용어가 문학적으로 차용되면서 의미의 변질과정이 이루어졌다. 어떤 때는 이야기 속에 감춰진 은유나 비유를 의미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상징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치 코드라는 용어를 쓰면, 그 글에 무언가 감춰진 것이 존재하고, 또 그 감춰진 것에 그 글이 원래 의미하는 바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용어 자체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문학에서 코드라 하면 상징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듯싶다. 다만, 조금 더 현대적 의미가 덧붙여졌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 현대적인 의미란 게 과연 무엇일까? 상징인데 상징이 되지 못하는, 아니면 상징이고 싶은데 이미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상징할 수 있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코드라 지칭해버린, 그런 것이 현대적인 의미일까? 갑자기 이 글의 흥미 요소인 세 유형의 캐릭터를 이야기하다, 내가 이런 상징과 코드에 대해 의문을 달고, 또 그 정의에 대해 의문을 다는 것은, 이 글이 그러한 연장선상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상징을 담아내고 싶은 코드를 사용했다고 하면 좋을까? 아니면, 상징을 갈망하는 코드라고 표현해야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도 상징과 코드는 너무 어려운 용어니까. 다만, 이러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글의 축을 이루는 세 인물이 이와 유사한 느낌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글의 가장 큰 축은 자살이라는 반항으로 상징되는 세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 반으로써 적그리스도로 표현되는 주인공 화자가 두 번째 축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소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살이라는 반항으로 표상되는 세연이 마치 그리스도와 그를 따랐던 순교자처럼 동격화 되어 정(正)이 되고, 그를 반대하여 자살을 반박하는 주인공이 반(反)으로써 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축은 세연의 숭배자이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였던 추이다. 그런데 이 추라는 인물은 정반합 이론에 근거한 정과 반의 합(合)이 아니라,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잉여? 혹은 나머지?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쓴 작가와 거의 연배가 비슷하여 추라는 인물이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에서 나온 여자 캐릭터와 비슷하거나, 혹은 우리 세대 때 자주 보던 여자 캐릭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글속에서 추는 분명 정인 세연과 반인 주인공의 연결고리로써 작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동시에 세연에게도 주인공에게도 버려지는 잉여와 같은 존재로써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축은 결국, 세연과 주인공이 된다. 이렇게 단정 지을 때 세연과 주인공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려다, 결국 상징이 되지 못하고 하나의 코드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징적 코드로 이 글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 속에서 세연이 상징하는 바는 사실 간단하다. 신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어떤 이는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 당위성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그 이야기의 전제 자체가 신이 없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은 우리 문명 속에서 도태되어져 갔다. 물론, 우리 시대에 기독교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인구과밀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아이러니로 존재하고 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은 그러한 신이 아니다. 인간의 규칙과 도덕성의 절대기준으로서 작용하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한 신은 관념 속 과정 속에서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그동안 신이 제한해 놓은 규범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진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는 마치 필연적 과정처럼 산업화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현대화된 사회를 이룩해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화에서 현대화로 이루어진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된다. 신이란 규범을 대체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우리를 규정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소위 민주주위와 선진화 그리고 세계화 등등, 이 모든 구호들이 자연스럽게 오늘날 우리의 위치를 규정짓고 있다. 때문에 여기엔 더 이상 신에 관한 어떤 의문도, 존재에 관한 어떤 의문도 달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시스템 그 자체와 그 시스템 하에 존재하는 우리라는 시스템이 함께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어떤 의문도 없이 시스템화 되는데 동의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그와 역행하는 질문들로 우리 존재 당위성을 증명하려 했다. 소위 탈구조주의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맥락에서 광기와 성, 정신분석 등등으로 역사를 해석하면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에 대항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인 세연은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전제는 세연과 같은 세대는 그와 같은 질문마저도 먼저 할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즉, 더 이상 이 세계의 시스템 그 자체에 역행할 어떤 질문도 반항도 남아있지 않은 세대를 표상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지막 반항의 발로로 왜 하필 하고 많은 선택지 가운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자살이란 말인가?

 

 

 사실 이 글에서 이 시대에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고전적이고 진부한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에 더 이상 어떤 특별한 반항과 절규의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 세대가 이 시대의 시스템에서 가져올 수 있는 어떤 혁명도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글속의 세연의 자살이라는 반항이 가진 상징은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어떤 절규의 메아리로 우리 가슴을 미어지게 할지언정 소리 자체가 되어 어떤 울림이 되지 못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즉, 벙어리 냉가슴의 모양새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많이 차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비록,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신’이라 상징될 수 있는 친부교살을 행했지만, 이는 ‘신’이라고 상징되는 상징 그 자체와 더불어 아버지라는 혈육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살인을 의미한다. 즉, 소설 속에서 이반은 친부교살을 통해 모든 법규와 나아가 근본적인 인간관계와의 단절까지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선 자살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할 때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즉, 인간관계의 끈을 놓지 못한 상태에서 자살이라는 반항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매우 일방적인 전제를 지닌 실험이다. 마치 후기 구조주의 지식인들이 일방적으로 성, 광기, 정신분석 등으로만 구조주의에 맞서려고 했던 것처럼 착각하는 본새이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해석이 파격적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에게 보다 어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구조주의에 역행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래서 근래 다양성과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을 빼놓고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서) 자살을 반항의 수단으로 주장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실험의 조건을 이미 한정시켜 놓고서 시도하는 실험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글이 정말로 그러한 실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저 우리 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내려고 했으며, 그러한 자화상에 필요한 부수적 도구들로 이 시대의 관념들을 다소간 차용한 것이라는 사실쯤은 나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세연의 반으로써 작용하고 있는 주인공 화자가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선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추의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은 부분이 이 소설 속 가장 큰 결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관계의존성 혹은 관계중독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추가 인간관계에 대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설득력을 갖추었다면, 굳이 주인공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살이라는 반항이 갖는 시대적 메시지와 동시에 그에 반하는 우리 시대에 남은 소소하지만 거대한 담론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는 많은 여지를 주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지금 이 자체로도 여러 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기는 했지만, 다시금 스스로 질문해본다. 이 시대에 정말로 반항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정말로 더 이상 우리에게 남겨진 담론과 숙제는 없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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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1-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내용 늘 ㅡ!!
상징과 코드에서 ㅡ벌써 종교적 색채를 읽어버리는
저는 ...참 !ㅎㅎㅎ
진득하게 다시 글을 좀 읽어보고 ㅡ또 얘기해요!

몽원 2015-11-18 01:07   좋아요 1 | URL
하하: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넵!!! 또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기대하겠습니다~
 

 

 


 












연을 쫓는 아이 -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개인적 바람을 연에 실어 보내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내게 있어 가장 큰 질문 중 하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위험한 불안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 자체가 너무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겨먹은 자체가 관념적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벌써 앞의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그렇다면 관념적이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1>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3> [불교]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부처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정의가 나와 너무나도 관련 있는 사항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2>의 정의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생각, 생각, 수많은 생각의 꼬리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떨리는 감정으로 주체하지 못해도 부족한데, 글을 쓰기도 전에 항상 미리 글을 왜 쓰는지 물으며, 주저하는 내 모든 감정과 생각의 연결고리들....... 그런데 그 연결고리들은 어찌하여 인과관계마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지, 결국엔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돌고 돌아, 언제나 하나의 절망이란 이름으로 내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이토록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나는 그토록 글을 쓰고 싶어 했으며,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고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고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해왔다. 아마 그 글에 대한 첫 느낌의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당연하게 생텍쥐페리의 첫 작품인 ‘야간비행’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당최 ‘어린왕자’와 연관이 되질 않는 작품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한데다, 내용도 뭘 위해 썼는지도 모르겠고, 관념적이라고 하기에는 관념이 너무 설익었고, 그냥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낭만을 이야기한 거 같긴 한데, 그냥 재미없을 뿐인, 정말 그렇고 그런 작품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의 첫 작품이니까, 그랬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시작이 지날수록 깨달아지는 한 가지는 무섭게도 그의 설익은 작품이었던 ‘야간비행’과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어린왕자’가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야간비행’에 대한 내 기억은 너무나 흐릿하다. 그럴만한 강한 인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왕자’가 비록 아주 세련되게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읊고 있지만, 실은 어느 별에서 혼자 사는 지독히 외로운 한 ‘어린왕자’란 이름의 소년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우주여행을 떠나는 모양새이고, ‘야간비행사’도 지독히도 외로운 자신만의 비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해 가는 그런 과정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린왕자’의 내용이 어느 부분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말들이 예쁘고, 좋은 비유로 가득하다할 뿐이지, 기실 너무나 현실적이지 못한 관념적인 이야기 그 자체 아니란 말인가? 그 때문인지, 혹은 내가 신이란 관념에 한때 너무나 크게 휘둘려서 인지, 이십대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헤르만 헤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미시마 유키오 등등, 대부분 관념 그 자체를 다루는 소설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우리나라의 소설들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육이오 동란과 해방이후의 이야기들, 그리고 민주화 과정 속에 숱한 애환 섞인 이야기들이 그저 뻔하기 그지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것이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의미와 관념들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연을 쫓는 아이’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듯이 상투적이라는 말이 왜 나쁘단 말인가? 쉽고 재밌게 쓴 소설이 왜 소설로써 가치가 없단 말인가?

 

  평소 내 습관대로 역시 서두가 반 이상을 차지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근 내가 당면했던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화두가 이 소설 속에 존재했고, 너무나 오랜만에 읽어본 관념적이지 않은 장편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너무 쉽고 재밌게 쓰인 좋은 글을 마주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셈이었다. 마치 천일야화를 보듯, 혹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떠올리듯,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아랍영화들을 내내 마주하듯, 이 소설은 아랍이란 이국적인 풍경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며, 소설을 읽는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쓰면 되잖아. 그리고 우리 이야기들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잖아. 비록 너무나 좋아진, 그래서 너무나 각박하고 바빠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들도 우리들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어왔잖아. 자, 그럼 써봐! 이렇게! 그리고 네 얘기도 얼마든지 이색적이고 재밌는 모험과 이야기들로 가득하잖아! 주저하지 마! 용기를 가져!’ 하지만 정말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 관념적인 내 자신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일 년 동안 혼자 여행을 떠나고, 수도원에서 살고, 배를 타고, 목장에서 살아보고, 공장에서 살면서 일한, 그 모든 이색적인 풍경들과 경험들이 애초에 신이라는 관념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여전히 그 무한대의 가까운 관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렇게 쉽고 재밌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 결코,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관념도 철학도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다루는 혹은 이야기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눈을 감고 다시 떠올려본다. 비록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지만 카불에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연을 날리던 아미르와 하산, 그런 아미르를 위해 아세프에게 맞으며 강간까지 당하던 하산과 그 장면을 몰래 멀리서 훔쳐보던 아미르의 배신....... 그리고 길고 긴 역사와 민족 종교란 인과의 과정을 통해 밝혀진 아미르와 하산의 이복형제란 진실, 그럼에도 영원히 화해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 하산의 죽음이란 절망적 현실과 동시에 평생 동안 자신을 옥죈 배신이란 굴레로부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인 하산의 남겨진 아들 소랍....... 그 소랍을 위해 모든 명예와 부가 보장된 미국을 떠나 전쟁 이후 죽음과 참혹한 현실만 거리에 가득한 카불로 향하는 아미르........ 그곳에서 무슨 기구한 운명처럼 다시 마주한 아세프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목숨을 위협받는 아미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세프에게 새총을 쏘아 아미르를 결정적인 위기에서 구출해준 소랍....... 그럼에도 자신이 다시 아미르에게 버려지리라 믿고 자살을 시도해버린 소랍....... 그 이후 되살아났음에도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소랍의 길고 긴 블랙홀과도 같은 침묵........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자로 데려온 소랍과 미국에서 연을 날리며 작지만 서서히 진행될 소통을 꿈꾸는 아미르의 바람........ 그 바람에 나의 이야기들을 나의 꿈들을 실어 연을 날려본다. 쉽고 재밌는 그렇지만 지상에 쉬 안착하지 못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상한 모양새의 연을, 하늘에 높게 띄워본다. 바람에 훨훨 날아가기를, 그리고 언젠가 아무도 모를 어느 귀퉁이에 추락해 누군가에게 몰래 주워지기를, 그렇게 연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주기를, 가만히 눈을 감고 바라본다. 언젠가, 그 언젠가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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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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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 살인 사건, 비상구 - 김영하의 섹시한 글쓰기에 관하여

 

 

 

  김영하의 작품은 자극적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글은 언제나 섹시한 맛이 있다. 아마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부터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간혹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나의 오감은 항상 비슷하게 반응한다. 마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를 꿈꾸면서 극대화된 쾌감의 짜릿함을 느끼는 기분과도 같이 제 혼자 달떠 올라서, 글을 다 읽고서는 항상 사람이 간혹 지나다니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폐허에서 몰래 자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대한 내 시선이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이번에 읽은 그의 여러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던 ‘사진관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 내가 크게 주목한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살인과 치정이라는 상황,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론은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 비단, 이 글속 화자의 직업 자체가 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의 글속엔 언제나 살인과 치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와 같이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살인과 치정이야기니까, 당연히 치정을 통한 살인이야기로 종국을 내야할 것 같지만, 살인자는 전혀 뜻밖에 곳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굳이 무슨 까닭으로 살인이야기에 치정극을 섞어서 글을 쓴 것일까? 이 글 속에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김영하는 그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조형사야 신참이니까 알 수 없을 테지만 내 코엔 그 냄새가 난다. 그것은 청결한 화장실과 비슷하다.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 미미한 방향제 내음, 개방된 은밀함,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인과 치정이야기인 까닭에 여자의 인상에 대한 이 묘사는 소설에서 하나의 풍미적인 작용으로 끝나야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과 분위기로 자리매김해버린다. 즉, 소재와 주제와 별도로 풍미가 주체가 되는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청결한 화장실 같은 느낌이라니? 또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섹시한 단어선택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묘사에 묘한 상상을 덧댄 내 개인적 기호와 취향이 소설의 해석 자체를 오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괜한 장치적 기능으로 작용하는 소설의 풍미에 발정한 개새끼처럼 혀를 내밀고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껄떡거리는 우를 현재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그다운 소설이라고 느낀 소설이 이 소설인 것을, 그래서 그 풍미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더 좋은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대체······.

 

  두 번째로 내가 유심히 본 소설은 ‘비상구’였다. 이 역시 ‘사진관 살인 사건’과 비슷하게 여자의 질을 비상구로 표현해내는 풍미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빼고서 이 글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90년대식 쌈마이들의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뭐 이 정도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굳이 이 이야기의 ‘비상구’를 각박한 현실에서의 탈출구라는 풍유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나는 대충 수긍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굳이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온당한 해석이긴 할 터이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 작품집 내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고압선’ 등이 훨씬 풍유적인 글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김영하의 문학적 풍유와 비유에 관해 말하고자한다면 그 두 작품들을 뽑을 것이다. 그에 비해 ‘비상구’는 문학적 풍유를 들먹이기엔 그 끈이 너무 엷다. 아니, 사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니 거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자라는 그것도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한정하여 그 특유의 판타지를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 글은 ‘사진관 살인 사건’ 보다 풍미 그 자체를 위해서 쓴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조금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엔 청결한 화장실이라든가, 갓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서 표현하는 ‘비상구’라는 직유법적인 비유가 내 취향이 아닌 탓인 듯싶다. 하지만 재미와 가독성의 측면에서 이 글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제까지 내 개인적으로 몰랐던 김영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섹시함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때론 너무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만을 꿈꾸어 그 여운이 길지 못하다는 사실. 그래서 그의 발칙한 상상력과 사변들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긴 하였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었는지 나는 이제껏 김영하를 따로 파고자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이번에 읽게 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경우는, 만약 문자 그대로 자전소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읽은 김영하와는 완전히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그 글속에서 그는 글에 영혼을 판 대가로 아마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줄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단순히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함께 나눌 여자가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그렇게 같이 생활인으로써 함께 살 수 있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아쉽게도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글이 그에겐 나름 의미 있는 자전적 소설일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 특유의 풍미인 자극적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김영하는 언제까지나 젊고 파릇한 감성으로 섹시한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섹시함이 불변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란 작품집이 오래된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성이 아쉽게도 조금은 올드하다는 사실이었다. 삐삐와 채팅 이야기, 오래된 영화와 오래된 음악 이야기, 그 주된 감성의 뿌리는 거의 90년대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와 같은 90년대 학번에겐 감성팔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게 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도 이제 슬슬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에서 조금 더 오래 기억될 정사들로 이야기를 바꾸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더 깊은 풍미의 섹시함을,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각인될 그런 섹시함을 추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그다운 글을 추구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가 ‘피뢰침’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이란 아주 짧고 순간적이기에, 그래서 전격을 맞은 듯한 느낌이기에, 그 뒤에 남는 것은 일종의 요의 현상뿐일지는 몰라도, 단지 그런 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일지는 몰라도, 섹시함이라는 것에도 일종의 농도가 있다고, 그래서 그 뒷맛도 다양할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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