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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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20대 때 기형도의 시 중 나는 이 시를 가장 좋아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 본연의 자기연민이거나, 역으로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연민의식으로부터의 발아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자기연민이었든 타인에 관한 연민이었든, 분명한 것은 저 시를 통해 나는 지금의, 혹은 향후 앞으로의 나의 몇 년 후를 예감했던 것 같다. 속은 이미 헐어버렸지만 날렵한 듯한 외양으로 부러지지 못한 채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는 모양의... 무언가 잔혹한... 혹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생생한 줄기 앞에서 뒹구는... 무언가 황폐한... 그렇지만 나는 그 때 한 가지 예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줄기에 매달려 있든, 줄기로부터 부러져 나오든, 그래서 잔혹하든 황폐하든, 그 존재 자체에 깃든 허무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전혀 충일하지 않고, 그래서 전혀 나의 방어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것이 예상보다 무척이나 서글프고 서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나는 결코 예감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지금부터 이 슬픔에 대해 정직하게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 이것이 비록 내 치부를 드러내는 치욕밖에 될 수 없는 작업이 될지라도.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가 아니었던 스무 살 적을 떠올려 본다. 그 때 비록 나는 나의 동정을 창녀촌에 갖다 파는 멍청한 짓을 했지만, 첫사랑의 손길엔 떨려했고, 첫입맞춤에 온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단지 그녀의 손끝 체온과 입술에서 불어오는 숨결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 각자가 분열하여 ‘감각’이란 이름의 또 다른 세포를 낳고, 그 세포를 통해 ‘영혼’이란 이름의 또 다른 생명을 낳을 것처럼, 그렇게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말했듯이 사랑을 배우고 알기엔 너무 멍청했다. 나의 동정을 그렇게 쉽게 팔았듯이, 나의 감각을, 나의 영혼을,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다는 그 이유로 너무도 간단하게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단지 섹스란 행위 하나에 손쉽게 팔아버렸다. 아니, 그 밑 모를 바닥으로 너무 쉽게 매몰되어 갔다. 그런 황폐한 인간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아주 단순한 손끝 감각으로부터 전해오는 세심한 배려가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발화는, 그렇게 끔찍했다.


 

 스무 살 적에 그녀에게 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자 현학적인 말로 떠벌였던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실제로 맺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실은 어느 누구보다 이제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내 품에서 잠시 쉬고 있지만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내 친구라는 사실을. 그러하기에 그녀와 친구 둘을 모두 너무 사랑했던 나로선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이란 말로 내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애써 위로하며 자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말의 올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 단순한 현학적 말장난 때문에 나는 그녀와의 예정된 이별이란 수순 이후,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집착해왔다.

 

 

안마시술소를 나온 뒤 기분은 더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 이후 이제까지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고, 그녀들과 쉽게 관계를 맺고, 그렇게 쉽게 헤어져 왔다. 그러나 나의 대다수의 관계는 업소의 여자들과의 관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관계를 맺거나,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는 그녀들에게 제대로 치근덕거려 본 적이 없다. 아니, ‘자자’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온 적조차 거의 없다. 내 스스로 그런 내 모습을 너무 혐오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에게도 쉽게 성욕을 느끼는 내가 나의 그런 성욕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도 욕망을 추구하고 싶노라고, 그리고 그래왔다고 떠벌려 왔지만, 기실 나의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에게조차 나는 너무나 쉽게 자고 싶다고, 그렇지만 사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로 철옹성을 치고서, 그녀들과의 관계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선 아주 쉽게 안마시술소와 같은 업소의 여자들에게로 도망을 쳤다. 때론 그녀들과 연인 비슷한 오랜 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내가 처음부터 은교를 음심으로 본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말들이 변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찌됐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음심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음심을 쉽게 드러낸 적은 없다. 너무나 황폐하게 변해버린 내 감정을 내 진심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자꾸 보고 싶기도 했고, 자꾸 생각나기도 하긴 했다. 그렇게 하나의 욕망의 구멍이라는 존재로서 여자가 아닌, 존재 그자체인 여자로서의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나를 휘감아버리는 음심에 그만 나는 절망해버렸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모든 감정을 부인하곤 했다. 마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파동도 없었던 것처럼.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하나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형은 책 읽고 울어 본 적 있어요? 나는 초등학교 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1주일 동안 울었었는데...’ 잠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가 어릴 적 어머니와 이혼을 해서, 남달리 감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던 후배의 상황, 그리고 그에 비해 정작 문학을 한다고 하지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 문득, 삼국지를 읽었을 때 관우가 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후배에게 그 장면에서 분해서 한 번 운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후배는 내 대답이 너무 엉뚱했던 탓에 ‘형은 진짜 남자다.’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코믹한 상황과 대화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실은 그 삼국지에 관한 기억마저도 날조된 기억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슬픔을 터뜨렸던 그 마지막 때는 언제였을까? 나라는 존재는 실은, 남자다움이거나 혹은 담담함이란 외피를 가장하며, 줄곧 내 모든 감정을 삼켜오기만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쉽게 내 진심을 외면한 채 나락해가며, 동시에 수인으로서 이제까지 내 모든 시간을 써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울 속에 들어서 있는 남자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얘기들이 전혀 소설과 관계없는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글이 이럴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 아니, 글을 읽자마자 이 글의 적요 속에 감춰진 ‘나’라는 인간의 황폐함과 그 슬픔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이미 일주일 이전에 개략적으로 나는 글을 완성시켰지만,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텍스트의 모든 맥락과 이야기 그 자체를 무시한 채 ‘나’라는 인간만 가득한, 그것도 징징 짜는, 마치 나의 외로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모두 전가시키는 듯한 이 글을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육체의 과실이 어느 생생한

물통에서 멱감는다

그러나 물 밖에선

투구와 같은 힘센 실다발을 풀며

떨어지는 물에 목이 잘리는

황금의 머리가 빛난다


           -P.Valéry, <목욕하는 여인>에서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고,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 할 거 같다. 처음 나는 기형도의 시 ‘노인들’을 인용하면서, 내 본연의 자기연민과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식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내 사랑과 동시에 그렇게 시작도 해보지 못한 내 사랑의 나락에 관해 줄곧 두서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은 내 지나친 감정이입 탓에 처음에 밝힌 어떤 예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이미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춰진 언급은 거의 어떤 자기변명과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것이 어떤 예감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필연으로 표현되어진 느낌을 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필연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 필연이라는 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기책임을 다른 무언가로 전가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그녀와 관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끝나가는 것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하고, 줄곧 그 예감에 따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삼십대의 내 모습이 이렇게 황폐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줄기에 날렵하게 매달려 있는 추악한 마른 나뭇가지의 모습이나 이미 말라비틀어질 대로 말라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잘린 채 그 앞에서 나뒹구는 마른 나뭇가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의 육체가 풀과 같다면 어떨까? 푸르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한 나무줄기가 아닌, 거센 바람에도 이리저리 몸을 누일 수 있는 풀과 같다면, 그렇다면 어떠할까?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불에 타고 난 노트의 재를 그녀가 울면서 화장실 변기 속에 주워넣고 있었다. “할,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인간은 결국 죽는 순간까지 풀이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시를 통해 시 속에서 풀과 같은 인간을 창조하며 풀이 되는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을는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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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집 - 서정주 시집
서정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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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집 - 뱀의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

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싶다하였으

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중략)..........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입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

 맻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창씨개명을 하고, 신식교육까지 받은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생활을 해온 미당이었지만, 그의 자화상 속에서의 아버지는 종이었다. 그리고 어매는 어떠했던가? 달을 두고서 풋살구가 먹고 싶다는 어매. 동상이몽이었을까? 아니면, 오지 않는 애비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이러한 부모 때문에 그의 젊음을 키운 것은 결국 팔할이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을 따라 어떤 후회도 없는 그의 핏빛 시편을 써내려 왔다. 대체 왜 그는 그런 시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수 있었단 말인가?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중략)...................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배암.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

 여라! 배암.


 

                                                ---<화사>---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난 사내. 징그러운 몸뚱이로 태어난 사내. 그렇게 뱀이란 운명으로 결정지어져 태어난 사내. 그런데 미당은 말한다. 꽃다님 같다고. 그리고 이브를 꼬여냈던 그 달변의 혓바닥으로 아름다운 입술들을 훔치려 한다. 그렇게 하늘을 물어뜯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 입술의 임자가 지닌 발꿈치로 대가리가 부셔질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꾸 자꾸 숨어서 기회를 노린다. 꽃뱀이란 태생의 운명처럼.

 

 

 복사꽃 픠고, 복사꽃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

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도라....

아무병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봄>---


 

 오랜 동안 기다려 왔다. 긴 동면을 깨고서 돌아온 피가 돌기 시작하는 계절. 그는 그의 선조가 그랬던 운명처럼 다시 여인을 꼬여낸다. 그리고 적도해바래기 열두송이 꽃심야, 횃불켜든우에 물결치는 은하의 밤으로 데려간다.

 

 

 적도해바래기 열두송이 꽃심야,

 횃불켜든우에 물결치는 은하의 밤.

 자는 닭을 나는 어떻게해 사랑했든가

 

 모래속에서 이러난목아지로

 새벽에 우리, 기쁨에오열하니

 새로자라난 치가 모다떨려.

 감물듸린빛으로 지터만가는

 내나체의 삿삿이....

 수슬 수슬 날개털디리우고, 닭이 우스면

 

 결의형제가치 의좋게 우리는

 하눌하눌 국기만양 머리에 달고

 지귀천년의 정오를 울자.


 

                           ---<웅계 上>---

 

 

 그 태고 적부터 지닌 그 요사한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 선조가 받은 저주 때문에 생겨난 요술일까? 닭으로 둔갑한 뱀은 꼬여낸 암컷의 닭과 함께 치가 떨릴 만큼 기쁨에 오열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 지귀천년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은 바로 그 다음 시에 이렇게 드러난다.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 싶습니까

 (운모석관속에 막다아레에나!)

 

 닭의벼슬은 심장우에 피인꽃이라

 구름이 왼통 젖어 흐르나....

 

 막다아레에나의 장미 꽃다발.

 

 

 ................(중략)...................

 

 

 임우 다다른 이 절정에서

 사랑이 어떻게 양립하느냐

 

 해바래기 줄거리로 십자가를 엮어

 죽이리로다. 고요히 침묵하는 내닭을죽여....

 

 카인의 새빩안 수의를 입고

 내 이제 호을로 열손까락이 오도도떤다.

 

 애계의생간으로 매워오는 두개골에

 맨드램이만한 벼슬이 하나 그윽히 솟아올라....


 

                              ---<웅계 下>---

 

 

 마치 성서의 이야기 같기도 한 이 시 속에서 그는 결국 그의 사랑하는 닭을 죽인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오들오들 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절정과 양립할 수 있느냐고?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 아닌 절정이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이의 절정으로 남겨진 그의 두개골 사이로 커다란 뿔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릴 적 만화에서 자주 본 악마와의 형상과도 같이.

 

 

 내 너를 찾아왔다 유나.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

벽닭이 울때마닥 보고싶었다....


 

...............................(중략)..............................

 

 

                          종로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볓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드러앉어 유나! 유나! 유나!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

구나.

 

 

                                                ---<부활>---

 

 

  한 번의 죽음이란 절정으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절정만이 남아 오래도록 기쁨에 오열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죽였던 애계의 형상들이 도처에 다시 피어나고, 다시 생생이 살아, 다시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여기서 미당은 비록 그 스스로 뱀으로 태어난 저주스런 운명이지만, 그러한 뱀의 저주를 통해서만이 또 다른 생명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자기항변이든 그 무에든 간에 이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아름다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미당의 자화상은 단순한 징그러운 몸뚱이가 아닌 꽃다님이란 또 다른 페이소스를 지닌 죽음이면서도 생명인 꽃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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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mecoming (Paperback)
Pinter, Harold / Grove Pr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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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 해체 그 이후 시적 가능성에 대해

 

 

 정확하게 몇 년 전에 귀향이란 작품을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인터넷을 경로로 해서 아마 귀향의 영어 대본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충격이란... 이 건 분명 현대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야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친부교살에 대한 치밀한 고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 형태만이 취할 수 있는 어떤 드라마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태생적으로 호로 자식들이 판치는 콩가루 집안에 대한 이야기에, 순전히 드라마에 대한 해체를 위한 해체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이 존재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관심보다 드라마 이면과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내 개인적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 때문에 나는 귀향 이 후, 헤롤드 핀터의 작품을 꽤 여러 작 찾아보았다. 뭐, 사실 대다수는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평하기는 좀 그렇다.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이라면, 대다수 비평가들이 호평한 작들과 내 취향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 귀향과 생일파티 그리고 관리인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번 계기를 통해 세 번째 정도 귀향과 위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서, 이제야 내 '끌림'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그러면서도 무언가 공허했던 그 느낌에 대해 대략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먼저, 내 개인적 끌림은 앞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드라마 자체에 대한 내 개인적 무관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내 무관심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드라마라는 것은 인간의 사소한 삶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건과 사건을 이루는 이야기 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건이 어찌되었든 또 그 사건 때문에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미미하다. 물론, 나라고 그 자체에 초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극적인 반전과 긴장감은 늘 나를 끌리게 하는 부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드라마의 사건보다는 그 사건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내 개인적인 사고의 출발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창조하는 작업에 앞서, 무언가를 부수고 해체하는 작업부터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귀향의 어떤 면이 이러한 나의 끌림을 발화시킨 것일까?

 

 처음에도 밝혔듯이, 귀향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볼 수 있는 치열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고 어떤 극적인 드라마 형태를 포기하는 대신에 시적인 내면의 독백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이 극은 처음부터 그냥 해체된 상태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낀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넘겨버리고, 그들이 그녀에게 창녀 일을 시키려 하는 것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 백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그의 바로 두 눈 앞에서 자기의 와이프는 자신의 동생과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자랑삼아 떠벌리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을까? 도저히 일반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러하기에 많은 비평가들은 주인공 테디와 루스의 결혼생활이 실은 진짜가 아니라 거짓일 뿐이라고 부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이야기하면서, 달을 가리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극의 본질은 테디와 루스가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테디와 루스로 대변되는 이성과 욕망의 대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분명히 극적으로도 테디와 루스는 결혼한 상태이다. 그를 증명하기위해 초반 테디의 아버지 맥스가 루스를 보며 아들이 데려온 창녀라고 의심할 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테디의 아내임을 설명한다. 게다가 그들은 세 자식을 낳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테디는 이 모든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묵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앞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테디는 루스의 남편이라기보다는 이 극 속에서 지극히 차가운 이성을 지닌 철학자로서 더욱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테디와 루스가 마지막에 헤어지는 장면에서 힌트를 살짝 얻을 수 있다. 그 장면에서 루스는 테디에게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지는 말라>고 충고한다. 즉, 테디는 그의 철학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면서 스스로 고백하듯이 어디서든지 늘 능동적인 참여자가 아닌 관찰하는 이방인으로써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그의 부부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아니, 그냥 혼자 외떨어져 그 모든 혼돈으로부터 비켜 나갔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에 비해, 그의 아내 루스는 그 반대급부인 욕망으로, 특히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먼저 나는 극의 마지막 부분을 잠깐 떠올려 보고자 한다. 테디가 루스와 작별한 후, 맥스는 루스에게 키스해 달라며 애걸하면서 루스가 종국엔 그들의 지배자가 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 독백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루스는 마치 여왕처럼 의자에 앉아 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한 예감에 상응하는 복선을 그 도도한 자태로 드러낸다. 즉, 집안의 권력의 축이 맥스에서 루스로 이동하게 될 것임을 이 글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미 그의 아들들에게조차 쉽게 무시당한 낡아빠진 권력을 가진 그였기에, 우리는 그에게 어떤 권력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초반 카디건을 입고서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늙은 왕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두에도 밝혔듯이 이 글은 바로 이런 측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대판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 세기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과 바뀐 것은 우리의 왕인 아버지가 그 전 세기와 달리 이제는 너무나 그 권력이 쇠퇴하여 너무 늙고 힘없는 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이 글은 레니와 조이를 통해 늙어빠진 구 권력인 아버지 맥스에 대해 조롱하고, 새로운 권력에 대한 갈망을 여성성을 대변하는 루스를 통해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권력으로 대변되는 루스가 과연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요구하는, 그리고 특히 희곡에서 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시적 담화나 시적 독백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속에서 루스는 작가가 남자인 까닭일지는 모르겠지만, 남성들의 욕망의 투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로서의 여성, 아내로서의 여성, 그리고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루스는 영리한 것인지, 아니면 누드모델이었던 태생적인 이유 때문인지, 이러한 욕망의 투사에 대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심지어 이를 너무나 잘 이해하여, 이러한 남자들의 욕망을 이용하는 방법을 그녀는 이미 터득하고 있다. 극의 2막 초반부에 테디와 레니의 철학에 대한 정의에 관한 담화에서 루스는 이런 독백을 한다.

 

 

 지나치게 장담 마. 잊은 것이 있어. 날 봐요. 내가 … 다리를 움직인다. 이것뿐이야. 그렇지만 난 … 속옷을 … 입고 있어. 속옷이 나하고 같이 움직여 … 그것이 남자의 정신을 사로잡아. 아마 오해하고 있는지도 몰라. 행동은 단순하단 말이야. 이건 다리고 … 움직이고. 왜 이런 것에 대한 관찰을 억제할까? 글쎄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지도 몰라.… 입을 통해 나오는 말 자체보다도. 명심해 둬요… 이런 가능성도.


 

 즉, 그녀는 그녀 스스로 남자의 정신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관찰자인 테디와는 정반대 급부에서 철학의 저변을 이루는 사변적인 언어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그 언어가 발화되고 있는 행위와 그 행위의 시작점인 입술이라는 대상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 때문에 극 속에서 남자들은 이러한 루스의 다리와 입술에 정신이 사로잡히게 되고, 동시에 의미가 모두 해체된 언어를 남발하면서 행위 그 자체에 (특히, 루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성적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행위 자체는 루스의 이야기를 별도로 두고서라도, 남자들의 본능이고 욕망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주도권이 더 이상 남자들이 아닌, 루스라는 대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는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전혀 감정선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 차갑기 그지없는 극에 시적 가능성의 차원을 남성성이 아닌 여성성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모든 남성적 욕망이 투사된 루스라는 인물이 여성성 그 자체를 논할 수 있는 대상인지, 그리고 이런 왜곡된 여성성의 루스가 어떻게 시적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루스가 이러한 왜곡된 남성들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을 그녀의 욕망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중화시켜가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이렇게 개방된 욕망의 인물들이 난립하는 세계 속에서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혹은 이를 회피하는 인물들과의 대립 속에서 (샘과 테디로 대변되는), 이런 혼돈 속에 권력다툼에서의 정복자와 파괴자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화해의 가능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그랬다면 우리가 받아들였을 처음의 당혹스러움과 마지막 허탈함을 조금은 메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문학의 영역이 시적 창조에 대한 고집스러운 영역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거울과도 같은 묘사와 미래에 대한 차가운 예견을 포함한다면, 여기까지의 작업이었을 뿐이라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 자체가 어쩌면 시적인 가능성을 남겨둔 작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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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행복한 그림자의 춤 -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

 


 이 번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기 전, 나는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다. 먼저는 정말 오랜만에 내 자신이 쓴 글을 합평을 받는 이유 때문이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글을 읽을 때 기존의 방식과 달리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하고 읽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이러한 글 읽기 방식은 내가 수도원을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수도원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가지치기하기로 작정했고, 그 가지를 친 시간과 에너지를 글을 읽고 쓰는 데로 전환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내려와서 약 두 달 동안, 나의 단단한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병든 닭처럼 집안 그 어딘가에 틀어박혀, 목구멍으로 세어 나오지 못하였고, 당연히 가슴 속에 맺혀 있던 말들도 글이나 혹은 그 다른 무언가로도 세어 나오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으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세 편이나 되는 단편을... 물론, 이 단편들은 전부 예전에 썼던 짧은 콩트이거나 수필 같은 형식의 글을 열심히 습작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견지 하에 다시 새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아니,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예전과 다르게 강렬하게 내가 시름시름 앓던 만큼 목구멍에 맺혀 거치적거리면서, 미묘하게 내가 예전에 글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게 글을 보게끔 만들었다. 물론, 이는 글을 쓰는 이에게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독자와 똑같이 글을 분석하고, 그저 감상하려고만 한다면 거기에서 ‘작가정신’이라든가 혹은 ‘창작의욕’이라 부를 수도 있는 다른 그 무언가가 피어날 여지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글에 대한 순수한 접근을 막는 커다란 장애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피어난 작가의식은 글을 읽는데 있어서 글을 먼저 감상하고 느끼기보다, 분석하려 들고, 함부로 재단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을 내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였다. 아마, 이는 내가 내 글을 세 편 정도 쓰고 나서, 내 글에 대한 개인적 애착으로 한 50번 이상 퇴고를 한 다음, 이상 문학상의 글들을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본인에 대한 글의 퇴고는 너무나 가깝고 밀착되어 있는 까닭으로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비평해 보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때문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 나는 나와 비슷한 관념이 나열된 글에서는 지긋지긋함을 느꼈고, 다소 몽환적이거나 실험적인 글에서는 내 글에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도입할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내게도 미약하게나마 ‘작가의식’이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가의식’이 너무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기에, 어설펐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한 재단과 망상 속에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나는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정작, 그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어떤 포인트를 말하고자 쓴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염두에 두지조차 않고 글을 읽었다. 물론, 그 글들이 내가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십대 때부터 줄곧 나는 이상하게도 한국문학보다 외국문학에 더 친밀함을 느꼈고, 때문에 동경해 왔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이라도 예전에는 결코 이런 식으로 접근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줄곧 나는 글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오감을 사용하여 읽는 것이라고 믿어왔고, 그러하기에 가슴에 울림이 있거나 떨림이 있는 시적인 뒷맛이 있는 글들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지금 이순간도 바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모든 글들을, 심지어 내 글조차 머리로만 읽었다. 바로 이 이유로,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한 채, 내 개인적 사변에 휘둘리면서 글들을 그 글 자체로가 아닌, 하나의 내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거나 교재 비슷한 심정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예감 속에서 나는 잔뜩 경계의 시선을 품고서,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법 이제는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주인공 소녀의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근방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오던 마살레스 선생님은 매해 6월이면 학부모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파티를 연다. 그렇지만 파티라고 해서, 뭐 왁자지껄하거나 대단한 행사 분위기를 연상해선 결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오래된 전통의식과도 비슷한 학예회 일종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파티라고 해서 차려지는 음식도 매해 아이들을 위해 차려지는 비슷비슷한 음식들이 고작이고, 파티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은 그냥 아이들이 그들의 학부모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게 전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실력이란 것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얼마나 엉성한지... 간혹 재능이 풍부한 아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마살레스 선생님의 끝없는 아이들에 대한 무한 긍정주의와 신뢰는 있던 재능도 사라지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마살레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재능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이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그 본인 스스로가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얼마나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지, 아이가 설령 박자를 놓치고 다른 음정을 치더라도 개의치 않고 아이들의 그 엉성한 천진난만한 연주를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대체 어떤 아이가 그 재능을 만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아이들은 그 순진무구한 때를 벗기까지 모두 마살레스 선생님을 좋아한다. 항상 친절한데다 칭찬일색인 선생님을 그 어떤 아이가 마다하겠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의 엄마도 자신의 그 추억의 자산 때문에 주인공 소녀를 마살레스 선성님께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몇 해 전까지 주인공 소녀도 그러했던 어머니와 같이 마살레스 선생님을 너무나도 좋아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그런 입에 발린 소리들을 듣고 좋아하기엔 주인공 소녀는 조금 커버렸다. 그리고 주인공 어머니도 이제 그런 고리타분한 파티에 참석하기엔 꽤나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몇 해 전 경제적 사정으로 마살레스 선생님이 좁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에서 피아노를 배워야만 하는데다 파티도 그곳에서 열려야 했기에, 어쩌면 올해를 끝으로 주인공은 마살레스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그 특별한 파티의 참석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주인공도 그녀의 엄마도 그저 마지막 파티일지도 모를 그 시간을 어떻게든 때울 작정으로 파티 내내 서로 딴 생각에 여념이 없다. 주인공 소녀는 그저 마지막 피날레가 될 자기 공연 시각이 어서 빨리 와서 파티가 끝났으면 하는 눈치이고, 그녀의 엄마는 선생님이 차려놓은 파티음식이 6월의 후덥지근한 날씨에 혹시 상하지 않았을까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 소녀의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의례적이고 지루한 파티는 끝날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살레스 선생님은 파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가장 나이도 많은데다, 파티의 피날레를 맡은 주인공 소녀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썩 관심이 있는 눈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주인공 소녀가 연주하는 그 도중, 그렇게나 마살레스 선생님이 안절부절 못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 주인공들이 당도하여, 시끌벅적하기까지 하다. 똑같은 황갈색 옷의 제복을 입고 들어오는 열 명 남짓한 아이들,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에서 마살레스 선생님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인 모양이다. 개중에는 남자아이들도 여럿 보이는데 모두가 초점 없는 눈에 짧은 머리를 한 모양이 비슷비슷한 생김새이다. 그 모습에 엄마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하고, 예정에 없던 그 아이들의 연주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살레스 선생님은 역시 그런 학부모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 아이들의 연주를 그저 흐뭇하게 지켜볼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키만 하고 여윈 ‘돌로레스 보일’이란 여자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녀의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곡은 독일의 작곡가 ‘글루카’가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전설’을 소재로 작곡한 3막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나오는 발레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런데 이 게 무슨 일일까? 그렇게나 수런대던 모든 소리들이 어느새 잠잠해지고 모두 그 소녀의 연주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모두 무언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열망 같은 혹은 그리움 같은 것이 되살아나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다름 아닌, 어떤 재능도 만개시킬 수 없는 그저 사람 좋은데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피아노 파티장소이고 (말이 좋아 파티이지 그저 학예회일 뿐인 장소이고), 그 연주자는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를 다니는 한낱 흐리멍덩한 여자아이의 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소녀의 연주가 끝마쳐지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어떻게 그 감정을 설명해야 할지 모두 당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 지루한 파티를 딱하고 지루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주는 개운하진 못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뒷맛 때문이 아닐까?

 

 글을 다 읽고서 처음에 품었던 나의 경계심은 글속에 주인공과 학부모들이 지루한 마살레스 선생님의 파티와 지적장애아들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피아노곡의 연주로 자연스레 스르르 풀려간 것처럼 어느덧 걷혀있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전부 다 하면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매일 도배학원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의 1-2시간을 이용하여 짬짬이 그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그리고서 내가 느낀 것은 크게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현재 내가 써가고 있는 내 글의 지점과 앨리스 먼로의 글이 추구하는 지점과의 차이와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내가 추구할 글의 지점에 관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내 글에 대한 팽배한 애착을 오롯하게 버리기란 현 단계에서 힘들뿐더러, 그러한 애착과 상반되는 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미묘한 거리두기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볼 수 있게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이 어떤 단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고서 내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의 비평을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란’ 제목으로 한 이유는 비단 ‘행복한 그림자의 춤’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글들에 그러한 맛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로 채색된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와 ‘망상’,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그녀의 아련한 향수와도 같은 지나버린 시절에 대한 어떤 애착을, 힘없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 대처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한 ‘태워줘서 고마워’와 ‘그림엽서’, ‘주일 오후’에서 여성 내부의 사랑에 대한 열망과 야멸찬 증오를, 뭐라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개운치 못하지만 달콤하면서 씁쓰름한 그 맛을 느낀 것은 대체 무슨 연유였을까? 분명,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착들이 내게 어떤 개운치 못한 맛을 주고, 동시에 그 향수는 앨리스 먼로 특유의 장황하진 않지만 한가득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 같은 묘사적인 필체에 기인하여 풍부한 달콤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개운치 못한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달콤하다고 말하기엔 앨리스 먼로의 주인공 여성인물들이 갖는 씁쓸한 자아 풍경 때문일까? 그 씁쓰름한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특히, ‘태워줘서 고마워’에서의 마지막 여자아이의 제목과 똑같은 작별 인사말은 아련하게도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가벼운 이별에 대해 순응하고 있는 듯한 암시를 보이고 있기에, 내내 뒷맛이 텁텁했다. 아예 대놓고 그러한 이야기로 꾸민 ‘그림엽서’는 그 맛은 덜 하지만, 분명 같은 맥락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여성의 이별이야기이다. 또, ‘주일 오후’의 하녀신분의 소녀가 상류층 신분의 청년의 갑작스런 키스로 발견해 내는 ‘자아 찾기’의 방식이란, 정말 여류작가가 이런 글을 써도 좋은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끔 했다. 물론, 그 헛된 ‘자아 찾기’ 방식에 대한 불안의 전조와 예감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렇듯 아이러니하게도 여류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여성 주인공들은 힘없는 약자인 여성으로서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 앞에서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없이 무력하고, 순응적이다. 하지만 이렇듯 씁쓸하고 씁쓰름하다고만 하기엔 그녀의 글엔 다른 풍미가 은근히 배어있다. 특히,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거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때면 이 향취는 이상하게 히스테릭하게까지 묘사된 그녀의 어머니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덤덤하면서도 낭만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남성성’에 대한 은근한 동경과 함께 자신의 ‘여성성’을 통해 그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극복해 보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해내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붉은 드레스-1946’을 통해서 결국은 자신도 평범한 여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말지만... 작가 내부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동경의 끊임없는 갈등과 더불어 해결안을 모색하고자 발버둥치는 자아상이 엿보인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통해 그녀는 ‘마살레스’라는, 어쩌면 자신이 추구하거나,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를, 어느 시골의 늙고 순진한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그 모든 맛을 버물려 낸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돌로레스 보일’이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가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코뮈니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연주를 통해서만이 작가내부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뛰어넘는 자리, 그리고 지나간 시절의 ‘애착’과 ‘향수’가 섞인 오묘한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 전까지 그녀의 글들에서 나던 씁쓰름하던 맛은 쌉싸름한 맛으로 뒤바뀌게 된다. 또, 그 맛엔 달콤함이 배어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씁쓰름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콤함은 씁쓰름함을 중화시키는 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너무 달콤하기만 하면 그 맛은 금세 질리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쌉싸래한 맛은 어떤 면에서 달콤함과 씁쓰름한 뒷맛을 동시에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그런 맛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돌로레스 보일’이란 ‘코뮈니케’의 연주는 작가자신이 추구하는 ‘글’에 대한 맛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현재 쓰고 있는 글의 지점과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지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나는 습작이란 핑계를 대고 있지만, 다소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글들을 썼고, 지금도 그런 글들을 쓰고 있다. 아마 이는 내가 시에 대한 집착이 있기에 시의 호흡을 소설로 가져가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 것이다. 동시에 줄곧 그러한 실제적인 관념과 실험 속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남들과 같은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다룰 어떤 재간과 관심이 없다. 뭐랄까? 그러한 관념과 실험들이 내게 일상이 되어, 그런 것들이 내겐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어찌됐든 현재의 내 재능과 지금까지의 내 살아온 과정, 그리고 내 글의 방향성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글들은 당분간 그런 관념적이거나 실험적인, 더러 좋은 글이라면 시적인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글들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쓸 수밖에 없는 글과 자신이 추구하는 글이란 건 당연히 별개일 수밖에 없고, 언제나 모든 길엔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만약 자아과잉이 덜하다면, 아마 나는 앨리스 먼로와 같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혹은 다른 자아를 통한 묘사의 형식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덜어내지 못한 나의 관념들과 어떤 집착들은 그러한 글들을 쓸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엔, 그러한 관념과 집착의 덩어리인 자아를 덜어내는 방법은 글이란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배우지 못한 나로서는 글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달리 방도를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덜어내지 않고는 다른 걸음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절실히 예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 예감은 나를 묶어두는 퀴퀴한 족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축지법’을 배운 적도 없고, ‘돈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모든 길엔 여정이 있고, 그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이제껏 보아왔기에 인정할 뿐이다. 아니, 그것은 거스르고 싶지만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의 법칙임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사실, 그러하기에 앨리스 먼로의 글들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이전의 글속에 여성 인물들의 전형성은 부정해도 좋을만한 인물상들이었다. 게다가, 그 밑에 깔린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가장한 은근한 콤플렉스와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비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보여주는 모든 미묘한 맛의 버물림은 그 이전까지의 글들이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견지하게 했고, 과정의 중요함에 대해 새삼 내 스스로 재고하게끔 만든 것이다. 물론, 나는 어떤 글이 시기적으로 먼저인지 나중인지 모른다. 그리고 한 작품, 작품을 떠나 이렇게 그녀의 모든 작품을 한 작품에 뭉뚱그려 비평하는 방식이 결코, 좋은 비평방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반에 흐르는 풍미를, 그리고 그 풍미의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한 작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내가 처한 위치와 앞으로 자리하게 될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은 내 글의 전반적인 풍미를 좌우하게 될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내부의 고유의 갈등,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고 동시에 그 해결안을 찾고자 발버둥 칠 때만이 찾아지거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또, 그 자리는 아마도 지금 현재부터 자신의 맨 처음, 애착이든 향수든 혹은 관념이든 이야기든 뭐든지 간에, 그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풍미이거나 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사람됨은 그 시작점부터 차츰차츰 형성되어, 어느 순간이면 단단하게 굳어져버려 스스로 눈치 챌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됨의 형성과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그러한 시작점부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지점에 관심을 둘 수 있겠는가? 그러하기에 아직은 조금은 더 느긋한 걸음으로, 어쩌면 앞으로도 쭉 그러한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 뒤편도 바라보고, 길옆도 바라보면서 긴 여정을 잰 걸음으로 황소가 무겁고 고집스럽게 걷듯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비록 그 여정이 그 때문에 길고 지루할지라도 앨리스 먼로라는 어쩌면 그 과정을 모두 걸었을 작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작품처럼, 종국엔 그 모든 맛을 버물려낼 수 있는 작품을 하나쯤 써낼 수 있다면,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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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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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꽃을 향한 염원



부드러운 입술을 포개어

달콤한 혀끝 감각을 느끼는

당신의 아랫배는

따스하게 달떠 오르고

살짝 상기되어 불그스레한

당신의 수줍은 윗볼에

나는 갓 피어나 꽃잎을 펼친

당신의 질 옆 소음순을

상상하며 굵고 단단하게

그만 발기해버립니다.


온몸으로 발열하는 당신을

하나의 꽃이라고

살짝 젖혀진 당신의 입구를

하나의 꽃봉오리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금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당신을 받쳐주는 줄기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듯 하늘거리며

당신 안에 흩뿌려질

나의 정액도

감히 꽃씨라는 이름을 붙여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불리울 수 있을까요?

그렇게 당신과 같이 저도 감히

꽃이라 칭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처럼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언젠가 어느 여자에게 ‘꽃을 향한 염원’이란 제목을 달고 이런 시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여자와 나의 달콤한 하룻밤의 첫 정사를 꿈꾸며 내가 썼던 일종의 나 자신을 위한 고백이었다. 그렇다. 분명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고백 그 자체였다. 꽃에 관한 강한 열망을 품은, 그러나 늘 꽃일 순 없는, 늘 꽃 앞에서 시방 위험한 짐승일 수밖에 없는, 그런 내 자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은....... 그렇게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꽃대이고 싶은....... 한때 이를 닦으며 뻐끔거리는 치약 거품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역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코를 푸는 휴지 속에 맺힌 누렇게 하얀 콧물들 속에서도 종종 보아야 했던, 혼자만의 허공에 뿌려진 혹은 종종 여느 여자들의 배 위나 콘돔에 그대로 사장되어버린, 내 정액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언제나 꽃과 의미에 대해 강렬한 콤플렉스와 함께 열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위한 충실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내 자신만을 위한 고백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20살 때부터 나를 휘감아 온 화두들로부터 그 여자를 따로 분리시키지 못했고, 이렇게 추상화된 꽃이란 이미지로 그냥 그 여자 역시 여느 다른 여자들처럼 내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꽃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어떤 기억으로.......



 ‘자위일 수 없는 까닭’,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과 ‘신앙 없는 자의 기도’까지, 20살 때부터 내 뇌리 속을 사로잡았던 화두들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화두들에 휩싸이게 된 까닭은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사춘기를 휘어잡았던 신에 대한 열망과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춘기 때의 자위란 행위를 하면서 느꼈던 죄책감들, 그리고 20살이 되면서 차례차례 신을 떠나게 된 친구들의 방황과 그 속에서 한 여자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충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점층적으로 내 내면에 쌓여, 나는 그 모든 상황에서 비롯된 내 자신의 모순과 친구들의 절망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려야 했던 한 여자에 대한 변명을 신이란 존재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자위라는 혼자만의 외로운 몸짓도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거나 기도일 수 있기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한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가 꽃 피어날 수 있기를...... 그렇게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순이란 형태의 언어와 나이에 갇혀버린 나와 우리의 부질없는 모든 20살의 행위들과 바람들마저도, 결국엔 하나의 신앙이거나 진실일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그것들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고, 또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위와 사랑 그리고 신앙이란 곡조의 휘파람이란 얼마나 처량하기 그지없는지...... 어떤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진실을 비밀이란 신비로 포장한 그 마지막 곡조가 채 끝을 맺기도 전, 나는 그만 실소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20년이란 그 시간이....... 아니, 이제야 꼬박 그 20살이란 나이를 상쇄할만한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 거 같다. 꽃이란 실체와 그 꽃을 향한 내 강렬한 어떤 염원의 뿌리를.



 나는 지금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읽은 지 채 30분도 되지 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급박한 호흡에서 글들은 ‘비평’으로써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게다. 왜냐하면 이런 호흡의 경우 대개 글들은 감정의 결들은 살아있지만 당최 냉정하지가 않아서, 나중에 보면 마치 하룻밤의 정사를 꿈꾼 듯 격한 감정과 욕망만 뒤섞여 있어, 그 난잡함에 언제나 후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감정의 결들을 최대한 살리고 싶고, 또 이로 인해 후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격한 감정의 결들이 비록 나중에 봤을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격정 그 이상이 아닐지라도, 이를 통해서 내 나름의 절실한 고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아니 지금의 이 격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내게 후회할 어떤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보고서 이런 격한 감정에 휩싸여 내 고백을 해야 할 절실한 까닭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내 시와 그녀의 글의 어떤 공감대를 내가 발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글에서 온 어떤 압도적인 몰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지만, 내 절실함을 끄집어낼 만큼의 진실은 아니다. 기실, 내 절실함은 어떤 수치심에 가깝다. 그동안 내 자신의 글에 대해 한없이 스스로 오만했던....... 때문에 타인과의 공감대 없이 나 혼자만의 소리를 내려했던, 내 스스로에 대한 미욱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



 이 글을 읽기 전 나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글을 쓰고, 스스로 비평도 해보며, 동시에 여러 사람과 함께 평가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었다. 글의 내용은 어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갇히면서, 어떤 흐릿한 형태의 여자 형상을 보고서 그간에 자신의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된 공포감과 수치심을 그 여자의 형상에 투영한다는 내용인데, 오랫동안 구상한 것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이 졸렬하게 글이 써져 버렸다. 아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글이 처음에 내 의도와 달리 너무나 추상적으로 가버린 데다, 엘리베이터 속의 여자 형상과 남자의 기억 속의 여자들의 연결고리가 미흡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결국 너무 내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그 글은 어떤 묘사도 인과관계도 없이, 화자의 추상 속에만 머물게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비슷한 구상의 ‘몽고반점’은 내용 자체는 관능에 대한 추상과 관념을 다루고 있지만, 전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내 글과 그녀의 글의 간극이 이렇게 똑같은 성적 관념을 다루는데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가로 놓인 것 같은 차이를 만들어낸 걸까? 지금부터 나는 그 이유를 살피기 위해 먼저 이 글 ‘몽고반점’에 대해 나름 분석한 후, 내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을 대조해보고, 글을 갈무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몽고반점’이라는 어떤 현실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소재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생소한 ‘몽고반점’이란 소재를 육체의 ‘순수성’과 연결 짓는 다소 시적인 연결고리는 일반인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매우 소소한, 그렇지만 일반적인 현실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소재를 글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동시에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몽고반점’에 성적인 관능과 함께 예술적 색채를 부여해 나간다. 특히, 여기서 그녀가 뛰어난 점은 이 ‘몽고반점’을 통해 드러나는 성적인 관능과 예술적 자연의 색채가 전혀 이물스럽지 않다는데 있다. ‘몽고반점’은 아직 어릴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순수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 순수성은 육체적 순수성과 결부될 수 있고,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순수성으로도 연결되어진다. 그리고 이는 이 글에서 화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축이라 말할 수 있는 화자의 ‘처제’의 캐릭터를 구성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벗은 상태를 즐기고, 육식을 거부하는 문명에서 외떨어진 존재. 그 때문에 그녀는 그녀 식구들에게서조차 외면 받고, 모두에게 정신병자라고 오인 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바로 그 이유로 그녀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다. 또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화자가 사회적인 영상을 찍던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고립된 자신의 ‘처제’에게서 성욕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사회적 작품이 아닌 관능 그 자체, 그리고 그 관능이 자연 그 자체로 표현되는 색채가 담긴 영상을 찍고 싶어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경계는 너무나 미묘하고 위험하다. 왜냐하면 관능과 자연이 하나 되는 지점과 포르노그래피의 지점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 때문인지 처제에게 투영하는 자신의 욕망이 예술적인 욕망인지 관능적인 욕망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기실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관능적인 욕망이었다. 때문에 동시에 순전히 예술적인 욕망으로 승화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는 경계와 구분을 나누는 하나의 도덕률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와 ‘처제’라는 관계, 동시에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이 모호한 ‘처제’와의 관계가 어떻게 예술적 승화로 인정받고 용인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소설은 그냥 동화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는 식으로 끝내지 않는다. 소설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경계의 끝까지 이른 후, 이제까지 ‘화자’와 ‘처제’의 그런 모든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용인해 왔던 ‘화자’의 ‘아내’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이 경계가 애초에 무리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하나의 관능적 실험으로써의 소설의 분명한 선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 글의 방향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 앞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내가 시도했던 관능의 실험은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때문에 캐릭터도 불분명했고, 배경 자체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엘리베이터에 갇히다’라는 설정 자체에서 분명한 캐릭터와 현실적 배경을 끌어낸다는 자체가 이율배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추상과 비현실도 실제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추상과 비현실적인 소재를 가져다 와서 쓸 때,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삼을 때, 더욱 실제와 현실의 디테일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시’적인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논리로, ‘추상’과 ‘비현실’을 써내려간다면 어느 누구와 소통하고, 또 어느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2%를 위한 실험이었다고 한들, 그러한 글은 그 2%와도 소통할 수 없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제까지 20살 때부터 집착해온 나의 화두들은 분명히 이 지점에서 나의 글쓰기에 걸림돌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 분명 그러한 화두가 일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게 한 점은 있겠지만, 동시에 그 시야를 함께 나누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만든 걸림돌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 때문에 나는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서 다루었던 비슷한 내용의 ‘시’를 쓰고서 어느 여자에게 선물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나도 꽃이 되고 싶었음을, 그렇게 누군가처럼 의미가 되고 싶었음을 읊조렸는지도....... 결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될 수 없는, 속으로만 타들어가는 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단순히 꽃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그렇게 모든 존재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제 와서야, 내게 하나의 꽃이었던 대상도 그 실체도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럽게 내 마지막 시구를 바꿔보고 싶다.



당신과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하나의 온전한 시가 된 이 시를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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