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열매와 체리를 먹던 지난달부터 여름은 이미 와 있었다. 이미 보름도 더 전에 복숭아와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여름은 이미 시작했고, 저런 제목을 쓸 필욘 없었는데, 신호탄이 필요하다. 지난 일 년 삼 개월은 노트북을 거의 켜지 않던 시간이었고 최근에서야 노트북을 켜 뭘 해보려 한다. 주로 기사 검색, 웹툰 보기, 미드 보기에서 다시 꺼지는 경우 많지만. 지난 해 늦은 봄부터 아홉 달 가까이 걸려 자격증 따고 보이는 것보다 목표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꿈을 꾸었다.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삶의 인맥을 열고, 이제 몇 년 더하면 인생 절반을 함께 했다 말할 수 있을 오래 사귄 애인과 결혼하고. 그러고도 반 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안 행사에 불려다니고 원하던 시험은 문앞에서 낙방하고. 그와 동시에 평생의 분신이 될 아기가 찾아왔고, 복잡했고 어쩐지 억울했고 마음과 달리 몸은 한없이 가라앉고. 그렇게 몇 달이 더 흐르고 여전히 시간은 멈춰있고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시간과 삶은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

 

북플은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 가볍고 간단한 기록이라 자주 접속했지만 책을 거의 사지 않았고 하지만 읽을 책은 손길 닿는 곳 어디에나 널려 있었으며, 정기검진을 다니기 시작하고 입덧이 시작되면서 매주 가던 도서관마저 끊었다. 이 순간에도 문자로 희망도서 도착알림을 차곡차곡 넣어주는 고마운 도서관이지만 빌려와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많은 신간들은 유독 남달랐던 애착과 지식욕을 반영하는 물질이고, 이제 그것들로 나를 온전히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 집중력과 열정,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둘이라 생각했던 그러나 하나였던 어떤 일만 끝내면 돌아오겠다 생각한 알라딘 블로그에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7년이 넘도록 일상과 생각과 감정을 차곡차곡 쌓았던 보물창고를, 그렇게 잊었다.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욕심도 없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기록하므로. 그저 하던 일을 더 오래 버려둘 엄두가 나지 않을 뿐.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자각했고, 흐르는 시간을 자유롭게 놓쳐버릴 용기가 없었을지도. 정신을 차려보니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며칠 후면 본격적인 여름과 함께 올해 하반기가 시작된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 말고, 이 시간의 결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두 시간 넘게 달려 수목원을 찾았는데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거다. 여름이다, 무언가를 해야겠다, 이대로 시간이 나를 통과하도록 속수무책으로 둘 수는 없다, 는 생각을 한 것이.

 

아기가 간절한 친구는 뜨개질을 배운다며 필요한 거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나는 비타민D 결핍으로 핀잔 들으며 먹거리 검색한다. 시간이 생기면 편하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는데, 일단 시작하면 성과를 내야하므로 여기서 뭘 더 저지르는 건 욕심 아닐까, 하지도 못할 거면서. 평정심과 건강을 지키며 간헐적으로 외국어 단어나 외우는 게 더 가치있는지도. 그러다보면 나는 결국 책 근처로 돌아오겠지. 몇 달 동안 빌려볼까 살까말까 하면서 망설이던 책들이 저녁에 온다. 오늘이 시작이면 좋겠다.

 

펼쳐볼 때마다 보잘 것 없는 서재에 대해 생각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고르고 읽고 사모으는데 어째서 심야 이동도서관에 꽂힌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숨고 싶어지는지. 더 잘 고르고 더 잘 읽고싶다. 이 책 좋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정말 좋은 책을 골라 들고 싶게 하니까. 아주 작은 시간도 너무나 사소한 선택도 다 기록되고 있다는 무언의 감시. 기분 좋은 간섭. 내 세상엔 책이 전부가 아니지만 책을 빼놓고는 내 세상을 논할 수 없을 것. 심야. 이토록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시간에. 책.

 

 

이 책이 일종의 메타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을 당장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책을 읽어나가며 버거운 순간들이 있긴 했다. 심지어 마르케스의 저 작품을 실제로 읽더라도 흥미와 매력을 제대로 느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잊을 만하면 나오는 <미로 속의 장군> 줄거리와 인용문은 충분히 이 책을 덮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지한 대만의 독서가가 들려주는 독서讀書라는 행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사유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얕게는 (본인이) 책을 고르는 법과 읽는 법, 감상과 글쓰기에서 깊게는 각종 사유로 뻗어나가는 내용도 그렇지만, 이 시대 독서와 책 읽기, 책이라는 자체에 대해 이토록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고 신랄하게 적어나가는 사람이라니, 부러웠다. 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편이 아니라 도중에 찾는 사람이라서. 사실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이던 사람들도 정작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견고함을 다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 나아졌다. 무엇이. 어쩌면 영원히 원하는 확신을 쥘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행위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기분이 나아지는 것. 하면 행복한 일들. 되찾기를. 

 

그리고 언젠가, 읽어낸 모든 책은 버려지기를. 숨겨진, 글로 쓴 모든 순간이 지나가기를. 좋았던 추억이 슬픔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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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6-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결혼도 하고, 임신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북풀에서 아이님 흔적보고
그 생각 잠시 했거든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예정일은 언젠가요? 가을쯤...?
암튼 모쪼록 건강했다가 순산하길 바래요. 힘내구요.
왠지 너무 차분합니다.ㅋ

아이리시스 2017-06-29 23:4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한테 낮에 북플 댓글 달고 이것도 쓰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나고 마음도 정리돼서 포스팅 올리고 싶던 차에 댓글이 와서 깜짝 놀랐고요. 아기는 올해를 꽉 채워야 태어납니다.마지막달에 태어날지도.. 고맙고 감사하고 또 사실 저는 그다지 오랜만 아니라서.. 뭔가 차분히 쓰고 읽고 하는 것만 오랜만이지 항상 여기 있던 느낌이라서.. 제 글은 저와 달리 언제나 차분했어요! ^__________^

cyrus 2017-06-2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활동이 너무 뜸해서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근황을 접하게 되니 정말 반갑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합니다. 아이리시스님을 처음 만났던 날에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요. 아무튼 결혼, 임신 소식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셔야 되요. ^^

아이리시스 2017-06-29 23:49   좋아요 0 | URL
cyrus님도요. 한쪽이라도 늘 같은 자리에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거죠. 놀랍게도. 신기하게도. 저도 우리가 첨 만났던 날에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 안 나요. 첨이란 다 그런거죠. 늘 한결같은 모습, 힘이 많이 됩니다. 또 봐요, 생각보다 더 자주. :)

2017-06-29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9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6-2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 오랜만이다, 생각하고 왔더니 새로운 소식이 차곡차곡 많이도 쌓였네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읽고 쓰기가 다시금 찾아들어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

아이리시스 2017-06-30 00:04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저도 늘 변함없이 같은 자리 지켜주는 다락방님이 고마워요. 만약 제가 없을때도 이곳을 지켜준 분들이 없었다면 제가 돌아온 것도 별 의미가 없었겠죠. 제 시작도요. 어느 정도의 읽기가 뒷받침이 되어야 쓰기도 할 텐데 결심처럼 잘 될지, 많이 기록하고 또 얘기 나누고 싶어요. 더워도 힘내자구요! :)

2017-07-08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1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9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해가 됐으니 새 책을 담아볼까 :)

 

 


15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주키퍼스 와이프
다이앤 애커먼 지음, 강혜정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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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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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린 노예시대 흑인의 저항이 어떻게 끝날지 뻔히 알고있다. 대부분의 흑인노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탈출 혹은 패배의 이야기가 되는 건 이 때문이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는 소재는 황홀했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통로였으며 이 소설의 별난점이지만 소설의 방향은 그대로였다. 서술이 좋고 문체가 빛나서 좀 더 좋은 작품이 된 것 같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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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당장 엄마를 보고싶게 했다. 엄마가 생각보다 훨씬 여리고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친절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아무리 멀리가도 결국은 엄마 곁을 맴돌게 될 거라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 누구의 삶보다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 삶을 계획해온 날들. 그날들이 모여 나는 내가 되었다. 나를 나로 만든 건 엄마가 유일하다. 언젠가 내 엄마의 삶을 당신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그런 날이 오기를.
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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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매력을 아직까진 모르겠다. 잔잔한데 뜨거웠다, 그게 다이긴 한데, 좀 더 말해보자면, 그리움과 화해와 용서는 늦으면 소용없을지도 모른다는 확인이다. 그래 그거. 길을 잃는 것의 의미를 너무 국한시켜 살아오지 않았나 싶었다. 조금 막막하고 무섭고 또 다행이고. 팔십 년을 기다려 처음으로 돌아오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조각으로 남는 삶. 이제 조금 알겠는데 그걸 말해주고 싶은 이는 대부분 곁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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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책은 왜 이렇게 쏟아지고 또 나는 어쩜 이렇게 게으른가. 세상은 언제나 내 안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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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13,800원 → 12,420원(10%할인) / 마일리지 6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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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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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세상
톰 프랭클린.베스 앤 퍼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15,800원 → 14,220원(10%할인) / 마일리지 7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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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말-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한 인터뷰
칼 세이건 지음, 김명남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2월
17,500원 → 15,750원(10%할인) / 마일리지 8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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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이 좋은건지 우주가 좋은건지. 칼 세이건의 문체가 아름다운건지, 칼 세이건의 생각이 매력적인건지. <코스모스>를 필사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그러면 전부를 삼킬 수 있을 것 같았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정말 좋은 일들은 해버리는 것보다 조금씩 아껴두는 것도 좋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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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아니라 욕실이겠지? 집 넓고 자기 공간이 큰 사람들이 욕조에서 와인 마시며 음악 듣는다는 건 잘 알지만(뭔들 못할까?) 벽걸이 시디플레이어를 설치하고 캐롤 ost를 듣는 이제훈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일부러 다이얼식 전화라니, 버튼식 유선전화는 우리집에도 있지만. 남의 취향에 관심 갖는 거 잉여스러울 때가 많지만(대개 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어하니까) 재미있게 보던 <치즈 인 더 트랩>이 분노 유발로 방향을 틀며 끝나기에 삼일절에 다시 <시그널>에 버닝한 후 그동안 쟨 왜 저러고 사나, 뭘 위해 살지? 싶던 해영의 사정이 나오며 완전 좋아져서 금요일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도달한 <씨네21> 1044호. 너는 왜 티븨드라마로 표지모델이 됐니, 땡큐. 하면서 또 생각한다. 그 힘든 상황에 어떻게 그렇게 잘 컸니? 시니컬하긴 했지만 나빴던 적은 없잖아. 어쨌든 지금은 불의에 분노하고 타인(범죄자일지라도)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그런 남자가 됐잖아.

 

 

 

나는 가끔은 비싼 향초, 자주 싸구려 향초를 켜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고 온갖 형광펜과 색연필을 총동원하여 정성들여 다이어리를 쓴다. 읽은 책에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간혹 책도장을 찍는다. 중고샵에 내놓을 때 값 떨어질까봐 최근엔 책 훼손을 조금 고민하게 됐다. 인생 끝까지 들고가야 할 책 많지 않은 것 같거든.

 

 

 

자주 간절곶에 간다. 구룡포항과 강구항을 좋아하지만 7번국도는 너무 멀다. 뉘엿뉘엿할 즈음이면 더 좋고 사실 화창한 봄날에도 좋고 아주 추운 겨울날에도 좋다. 어느 순간 카페와 레스토랑이 너무 많이 생겨서 예전처럼 고요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는 찾을 수 없게 됐지만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바다 덕인지 매력을 완전히 잃진 않았다. 낭만과 소요를 동시에 느끼면 평온해진다. 오랫동안 선적과 하역이 이뤄지는 부둣가 동네에 산다. 부둣가 낚시꾼들과 방파제와 수출입 현장의 분주함 가까이서 어린시절을 보내다보니 세상에서 제일 잔혹한 바다는 해운대. 아침마다 미어터지는 지하철에 실려 센텀으로 출근할 땐 미칠 것 같았다. 광안리, 해운대, 송정, 일광, 태종대, 기장, 다대포, 송도까지 바다 순례는 매번 많이도 한다. 바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바다를 버리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산의 매력을 잘 알진 못하지만 바다의 매력은 밤새워 얘기할 수 있다. 섬은 로망으로 충분하다. 제주까지 갈 것도 없이 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정말 살고 싶은 동네가 많이 나온다. 바닷가 마을에서 사는 건 아직 좀 많이 두렵기는 하지만.

 

 

 

겨울엔 눈꽃 트래킹이 그렇게 좋더니 기온이 바뀌니 금방 봄이 올 것 같아 이렇게 신이날 수가 없다. 산 아래 계곡, 푸른 바람 아래 살려면 꽃은 핑크나 퍼플이 제격이겠지? 푸릇푸릇/ 울긋불긋. 사진 한 장으로 잊고 있던 봄이 되살아난다. 저 예쁜 풍광을 지나 외길로 굽이굽이 산을 오르던 캠핑장 가고오는 길. 한적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봄은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았다.

 

 

 

둘이 가는 캠핑에서 독서는 좀 버거운 일이다. 텐트치기도 밥도 설거지도 간식준비도 술상차리기도 나는 거의 하는 게 없지만 둘이 있는데 하나가 책에 빠지면 하나는 외톨이가 되니까. 그렇다고 여러 명 가면? 독서할 일이 있을까? 여기선 해지면 어두워서 책 못 읽는다. 겨울밤 난로 피워놓고 마쉬멜로 구워 먹으며 침낭에 들어가 영화보는 건 행복 그자체다. 온도는 후끈하고 바깥공기는 차갑고 어둠과 밤과 자연 그리고 나는 하나. 이게 다 취향 때문. 밀크티도 좋고 율무차도 좋다. 책을 한가득 빌려 나오면서 도서관 한켠 자판기에서 한 잔 뽑아마시는 밀크티나 율무차는 소소한 행복의 최선. 아직도 금요일이 아니구나. 아, 이번호에 실린 과학자 5인방 기획기사 중에 서민 교수님도 계신다. 『기생수』를 비롯한 몇 개의 텍스트를 소개한다.

 

 

 

 

 

 

 

 

 

 

 

 

 

 

 

 

 

<사울의 아들>은 상영이 끝나기 전에 <쇼아>랑 같이 보고 싶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이 정말 아프면서도 재미있다. 기억해야 한다, 이름 없는 자의 이기지 못한 혁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묵직한 것들이 자꾸 차올라서 뜨거움이 그리워지는 겨울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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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3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6-03-1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그널이 끝나서 정말 슬픕니다. 정말입니다. 어서 시즌2를 하란 말이다....라고 박해영의 위 사진을 보며 쓸데없는 푸념을..그래도 나는 박해영보다는 이재한을 더 사..아니 좋아합니다.^^

아이리시스 2016-03-15 11:45   좋아요 0 | URL
촘촘하다가 막판에 뭔가 나사가 풀려버려서 드라마란.. 이런 생각했지만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슬픕니다.. 돈 들여 배우를 키우는게 아니라 돈들여 작가를 키워야하는데... 당연히 이재한형사님이 더 최고입니다^^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유대계에 유독 지성인들이 많다. 유대인의 공부법, 부와 성공이 출판계 키워드가 된 걸 보면 똑똑하긴 한 모양인데 또 한 명의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역사학자가 나타났다. 『사피엔스』는 사실 진화론을 쭉 읽어온 독자에게라면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들었다). 진화론에 해박하지 않지만 특별히 어렵거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아는 당연한 역사를 전혀 새로운 이론처럼 다시 쓰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이클 센델이 초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용한 멋진 정리법이 생각나는 인류학적 통사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문자사용/선사시대.. 연도와 시대는 물론 인류진화 순서를 얼마나 힘들게 달달 외웠는데 이들이 한때 공존한 각기 다른 호모종이라는 건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등 여섯 종이 지구에 살았단다. 내가 외운 이름들이 진화한 순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호모 종이었다니, 한때는 죽어라 싸우고 경쟁하다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는데 그 살아남은 조상이 내 조상이라니 아니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니. 현생 인류의 조상과 네안데르탈인의 이종 교배는 여러 번 일어난 흔적이 있고, 그렇다면 지금 어딘가 이종 교배로 태어난 종의 후손이 살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이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증거는 또 어디에.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물음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의 연속이다.

 

50명 정도의 무리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수립이 수렵채집인이자 단일계로 살던 인류를 처음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헌터>에서 보니 몸집이 작고 힘 약한 종은 거의 언제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더라.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자나 호랑이는 늘 사슴이나 토끼를 이길 것 같지만 싸우는 구도가 1:수십마리이면 사자나 호랑이도 지치거나 포기한다. 그러면 사슴이나 토끼가 살아남을 확률이 커진다. 사슴이나 토끼가 잡아먹힐 확률이 그 반대보다 월등한 건 사실이지만 사자나 호랑이를 만났다고 해서 언제나 희생되는 게 아니다. 위험한 숲에서 사자나 호랑이 그리고 약하고 작은 종이 공존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유독 뼈가 굵고 힘이 세며 뇌용량이 큰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종도 무리의 습격에는 꼼짝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이후 다른 종을 사라지게 만든 건 직접적인 충돌에의 희생보다는 가혹한 기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언어, 문화, 국가, 종교, 과학이라는 비가시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특히 종교와 과학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먼 미래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방식의 메커니즘일 확률이 높다.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허울 아래 모든 개체를 하나로 묶는 힘, 사피엔스만의 특출난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의 말처럼 정말 자연발생설에서 유래한 운좋은 돌연변이의 탄생 혹은 정신병 때문이었을까.

 

과거를 거쳐 현재를 조명하고 곧 닥칠지 모를 비극적 미래까지 나아간다. 유발 하라리가 보여주는 게 사피엔스종의 비극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분명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사피엔스종이 사피엔스종보다 더 나은 종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이 없다는 사실을. 언어와 무리생활과 도구 사용 그리고 과학기술은 널리 언급되는 데 반해 종교의 의미를 인류와 연결시키는 건 그가 과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자라는 데서 기인한다. 지리상이든 기후상이든 다른 종들의 도전을 모두 물리치고 살아남은 게 내 조상이라니 경이로운 자부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사피엔스종이 원한 게 더 나아지려는 거라면 너무 멀리 왔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었다면, 능력이 아니라 자연적이었다면 사피엔스의 운명 역시 과신하지 못한다. 실제로 과학혁명 이후 인류의 가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중세 과학혁명은 단지 부재하는 신을 물리치고 부당한 대우에 시름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작업의 시작이자 잃어버린 합리성을 되찾는 일이었다면, 이제 과학이 시도하는 많은 업적들-유전 공학과 생명 공학-의 무궁한 발전은 우리의 질서와 가치 그리고 의미와 목숨을 위협한다. 곧 땀 흘려 일하고 일한 만큼 먹을 수 있었던 공평한 시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긴 시간 속에서 길을 잃기 쉽지만 『사피엔스』에서 주목할 사실은 과거에 우리(사피엔스)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넘어 여전히 살아남을 것인가의 중대기로에 선 인류의 현상황이다. 사피엔스가 멸종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멸종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뭘까. 곧 다가올 재앙, 자연발생을 불사의 능력이라 믿는 인류의 오만함이 미래를 망치고 있다. 더 대단한 종이 있다면 언제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사피엔스를 두고볼 지 모를 일이다.

 

진화론은 자주 인류가 이룩한 성과를 간과하거나 과찬한다. 고작해야 현재를 과신하고 과거를 둘러보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뿐인 위치에서 과학을 전지전능함으로 치부한 탓에 나무인 채로 숲을 들여다보려 한다. 나무가 숲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후반부는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 반신반의하면서도 너무 재미있다. 낙관과 비관의 의미를 모두 남겨놓는 저자의 통찰과 예견은 역사학자 혹은 인문학자에게서 나오는 신중함이다. 인간은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유발 하라리가 자기 소속감을 내려놓고 냉철하게 구사하는 종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특히 인상 깊은데, 적어도 학자로서의 그는 사피엔스라는, 유대계라는 기존 이론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은 걸로 보인다. 아니면 사피엔스는 과학의 모든 장점을 장착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뱀파이어처럼 피를 마시며 평생을 사는 불사신으로, 어쩌면 하나의 더 높은 종에게 사로잡혀 제2의 종으로 반식민적인 삶을 살 수도. 잘 몰라서 누리는 특권인가, 온갖 상상이 가능한 미래를 즐기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서재에서 다시 한 달을 사라지는, 공백 갖는 사피엔스다, 포스트사피엔스가 되고 싶은,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사피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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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0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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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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