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해외뉴스를 통해 시리아나 아프카니스탄 같은 혼란한 국가의 상황을 보게 된다. 사방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주변에서는 폭탄테러가 일어나 수백명씩 죽는 일이 발생한다. 놀라운 건 이런아수라장 같은 곳에서도 시장이 열리고 장사를 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남은 사람들은 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만큼 삶은 끈질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학살하던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갔을까? 모진 삶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살아나갔다. 그게 바로 삶의 특성일 것이다.

태백산맥 3권은 1,2권에 비해 속도감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좌우익의 학살이 한차례식 지나간 후 3권에서는 표면적으론 큰 사건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연순 반란 사건을 일으켰던 김지회와 14연대는 지리산 속으로 숨어들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벌교 총책인 염상진을 주축으로 한 좌익들은 지리산 자락인 조계산에 숨어 반격을 준비한다. 벌교에는 경찰 토벌대를 이끌고 온 임만수 외에, 200여 명의 중대 병력을 이끌고 계엄군 사령관으로 온  심재모 중위가 등장한다. 심재모는 우익들의 지나친 복수를 금지시키고, 벌교를 안정시키며, 염상진 일당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지리산에 입산한 좌익들의 가족들의 힘겨운 삶이 그려진다. 빨갱이의 가족이나 자식이라는 비난 속에 매를 맞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면서도 그들은 살아남는다. 대부분 가족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아버지가, 아들이 그 사상을 가졌기에 고초를 당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편을, 아버지를, 아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눈물겹다.

2권에서 염상진이 마을로 잡입한 사건 이후, 다시 좌익들을 가족들은 잡혀가 몰매를 맞는다. 남편이나 아들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알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그들은 그냥 매 타작을 당할 뿐이다. 겨우 풀려난 가족들은 굶주림과 주변의 냉대를 당한다.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염상진의 아내인 죽산댁은 아들 광조와 힘겹게 살아가고, 하대치의 아내인 들몰댁은 두 아들과 살아가기 위해 처갓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외서댁은 여전히 염상구에게 몸을 빼앗긴다.

이들 중에 가장 안타까운 사연은 과수원 댁의 불리는 배성오의 어머니이다. 큰아들은 공무원이고, 작은 아들은 공산당이다. 아들이 집에 들어오자 그를 숨겨 준다. 헛간에 굴을 파고 작은 아들에게 음식을 날려 주면서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닭을 삶아 아들을 먹이는 장면에서는 너무나 애처롭다. 그런데 결국 형이 이 사실을 알고 동생을 밀고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이 총을 맞아 죽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본다. 그리고 결국 그 어머니도 목을 맨다. 당시 이런 사연을 가진 가정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3권에서는 기독교 사상가인 서민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통해 백범 김구의 사상을 우남 이승만과 대조하여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승만을 기회주의자로 김구를 민족주의자로 묘사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신탁통치 반대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네. 백범의 반탁은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우남의 반탁은 자신의 집권 욕구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려 함이 아니었나. 여기서부터 백범은 역사적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고, 우남은 반역사적 소아 이익의 길을 택했다. 좌익 진영의 찬탁과 우익진영의 반탁이 엇갈리는 소란 속에서 이승만 중심의 남한 정부 단독 수립이 싱가포르 통신을 통해 들어온 것이 1946년 4월이었고, 우남은 마침내 6월 3일에 남조선만이라도 즉시 자율적 정부를 수립해야 ㅎ나다는 그 유명한 '정금 발언'을 한 것이 아닌가. 백범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발언은 곧 민족분단의 획책이었지. 같은 민족이 서로 상대되는 주의를 앞세워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민족분단을 야기한다, 그건 백범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지, 식민지 시대에도 민족의 분단은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백범과 우남은 서로 등을 돌리 수밖에 없었느니까. (P 306)"

개인적으로 백범과 우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저자의 시각에 전부 동조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좀 더 알아가게 되었다.

3권에서도 염상구의 악행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염상구라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외서댁을 통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외서댁이 임신하자 그 사실을 소문을 낸다. 결국 외서댁을 자살을 시도한다. 또 안창민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이지숙을 고문하고, 정하섭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소화를 고문한다. 그리고 소화를 고문하는 과정에서는 임신을 한 그녀를 낙태를 시킨 것도 모자라, 그것을 통해 정하섭의 어머니와 협상을 해 돈을 챙긴다.

염상구란 인물과 벌교의 지주들의 만행을 보면 작가의 시선이 너무 좌익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백산맥은 저자가 민족주의자이면 중도주의자인 김범우라는 인물을 통해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점점 우익의 만행과 친일 주의자인 지주와 경찰 간부 등을 등장시키며 균형이 무너지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황의 균형을 맞춰주는 인물이 계엄군 사령관인 심재모이다. 그는 일제시대 때 학병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귀국 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군에 입대한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들도 증오한다. 저자는 심재모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우익이 모두 친일 주의자만은 아니며,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인물이 있음을 상기시 켜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2017 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박상순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다. 한때는 월간이나 계간으로 출간되는 문예지들을 꼬박 읽고, 그곳에서 있는 시들을 깊이 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수상작들을 더 주목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문예지마다 각종 상들이 있었고, 그 상에 수상한 시들이 실려 있었다.

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다시 옛 생각이 났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시도 시대를 따라 변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시들은 한 번 읽으면 그 의미가 금세 마음에서 느껴졌는데, 이 책에 실린 시 중에서는 몇 번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시들이 많아졌다.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변했던지, 시가 변했던지...

대상 작품은 박상순 시인의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이라는 시이다. 박상순 시인의 시는 처음 접해보는데, 읽는 내내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을 많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그렇다.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비위 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묻고, 그는 죽고 말았다." -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중에서

박상순 시인의 시 중에 특히 지명이 많이 언급된다. 이 시에는 '왕십리'라는 지명과 '모란'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는 시가 있다. 모두 지명과 관련되어 저자가 느꼈던 아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하얗게 밀어 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 [왕십리 올뎃] 중에서

"모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원인데 봄날인 줄 알았음.
그래도 혹시나 둘러만 볼까, 생각했는데, 아뿔싸
고독의 아버지가 있었음. 나를 불렀음.
환자용 침상 아래 납작한 의자에 앉고 말았음
괜찮지요. 괜찮지. 온 김에 네 집이나 보고 가렴.
바쁜데요. 바빠요, 봐서 뭐해요. 그래도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으니, 여기저기, 여기니, 찾아가보렴.
옥상에 올라가서 밤하늘만 쳐다봤음. 별도 달도 없었음.
곧바로 내려와서 도망쳐왔음.
도망치다 길 잃었음. 두어 바퀴 더 돌았음.
가로등만 휑하니, 내 마음 썰렁했음. 마침내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는 집, 여기저기 맴돌다가 빠져나왔음." -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최근에 시집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이 시집에 나오는 시인들의 이름이 대부분 낯설다. 그럼에도 반가운 이름이 있다. 이근화 시인이다. 이근화 시인은 시집보다는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란 산문집으로 먼저 알았다. 글 쓰는 이의 고통적인 숙명과 그 숙명에서 느끼는 보람 등을 이야기하고 있던 산문집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 실린 시인의 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벚꽃이 만발하고 오랜만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들 거린다. 이건 너무 정교해. 사실이 아니야. 내가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느라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동안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 아저씨도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젊은이들도 구부정한 노인들도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든다. 잠시 멈춰서 허리를 뒤로 젖힌다. 유연하다 저 허리. 상상도 못할 일이야. 하늘과 벚꽃이 함께 담기는 순간 우리의 봄은 완성되는 것일까.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페이지가 이제 막 넘어간다.

입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발걸음을 총총 옮기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이건 너무 낡고 지루해. 우습게 반복되잖아. 내가 울지 않아도 이 세계는 넘친다. 내가 웃는다면 조금 더 시끄러워질 것이지만, 당신의 발가락을 빠는 상상만으로도 침은 고인다. 돈도 사랑도 성공도 없지만 샘솟는 침을 어찌하랴. 진지하고 솔직하기를 바랐지만 얼렁뚱땅 두루뭉실 흘러간 내 인생아. 약 15도 정도 허리를 젖히고 벚꽃을 바라볼 때 나는 어디로 가나. 어떻게 돌아오나. 왜 멈추나 주정차 단속 구간에서 경찰들도 빨간 봉을 든 채 벚꽃과 함께 흔들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멈춰선다. 호루라기 소리를 배경으로 팡팡 터지는 셔터들." - 이근화 시인의 [약 15도] 중에서

이 외에도 이 시집에는 김상혁, 김안, 김현, 이민하, 이영주, 이제니, 조연호 등의 시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백산맥 2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해방 후의 혼란 상황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었고, 그 결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중에 가장 잘 못 낀 단 추가 친일청산이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결구도가 미 군정 이후는 좌익과 우익의 대결구도가 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것이 가장 급했던 미 군정은 행정 유지와 좌익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제시대 경찰들과 공무원들을 다시 기용한다. 그 결과 해방 전 친일파였던 우익이 독립운동을 했던 좌익을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한국의 해방공간에서만 벌어지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은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년 만에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있다. 2권을 읽으면서 앞에 언급한 구조가 그대로 소설로 재연되고 있다. 2권에서는 여순반란사건 이후 다시금 공권력을 회복한 우익이, 이제는 좌익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소설의 배경이 벌교의 소화다리 밑은 이렇게 죽은 시체들로 가득해진다. 결국 보다 못한 김범우는 이 지역의 국회의원인 최익승을 찾아가서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재판 없이 총살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화근이 된다.

최익승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달려온 인물이다. 일제 시대 때 그가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인 밑에서 소사를 하며 일본인과 친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제 시대 때 권력을 잡았지만, 해방과 함께 살기 위해 도망을 가야 했다. 하지만 미 군정이 들어오고 그들 밑에서 권력을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해방 후 쌀값이 폭등할 때 당시 부자들이 그렇듯 쌀을 매입해 폭리를 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권력을 비웃는 김범우에게 증오를 느낀다. 그리고 그를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가둔다. 여기에 동조하는 인물이 벌교의 경찰서장인 남인태라는 인물이다. 남인태 역시 일제시대 때 순사를 하다가 해방 후 다시 경찰이 되었다. 그는 최익승에게 사주를 받아 김범우를 가둔다. 이 과정에서 김범우는 '빨갱이'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상관없이 그 말은 되풀이될수록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 왔다. 김범우는 그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자신의 의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위축감을 느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P24)"

2권에서는 벌교 지역에 진압경찰병력이 들오면서 더욱더 공산주의자 색출과 폭력과 학살이 심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염상진과 일행들의 가족들을 몰매를 당하거나, 구타로 죽거나, 심지어는 성적인 능욕을 당한다. 또한 이런 공산주의자 색출을 이용해 자신들을 욕심을 채우거나 부를 채우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소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여수 읍민들이고 순천 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는 확실한 죄악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P 159)"


 


그렇다고 이야기가 우익의 만행에만 초점을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단지 2권이 다시금 우익이 벌교 지역을 장악하고 보복을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이 부분이 더 강하게 부각될 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소설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좌익들의 '공산주의 혁명'이 얼마나 허구이며, 그 허구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또한 한편으로 당시의 해방 후 토지분배의 실패 과정과 쌀값과 같은 폭동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가졌을 미 군정과 지주계급에 대한 분노도 묘사한다. 결국 이런 상황이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2권에서는 특히 저자의 냉철한 역사의식이 돋보인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이 된 것이 단지 미군이나 좌익, 또는 우익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김범우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불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과 자체 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P 376)"

글을 쓰다 보니 소설에 나와있는 정치적 상황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지만, 사실 이 소설은 계속해서 위대한 서사성을 가지고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고 나간다. 이 책을 읽으며 한동안 경험하지 못한 소설 읽는 재미를 다시금 느낄 수가 있었다. 산으로 숨은 염상진 일행이 다시 벌교읍으로 집입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안창민이 부상을 당해 숨는 이야기, 또 정하섭과 소화의 기구한 사랑 이야기 등, 소설적 재미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백산맥 1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읽다 보면 한 인물에 대한 인상이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내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소설 속의 두 인물이 있다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태백산맥]의 김범우라는 인물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린 심성에도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노파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내면의 싸움을 싸운다. 살아가면서 마음에 선악의 싸움을 느낄 때마다 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이 났었다. 라스 콜리 니코르가 내면에서 싸움을 싸우는 인물이라면,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 속의 김범우라는 인물은 외부에서 극단적인 좌우익과 치열한 싸움을 싸우는 인물이다. 해방정국에 모두들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나 민주주의자가 될 때, 김범우는 자신만의 신념으로 민족주의의 길을 걷는다. 결국 두 세력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으로 나누어져 서로 상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럴 때면 나는 김범우라는 인물이 생각난다. 보수나 진보라는 이념보다 국가와 사람이 중요할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다.

[태백산맥]이란 책은 벌써 20년도 넘은 시절에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역사 소설의 황금시대였고, 특히 10편짜리 역사소설들이 인기를 끌었었다. 그중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후에 출간된 [한강]같은 작품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흔히 조정래 작가의 작품을 좌편향적인 시각에서 해석할 때가 많다. 그로 인해 작가나 작품 역시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태백산맥은 결코 한쪽의 시각에서 치우친 작품이 아니었다. 작가는 양극단적인 염상진이나 염상구와 같은 인물들 속에서 민족주의자인 김범우란 인물을 통해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혼란 시기에 우리가 가야 했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민족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의 길이었다. 작가의 시각은 결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모두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와 한민족을 유린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민족끼리 중심을 잡고 역사를 헤쳐나가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너무도 끔찍한 역사의 비극들이 일들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소설의 시작은 해방정국에서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난 전라도 벌교의 혼란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벌교에서 공산주의자로 잠입해 있던 염상진이란 인물이 그를 따르는 정하섭이나 하대치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여순 반란 사건에 참여해 벌교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진압군이 들어오자 염상진과 일행들은 지리산 쪽으로 도주를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벌교라는 지역과 그 지역에 사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해방 후에 한국 사회가 거쳐야 했던 좌우익의 극한 대립과 혼란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김범우라는 인물을 통해 모두들 양극단으로 치우칠 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그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런 시각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바로 김범우가 한때 김범우의 집안의 머슴이었던 문 서방과의 대화이다. 여순 반란 사건이 터지자 김범우는 문서방 집으로 피신을 하고, 문서방은 읍내의 상황을 김범우에게 전달해 준다. 이 과정에서 문서방은 땅을 공짜로 준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말에 혹해서 김범우에게 묻는다.

"긍께 말이요, 염상진인가 위원장 동무란가 허는 사람이 말하기를, 지주덜 전답을 싹 다 빼앗갖고 소작인덜헌테 골고로 골로로 갈라준다고 혔다는디, 고것이 참말이었을께라?"

그러자 김범우는 이런 공산주의의 허구를 쉽게 이야기 해 준다.

"문 서방, 문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먼이라, 살아생전에 안 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워메 워메, 그럴라면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그렇지요, 농사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하는 맛이 살제 무신 초 친 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그런 농새도 안 지어라."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겠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허어, 갈수록 태산이시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의 농새 자알 되야묵겠소. 쎄 빠직 일헐 눔 하나또 웂을것일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북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그렇다고 작가가 단순히 공산주의자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해방정국의 혼란을 묘사하면서 친일파들이 공산주의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다시금 정권을 잡고, 한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해방정국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지주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땅을 넓히고, 소작인들은 계속해서 그런 지주들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속에 분노를 끓고 있는 모습들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런 배경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해방정국에서의 광기이다. 양극단으로 치달아 서로를 죽여버리려는 광기를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서로를 학살하는 장면을 통해 그래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소설적인 재미가 있다. 역사소설의 매력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흘러가는 소소한 스토리일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역사소설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태백산맥에는 바로 그런 소소한 이야기가 있다. 인생들의 굴곡진 삶들이 녹아있다. 그래서 이 책이 계속해서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배경에서 어느덧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광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존재한다. 서울에서의 웬만한 아파트값은 10억이 가는 상황에서, 한 채가 아닌, 여러 채를 늘려 가며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조금만 부의 균형이나 복지를 이야기하면 모두 공산주의 사상으로 매도를 한다. 반대편에서는 치솟는 전셋값과 월세값을 감당하지 못해 계속해서 외각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진 자들은 모두 적폐 세력이 된다. 이런 극단적인 대립이 계속될수록 사회는 불안해지고, 해방정국과 같은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다. 마치 [태백산맥] 속의 해방정국이 그대로 오버랩 되는 상황이다.

 

자기 것을 조금 양보하고, 서로를 조금 더 생각해 주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결국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김범우와 같이 양쪽으로부터 비난과 배척을 당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20년 만에 읽은 태백산맥의 현실이, 20년 전이나 바뀐 것이 없는 지금 현실과 너무 비슷해 마음이 씁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 가다가 해외 토픽 등을 보면 여성을 납치해 오랜 시간 가두어 놓다가 발각되는 사건들이 보도된다. 심지어는 납치한 여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렇게 십 년 넘게 포악한 남자에게 감금당해서 사는 여성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까. 그리고 피해자인 여성은 감금에서 풀려난다고 해도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더 나아가 이런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난 자녀는 어떤 삶을 살까.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이런 삶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카렌 디온느 작가의 [마쉬왕의 딸]이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스릴러 소설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읽으면서 스릴러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길들여진 한 여성이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감점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을 처절하면서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헬레나는 두 딸과 남편과 함께 미시간 주의 늪지대 근방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야생 열매로 잼을 만들어 가게에 팔면서 행복하게 살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방송에서 끔찍한 뉴스를 듣는다. 오래전 여성을 납치해 10년 넘게 숨어살다가 잡힌 죄수가 간수를 살해하고 탈옥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늪지대에 숨어 살며 살인을 저질렀기에 '마쉬왕'이란 별명을 붙어 있다. 마쉬왕이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늪지대를 지배하는 마왕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마쉬왕이라고 불리는 자는 바로 헬레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디어의 혼혈이었던 헬레나의 아버지는 16세 소녀였던 헬레나의 어머니를 납치해 늪지대의 오두막에 가두어 놓고 생활한다. 거기서 헬레나가 태어났다. 헬레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전부였다. 비록 남들에게 끔찍한 유괴범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품에서 탈출하고, 아버지를 감옥에 가게 한 것이 바로 헬레나였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두 딸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와 싸워야 한다. 늪지대로 탈출한 아버지를 경찰이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기 때문이다. 마쉬왕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받은 자신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아버지를 잡으러 간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하는 뒤쫓아야 할 존재는 아버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교도관 둘을 죽이고, 교도소에서 탈옥한 것도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 저 늪지대에서 사는 한 떨기 꽃송이 속의 꽃가루 알보다도 더 작은 크기의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양 갈래머리의 꼬마 소녀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P 41)"

소설은 그녀가 아버지를 추적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반절 이상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 늪지대에서 아버지와 살아가던 추억들, 아버지에게 사냥의 기술을 배우고, 아버지에 인정받던 짜릿한 기분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차츰 아버지의 폭력성을 접하고, 자신과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회상한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딸의 감정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언론은 아버지를 가리켜 동화 속 괴물의 이름을 따서 마쉬왕이라고 불렀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이해한다. 그 동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버지가 한 말이 행동들 중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걸 나는 후에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거다.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최선의 선책을 한 것뿐이지 않을까? 아버지는 나를 학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적어도 많은 사람이 아버지가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성적 학대는 없었다. (P 61)"

소설의 초반에서는 헬레나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좋은 부분만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의 끔찍한 폭력성이 드러나고, 결국 그 아버지의 폭력성을 미워해야만 하는 헬레나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성에 길들여진 한 소녀가 아버지의 사랑과 폭력 사이에 갈등하는 심정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읽는 내내 과연 작가가 어떻게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놀라기까지 하였다.

비록 소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어쩌면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은 거의 숙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까지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는 아버지의 폭력의 방식과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극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저앉는 사람들도 있지만, 헬레나처럼 강한 의지력으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방식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나 감동적이면서도 의미심장에서 눈물을 흘릴 뻔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