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출판계 결산을 보면 연말 이전 몇개월간 (평소 같은 기간 혹은 다른 시기(때)에 비해) 문학이 덜 팔렸다고 한다. 나는 문학이 읽는 감수성뿐만 아니라 소화하는 감수성도 있다고 여긴다. 읽는 일은 감정이입으로 가능하지만 리뷰 쓰는 일은 원래 가진 배경 지식과 배경 감수성에 크게 구애 받는다고. 많이 팔렸으면 덜 읽혔을 수도 있지만 덜 팔린 게 많이 읽혔을 리 없으니 결국 문학의 침체기라고 진단하더라. 문득 정말 진한 문학 같은 문학을 읽고 싶어서 그럴때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고르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는지 선뜻 떠올릴 수 없어 급하게 이북을 결제해 『카인』을 읽었다. 사라마구는 몇 번 시도한 작품들이 있지만 끝을 보지 못한 탓인지 기억에 없다. 제목만 카인인 줄 알았는데 정말 카인(이 구약성경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사라마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타이틀로 열심히 홍보중이지만 사라마구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 이 소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진심이다. 건조하지만 단호한 문체는 훌륭하지만 소재에 비해 구성이나 이야기하는 방식에 아쉬운 점이 있다. 어쨌거나 책 읽기는 이어져야 하는 법. 진지하게 읽는 사라마구 두번째 작품은 지난해부터 쭉 마음으로만 읽는 중인 『수도원의 비망록』이다. 다른 작품 두 권도 집에 있으니 올해 가진 책들을 읽을 예정이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사실 길게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나로선 아주 적거나 거의 없다. 아담과 하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이삭 살해(하려는) 현장. 구약을 관통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들을 따라 여행하는 카인과 도시의 여주인이자 모든 것을 삼킬 정도의 힘을 지닌 마녀 릴리스Lilith(아담이 하와와 결혼하기 전의 부인과 이름이 같음)와의 정력적인 사랑의 현장을 교차시킨다. 가진 것 없이 떠도는 흙바닥 밟는 노예였던 카인이 여주인의 안방 침실에서 여러날 보낼 수 있던 이유도 넘치는 정력과 서투름 혹은 비리듬감 때문이다. 젊고 쫓기고 급하고 서툴고 위험한 남자만큼 황홀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카인』은 구약의 여호와의 시험을 그대로 따르며 인간의 잘못과 죄를 묻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모든 죄는 인간이 저질러놓고 어째서 문제만 생기면 (인간을 만든) 신을 탓하는가 하고.

 

 

 

 

 

 

 

 

 

 

 

 

 

 

 

『색맹의 섬』은 세 번째 읽는 올리버 색스의 책이고, 이제 이 세상에 그가 없다는 걸 알고 읽는 첫 번째 책이다. 색스(주제와 글쓰기)에게 홀딱 반한 첫 번째 경험이기도 하다. 앞서 두 권을 읽을 땐 어떤 의무감에서 읽었고, 서로 다른 주제임에도 그의 주제와 글쓰기가 겹친다는 생각에 다시 읽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다시 읽을 날이 오리라는 사실도 알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거나 침대에서 자신의 다리를 주웠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한 권 더 읽어보려는 건 오로지 '섬'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있으며 하필 지금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색스는 편두통을 앓던 어린 시절 색각 이상 현상에 종종 시달리며 평생 색깔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색맹의 섬에 대한 존재를 듣게 됐다면 의학적 연구나 개인적인 호기심에 전율했대도 충분히 이해한다. 누군들 그 섬에 가고 싶지 않을까.

 

우연한 기회에 이룬 여행의 시작은 핀지랩(Pingelap)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 선천성 전색맹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런저런 장애가 되는 사항들을 모조리 뛰어넘은 후에야 가능했다. 사실 온 색깔이 다 보이는 시각으로 색맹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다만 느낄 뿐이다. 조심스럽게 느낀 바를 말해보자면 색맹은 단순히 색을 구별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을 넘어서는 것 같다. 상상이 잘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일러스트 가득한 예쁜 책을 펄럭이며 여행/관찰/연구 등 일석무한조를 체험한다.

 

남태평양 오지 열대섬으로 떠난 두번의 미크로네시아 여행을 기록한 책이다. 제한구역이 많아 허가받은 군인 외에는 제대로 내릴 수도 없는 섬들을 지나쳐간다. 핵실험이 이뤄지고 죽은 땅이 된 곳이 있는 반면, 아름다운 열대섬의 풍광과 동식물이 그대로 보존되는 곳도 있다. 무한한 섬에 대한 열망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도중 불시착하는 섬만 여러 개-그곳에서의 황홀한 이야기들은 덤. 핀지랩은 어떻게 한때 원주민 전체의 1/3이 전색맹을 앓는 섬이 되었나. 1775년 기록적인 태풍 탓으로 인구 대부분이 죽고 극소수가 살아남은 고립된 섬에서 적은 인구가 오랫동안 근친혼을 이어가다보니 부작용으로 마스쿤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섬 바깥 세상보다 훨씬 많아졌다. 자연이 내려준 보석같은 땅이자 섬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만지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흑백으로만 나뉘는 빛깔 없는 세계는 아픔과 기적과 감동이 함께 한다. 찌릿하면서도 황홀한 섬 여행기는 여행의 최종목표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조정하게 만든다. 괌도 팔라우도 피지도 나우루도 아닌 내 지도에도 없던 미크로네시아라니. 『색맹의 섬』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서 언제까지라도 말할 수 있다.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소재거리들이 여럿 보이지만 배경의 특수성이나 윤리적으로 생각할거리를 던지는 솜씨로 보면 분명 보존과 보호, 유지와 변화에 관한 눈부신 수작이다. 제약회사인 '보걸'사社는 사장 폭스의 주도 하에 브라질 아마존 밀림으로 과학자를 파견해 신약 개발을 후원하고 있다. 비용을 대는 입장에서 애닉 스웬슨 박사의 팀과 쉽게 연락이 닿지 않아 초조한 중에, 현지 개발 사정을 알기 위해 평소 호기심 많고 성실한 연구원 앤더스 에크먼을 파견한다. 폭스가 연구원이자 연인인 머리나에게 동료 앤더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머리나와 안면있는 앤더스의 아내 캐런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 편지 속엔 아프거나 위험하다는 얘기가 하나도 없었다고, 왜 죽었는지, 어디 있는지 알기 원한다며 머리나를 재촉하고, 폭스는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앤더스 후임으로 머리나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여곡절끝에 스웬슨 교수와 만나지만 앤더스의 죽음은 사실과 달랐다.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이 사는 열대 우림으로 안내하는 것만으로 이 소설은 신비의 옷을 입는다. 식인 부족이 사는 강 옆 지류에 위치한 라카시족 마을이 스웬슨 박사의 관찰 대상이다. 라카시 여성에게는 폐경이 훨씬 지난 시기, 즉 아무리 늙은 여자라도 죽기 전까지 생식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생산은 하되 양육은 손주들 몫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선 일흔 여성이 배가 부른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현대 여성의 불임과 임신 시기, 임신 연장에 관한 약물을 만드려는 게 그들의 목표다. 소설은 지루하게 연구 목표나 타당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과학자들이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채로 고립돼 살아가는 라카시족에 동화되는 과정, 풍속과 삶에 대한 간섭과 개입의 영역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펼쳐놓는다.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의사다(적어도 의학 교육을 받았거나 의학 지식을 가졌다). 부족인의 생명이 위독할 때 문명 사회에서 하던 대로 의사 역할을 할 경우, 사람을 살릴 확률이 높지만 그들이 사람을 살릴 줄 아는 의사인 걸 알게 된 토착민들이 과학자들을 가만히 둘까. 단지 연구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연구/관찰 종료 후 과학자들이 마을을 떠나면 남은 이들은 생명이 위독한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이제껏 아픈 사람에게 통했던 방식, 치료법, 치료하는 사람의 위신이나 믿음이 이전과 똑같이 유지될 수 있을까. 외부 사람들이 오기 전에 부족민에게는 나름의 처방과 처치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 있었고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지혜와 풍속이 있었다. 외부인이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거나 개입자가 된다면 부족 마을의 질서는 흐트러지거나 지속되지 못할 게 뻔하다.

 

모든 인물이 제자리에서 확고하게 두드러진다. 이스터라는 귀여운 원시부족 꼬마, 귀머거리 꼬마. 오늘을 기준으로 앞뒤 육개월씩 잡아도 전무후무한 귀요미 캐릭터를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앤 패칫이라는 작가를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 스토리상의 허점과 구성상 아쉬움을 보충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거짓말이지만 괜찮다, 이스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건 나중에 염려하고 지금은 지구 반대편 끝 어딘가 살고 있는 고집스럽고 영리하면서 자연친화적인 사람들을 생각하겠다. 이스터를 여기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꼭 끌어안은 채 해먹에서 하룻밤 함께 자고 싶은 이스터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어디 못 가게 신발 숨기는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이 귀엽고 영리한 꼬마는 누군가의 물건들을 제 상자 안에 감추며 앤더스가 인내와 사랑으로 가르친 알파벳을 공부하며 때로 제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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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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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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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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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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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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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5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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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동품 상점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평생 불 곁에서 살아온 어떤 이에게 불은 이러한 존재다. '내 인생 전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뭘했을까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 밤.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으며 연말연시를 흘려보냈다. 매일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인데 찰스 디킨스라고 별다를 게 있을 리 없다. 영화 몇 편쯤 보고 싶어 목록을 정해뒀다. 이건 늘 하는 일이고, 지금 내 상태는 독서에 최적화 되어있다. 대신 다른 걸 했다. 밀린 빨간책방을 좀 듣고 밀린 애인있어요를 좀 보고 뭐 이것저것 신경 안 써도 될 것들을 신경썼다. 계획대로라면 크리스마스에 끝냈어야 했다. 성냥팔이 소녀 다음으로 크리스마스에 가장 어울리는 소녀 넬(넬리)의 파란만장史.

"불은 내게 책과 같단다." 그가 말했다. "읽는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또 그것은 음악이기도 한단다. 나는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타오르는 불은 자신의 함성 속에 또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 불은 자신의 초상화도 지녔단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에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불은 나의 추억이기도 하단다. 불은 내 인생 전체를 보여 주거든." (442)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하층민으로 대표되는) 빈곤과 가난, 악의와 선의, 순수와 타락의 대비를 융단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읽는다. 꽤 두꺼운데 무겁기까지 해서 얼른 끝내고 싶었는데 의외로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넬의 생사를 묻는 뉴욕 부둣가 얘기가 책 뒷표지에 실려있는데, 정말 그랬다. 유일하게 해리 포터를 떠올리게 하는 겨울 주인공. 소녀는 따뜻한 이불 속 부모 품 안의 행운을 누리지 못했지만 순수와 타락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어른들에게 큰 빛을 주고 갔을 것이다. 주요배경일 줄 알았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이 아주 잠깐 등장하고, 넬과 할아버지의 떠돌이 생활 중 만나는 모든 인물은 삶의 다양한 인간군상의 소재로 변신한다. 인형극단, 밀랍 인형 전시 마차의 부인, 도시 속의 화부, 선원, 작은 시골 마을의 교장. 만남과 헤어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인연들. 영영 날이 밝아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에게 주어진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순수한 키트(의 가족들)와 넬로 대표되는 선한 사람들/ 퀼프처럼 뼛속까지 악당인 사람/ 프레드와 스위블러처럼 힘겨운 삶에 적응하려다 실패하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 디킨스다운 인간군상이라 비교적 쉽게 선악이 구별된다. 아이라서 순수한 게 아니라 무언가 지켜낼 것이 있기에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쓰는 법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간절했던 할아버지가 실수를 하는 것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키트가 끝내 쉬운 길(악의 무리)과 타협하지 않는 것도 다 거룩한 동시에 마음이 아리다.

가족 간의 사랑과 애정이 고귀한 것이라면 가난 속에서도 그러한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살펴보기로 하자. 부자와 잘난 사람들의 유대는 세상이 만들어 주지만 가난한 자와 초라한 가정의 유대는 진실의 고리와 하늘이 맺어 준다. 아마도 좋은 가문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권력의 노획품과도 같은 주택과 토지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들에 대한 그의 연계는 자부심, 부, 승리의 연계인 반면, 가난한 사람이 과거에도 누군가가 살았고 내일이면 또 다른 누군가가 살게 될 공동주택에 갖는 애착은 그저 순수한 땅이라는 것에 더 깊은 뿌리를 둔다. 그의 가재도구는 은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여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피와 살 같은 것이고, 재산은 없지만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해진 옷을 입고 고된 노역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빈약한 식사와 초라한 바닥과 벽을 감내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받은 집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로써 보잘것없는 집은 신성한 장소로 거듭나게 된다. (378-379)

 

왜 그렇게 밤 거리를 걷는 게 좋았을까. 캄캄한 방에 북라이트 불빛 하나 밝힌 이불 속에서 자세를 바꿔가며 찰스 디킨스를 읽는 일은 19세기 어둑어둑한 거리를 정처없이 무작정 걸어다니는 일과 같았다. 길을 잃은 상태에서 시간조차 어림짐작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앞도뒤도 캄캄한 그 거리를 말도 못하게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인생의 마지막에나 겨우 맛볼 수 있을 열매를 한꺼번에 먹어버리는. 넬의 짧은 인생이 그토록 풍부했던 것도 작은 숙녀가 가진 무한한 긍정 에너지와 넘칠 만큼 가졌던 순수의 샘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홀로 빛나던 찬란한 마음과 눈동자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해 마지막날이 되어서도 결코 갖지 못한. 넬과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극중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 이 아름다운 비극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에 사는 넬이 심부름 갔다 길을 잃고 도움을 청해올 때, 그는 다만 밤과 산책과 도심의 불빛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다. 돋보기를 가져다대고 보는 일과 멀리서 보는 일 중에 무엇이 더 옳고 어느 편이 더 아름다운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밤은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여름이면 나는 이른 아침에 외출해서 온종일 들판과 시골 길을 거닐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집을 떠나 있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에 머물 때를 제외하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늘에 감사할 일이지만, 나는 도심의 불빛과 거리에 쏟아지는 그 빛의 경쾌함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

 

건강에도 좋은 뿐만 아니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성격과 직업을 마음껏 추측할 수 있어서 밤 산책은 어느새 내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대낮의 눈부심과 분주함은 나처럼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햇빛에 훤히 드러나는 얼굴보다는 가로등이나 상점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행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면 편이 내 목적에 알맞다. 그리고 솔직히 상상의 세계가 완성되려는 순간에 여지없이 그것을 무너뜨려버리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12)

 

독서의 양보다는 질이라고 늘 말하면서 독서 계획 어딘가에 꼭 붙잡고 놓지 못하던 다독이라는 결심은 디킨스의 글 앞에서 아름다운 몽상 따위로 행해봐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다. 좋지 않은 시대에 사는 삶은 온몸으로 부딪쳐도 겨우 돌멩이 하나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2016년 첫 책은 시작이라는 거룩한 단어 앞에서만 의미가 있다. 매일 눈을 뜨며 시작이란 걸 하는 이에게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다. 무지개 스펙트럼 사이에 가시적 경계가 없듯 그날 밤 열두시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하루를 더 살고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읽은 책이 더 늘어나고 그리고. 한참 걷던 빅토리아 시대 런던과 지방 도시들,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사연들에 감사한다. 써먹을 수 있는 지혜가 하나 더 생겼겠지. 버릴 수 없는/오래된 습관 같았던 책으로 걷기는 이제 책에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주는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시간을 내어주는 데 무척 인색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게 별 거 아니듯. 다시 한번, 내가 책을 읽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얼 하고 있을까. 크리스마스에 닫아야 할 문을 이제서야 닫게 된다. 새해 첫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직 닫지 못한 문과 보내지 못한 손님. 되도록이면 모두 비우고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나는 끝내 이 애처로움과 안쓰러움, 먹먹함을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나선다.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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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01-0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넬이 할아버지와 여기저기 다닌다는 말을 보니 <집 없는 소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만화영화로 봐서 다 생각나지 않지만,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거기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에는 괜찮아졌는지, 그건 잘 모르겠군요 예전에 한 만화영화(원작은 소설일지도 모르겠지만)에 슬픈 것도 있네요 어쩌면 비슷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여서 순수한 게 아니다, 가진 게 없고 어려도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잘 알았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키트도... 힘들게 산다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때는 더 많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요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나쁜 사람도 있었겠지만...

책으로 걷기, 어쩐지 멋진 말입니다 여기 조금 쓴 책 속 글을 보니 이 책은 천천히 걷듯이 봐야 할 듯하네요 넬과 할아버지를 따라서...


희선

아이리시스 2016-01-06 19:32   좋아요 0 | URL
희선님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때도 그랬고 이 댓글도 그렇고 정말이에요. 아마 제 글을 꼼꼼히 읽어주셨고 또 원래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일테죠, 새해 복 많이 받으셨죠? 벌써 새해도 한 주가 지나가는데 계획같은 건 더이상 세밀하게 세우지 않지만 몇 가지가 있는데 하루하루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게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데일리 다이어리에 한줄 쓰면 적을 게 없는 그런 거 말고. 아님 일기라도 써서 채우기로..( ˝) 체력이 약해서 빨리 심하게 지치는데 그래서 잠도 많이 자거든요. 잠도 좀 줄이고 책을 더 읽어도 좋고 전문분야 다큐를 좀 더 많이 보고 에세이를 써보고 또 정리 잘하고 버릴 건 미련없이 버리는 거. 새해에 비싼 향초를 샀어요. 원래 여기엔 돈을 안 썼을텐데, 꾀임에 넘어갔습니다-_-

매일 밤 켜고 은은한 불빛과 진한(!) 향을 느끼는데 독서할 정도로 밝은 빛은 못 되고요(다섯 개 정도 켜면 모를까@.@), 스탠드나 라이트를 따로 켜지만 세상이 더 고요하고 정적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거기도 춥나요? 날이 며칠 째 되게 춥네요. 이것도 느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해요 :)

cyrus 2016-01-0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라서 한때 이 책을 꼭 구하고 싶었어요. 알라딘 중고매장에 이 책이 있는 걸 알고 당장 가게로 갔는데, 다른 손님이 먼저 구입하는 바람에 허탕 친 적도 있어요. 이 책이 다시 나와서 다행이네요. 세련된 표지가 마음에 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아이리시스 2016-01-06 19:36   좋아요 0 | URL
중고매장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책이 생각외로 빨리 팔리는 싸이클을 가진 것 같아요. 저는 몇 년 째 보지 않은 책이라 몇 주 전에 팔러 갔는데 제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대부분의 책이 팔린 것 같더라고요. 초신간은 아니지만 몇 년 내에 나온 책이었으니 당연한 거였을까요? 중고매장에 오래된 책들도 많으니까요. 저는 오프 매장에서 책을 사보지는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책을 잘 안 사는 요즘 온라인 중고도 마찬가지네요. 어제 <히틀러1> 문자오던데 그걸 사고 싶어서 등록할 때와 지금의 마음이 참 다른 거 같아요. cyrus님도 곧 읽으시면 될테고, 저도 인사 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지금처럼 자주 좋은 글 올려주시고, 건강하세요. 올해도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요~^^

kgn0122 2016-01-09 14:04   좋아요 1 | URL
오해가 있으실 것 같아 답글 남깁니다. cyrus님께서 보신 책은 아마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골동품 가게 이야기>일 겁니다. 그 책은 100페이지 남짓한 이 책(오래된 골동품 상점)의 다이제스트판을 번역해 놓은 책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 다른 책이죠. 내용도 맞지 않고.

cyrus 2016-01-09 16:29   좋아요 0 | URL
To. kgn0122 // 그렇군요. 제가 말한 절판본은 완역이 아니었군요.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책을 샀으면 낭패였군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01-07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로운 길을 내고 싶지만 항상 마음보다 책이 더 많이 남아서 늘 그게그거인듯한, 실제로 늘 그게그거인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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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스릴러를 읽는 목적을 어디에 두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그외의것들에 비해 훨씬 불편하고 보기 어렵다. 둘 다 전형적인 스릴러라면 <인 어 다크, 다크 우드>보다는 내 스타일이지만 어린 형제와 다정하고 정의로운 선생님 외에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형사 상사와 여형사 후배라는 공식도 식상하고, 형사의 가족에 미치는 범죄행위도 뻔하고, 여형사가 개인적 이유로 형사를 관뒀는데 상사가 다시 설득해서 데려와 수사에 참여시키는 모든것들이 평범했다. 마지막에 나오는 안도의 한숨만은 진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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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J. 더글러스 지음, 이은경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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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12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05월 24일에 저장

매스컴이 다루는 대부분의 여성을 성차별의 관점에서 훑을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이거나 설득적이지 않다. 젠더 프레임을 만든 게 매체일까, 아니면 사회적 인식이 먼저였을까. 후자라면 매체는 책임을 덜 수 있으나 미래를 향한 도전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한없는 약자, 여성. 나는 내 성을 약자라고 부르짖는 무리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길들지 않고 맞서는 용기를 내는 이들에 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 / 예담 / 2016년 6월
13,800원 → 12,420원(10%할인) / 마일리지 6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08월 05일에 저장

아무 사건이 없다. 복잡한 척하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게 엮여 싱겁게 풀려버리는 고리들, 공감 안 되는 캐릭터, 매력적인 분위기를 구축해놓고도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점에도 불구하고 여자들만이 이해하는 미묘한 질투와 시기가 낯선 장소에서 어떻게 촉발될지 궁금했기에 읽었지만 단 한순간도 흥미롭지 않았다. 기대가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었다. 부탁인데, 여자들아, 남자한테 매달려 살지 좀 말자. 피곤하다, 진짜.
여행자의 독서 두번째 이야기-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15,800원 → 14,220원(10%할인) / 마일리지 7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07월 26일에 저장

여행과 독서, 별 특이할것도 없는 이제는 식상한 아이템인데도 늘 설렌다. 나만의 여행과 독서를 새롭게 쌓아올리고 싶은, 지금껏 이룩한 독서를 헤쳐 무너뜨려도 전혀 아쉽지 않고 고마운. 가장 좋은 책이라도 나를 자극하지 않으면 죽은 책일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한다, 늘은 아니다. 나는 늘 실용적이거나 민첩하지는 않다. 아무리 사회 이슈에 발빠르다고 해도 아는것만 백날 읽어봐야 뭐할건데, 익숙해진 목록 속에 자주 묻는다. 그런데 여행과 독서가 겹쳐지고 이 저자의 이름이 보이면 다시 똑같은 길이 반복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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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고 싶은 책은 『나누어진 하늘』인데 얇은데다 한번 읽다만 전력이 있기에 『몸앓이』를 읽게 됐다. 마음과 달리 한번에 읽히지 않아서 한숨 푹푹 나는 문체를 갖고 있고, 내용마저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은 스타일로 전개된다. 개인적으로 독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하의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나 강제수용소 관련 문학만을 요구하거나 관심둔 것 같다. 배경을 지우고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든 독일 작품이 선뜻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1929년생 볼프는 분단 독일의 동구권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그녀의 생을 관통한 국가와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배경이 그녀의 문학과 삶을 떠받친다고 해도 맞다. 2002년 출간된 『몸앓이』는 몸을 앓는 주인공을 통해 사회구조의 모순과 병든 사회/국가를 은유한다. 몸과 국가를 유기체로 생각하고, 아픈 팔다리를 떼어내듯 사회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바꿔 말하면 몸이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도 그래서 하나가 고장나거나 흔들리거나 잘못되면 다른 것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 문화(문학/예술)가 필요하다는 게 볼프의 문학적 주장이다. 응집된 문장과 압축된 시어는 진도를 막기도 하지만 독일 특유 진지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몸의 치유가 사회악의 사라짐이라는 무조건적인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건 거짓이니까. 대신 아픈 몸을 고치듯 아픈 정신을 문학과 예술적 성취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고도로 응축된 주제가 얇디얇은 한권의 책에서 빛을 발하는 중이다. 볼프의 작품세계를 그녀의 배경과 놓고 이해하면 1963년 쓰여진 『나누어진 하늘』도 얼마든지 추측가능하다. 몸은 앓고, 하늘은 나누어지고. 몸과 하늘은 두 개가 아닌데 이런 비극이 또 어디. 다만 분량이 길고 분단 현실의 사랑과 노동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시대에 처한 개인의 비극을 짙게 보여준다는 점에 의할 때. 이런 볼프가 환상(신화)소설을 썼다는 데 한번 더 놀라는 데서 fade out.

 

 

 

 

 

 

 

 

 

 

 

 

2. 찰스 디킨스는 1800년대를 살았다. 생몰연대가 1812년~1870년인 디킨스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이미 갔는데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읽히며 우리를 울리는 건 세상이 200여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똑같거나 사람의 삶이라는 게 비슷해서일 것이다. 디킨스는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라고 생각하면서 여태껏 못 읽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황폐한 집』도 그렇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산업혁명기 밑바닥(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일텐데 바로 그 이유로 디킨스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의 사실주의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없는 것처럼, 스탕달을 또 그렇게까지 애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뭘 또 그렇게 뒤집어서 탈탈 털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디킨스 읽기 자세에 스스로 아쉬운 점이 있어서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더 진지하게 읽으려 했다. 예전엔 몰랐던 디킨스의 매력을 하나라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디킨스의 매력이 내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걸로 한탄하긴 싫지만 두껍긴 두껍다. 지금 이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3. 『나흘』을 좋아하고ㅡ 『등대』를 좋아한다. 인물들이 팔딱거리고 비극적 우리 역사가 획을 긋고 지나가면 이상하게 내 일처럼 가슴이 아리다. 누군가는 나빴고 누군가는 착했는데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화를 입는다. 기억나지 않는(모르는)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얘기인지도 모르고 옆집 할머니의 어머니 삶인지도 모르고. 두 소설은 애틋한 기억으로 마음안에 남아있고, 두번 세번 읽어 그 기억을 건드리지 않는 한 아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검은 모래』, 『불타는 섬』, 『비밀정원』/ 『나라 없는 나라』,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목등일기』도 작든크든 멀게든가깝게든 우리 역사와 역사 속 개인들을 건드린다. 근래 몇 년간 내가 읽은 한국소설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장치한 메타포가 난무하는 젊은 작가들의 기대작들은 멀리 하고, 문체의 서정성이 빛나거나 역사라는 아픈 비극이 중도에 놓이거나 차라리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중견작가들이 공모전을 통해 수상한 작품들을 읽었다. 어쩌면 취향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는 이제 한국문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취향은 변하는 법이고 나는 더 변덕스러우니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국 문단은 오래도록 문체 중심주의였다. 문체는 능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글쓰기는 자꾸 읽고 쓰면 나아지지만 문체는 거의 타고난다. 스토리가 강한 작품이 문체까지 갖추기는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주위적-예비적 청구의 병합같은 거지만 늘 동시에 요구당한다. 둘다 만족시키면 가장 좋겠지만. 문체가 생각만큼 세련되지 못하다 해도 결국 공부와 연구를 토대로 스토리텔링이 강화된 이 소설들이 미래 한국 문단 한 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단 권력은 이렇게 등단한 작가들을 아직 좋아하지 않는 듯하지만, 독자가 읽어야 이들이 강해진다. 정치인이 뭘 해보여야 표를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끔은 어이없다. 유권자가 표를 줘야 그사람이 힘을 갖고 무언가를 해보일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어쨌거나 문단 물줄기도 이제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스토리텔링/문체/장르 등으로 좀 세분화되어 발전했으면 좋겠다. 싹도 나기 전에 끊고 뭉개고 돌덩이같은 기준을 정해놓은 채 끼워맞춰 판단하는 버릇 좀 버리고. 책이란 건 상품으로 만드는 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어줘야 의미가 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이 반드시 내게 백퍼센트일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경험과 사유와 고통과 노력으로 채워가도 된다.

 

 

 

 

 

 

 

 

 

 

 

 

 

4.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읽고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나를 보내지 마』를 다시 읽고 싶어졌는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내용이 많이 상쇄된 두 작품을 정리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정리해도 되겠다는 정리벽에서 나온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이었다. 이제 이시구로의 삼부작 옆줄에 당연하고 완벽하게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자신있게 놓는다. 여행과 회상의 형식을 통해 기막힌 모험/추리, 환상 소설을 탄생시킨 한결같음이 이 작가의 무기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제목은 '우리는 모두 부모가 된다'로 바꿔서 부모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만들고, 『파묻힌 거인』은 그게 뭐든 파내야 한다고 속삭인다. 몰라서 평온한 진실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파봐야 안다는 게 내 생각. 파헤쳐서 파묻을 것만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묻어야 한다,

 

이 작가를 완전히 안다는 생각이 들고나자, 오래 전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 이상 세 편)을 읽고 싶다. 연관이 없어보임에도 무의식이 그 관련을 자꾸 들먹인다. 그러나 다시 건드리는 게 독배일지 만찬일지 모르고 있다.

 

 

 

 

 

 

 

 

 

 

 

 

 

5. 『어떤 날들』, 『비밀의 계절』, 『사형수가 된 여자』,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모두 누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순문학 안에서 범죄가 다루어지는 경우로, 한 권 더, 앨런 에스킨스의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초반부를 더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 후반부는 여느 범죄스릴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가므로 주의깊게 비교해야 한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 가계도이긴 하지만 분명 스톤이라는 여자의 한평생을 놀라운 장면전환으로 그려내며, 『돌의 연대기』와 『사랑, 판타지아』를 관통하는 건 알바니아 민중의 삶과 알제리 전투 하의 생활상이다. 따를 주인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점과 이야기 구조가 퍼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관성을 가진 점이 조금 닮았다. 『비밀의 계절』에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튀는(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친구를 배제하거나 따돌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착되는 범죄, 이 범죄는 누군가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누군가를 내모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불안하고 뒤틀린 청춘을 표현했다기에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나쁜 광기에 불과할 뿐 청춘이라는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빛나는 추억의 단면이 아닌 것 같다.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사형제도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일면있는 여러 가족들이 별장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다가 벌어진 어느 사건으로 서로가 서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데, 사건 불해결로 인해 촉발된 다른 사건이 죄 없는 사형수를 사형집행해버린 상황이 된다. 누군가는 덮어주려 하고 진실은 수면 위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즈음 내가 읽던 『스톤 다이어리』와 함께 읽고 싶다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기대에 부응하는 줄거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어떤 일로 사형수가 된 여자가 있는데 피해자 엄마가 사형시키면 안 된다는 민원을 끊임없이 넣으며 여자를 구출하려는 순간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순간의 벌 대신 살아있는 고통으로 갚으라는 피해자 가족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가장 최근 읽은 『파란 실타래』는 대가족의 연대기이자 가족간 애증의 에피소드로 똘똘 뭉쳐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가족이 되기 전의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타인이었고, 아이가 없었을적의 부모는 이후 태어난 자녀가 모르는 모습이다. 단순한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몰랐거나 알 수 없었던 시절을 수채화처럼 차곡차곡 펼쳐놓는다. 앤 타일러는 처음인데 일상 속 작은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터뜨리는 듯 폭발하는 잔잔함이 매력적이다. 『황금방울새』 포함 (**)권(생각나는 책 추가중)은  리뷰를 남기고 싶은데, 언젠가 써야할텐데, 그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 쓰다보니 에피소드도 아니고 11번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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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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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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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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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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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1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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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0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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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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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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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4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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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8-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랍니다.
이번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면서,
BBC에서 공들여 만든 드라마의 일부 영상들을 봤는데,
전체 15부작을 한꺼번에 좌악~ 살펴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아쉽더군요.^^
https://youtu.be/WyMY83Qyzws

아이리시스 2020-08-28 22:13   좋아요 1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독서랑 조금 먼 일상중이지만 저도 한번 볼게요!^^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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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결정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로레트? 얇디얇은 층이 쌓이고, 매달 원자 수천 개가 쌓이지. 차곡차곡. 천년이 흐르고 또 천년이 흐르지. 이야기가 부풀려지는 것도 마찬가지야. 오래된 돌들엔 하나같이 이야기가 쌓인단다.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그 작은 돌멩이는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하는 걸 봤을지도 몰라. 그 돌멩이는 파라오의 눈 속에서 반짝였을지도 몰라. 스키타이의 여왕들이 그 돌멩이를 몸에 달고 밤새도록 춤을 췄는지도 모르지. 그 돌을 차지하려고 전쟁이 몇 번이나 일어났을지도 모르고." (1권, p86)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은 배워야만 경험가능한 극한의 세계다. 겪지 않고도 알 수 있거나 안다고 말한다면 그건 어느 정도는 허영이라고 생각한다. 겪지 않고 전쟁에 대해 대체 뭘 알 수 있을까. 베르너와 마리로르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딱 한번 만난다. 하지만 하루가 영원이 되었고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내내 같이 있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은 예상도 한계도 뛰어넘는다. 소설의 배경은 넓게 보면 2차대전 중이고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다룬다. 공간은 사실 큰 의미없다. 어디에나 폭격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숨고 도망치기 때문이다. 뒤죽박죽인 챕터 연도가 혼란스럽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의미없는 이유도 전쟁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의 이유-원인과 결과를 넘어서는 장엄한 서사. 이후 1970년대 한번, 2014년이 한번 나온다. 작가로서 필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20세기 최대 전쟁을 고작 스물도 되기 전에 겪고 한 세기 가까이 고향이나 고향을 떠나 살아남은 이들의 지금을 조명하는 건 이야기를 만드는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을 사는 사람은 무엇이 되어야 하며 또 무엇이 될 수가 있나. 엄마를 잃고 아빠와 둘이 프랑스에 사는 마리는 유전병으로 여섯살부터 시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다가 열여섯살 전쟁 즈음해서는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소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파리 박물관에서 자물쇠 보관 담당으로 일하며 딸에게 점자책을 사주기 위해 착실히 돈을 모은다. 아무도 더 큰 것을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지도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러는 통에 전쟁은 소리 없이 그들 곁을 맴돌며 일상과 시간을 갉아먹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일단 시작된 이상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공간. 앞을 보지 못하는 딸을 업고 이 시국을 견뎌나가야 하는 마리의 아버지는 전쟁이 심해지자 관장의 명령을 받고 네 개의 다이아몬드(진짜는 단 하나이며 누구에게 할당된지 모름) 중 하나를 들고 무작정 피난하지만 계획된 안전에 닿지 못한 채 작은 섬으로 이뤄진 성벽도시 생말로에 있는 마리의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의 집에 머물게 된다. 누가 알았을까. 이토록 긴 시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줄. 다시는 평범한 삶을 가질 수 없음을.

 

독일에 사는 베르너는 유타라는 귀엽고 영특한 여동생과 고아원에 산다. 전쟁으로 고아가 됐는지 원래부터 고아였는지 중요하지 않지만 잘 모르겠다(나왔었나). 이 독일 소년의 취미이자 특기는 고장난 라디오 수리로, 나중에 이 재능 때문에 여러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베르너와 유타는 매일밤 우연히 갖은 허름한 라디오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죽인 세월을 견딘다. 둘은 둘만이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옥탑방, 지하실, 2층 침대. 삶은 늘 가장 아래 아니면 맨 밑에서 이루어진다. 베르너가 히틀러 유겐트가 되어 국가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남매의 삶은 부모 없음만 빼놓고 다른 아이들과 비슷했다. 이즈음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던 독일은 타국 전파를 자국민이 듣지 못하게 강력단속하고 지레 겁먹은 베르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민한 유타는 지금 조국이 국민에게 알리는 소식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다름을 안다. 몰래 듣는 프랑스 전파가 흘려준 목소리가 지금 독일이 일방적으로 프랑스를 침공중이라 전했기 때문이다. 베르너는 다른 남자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로 차출된다. 고아라서 더 쉽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 중 국가의 부름을 받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자 성공의 가도를 희망할 수도 있는 일이라, 사랑스런 동생 유타와의 이별을 감수하면서 호기로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한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이를 먹는다. 마치 성실히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1권 내내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은 단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 소녀와 소년의 일상과 전쟁을 숨가쁨을 급박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서서히 그리고 제대로 전쟁 안으로 끌어들인다. 전쟁을 사는 삶이 아니다, 삶 그자체가 바로 전쟁이다. 평상시에도 어려운 전시를 앞을 보지 못하는 채 보내야 하는 긴장 못지않게 고아로 살아가는 일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베르너와 마리로르여야 했을 것이다. 아직 여물지 못한 꿈꾸는 10대에 전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일. 그때 소설은 정확하고 유려하게 소설의 의미와 가치만을 다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지식을 활용하거나 지루하게 늘어놓지도 않으며 프랑스-독일-영국 등 참가국에 대한 판단 역시 보류한다. 퓰리처라는 명망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여전히 전쟁을 몸소 겪지는 못한 1970년대생 소설가인 앤서니 도어에게 중요한 건 전쟁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전쟁 속에 살던 한 소녀와 소년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다. 작은 소년 소녀에게도 가족과 친구, 꿈과 미래 등 잃으면 안될 것들이 많으니. 마리의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과  전부인 아버지와 유모같은 마네크 부인 또 이웃들, 베르너의 '아이들의 집' 친구들과 원장과 입대해서 만난 프레데리크, 막스와 폴크하이머 등의 친구들 그리고 동생 유타의 다양한 삶들도 엿보는 세계다. 누가 터널을 통과했는지 또 나오지 못했는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한껏 움츠려 인생의 한 시절을 통과했는지, 전쟁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어리석음인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인도하는 급행열차. 그리고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빛.

 

베르너는 프레데리크가 보는 것을 보려고 애쓴다. 사진이, 쌍안경이 등장하기 전 시대를. 그리고 여기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찬 미개지 속으로 주저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 책은 새들로 가득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푸른 날개를 단 덧없는 신비로 가득하다. (2권, p15)

 

오히려 담담해서 더욱 서글픈 상황이 숨막히는 문장으로 여기저기서 팔딱거린다. 글로 읽는 피는 실제의 피보다 더욱 진하기도 더욱 묽기도 하다. 더 새빨갛기도 하고 덜 빨갛기도 하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 눈앞에 있다가 금세 저 바깥에 있다. 폭탄처럼 찢어발기는 희망 없고 변하지 않는 시간이 베르너와 마리로르를 통과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간다. 소설은 한번도 극적인 순간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모든 순간이 극적이고 눈부시고 뜨거웠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다. 죽음이나 죄책감으로 시간을 통과하는 게 전부였다. 빛도 사람도 사랑도 시간도 송두리째 어떤 삶을 휩쓸었다. 통과한 사람들은 다시 통과하기 전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사람이 만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진실 한 줄기를 손안에 꼬옥 쥐고 회상과 추억 속에 사는 두사람.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하고 내 소중한 누군가의 마지막을 또다른 누군가 기억하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후회하고 아프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고.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올해 읽는 가장 대단한 문학작품은 아니다(내가 뭐라고). 정말이다, 이보다 나은 문학을 올해만 다섯 손가락 넘게 만났다. 올해를 한 달 남겨두고 이 리뷰여야 하는 까닭은 눈을 감아도 떠도 사라지지 않는 영롱하다못해 슬픈 어떤 빛 때문이다. 실패일지 몰라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을 작가의 한 줄기 빛. 베르너와 마리가 만남으로써 만들어진 하나의 운명. 폐허 위에 다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그리고 살아있는(보는) 우리. 직선과 직선이, 면과 면이, 가로와 세로가 만나 비로소 생긴 점 하나 위 우리. 인간이라는 거룩하지만 종종 파묻히는 종족. 살리고 죽이고 살고 죽는, 그래야 백 년이 고작인 운명의 숨이 끝내 놓쳐지지 않아 읽기 시작한지 넉 달만에 그들을 소환한다. 지구상에는 얼마나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나 시간이 돌이 되어야 하는지, 소년과 소녀가 어른이 되지 못하면 저 세상에서는 무엇이 되는지, 이루어지지 못한 꿈과 소원과 만나지 못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는 것과 보이는 것, 볼 수 없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뭐가 더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 보이는데 못 보는지, 보이지 않는데 보는 척 하는지. 모든 게 사람이었다, 그리고 숨이다. 살아있으니 뭐가 돼도 되었다. 살았으니 허락된 듯했다. 하나의 점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들은 다이아몬드가 되기 전의 돌이었다. 그렇게 인생이 고달프고 이다지도 짧아서 아무도 아무도 그 누구도 끝내 다이아몬드가 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삶이자 시간이고, 하늘 아래 존재하는 우주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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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8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8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5-11-2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을려고 무엇엔가 홀린것처럼 들어왔나봐요.
제가 올해 읽은 리뷰중에 가장 황홀하지만 영롱한 리뷰예요.
아~, 좋다.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5-11-29 17:27   좋아요 0 | URL
책이 좋아야 하는데 간혹 책보다 리뷰가 더 좋은 건 책이 사람에게 말하고 싶게 하기 때문이에요.
양철나무꾼님이 잘 읽으셨다고 말씀하시니 정말 좋아요, 정말이에요. 우왕♥

주말이 가고 있어 슬프지만, 아까워하면서 흘려보내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야겠어요. 굳이브닝^^

stella.K 2015-11-2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거의 혹평을 하다시피 했는데...
저는 요즘 소설을 점점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제가 아는 전쟁소설은 스펙타클한 서사의 복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선 그런 게 거의 없고 감성만 있어서
별로였거든요. 이런 소설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생각 보다 너무 좋게 알려진 게 좀 화가나더라구요.
뭐 그냥 나 같은 재수없는 독자 만나 이 책이 고생한다 그럴 것 같아요.ㅋㅋ

아이리시스 2015-11-30 13:39   좋아요 0 | URL
저는 스텔라님 리뷰를 못 읽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로는 못 볼 내용이죠, 만들면 제가 개인적으로 애정한 몇몇 인물 빼고는 지루하겠죠. 저는 그부분이 문학의 역할이라 여겼고 스텔라님은 전쟁 서사로 스펙타클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고. 그런데 저도 스텔라님 의견에 동의하거든요^^ 읽는 중에도 힘들고 진도 안나가는 건 서사의 힘이 부족해서라고. 이런 소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답인 것 같아요. :)

stella.K 2015-11-30 13:35   좋아요 0 | URL
제가 알고 있기론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또 이런 소설이 영화로 만들면 기가막히게 잘 만들기도 하잖아요.
감독이 꼭 원작을 살릴 필요없이 얼마든지 해석과 상상력이 가능하거든요.ㅋ

아이리시스 2015-11-30 13:45   좋아요 0 | URL
간만에 위에 댓글 오타를 고쳤는데 여전하네요, 시간이 바뀌어버리는..(히히)

오오, 영화로 만들어요? 이 마케팅하기 좋은 작품을 안 만드는 것도 이상하죠, 원작에 충실 안하면 되는데(큭큭). 제 영화 스타일이 스릴러라서 대부분의 영화를 시시해하고, 스릴러나 스펙타클이나 무협일 때 영화가 가장 빛나는 것 같아요.하하.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아직 [사도]입니다 흙흙(극장에 못갔어..)

루쉰P 2015-12-02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책보다 좋은 리뷰를 올리시는군요 ㅋ 리뷰보다가 이 책 읽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왔잖아요! 하지만 읽지 않을거에요 전 이 리뷰면 제 마음에 영롱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ㅋ 공부 잘 되시나요? 전 여전히 공부 중입니다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5-12-03 18:23   좋아요 0 | URL
욕망이 올라오다니ㅎㅎ 날이 추워요, 잘 지내요? 저는 공부라기보다는 공부해야지 생각만..( ˝) 뭐 이것저것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서 일을 벌이기도 그렇고 아니기도 그렇고, 정말 하고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 루쉰님. 책보다 좋은 리뷰는 늘 책이 있어서 가능한 거니까 오래 생각을 곱씹을 만한 글을 쓰게 해주는 책은 좋든 나쁘든 다 좋은 거예요. 그쵸?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