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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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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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프랑스 문학에 대한 추억여행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예감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방송대 불문과의 프랑스 단편이라는 과목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텍스트로 해서 시험을 치룬 적이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이십대 때 대학시절 신학이 전공이었던 탓에 아마 다른 서적으로 얼핏 접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때문에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까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천국으로 간 집달리’의 경우는 거의 종교우화서적에서 본 아슴푸레한 기억이라, 제목만 기억날 뿐 내용 자체가 거의 흐릿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는 읽는 순간,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져, 읽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그 까닭에 원어로 본 이유도 각인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 시험은 기말시험으로 프랑스 단편 과목의 거의 300페이지 분량 가까운 책 전체를 범위로 했는데, 다른 단편은 사실 지금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뭐랄까? 그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아릿한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십대 때부터 줄곧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특히 프랑스 문학에 동경이 강했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삼십대가 넘어서 굳이 방송대 불문과에 들어갔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또 굳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어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과 어둠에 대한 동경이 함께 공존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프랑시스 잠 작품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상상력과 서정성, 동시에 기독교 문학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여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기의 향연들, 이 양극의 기묘한 유혹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채워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한 마디로 기막힌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발랄하고 경쾌한 서곡에서 씁쓸하고 여운이 있는 비극의 전조로 뒤바뀌는 서정적 변주곡! 만약 나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상상력이란 건 고작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AV동영상 수준의 상상력이었다. 몰래 여자의 알몸이나 훔쳐보거나 강간하고 도망가는 그런 식, 혹은 그러다 문득 회의에 빠져 성적인 담론에 대해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나 진부하게 늘어놓을 게 뻔한 졸작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곡으로 따지만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들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곡이었을 것이 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우리를 동화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화적인 세계로까지 데려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구성은 흔한 신화적 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그것을 만용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에서부터 혹은 마이더스 손 이야기와 같은 신화이거나 우화와 같은 구성, 거기에 그 시대의 현대성을 가미시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러한 신화적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 획기적인 상상력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라는 설정과, 둘째로 그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가공하여 새로운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는데 있다. 만약, 작가가 마지막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그저 벽속에 갇혀버린 것으로 끝내고, 교훈적으로 마무리했다든가 혹은 재미를 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비약적인 능력을 한껏 치장했다면, 글은 신화적이도 동화적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졸렬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벽에 가두어 놓고, 또 그 남자를 위해 담벽으로 스며드는 기타의 선율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율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버린 야심한 새벽 홀로 남겨진 이들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질 위로의 선율이 되고, 혹은 누군가를 애타가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속 담벽 안에 가둬버린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슬픈 발라드로 남게 된다.

 

 

  두 번째로 나는 ‘생존 시간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역시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작품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경우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 1946년이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가 1943년이니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는 장편이고, 이 작품은 단편집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상했던 시기는 비슷했을 것이라 예상해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층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상기조가 ‘실존주의’임을 떠올려 볼 때, 그 시기 이런 비슷한 작품이 다수 쏟아졌다고 하더라도 하등 기이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비슷한 소재임에도 이야기의 초점과 중심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실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이유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마르셀 에메는 그 특유의 유머와 함께 시간의 상대성과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연출해야했다고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이 역시 초반 가벼움을 가장하면서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사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에 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상대성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독자에게 준다. 왜냐하면 작가 자체는 글속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어떤 자신의 철학적인 주관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달에 15일을 사는 남자, 혹은 36일 사는 남자와 같이,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객관적으로 표현해내고, 그 속에 처한 작가로 대변되는 주인공 자신의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갈 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좋은 소재가 단편으로 종결된 까닭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개인도 그러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면 작가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그러한 소재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인 사르트르, 알베르트 까뮈 등이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서 마르셀 에메가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우리는 결코 지금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마르셀 에메는 역시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느낌 그대로 내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게는 이 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서정과 더불어 양극에 서있는 어두운 관념에 대한 환상이 아직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 처음 마주했던 ‘어린 왕자’와 같은,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벽을 드나드는 남자’와 같은, 이런 간결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어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런 아름다운 단조의 변주곡을 하나쯤 써내고 싶다. 쓸쓸하지만 여운 있는 서정성 가득한 발라드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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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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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통해 다시 읽는 카프카와 글쓰기에 대한 고뇌

 

 

 

  모임에서 이기호의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기성작품 품평작품으로 정해서 이 기회에 나는 그의 소설집 두 권을 읽어 보게 되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고, 다른 하나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제목에서부터 끌린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다. 먼저,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기도 했고, 그 작품 중 그의 등단작품인 ‘버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버니’의 경우는 모임에서 예전에 품평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랩 형식으로 구사한 문체가 과연 시적 담화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버니’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안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산 속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곳에 다녀오면서, 내 안에 많은 자의식이 깨진 부분이 큰 탓일 게다. 뭐, 여담은 이쯤으로 해두고, 어찌됐든 새롭게 읽게 된 ‘버니’는 시적인 담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여전히 모자란 구석이 있었지만, 시적인 시도 그 자체였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울림이 있었다. 단순히 반복되는 순이의 랩이 보도방 아가씨의 절정의 비명에서 성공한 가수의 노래로 표현되었을 때, 그 울림은 짠하면서도 동시에 싸늘한 서글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유머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 전반적으로 나는 그 비슷한 정서를 느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마찬가지였고, ‘국기게양대 로망스’도 그러했다. 거의 무언가 따스한 연민과 더불어 유쾌한 유머가 공존했다. 그런데 그의 글 ‘수인’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경우는 비슷한 뉘앙스의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무언가 글쓰기 자체에 대해 정면 돌파하려는 작가적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수인’을 중심으로 문득 떠오른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살짝 양념으로 곁들여 글쓰기에 대한 내 개인적 고뇌를 살짝 토로해 보고 싶다.

 

 

  ‘수인’을 읽기 전, 미리 줄거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듣자마자 나는 바로 카프카의 ‘소송’과 ‘굴’을 떠올렸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진 후 한반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우리 민족이 유엔에 의해 세계 각지로 타의에 의해 흩어진다는 설정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산속에서 글을 쓰느라 전혀 몰랐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어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심판관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에서,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문화적 보존의 가치로 지하 밑바닥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친 교보문고에 자신이 유일하게 낸 소설책을 찾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건 뭐 카프카 패러디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서도 그런 내 애초의 생각 때문인지, 글 안에 가득 풍기는 카프카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랄까? 훨씬 유쾌하고 가볍다고 할까? 그래서 현대적으로 풀어놓은 기분이랄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카프카 그 자체를 들이밀 때, 현대의 그 독자 중,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지겨운 문장들을 끝까지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특히, ‘굴’의 경우는 카프카의 소설 중에서도 그 끔찍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고민을 했다. 다시 그 끔찍했던 ‘굴’을 그리고 ‘카프카’를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결국, 읽고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말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십대 때 가장 내게 영향을 준 두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를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 작가들이 둘 다 끔찍하게도 지리멸렬한 작가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죄와 벌’에서 노파 하나 죽인 사건으로 빼곡한 글자체로 해서 장장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그나마 짧은 편이다. 보통, 그의 장편들은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다반사다. 그래도 무언가 읽고 나면, 기존의 관념을 도발하고 깨트리는 상쾌함이 있었다. 그런데 카프카의 경우는 남아 있는 글이 몇 있지도 않고, 거의 다 단편이나 중편이다. 장편이라 봤자 단 세 편뿐인데, 그 지리멸렬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히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루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카프카는 지루한 게 아니라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헤매게 만드는 모호한 재주가 있다. 그것도 매우 지루하게, 짧은 단편에서조차. 다만, 그의 글 중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글은 ‘변신’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변신’을 통해 처음 그의 글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후 카프카가 쓴 대강의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미완으로 쓰인 장편, ‘실종자’와 ‘성’ 그리고 유일한 완성작인 장편 ‘소송’과 그의 몇몇 단편에서 중편까지. 그런데 특히, 그 중에서도 내게 지리멸렬함 그 자체로 각인된 작품이 중편인 ‘굴’이다. 물론, 그의 장편 또한 만만치 않지만, 여하튼 ‘굴’을 읽고서 내가 한 마디로 느낀 감정은 ‘이건 대체 뭐지?’였다. 그만큼 글 자체가 이해 불가했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카프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글이라는 ‘굴’을 파야만 하는지 또한 이해 불가했다. 그래서 그냥 그때는 후일을 기약하며, ‘굴’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글쓰기일거라 쉽게 단정 짓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수인’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읽었을 때 아주 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에 근 10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마주한 카프카의 ‘굴’은 그리 녹록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지리멸렬함과 지루함은 여전했지만,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선 ‘굴’ 자체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발톱을 숨겨놓은 채.

 

 

  카프카의 '굴'은 치밀하고, 방대하다. 그렇지만 그의 ‘굴’은 글쓰기라 단정 짓기 힘든 게, 어떤 적의에 대한 방어책으로써의 ‘굴’이란 느낌이 글속에 강하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적의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글 서두에서는 지하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한 동물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동물은 누구도 마주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마주하면 그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늘 굴 깊은 곳에서 소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아주 작은 생물체들이 길을 내는 소리, 바람이 통하는 소리, 지상에서 들려오는 아주 조그만 소음 등등, 그렇지만 보통 굴은 평안하고 고요하다. 주인공은 그 고요를 사랑하며, 그 때문에 굴을 사랑한다. 하지만 치밀한 주인공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에 나름의 여러 가지 방비책을 세운다. 가령, 미로와 같이 얼기설기 얽힌 굴의 중앙에 광장을 만들어, 여차하면 그리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곳에 몇 개월치 먹을 식량을 비축하여,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도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하여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주인공은 굴의 다른 곳에도 조그만 광장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는다. 과연 그의 이런 방비책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왜냐하면 정작 적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광장이든 다 뚫고서, 결국엔 주인공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만 주인공은 굴 중앙에 광장만큼은 튼튼할 거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그 광장에서 무언가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그냥 작은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커져, 주인공의 굴에서의 삶의 고요를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소리는 광장에서 뿐 아니라, 굴 어디에서든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들린다. 만약 광장 가까이에서 땅을 긁는 소리라면 분명 광장에서 떨어진 굴의 입구에서는 그 소리가 작게 들려야 할 텐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땅을 긁는 소리가 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가 어쩌면 애초에 자신이 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 그는 분명 그 비슷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을 처음 만들던 시기였기에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소리는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때 이후로 얼마 후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촉각과 청력이 발달하면 발달했지 퇴보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처음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후로 한참동안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 소리를 내내 들었다면 주인공이 굴을 계속 만들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적으로부터 도망칠 피난처로써의 굴을? 어쩌면 주인공은 내내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굴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땅을 긁는 누군가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소리를 외면한 채 그냥 자신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그 자신의 굴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처음부터 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굴? 광장? 적? 카프카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밑도 끝도 없는 이 알레고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버려, 이 소설을 알레고리가 아니라 어떤 상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믿는 한에서는 알레고리는 어떤 본질에 관해 회귀하는, 그렇게 본질을 상기시키는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이 소설의 굴과 광장 그리고 적은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새로운 해석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좋은 소설이라 말하고, 카프카가 20세기에 가장 연구되는 대표적인 작가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밥을 입에 떠먹여주기를 바라는 독자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실존이란 견지 하에 해석하면 그냥 실존이 되어버리고, 글쓰기란 견지에서 해석하면 그냥 글쓰기가 되어버리는 그의 소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엔, 나는 지금 ‘수인’에서 제기한 글쓰기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단지 카프카의 ‘굴’을 도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하려는 것 아닐까? 많은 의구심 속에 다시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수인’의 굴과 카프카의 ‘굴’을 잠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어차피 카프카의 ‘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내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처럼 작가는 우연에 기인에서 글을 쓰다 ‘의지’를 넣어 글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무리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누군가의 묘비명인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마무리를 낼 수 없는 게 삶이지 않은가? 다만, 그럼에도 글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또 너무 옆으로 샜다. 다 지랄 맞은 카프카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 카프카의 ‘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수인’에서의 굴은 간단명료하다. 글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은 굴을 판다. 거의 모두가 버린 한반도에서, 그렇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낙진이 바람처럼 휑하게 휘날리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로선 그가 소설가임을 필사적으로 심판관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는 무사히 외국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의 서두에서의 설정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게 또 카프카의 ‘소송’을 은근히 패러디한 느낌이다. 그래도 확실히 이 작가가 카프카보다 덜 잔인한 건 황당하긴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라는 그럴 법한 이유와 핑계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도까지 가르쳐주니 얼마나 친절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카프카는 어느 날 주인공을 그냥 끌고 가서, 너는 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는 주인공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 소송을 해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그렇게 자신의 죄도 모른 채 어느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다. 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이기호는 ‘수인’에서 굴이라도 파서 자신이 썼던 책만 찾으면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보내주기까지 하겠다니, 나름 인정이 있는 작가이다. 여하튼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서 굴을 파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툰 곡괭이질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슬슬 곡괭이질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열흘 만에 교보문고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복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심판장에서 보았던 서기와 알고 지내게 된다. 서기는 심판관의 명령으로 최대한 주인공의 편의를 봐주며, 2,3일에 한 번 꼴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러면서 그 둘은 친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주인공의 부탁으로 맥주까지 가져온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주인공은 날마다 교보문구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불안감을 느낀다. 그가 유일하게 낸 책 한 권이 만약 교보문고 진열대에 없다면? 그가 산 속에 들어가 글을 쓰는 사이 만약 누군가가 그 한 권을 사갔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굴을 파기 위해 한 작업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외국으로 가지 못하고 낙진만이 남은 한반도에 남게 된단 말인가? 소설가로서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교보문고 입구 삼십 센티미터쯤 앞을 남겨 두고서, 주인공은 맥주를 가져 온 서기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서기는 말한다. 이미 원하는 곳으로 이주가 진작 결정되었다고. 왜냐하면 그의 굴 파기 그 자체가 그의 형벌이었고, 그에 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두꺼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수고 굴을 팔 수 있겠는가? 벌써, 이로써 그는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가 한 작업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굴을 파고, 밤마다 자신의 책이 없을까봐 두려워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다 마신 맥주병을 서기의 머리에 내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파왔던 굴을 무너뜨린다. 그리고서 삼십 센티 남은 교보문고의 입구 쪽으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그곳은 더 이상 노동이 필요치 않은 존재 그 자체로 소리를 내는 책들의 세상일 거라 꿈꾸며.

 

 

  글을 쓰는 초반에 나는 분명 10년 전쯤 카프카의 ‘굴’을 읽었을 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짓고 그냥 책을 덮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렇게 읽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치열한 글이기에 여러 의문들을 두서없이 던져 놓았다. 그 의문들을 다 주워 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결국, 그러하기에 이렇게 똑같이 10년을 넘어서도 ‘굴’에 관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프카의 ‘굴’이 이기호가 던져 놓은 ‘수인’에서의 ‘굴’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은 너무나 확연하게도 다르다. 이미 내용을 분석하면서도 나는 둘의 분위기가 얼마나 확연히 다른지 은근히 강조하였다. 그러하기에 ‘글쓰기’란 화두에 대해서도 둘이 내어 놓는 입장 차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카프카는 굴 파기를 일종의 글쓰기라고 봤을 때, 스스로 피난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결코 글 속에서 안주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글로 인해 더욱 불안해지고, 더욱 예민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엔 애초부터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즉,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그 불안의 전조는 늘 있어왔고, 때문에 글 자체가 그에게 순간의 피난처가 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는 죽기 전 그가 법률가로서 빠듯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서, 하루에 네 시간씩 꼬박꼬박 쓴 대부분의 글들을 스스로 불태웠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 남은 그의 글들은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친구가 카프카의 사후 세상에 남긴, 카프카 스스로 부인했던 글의 존재가치를 위해. 그런데 이를 뒤집기라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본연의 연민이 발동하여 이기호는 글쓰기에 대해 카프카와 비슷한 설정 속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 글 자체가 내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러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교보문고를 가득 메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곡괭이질 하듯 노동을 해야 한다고, 사뭇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선 분명 이기호의 결론이 이상적이고 온건하다. 어느 누가 카프카처럼 글쓰기를 하고 싶겠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질 않는 굴을 파서 무엇 하겠는가? 그 속에 대피한들 카프카 말대로 결코 피난처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자신을 갉아먹는 굴 파기이며, 똬리틀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카프카의 그런 ‘굴 파기’가 더욱 치열하고, 때문에 ‘글쓰기’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누구나 쉽게 결론은 내릴 수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죽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뻔한 답을 내놓듯, 쉽게 글쓰기란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나는 카프카가 그러한 글쓰기의 꿈을 보여줬다고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 근방에 도달한 글쓰기의 열망으로 그는 치열하게 하루에 주어진 일과가 끝나고서, 밤마다 4시간씩 꼬박꼬박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 아무것도 바꾸어주지 못할지라도. 책이라는 노동 없는 소리에 파묻히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설가라는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그는 글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하기에 내게는 여전히 너무 높고 어려운 카프카이다. 아니, 너무 깊고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굴과 같은 카프카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도저히 그처럼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꿔본다. 카프카와 같은 열망을, 카프카와 같은 치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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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2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2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시가 내게로 왔다 2 - 시에 고백을 담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에서 시인은 어떻게 나비의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시퍼렇고 서슬 퍼런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가 왜 나비는 무섭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공주 같은 나비였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 어떤 시절 그러했듯이, 세상이란 바다가 무섭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만 청무우밭으로 착각하고 간 바다에서 청무우가 소금에 절어지듯 어린 나비는 절어서 되돌아온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우리 새하얀 청춘이 세상이란 소금기 가득한 풍파에 절어지듯이,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쩐 삶만을 삶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삼월 달에 꽃이 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늘 서툴기만 한 우리네 청춘이었다고 해도, 우리 가슴 속에 시리게 품을 문장 하나쯤은 남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 초생달 같이 시린 문장 하나!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내 꼬옥 품어주어야 하는 상처 같은, 그렇지만 배움 같은 그런 문장 하나!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물이 되기를 늘 꿈꿔왔다. 내 뜨거운 욕정이 닳고 닳아, 더 이상 그 누군가를 뜨겁게 감싸지 못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꿈꿔왔다. 그래서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고, 늘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뇐 만큼 꼭 그만큼, 어느 누구와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게 되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늘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유는 명료했다. 내 불길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혼자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어쩌면 흐르는 물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게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

기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

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

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

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관념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청춘이라면 모두 이상이라는 이 이상한 사내에게 한번쯤은 꼭 끌려야만 하는 게 법이라도 되는 걸까? 이 시를 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실 잘 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읽는 바로 그 순간 내 가슴 속에 울림이 있었다. 절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절벽에 핀 꽃처럼 매달린 어느 사내의 절규가, 울부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꽃의 절규일지도 모르는 그런 울부짖음이······.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진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넣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태어나서 시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학교의 문학 동아리 선배인데, 지금은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화두와 함께, 시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들어온 01학번 새내기 여자 후배였다. 선배의 경우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인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움을 알고, 노래를 아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01학번 여자 후배의 경우는, 좀 색달랐다. 뭐랄까? 그 발상이 엉뚱하다고 할까? 아니, 처음엔 그렇게 느꼈다.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 태양이니까, 구름아! 태양을 안아주겠니? 이런 어투의 짧은 동시 비슷한 글을 동아리 사이트에 남겼는데, 이상하게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우산을 펴는 시부터,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의 허망함을 파도의 말로 따뜻하게 감싸는 시선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투성이었다. 늘 관념과 관념이란 절망에 허덕이던 내겐 그 모든 언어가 신선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눈이 내려 검게 질척이는 눈에 대한 절망적인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동아리 사이트 내에 그 시를 올렸는데, 댓글에 후배가 이런 말을 달아 놓았다. 난 그 질척이는 검은 눈들이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느껴진다고. 또 무언가 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쿵하는 울림이 어떤 그림으로 내게 되살아났는지 알 것만 같다. 짙은 농담으로 그려낸 할머니의 싸륵싸륵 눈을 밟는 굽은 발걸음, 그렇게 눈을 녹이는 할머니의 소리,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다.

 

 

 

 

호남선

 

김준태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그리스 민요 중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민요가 있다. 사실, 민요라기보다는 전통가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장르로 꽤나 유명한 곡이니까. 여하튼 처음 이 시를 혼자 속으로 읊을 때는 그런 느낌이었다.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으로 자꾸 시계를 보고, 그럼에도 떠나는 사람은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야만하는······. 어쩌면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 근대사 속에서 터키와 전쟁을 치루며, 그렇게 누군가는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고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시는 그런 비장미보다는 오히려 내게는 한이 물씬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한스럽고 서글퍼서 읊다가 그만 나도 호남사람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몰입을 할 뻔했다. 겨우 네다섯 살 적 서너 해 산 게 전부인 내가, 그리고 기차를 타고 떠가날 잘 배운 놈들의 하나일 게 분명한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토할 뻔했다.

 

 

 

베트남 Ⅰ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은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부인

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시션 박스

속에서도 가랑이 벌려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나는 물론 베트남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베트남은 아버지의 베트남이다. 신학대를 가겠다고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가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놓여진 17장의 편지, 그 속에 아버지의 빼곡한 베트남과 신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휴학하고서 방황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그 때,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의 일기장 속에 베트남의 사진들과 아버지의 글들로 베트남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로이에 관해선?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시를 택했는지. 그렇지만 스무 살 때 처음 어느 선배가 루오의 화집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게 루오 그림 중 유독 ‘창부’라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깔의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한 허리, 그 어디에도 내가 생각하던 기존의 창부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거울 속 지친 기색의 창부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화집을 사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서 여인의 슬픔을 이해해 보려 하였고, 드가의 무희들의 공연 뒤 그 시린 등 뒤를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내 청춘의 시린 등 뒤에 대한 기억을 보듬어 보려 하였다. 그리고 화사한 모네의 그림 속 여인에게서 환상을 품어보았다. 개양귀비 핀 들판에서 서 있는 여인의 풍경과 우산을 들고 뒤돌아선 여인의 자태에서 눈부신 여성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땐 몰랐다. 그 모든 시작이었던 루오의 그림의 창부로부터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 지, 그땐 미처 몰랐다.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하게 부풀어 올라 어디가 허리인지 배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어느 창부에게서, 그렇게 지친 피로의 기색을 띤 조금은 못생긴 창부에게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지. 문득, 내 20대 때의 모든 연민들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

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우리말들을 모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의 이름을 모르는지 생각해 보았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자주달개비, 부추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이름들, 그러하기에 당연히 생경한 꽃의 정경과 향기들. 아무리 인터넷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고 들여다보아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저 아름다운 꽃의 말들로 사람들의 얼굴마다 형상을 그려주고, 새들의 날개로 옷을 지어주고, 나무와 들풀의 뿌리로 밥을 짓고, 산과 강의 풍경들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툰 시를 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 삶이 쭉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박남준이란 시인도 나처럼 그러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저 모든 꽃과 새와 들풀의 말들을 모르지만,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떼는 법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원’이라는 산골짜기 마을에 살면서, 나는 하루 일과로 나무를 해오면 장작을 쪼개고, 아궁이는 아니지만 기름보일러 대신 사용하는 나무보일러에 불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박남준 시인처럼 서툰 내 삶을, 서툰 내 시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이 남은 재들을 부대자루에 담아 밭에 뿌리면서, 또 다른 환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툰 나비가 바다에 절어서 돌아와 생긴 시린 초생달이 서서히 차올라 보름달보다 환환 달빛을 드리울 그런 환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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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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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1 -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의 자태

 

 

 근래 내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남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말 그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해도 200만원을 겨우 버는데, 나는 일주일에 그 정도 일하고 그 만큼을 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자유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나는 대학로의 방송대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한다. 실상, 공부보다는 주로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 만큼 여유롭고 한가하다. 말 그대로 일종의 선비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인지 다소 게을러져서 평소 10시 넘어서 일어나는 건 기본이고, 어쩔 때는 12시 넘어 2~3시까지 잠에 취해 있을 때가 있다. 물론, 늦게까지 잠을 안자는 부엉이 생활패턴이 그 주원인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다음 날 마뜩하게 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나는 그 무언가를 상실했다. 10대 후반부터 지금껏 나를 지탱해 주던 그 무언가를.

 

  외로움, 그리움 혹은 공허함, 이런 것들은 사실 이제까지 줄곧 너무나 익숙하게 곁에 있어 와서인지 그리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때때로 이런 감정들에 휩싸일 때면 주체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나는 그런 주기들을 견디는 법들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상실감은 무엇 때문일까? 오후 3시 늦게 일어나서, 5시께나 대학로 도서관에 당도하여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는 내 자신의 일과에 대한 무력감? 혹은 그럴 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제 끝나버린 관계들의 아쉬움? 이 역시 모두 앞에서 말한 범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결정적으로 상실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내가 그 동안 그토록 두려워하며 경계했던 열정이다. 열정.......

 

  십대 후반부터 스무 살까지 품었던 신에 관한 열정, 그리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 스무 살 적, 한 여자에게 품었던 열정, 신과 여자 모두 잃고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방황에 품었던 열정, 이런 방황 가운데 훌쩍 서른이 되어 먹고살기 위해 영어에 매달렸던 열정, 끝으로 최근까지 가슴 속에 품었던 막연한 프랑스에 관한 열정 등등. 이제껏 나는 이런 열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었고,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신에 관한 열정 때문에 신을 잃었고, 한 여자에 관한 열정 때문에 그 여자를 잃었고, 방황에 대한 열정 때문에 종국엔 방황의 길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떤 열정을 상실했음을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의 하루의 일과 중에서 산책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에 두 번 정도 하는데, 학교에 당도해서 한 번, 오후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두 번 정도 한 번 할 때 마다 30분 이상 소요되는 산책을 즐기고 있다. 장소는 대학로 방송대와 가까운 낙산공원이다. 그리고 산책을 할 때면 나는 위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때론 무력해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어떤 영감을 받아 시를 쓰기도 하고, 소설에 대한 갈피를 잡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내 화두는 나의 이런 상실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이었다. 아니, 어떤 부름이었다. 산책 코스 중 내가 혼자서 명명한 ‘생각 벤치’라는 곳이 있다. 다른 곳의 벤치와 달리 대학로의 전망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 무언가 탁 막혔던 가슴이 트이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즈넉해져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이런 저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결국엔 숱한 상실감들에 지쳐 생각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그 때, 가슴 속에서 어떤 시 구절이 울렸다.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같고

    

 

  김수영의 유명한 ‘꽃잎1’의 마지막 시 구절이었다. 갑자기 왜 그 구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 어떤 시보다도 혁명적인 그 시가 왜 나의 이런 삶 가운데에 문득 떠오른 것일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 어떤 위로가 되는 미지의 목소리처럼 가슴 속에 남아 글을 써보려 시도해 보았다. 이 또한 거의 10년만이었던 거 같다. 어떤 스터디에서 내준 숙제가 아닌 내 스스로 내밀한 고백을 담아 무언가 평론을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그런데 좀처럼 글이 잘 이어져 나가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 상황과 이 혁명적인 시를 도무지 연결할 고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쓸데없는 내 얘기 뿐. 어디에도 내밀한 고백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장 써내려간 글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며칠 째 그 부름에 응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에브리맨’을 읽게 되었다. 속도를 높여, 페이지를 넘겨갈 수록 확신이 들었다. 부름에 응해야한다는. 그러하기에 지금 이 평은 어쩌면 ‘에브리맨’에 관한 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꽃잎1’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저 쓸데없는 내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죽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이런 문제에 대해 나는 그다지 할 말이 있지가 않다. 신의 문제의 경우는 스스로 뿌리를 잘랐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고, 죽음의 경우엔 실제로 내 경험의 테두리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작 30대 중반에 내가 감히 어떻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일도 안 되는 허방을 짚는 짓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최근까지는 분명이 그랬었다. 그런데 근 2년 사이 나는 죽음에 대해 이제는 조금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버리게 되었다. 다만 벌써 그 이야기를 발설하는 것이 옳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대화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건 별 일 아니지만, 이렇게 글로 그 죽음에 대해 표현한다는 것은 사뭇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론 내밀한 글들이란 건 사장되지 않고 되살아나서 칼날을 들이밀기도 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눈을 떴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한 친구의 모습이 어리었다. 모두 괜찮으냐며 알아보겠느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하얀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주일간 내가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밤,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버지가 문을 열어보니 내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더란다. 그래서 병원에 급하게 데려왔는데, 의사 말이 뇌종양이라고 했다. 뇌종양....... 이상하게 어떤 울림도 충격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나와 한통속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친근한 언어로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의사 말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난 뇌종양을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술을 좋아하는 경우 30대 중반에 나와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내 경우에는 빨리 발견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종양의 진행 속도 또한 급성이 아닌 만성이라 제거하면 바로 완치가능하다고 했다. 비록 8시간의 대수술과 약 1달간의 입원생활을 더 해야 했지만, 실제로 두 달 이후 나는 이 전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내 몸이 호전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술을 몇 달 후엔 한두 잔씩 마시기 시작하였고, 1년쯤 지나서는 매일 같이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빼먹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한 3개월 전쯤 그 일이 발생했다.

 

  그 날은 사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날 스터디 모임이 있었는데 후배가 발제를 하는 날이었다. 그 당시 스터디의 경우 내 2~3명의 친한 후배와 외부에서 아는 사람의 경로로 들어온 3~4명의 사람들로 구성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말은 문학 모임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둘, 셋 정도 됐고, 나머지는 대체 왜 그 모임을 참가했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여하튼 그러한 간극 때문인지 그 날도 문학이 아닌 영화로 스터디 주제를 삼아 이야기를 했는데, 외부에서 온 멤버들이 가관도 아니었다. 대체 영화는 보고 왔는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최소한의 예의로 글을 써오는 것조차 하질 않고서 마구 발제자를 공격해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스스로의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무기로 삼아 허세를 떠는데, 그 때부터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닌 과민해진 나는 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이제까지 평생 처음으로 느껴본 두통이었다. 사실, 난 뇌종양을 달고 태어났음에도 평생 두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스터디가 끝나고서 돌아오는 전철에서까지 나는 그것이 기분 탓인지 두통 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기분을 전환할 마음으로 후배의 기분도 풀어줄 겸해서, 발제했던 후배에게 술 한 잔을 제의했다. 안주는 석화였고, 술은 소주였다. 한 잔을 들이키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두통이 아닌 기분 탓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약 20분, 나의 기억은 소실되어 버렸다. 앰뷸런스 실리면서부터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는 한다. 계속 구역질을 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후배와 함께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두 시간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놀란 어머니와 아버지는 술을 왜 마셨냐고 다그치기도 하시고, 대체 약을 얼마나 안 먹었으면 약물 기준치가 떨어져서 그 모양이 된 거냐고 말씀하셨다. 그때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두려움이란 걸. 이제부터 내 몸은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작지만 나에게는 크다면 큰 변화가 생겼다. 먼저 프랑스에 대한 나의 동경을 접었다. 물론 앞으로 5년 정도 지나 완치 판정이 내려지면, 다시 나는 또 프랑스를 꿈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 내가 프랑스를 꿈꾼다는 것은 그 막연함만큼 먼 이야기처럼만 느껴진다. 아니, 사실 내가 프랑스에 대한 꿈을 접은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이냐면, 더 이상 프랑스를 핑계로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염원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지금 쓰지 못하면, 나는 언제 쓸지 알 수가 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영 나는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난 프랑스라는 그 막연한 이름을 통해 얼마나 글쓰기를 미뤄왔던가?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내 눈 앞에, 내 손에,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을.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그 제목처럼 보통남자이다. 예술가이기엔 너무 안정 지향적이고, 그렇다고 안정만을 추구하지는 못하여, 3번의 실패한 결혼을 한. 그래서 말년을 외롭게 병과 싸우다 간 보통남자이다. 이 소설 속에서 죽음이란 건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무겁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까닭으로 죽음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저자는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우스워져버림을 깨닫는다. 은퇴 후 그림만 그리겠다는 그 꿈도, 망각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그 대단한 결심들도, 그가 한 평생 모아온 책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죽음 앞에서도 각자 주어진 악전고투를 치러간다. 그의 동료 중 어떤 이는 자서전을 쓰려하고, 어떤 이는 그림을 배우는데 열중을 해보고, 주인공은 죽음이란 의미와 맞닥뜨려 그 속에서 동시에 생의 의지를 되새겨 본다. 나는 감히 이렇게 직면한 죽음과 나의 죽음의 문제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나의 죽음의 문제는 이렇게 일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일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되레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하기에 생명으로 가닿기 위한 느린 걸음이어야만 한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대학 때 한 선배가 매 주 열리던 ‘낚시촌’이라는 시낭송 모임에서 이 시를 낭송한 적이 있었다. 평소 워낙 시인 같은 선배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가슴 속에서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뜨뜻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전까지 단순하게 내게 교과서에 나오는 ‘풀잎’, ‘폭포’를 쓴 저항시인으로만 알아왔던 김수영 시인이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저항과 혁명정신은 내가 기존에 알던 저항과 혁명이 아니었다.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가 아닌,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은 느리고 부단하게 흔들리며, 떨리는 불안이었음을 그제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스스로 안위하듯 한 번 더 읊조린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이제 두서도 없고 복잡한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할 거 같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의 부름에 대한 내 대답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에브리맨’에서의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깡그리 잃어버린 열정에 관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실, 처음부터 나는 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마지막 구절이었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 그런 느리고 유려한 흔들림. 많이는 아니고 그렇게 조금. 사실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 무언가를 못한다고 해서 그리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엄청난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의 이 선비놀음으로 인해 앞으로 다소 궁색한 삶이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전혀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 있다. 오랫동안 나의 화두의 하나였던 뿌리를 자른 꽃잎이 바람에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꽃잎이 어딘가로 날아오르는가와 그리고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는 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실 어차피 그 꽃잎은 어딘가에서 모르게 썩어질 것이고,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다른 꽃을 피어낼 것이다. 그러하기에 꽃잎이 어딘가로 가거나 머무는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이다.

 

  언젠가 몰래 담배를 피러 나온 학교 담벼락과 마주한 꽃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봄이면 매일 눈처럼 떨어지는 것이 꽃잎이지만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그만 두 눈을 적시고 말았다. 그리고 부끄러워 그 거리를 뛰어서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가, 서럽게 울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 아무리 눈물을 흘리려 발버둥 쳐도 한 방울도 흘려지지 않는 눈물이 왜 갑자기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는지. 몇 년이 지나고서 문득 그 일을 기억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 나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를 통해서 내 청춘의 절정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그 순간은 짧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고 정지한 화면으로써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 때 그 꽃잎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음을. 그러하기에 아직도 나중에 떨어지는 작은 꽃잎들이 내 가슴속에서 천천히 묵직하게, 그렇지만 절정이란 이름의 유려한 자태로 나락해가는 풍경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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