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6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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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형사 헤리 홀레 시리즈'가 벌써 10권이 출간되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으면서 맞닥뜨리는 것은 시종일관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인공 해리 홀레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리는 암담함 결말을 보게 된다. 작가가 무슨 파괴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요 네스뵈는 일체의 희망을 남겨두지 않고 주인공 해리 홀레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출간될 때마다 또 읽게 된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리디머]라는 소설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 시리즈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라는 인간을 통해 암울한 세계와 그 암울한 세계에서의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요 네스뵈 그리는 희망이라는 것이 깊은 함정에 갇혀 작은 출구만을 바라보고 바둥거리는 짐승의 몸부림 같기도 하지만, 어쨌듯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열 번째로 번역되어 출간된 [리디머]는 원래 순서상으로는 여섯 번째이다. 오슬로 3부작이라고 불리는 [데빌 스타] 이후 이야기이고, 영화화되어서 유명해진 [스노우맨] 전 이야기이다. 소설의 시작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강추위가 몰아치는 스산한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해리 홀레 시리즈 특유의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로 시작된다.

"지하철 출구 유리문을 빠져나오는 그의 입에서 담배가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오슬로 지하의 부자연스럽고 강렬한 열기를 뒤로 한 채, 계단을 올라가 12월 오슬로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둠과 살을 에는 추위 속으로 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들었다. 에게토르게. 이 작고 트인 광장은 여러 개의 보행자 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오슬로 중심부였다. 요즘처럼 추워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때에도 중심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일요일이라서 이례적으로 상점들이 영업 중이었다. 광장을 둘러싼 4층짜리 수수한 상점 건물에는 쇼윈도에서 노란 불빛이 떨어졌고, 광장은 그 불빛 속을 서둘러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P 25)"

해리 홀레의 시점에서 암울한 오슬로와 그 오슬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전개되지만, 동시에 한 남자의 시점에서도 이야기가 언급된다. 크리스토 스틴키츠라고 불리는 남자로 별명은 크로아티어로 '말리 스파시텔리'이다. 어린 구세주라는 의미이다. 소설은 그가 크로아티아에서 어떤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어떻게 암살자가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욘'이라는 구세군 성직자를 암살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왔다. 그러나 실수로 욘과 닮은 욘의 동생 로베르트를 죽인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해리 홀레를 중심으로 한 노르웨이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이제 그는 무기도 없고, 돈도 없지만 그는 끝까지 오슬로에 남아서 임무를 완수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금욕적이고 자선적인 욘이라는 젊은 성직자를 둘러싼 어두움들이 들춰진다.


 


 

보통 해리 홀레 시리즈에는 다른 형사 시리즈에 비해 액션적인 장면이 적게 등장한다. 때로는 사건의 전개보다 해리 홀레의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느라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리디머]에서는 크리스토 스틴키츠로 불리는 남자를 중심으로 무척 속도감 있는 액션 장면이 등장한다. 로베르트를 죽인 후 해리 홀레와 노르웨이 경찰에게 쫓기면서도 끝까지 욘을 추적하는 장면이 매우 박진감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리 홀레 비슷하게 이 남자의 어두움도 진하게 묻어 나온다. 보통은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잔혹한 암살자에게 분노를 느끼기 마련인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쫓기는 암살자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무사히 노르웨이에서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기까지 되었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서 무척 뛰어난 수사 실력을 보이는 해리 홀레도 만나 볼 수 있었다. 다른 시리즈에서 해리 홀레는 금세 수사 방향을 잃고 알코올에 중독되어 자신과 수사를 망치기 일쑤인데, 이 소설에서 해리 홀레는 매우 뛰어난 수사관으로 등장한다. 얼굴을 바꾸어 가며 신출귀몰하는 크리스토의 정체를 밝히고, 그가 남긴 단서들을 추적해서 크리스토가 등장하는 곳마다 귀신같이 나타난다. 물론 그때마다 한 걸음씩 늦기는 하지만...

소설의 결말 역시 다른 시리즈와 다르다. 항상 해리 홀레와 주변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던 결말이 이 소설에는 비교적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해리의 연인 라켈과 아들 올레그는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 결말 부분에서는 그들과 행복한 삶을 이어질 것 같은 기대감도 준다.

 

 

 

다만 소설의 결말 부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이 부분부터는 조금의 스포가 있다.) 해리 홀레는 마지막에 모든 사실을 알고 스탄키츠가 임무를 완수하고 도망하게 방치를 한다. 스탄키츠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대는 해리에게 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해리는 이렇게 말한다. '형사의 임무는 용서가 아니다!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스탄키츠의 범행을 눈감아주고, 그를 달아나게 해 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팬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들 올레그가 자신의 범행을 밝혀내고 자수를 강요하는 해리에게 한 번만 눈 감아 달라고 절규한다. 그럼에도 해리는 '나는 경찰이다! 그리고 경찰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올레그는 해리에게 총을 쏜다. 왜 스탄키츠는 되고, 올레그는 안 되었을까...

그럼에도 이 책은 내가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 중 최고였다. 그전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은 [레드 브레스트]였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은 [팬텀]이었다. 팬텀의 암울한 결말과 시종일관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에 읽고 나서도 내내 마음이 답답했었다. 다시는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팬텀]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리디머]를 읽으며 다시금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매력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팬텀] 이후의 [폴리스]와 [서스트]이다. 이 두 권의 책에서 [팬텀]의 어두운 분위기가 반전되기를 희망해 본다. 물론 지금까지 분위기로 봐서는 가능성이 매우 작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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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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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니슨이 비교적(?) 젊은 시기에 찍은 [테이큰]이란 영화가 있다. 한국에서 리암 리슨을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납치된 딸을 찾는 아빠의 여정이 담겨 있다. 오래전에 본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딸이 납치되었을 때 리암 니슨의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뭘 원하는지도 모른다. 몸값을 원한다면 안 됐지만 돈은 없다. 다만 남다른 재주는 있지, 밥 먹고 해 온 것이 그 짓이다. 지금 딸을 놔준다면 여기서 끝내겠다. 내 딸을 놔주지 않는다면, 꼭 찾아가서 죽일 것이다."

매우 담담하면서도 강렬하게 대화를 한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행운을 빈다!"라고 말하지만, 곧 끔찍한 맛을 보게 된다.

[크루얼티]는 아빠의 복수극이 아닌, 딸의 복수극이다. 이 소설에서는 딸이 아닌 아빠가 납치가 된다. 평범한 외교관 아빠와 생활하는 고등학생인 그웬돌리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 빼고는 역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럽으로 출장을 간 아빠가 납치가 되었다. 그리고 밝혀지는 아빠의 충격적인 직장생활... 아빠는 평범한 외교관이 아닌 CIA 요원이었다. 아빠의 동료들과 정보기관은 총동원해서 아빠를 찾지만 아빠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아빠의 행적을 의심한다. 아빠가 이중 스파이의 행동을 하다가 잠적한 것으로 의심한다. 그웬돌리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혼자 아빠가 남기고 간 단서를 추적하다가, 아빠의 비밀 창고에서 아빠가 남긴 [1984]라는 낡은 소설책과 알 수 없는 숫자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숫자가 가리키는 곳을 쫓아가며 아빠를 찾아간다.

그웬돌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파리이다. 그곳에서는 그녀는 야엘이라는 이스라엘 첩보 요원을 만난다. 전직 체조선수였던 그녀는 야엘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그녀 안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왕따를 당하고, 친구에게 뺨을 맞고 눈물을 흘리던 그웬돌리는 이제 무자비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뼈를 꺾고, 총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파리, 베를린, 프라하를 거치며 유럽 대륙을 뒤져서 드디어 아빠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아빠를 납치하고 유럽 전역에 어린 여성들을 인신매매하며 무기를 밀매하는 잔혹한 악당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제 리암 니슨이 혀를 내두를 만한 딸의 복수가 시작된다.

미국에서는 YA 소설이라는 장르가 매우 인기가 있다. 영 어덜트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청소년문학이라고 부르지만 장년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영화화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헝거게임]나 [메이즈러너],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장르의 배경이 암울한 미래사회가 되고, 주인공은 어린 여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혹독한 세계에서 여자아이가 세상과 사람과 싸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들이 많았다.

[크루얼티] 역시 YA 문학이지만, YA 문학으로는 드물게 스파이 소설이다. 평범한 여학생이었던 그웬돌리가 아빠를 찾기 위해 스파이 세계에 발을 디디며 학교에서는 알지 못했던 잔혹한 세계를 보게 된다. 납치, 인신매매, 마약, 폭력, 무기 밀매, 그리고 CIA가 연결된 검은 커넥션까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분분투하며 점점 성장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YA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스케일이 크다. 후반부에는 폭력적인 내용도 많이 등장한다. 미국 청소년들은 이 정도는 거뜬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 세계가 점점 더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속도감 있게 읽히며 주인공 그웬돌리의 심리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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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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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그런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곧 소설을 읽는 새로운 맛을 알게 되고, 다시 그 경험에 매료 된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이번 소설은 처음 경험해 보는 씁쓸한 맛이다. 이런 쓸쓸한 맛이 너무 강하기에 읽으면서 당혹스럽고, 속이 쓰린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면서도, 너무나도 괴로운 경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는 작가의 글로 인해 속이 후벼지는 느낌이었다.

[팡쓰치의 낙원]이란 소설은 주인공 팡쓰치라는 여성이 리궈화라는 중년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서 보도된 적이 있지만, 작가인 리이한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부유한 집에서 자라고, 대만의 대학 입학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이지만,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인해 평생 우울증과 자살 시도에 시달렸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이 책을 섰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객관화하면서 치유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이 책이 출간된 후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설은 부유층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단짝인 팡쓰치와 류이팅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어릴 적 부터 친구로 지내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리이원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의 집에서 그녀가 골라주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리궈화라는 남성이 등장한다. 리궈화는 문학 선생으로 입시전쟁이 치열한 대만에서 매우 유명한 학원 강사였다. 그는 두 아이에게 작문 수업을 해 주겠다면 접근한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아름다운 팡쓰치였다. 13살때부터 팡쓰치는 리궈화에서 성적으로 유린을 당한다. 결국 팡쓰치는 류이팅과 함께 대학에 진학했지 정신적 이상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리궈화가 아닌, 팡쓰치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 리이원이라는 여성에게 돌려진다.

이 책의 내용은 가슴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소설은 문장은 찬란하다. 마치 봄날에 비치는 햇살을 보듯이 아름답고 눈부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는 게 더 힘들고 괴롭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팡쓰치를 유린하면서 달콤한 문학적인 말로 자신의 성욕을 포장하는 리궈화의 말들을 읽을 때면 더욱 그런 감정을 느꼈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 날 원망하지 마. 넌 책을 많이 읽었으니 아름다움이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것 알거야, 넌 정말 아름다워, 하지만 모든 사람의 것일 수 없으니 내가 가질 수밖에. 넌 내 거야. 넌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널 좋아애, 우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따. 이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P 90)"

리궈화는 이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을 흠모하는 여학생들을 유린했고, 팡쓰치에게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한다. 소설에는 대만의 입시가 얼마나 치열한지, 그리고 그런 입시에서 그들의 성적을 이끌어주는 선생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한다. 더 힘든 부분은 이런 리궈화의 욕망에 대해 자신에 대한 사랑인지, 폭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팡쓰치의 마음이다.

"그가 내 사춘기를 찢어버렸지만 나도 내 사춘기를 찌어버릴 수 있어. 그가 한 것처럼 다도 할 수 있어. 내가 나를 버린다면 그는 나를 다시 버릴 수 없을 거야. 어차피 우리가 먼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했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네게 뭘 하든 상관없잖아. 안 그래? 진실이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도 선생님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 된다. (P 94)"

그러나 사실 이런 팡쓰치의 생각까지도 리궈화의 생각에 조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여자 아이를 육체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지배한다. 그는 팡쓰치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아이인 것을 알고, 그녀가 자신과의 일을 결코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인 류이팅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리고 계속 현란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조정한다.

소설은 단지 남성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런 폭력이 가능한 대만의 입시 구조와 입시 구조로 인한 권력, 그리고 남성 중심의 시각 등을 이야기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성공과 물질만을 전부로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절대권력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권력에게 자신의 몸과 생각을 빼앗기는 일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누군가 그녀에게 바른 시각으로 자기 자신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했다. 읽는 내내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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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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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가뭄이 심한 아프리카 초원으로 기억난다. 무슨 연유인지 다리에 상처를 입은 사자가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사자의 뒤에서는 하이에나들이 쫓아온다. 하이에나들은 사자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자의 허벅지부터 사자를 산 채로 먹어 치울 작정이다. 사자 역시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하이에나를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애써 멀쩡한 것처럼 걷는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린다. 마치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본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대할 때면 유독 이 장면이 떠오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도 상처 입은 짐승이 아닌가 모르겠다. 육체와 내면이 찢기고 망가져 서 있을 힘도 없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버틴다. 때로는 자신의 육체적 병이나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실없는 농담도 한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건지 뭐!'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었다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신의 먹어 치울 상대를 알기에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가끔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다. 가슴을 열어젖혀서 자신의 찢긴 상처를 보여 주며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 상처 입은 채로 쉰일곱의 나이로 오랜 기간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온 남자가 있다. 이미 열네 살 때 커다란 상처로 마음과 육신은 갈가리 찢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인생이란 밀림을 걸어온 남자가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남자도 한계에 이르렀다. 육체와 마음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를 감출 수가 없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 포효처럼 자신의 상처를 열어젖히고자 한다. 모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상처 입은 모습으로 버텼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잔치에 유일한 친구를 초대한다. 아니, 열네 살 때 친구였다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한 사람을 초대한다.  

다비드 그로스만은 한강 작가로 인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가이다. 그는 작년에 한강 작가에 이어 이 상을 수상했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에 대한 소개 글에는 그를 반전 작가로 소개하는 글이 많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무엇보다도  상처 입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이 존재한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바로 이런 작가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소설은 이제는 한물간 스탠딩 코미디언인 도발레가 오십 칠세의 생일날 한 술집의 무대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그는 특유의 익살과 몸짓으로 관중을 사로잡는다. 그 관중 중에는 그가 초대한 열네 살 때의 친구 아비사이가 있다. 그는 전직 판사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은퇴를 당한 뒤 혼자 칩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억에서 사라졌던 도발레의 전화를 받는다. 도발레는 아비사이를 자신의 무대에 초청한다. 도발레가 아비사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냥 자신을 봐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초대된 도발레의 쇼는 비록 성적 농담과 우스광스러운 행동들이 난무하지만 하룻밤 술집에서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코미디였다. 그런데 관중에서 변수가 발생한다. 한 키 작은 여자가 도발레의 거친 농담에 뜻밖의 반응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 순간부터 도발레의 코미디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성적 농담과 우스광스러운 행동 대신 어느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열네 살 물구나무로 거꾸로 걸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해한다. 그들이 무대에 기대한 것은 성적인 농담과 조금은 더럽고 거친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이었는데, 어느새 그 코미디언은 사라지고 상처 입은 열네 살의 소년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코미디를 하라고 소리친다. 자신들은 코미디를 듣기 위해 돈을 주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 도발레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성적이며 자극적인 농담들을 한다. 관중들은 그가 근근이 던져주는 농담으로 지루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소리를 치고 떠나간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이제 남은 사람은 아비사이와 키 작은 여자뿐이다. 그리고 그를 갈가리 찢어놓고, 영원히 회복시켜 놓지 못했을 어린 시절의 상처가 들춰진다. 아비사이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함께 보여주고 싶었던, 함께 들춰내고 싶었던 상처들. 그러나 43년간 혼자만 가지고 있었던 상처들은 아비사이에게 보여준다. 쇼가 끝나고 아비사이는 그에게 다가가 위로한다. 그런 친구에게 도발레는 말한다. 일 분만 더 사간을 내 달라고. 아비사이는 말한다. 한 시간도 낼 수 있다고.

소설의 매력은 책을 읽는 독자를 작가가 창조한 낯선 공간으로 끌고 가는데 있다. 때로는 극장에서 영화에 몰입하며 감독이 스크린에 창조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지만, 소설에 비할 바가 못된다. 물론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만든 세계에 들어가는 초반의 시간이 힘들지만, 일단 한 번 빨려 들어가면 독자는 쉽게 나오지를 못한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흡입력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빨아들이는 능력이 바로 소설의 힘이다. [말 한 마디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를 읽으면 바로 이런 힘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작가가 만든 타락한 도시 네타니아의 한 술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작고 왜소한 도발레의 쇼를 보게 된다. 관중들과 함께 웃고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가 또 다른 낯선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난봉꾼들의 잔치가 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오딧세이처럼, 눈이 멀어서 자신을 조롱하는 이방신전에 끌려 온 삼손처럼, 인생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도발레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도발레의 화려한 입담과 아비사이의 회상을 통해 도발레의 어린 시절로 끌려가게 된다. 이쯤 되면 벗어날 수가 없다.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군용차에 실려가 부모 중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장례식으로 끌려가는 어린 짐승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짐승이 마지막 맞닥뜨리는 충격적인 장면 앞에 함께 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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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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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라는 영화 속의 주인공 네오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어느날 모피어스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온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말한다. 우연곡절 끝에 만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매트릭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매트릭스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스템 속에 길들여 있기에 이 세계의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며 진실을 알고 싶냐고 묻는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파란약과 빨간 약을 주며 선택을 하게 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그동안 네오가 가졌던 모든 의심을 잊어버리고 다시 평범하게 시스템 속에 적응하며 살게 된다. 반면 빨간약을 먹으며 시스템 속에 벗어나 실제 세계를 보게 된다.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그 순간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 시스템에서 깨어나서 현실 속의 세계를 보게 된다.



처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네오가 매트릭스 밖의 현실 세계에서 눈을 뜨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이게 뭐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상세계였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와 비슷한 충격을 다시금 받았다. 지난 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다. 그 후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실체가 점점 밝혀지기 시작했다. 비선실세라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움직이는 세계, 권력과 대기업의 유착관계, 정보기관에 의한 여론조작, 언론과 방송계를 움직이는 검은 손들. 결국 그동안 우리가 알고 믿었던 세계는 소수의 몇 명에 의해 조작된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조작된 세계의 시스템 속에 살고 있던 또 다른 네오가 아니었을까.

[고요한 밤의 눈]이란 책은 이런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출간된 책이다. 출간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며 약간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저자가 만든 상상의 세계일뿐인가. 아니면 저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카프카와 같은 비틀기를 통해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일까. 최근에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다. 현대소설 중에서 같은 소설을 두 번 읽는 경험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현실이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 속의 세계가 단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소설이 예언적 소설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우리가 몰랐던 세계를 저자는 묘한 상징과 은유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은 X라는 남자가 십 개월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X는 15 년간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마지막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었다. X는 잃어버린 자신이 누군지를 찾는다. 그가 발견한 자신은 유명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이자, 동시에 스파이였음을 알게 된다. 또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준 Y와는 대학시절에 연인사이였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흔한 스파이소설과 비슷하다. 영화로 더 유명한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 [본 아이덴티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스파이라는 직업은 참 특이하다. 이 소설 속의 스파이는 보통 스파이 소설의 스파이처럼 국가를 위해 타국에서 자신을 숨기면서 암살이나 기밀을 수집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소수의 엘리트층으로서 자신을 숨기며 자신이 속한 세계가 유지되도록 일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누어진 세계를 유지하고, 대다수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소수의 지배자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시스템을 만들어간다. 그를 위해 언론과 여론, 문화 등을 조작한다. 이들은 철저한 비밀 속에서 점 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스파이의 조직의 리더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X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X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신이 스파이 일을 관두려 했고, 조직은 그런 자신을 잡아두기 위해 Y라는 스파이를 통해 그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X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Y를 옆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스파이의 일을 계속한다.
이와 함께 D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어느 순간 사라진 언니를 대신해 정신과 의사의 역학을 대신하다가 X와 상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떤 조직에 의해 조작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파이 조직의 중간 간부인 B라는 남성도 등장한다. 그는 Y의 상사이기도 하다. 그는 소수의 몇 사람이 세상을 조작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조작된 세상을 당연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점차 그 일에 회의를 느끼고 조직의 정책에 반대한다. 처음 그가 조직의 정책에 반대한 것은 너무나 강압적인 정책은 반드시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 온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시스템에 반대하기 위해 조직에 반대를 든 게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었다.

"세상은 지배하기 더 쉬워졌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원망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뿐이다. 그래서 자살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자꾸 일어나면 세계가 흔들린다. 먹이사슬의 바닥을 장식할 인간들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저 고려하지 않은 생지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면서도 자신들만의 세계는 굳게 유지되리가로 믿는 근거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P 209)"

그러나 B의 이런 생각은 감성주의자라는 비판과 함께 무시된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B는 조직에서 배제되고, 그와 함께 자신의 일에 점차 회의를 느낀다. B가 스파이 조직에 회의를 느낄 때 쯤 X와 Y 역시 은밀히 스파이 조직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이들은 스파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스파이에 의해 세계가 어떻게 조작되기 시작되었는지 그 시초를 찾아나간다.

소설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을 읽는 것처럼 모호한 이미지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실존적인 모습을 너무나도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B는 어느날 백화점에서 자신이 산 명품을 바꾸러 간다. 매장 직원은 귀찮은 듯이 그를 대한다. 매니저는 규정에 없지만 바꾸어주겠다고 선심을 쓰듯이 말한다. 음지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숨기고 살던 B는 내면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B는 아무렇지 않게 매장의 한쪽 진열장 벽면을 가리키며, 거기 있는 모든 물건을 포장해 달라고 한다. 직원들이 반신반의하자 그는 자신의 신용카드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카드는 등급을 의미한다. 그의 신용카드의 등급을 확인하고 매니저와 매장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이제 B는 귀찮은 존재에서 두려운 존재가 된다. 힘들게 포장한 물건들은 B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에서 반품을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위 계급들만 할 수 있는 갑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하자, 그들은 B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소설 속의 이 작은 에피소드는 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에 순응하고 있고, 이런 시스템을 소수의 사람들이 조작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소설 속에서는Z라는 소설가도 등장한다. 스파이 조직은 그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B를 통해 Y에게 감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Y가 보기에는 그는 작품 한 편 제대로 못 쓰는 현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미 X는 소설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시스템을 언급하고 있었다. 모두들 당연시 여기는 시스템 안의 세계를 소설을 통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X는 세계의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의 영화의 네오처럼 자신이 속한 세계가 조작된 세계임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가 하는 일은 그가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 들어와서 시스템 속에 속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스파이 조직은 문화단체를 움직여 Z에게 창작 지원금을 받게 한다. 그리고 시스템을 비판하는 글을 쓸 때마다 그 지원금의 액수를 줄인다. 결국 Z는 조금씩 시스템 안을 편입되어 가는 자신을 느낀다. 이 부분을 읽으며 지난 정권의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아무도 모르던 세계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이미 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Z는 저자였을까. 그리고 저자는 이 세계의 조작된 시스템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일까.

스파이가 하는 일은 젊은 세대들이 점점 비판의식 없이 세계의 시스템 속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제거해야 할 것이 바로 ‘사색’이다. 그리고 사색의 도구는 소설과 같은 책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통해 이들을 몰아붙임으로 사색의 시간을 빼앗아 간다. 그냥 앞만 보고 달릴 뿐, 자신이 왜 달려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사색이다. 사색은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모여서 내면에 관한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작 나루 수 있는 대화는 매달의 카드대금과 아파트 대출금, 미래에 대한 건 돈 걱정뿐이어야 한다. 더 깊이 고민하는 건 절대 불가능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 생각하고 생각하면 위험해진다. (P 145)"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우리가 속한 세계를 분석하고, 그 세계 속에 사는 우리의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바로 일어날 한국사회의 변혁을 알리는 예언적인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서 눈을 뜨는 X와 Y, B, 그리고 Z와 같은 사람들이 시스템을 바꾸고 붕괴시킬 것을 이야기한다.

"요즘 우리의 저항은 어쩌면 안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린 아마 안 될 것야, 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냉정한 비관 속에서 우리는 지지 않기 위해 모른 척 했는지 모릅니다. 미래에 타임머신이 있어서 무언가를 바로 잡으려 할 때 결정적인 시점, 최우의 시간이 언제일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희망입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지, 아니, 무엇이 중요한지를. (P 286)"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소설에서 말하는 스파이란 누구일까 라고 생각을 해 보았다. 소설 속에서 스파이들은 자신이 스스로 세계의 시스템을 조작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서 그들 역시 시스템 속에 속해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시스템 속에 안락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스파이란 이 세계의 시스템 속에 안락하게 살면서,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위기라고 한다. 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모습을 발견하고, 변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설은 의식 속의 모호한 세계만을 헤매고 있다. 또한 많은 출판사들이 소설 대신 자기계발서적이나 경제서적을 출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색과는 멀어진 채 점점 시스템 속에 동화되어가 있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책이야 말로 우리를 이 세계의 참 모습을 보게 하고 조작된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책을 만드는 사람을 ‘키맨’이라고 부른다. 과연 이 세대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열쇠와 그런 열쇠를 만드는 ‘키맨’을 다시금 만나 볼 수 있을까. 진정한 변혁은 단순히 정치적인 구호나 운동으로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될 때 진정한 변혁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이런 의식의 변화에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책들이 있었다. 과연 이 시대에 이런 책들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금 우리의 의식을 깨우는 위대한 소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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