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가끔 극장에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한 SF 영화를 볼 기회가 있다. 스크린 가득 넓은 우주 공간이 펼쳐지고, 우주선에 연결된 가느다란 생명선 하나에 의지해 우주 공간을 유형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가 일어나서 생명선이 끊어진다. 그리고 남자는 넓은 우주 공간으로 던져진다. 그는 그렇게 점점 스크린 밖으로 멀어진다. 산소가 남아 있는 한 남자는 오랫동안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산소가 다 사라져 그의 생명이 멈춘 후에도 그의 육체는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만약 그의 영혼이 있다면 그의 영혼조차 그 광대한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치 우주 공간을 떠도는 존재가 나 자신이 된 것처럼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 나 자신이 심연(深淵)의 우주 공간으로 내가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 고안해낸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 오로지 광대함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 세계 속으로 내가 던져진다면, 내 기억과 육체도 모두 무(無)로 변하는 어둠으로 내가 던져진다면,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느끼는 공포는 어떠할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이런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내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광대하고 어두운 공간 속으로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시점을 놓쳐 버리기 일수이다. 점점 그가 묘사하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공간 속으로 던져지고, 어느 순간 그 세계에 대한 경이감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처음 도스토옙스키의 만난 것은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이다. 이 소설을 통해 페테르부르크의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을 라스콜니코프의 뒤를 쫓아 걸었었다. 심약한 라스콜니코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악마적인 생각들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읽으면서 매 순간 이 정도에서 이 책을 덮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멈출 수 없이 심약한 영혼의 여행에 끝까지 동참했었다. 소설을 끝냈을 때 아쉬운 마음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금 어둡고 광대한 세계 속으로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 방대하고, 더 절망적이고, 더 복잡한 인간 영혼 속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답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된다. 타락한 인간 영혼을 대표하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에게서 난 배다른 세 아들 드미트리와 이반, 알료샤가 있다. 아버지와 같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즉흥적이고도 다혈질적인 드미트리,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무신론자인 이반, 그리고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알료샤, 이렇게 세 아들이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가 있는 카라마조프가에 오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아버지 표도르와 큰 아들 드미트리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드미트리가 아버지와 집 안에 폭력을 행사하고 간 며칠 후 아버지 표도르가 살해당한다. 결국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몰리고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단순한 내용이 방대한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위대한 소설가인 도스토옙스키는 말년에 이런 단순한 내용을 이렇게 방대한 분량으로 소설로 완성했을까. 과연 그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카라마조프가로 대표되는 인간 영혼의 어둡고도 음습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스스로 타락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표도르는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이 목소리를 통해 그 표도르가 러시아의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말한다.
"지금 바로 이 지주에 대해 말해두려는 것은 그저, 그가 괴상하지만 주위에서 꽤나 자주 마주치게 되는 유형, 즉 너절하고 방탕할 뿐만 아니라 아둔해빠진 인간 유형 - 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할 줄 알고, 오로지 이런 일 하나만 할 줄 아는 듯싶은 그런 자들에 속하는 유형이었다는 점이다 - 중략 - 동시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우리 군 전체에서 가장 아둔한 반미치광이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이건 얼뜨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반미치광이들 중 대다수는 꽤 영이하고 교활하며 -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둔함, 그것도 그 어떤 독특한, 민족적 아둔함이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1권] P 19-20"
표도르는 타락한 인간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스토옙스키는 표도르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를 통해 타락한 인간 영혼 속에 다양한 영혼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큰 아들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탐미주의자이다. 그는 미적인 아름다움을 빠져들고, 그 미적인 아름다움이 자기를 잠식해 가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파괴해 간다. 물론 저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세 그 저항을 멈추고 마치 늪 속에 빠져들어가는 짐승처럼 그 미(美) 속으로 자신을 함몰해 간다. 드미트리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귀족 약혼녀가 있음에도 그루센카에게 빠져들어 자신을 망쳐가면서도 동생 알료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여기엔, 형제, 네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어, 한 사내가 어떤 미녀한테, 여자의 몸이라든지, 아니면 그저 여자의 몸의 한 부분에라도 반하게 되면, 그 여자를 위해 자기 자식들까지 내놓고, 아비와 어미도, 러시아도 조국도 팔아먹는 법이야. 정직한 인간이라도 가서 도둑질을 해. 온순한 인간이라도 - 사람을 베어 죽이고, 충직한 인간이라도 - 배반을 하게 돼. 여자의 사랑스러운 발을 노래한 시인 푸쉬킨은 자기 시에 발을 찬미했지. 다른 사람들도 소리 높여 찬미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귀여운 발을 보면 전율을 느끼게 마련이거든. 하지만 발뿐만이 아니야... 여기엔 형제, 경멸이라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어, 설령 그가 그루센카를 경멸하다 쳐도 말이지. 경멸하면서도 떨어질 순 없는 거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1권] P 162 "
이반은 냉철한 이성주의자이다. 그는 무신론적 사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마치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말하듯이, 그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에게 신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신을 그리워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는 괴로워한다.
알료샤는 종교적인 순수함을 추구한다. 그는 조시마 장로라는 수도사를 쫓아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순수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존경하던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평생 영혼의 정결함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썩은 육체 밖에 남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자신이 쫓던 것이 어쩌면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두려워한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라는 영혼의 다른 모습이 표도르라는 타락한 영혼 속에 녹아들어 가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들을 카라마조프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는 어둡고 음침한 타락한 인간 영혼의 광대한 세계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다 보면 그 타락한 어둡고 음침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무섭고도 두려운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무(無)에서 무(無)로 던져진 존재일까. 신이 없고, 인간은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으로 던져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냥 표도르처럼 일생 자신만의 쾌락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존재일까. 도스토옙스키의 어둡고 절망적인 질문들은 어쩌면 그가 일평생 고민하고, 말년까지 고민했던 질문들이 아닐까. 소설은 이렇게 점점 절망적인 질문 속으로 우리를 던져 놓는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마지막에 한줄기 빛이 있다. 그리고 그 빛을 좇아서 다시금 그 어둡고 광대한 우주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그 희망은 항상 미완성으로 끝난다. 과연 그 희망은 도스토옙스키의 삶에서도 미완성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소설을 읽는 나는 일생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던져 준 그 희망을 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