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자마자 한 권씩 리뷰했다면 되새겼을테고 떠올렸을테고 그러면 기억됐을테고 덜 까먹을 것이다. 하지만 쉼 없이 한 권을, 때로는 여러 권을 산발적으로 읽으며 생각은 덜했기에 감상은 남았지만 지식(이랄 것도 없지만)은 소멸했다. 예를 들면, 지명, 캐릭터 이름, 좋았던 부분의 정확한 구절 같은 것들. 리뷰하려면 등장인물과 줄거리 정도는 있어야한다고 여기지만, 흘러가는 것을 붙잡는 재주가 없다,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인공적이다 그건. 이번에는 없다. 다음번에는,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없을지도. 

 

 

<어떤 날들>의 엔딩은 어떤 면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그들이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책임감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그들이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_선택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사소한 선택사항_중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약간의 가능성으로 인해 비난받아야 마땅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같은 이름 다른 의미로 이 작고 무거운 커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기대된다.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지 못해 짊어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남자와 그런 사랑을 감당하고 책임지기 위해 가족을 떠난 여자_남자와 여자라 불리기에는 너무나 어린 그들_의 마음 같은 거, 사실 이 가족들을 생각하면 많이 몰염치할지도. 그러나 균열은 처음부터 없던 게 아니라 있어도 몰랐던 흠이기에 이 가족이 따로 살아가는 삶도 기꺼이 응원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다. 가장 두려운 것을 책임질 수 있게 하는, 책임지지 못해도 용기내게 하는, 용기가 나지 않으면 신념과 신뢰를 지키게 하는, 뜨겁게 부서지는 게 미온하게 완벽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쎄, 난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은데. 띠지에 박힌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낯설다. 내가 기억하는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아닌데다 누가 살인마였는지 기억이 도통..나질 않아.. (어쩌면 나는 순간을 견디기 위해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삼십년 복역 끝에 정신병원으로 온 살인마가 있고, 조울증 엄마와 자폐증 동생을 가진 청년이 있다. 술에 찌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엄마는 자폐를 앓는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조는 지긋지긋한 엄마와 동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먼 곳에 있는 대학을 선택한다. 적어도 밤낮으로 엄마와 동생을 돌보지는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사고치는 엄마와 혼자서는 위태위태한 동생 때문에 일상은 흔들릴 때가 많다. 그의 삶은 수업 과제로 삼십년 전 이웃집 소녀를 살해하고 불태운 혐의로 복역 중인 칼을 인터뷰하면서, 옆집에 사는 라일라와 사귀면서 점점 변화해간다. 누군가의 이야기(사연)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어떻게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이 소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조의 일상과 (이제 기억이 난다)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추적하면서, 살인범 칼의 젊은 시절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감동과 눈물의 시간이다.

 

 

 

이 소설은 열에 아홉이 좋다고 할 만한 그런 작품이 분명하지만 나는 당시 줄기차게 읽고 있던 추리소설에서 문학작품으로 복귀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매겼다. 별은 다섯을 매겼지만 좋아하는 형태의 소설은 아니라서 실질적 의미에서 네 개다. 왜인지 모르지만 <스토너>는 사실 지루했었다. <스톤 다이어리>를 읽으면 당연히 <스토너>의 여성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스토너보다 스톤이 더 나았던 건 역시 여주인공이라서였을까. <스톤 다이어리>를 다루는 빨간책방을 들었고, 알게 되었다. 누구나 겪는 삶을 진지하게 풀어가는 소설과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 중에 나는 후자를 좋아하니까, <스토너>나 <스톤 다이어리>에 큰 점수를 부여하지 않았던거다. 사건 배열의 미장센을 이용하는 건 영화지만 시간의 일방성으로 진행되는 느린 소설에서 몇 발짝 비켜나 있었기에 이 소설이 마음에 들어왔을 때 좀 놀랐던 것 같다. 신기한 사실은 정말 특별한 사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읽기 나름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게 읽힌다는 것. 읽는 사람의 진입장벽을 생각하면 위, 그리고 위의 위 책이 더 나을지도. 특정 사건이 없다는 것은 임팩트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쉽게 읽히지만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다는 뜻이다.

 

 

 

왜 하필 이탈리아?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이미 경험했다. 이십대 내내 나는 딱 한번 가본 이탈리아를 품었고, 사실 가보기 전부터도, 십대부터 그 거대한 유적과 역사의 도시들을 품고 있었다. 남들은 이탈리아하면 쇼핑이라는데 쇼핑을 굳이 이탈리아까지 가서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줌파 라히리의 작은 책이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익히고 동경하고 사랑하는 사전이었던 것처럼 나도 언어 배우기 혹은 언어 공부라면 일가견 있다. 참고서, 문제집 사는 것도 소설책 사는 것만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고, 빽빽한 알파벳이나 꼬불한 히라가나 사이로 연필을 꽂아놓으면 으쓱하는 기분이곤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탈리아를 사랑하여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타언어로 자신만의 언어 배우기 에세이를 쓴 도전을 얕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기대가 컸다면 실망도 큰 법이라, 대한민국이 아닌 땅에서 나고 자랐다면(혹은 부모가 타국인이었다면) 당연히 익히고 말했을 언어 배우기에 큰 로망이나 대단한 가치를 두고 싶지 않은 건 내 작은 고집이다. 서정적이면서도 그 서정성에서 약간은 빗겨나 있을 정도의 현실성을 획득하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대한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계속 <LAST>의 미주를 생각한다. 떠오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이 더욱 강렬해졌는데 어느 작품이었는지 모르겠다. 미주는, 아저씨도 잃고 회장님도 잃은, 유학을 가버린_집나온 학창시절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워진_미주는, 이제 행복할까. 지금 가진 추억 속 사람들이 다 과거가 되어버리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릴 때, 우리는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수수한 청바지에 새하얀 셔츠와 운동화를 좋아하는 여자가, 높은 구두와 값비싼 보석과 푹파인 드레스를 감당할 때, 그 삶으로도 살 수 있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정말 다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내것이 아닌 것을 단호하게 내려놓는 용기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는 결단은 역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니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서울역 사람들(정의)을 지키는 대신 미주(사랑)에게로 왔다면 그는 지금 살아있을까. 그들은 오래 행복했을까. 행복도 사랑도 평화도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 희망이었다. 희망이 그토록 먼 삶이라면 처음부터 피해야만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이 붉은 계절이 곧 지나가는 것과는 달리 웬만해선 끝이 나지 않을 거란 걸, 더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소설에서 어느 드라마 속 파란만장했던, In Or Out의 삶을 살던 여주인공을 떠올리고, 또 그녀는 내게로 오버랩된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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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수철 2015-10-28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글은 꾸준히 좇아 읽었지만, 댓글은 처음 남기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음, 저도 드라마 라스트를 제법 챙겨 보면서 흥미를 느꼈더랬어요.

그런데 미주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왜,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권투를 하는 넘버 투에게 주로 이입을 했거든요. 그런데 미주나 넘버 투 같은 사람은... 사실 같은 부류라는 생각이 드네요. 야망이 없고 선한.....

그 둘이 결국 함께 떠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공연히 억울해했던 기억도 나네요.ㅎㅎ

아무려나 `스톤 다이어리` 챙겨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5-10-28 15:48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 안녕^-^ 하세요.

오래 봐서 이제 거의 식구처럼 여겨지는데도 타이밍을 놓쳐 인사를 못 남기고 덧글도 생각만 하고 못 남기고 그랬어요. 저도 한수철님 글에서 언젠가 저도 보고 막 그랬는데요, 그때도 뒤늦게 봐서 인사를 놓치고.. 반가워요!

미주가 혼자 남았기에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궁극적으로 본인들 잘못이 아님에도 세상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부류)이 `어떤날들`과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에 나오거든요. 그들은 행복해지지만 드라마 라스트 속 둘은 함께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 게 좀 억울했고, 미주가 혼자 남아 가정을 꾸려 딸아이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줄 생각을 하니 그 사랑과 세월이 애잔해서요.

기대하세요, `스톤 다이어리`는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두 권도요. 자주 뵈요^^

2015-10-28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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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5-10-29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는 막 킬빌을 보고 왔어요.
어떤 분하고 술 약속을 잡았고, 성사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아이님, 저와 변요한을 연결짓지는 말아요. 부디.
아이님!!!!! 와락 ㅎㅎ

아이리시스 2015-10-30 21:06   좋아요 0 | URL
요즘 영화 보느라 바쁜 거예요? 좋다..킬빌..술 약속은 정말 안 어울리고(소이진님 술마신대! 이런 느낌)
변요한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한 소이진님은 계속 변요한..( ˝)
좀 참아봐요.. 그런데 막 새벽 3시까지 안 자고 뭐하는 거예요? 주말 잘 보내요. 2학기 시간표도 월요일 공강인가요?(월요일 맞나.. 금요일이었나..) 금토일월 이렇게 다 논다고 1학기때 그랬나.. 토일월이랬나.. 아 나이드니 저질 기억력이여.. (2학기도 그럴리 없어..)

2015-10-30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3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2월, 3-4월에 겪은 두 가지 일의 스트레스를 5월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며 하나둘 털어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참았던 책 얘기를 하고싶어졌다. 읽은 책보다 읽는 중의 책이 훨씬 많은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당시엔 어려웠어도 이미 지난 일은 또 금방 잊히는 게 사는 이치같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오고 좋은 책과 나쁜 책이 교차하는 것도 삶. 마음 너머 저 어딘가의 당신에게 고맙다고 쓴다. 그간 이곳 서재의 기능도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지만 기본은 늘 변함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일상과 텍스트(책,영화 콘텐츠)의 나눔. 겉으로 드러나는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 말고.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지구상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떠나는 깊은 밤으로의 여행, The End of Night), 폴 보가드, 2014, 뿌리와이파리

 

 1월에 만나 첫 페이지를 읽으며 이미 올해의 첫 번째(순위아님, 날짜순) 베스트()에 넣어두었다. 베스트()안에 몇 권이 꼽힐 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설령 앞으로 읽을 책들이 모조리 더 좋다해도 이 책의 가치와 의미를 놓치거나 잊을 순 없다. 개인적으로 '시간'과 '밤'이라는 소재는 정겨우면서 질리지도 않는다. 6월이면 통합도서카드를 만든 지 일 년 된다. 도서관을 이용하며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먼저 읽고 나중에 사는 것.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다 해도 '소장하고 싶음'을 어느 선까지 설정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서재를 꾸미는 것도 귀찮다. 차라리 집이 도서관이었으면. 다시 읽는 타입이 아닌데 좋은 책은 읽히고 또 읽히는 게 마땅하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밤에 대한 분석과 의미가 짐작처럼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날 때, 내가 떠나온 혹은 나를 떠난 잃어버린 밤을 찾고 싶어한 것 같다. 낮을 아는 이는 많지만 밤을 아는 이는 흔하지 않으므로. 밤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밤이 주는 고요와 안락을 얘기하고 싶었다.

 

 밤을 낮보다 더 환한 밝음으로 사는 현대인들이 가엾다. 밤이 밤이 아니고 낮이라서 고마운 적도 있었을 것이다. 밤은, 그러니까 밤은, 오래 다른 시간, 공간, 세계였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숨쉬게 하고 외롭게 하고 기쁘게 했었다, 밤은. 그러니까 밤은, 내가 낮보다는 밤에 더 가깝다고 느끼게 한다. 낮만 아는 사람은 밤을 통과할 힘이 없고, 밤만 아는 사람은 낮의 빛을 피로하다고 느낀다. "어둠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받는다."고 저자 폴 보가드는 썼다. "어둠을 알려면 어둠 속에 거하라."고 웬들 베리는 조언한다. 폴 보가드는 자연이 주는 선물인 밤의 어둠을 막는 인공적 빛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 여행했다. 빛의 공해 속에서 모든 생명체는 제대로 안정하고 숙성할 시간이 없다. 빛과 어둠, 그 혼돈에서 각각 피어나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현대인은 간과한다. 모두가 잠든 시간, 가로등, 주차장, 네온사인, 주유소, 신호등, 간판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들이 어색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 굳이 왜 어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2001년 조사한 이탈리아인 피에란토니오 친차노와 파비오 팔키가 만든 인공 밤하늘 밝기에 관한 세계지도를 보라고 답하겠다.

 

 이에 따르면 미국과 서유럽에 사는 사람들 99%가 빛의 공해 속에 산다. 그들 모두가 평생 불빛 없는 밤을 경험하지 못하며 비정상적인 수면으로 생체리듬을 교란당한다. 피로와 소음에 압도된다. 빛과 소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각적 불능 상태를 의도적으로 재현하지 않고는 더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지나친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대신 청각, 미각, 촉각, 후각적 기능을 상실했다. 총체적 감각이 합세해야 비로소 발현되는 예술적 사유의 가능성을 잃었다. 찰스 디킨스는 <밤 산책>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거리를 떠돌며:런던 탐험>에서 밤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을 수도 있는 게 삶이라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누릴 수 있는 감각을 다 못 누리고 사는 건 억울하다. 김영하 작가는 온 감각으로 글을 쓰라고 조언하고, 나는 메모지에 무심코 밤이 그립다고 쓴다. 좁은 땅, 넘치는 인구,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밤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무의미하지 않다. 충분한 수면과 온 감각의 활성화, 제대로된 사유의 힘. 잃어버린 밤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밤을 사랑하는 이유와도 닮았다. 이렇게 말해 볼까, 우리 밤에 만나요.

 

 

 

 굶주린 길(The Famished Road), 벤 오크리, 2014, 문학과지성사

 

 새삼 환상문학, 초현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운운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거장들-마르케스, 보르헤스, 아옌데-을 소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이현수의 <나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 임철우의 <등대>, 바버라 킹솔버의 <화가 혁명가 그리고 요리사>를 처음 듣는 나이지리아 작가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옆에 놓아보자. 무려 75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다. 성장 혹은 역사와 현실을 비틀기 위해 의도적으로 초현실적 스토리를 빌려온 혹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존재를 화자로 등장시키는 혹은 실제 존재한 인물을 사실과 전혀 다른 상황과 위치에 넣은 소설들. 그렇게만 나누면 이 소설은 혼령 아이가 등장하는 <소년이 온다>와 비슷하다.

 

 1959년생인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벤 오크리는 극도로 혼란한 격동기의 나이지리아를 몽환적인 언어로 그려내 1991년 부커상을 받았다. 한 아이(아자로)가 죽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중요하지도 파헤칠 필요도 없다. 아이 생사를 모르는 부모는 삶과 죽음이 뒤바뀐 삶을 살고, 아직 저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혼령 아이=아비쿠(아자로)는 아비쿠의 협정을 위반한 채 이 세계로 넘어온다. 1, 2가 아닌 3의 세계에 존재해야 할 아자로에게는 특이하게도 1,2 중에 머무를 곳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삶은 상상가능한 모든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경계에 존재하는 아비쿠들의 투닥임, 미래와 재앙을 보는 아자로의 시선이 닿는 모든 시공간이 나이지리아가 당면한 문제, 곧 이 세계의 부조리를 대변한다. 작가가 구축한 환상성은 줄거리의 특수성-나이지리아 현실-에서도 나타나지만 현실과 초현실에 존재하는 아비쿠의 위치로부터 나온다. 모든 인물이 익명성을 띄고 시공간의 구체성이 사라지는 것, 굶주린 길이 의미하는 나이지리아의 정체성-흑인, 가난, 민족(종족) 등의 곤혹과 수난-을 더이상 문학적일 수 없을 것처럼 아름다운 문체로 잘 다듬어냈다. 올해 만난 책 중 세 번째(순위아님, 날짜순) 베스트().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열 번째 소설 <마법의 시대(The Age of Magic)>로 배드 섹스(Bad Sex in Fiction Award)상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사에 인용된 "우주가 그녀 안에 있었다. 한 번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우주가 펼쳐졌다. 칠흑 같은 어둠 어딘가에서 길 잃은 로켓이 폭발했다."라는 구절은 굉장히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굶주린 길>에서 느낀 벤 오크리의 매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다른 작품이 계속 출간됐으면. 게다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는 모두 가지고 싶은 아끼는 전집 중에 하나다.  

 

 

 

 바다 사이 등대(The Light Between Oceans), M.L. 스테드먼, 2015, 문학동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작고 좁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호감을 갖고 헤어질 뻔하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다. 그러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평생(영원히) 가족과 뭍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등대에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외딴섬 야누스 록으로 들어간 한 여자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여자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한 남자의 눈부시고 아름다운 신앙같은 사랑이다. 톰과 이저벨, 딸 루시, 루시의 부모-톰과 이저벨만큼 대단하게 서로 사랑했던 비운의 커플-의 이야기가 잔잔하고 따뜻하다.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더이상 부러울 게 없는 톰과 이저벨 커플에게 찾아온 두 번의 유산은 커다란 시련이었다. 섬에 갇힌 이들이 예고없이 닥친 퍼석거리는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때마침 우연히 섬으로 흘러들어온 아기에게 위험을 감수하며 인생 전부를 걸어버린 이저벨과 한번의 동조 후 그녀를 말리지 못해 생긴 일그러진 상황을 바로잡으려 끊임없는 죄책감으로 그녀를 설득하는 톰. 그들에게 선택과 책임 그리고 아기는 거의 신앙이 되어가고 있다. 좁은 섬, 타인을 밝히되 자신들은 전혀 밝아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에 대한 딜레마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지치지 않고 '당신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도덕적 판단과 운명에의 순응 사이로 몰아넣는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레이첼 와이즈 그리고 알리시아 비칸데르, 야누스 록의 적막과 고독,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바다 위의 이정표 등대, 매일매일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 바다 옆 자그마히 놓인 고독의 삶, 1차 대전 후 오스트레일리아를 관통한 상실의 고통과 쓸쓸함, 등대를 사는 이들의 물결치는 행복.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행복을 향한 욕망과 이어지는 삶.삶.삶. january(1월)의 어원인 janus(야누스)는 두 얼굴의 신을 의미하고, 야누스 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왔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외딴 바위섬 야누스 록이 실어온 이야기는 또 있다. 작은 보트에 실려 센 물살에 떠내려온 아비를 잃은 갓난 여자아이와 사랑하는 남자와 딸의 생사를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 언젠가 루시를 원래 부모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톰과 이저벨의 슬픈 운명. 빛은 무대 위 조명처럼 짧지만 등대지기는 누구보다 강하다. 전쟁으로 오빠 둘을 잃고 부모님의 유일한 소망으로 사는 이저벨과 전쟁 때문에 죽음을 끌어안고 메마르고 불안한 삶을 이어온 톰, 독일(오스트리아)인이던 루시의 생부와 어렵게 자수성가한 남자의 딸인 루시의 생모까지, 모두의 사연들이 불행을 딛고 존재하는 가운데, 파도와 밤의 어둠은 연이어 바다와 빛을 삼킨다. 어둠은 머지않아 다시 재빠르게 빛과 온기를 토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빛을 잊지 않고, 빛이 그들을 떠날 의지가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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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5-05-31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 꾸미기가 귀찮아서 그저 쌓아만 둬요. 담쟁이 덩쿨마냥 뻗어가는 책들을 보는 것도 은근 재미있다는(말도 안되는 자기 최면을 걸고 있죠^^) 대산세계문학은 저도 열심히 모으고 있어 반가운 마음에 살짝 흔적남겨요^^ 소개해주신 책들도 흥미롭네요. 저도 빨리 벗해봐야겠습니다.^^

아이리시스 2015-05-31 16:06   좋아요 0 | URL
서재같은 거 저한테는 있지도 않아요(슬픔). 많지도 않은 책이 이미 포화상태라 바닥에 그냥 쌓여 널부러져 방에 들어가질 못하겠어요. 책장 들일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넓은 집 사서 이사나가 새로 꾸미면 모를까, 상황이 그렇다보니 서재 욕심도 별로 없는데요, 저는 읽는 욕심이.. 그런데 헤르메스님은 저와 비교도 안 되게 책이 많잖아요, 가끔 사진을 본 것 같은데요? 정리하면 엄청 멋지실 거예요^^

양철나무꾼 2015-05-3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책탑을 쌓다 쌓다 책이 제가슴에 얹혀요, 쿨럭~--;
그래도 매일 습관처럼 책마실을 다니고, 장바구니를 채우고, 구매버튼을 눌러요.
아이리시스 님 말씀만으로도 솔깃한데, 헤르메스님까지 합세하시니 전 일났습니다. 보관함이 완전 빵빵해지게 생겼습니다~ㅠㅠ

아이리시스 2015-05-31 16:12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도 책탑이 어마어마한 거 제가 알죠, 완전 알죠(부러움), 그런데 분야 안 가리고 많이 읽으시는 게 저는 더 부럽죠(정말요). 책이 계속 나오는 한 또 사야죠, 살 수밖에 없죠, 이미 있는 책은 새로 나오는 책과는 다른 책이니까요(후훗). 보관함 말인데, 저는 집을 팔아도 다 못 살 것 같아요. 다 사도 읽지 못하겠죠. 그래서 양철나무꾼님 책탑을 오랜만에 또다시 구경이라도 시켜주세요(꾸벅), 정리하면 도서관 비슷할 거예요. 아, 친구가 그려줬다고 하셨죠? 볼 때마다 프로필 그림 너무 잘 그렸다는^^

페크(pek0501) 2015-06-0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풍성한 책 이야기라니... 많은 정보를 안고 갑니다. ^^
자주 글 올려 주세요.^^

아이리시스 2015-06-09 00:39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pek님. 제가 좋아 만족하며 쓰지만 읽어주시는 분들 있어 늘 행복해요.
연연해선 안 되지만 잊진 않을래요. 자주 놀러오세요^-^

2015-06-03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5-11-0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왜 못읽었지?했더니 아버지 병원에서 먹고자고 할 때네요;; 황금 페이퍼가 여기 있었군요❤️ 이런 식의 풍성한 레퍼런스 사랑합니다😘

2015-11-09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쓰고 싶은 것들을 꾹꾹 눌러담아도 시의적절하게 뱉어내게 되는 건 처음과 상관 없는 또다른 성질의 이야기인 것 같다. 아직도 막막한 그날의 부서짐을 이제와서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닿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손을 떨면서 가방을 챙기고 덜덜 떨리는 다리로 밤 열두시를 향해 가던 골목길을 달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로 향하던 지난 3월의 일 말이다. 잊었다. 잊혔다. 그러니 불가능하다. 서재를 5년 넘게 꾸려왔어도 100% 생각하는 바를 글로 치환시켜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 글은 늘 머릿속과 다르다. 절반 아니면 그 이하도 표현하지 못한다. A를 말하고 싶고 당연한데도 늘 A'나 B, 어쩔 땐 전혀 상관 없는 C를 말하게 되기도 한다. 왜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제일 앞에 놓지 못하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매순간 완곡어법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사는 속도와 들기(혹은 읽기)까지의 속도차가 매우 큰 책. 지나치게 아끼다 입지 못하고 걸어만 두는 옷. 소중할 수록 혼자만의 서랍에 넣고 뜸들이듯 묵히는 이유를 찾겠다고 결심한 건 실패할 걸 알면서도 시작하는 도전과 비슷했다. 적재적소 혹은 제때 소비 못하는 느림병에라도 걸린건지. 사랑한다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아끼는 이유. 가장 좋았던 혹은 나빴던 장면, 순간, 느낌을 숨기는 이유. 어쩌면 알 것도 같다.

 

꼭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하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서운하다는 말 역시 빠를 때보단 늦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황홀했는데 어딘가에 꺼내길 놓친 것들 중엔.

 

하나만 골라보려 했는데 안된다. 전체 스토리가 거대한 산을 그리고, 만남 이전 각자의 삶과 만남 이후 운명적 사랑이 맞물려 끝까지 가야 비로소 한편의 성장과 사랑의 완성을 만나기 때문에 어떤 장면을 가져온들, 이 청춘 커플의 아기자기하고 눈물겨운 로맨스만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로맨스인듯 로맨스아닌 로맨스. 내가 궁극적으로 마침표를 찍은 건 성장.이란 단어지만 의외로 많은 재들이 별빛처럼 쏟아져내린다. 비로소 사랑, 이라거나 언제나 사랑, 혹은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한다, 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5UwBDhFf8k

https://www.youtube.com/watch?v=wR0Zq6WXpBY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기억하고 추억에 젖은 그녀가 서툴러서 이루지 못한 과거의 사랑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현재의 사랑을 교차시키며 아파했듯, 눈이 가려진 채 딱 한번 잡은 적 있는 손의 감촉과 느낌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 사랑이 운명이라면, 서로를 알아본 순간 두사람의 우주는 감촉과 느낌과 믿음, 함께했던 시간과 함께하는 순간으로 뒤덮여버리는 게 아닐까. 그게 전부라면 세상의 모든 사랑, 불확실성을 부유하는 마음들이 더 가혹하고 가엾을 수밖에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lebCumfJU5Q

https://www.youtube.com/watch?v=_oZhPZ8RKrk

 

 

              

 

 

              

 

 

 

힐러가 좋아서 현실에 힐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무장된, 세상 어디에도 저를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소년 같은 남자. 어쨌거나 마땅한 공연을 찾고 있었고, 지창욱을 보겠다고 티켓팅을 했다. 공연 시기를 보면 타환일 때도 공연중이었는데 드라마를 하면서 공연을 한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그런데 저 배우는 어느 순간 TV나 스크린이 아니라 공연장에서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본인이 공연의 매력에 푹 빠진 상태. 최근 인기로 돈독에 오른 상태가 아니라면 분명 가진 능력과 한계를 공연장에서 시험해나갈 것이다. 노래가 전부인 공연계를 어떻게 뚫을지는 모르겠으나. 매번 인기로 표를 팔고 싶을 리 없고, 표를 파는 게 목표라면 드라마를 하는 게 더 이득일테니.

 

 

 

 

막공을 향해 가는 막판 지방공연 중이지만 창작 뮤지컬이라는 메리트가 있었고, 김광석이라는 훌륭한 뮤지션의 곡을 재편곡한 곡들을 한자리에서 다시 듣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아놔, 자리가 제법 괜찮았는데도 배우 얼굴이 안 보였던 것만 빼면 모든 게 좋았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근처 대학가에서 칼국수와 파전으로 점심을 먹었고, 고속도로에서 들른 휴게소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는 아메리카노보다 더 연했고, 전날 괜한 짜증으로 다퉜지만 결론적으로 J는 그다지 잘못한 게 없어서 화낸 나만 머쓱했고, 비가 내려서인지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으나 대구 시내는 더럽게 정체됐다. 남는 시간은 홈플러스 구경으로, 밀러와 하이네켄을 미지근한 상태로 도착한 공연장 주차장에서 마셨다. 그날 본 풍경은 신기했다. 어린 딸과 엄마가 있었고, 부모님을 졸라 가족이 총출동한 경우와 홀로 당당하게 온 경우가 있었다. 김광석은 김광석임에도 불구하고 7080 가수, 공연은 커플끼리 다정하게, 라고 생각한 고정관념을 제대로 깨부숴준 배우 지창욱의 인기는 놀.라.웠.다. 거기다 노래가 좋다, 공연이 좋다, 는 말을 아무리 빨리 해도 지금은 늦겠지. 다음 기회에.

 

 

 

2.

 

 

나는 내가 당신의 삶이라는 것도 알아요, 삶의 고통이고 기쁨이죠.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거기에 대해선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3.

 

 

 

 

 

 

 

 

 

 

 

 

 

 

 

성(性) 문학 컬렉션을 지향하는 '밤의 문학'이라는 달콤한 카테고리 에서 출간된 예문의 <나나>와 <사포>. 앞으로 어떤 문학 작품이 포함될지 기대되는 '밤의 문학'을 출범시키는 출판사의 각오는 로맨틱했다. 밤이 없다면 쉼과 가림, 숨김과 비밀의 미학을 우리가 알 수 없을 지도 모르지. 책을 펼치면 만나는 사랑과 로맨틱에 대한 찬가.

 

사랑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사랑이다.

-옥타비오 파스

 

문학 작품에는 삶과 사회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성(性)을 다룬 문학 작품 또한 성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삶과 사회를 반영합니다. 어쩌면 삶, 그리고 사회란 끊임없이 타자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시인은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인류가 살아있는 한 에로티시즘은 모든 예술의 가장 풍요로운 원천으로 존재할 것(장 콕토)"이라고 합니다.

 

밤은 낮과 다르지만 어둠만은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책들은 반대자들에 의해 '밤의 작품'이라 불렸지만 대낮처럼 밝은 지성의 힘을 오늘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음과 양은 대립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도와주어 만물을 생성, 창조한다는 오랜 지혜와 마찬가지로 밤과 낮, 남성과 여성은 다르지만 서로를 도와 생산하고 창조합니다. 또한 밤은 "또 하나의 세계(파스칼 키냐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ZWjIXpz3CY

 

그냥 나는, 아직도 미완성인 사랑을 완성해보려 애쓰지만 결코 완전한 모양으로 만들지는 못할 거란 걸,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존재하는 한, 현재 아니면 과거라는 걸, 미래 역시 현재 안에 자리하는 조각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살고 싶은대로 살아봐. 괜찮아. 어떤 모습이라도 내가 옆에 있어줄테니까." 라는 말을 평생 들으면서 혹은 믿으면서. 그래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혹은 꿈꾸면서. 저 남자 손바닥 안에서 여자는 절대 사라지지 않겠지. 만남은 이별을 낳기도 하겠지만 함께 한 세월이 손바닥이라면, 저 남자의 사랑은 분명 손바닥 넓이 이상일 것이다. 넓은 시간, 넓은 가슴, 넓은 추억을 가진 완은 그렇게 굳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결국 싱싱과 마주본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다 알 때까지 깊이 들여다볼 때까지 사랑할 때까지 기다린다. 사랑에는 때론 미련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사랑에 관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섭렵하면서, 그러길 바라면서. 달라지려 애쓰면서, 사람을 믿으면서.

나는 살겠지. 오랫동안. 변함없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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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1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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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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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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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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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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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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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뜸하다가 갑자기 뭔가 쓰려고 흰 종이를 펼치면 가장 난감한 일이 할 말이 넘쳐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는거다. 생각해보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긴 적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끄적임이 체화된 이에게 주절주절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서. 하지만 갑자기 펼친 여백이 당황스러운 와중에 시간까지 촉박하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안 쓰거나, 남기든 버리든 나만 아는 용량 안에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들을 저장하게 된다. 아마 알라딘 서재에 글쓰기가 잠정적으로 중단된 지난 몇 달 간 수십 권의 책이 그렇게 안드로메다로 갔을 걸. 언젠가 꺼내 쓸 날이 있겠지 하면서.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거나 드물다는 걸.

 

 그렇지만 내가 쓰면서 내가 뭘 쓰는지, 쓰려는지 모르는 글이 기승전결을 갖출 가능성이 있나. 물론 여기서야 기승전결 따위 아무도 신경 안쓴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신경쓰잖아. 나는 나에게 제일 먼저 잘 보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기다리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표지의 부제를 읽으면 제목에서 내용이 파악된다. 책을 결코 많이 읽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게으른 편이고 종종 산만하기도 해서 독서는 늘 그럭저럭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읽어서 좋은 건 원래 타고난 직관보다 좀 더 많은 직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아, 그들은 어떤 특정 상황에 처해 자신들이 결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집단 강제주입 혹은 자발적 타협으로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구나. 나치 시대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 반면, <인류>는 제목과 표지 만으로 나치 시대의 증언이란 걸 알 방법이 없다. 이 책이 고고학인 줄 알고 소개글을 읽다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후 겪은 로베르 앙텔므의 인문학적 에세이인 걸 알았다. 초기의 나치 시대 수용소 문학으로 유명,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수용소 문학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프리모 레비의 작품으로만 알던 책 읽는 사람에게 더 추가해야 할 작품들이 나와 반갑다.

 

 

 <그들은...>은 초판이 1955년, 재판이 1966년에 나왔다. 저자 밀턴 마이어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어느 마을을 방문, 10명의 전직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 출신의 다양한 직업/지위/직책을 지닌 평범한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눈다. 개개인의 상황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인터뷰는 자신의 입장을 늘어놓는 방식이기에 순간순간 지루해지기도 한다. 일반의 수용소 상황과 괜찮은 문장을 읽기 원한다면 <인류>가 더 나을 것. 하지만 둘의 문학성이나 인문학적 차원에서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거짓말처럼 하나같이 자신은 명령의 체계를 떠나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가해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그래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식이다. 마치 새장 안의 새가 새장 안이 세상 전부라 믿는 것처럼. 게다가 그들의 침묵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 직접적 가해자와 간접적 가해자, 명령과 묵인, 방조. 이들 중 무엇이 더 나쁘다 말할 수 있는가. 가해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발적으로 가담했든 비자발적으로 가담했든 가담했다는 사실엔 차이가 없는데 그건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가.

 

 

 

 이 책들은 결국 <생존자>, <히틀러의 철학자들>, <어느 독일인 이야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와도 만난다.

 

 

 

 

 

 

 

 

 

 

 

 

 

 

 

 

 원래 인간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이 제일 끔찍하다고 믿는다.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라고 믿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가장 비루한 방법인 듯 보이지만 때로 자신이 겪은 일보다 더 심한 일을 겪은 사람을 보며 스스로 위안하고 거짓말처럼 치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닥친 슬픔의 강도가 다르듯 불행과 아픔의 차이 역시 천차만별이다. 어느 수용소가 가장 심했고 끔찍했고 참담했다는 얘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져있지만 자기 삶 구할 길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가장 처참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위의 책들이 다루는 개별 수용소, 개별 삶, 개별 경험에 본격 차등이 있더라도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을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째서 저자와 출판사만 달라져 출간되는 매번 비슷한 나치 수용소에서의 엇비슷한 경험을 읽어야 하는가 물으면, 나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늘 같은 카테고리의 책들에 관심이 가고 매번 꼭 읽게되더라는 결과론적 의미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약 70년 전에 벌어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작게든 크게든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이런 세상에 내가 산다고. 사는 일이 힘들다는 자각조차 못하며 그럭저럭 산다고.

 

 

 

 <인류>도 다른 저작들과 다르지 않다. 써내려간 방식, 입장, 상황이 다르긴 해도 결국 나치 시대의 강제 수용소를 바라보거나 체험한 데서 시작된 증언이다. 1947년 출간되었고, 저자 로베르 앙텔므 역시 20대에 겪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순간을 없던 일로 하지 못해 세상에 내놓는다. <인류>가 끔찍한 시간을 대상으로 회고처럼 씌어진 글이라고 볼 때, 문장과 단어 사용이 굉장히 서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려는 용기만큼 가상한 일이 없다. 감각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상황이 더 좋을 수록 혹은 더 나쁠 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배고프다'는 말 대신, 두려움을 '두렵다'는 말 대신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우린 나치의 오롯한 피해자들이 겪고 본 일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존엄과 자유의 박탈을 통해 밝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수치, 치욕은 결국 인간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인류라는 단어로 만난다. 그는 필요 이상의 인류 단일화를 문제 삼고, 등급화, 차별, 예속, 착취를 고발하려 했다. 인류의 다양한 모습을 들춰내는 한편, 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인류라는 말도 보탠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제는 피해자였다가 오늘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상황들에 비추어 보면. 모르는 것, 몰라도 되는 것, 몰라야 하는 것조차 각각의 책임이 따른다. 하물며 본성을 기반으로 자유에 의해 가해를 선택한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오래 전에는 목숨을 담보로 가해를 강요 당하는 2차 가해자들을 덮어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만 여겼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방아쇠를 당기도록 훈련시키는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의 말을 따르는 소년병,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순사보다 더 같은 민족을 탄압한 일본 앞잡이, 살아남기 위해 나치당의 편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그에 동조하거나 또는 끔찍한 행위가 잘못됐다고 여기면서도 묵살하는 평범한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만큼의 비난과 처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죄가 없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가 행한 만큼의 벌을 받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모든 수용소 문학은 있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고발이다. 

 

 

 *

 북플이 없었다면(이조차 꼬박꼬박 기록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기록한 리스트와 코멘트(생각나는대로 엉망진창 두서없음)가 없었다면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은커녕 목록조차 기억하지 못했을거다. 엄마는 내가 가져다준 <궁극의 아이>를 읽고 계신데, 집에 책이 두 권이라 다시 읽으려다 예전에 '모두 기억하는' 엘리스를 몹시 부러워했던 게 떠올랐다. 기억과 경험이 결국 생의 힘이라고,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차곡차곡 기억하며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위 책들을 써놓고 좋았던 소설에 대해서 써야지 했는데 다시 머릿속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자주 무슨 생각 하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데, 실은 별 생각없이 살고 있는지도. 생각이 많으면 삶이 복잡해지는 법이니 이게 더 낫다. 적어도 지금 나한테는. 그렇다고 생각 없이 살자는 얘기는 아닌데ㅡ 요즘은 그런 사람도 참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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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2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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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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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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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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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3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보니까 좋아요. 조으다..<인류>는 저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인데 마침 글을 써주셨네요. 저는 이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으면서 느낀 건 생각보다 어떤 구별 같은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나치=나쁜놈 이라는 간단한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내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더군요. 아무튼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 구별이 아주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 나빠, 라던가, 아니면 다 그럴 수 있었어, 라고 말하는 것은 동일하게 안좋은 결과, 그러니까 미래 언젠가에 있을 반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든 읽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읽는 수밖에는 없겠죠. 우리가 할 일은.

기승전결에 아무도 신경 안쓰지만, 내가 신경쓰잖아...에 깊이 공감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기승전결 아주 좋은데요. 안드로메다로 간 것들 중에서 몇 개만 꺼내와봐요.

아이리시스 2015-03-31 13:30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났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로메다간 것들.. 실은 별로 없을지도 몰라요, 갈만하니까 간 걸지도.. 오래전에 숨겨둔 예전 글들, 제가 쓰고도 좋아했던 순서대로 몇 개 읽어봤는데요. 거의 [결]에 늘 문제가 있죠. 확 타올랐다가 화르르 꺼지고, 예고도 없이. 제가 블로그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냥 썼어요. 제가 쓰지만 글의 흐름과 속도는 문체가 결정짓는 것 같아요. 저는 도저히 그걸 멈추거나 재촉할 수가 없어요.

문득, 저만 구별이 안 되는 게 아니구나.. 싶어 약간의 안도감을 느낍니다^^

yureka01 2015-05-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처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어느날 전쟁소식을 듣고 총들고 나와 위협하던 이야기..동유럽 구 유고연방헤르체고비나의 이야기더군요..아마 유태인을 가두고 수용소로 보낸 말단 인물들도 비슷했을 겁니다. 이웃집의 아저씨가 남영동 분실의 고문기술자인것처럼...

아이리시스 2015-05-29 10:21   좋아요 0 | URL
네, 악의 평범성을 논하는 게 이제는 새로운 담론이 아니게 된지 오래고, 인간이 선악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점점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이 원래 그런지 그렇게 되어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크게 보면 살자고 하는 일들인데, 혼자 아니면 함께의 문제가 곧 나와 타인 즉, 인간의 차이인 것 같아요 :)
 

 

 

 

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

.

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고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 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절반만 말해진 거짓>, 신용목

 

 

 

자유가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은 권태에 시달리고, 억압을 체험한 사람은 자유를 갈구한다. 우리는 대체로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졌거나 가지고 싶은 것보다 우선하여 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처음은 가려진 절반을 찾기 위한 밤이었다. 어떤 걸 말하고 싶고 어떤 걸 말하기 싫은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하기 싫은지. 왜 좋아하는 건 싫어지고 싫은 건 좋아지지 않는지, 왜 내 소유가 분명한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결심은 허물어지는지, 자주 허무와 무기력에 시달리는지, 어째서 가끔 슬픈지, 어째서 종종 아픈지, 왜 만사가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지는지.

 

 

 

새가 실수로 하늘의 살을 찢는 광경과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에 들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떠올렸다. 동시에 수많은 삶을 사는 듯 보이던 어떤 사람이 실은 단 한 명이었는지도. 다소 환각 같은 몽롱한 꿈 안에서 이 소설을 조용히 읽었다. 이 불명확하고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처럼 서걱이는 소설에는 실은 금지된 소망 즉, 경계를 넘어서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사연이 서려 있다. 실제로 넘고 싶은 건 국경(이곳)이지만 저곳이 이곳과 다르리라는 확신은 없고 단지 믿음 뿐이다. 비자를 얻고 통과하는 것의 의미는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천국과 지옥, 육신과 영혼, 사랑과 증오, 바다와 섬 만큼 먼 거리를 오가는 의미다. 하나를 지나치고 다른 것을 맞겠다는 의지,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얻겠다는 집념,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기어이 가겠다는 눈물겨운 결심, 거절과 모욕을 기회로 삼겠다는 꿈. 선 하나를 넘으려 한숨, 눈물, 두려움, 외로움, 아픔, 불행은 물론, 죽음마저 감수해야 했으니 이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떠나 저 세계로 가는 통과비자를 얻기 위해 현재를 북받치게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나치 시대 독일 망명문학은 토마스 만, 레마르크, 브로흐, 츠바이크, 안네 프랑크의 삶과 작품에서 엿보거나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온 걸로 치면 후발주자에 해당할 제거스의 작품은 굴복과 패배를 마다하지 않는 민중, 자유를 향한 절절한 갈망을 주제로 하는 노골적 반파시즘 경향을 보인다. 그것도 굉장히 밀도 높은 서정과 묘사, 아름다운 문체로. 저항을 말할 때 필사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 투사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괜찮다. 일제강점기의 1920년대 카프 문학가들은 막막한 시대를 자기연민과 연약한 감성으로 극복하려는 낭만주의 문학을 회피라며 비판했는데, 시대 상황 안에서 예술이나 예술가가 취하는 방식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에서는 취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초월을 궁극으로 하고 질문을 구할 뿐 정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향과 기질, 신뢰와 극복의 문제로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오해하거나 매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거스는 회피도 직시도 아니라는 점에서 두 경향을 올바르게 융합시킬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전체적으로 묘한 울림과 아름다움이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완성되고 세월의 무상과 시대의 전환을 체험하는 동시에, 뜻모를 아련함과 미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첩보전과 연애전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궁극적으로 회한에 닿는다. 어느 정도 『속죄』나 『체실비치에서』가 주는 소재나 감정과 닿아 있다. 1990년도에 출간됐으니 횟수로 25년이나 지난 작품을 이제 만나는 셈이고, 앞 두 작품이 2000년대에 나온 걸 감안하면 『이노센트』는 이 작품들을 쓰기 위한 전조전, 나아가 여러가지 시도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매큐언의 긴 호흡과 우아하고 탄탄한 문장은 쭉 유지되어 왔고, 미스터리는 한층 치밀해졌으며, 심리전은 더 깊어지고 내면묘사는 더 탁월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애증과 회한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작가다. 사랑이 증오와, 순수와 타락이, 선과 악이, 삶과 죽음이 뒤엉키는 광경이 놀랍다. 

 

 

 

 

 

갑작스럽고 원통치 않은 이별이나 죽음이 있을 리가 없다. 영원한 이별이라는 명제 자체가 납득과 수긍이 안 되는 일임을, 여러 번, 더 많이 겪는다고 괜찮아지는 종류의 현상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몇날 몇시 몇분 몇초인지 알고 있었대도 후회와 미련이 남은 자에게 제대로된 작별인사란 건 허상에 불과하다. 안녕,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괜찮아, 같은 말들을 몇 번 더 한다고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라지고 나면 왜 그딴 것들이 그렇게 아프고 서러워지는 걸까. 다시 생각해도 짧은 인생에 수긍 가능한 작별이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제대로 작별하라는 소설이 있다. 솔직한 기분과 마음을 제때 전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일상을 통째 흔든다. 작품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시시했지만, 자신이 본 사실을 잊지 못해 평생 진실에 몸서리치며 살던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잊혀진다 생각할 뿐 아무것도 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훑고 지나간다. 벽장 안 검은 고양이는 시멘트로 묻어버리고 귀를 막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에드거 앨런 포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늘 과거와 미래에서 빌려온 인생을 사는 듯 아슬아슬한 현재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만 빛을 내는 진실이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인사하라고 말한다.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잘 하는 사람을 볼 때 더욱 강해진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알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알 때 더 강해지지만 모를 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들을 만나게 됐나 보다. 잘 쓴 영화 이야기를 읽고 예술의 시대를 평정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

 

『예술가의 지도』에는 이젠 익숙한 일곱 명의 여성 예술가의 삶이 담겨있다. 작품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은 물론 일상과 죽음마저 허무는 해부는 동시대 수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영화 그 자체로 그려진다. 멀고 깊고 오래된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또 복잡해서 다 잇기가 어려울 지경, 거트루드 스타인, 쉬잔 발라동, 이사도라 던컨, 루 살로메, 알마 말러, 조르주 상드, 베티나 폰 아르님의 일대기를 알면 19-20세기 유럽과 예술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감과 소통, 우정과 사랑, 미움과 질투, 증오와 애증이 곧 영감의 원천이고 예술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마법처럼 책이 덮인다.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시공간으로 예술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은 실린 서사적 평론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미 읽은 글이 많지만 차분히 다시 읽는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영화라는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끄적이긴 하지만 영화 리뷰를 서사나 장치 외적인-이를테면 배우나 배경-것들로만 쓰는 게 무익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이상의 장치나 기법에 대해 분석하는 법을 모르니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문학(소설)을 대하는 자세와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면 더 많은 게 보이지 않을까 욕심이 생긴다.

 

 

 

 

한밤중에 네 식구가 탄 차가 길을 잘못 타서 삼랑진 고개를 넘어가던 어릴 때를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상은 아픔, 배신, 이별, 죽음 같은 순간들이 더 괴로웠으나 이 경험은 세상이 종말을 맞을 때처럼 생명체가 전멸하고 나만 살아남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거리와 시간과 속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렸고 산 위에서 내려다본 땅은 너무나 까마득했으니까. 주유를 알리는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 도움 줄 지나는 차가 앞뒤로 한 대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부옇게 서린 안개로 뒤덮인 희미한 산 위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처음에는 만만했다. 심상찮은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시대와 사건과 공기와 추억담과 진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쓴 이야기라는 『소년이 온다』가 여느 소설들처럼 급히 왔다 떠나갈 썰물같을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억울하게 소중한 이들을 떠날 수밖에 없던 그들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돌 때 이게 내게 내려진 형벌이구나 싶었다. 산 위에서 귀신이나 괴물이 나타날까 두려웠던 그 순간, 아빠가 귀신이나 짐승보다 사람이 나타나는 게 더 무서울 거란 말이 위로가 되었던가. 여전히 무서웠으니 그 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소년이 오는 건 전혀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을 만큼 컸는데 소년은 내게 오는 길을 모른다. 소년이 내게 오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작가는 자주 이야기가 왔기에 그 이야기를 받아쓰기만 하면 됐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강 작가에게는 계속 소년이 찾아오고 또 왔던 게 아닐까. 그녀에게는 오고 내게는 오지 않는 어떤 소년이 있다. 소년이 아는 진실을 우리는 모르고, 우리가 모르고 싶어하는 것을 소년이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 소년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지만 내 비겁과 폭소와 무력과 무능이 들킬까봐 괴롭다. 그날 이후 소년은 가끔 나를 왔다 가고 나는 매일 소년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기 전과 후로 세상을 나눈다면 예로 들 수 있을 경험이다.

 

 

또다른 시를 읽는다. 여자의 오롯한 생이 몇 줄 안에 있다. 긴 세월, 광활한 시공간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 펼쳐져 인생을 아는 그녀와 모르는 나 아니, 다 살아버린 그녀와 덜 살아낸 나 사이에 파티션을 쌓는다. 31일이 1일과는 전혀 다른 날인 것처럼, 매월 마지막 날이 되면 비로소 페이퍼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제와 다른 오늘을 예상할 수 없고 들키지 않고 금기를 깨버려도 괜찮을 비밀스런 파티션을.

 

몸의 절반이 봄으로 건너가지 못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왼쪽은 가로등을 꺼버린 골목길이다 모세혈관마저 캄캄하게 돌아 나오는 길을 잊었으므로 그곳엔 지금 처음 남자에게 안겼을 때의 체온과 첫 입술이 서성이고 있다 심장도 쿵쾅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누군가 왼쪽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끊어버렸으므로 그곳엔 녹지 않는 눈과 시어머니, 남편 딸들이 나란히 눕던 단칸방이 있다 선산으로 시댁으로 떠나보낸 상여와 가마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은 예순세 번째 봄이지만 왼편은 먼저 간 남편에게 세를 내준 것 같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아니 왼쪽이 먼저 가서 함께 누운 것 같다 절반은 잔설이고 절반은 새 잎인 연옥의 하루, 오른쪽 절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왼쪽이어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우익이다 지난 번 다녀간 딸이 해준 눈썹 문신만 사철 푸르다 이제 아이라인도 그릴 필요 없어, 딸 덕분에 왼쪽 절반에도 자랑처럼 무성하게 돋아난 그런 풀이다

 

<환절기>, 권혁웅

 

 

궁금하다. 절반은 어디 있고 또 절반은 어디 있는지. 남은 절반이 거짓이라면 숨겨진 절반이 진실이 맞는지. 처음은 어디고 끝은 또 어딘지. 그리움과 후련함 뒤엔 뭐가 있는지. 나무와 여자와 사랑과 불안은 뒤에 무엇을 숨기는지. 세상은 궁금한 것 투성이고, 나는 이 불확실한 성을 손 잡고 통과할 것들이 필요하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소설이든 이야기든 그림이든 기쁨이든 감동이든 슬픔이든 간절함이든 미련이든 매혹이든. 예쁜 옷이든 돈이든 나무든 꽃이든 멍멍이든 순대국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별이든 빛이든 순수든 일탈이든 그 무엇도 아니라면 어쩌면 일상의 유니크함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슬프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운 지금은 새로 시작할 책이 제발트의 첫 소설이라는 것만이 커다란 위안이다. 몇 개 덧붙이자면 금요일이고, 차가 생겼고, 고속도로를 달려 휴게소 핫바와 어묵을 먹은 뒤 백사장에서 별과 야경을 보고 파도소리를 들을 예정이라는 것, 집에 돌아와 떡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매운 떡볶이와 맥주를 마실 예정인 것. 이불 속에 우리 둘 뿐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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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4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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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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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0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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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1 1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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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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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7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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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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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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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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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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