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1 - 미래에서 온 살인자,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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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타임머신이나 시간여행과 관련된 영화나 책들을 좋아했었다.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이제는 꽤 오래된 영화인 [백투 더 퓨처]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괴짜 과학자를 만나 이상한 슈퍼카를 타고 과거와 미래를 여행한다. 여러 시리즈로 만들어졌던 이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엄마가 자신을 좋아해서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신은 태어날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진다. 영화를 본 후 한참 지나서 시간이 지나서 생각한 것이지만, 결국 영화에서 엄마가 주인공을 낳지 않았다면, 주인공이 과거로 오는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이것을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라는 이론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은 이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라는 묘한 찰흙 덩어리는 잘 반죽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함을 깨달았다.

[곰탕]이란 소설은 바로 이런 묘한 소재로 만든 특이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할 때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 끌렸다. 그럼에도 곰탕을 배우기 위해서 과거로 여행한다는 내용으로 인해 소설이 조금 황당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소설을 펼치는 순간, 그런 염려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저자는 소설가보다는 [헬로우 고스트]나 [슬로우 비디오]라는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작가의 이력답게 소설은 초반부터 짧은 단문으로 화려하고 빠른 이미지 변환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2063년 부산은 몇 번의 쓰나미에 휩쓸려 지금의 부산과는 다른 모양이 되었다. 가장 다른 점은 바다가 멀리 물러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가 물러간 지점에 사람들은 옹기종기 집을 짓고 모여 산다. 이들을 아랫동네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아랫동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윗동네 사람들과는 차별되어 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은 다시 쓰나미가 몰려와서 죽든지, 윗사람들의 허드렛일을 하다가 죽게 된다. 그중 하나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여행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윗마을 사람의 심부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공 우환도 마찬가지이다. 우환은 아랫마을 출신으로 아무런 소망 없이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한다. 미래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으로 인해 짐승들이 사라지고, 유전자 결합을 해서 만든 쥐와 같은 동물을 먹는다. 식당 주인은 항상 예전에 먹었던 곰탕을 이야기하고, 결국 우환에게 시간여행을 통해 곰탕을 만드는 법을 배워오라고 말한다.

13명이 탄 시간여행 일원 중 우환과 한 소년만이 살아남는다. 소년은 12명의 남자를 죽인 살인자를 죽여 달라는 한 노파의 부탁으로 과거로 왔다는 것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소년과 헤어져 우환은 부산에서 꽤 유명한 곰탕집에 취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곰탕집의 사고뭉치 아들 이순희와 그의 여자친구 유강희를 만난다. 문제는 이순희와 유강희의 이름이 자신을 어린 시절에 버린 부모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 이제 우환은 곰탕을 배우는 것보다 무책임하게 자신을 만들고 버린 두 아이들을 갈라놓는 것에 집중한다. 자신의 저주스러운 인생을 탄생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과 가까이할수록 그렇게 증오하던 그들과 정이 들어버린다.

이와 함께 소설에서는 과거로 돌아와 자신이 미래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쫓는 경찰들이 존재한다. 소설에는 유머와 감동과 함께 현대사회의 특유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레이저와 순간이동, 비행청소년, 장기밀매, 안면성형 등 충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소재 등이 등장한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과 [황해]를 섞어 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특히 1편의 말미에서는 우환과 함께 온 소년이 죽이려고 하는 12명을 살해한 사람의 정체가 발켜지면서 충격적을 준다. 마치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빠른 전개와 스토리가 압권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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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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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로 처음 혹성탈출이란 영화를 보았다.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오리지널 영화였다. 낯선 혹성에 불시착한 주인공 일행이 인간을 사냥하고 짐승처럼 다루는 원숭이들과 대면하는 내용이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마치 이물감을 느끼는 것처럼 낯설고 기괴한 세계를 접한 느낌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말을 타고 해변가로 탈출하면서 일부만 드러난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절규하던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혹성탈출이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될 때마다 제일 먼저 극장에 달려가서 보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헌등사]를 책을 읽으면서 혹성탈출이란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시종일관 낯설다. 소설은 시작부터 아무런 설명 없이 일본의 낯선 풍경을 묘사한다. 요시로라는 사람이 개를 대여해서 달리기를 한다. 집에 들어오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자세한 설명이 없는 무메이라는 어린아이가 요시로를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점점 요시로의 독백을 통해 요시로가 백 살이 넘은 것과 70 정도이면 젊은 늙은이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메이의 건강 상태도 이야기한다. 무메이는 근육의 마치 연체동물처럼 힘이 없고, 이가 빠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늙은이들은 점점 건강해지고, 아이들은 점점 건강을 잃어가는 조금은 황당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정부가 통제를 한다.

"건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들이 없어진 세상에 소아과 의사들은 노동시간이 늘어났고, 부모들의 분노와 슬픔을 일거에 받아들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정을 신문기자 등에게 말하면 어딘가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P 32)"

"최근 아이들의 90퍼센트는 미열을 반려해 살아가고 있다. 무메이도 언제나 미열이 있다. 매일 열을 재면 오히려 신경질이 되고 마니까 열은 재재 말아 달라는 학교 측의 지시가 있었다. '오늘은 열이 있네요'라고 말하면 아이는 몸의 노근함을 떠올린다. 열이 나올 때마다 학교를 쉬게 한다면, 거의 학교에 갈 수 없게 되는 아이도 많이 나올 것이다. 어느 학교에나 제대로 된 의사가 반드시 한 명은 대기하고 있으니까 병에 걸렸을 때야말로 등교하는 편이 낫다. (P 50)"

더 특이한 것은 언어이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외국어 사용이 금지되고, 모든 언어가 일본어로 대체된다. 언어가 바뀌면서 인간의 생각들도 바뀐다. 이전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이제는 낯설게 받아들이고, 또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난다.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해서 여성의 경우는 55세 이상, 남성의 경우는 이미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이 우선시되었다. 얼굴에 주름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탈색해 나이를 속여서 취업하려고 한 여성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는데 실제 연령보다 많아 보이도록 하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오래된 농기구 스위치에 영어로 'ON'과 ;OFF'로 쓰여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비추어져, 아직 젊다는 것이 탄로 나버린 모양이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이 먹은 증거이다. 전기 제품에 'ON' 'OFF'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젊은 사람은 그런 영어 단처조차 몰랐다. 영어를 학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P 67)"

소설이 진행되며 요시로의 가족사가 등장하고, 아내인 마리카와 딸인 아마나, 그리고 손자인 도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조금은 기괴한 무메이가 태어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 모든 과정을 인생에서 겪은 요시로의 삶을 통해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암시한다. 지진이나 쓰나미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원전 폭발이나 방사능 유출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들이 생태계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곳곳에 등장한다.

소설은 대부분 요시로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마리카나 무메이의 시점으로 변하기도 하고, 소설 말미에는 갑자기 15살이 된 무메이의 미래가 등장한다. 그 미래는 마치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끔찍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다와다 요코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세계문학에 대한 낭독이나 감상에 관심이 있어서 다와다 요코의 작품의 부분적인 부분을 읽거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읽은 적이 있다. 22세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낯선 독일이라는 세계로 이주해 낯선 독일어를 통해 세상을 다시 접한다. 이런 언어와 세상이 주는 낯선 경험이 그녀의 소설의 주된 주제였다. 그러나 동일도 지진 이후 침묵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고, 사회적인 소설들을 쓰고 있다. 그녀가 상상한  본의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일본의 일그러진 사회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일본 이란 사회 내부에 있기에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기괴하게 변해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낯선 타자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는 다와다 요코의 시각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 필립 딕의 SF 소설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낯선 미래 세계와 그 세계에서 변형된 인간성을 그리고 있는 필립 딕의 작품성이 다나와 요코의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제목인 '헌등사'는 여러 가지 악양향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명만 유지하게 된 미래의 일본 아이들 중 외국으로 밀항을 해서 자신의 건강상태를 검사를 받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본의 실체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 이 헌등사라는 단어 속에 아직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많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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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인간을 말하다 - 권력에 지배당한 권력자들의 이야기
리정 지음, 강란.유주안 옮김 / 제3의공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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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을 통해 전직 대통령의 비리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드는 생각은 결국 인간은 권력 앞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만큼 인간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수단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순수하고 정직했던 사람들도 일단 권력을 잡으면 부패하게 되어 있다. 비단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절대권력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작은 회사나 공동체에서 리더가 되면 소통을 닫고, 독단적으로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래에 있었을 때의 총명과 결단력은 없어지고, 상황의 흐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현실의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하물며 이런 작은 권력도 이런데 봉건국가에서 절대권력인 왕이나 권력자들은 어떠했을까? 이런 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책이 [권력, 인간을 말하다]라는 책이다.

[권력, 인간을 말하다]라는 책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당나라를 배경으로 당나라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권력에 잠식되어 부패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밀과 당태종 이세민, 그리고 이세민의 밑에서 권력을 잡았던 장손무기 등이다.

이밀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이 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사상을 통해 반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는다. 진취적인 사상과 빠른 결단력으로 순식간에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으나, 막상 권력을 잡자 우현실을 판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원래 자신의 상관이었으나 자신에게 지위를 양도한 적양을 제거함으로써 민심을 잃고, 결국 이세민에게 투항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저자는 이밀이 참모로 있을 때는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지만, 막상 자신이 지도자가 된 후에는 상황을 판단하지 못해 실수를 했다고 말한다.

"한편 여전히 군웅들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는 그때, 이밀은 왕세충과 낙양에서 격전을 벌이며 승부를 다투고 있었다. 이연과 이세민은 진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이때 이밀은 치명적인 과실을 범하고 말았다. 그의 책사인 시효화는 지금 낙양을 두고 다투지 말고 정예 부대를 선발해 서쪽으로 장안을 습격하라고 충고했다. 역사는 어찌 이렇게 똑같은가! 이는 일찍이 이밀이 양현감에게 제안한 계획이었다. 당시 양현감은 이밀의 충고를 듣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밀이 시효화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이다. 이밀은 남에게 충고를 잘했지만  남의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방관자는 정확히 볼 수 있으나 당사자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P 31)"

권력을 잡은 후 후계 구도 때문에 붕괴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은 당 태종 이세민이다. 역사에 보면 일단 권력 앞에는 부모형제도 없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당나라 역시 계속해서 이런 싸움이 있었다. 당태종은 당나라를 세우고 절대권력을 잡았지만 아들들 간의 싸움으로 반란과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뛰어난 두 아들이 권력싸움으로 축출되고, 조금 부족한 셋째 아들 이치가 왕이 된다. 그리고 그 이치가 바로 측천무후에게 권력을 넘겨주어 당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린 당고종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 당태종과 함께 당나라를 세운 장손무기였다. 그는 이인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반대파들은 모두 역모로 몰려 사라졌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역모로 몰려 사라진다. 장손무기의 편에서는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양귀비에게 빠져 나라를 무너뜨리 당 현종 이융기이다. 측천무후와 위 황후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여인천하의 혼란기를 수습한 인물이 바로 이융기이다.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위 황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뒤 이어 자신과 함께 위 황후를 제거한 측천무후의 딸이자, 자신의 고모인 태평 공주까지 제거한다.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검소한 정치로 당나라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를 만든다. 그러나 절대권력이 오래되자 그도 부패하게 된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재상 양국충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고, 자신의 은밀한 궁에 들어가 양귀비와의 향락의 세월을 보낸다. 결국 그가 총애하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양귀비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며 권력에서 쫓겨난다. 저자는 이융기의 부패를 통해 절대권력이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융기의 비극은 '물이 차면 넘치고, 해도 한낮이 지나면 저문다'라는 간단한 변증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부패가 가져다준 인간성의 타락에 있다. 황산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을 부식시킬 수 있는 것처럼 절대 권력도 세상에서 자기 절제력이 가장 강한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영민하고 용맹스러웠던 이융기를 무능하고 어리석게 만들었고,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르던 자를 무절제한 사치에 이르게 만들었다. 또한 마음속에 천하를 품었던 자를 호화로운 생활에 빠지게 했고, 겸허하게 간언을 받아들이던 자를 강퍅하고 독선적으로 변하게 했다. 권력을 누리는 것은 칼끝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아서 달콤함을 맛보았을 때 이미 칼끝에 상처를 입고 만다. 이융기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나날이 계속되는 상처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P 127)"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한다. 당태종은 당시 누구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짐작하고 있는데, 오로지 자신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간신인 양국충의 인의 장막에 가려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것도 있지만, 권력자가 가지는 특유의 인지적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 시대의 황제들은 모두 가장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뛰어난 스승에게 보고 배웠으며 사서오경을 읽고 도덕적 소양을 키웠다. 다시 말해 결코 어떤 황제도 천하를 잘 다스려 역사에 길이 남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 욕망을 억누르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함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일단 황제가 절대 권력의 최면에 걸려 인지적 딜레마에 빠지면 욕망과 이성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고, 옳고 그름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는데 있다. 또한 황제에게 진리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을 진리와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의 욕망은 결국 제멋대로 분출된다. (P 144)"

마지막으로 당나라 말기의 황소라는 인물은 권력을 잡은 후의 계획이 없다면 그가 잡은 권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당나라 말기에 황소는 농민 반란군을 이끌고 황소의 난으로 유명한 전쟁을 일으킨다. 황소는 높은 기개와 강인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중앙절이 오기를 기다려, 나 국화가 활짝 핀 후에는 100가지 꽃이 시들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 짙은 국화향이 장안성에 가득하니 온 장안성을 노란 국화색 황금 갑옷으로 덮어버리리... 이 시는 황소가 반란의 미학을 극치로 발휘한 작품으로서, 그의 격정적인 글에는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강인한 아름다움이 있다. (P 300)

그러나 황소의 군대는 일단 장안을 장악하자 더 이상 목표를 잃고 조직이 무너진다. 그리고 장안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많은 지도자들이 막상 권력을 잡은 후 우왕좌왕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결국 권력을 잡기 전에 얼마나 준비되었는지가 그가 잡은 권력이 얼마나 유지되는지를 말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이 역사를 조금만 참고해도 좀 더 지혜롭게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과연 권력 앞에 부패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절대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권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권력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역사를 통해 인간을 알고 싶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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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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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끔찍한 살해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아이가 살해되었다. 어린 남자아이는 즉시 죽었고, 여자아이는 몸부림치다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죽었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늑대 울음소리를 지른다. 사건 현장에는 다른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이들이 죽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 여자이다. 목숨을 끊으려고 한 여자는 보모였다. 처음 이 장면을 읽었을 때 강도나 사고로 두 아이를 잃고, 엄마는 충격을 받고, 엄마보다 더 아이들을 사랑한 보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했었다.

소설은 이 장면을 보여준 후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미리암의 가정을 보여준다. 미리암 변호사였고, 남편 폴은 아티스트를 키우는 프로듀서이다. 처음 밀라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미리암은 직장을 쉬면서 혼자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당이란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미리암의 육아에 병들어간다. 그 무렵 미리암에서 변호사 일자리가 들어오고 둘은 결국 보모를 구하기로 한다. 자신의 두 아이를 맡아 줄 보모를 구하면서 부부는 보통 사람들처럼 신중히 사람을 구한다. 몇 명을 면접하고, 루이즈라는 여성을 만난다. 처음 루이즈는 이 가정에 마치 신이 보낸 선물처럼 나타난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과 친구처럼 놀아주고, 집 안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무엇보다도 최고의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알뜰하게 가족을 돌본다. 폴과 미리암은 그런 루이즈를 신뢰하고 가족처럼 대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랑한다.

소설은 이렇게 루이즈가 이 가정의 일원으로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중간중간 끔찍했던 살인 사건의 날짜로 돌아와 그 장면을 묘사하거나, 그 과정을 수사하고 탐문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그리고 루이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가 언급된다. 두말할 것 없이 모두들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이즈가 자신의 자녀처럼 키우던 두 아이를 살해했다니... 사건을 접하는 사람마다 충격을 받는다.

이제 소설은 점점 루이즈라는 여성의 삶과 내면으로 들어간다. 파리 외곽의 허름한 원룸에서 혼자 사는 루이즈.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있었지만 병만을 남겨 주고 죽는다. 스테파니라는 딸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집을 떠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미리암의 가정에서의 평온한 모습과는 반대로 루이즈의 혼자의 삶은 공허하고 두렵다. 그럴수록 그녀는 미리암의 가정에서 평안을 느낀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 그녀의 이런 내면이 가장 처음으로 드러난 장면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부분이다. 너무나 재미있는 이 놀이 속에서 작가는 조금의 섬뜩함을 비친다.

"그러면 밀라는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을 마주친다. 아당은 밀라를 따라다닌다. 아당은 너무 웃다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여러 번 엉덩 방아를 찧는다. 아이들은 루이즈를 불러 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이즈? 어디야?' 조심해. 우리가 간다. 아줌마를 찾아낼 거야. 루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불러도, 폴이 죽어 울먹여도 숨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웅크린 그녀는 아당의 공포를, 흐느끼다 목이 메고 기진맥진한 아이의 공포를 주시한다. - 중략 -둘만 남았다고, 루이즈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게 불안해져서 밀라는 보모에게 애걸한다. '루이즈 아줌마, 하나도 안 재미있어요. 어디 있는 거야?' 아이는 신경이 곤두서서 발을 구른다. 루이즈는 기다린다. 그녀는 방금 낚은 물고기가 아가미는 피투성이 된 채 온몸을 펄떡이며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관찰한 듯 아이들을 바라본다. 배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기진한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물고기, 그 상황에서 벗어날 가망이 전혀 없는 물고기." (P 60-1)

폴은 친구들을 초청한 파티에서 술기운에 루이즈도 여름휴가에 함께 갈 것이라고 공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다. 루이즈는 일주일간의 그리스 여행에서 자신은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폴과 미리암도 루이즈는 우리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그는 혼자 쓸쓸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럴수록 루이즈는 더욱더 미리암의 집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폴과 미리암은 점점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루이즈를, 그리고 무언가 알 수는 없지만 점점 자신들을 조이는 듯한 루이즈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루이즈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루이즈 역시 이것을 직감한다. 이제 그녀는 아이들과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 그녀는 결국 내보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될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족이 아니었다.

"행복감에 이어 낙담의 나날들이 이어진다. 세상은 점점 줄어들고 움츠러들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폴과 미리암은 그녀에게 문을 닫았고, 그녀는 그 문을 부수고 싶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찾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몸을 숨길 둥지 하나, 따스한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는 것, 가끔 그녀는 자기 몫의 땅을 요구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가 곧 풀이 죽고 서글픔을 차오르며 무언가를 믿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P 243)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과 맨 부커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알려진 2016년도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작품이다. 소설은 한 가족에게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그 사건과 연루된 미리암과 폴, 루이즈, 그리고 아이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관계, 부모와 보모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들은 가족이라는 터울 속에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존재했다. 이런 프랑스의 사회적인 문제점과 함께 루이즈라는 여성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너무도 섬세해 읽는 이를 전율케 한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공허한 내면과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마음들, 그리고 결국 부모와 아이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혼자 남겨지는 그녀의 마음들이 읽는 내내 그대로 전달된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칫 스티븐 킹의 미저리의 프랑스 판이 될 수 있을 거 같은 소설이지만, 소설은 내내 루이즈라는 인물을 광기나 집작과는 다른 연약하고 상처받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계속해서 연민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내 입장에서는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나 역시 폴과 미리암처럼 내 아이가 먼저고 내 가정이 먼저이기 때문일까? 결국 가족 외에 또 다른 가족은 허울뿐일 것일까? 읽은 후에도 너무나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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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기에, 친구 집에 놀라가면 제일 먼저 책장을 구경했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과 비슷한 책들이 있으면,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책에 대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유명한 서평가인 조 퀴넌의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라는 책을 읽으며,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의 책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스스로 애서가라고 말하는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전자책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는 것보다, 꼭 자기 책을 구입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리고 책에 자기 이름을 적고, 때로는 줄을 치며, 정독을 해서 읽는다. 이런 독서의 경험을 통해 책의 저자와 깊은 대화를 나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경험을 마치 가톨릭의 영성체와 같은 경험으로 비유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정체불명의 만찬실에서 작가와 사적으로 영성체를 나눈다.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자기는 솔 벨로가 아주 오래전부터 주위에서 얼쩡대던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자기에게 뭔가 한 수 가르쳐줄 수 있는 것 같아서 그의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느끼는 기분이 딱 그렇다. -중략-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책을 통해 직접 그들에게 말을 건다고, 나아가 그들을 돌봐주고 치유해준다고 느낀다. 그들은 종종 작가가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P 38)"

그러기에 저자는 책을 한 권 한 권 소장하면서, 때로는 그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 저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로 인해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그 책을 가지고 못함을 아쉽게 느낀다.

"[보봐리 부인], [이방인], [네이티브 선], [러브드 원], [전쟁과 평화]를 10대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읽었던 판본 그대로 갖고 있지 않은 점은 애석하다. 이 책들의 일부는 본가에 남겨두고 왔는데 부모님이 갈라서는 바람에 전쟁 사상자 꼴이 났다. 이미 옛날에 없어진 책들이고 어떻게 처분됐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 책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책이란 그렇다. 그 책들들이 아직 내 수중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책들을 맨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어떤 대목에 줄을 그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내 시각이 변했는지 알고 싶어라. 여전히 그 책들이 나를 압도하는지 알고 싶어라. (P 45)"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매번 이사할 때마다 청소년과 청년 때에 읽었던 책들을 바리바리 싸아들고 이사를 하다가, 결국 몇 년 전 이사하면서 많은 양을 버렸다. 그중에는 이제는 사라진 범우사 출판사의 세계문학들이 많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등... 모두 새로운 출판사의 새책들을 가지고 있기에 짐만 된다고 생각하고 버렸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그 책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저자의 글처럼 나도 그 책의 어느 부분에 밑줄을 쳤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무척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독서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책에 나와있는 저자의 책 읽는 습관의 조금 괴팍하기까지 하다. 먼저 저자는 남이 자신에게 읽기 싫은 책을 주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는 철저히 자신이 읽고 싶은 책만 읽고, 읽기 싫은 책은 손을 대지 않는다. 서평가라는 직업으로 인해 때로는 돈과 관련되어 읽기 싫은 책도 읽고 서평을 쓸 때가 있지만, 그 후에는 절대로 그 책을 손도 대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습관은 더 심해졌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자신이 죽기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를 대략 계산하고, 그 안에서 정말 읽고 싶은 책을 읽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는 책에 대한 저자의 간절함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보험 통계상의 기대 수명까지 산다면 책을 얼마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오래전에 계산해봤다. 그때 2,138권이라는 답이 나왔다. -중략 - 걸작 500권, 가벼운 구전 500권, 진짜 천재들의 간과된 작품 500권, 특이한 책 500권, 일급 쓰레기 138권을 읽을 시간이 원칙적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쓰레기는 너무 바보 같아서 읽고 있으면 심장이 뛰고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책이다. 이 유토피아적인 미래에 [하이호, 스티브라노!]에 내줄 시간은 없다. 진짜 프로의 손으로 빚어낸 순도 100퍼센트의 아둔함은 신명 날 수 있다. 엉성함은 그냥 엉성하다. (P 188)"

또 저자는 사립학교 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이라는 든지, 양키스와 같은 특정 운동팀의 이름이 등장하는 책등은 철저하게 읽지 않는 조금 괴팍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데이비드 베니오프의 [도둑들의 도시]를 읽다가 이 책의 주인공이 나중에 양키스의 팬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덮고, 동네 도서관에 기증했다고까지 한다.

저자의 글처럼 이제는 점점 책을 읽어가는 사람들이 적어가고, 특히 종이책을 수집해가며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그 책들이 주는 삶의 풍성함은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가 없다. 저자는 그런 풍성함을 점점 읽어가는 세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자신의 책과의 소중한 경험을 또 다른 자신의 책으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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