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걸음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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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피가 흐르는 날개를 끌며 일어섰다. 참새의 피가 너의 눈에 홍채를 한 겹 덧씌웠다. 햇빛은 핏빛으로 붉고, 참새는 황금 같았다. 피를 흘리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비둘기만큼이나 커다란 참새 한 마리가 너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것은 너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그리고 너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이 귀에 도달했을 때 그가 모옌이고 중국작가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항자가 하루키라서가 아니라 중국문학에 대해 뼛속 깊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루쉰, 위화, 쑤퉁 등)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단 한 편의 작품을 읽었을 뿐이므로 모옌과 중국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섣부르고 어쭙잖은 오만에 불과한 허세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들통날 게 뻔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모옌의 문장은 몽롱하고 아름다우며, 삶의 오욕을 곱디 고운 문장으로 바꾸어 토사물처럼 처절하게 내뱉을 줄 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그런 것처럼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체험을 한다. 석류꽃 향기와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을 띤 분필들과 핏빛 성욕 그리고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 맞은 채 기절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수많은 토끼들 아니,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며 길바닥에 나뒹구는 피와 살점이 덜렁거리는 우리들. 깎아 도려내고 싶은 얼굴로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간사한 언어로 바닥을 기는 세상의 모든 의욕들. 모옌이 그리는 <열세 걸음>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반죽음의 상태이다.

 

생(生)은 현실에 발을 딛고 옳다고 믿거나 여기는 가치를 고수하며 존재하되, 시간과 공간을 하염없이 옮겨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가능한 의지라는 특권을 갖고 났지만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정작 얼마없다. 대부분의 것이 사회 혹은 국가라는 틀 안에 갇히고 더 좁게는 가정이나 가족 안에 다시 한 번 갇힌다. 새장 안에 갇힌 존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쇠창살 사이로 건네받는 분필(먹이)에 그저 감사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치열한 사회주의 계급투쟁 아래 인민의 이득이 최고 목표이고, 국가의 이득이 곧 개인의 이득이라는 이념 아래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어떻든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당대(초고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수정은 2000년) 중국의 지식인은 제도적으로 국가체제에 의존하고 복종해야 했다. 교권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그저 국가대변인 아니면 새장에 갇힌 앵무새에 불과했다. 적은 봉급과 열악한 환경에 교육의 자유는 빼앗겼고 학생은 물론 교사 역시 대입의 압박에 시달렸다.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한 체제에서 개인의 혁명은 설 자리가 없었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교단에서 쓰러진 팡푸구이는 그간의 평판이나 그가 가졌던 생각과 생활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로 살아남은 이들의 입맛에 어울리도록 손질당한다. 그가 당국의 압박에 의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서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내 변화를 촉구하려는 관련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진실을 캐낼 의무나 진심 따위는 없어도 된다.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문제는 쓰러진 것이었을 뿐,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팡푸구이는 물리교사 장츠추가 되고, 장츠추는 교사를 그만두고 상인으로 내몰린다. 눈앞에서 빼앗긴 것을 복기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화려한 몸부림은 그야말로 지옥에서의 발버둥과 다름없다. 양쪽 결과가 같단 걸 알면서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을 선택권을 주는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팡푸구이가 살아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현실과 환상의 전복은 <열세 걸음>의 정수라고 해도 좋다. 중국문학과 모옌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판이하게 뒤집는다.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가 여러 번 끼여들고, 화자와 청자가 뒤바뀌고, 시점이 들쭉날쭉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자의 입으로 내는 소리는 흔적이 없어야 한다. 팡푸구이의 죽음 후 매일 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 잃은 투샤오잉의 절규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가 당하는 억압을 대변하는 속죄 드라마 한 편을 재연하는 것 같다. 사범대 러시아과의 예쁜 여대생이던 투샤오잉과 물리교사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이며 토끼고기통조림공장에서 토끼가죽을 벗기는 투샤오잉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팡푸구이가 죽어살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 죽어살아야 하는 목적이 나온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 삶을 바로잡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분필을 먹다가 내장과 뇌수가 흘러터져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짐승과 다름없이 그려진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팡푸구이와 제 직업을 두고 장사를 해야 하는 장츠추 모두 불행하고, 투샤오잉과 리위찬 역시 그렇다. 순결한 욕망은 더러운 관음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질주한다. 비극은 반복되고 심해지며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던 이들, 살 자유는 물론 죽을 자유도 없던 이들의 슬픈 모노드라마가 시작된다.

 

성적환희의 몽상은 비루한 상상의 나래가 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더러운 것에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게 하는 충동, 금지된 욕망 앞에서 자가당착적 모순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고통 역시 모옌이 구사하는 특이한 서술형식과 민담과 전설을 적절하게 배치한 환상적 구성과 만나 또렷한 마력을 드러낸다. 만지기 싫은 현실을 눈으로 보고 싶은 이는 없다. 그건 참새의 열세 걸음 째를 굳이 보겠다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현실의 비루함에 마술을 걸어 튀어나온 모습들로 궁극의 현재를 보여주는 모옌의 문체는 절망을 빛으로 바꾸고, 비극을 향해 역공을 퍼붓는다. 낯설고 신기한 기법이다. 이 마법은 속아넘기는 그런 같잖은 억지가 아니라 제자리에 놓인 것으로 재배열하여 재탄생시키는 또다른 황홀경의 재발견이다. 우린 굳이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손뻗지 않고도 모든 환희와 쾌락, 고통을 체험함으로서 모옌의 문학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다. 걸어나오는 것은 자유이다. 살기 위해 했던 일이 곧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버린 과정을 읽는 일은 혹독하다. 파괴로서만 쾌락을 느끼고, 쾌락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 여겼던 두 부부. 팡푸구이와 투샤오잉, 장츠추와 리위찬의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탐하는 육체는 정신 속에서 더 탐스럽고 요물스러워진다. 약한 것은 밟고 강한 것에 따른다는 원칙 하에 진짜가 아닌 가짜로서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끈적하고 질척한 과거의 성적유희는 주로 여자들의 것이다. 나란히 공산당 간부 왕 부시장에게 농락당했던 리위찬 모녀와 중국과 러시아 혼혈2세의 아맛빛 머리결을 가진 투샤오잉의 슬픈 미래는 연쇄적으로 부서져간다. 이들의 철로 끝에는 인민과 신성함의 대표 공장장의 향락에 바쳐진 재물이 되어 투신하는 투샤오잉이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눈물이 필요 없었다고 모옌은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삶에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인생이다. 사는 게 그럴 리 없듯 죽는 것 또한 뭐 그리 그토록 억울할 게 있을까. 그래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너무 오랫동안 서있는 일은 위험하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 두 팔을 벌린 채 빛과 그림자가 차례로 얼렁거리며 인도하는 몸짓은 인간다운 숨결로 싱그러운 꽃처럼 살고자 했던 이들에게 재앙이다. 누구도 들개들이 목을 물어뜯고 까마귀들이 오장육부를 끌어내고 개미떼가 백골로 만들어주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 어디에도 몸을 놓지 못한 채 중간즈음에서 제 존재를 던져버리는 맹수 사육사만 해도 그렇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살아서 제 거대함을 과시하던 시베리아 호랑이는 죽어서 뼈가 발려진 채 동물표본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는 '위안위안'과 '팡팡'은 맹수 사육사의 허울좋은 기세로 인육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동물의 먹이가 되는 세상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돈 앞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는 현실이 살아있는 자들을 내모는 방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세상과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의 영혼까지 비춘다. 살기 위해 제 존재를 없앤 팡푸구이 때문에 연쇄충돌로 불행해지는 투샤오잉과 그의 아이들, 장츠추와 리위찬 그리고 그의 아이들. 그들은 불행해도 괜찮은가. 사라지거나 지워버려도 좋은가. 소비에트 체제가 그랬듯 개인을 감싸줘야 할 유일한 조직체인 국가가 존속을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와 행복을 억압하는 것. 그렇게 억압된 개인의 인격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마구 깨부수며 인민평등과 인민이득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체제는 단연 이념적 갈등에서만 오거나 비단 중국의 현재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건드리기 싫은 구정물 속 비루함을 환상적인 마법으로 승화시켜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다가 울분처럼 내뱉어버리는 것. 모옌의 방식은 현실을 상키시키기에 충분하다.

 

추운 겨울 맨발로 내쫓긴 아이가 갈 곳은 어디일까. 동화라면 옷을 입히거나 돌아올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주고 쫓는 게 미덕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몰락하는 자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은 없는 법이다. 한 번 추락한 순간 그들은 더 추운 곳, 더 더러운 곳, 더 비천한 곳, 더 질척이는 곳으로 내쫓기기만 한다. 마침내 혼란함과 황홀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책을 덮으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망각의 강의 건넌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이 선택한 순간 이미 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생생하게 확인하게 되어서이다. 희미한 기대나마 안고 있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고 뭉개 더 멀리 보내버리는 게 미덕일까. 안일한 동정은 미덕보다 악덕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뚝거리며 가버리는 절망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 때문에 내내 괴롭다. 괴로움은 내 것이다. 문학은 위대하며 아름답다. 살아있는 자의 산 삶, 죽어있는 자의 죽은 삶은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산 자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역할을 부담하게 하는 일은 비겁하다. 국가는 여전히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이념과 사상이 어떠하든, 개인 없는 국가란 무인도에서 왕 노릇하는 어리석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든 겁먹지 말자.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며, 각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은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젠가 쓰러질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가는 것이 인간. 모옌의 <열세 걸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있음과 의지를 지닌 자존의 의미를 알려주는 동시에 멀리서 제 몸을 뽐내는 별처럼 걸어오는, 문학을 가장한 환호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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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3-01-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이걸 왜 오픈으로 해두지 않았어요? 이 훌륭한 리뷰를.

아이리시스 2013-01-21 18:15   좋아요 0 | URL
땡큐땡큐(__) 한번 더.(__) 모옌이 새해 선물을 좀 크게 가져다줬죠. 모옌 만세! :D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히친스에 이어 하워드 진도 이 세상에 없다. 안 계신다. 아이쿠. 하지만 이 글들을 모아볼 수 있을 유일한 근거는 하나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사망. 그런데 원서도 2012년 출간이다. 번역출간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글에서도 2년 이상 지난 셈인데 괜찮을까. 이런 책들은 왜 항상 아주 옛날 것까지 모아서 한꺼번에 출간되나. 30년 전 글이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나. 의문이 없던 건 아니나, 나올만 하니 나왔겠지 싶기도 하고, 지나간 일을 되짚어볼 근거도 충분해서 읽는다. 근 30년(1980-2010)에 걸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이 분 살아생전 단 한 편도 읽지 않다가 작고 후 읽게 되는 무심함이라니, 이보다 더 아쉬울 수도, 이보다 더 수지타산 안나오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조선소 노동자 출신이라는 프로필 속 한 줄이 다른 어떤 것보다 눈에 박힌다. 그도 주로 진보 지식인 입장에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촘스키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타계소식이나 접하고서 아, 그 사람, 하는 나는 역시 깨어있지 못한, 시사에 관심 제로인 젊은이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는데, 실천은커녕 이론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팩트의 정책들도 수없이 많다. 일단 1980년부터.

 

아, 이 정도면 이 책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 듯한데 덧붙이면, 왜 대통령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책은 아니란 것이다. 나는 모르는 잡지 [The Progressive]

 

1980년대. 보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베트남 파병을 위한 모병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총장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모병에는 눈을 감으면서 등록금이나 정규직 시위에는 학생과 교직원을 압박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아무도 굴하지 않았고 탄압이 어마어마한 상황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수없이 시도한 끝에 겨우 총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모두 '평등'을 주장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이가 한 사람 뿐이라도 그가 가진 권력의 파이가 더 크면 이미 굳어져버린 제도의 물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옳고그름을 몰라서 바뀌지 않는 건 아니다. 한편 베트남 전쟁 때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용되어 쓰였다.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것으로 설정해 놓고 그걸 이유로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p.40)에는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며, 베트남 전쟁 때와는 달리 니카라과 좌파 정부 때에는 여론몰이가 어렵게 된 국가의 입장을 예로 든다. 깨어있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민 앞에 되먹지 않은 여론몰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명제를 보여줬다.

 

199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신좌파 운동이란 이름으로 일어난다. 노조,농민,세입자,여성,인권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제인권 문제에서 인종평등 문제까지 되짚는다. 올바른 말만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어서 재밌다. 보스턴대 총장이었던 존 실버는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 같은 지식인을 두고 "학계의 우물에 독을 풀어넣는 자들"이라고도 했다. 우파들이 미국의 교육을 향해 내뱉는 비난 중에는 '토머스 하디의 문학작품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기 전, 톨스토이와 루소의 글과 과테말라 원주민 리고베르타 멘추의 글을 읽기 전에 미국의 교육은 별 문제가 없었다'(p.61)라는 얘기가 있다. 하워드 진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의 과정에서 배우는 연대와 끈기의 결과에 빗대어 국제연대와 평등을 촉구한다. 이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있는 내용이자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토니 블레어와 함께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을 때 하워드 진에게 도착한 메일 한 통은 눈물겨웠다.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그 후세인을 저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살고있는 땅에 폭격을 시작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지도자는 후세인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대량살상무기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 에이즈나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것의 기만성은 하늘을 찌른지 오래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는 분노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정작 군사비에 들어가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한 무기와 지뢰 금지, 제3세계 군사 정권 지도자 훈련에서 손을 떼는 일에는 무관심한 서방세계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코소보 분리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묵인하는 미국의 입장을 체첸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벌인 러시아의 잔혹함을 묵인한 것과,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한 클린턴의 입장은 허용될 수 없는 수위였다. 현 코소보는 타국의 승인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여전히 세르비아와 러시아 등 몇몇 국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코소보에 대한 무기 공급을 승인하며 제나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행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2000년대. '진퇴양난'을 의미하는 작전조항 <캐치-22>를 쓴 조지프 헬러의 작품 주인공 요사리안 대위는 폭격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보게들, 우리가 지금 폭격하려는 도시에는 그 어떤 군사목표물이나 철도, 산업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가?"(p.108) 예술가들은 시,소설,노래,그림,연극으로 말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버지들의 깃발], [진주만]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미화하는 전쟁영화와 책이 쏟아져 나온 시기는 대규모의 군사예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명분을 갖추어야 할 시점이었다. '전쟁의 대가들'이라는 밥 딜런의 노래가사,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조지 버나드 쇼의 <바바라 소령>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애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안개를 뚫고 진실을 볼 줄 아는 예술인이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디킨스, 톨스토이, 발자크, 스타인벡 등은 작품 속에서 가난한 자의 편을 든다. <컬러 퍼플>의 엘리스 워커, 마지 피어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는 예술가로서 사회 운동가로 투쟁에 동참한 이들이다. 예술과 문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이들의 목소리는 차라리 사회적 양심이다.

 

*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미국은 안 그런가? 아프가니스탄 폭격에만 집중하고 무한정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파묻혀 지구적인 시장 체제의 희생자가 되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의 문제와 노동자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자국에 쏟아지는 비난-이윤을 앞세우는 기업 지배 시스템에 대한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기 때문에, 명목상 안전을 핑계로 군사비를 합리화하는 것도 미국이다. 베트남전과 걸프전, 대테러, 칠면조 사냥하듯 죽였던 이라크의 무고한 병사들과 민간인들, 착한 편이 나쁜 편에게 했던 더 나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한 원폭 투하.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을 죽인다. 여자와 아이들, 가난한 징집병들을.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생명이 평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권의 세계화가 먼저다. 적의 죽음은 그저 숫자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둔갑시키고 자기 쪽 피해만 이야기화 하는 것.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잔혹한 학살에 직접 가담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라크는 3류군사국에 중동에서도 높은 군사력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반복된 전쟁과 긴 경제봉쇄로 이미 전락해버린 국가를 향해 아비규환격의 포탄을 퍼붓는 미국에서도 반전 운동과 정치적 반대자로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정부의 권력은 결국 시민, 공무원, 군인, 언론인, 교사들이 복종해야만 유지된다. 터져나오는 각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이미 권력이 붕괴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의 부를 채워주는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보다는 의료혜택, 일자리, 교육, 육아, 쾌적한 주택, 깨끗한 환경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환경에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쓰이기를 원한다. 전쟁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이 미국 시민들에게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우리나라 사설/칼럼/주간지마저 거의 못 챙겨보는 나도 하워드 진이 기고하는 글을 제때 읽었다면 그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어렵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할 말을 전달하는 그의 칼럼이 흥미롭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서 좋고, 특히 미국이 관여한 1980-2010년의 국제적 활약상들-전쟁과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빈곤이나 인권문제를 대하는 방법 등-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커트 보니거트는 사람들에게 왜 힘들게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당신이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어 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런 생각과 느낌, 관심을 혼자서만 고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증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 바로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러니까 커트 보니거트의 글을 읽는 전 세계의 무수한 이들은 '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 이상 중요한 성취가 어디 있겠는가? (p.256)

 

시민들의 저항과 요구가 없다면 정부는 진보적 조처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한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1년도 채 되기 전 한 일이, 이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국방비를 허용하는 싸인을 한 것인 이상, 파키스탄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일인 이상, 확인절차도 없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무조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으로만 봐도 세계 도처에 널린 수많은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할 생각이 없음이 명백해보인다. 군사주의 강경파로 돌아선 힐러리 클린턴이나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로렌스 섬머스를 골라 쓰는 이상, 오바마의 색다른 자유와 평화, 인권에 대해 기대하기란 어렵다. 비록 미국역사 속 수많은 희생과 시위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서 노예 제도를 부인하는 수정 헌법 14조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는 14조,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15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5도살장>의 커트 보니거트가 항상 인용하곤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이자 유진 뎁스의 말을 쓰고 싶다.

 

"누군가가 착취당하는 하층계급이 있는 한, 나 자신도 그런 현실에 무관할 수 없다. 이 사회에 범죄가 있는 한, 나 자신 역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사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p.109)

 

미국은 최초 흑인 대통령 재임을 선택하며 새로운 시대를 쓰고 있고, 우리도 곧 있을 대선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대의 미래가 보여줄 희망적인 상징들이 상실되고 있는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라도 기대해야 할 판. 하워드 진의 유작이 된 이 책은 그야말로 진보적 입장-다 함께 잘 살자-에서 보는 미국 역사 자체였다. 주로 평화, 평등을 얘기하는,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답보중인 지구상의 오래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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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나 왔어요.
학예회를 고등학교 오니까 1박 2일로 하데요. 어제는 교내에서 먹거리 마당하고 강당에서 축제하고, 오늘은 전교생이 운동장에 우르르 모여서 놀이마당했어요. 둥글게 돌다가 부르는 수에 맞춰 짝 짓는 게임도 하고, OX 퀴즈도 했어요. 어제 쭈그려 앉아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을 찍다가 망가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버린 팔과 다리가 욱신거려서 죽는 줄 알았지요. 허헛.
어쨌든, 가스펠 뭐가 궁금해요?... 나 모르는 거면 답 안해줄래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11-23 19:42   좋아요 0 | URL
우왓, 학예회.. 우리때는 그런 거 안했는데요. 우린 그냥 학예전. 저는 사진부였어요. 그거 클럽활동으로 사진찍은 거 전시하는 거. 그런데 놀이마당은 진정한 축제잖아요. 뭐 세대는 흘러가고 학교도 변해가니까 소이진님은 좋겠다ㅋㅋㅋ

이렇게 공개적으로 묻지는 않을 거예요! 히히히

댈러웨이 2012-11-2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넋 놓고 읽어나가다가 토마스 하디에서 한번 깜짝 놀라서 넘어졌고, 커트 보니거트에서 한번 더 넘어졌어요. 일전에 소개해줬던 히친스에 대한 책도 매큐언때문에라도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워드 진, 이 책도 흥미롭겠어요. 뭐 어떻게 댓글을 달 수가 있는 페이퍼가 아닌데, 저는 꿋꿋하게. 하하하. 정말 잘 읽었어요.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라는 아이님의 의견을 100프로 지지하면서. ^^

아이리시스 2012-11-24 17:44   좋아요 0 | URL
댓글 못보셨겠지만 앞엣것 지우고 다시. 그저께 새로 배송온 새이불 통돌이 세탁기에 빨다가 찢어져서 솜이 튀어나왔어요. 으히히. 히친스는 매큐언이랑, 하워드 진은 커트 보니거트, 아이리시스는 댈러웨이님이랑 친구가 맞고 평화와 평등은 우주의 진리예요. 이분이 미국비판을 다 하고나니까 저는 할 일이 없어서 토욜인데 그저 뒹굴거리는데 하필 화장실 들어간 시점에 택배가 와서 문을 디따 크게 두드려서 소리도 못지르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없는 척했어요--;; 그책 제목이 말예요, <죽음이란 무엇인가>(그건 분명 책일테니까!)이거든요, 없는 척한 거 들켰을까요? 뮤직뱅크가 디따 큰 볼륨으로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거든요-_-;;

댈러웨이 2012-11-24 19:09   좋아요 0 | URL
어우 대체 몬 소리에요? --;

아이리시스 2012-11-24 19:21   좋아요 0 | URL
응? 새이불은 찢어지고 택배는 경비실로 갔고 저는 너무 졸려요ㅠ.ㅠ
댈러웨이님 뭐해요? 저는요, 장윤주 새앨범 듣고 있어요. 밥도 먹었어요. 토요일이 뭐 이래--;

2012-11-24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7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거 보면 사실 미국대통령 선거 같은 것은 '나쁜넘'과 '더나쁜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하는 것인가, 같은 거라고 생각되기도 해요(무한도전에서 못생긴팀과 더못생긴팀으로 나누는 것처럼). 우리의 대통령 선거는 그렇지 않았으면 싶은데 돌아가는 양상을 보니 우리도 그닥 다를 건 없을 것 같고..아무튼 그래도 그로 인해 냉소에 빠지면 안되겠죠. 이분들이 죽기 직전까지 글을 쓰신 이유도 그렇게 되라고 쓰신 것도 아닐테고.

주말 내내 몸이 안좋았는데, 회복이 잘 안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7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주말동안 제가 본 뉴스며 트윗멘션이며 때문에 삶이 피폐해졌어요. <터치>도 봤어요. 방금전 토론은 뭡니까. 자기편만 나와서 정해진대로 주고받는 것도 요즘은 토론이라 부릅니까. 무한도전은 백만년만에 지난주부터 다운로드를 해놨는데요. 어제는 티비 나른다고 하루종일 짐옮기고 청소한다고 시간이 없었어요ㅠ.ㅠ

아팠어요? 으아ㅠ.ㅠ 얼른 나으세요. 아프면 안돼요!!!

맥거핀 2012-11-27 23:45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이제 박도 문도 안도 왠지 지겨워요. 요즘 TV보면서 느끼는 건 정치평론가가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았나, 이 생각이 들어요.

걱정 감사, 몸은 상당히 좋아졌어요. (근데 TV는 잘 나오죠?)

아이리시스 2012-11-28 16:39   좋아요 0 | URL
어휴. 질렸어요, 아주! 4000만명이 정치평론가가 된 것 같던데. 그저 내 지지가 확고하니 반대편의 얘기도 귀담아들을 나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좀 알고 싶었어요. 근데 이건 뭐ㅠ.ㅠ

날이 추워서 정신줄 놓고 있으면 금방 병날 것 같아요. TV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는데요. 사실은 제가 든 것도 아니지만. 차에 실려갔으니 곧 운명이 결정될 것 같아요(TV의 운명이란!).

2012-12-0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4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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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볼셰비키-멘셰비키는 물론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 아예 없기 때문에 러시아 작품은 늘 멀리했다. 학교 때 착실하게 다른 과 문학수업을 듣지도 못한 결과이다. 내가 애살이 있었다면 철학과 문학수업들을 욕심내거나 그때 이미 웬만한 인문학 고전에 도달해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남달리 게으르고 미친 것마냥 신경이 딴 데로 가 있어서 그러지 못한 게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 한 권에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다. 푸슈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체호프,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이후의 계보에나 낄 울리츠카야는 <소네치카>(1992)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세 편의 장편 중 2001년 러시아 부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4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1991년 소련 해체. 1943년 태생인 그녀는 2차대전의 진행 중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소비에트 체제하를 살았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의 고통이나 억압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강도높게 풍자되기도 하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소련 수용소 안 강제노동의 가혹함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상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가 울리츠카야의 작품에서 소비에트 체제 하의 가족이 살아가는 법이 등장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정의 일상이나 행복 보다는 국가의 이념에 충성해야 하는 소비에트 시대에 자유와 도덕 불감증에 시달리며 자기들만의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도덕으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들의 눈물겹고 따뜻한 이야기이다.

 

반소비에트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 파벨을 중심으로 아내 엘레나와 그녀의 어머니뻘 바실리사, 딸 타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표격인 청소부의 딸이자 타냐의 친구인 토마가 한집에 산다. 파벨과 엘레나의 만남, 파벨의 이념 혹은 신념, 톨스토이주의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엘레나의 회상, 바실리사의 이야기나 토마의 사연 등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훑는다. 멀티카메라기법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인물을 고찰하는 생생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국가의 낙태금지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 파벨인데, 자칫 생명경시로 이어질 법한 일인데도 불구, 파벨의 주장을 경청한다면 이내 생각이 바뀌다가 곧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노동자로 남편 없이 아이 셋을 키우다가 바로 그 임신 때문에 피흘리며 죽어간 토마의 엄마는, 국가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대변하는 훌륭한 예다. 최소한의 비용과 책임으로 최대한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엄마를 잃음으로서 남은 아이 셋은 오갈곳 없는 고아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낙태금지법은 계급이 낮은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며 법을 고치기 위해 애쓴 파벨의 행동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엘레나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찬반론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낙태금지법에 인생이 저당잡히는 여자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윤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태를 권하거나 도우면 끌려가 고문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소설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윤리적 문제 중 다른 하나가 바로 자신의 딸이 아닌 타냐를 누구보다 예뻐하는 파벨의 부성이다. 타냐는 두 살 때 만난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안다. 친구 토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한 것도 이런 아버지의 풍부한 사랑 덕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악착같이 타냐의 가정에 순응하려는 토마를 보면 안쓰럽다. 어린시절의 가난했던 기억과 임신 중 죽은 엄마로 때문에 사랑과 출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식물에만 애정과 관심을 쏟는 토마는 꿈보다는 현실안주형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해야만 하는 힘없는 계급의 표본이다. 의식주를 획득하는 일은 타냐의 집에 머물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을 테니까. 수용과 잔류를 향한 악착같은 발버둥은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조교나 조수를 대상으로 반복되어 오던 간소프스키의 만행은 이 사회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 타냐의 처녀성마저 위협하는 걸로 끝장판에 도달한다. 이후부터는 파벨과 엘레나, 타냐와 골드베르그 형제, 바실리사, 토마, 연주자 세르게이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독서가 시작된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가족의 진혼곡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자의 흔적과 산 자의 추억으로 가족의 연대는 계속된다.

 

억압과 불통으로 시대를 이어가던 소비에트 체제의 한 가족을 통해 울라츠카야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새로 정립시키려 한다. 핏줄로 얽히지 않아도, 아픈 가족을 돌보면서도 끝내 지키려 했던 가치.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애. 사랑과 보호를 통해 세상 어디보다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잃지 말아야 할, 잊혀지지 않아야 할 가치를 굳건하게 품을 수 있도록 돕는 곳. 생명윤리와 낙태찬반론, 유전학에 대한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묘사는 놀랄 만큼 정연하다. 실험동물들을 죄책감 없이 죽이며 거기서 원하는 것을 얻는 연구과정에서 충격받은 타냐가 학위와 연구 활동을 그만두고 방황하는 장면에는 공감한다. 우성유전과 열성유전에 관한 이론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면역이 약해진 타나가 임신 중 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후 파벨은 타냐의 딸 줴냐를 키운다. 파벨이 죽자 엘레나만 남는다. 줴냐가 아이를 낳는다. 세상은 묻지마 범죄가 성행하는 흉악한 도시가 된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모든 것이 운에 달린 사회는 불안하다. 자유와 도덕은 모든 시대 모든 세대에 통용되는 가치이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넓고 복잡한 소설이 아니라 좁고 깊은 소설인 듯하다. 가족 개개인의 삶을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그중에는 파벨의 내면투시나 엘레나의 꿈 속 세상 같은 이상적인 세계관도 보인다. 이들은 소비에트 시대를 벗어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영유하는 자유로운 가족으로 탈바꿈해나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가야 할 가치는 여전히 죽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억압과 불통으로 인해 자유와 도덕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가져야 할 의미에 대해 이토록 열정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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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이야기 성서 -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록
오정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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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평생에 걸쳐 성경읽기와 베껴쓰기를 하기로 했다는데 나는 간혹 그녀의 소설을 필사하려 끙끙대다 말았다. 대학 전까진 펜을 들고 뭘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했지만 이제 하루하루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메모하기도 벅차다. 나는 별로 꼼꼼하거나 치열한 편도 아니어서 게다가 심한 다혈질이고, 이러니까 성격파탄자 같다.(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지금도 필사를 생각하며 책상 앞으로 불러오는 책은 <무진기행>과 <중국인 거리> 아니면 <유년의 뜰> 같은 작품. 습관이 되어버린 당연함들. 화려한 낮과 외로운 밤이 번갈아 계속되던 날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과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심장을 훑고 지나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소설가의 꿈을 되려 앗아가던, 내 안의 찌꺼기 한 톨을 마저 데려가던 어떤 상징들. 그녀들이 나의 뿌리였다. 바로 그때 사주에도 없는 소설가의 꿈을 버렸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오해마시라, 재능없음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혼자 싸우는 치열한 고독의 그림자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공동체 작업에 더 매력을 느껴서 한때 PD나 극작가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창작희곡을 척척 써내고 제 이름으로 연극을 올리는 동기를 간혹 부러워했다. 거기까지였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수사지휘권을 휘두르는 뒷전의 검사보다 일선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어느 고시합격자의 경찰 지원 인터뷰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정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그늘진 生과 외로운 삶이 더 두렵다. 詩를 읽을 때면 느껴지는 밑바닥을 헤매는 감성과 꼿꼿한 이성이 맞닿는 지점이 아프다. 다행히도 여지껏 소설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순간이 거의 없었다. 남의 좋은 문장을, 소설을, 궁극적으로는 글을 조우할 때마다 불행히도 내 것은 자꾸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글솜씨가 아니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필요한 게 소설가라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바보들에게 둘러싸여 천재가 되기는 쉽지만, 천재들에게 둘러싸여 바보가 되기는 더 쉽다. 절망의 윗 단계 체념. 어떤 단어를 온갖 자존감으로 배우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 꿈에서도 그런 순간이 다시 올까 두려워 나는 인터넷 서점 한 귀퉁이 프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 글을 쓰며 자위하는 것일까. 고개만 돌려도 나락으로 떨어질 이유가 충분한 이곳에서. 한 순간도 이곳이 위안이 된 적이 없었음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의욕적이지 못하다. 글이 생계가 되지 못한 순간, 여기에 자존심을 실을 수는 없다. 남의 책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올릴 때마다 한 계단씩 추락한다. 가끔은 비참했다. 그때마다 읽지 않고 못 배기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글읽기도 중단했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글로 벌어먹고 살 일이 없을 것이고, 없게 할 것이므로. 쓰러져 잠들 때까지 드라마를 봤다. 쉽게 살고 있었다. 가을은 미드 새 시즌기란 걸 잊은 여름이 있었던가. 의학드라마 앞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플 지경이 되자, 질주가 중단됐고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책을 몇 권 주문했다. 내 손에 도착했을 때, 당장 성경책을 가져와 비슷한 장을 폈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을 때, 사무엘하 13장을 함께 읽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읽던 책들은 대부분 성경구절을 안고 있었다. 나는 쉽게 사는 법과 어렵게 사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성경책은 미니사이즈였고 속엣 것은 더 작았다. 깨알 같은 글씨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라는 구약은 길을 잃을 때마다 샘물 같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퍼올리거나 길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원전(성경도 어차피 누군가의 번역)과 해석서(이 책)를 비교하며 읽는 작업은 시간 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먼 이야기는 잊었던 시공간에 다시 불을 지핀다. 마침내 2000년도 훨씬 전의 성스럽고 다채로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간다. 살라딘과 십자군의 그 이스라엘은 어찌나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지.

 

1.

하느님의 목소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충성이 대견한 아브라함의 일가만을 도피시킨 후 불태워지는 소돔은 언제봐도 카타르시스. 소돔이 실제로도 가능하다면 좋을 것이다. 잡다한 모든 것을 청소기 돌리듯 쓸어버리고, 구겨진 내장을 탈탈 털어 따사로운 햇볕에 말려 심장 옆으로 재배열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남을 자는 누구일까. 세상이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넌더리가 난다. 나는 본능적으로 진화론자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앞선다면 신을 믿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종교는 없지만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칭하기 어려울 만큼 신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거라 믿는 쪽이고, 신이 인간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도 여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은 너무나 살아내기가 힘들다. 창세기는 희망이자 구원이요, 탄생이자 소멸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자본주의가 뱉어놓은 모든 허상을 언제든 재반죽시킬 수 있는 발효덩어리 카스테라로 만들어 냉장고에 처박았고, 나는 그곳에 없으려 했다.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다시는 냉장고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버리는 일, 새로 만드는 일 모두 가진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오만과 태만과 욕심과 불행을 거두기 위해 바벨탑을 저지하거나 노아의 방주를 닫거나 소돔을 몰락시켰다. 본인이 만든 어떤 것도 도자기 장인의 그것마냥 한 치의 어긋남을 보기 싫어하였다. 하지만 아벨을 죽인 카인을 용서하였다. 철저하지만 야박한 분은 아니었다. 형인 척 연기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중 하나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으로 인해 태평성대를 누린다.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자기네들의 문화를 번성시키며 살던 히브리인들은 400년이 흐르는 동안 대도시로 흩어져 이집트인들과 섞여 동화된다. 히브리인 요셉이 자기네 선조들을 기근에서 구해준 사실을 잊은 이집트인들은 자기네들의 땅과 일자리를 뺏는 히브리인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하고 자유와 독립을 빼앗은 다음 노예로 전락시킨다. 히브리인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 구해진 한 아이는 힘이 세고 의협심 강한 파라오 딸의 양자가 되어 화려한 왕궁에서 자란다. 그의 이름은 모세. 이후 모세는 하느님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을 풀 것을 명하는 협상을 제안하지만 다섯 번의 재앙이 지나고 나일의 물이 홍해로 변할 때까지 이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마침내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에게 황량한 땅과 굶주림은 오히려 비참하다. 하느님은 다시 먹을 것을 내릴 터이니 그날 먹을 양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한다. 먹을 것을 얻었으나 광야에서는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을 피할 수가 없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야곱의 형 에사우의 아들인 엘리바즈가 얻은 아말렉의 후손으로 아말렉족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로소 아말렉족을 무찌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 시나이 광야에 이른 이들은 모세가 나팔로 하느님을 불러낼 때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하느님 나라의 헌법 십계명을 받는다. 이들은 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수송아지로 모세의 형상을 만들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박살내 이스라엘인들에게 마시게 한다. 이제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맹세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 기다린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대까지 벌한다." (p.219)

 

이후 40년 간 모세가 숨을 놓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주님과 친구처럼 마주 대하여 사귀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

 

2.

마태복음 1장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시작한다. 나열하면 밤샌다. 성경책 펴서 소리내 읽은 적도 있는데 쓸데 없었다. 마지막만 빼놓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14대이다. (p.228)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를 받아들이란 천사의 말씀이 내려와 그렇게 한다. 그때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박사가 헤로데 왕을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렸더니, 왕이 이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없애라 한다. 요셉은 다시 꿈을 찾아온 주님의 천사의 말대로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헤로데가 죽은 후 요셉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자리 잡고 살았다. 현재 중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팔레스티나'는 성서 속 위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땅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로인 탓에 오랜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 전 37년부터 팔레스티나 전체를 통치하던 헤로데 왕의 집권 말년, 아우구스토(카이사르)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탄생했다. 아우구스토가 죽고 아들 티베리오가 즉위한 후 서기 27~28년경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특사가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부탁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자기를 따르라 하고,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파'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것은 바위라는 뜻이고, 바위는 그리스어로 '페트로스'이다. 시몬은 그렇게 게파, 페트로스를 거쳐 '베드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자기를 따르라 했고, 이 제자들은 훗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고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된다. 예수님의 활약상은 가르침, 선포, 치유였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즉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갚아주라는 법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대왕이 편찬한 법전의 기본법으로서 '동태복수법' 혹은 '대당명제'라 칭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유다교의 율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쟁과 보복이 아닌 용서와 완전한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두셨다. (p.256)

 

1) 화해하여라.

2) 극기하여라.

3)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4) 정직하여라.

5) 폭력을 포기하여라.

6)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하여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즉 의로움을 이룩하는 것이다.) (p.270)

 

으아, 내가 사랑하는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구절이잖아.

 

마태오복음서의 산상설교는 반석 위에 집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로 끝맺는다. 이어지는 마태복음은 정말로 지루하지만 예수님 나라의 윤리와 생활규범이자 율법이니,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짜내는 기분으로 끝까지 읽는다. 세상에, 진짜 지루하다. 아홉 살, 열다섯 살 이후 교회 가본 적도 없지만 그것조차도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오빠(실제로 목사님 아들이었던 아홉살 때의 옆집오빠는 내 첫사랑이었다) 따라가 재미있게 노는 걸로 알았던 시절의 설교시간에는 이런 얘기들을 들었을 터, 옳은 얘기, 듣기 좋은 얘기도 반복해 들으면 지겹듯이 딱 그런 기분.

 

구약시대부터 단식은 속죄와 회개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마땅치 않게 보았고, 온갖 질병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모여드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열두 제자를 모아 능력을 주셨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파견하였다.

 

심판자 메시아, 구세주 메시아, 613가지나 되는 유대교의 율법계율에 짓눌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황금률과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짐과 명에는 가볍다고 하였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에게 놀란 제자들이 묻자,

 

"너희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뱃속을 거쳐 배설하게끔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고 악하게 만들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p.330)

 

라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행복하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p.336)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할 것이다'의 상황에 맞닥뜨린 자신의 배반에 베드로는 슬퍼한다. 한갓 죄인으로 묶여 뭇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끌려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후회와 비탄과 두려움, 죄책감과 슬픔으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받은 은돈을 성전 안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돈으로 산 옹기장이의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하겔다하마)'이라 불린다. 예수님에게 씌인 죄는 신성모독죄였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한목소리에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예수는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유다인들의 왕 예수'라는 죄명이 붙여진 십자가에 못박혔다. 무덤 안의 예수님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일러준다. 사흘 만에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성서를 요약하면 이런 글이 된다. [1]은 구약이고, [2]는 신약이다. 첫부분 외에는 내 말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별로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고, 특히 복음은 정말 종교인 아닌 내게는 쥐약이기도 한데, 착한 사람이 되기는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루살렘. 지금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아볼 생각을 하기에도 지쳐있지만, 어제의 뉴스 속 가자지구는 정말로 단테의 지옥과 다름없었다. 단테를 제대로 읽은 건 아니지만, 우리는 왜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된 집에 살면 안되냐는 여자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서일까, 어제 밤새도록 폭격맞고 있는 건물에서 옆 건물로 뛰어다니며 동생 구하겠다고 전전긍긍했더니, 하루가 다 피곤하다. 적어도 한 달, 길면 두 달에 걸친 이야기 성서 읽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다시 읽으라면 차라리 예루살렘 여행을 가는 편을 택하겠다. 테러와 폭격은 이후에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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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0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11-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정희 작가님께서 평생을 걸쳐 성경읽기와 필사를 하셨군요. 몰랐었는데, 알고나니 오정희 작가님이 더욱 좋아져요. 이 글 정말정말 좋아요. 정말. 지금 영화 보는 중에 잠깐 들른 거라 영화 다 끝나면 더 자세히 읽고 더 자세히 평 남겨야 겠어요. 영화 끝나자마자 북어처럼 퀭하게 침대로 직행할 지는 미지수이지만요. 나는, 드림걸즈 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19:34   좋아요 0 | URL
드림걸즈는 명작이죠! 좋아하는 영화예요. 소이진님은 벌써 오정희 작가님도 좋아하고 김영애 배우님도 좋아하고 이런 이런 조숙한 문학소년이 내 곁에 있다니!!!

얼른 와요, 리쓰은~~~~~~~~~~~~~ 아엠얼론애러크롯로드~~~~~~~~~~~~~~~ 불러줘요!!!

2012-11-21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차리고 읽어보려다가 아무래도 상태가 좋을 때 읽어봐야 할 글인듯 해서 인사만 전하고 가요. 잘 타이밍을 놓쳐서 이러고 있는데, 이제 자기는 해야겠죠?

맥거핀 2012-11-21 15:55   좋아요 0 | URL
정신이 그다지 맑지는 않았지만, 읽었어요. 구약과 신약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죠.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뭐 거의 보지 않지만), 어떤 질문들이 떠올라서 읽기가 힘들어요.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게 무슨 의미일까를 되묻고는 하지요. 성경을 죽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보면 여러가지로 대단하다 싶어요(빈정대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글쓰기를 멈추지 마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4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은 잘 타이밍을 놓치고 저 시간에 주무심 대체로 몇 시까지 주무십니까?(궁금)

쓴 저보다 남이 쓴 글을, 이렇게 긴 글을 읽는 분이 더 대단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시간도 좀 남고 여유도 좀 있고 저든 책이든 이야기에든 관심이 있어야 읽힐 거라고 생각을 해보니까요.. 구약까지만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뒷부분도 써야겠다는 이상한 오기로 썼더니 이렇게 되었고 요즘은 다시 핵심리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게 될까요? 이 글들은 타인보다는 나를 먼저 만족시켜야 하는데 저는 책을 통해(뒤에 숨어) 저를 쓰고 있어서, 제게 무슨 핵심이 있을까 싶어요.

이 글들이 훗날 제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거예요! (작가로서가 아니라도)

루쉰P 2012-11-2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이리시스님 제대로 된 성경 읽으시는데요. 후후후 어려워요. 어려워. 저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ㅋㅋ 근데 전 아인슈타인의 말은 참 좋아해요. 신은 믿지 않으나 인간이 모르는 우주의 법칙은 있다.고 물론 여기서 신은 인격신이겠죠. ^^ 저도 신은 믿지 않으나 뭐랄까 우연도 그렇고 뭔가 내가 모르는 법칙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래서 항상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으로 역주행을 노리고 있죠. ㅋㅋ
근데요 아이리시스님 글을 이렇게 잘 쓰시고 하시는데 소설가에 대한 꿈을 멈추셨다는 거, 물론 거기에 본인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지금처럼 쓰시면서 나아가시면 좋지 않을까요?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 소설인 것 같아요. 힘 내세요. 아이리시스님.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구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5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이 글에 오시니까 정말로 교주님 같아요. 그나저나 아인슈타인의 말은 제 맘과 같아요. 저는 신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믿습니다..이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삭막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정도는 투정하며 살아야겠어요.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이 멋져요. 제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뭐든 되려고 애써볼게요!!!

2012-11-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정희 작가라는 분을 소이진님 방에서 처음 접했었는데, <중국인 거리> 저도 읽어볼 거에요. 저도 필사할 거에요. (응?) 성서 얘기는 머리 아파서 안 읽었어요. 우리 식구들이 들려주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건. --; 아, 1번 시작되기 전의 글은 잘 읽었어요, 아이님.

아이리시스 2012-11-22 20:01   좋아요 0 | URL
1번까지는 최선을 다해 썼고 2번은 이해를 잘 못했어요. 쓰긴 했는데 읽힐 거란 생각도 못했어요. 로마제국으로 다시 되돌아가 독서를 해야겠다 그 정도의 생각만 하고 덮었는데 진짜 두 달이나 읽었네요(씨익). 저는 주위에 독실한 신자분이 없는데 윗집 아주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세요!! 필사는 원래 문체를 닮고 싶어서 하는 거라 그랬는데요, 저는 문체를 남의 문체로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학교다닐 때 문체를 오롯이 공부하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쓰라고 배웠는데요. 일단은 오정희 작가님이 단편치고는 현대적인 문체에다 이상가는 여류작가가 드물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누가 추천해줬어요.

댈러웨이님은 몇 시에 주무세요? (시차를 깨닫고나서 생긴 궁금증;;)

댈러웨이 2012-11-23 10:36   좋아요 0 | URL
열두 시, 한 시, 두 시, 세 시. 대중 없어요. 컨디션이나 다음 날 상황에 따라. 성향은 새벽형을 지향하는 야행성. ^^

아이리시스 2012-11-23 19: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그러면 얼른 와요!! 와요!!

Shining 2012-11-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제가 매번 놀랍다고만 하고 좋다고는 안 했죠, 아이님(그렇다고 여지껏 다른 글이 좋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아이님의 글은 대단하군_-b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말입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사실 댈러웨이님과 비슷합니다만ㅎㅎ 성서 얘기는 속독한 편이고 1번,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 글이 참 좋아요. 적확하면서도 영민한 느낌. 좋습니다그려d-_-b (원숭이 아니고! 투 썸즈 업, 입니다ㅋ)

2012-11-2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20:09   좋아요 0 | URL
저는 계속 좋다고 말한 게 진짜 좋아서 한 건데 듣는 샤이닝님이 이런 기분인지 몰랐어요(으쓱). 요즘은 정말 좋은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리뷰로서, 문학으로서, 인문서로서, 칼럼으로서. 한동안 숲을 보는 리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까 '나 이거 다 안다' 느낌이라서 재수없어요(응?).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 번 보고 싶은데 그걸 다 참아주려면 이웃분들이 고생스럽겠다..그런 생각을 했어요(요즘 심심해서;;).

Have a good time!!!

댈러웨이 2012-11-23 10:33   좋아요 0 | URL
쫌 고생스럽긴 해요. --; 뭐 그치만 예쁘게 봐주고 있는 거에요. =3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2-11-23 19:59   좋아요 0 | URL
원래 한 번씩 자발적 주관평가를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은 평가중-_-;
예쁘게 봐주세요(꾸벅).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누군가 그랬다.

간절함은 인연을 만들고, 기억만이 그 순간을 이루게 한다고."

-드라마, <신의>

 

 

올해는 정말 많은 시간여행자를 만났다. 사실 시간여행자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영화 [나비효과]는 시간여행 자체가 아니라 사소한 행동과 말, 상황 하나를 원인으로 해서 결과가 뒤바뀐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므로 제외. 끝난 후 시간이 꽤 흐른 몇몇 드라마들도 제외.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많이 써먹은 시공간적 소재들 전부 제외. 더불어 어릴 적 모험소재로 가장 좋아한 만화 돈데기리의 [시간탐험대]도 제외. 그러면 뭐가 남냐면, 음, 일단 점과 선에 대해 말해보자. 책제목 말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평행이론에 대해서도.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모른다. 잘난 척할 철학자의 견해에 대한 지식이 없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유지태와 김하늘이 나오던 영화 [동감]에서 시작됐는데, 그 영화를 떠올리면 그저 지금은 스타가 된 두 배우의 신인시절만 기억난다.

 

고1때 불어시간. 교과서에 실린 [그랑블루]라는 영화의 포스터에 대해 눈짓발짓 동원해 잡담하다 딱 걸려서 짝꿍은 교실 밖에 서있고, 나는 교실 뒤에 무릎꿇고 앉아야 했던 그때를 말해볼까. 나무로 된 바닥이 차고 딱딱하다며 뒤에 앉은 친구들이 저마다 교과서 한 권이나 책받침을 내밀던 사랑스러웠던 순간. 친구들아, 그때 정말로 사랑스러웠어,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 짝꿍과 나는 키가 비슷해 키순서대로 하면 언제나 짝이 되었는데(전혀 서로에게 호감가질 타입들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 걸 보면;; 걔는 새침한 모범생 타입이었고 나는ㅠㅠ), 그래서 억지로 우정과 신뢰를 같은 시공간에서 쌓아나갔다는 게 더 정확한데, 어쨌든 또 다른 어느 날에 우리는 연습장인가 노트에 동그라미를 크게 하나 그려놓고 공간의 1차원,2차원,3차원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공대 지원이 당연시되는 조숙한 이과반 여학생들의 드물게 쓸데있는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였달까. 1학년 때는 문과/이과를 나누지 않았지만 친구와 나는 이과반을 지망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구와 우주를 갈라놓고 인간은 동그라미 선 위에 살고 이것이 1차원,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면 2차원, 동그라미를 벗어나 살면 3차원 뭐 그렇게. 쉬는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하다가 까다로운 과목쌤 수업시간에 또 걸렸을 때 우린 벌서며 킥킥댔고 교무실까지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린 어떤 프랑스 영화와 시공간의 과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혼나야 하는 건가, 뭐 그런 대화를 하면서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도 대화를 이어갔던 웃긴 기억이 있다. 1999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시간여행자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하루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지만 일단 이 긴 리뷰를 써갈겨댔던 <1Q84>는 어떤가. 난 언제나 하루키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았지만 경이로울 만큼 매료되어서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가지치기가 가능해 다채롭게 읽히고 또한 해석이 가능한 그의 소설리뷰를 쓸 때 주목한 부분 역시 여러 명으로 쪼개지는 '나'라는 존재와 시공간여행이었다. 두 개의 달이 가르는 세상. 나이와 시간이 인위적으로 가르는 나. 방금 전의 나와 잠시 후의 나.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면 충분히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이 되고도 남았다. 이 모든 시작이 반드시, if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은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 그러니까 대장을 구하기 위해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는 때마다 제모습을 여는 하늘문을 오가며 외롭고 아프게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진행중일 것이다. 시간여행은,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언제나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하늘 아래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은 결코 없지만. 내가 여기, 그가 거기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런 것. 하나의 선에서 두 개의 점이 함께 평생토록 행복하기란 애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처음 하늘문을 넘어 그를 구할 온갖 약과 도구를 챙겨 다시 하늘문을 넘었을 때 하늘문 너머 세상은 그와 함께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울고 웃었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100년 전의 세상이었다. 제기랄,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도 아니고-_-;;

 

그래서 그녀는 쓴다. 방금 살았던 그와의 추억 속에 있는 시간들 중에 겪었던 수많은 고비마다의 해결법을, 사실 해결이라기에는 가이드라인에도 못 미치는 메모이지만 혹시 몰라서, 그가 위험한 순간, 왕에게로 가야 하는 순간, 사랑한 순간, 아파한 순간, 헤어질 지도 모르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저기 숨겨놓는다. 100년 후 고려 공민왕 시대.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기철은 이것들 중 몇 개를 손에 넣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이라 굳게 믿은 나머지 거의 유물 다루듯 그렇게. 거기에는 100년 후 나타날 은수가 쓰던 의료도구와 은수만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적힌 수첩, 빼곡한 일기와 메모들. 앞으로 펼쳐질 미래들. 100년 후 맞닥뜨려 헤쳐나가야 할 시간들이 빽빽히 적혀있다. 그것들이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고려의 현대인이었던 것이다. 가지고 더 가지고 손에 넣고 다시 버리고 그렇게 공허와 탐욕 사이를 한없이 방황하는 그런 현대인.

 

시간은 평행하다.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100년 전의 나와 10년 전의 나와 1000년 후의 내가 모두 이 세상 아래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여행자는 말한다. 각자의 내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이걸 인정해야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순간 만난 일이 기적이 된다고. 은수에게 최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은수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이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른 세상에 떨어져 나의 그리움이 모자랐을까, 아니면 믿음이..라고 자책하던 은수는 언제까지나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에게로 가는 시간여행자를 자처할테니까. 그의 목숨이 곧 사랑이었음을 알고 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그것 뿐일테니까.

 

이것이 이 모든 시간여행자들의 사랑과 추억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이론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시간은 앞으로만 흐를 뿐 절대 뒤로는 흐르지 못한다. 하늘문이 열려야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뿐. 100년 전 써둔 바위틈의 이끼낀 필름통 속 메모를 100년 후에 발견할 수는 있어도 시간을 거스르거나 빨리감지는 못하는 법. 그래서 시간여행을 잘못한 그녀를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 그는 그녀를 만난 기억이 없으니까. 손택은 저서 [문학은 자유다]에서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 시공간을 시간여행자들은 초월하는 것이다. 두 개 중 어느 하나만 벗어나도 나와 너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데 두 개 모두 합치하거나 하나도 합치하지 못하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읽지 않은 책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면 확 빨려든 문장이었단 얘긴데, 우연찮게 얼마 전 신형철의 칼럼에서도 손택의 이 문장을 만나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손택은 진리다. 어제는 손택의 비평집을 후보군의 책들을 끌어내리며 눈물을 머금고 질렀다. 다른 텍스트에 대해 얘기해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보다 이곳과 저곳이라는 공간으로 더 먹혀드는 곳이 있다. 드라마 [울랄라 부부]에 의하면 전생의 원수가 이승에서 부부로 만나는 거란다. 개는 인간들로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이승의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난다는 말까지 있다. 게다가 나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다. 다음은, 바로 그 사랑이 이뤄지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이승과 저승을 말하는 드라마 [아랑사또전] 얘기다. 아랑은 무슨 연유인지 모른 채 저승사자를 따라 망각의 강을 건너 저승의 숲으로 들어간 와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지만 이승에서 대체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왜 죽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랑은 자신에 대해 찾기 위해 사또 은오를 찾아갔다 사랑에 빠진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은 맘씨 좋은 옥황상제에게 보름달 세 개의 시간을 받고 죽음의 비밀을 찾아나선다. 둘 다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면서 사람으로 이승을 떠돌다 만나 사랑에 빠진 이들을 가로막는 건 한 공간에 있을 수 없고 한 시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은오는 아랑을 살리기 위해 저승길로 가고 아랑은 한 번 가본 저승길을 떠올리며 가는 길에 만나는 망각의 물을 절대 떠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옥황상제의 배려로 환생한 그들은 꼬마로 만난다. 이승과 저승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승에 살더라도 이 시대와 저 시대가 또 두 사람을 가를 수 있으니까. 그럼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또 어떤가.

 

이 소설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30년의 세월에 초점을 맞춰보자. 다분히 의도로 보이는 장면이고 그래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갈등이 첨예하지 못하다. 더 깊고 뭉클한 데가 많다. 여백의 美 보다는 보여주기가 우선하는 영화로는 적합치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문학으로만 존재해야 할 이 소설은 바로 그 문학적인 면이 해석과 상상과 비극을 동시에 불러온다. 과거의 일을 원인으로, 미래의 일을 결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 모든 이들은 자기가 처한 혹은 만들어낸 현실의 기준으로 사건을 천명(闡明)하는 것. 해석. 시공간의 괴리는 그것을 불가능케 하고, 소설의 바깥에서 우리가 보는 진실 역시, 마지막 남은 이의 목소리 뿐이다. 마지막 남은 이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보이는 진실이다. 시공간의 왜곡이란, 진실을 얼만큼 빗겨갈 수 있나.

 

천산수도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자국. 3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펼쳐지는 두 개의 진실들. 마주하는 명제는 이것. 시공간의 일방향성.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시공간은 변하는 것. 나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같은 것. 과거는 미래를 바꾸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닮았을지언정 둘은 결코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합할 수 없으므로. 천산수도원 묘지 안의 벽서. 성경구절들. 맞춰지는 퍼즐은 누군가의 상상 속 소설이 아니라 진실이 확실한가.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이제는 확인해줄 수 없는, 누구도 전체조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게 이 소설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인현왕후의 남자] 속 남자 붕도는 저곳에서는 쿠데타에 얽매인, 왕비를 지켜야 하는 비운의 무사로 적에게 죽임 당할 위기에 있지만, 이곳에서도 인현왕후의 남자로밖에는 살지 못한다. 조선 숙종 시대의 인현왕후 시해시도의 밤과 재기를 앞둔 발랄한 스캔들메이커 여배우 희진을 이어주는 건, 조선시대 붕도를 마음에 품은 어느 유곽의 기생이 준 부적 한 장이다. 이 드라마는 로맨스면에서만 탁월하다. 그리고 생생히 재생되는 조선시대상. 현대는 억지스럽지만 그 긴박함은 좋았다. 그리고 애정씬. 둘은 미치게 잘 어울렸다. 사랑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함께 있지 못하면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까. 둘은 늘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경복궁에서도 제주 공중전화박스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기다린다. 시공간을 다루는 어느 드라마도 이토록 빈번히 이동을 시도하지는 않았는데 이 드라마만은 유일하게 이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이곳에 나타나고, 저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저곳에 나타나는 인현왕후의 남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동해번쩍, 서해번쩍 홍길동 아니 이 세상에 번쩍, 저 세상에 번쩍 하는 인현왕후의 호위무사 김붕도였다. 둘이 처음 만난 경복궁. 지금 이 순간, 인현왕후와 그녀의 잊혀진 무사에 대한 숨겨진 역사다큐의 내레이션을 맡은 희진. 희진은 붕도를 느낀다. 둘은 그렇게 40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한곳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진실을 부여잡은 채, 자신의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 모든 식물, 모든 동물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서식하며 서로 파괴하는 과정에서, 절대 실질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 속에서 하나의 다양성을 맞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무심하게 서로 밀치고 파괴하며 번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는 얼마 후 또 다른 형태를 취하며, 그들을 움직이기를 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의 뜻에 따라, 단 하루 사이에도 수천 번씩 그 형태를 바꿀 수도 있으되, 자연의 어느 한 법칙도 그 일로 인해 단 한순간이나마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사드, <미덕의 불운> 중에서]

 

사드의 소설 속 맥락은 그런 게 아니지만, 딱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그래, 괜찮다. 우리가 어떤 존재라도, 어떤 형태라도, 어떤 변화를 맞이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 시간여행자를 이해하려면 남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 생각은, 사드의 문장을 끌어오기 전 이 페이퍼를 딱 끝냈으면 좋을 뻔했다. 말이 길어지면 늘 후회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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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는 시간 여행 보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더 좋아요. 어쨌든, 이건 할 소리가 아니고, 저는 예전에 시간여행자의 아내 였던가 하는 책에 구미가 당겨 언젠간 읽겠다 다짐을 했었지만 입때껏 읽지 않고 있어요. 시간 여행은 그 이름 만큼 흥미롭고 다채로운 주제이지만 또 그만큼 뻔하고 지루한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나저나 아이님 아랑사또전 정말 좋아하시나봅니다ㅎㅎ 또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2-11-17 15:5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안녕. 우왕 반가운 마나짱!!! 안녕안녕.

저도요, 그때 그 책 구판으로 우리집에 있다니까요. 먼지 쌓여서. 별로 재미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읽다 말았어--; 아랑사또전(이거 말하기 싫지만) 진짜 재미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나는 스무번을 봤어요. 스무시간을 넘도록 봤어..( '')

오랜만이에요! 주말에 뭐해요?

댈러웨이 2012-11-1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로운 거 하나 배웠어요. 시간여행이라는 용어가 있는 거네요. 상대성 이론이랑 막 연결되네요? (지금 공부 못한 거 티 내는 거죠?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저는 올해 그런 걸 다룬 책이나 영화를 뭘 봤나 싶은데, 생각나는 게 마땅히 없네요.

이 다방면으로 커버한 페이퍼에 어떤 댓글을 달까 무지 고민하다가, 1. 손택 질렀군요? <타인의 고통>은 완독한 거에요? 2. <지상의 노래>는 이번 주문에서도 밀렸어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ㅠ.ㅠ 3. 저 문단만 저렇게 떼어놓고 보니까 사드의 <미덕의 불운>이 정말 읽고 싶어지는 거에요. orz.

한 페이퍼당 한약 일주일치, 도합 한약 2주일치를 폭탄으로다가! 이 페이펀 참 재미나서 용서해주겠어요! 아이님, 안녕!

아이리시스 2012-11-17 21: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시간여행자라고 했어요. 과학공부하기 싫어요. 재밌을 것 같은데 혼자하기는 싫어요. 멋지지 않아요? 시간여행해서 꼬마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거나 20대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고 싶어요. 사실은 저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못다한 사랑을 이루러..( '')

<타인의 고통> 다 못 읽었어요. 매번 펼쳐서 읽다가 자고 읽다가 자고 그래요. 어제는 [해석에 반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잤어요. 논문공부하는 줄 알았;; <지상의 노래>는 재미있어요. 그러니까요. <미덕의 불운>의 가독성은 저한테 짱이었어요.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최근에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이 없었거든요.

사실은 이거는 <신의> 마지막회볼 때 썼던 거니까 오래 전에 쓴 건데, 지난 달에 쓴 거예요. 지금 끝나고 시작한 드라마가 2주나 방영했어요--; 게으름이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어요.

댈러웨이 2012-11-17 22:03   좋아요 0 | URL
저는 못 읽은 책들을 좀 읽으러..(쿨럭~) 그리고 저는 지금의 모습이 더 나아요! 근데 꼬마 때는 정말정말 구엽긴 했어요..(쿨럭~) 아 이 페이퍼는 이런 댓글 다는 페이퍼가 아닌거죠??? 저는 제 방인줄 알았다는. --;

아이리시스 2012-11-17 22:18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거긴 지금 12시 17분이예요? 그러니까 일요일? 저는 지금까지 쭈욱 우리가 처음 알게된 때부터 방금까지 쭈욱 제가 더 빨리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저는 말을 안하고 있으면 꽤 똑똑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2-11-1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 님, 안녕? 여전히 잘 하고 계세요. 흐뭇...ㅋ

아이리시스 2012-11-19 02:0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우리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맥거핀 2012-11-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솔직히 추천을 잘 안하는데 이글에는 추천을 눌렀습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시간이나 공간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뭐 꼭 시간여행이나 시간 거스르기 같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어떤 영화에서 어떤 한 장면에서 며칠 후의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을 압축하는 것이고, 그 시간을 생략하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고, 또 그 (압축된) 중간을 상상하라는 관객에게 보내는 권유이기도 하죠. (물론 공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구요.) 그런데 그것이 종종 색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경우들이 있고, 그런 영화들, 그런 이야기들에는 늘 매료되는 것 같아요. (오..진짜 손택의 저 말은 명문이군요.)

아..물론 이 글의 핵심은 나는 고딩 쉬는 시간에도 '차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했던 여자야, 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

아이리시스 2012-11-19 02:13   좋아요 0 | URL
우왕, 추천 잘 안하는 남자 맥거핀님께 낙점된 글입니다(으쌰으쌰).. 그런데 같은 이유로 저도 이 글이 맘에 들어요. 살짝 서정성도 있고 철학성도 있고. 그런데 텍스트를 드라마로 채워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제 드라마 편애 때문이기도 하고, 제 생각에는 맥거핀님이 이 주제로 글을 쓰면 참 재밌을 것 같아요. 좋은 영화들이 등장하는 멋진 글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이미 손택의 저 말을 외워버렸어요..

네, 이 글의 핵심은 고딩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로 타임슬립한 저의 시간여행에 대한 얘기랍니다. 딴 얘기를 시작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나고 또 오글거리니까..

굳나잇ㅡ 맥거핀님.

Shining 2012-11-1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드라마... 나는 왜 드라마를 못 보는가... 네, 저 그래서 아이님 드라마 얘기는 타임슬립(!)합니다. 고백할게요, 저는 드라마를 못 볼 뿐 아니라 드라마 관련 얘기도 못 읽더군요(흑).

지상의 노래, 에서 죽어가는 아내와의 이야기, 가 제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 그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말. 전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용납하는 데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주말 내내 초바빴어요_- 오늘 새벽에 글 하나 올리고 지금 다시 보니까 오타와 비문이 장난 아닌... 부끄러워요_-

아이리시스 2012-11-19 15:54   좋아요 0 | URL
어.. 나는 아내와의 이야기 따위는 완전히 까먹어버렸는데요? 저는 교차편집만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성서구절.. 저 성경책 펼쳐서 사무엘하 13장 읽었어요. 요즘은 랭보의 시를 베껴쓰고 있어요!

같은 드라마(적 요소라고는 해도) 저는 시트콤을 못보거든요. 그냥 그렇게 안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왜 그런 지는 나름 분석이 가능하고 샤이닝님도 알 것 같은데 그거에 대해서는 패스. 저는 아마 잠을 줄여서라도 볼 것 같은 이런 집착--;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확인차원이랄까. 얼마 전까지는 송중기의 사랑을 받는 문채원한테 빙의했다가.. 이제는.. [뮤직뱅크 in 칠레] 이런 거 보면서 흐뭇하다는;; (도대체 나의 취향은--;)

그러면 샤이닝님은 미드나 영드도 안봐요? 이건 좀 궁금하다.. 그건 뭐랄까, 좀 아쉬운데요?

Shining 2012-11-20 11:55   좋아요 0 | URL
일드는 본 적 없지만 미드나 영드는 꽤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많이 본 건 아니고 보다가 중간쯤 버려둔(로스트, 나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등등) 것들이 많구요_-; CSI는 광팬이고 멘탈리스트나 캐슬, 화이트 칼라 같은 거 잘 보는 편인데 대신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보는ㅋㅋㅋㅋ

그러니까 저는 연재를 못 기다리나봐요! 연재소설도 연재만화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보는 걸 보면 그것도 하나의 요인인 것 같아요. 드라마는 최소 16시간 적어도 20시간의 연재를 기다려야하고 클리셰를 견뎌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_- 한 번 보고 오 재밌네, 해도 잊어버리는; 그 다음날 챙겨보는 건 못해요. 아니다, 사실 TV 자체를 잘 안 봐요. 뉴스, 스포츠채널, OCN이나 채널 CGV, 주말 예능(무한도전 빼곤 그것도 챙겨보진 않고;) 이 정도만 봐요ㅎㅎ

근데 뭐지... 쓰다 보니 저의 TV시청 패턴을 다 쓰고 있어ㅋㅋ

아이리시스 2012-11-20 17:04   좋아요 0 | URL
응, 샤이닝님 얘기를 똑같이 하는 동생이 우리집에도 있거든요. 미드나 영드는 원래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끝내는 게 정석입니다(!) 요즘 물이 올라서 우리나라 것도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근데 역시 드라마는 일상 속으로 침투시켜서 하루에 한 회씩 보는 연재물 같은 느낌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송중기를 주말 내도록 보면서 생각했어요ㅋㅋㅋ

게다가 드라마 보다는 늘 제 '드라마에 관한 글'이 더 재미있다고 확신합니다!!!(응?)
^_______________^

2012-11-19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0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쯤의 감흥과 댓글용 코멘트를 다 잊어버렸어요. 핸폰으로 읽고 쓰는 중이라 정교하지 못해요~. 아 컴터하기 넘 힘들어요. 집에선 인터넷이 안 되고 직장에선 빨리 퇴근하고 싶고.. 집에 가면 전 석기시대여요. 요즘은 티비도 안 보니까 집에 가면 목욕하고 음악듣고 책읽으며 동굴 파다가 잔다지요~.ㅎㅎ 아이님 이 글 중간에 좋은 게 많았어요. 1q84부분, 고딩회상부분, 손택의 명문장.. 다른 부분의 글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특히 더 좋았더라는.. 신의, 마지막 세 개만 봤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댓글 엉망이죠? 이해하세요.. 투썸에서 야밤에 마땅히 멀리 해야 할 케잌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검지만으로 이 글 쓰고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2-11-20 17:18   좋아요 0 | URL
아니 핸폰으로 이렇게 긴 댓글도 쓰다니, 섬님 짱!! 집에서는 왜 인터넷이 안되는 거여요? 저희집에는 제가 와이파이도 손수 넣어놓고 원래 데스크탑에 들어오는 과속 케이블로부터 연결된 공유기도 있고, 다른집 인터넷도 엄청 잡히던데 그래서 하나 드리고 싶은 심정이여요. 그런데 케잌과 커피와 함께하는 야밤의 알라딘도 재미가 있으니까요. 시골가면 그렇게 되잖아요. 예전에는 산으로 뛰어다니고 나가서 숨바꼭질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커서 각자 노트북/스맛폰 이런 거 다들 들고 시골로 모여드니까 여튼 풍경이 확 변했어요. 동굴 파는 느낌 그것도 굉장히 괜찮은데~ㅎㅎ

제 글이 좋은 건 저도 알아요. 제가 요즘 좀 미친 것 같으니까요, 제 말은 걸러서 들으셔야 돼요!! 꼭이요!!!

루쉰P 2012-11-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시간여행자 한 명 돌아왔어요 제 서재 가 보세요 ^^

아이리시스 2012-11-20 17:19   좋아요 0 | URL
루쉰님 진짜 시간여행자 같아요.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낯설고 반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