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들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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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의 기원을 말하려면 목축과 수렵을 거쳐 농경사회로 이어지는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농경의 발달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고, 자급자족 대신 저장과 교환을 매개로 하는 화폐가 등장한다. 이로서 곡식이나 화폐가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연장자순, 나중에는 재산(사람이나 재물)을 곧 권력으로, 우두머리가 생기고 지배력에 의존함으로서 관리와 노동의 관계가 성립된다. 미국이 흑과 백의 이데올로기 즉, 인종문제를 약 300년 역사로 어림잡는 것은 미합중국의 연대기가 짧아서이지, 이와 닮은 문제가 이전이나 이후에 전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나 싶더니 인종분리정책이라는 또다른 모습의 차별이 등장한다. 흑인을 인종소수자로 하여 시작된 흑인불평등 사회에 이 작가가 있다. 흑인작가가 빈번하게 다루는 주제가 흑백 간의 인종갈등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직접 그런 현실을 당하고 봐왔기 때문이다. 종종 계급과 성 문제가 더해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종속관계나 여성에 대한 성차별로도 나타난다. 미국에서 흑인여성으로 사는 것은 농장의 소로 사는 것만큼이나 처절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남부 농장지대에서 태어나 이미 미합중국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잡은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1861-1865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이 종료되고도 45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백인 소유의 농장에서 일하며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늘 배를 곯으며 사는 남부 흑인들에게 북부의 산업도시는 마지막 남은 '꿈의 도시'이다. 소년 리처드 라이트 또한 다르지 않아서 부푼 희망을 안고 북부에 발을 들여놓지만 화려한 도시의 눈부심에도 불구하고 남부와 마찬가지로 좌절과 공포가 음습하는 흑인을 향한 백인의 폭력을 자각한다. 그는 깨어지지 않을 듯 단단한 세상의 와해를 위해, 백과 흑,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문제를 알리고 소통하기 위해 작품을 써왔다. 

나무 십자가가 비거의 가슴에 걸려 살갗에 닿았다. 그는 목사의 말을, 삶이란 세상에 못 박힌 육신이라는 것을, 흙의 나날에 갇혀 갈구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미국의 아들>은 시카고의 흑인 빈민가를 배경으로 흑인 소년 비거의 비정한 현실을 심층적으로 담는다. 부유한 백인가정의 운전기사로 취직한 첫 날, 그 집 딸을 살해한 이후의 감정묘사와 도주과정, 재판의 변론을 통해 인종 갈등과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1920-1930년대의 사회상 속에 개인상을 녹여낸다. 1940년 출간된 소설 속의 흑인 소년 비거와 현재 미국 땅에 거주하는 흑인 소년의 모습은 과연 다른가. 빈민가에서 푸대접으로 일하며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고, 많은 경우가 사회에 만연한 인종갈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렇지 못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흑인 대통령의 시대를 두 번이나 연 세계최강국 미국조차 흑백 간 충돌, 흑인에게 불리한 차별과 억압, 남과 북의 격차, 가난과 결핍 그리고 소외, 이 모든 것을 어쩌지 못한다.

 

 

북부도시 빈민가. 바퀴가 득실대는 좁은 방에 엄마와 비거, 두 동생이 산다. 스무살 비거에게 엄마는 백인 가정에 들어가 운전기사가 되기를 종용하고, 딱히 더 할 것이 없는 비거는 면접을 보기 위해 백인의 집으로 간다. 희망 없는 삶과 청춘이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다르지 않은 말이다. 면접 날, 합격통보를 받은 길에 딸 메리의 부탁으로 데려다주면서 메리와 남자친구 잰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메리와 잰은 비거의 공간을 헤집고 들어온다. 두 사람이 귀찮기만 한 비거에게는 흑인의 인권과 평등을 부르짖는 그들이 여느 백인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흑인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다가오는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비거에게 그날 밤 일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일 뿐이었다. 바로 그 날, 지금껏 당해온 서러움과 울분이 일촉즉발하여 쏟아진다. 취한 메리를 방까지 옮기다 사람 기척에 놀라 술투정하는 그녀의 입을 베개로 막았다. 잠시 후, 그녀는 더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처음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비거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원망과 복수의 칼을 숨겨둔 무서운 불꽃이었다. 곧 메리를 죽인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통쾌한 복수라 여긴다. 살기 위해 죽였다는 비거의 마지막 변론이 당시 백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살기 위해 살인하는 것. 그런 이상한 논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비거는 숨이 끊어진 메리를 트렁크에 들어가게 잘라 들고 내려와 거실 벽난로 속에 던져버린다. 후에 여자친구 집에서 메리의 납치극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편지를 쓴다. 사건은 점점 죄가 죄를 낳는 연쇄현상을 띠기 시작한다. 행위 자체는 실수지만 비거를 짓누르는 백인에 대한 분노가 이미 허용할 수준을 넘었다는 것에서 개인적 분노가 사회적 분노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날 버젓이 메리의 방에 들어가거나, 행여 살점이 남았을까 벽난로 곁을 서성이거나, 자기 몫으로 차려진 아침을 약간 떨면서도 태연히 먹는 것에서 그가 내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혹은 타당화 하고있음을 본다. 증인신문에서는 잰을 살인용의자로 몰기까지 한다. 비거의 죄는 처음에는 한낱 개인의 실수였다가, 다소간의 인종적 지능범죄였다가, '소수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흑인집단의 고통으로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겨우 인종범죄의 희생양으로 탈바꿈한다. 비거는 메리의 방에서 우연히 메리를 죽였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거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 혹은 사회였다면 비거가 과연 메리의 방에 둘만 있다는 것과 메리가 술에 취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숨통이 끊어질 정도로 세게 베개를 눌러야 했을까. 

재판장님, 저는 이 피의 순환을 씻어내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깊이 파고들어, 증오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복수 밑에 어떤 충동들이 얽혀 있는지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만일 단지 일이십명의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면 불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는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했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가 이삽년 계속되었다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백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삼 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고 수십만 제곱미터에 걸쳐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란 더이상 불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살인은 내면적인 동기로 일어났다. 차별당한 모든 흑인이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거는 살인했다. 무너진 자존심, 순환되는 가난,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 소외된 흑인이라는 지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번듯한 일자리, 반복되는 괄시와 무시, 빈번한 핀잔. 이 모든 것이 살인의 동기였다. 이 모든 것이 메리 즉 백인을 죽였다. 비거에게 씌인 살인동기는 '강간', 계획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여자친구마저 죽인 비거에게 아무도 그녀의 목숨값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흑인 여자는 다만 백인 여자의 살인증거로 활용될 뿐이다. 밥을 주지 않는 것과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은 사람이라서 빵만으로는 온전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흑인들의 소망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노력한 만큼 얻는 백인과 같이 공부하고 일하며 그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 단지 사람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것뿐임에도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 외의 잔인함과 사악함이다. 하필이면 메리의 가족처럼 흑인에게 유연한 태도를 취해 온 사람들이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사태의 추이를 설명한다. 흑인을 고통을 이해하고, 흑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흑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한 메리를 죽이고 잰을 곤궁에 빠뜨림으로서 얻어낸 허한 자유, 비거에게 그것은 살아있다는 자각이자, 자존감의 발로였다. 백인에게 흑인이 그랬듯 흑인 비거에게도 백인이 세상에 단 한 종류 뿐이었던 탓이다. 


재판장님, 불의는 한가지 형태의 삶을 송두리째 없애버리지만, 그 자리에는 그 나름의 권리와 욕구와 열망을 지닌 다른 형태의 삶이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자행되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억압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질식시키고 짓밟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 당혹감을 안겨주고, 돌 밑에서 자라난 잡초처럼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삶입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비추어 파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이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의식과 분노의 감정을 또다른 살인으로 달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묘미는 재판과정에서 흑인에게 우호적인 변호사, 형량을 줄이기 위해 오로지 흑인 입장에서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를 향해 내뱉는 비거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 죄는 나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제아무리 잘났어도 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해진 관습(불문법)과 제도(성문법)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제도는 여러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만 한 번 결정되면 쳇바퀴 돌듯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가혹하기 짝이 없다. 흑인이 삼 세기동안 겪은 뼈를 깎는 고통 속의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억압을 백인에게도 겪어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현상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입장을 바꿔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역할놀이 정도를 해볼 수는 있다. 리처드 라이트, 알렉스 헤일리, 제임스 웰든 존슨,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 같은 미국의 흑인작가들이 하는 일 또한 백인과 흑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일 터, 이제는 서로를 향한 원망이나 복수 보다는 이해와 타협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흑인과 백인의 목숨값과 죗값은 왜 다를 수밖에 없으며 또 달라야 하는지, 가진 것이 없는 자와 가진 것이 많은 자의 목숨값과 죗값은 왜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는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의 울음과 한국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의 울음의 가치가 어째서 다르게 여겨지는지, 우리는 알면서도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지 않는다. 비거는 살기 위해 죽고, 죽기 위해 산다. 비거에게 있어 백인 여자를 죽인 대가로 사형당하는 일과 미국에서 흑인 소년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스무살 청년이 사회가 쳐놓은 인종차별의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시련 속에 뒹굴었는지 생각해본다면 누구도 비거에게 종신형을 내릴 수 없다. 사회적 타살 앞에 우리 모두는 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강약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 세상의 구조는 더욱 굳건해지고, 핏빛 진실이 더욱 입을 앙다무는 침묵의 사회로 변한다. 바깥이 이토록 시끄러워서일까,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하는 이 세상이 어쩌면 지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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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09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쓰신 대로 비슷한 느낌의 영화가 상당히 꽤 있을 듯 합니다. 아니..이 영화가 원작이었나, 분명히 이와 비슷한 스토리의 영화 소개를(영화 자체가 아니라) 본 것 같기도 하구요. 왠지 그리피스 감독 영화 같은 느낌? 아니면 인종차별 문제를 뺀다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아무튼 이 흑인과 백인의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다른 여러가지를 대입해도 상당히 잘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또한 비극적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아이리시스 2013-01-10 00:22   좋아요 0 | URL
저는 다시 읽어보아도 이 리뷰가 맘에 들지 않아요. 생각이 막 떠도는데 반의 반도 붙잡아놓지 못한 채 쓴 글처럼 여겨져서요. 추천이 8이라니, 뭔가를 아는 분들 같아서 80보다도 좋아요. 맘이 놓여요. 글올릴 때 약간 예상을 해보는데 이 리뷰를 읽을 사람은 셋 정도, 어쩌면 그 세 분도 읽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추측했어요. 그만큼 딱딱하고 난해하고 복잡했어요. 창비세계문학 2차분 출간 전에 1차분에 모조리 리뷰 달겠다는 다짐을 했거든요, 민음사,열린책들,문학동네는 너무 많아서 힘들어서요--@ 저는 알고 있었어요. 비슷한 느낌의 영화를 맥거핀님이 알려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이 책에서 난로 속에 시체 던져 넣잖아요. 결국 뼛조각이 발견되긴한데, 통풍구가 막혀서 그걸 헤집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하룻밤 내도록 시체가 타고 있는데 그 누구도 아무 냄새를 못 맡았는지 신기해요. 벽난로는 원래 그런가요? 냄새가 바깥으로--; 그러니까 이게 너무 이해가 안가요ㅠ.ㅠ

댈러웨이 2013-01-0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작년부터 이쪽으로 꽤 파지 않았어요. 흑인, 인종차별, 아프리카...등등. 묶어서 글 쓰면 근사한 페이퍼 하나 나올 것 같은데요.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책 읽어갈 수록 문제작인 것 같은데, 창비에서 이번에 처음 번역출판해서 나왔나봐요. 작가가 생소해서 구글링까지 했어요.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책도 오래전에 읽었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이런 내용, 좀 무겁죠. 잘 알지도 못하겠고. 알려고 노력해야죠.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10 00:27   좋아요 0 | URL
토니 모리슨, 앨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를 읽었고, 아프리카 문학을 좋아해서 몇 권 사두었어요. 그렇기는한데, 더는 백인나라에서 고통받는 흑인얘기에는 흥미가 없었거든요. 내용이 이런 걸 알았다면 아마--; 저도 처음 보는 작가였는데 아래 루쉰님은 벌써 읽으셨다고 하네요. 놀라워@.@ 저는 뿌리는 안 읽었어요. 무겁고 머리도 아픈데 문장이 쉬워서인지 금방 읽혔어요. 댈러웨이님 고마워요^^

루쉰P 2013-01-0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이트의 글을 읽으셨군요 ^^ 전 이 작품보다 예전에 번역돼 나왔던 아메리카의 굶주림이라는 라이트의 자전적 소설이 참 좋았었어요 ㅋ 와우, 이걸 살려고 생각했는 데 내용이 정말 무시무시하네여 -.- 아이리시스님 덕분에 더 사고 싶어지네여 ㅎㅎ 흑인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라이트이지만 백인 여성과 결혼하고 자기가 분노했던 삶에 비슷해지다가 몰락한 이 사람의 삶 때문에 -.- 제 기억이 맞다면 말이지요~흑인 작가를 꽤나 좋아하고 옆 동네 형처럼 생각하는 저지만 좀 정이 안 가더라구여 -.- 전 뭐랄까 작가의 삶이 그가 쓴 내용과 반대로 갈 때는 자신의 삶을 상실한 사람으로 보는 측면이 있어서요 ^^; 루쉰 선생의 혁명가만이 혁명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의견을 지지 하는 편이라 ㅎㅎㅎ 그래도 라이트의 작품이 이렇게 번역돼 나오니 읽어야 겠어요! 아 참 그리고 저 리뷰 대회 나갈려구여! 마쓰모토 세이초 옹의 '미쓰테리의 계보'로 한 번 도전해 볼랍니다 ㅋㅋ 아이리시스님도 얼렁 동참하셔요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3-01-10 00:36   좋아요 0 | URL
저도 댈러웨이님처럼 라이트가 처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루쉰님은 역시 읽으셨군요. 그런데 다른 번역본은 어디에..( '') 백인 여성과 결혼하고 자기가 분노했던 삶에 비슷해지다 몰락했다는 얘기는 흥미로워요. 누구 생각도 막 나고--; 그치만 어느 사회에서든 기득권을 갖게 되면 비슷한 모습이 되니까요. 작가의 삶이 작품과 꼭 같으란 법도 없고 그렇지만도 않겠지만 그것들이 정이 안가는 건 루쉰님과 비슷한 마음이에요. 백인 여성과 결혼해서가 아니라 기득권을 가지게 되어서가 아니었을까요? 단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하층민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고 한다면요. 근데 라이트를 제가 변론할 필요가 없죠, 끙..

루쉰님 반가워요. 리뷰대회 나가시군요. 저는 벌써 몇 편 나갔는데, 푸핫. 얼른 나오세요. 루쉰님이 상금 타서 저 책 사주시는 겁니다, 강요강요ㅋㅋ

아이리시스 2013-01-10 01:02   좋아요 0 | URL
맞다, 루쉰님. 이 책은 지난 달에 읽었고 저 이번 달에 유일하게 읽은 책이 <미스터리의 계보>인데요. 그럼 그건 리뷰 안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왜냐면 비교당하기 싫...............다기 보다는 두렵................다기 보다는 자신이 없................추하다ㅠ.ㅠ 우리가 이런 대화를 했으니 비교 안해도 비교가 되게 되어 있잖아요. 저라면 비교를 해보겠어요. 재밌겠어ㅋㅋㅋ

루쉰P 2013-01-10 16:38   좋아요 0 | URL
'아메리카의 굶주림'은 제 서재 '서평 잡문'이란 카테고리에 실려있어요. 제가 손수 찍은 손사진과 함께요 ㅋㅋㅋ 아이리시스님 말씀처럼 기득권, 권력을 잡은 게, 그게 핵심인 듯 싶어요~ 전 항상 기득권과는 멀기에 기득권을 가진다면 제대로 한번 써보고 싶다고 에,,그러니까 정의를 위해서 말이죠. ㅋ 근데 전혀 이뤄지지 않는 소망이더라구요. 푸하하하

상금 타면 진짜 책 사드리지요. 푸하하하하

근데 쓸 수나 있을 지 원 -.- 작년에도 쓴다 해놓고 못 써서...

루쉰P 2013-01-10 16:39   좋아요 0 | URL
엥, 책이 저랑 겹치더라도 올리셔야 되여!!! 제가 못 올릴 수도 있다구요. 저도 못 올리고, 아이리시스님도 저 생각해서 못 올려서 둘 다 못 올리면...에 이건 뭐랄까...좀 블랙유머인데요 푸하하하

우리 같이 올려요..제발....

아이리시스 2013-01-10 17: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내가 못살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약에 둘 다 완전 열심히 쓰고 안되면 그건 카카오 100%급 블랙유머인데 으하하하. 저는 뭘 노려서 잘된 적이 인생에서 한 번도 없어요. 요즘은 열심히 로또번호를 맞추고 있지만ㅋㅋ

지금 루쉰님밖에 안계셔서 그런데요, 고양이는 뭘 잘 먹나요?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진짜 추운데 고양이가 양식을 구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집에 생선이나 우유는 없고 오겹살이랑 멸치는 있는데 꼬양이 주겠다고 멸치국물을 끓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슬퍼ㅠ.ㅠ 너무 춥잖아요. 고양이 먹을 거 주고 싶어요. 짜장라면 먹을랬는데 입맛이 혼자 먹을라니까 가버렸어요.

루쉰P 2013-01-11 15:13   좋아요 0 | URL
뜨아..이미 고양이는 가 버린 것 같아요 ^^;;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의외의 동물이기는 할 거에요. 다들 생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음...집 앞에 길거리 고양이들에게 홈플러스에서 파는 강아지 통조림 줬는데 와방 잘 먹더라구요. 글구 뭘 줘도 다 잘 먹어요. 그리하여 결론은 고양이는 뭘 줘도 먹는다는 결론을 얻었죠. 이미 고양이는 간 지 한참 됐겠어요.
그래도 멸치 국물까지 끓이실 생각까지 하다니...성인의 반열에 오를 듯 합니다.

아 저 정말 배꼽 잡고 웃긴 건 둘 다 써서 둘 다 떨어져...ㅋㅋㅋㅋ

아이리시스님은 혼 나셔야 해요 . -.- 뭘 노려서 잘 된적이 없는 인생라니!! 전 그런 말 싫어해요. 뭘 노려서 안 되는 인생이니 더 노려야죠! 책 뚫어지게 끔 노려 보셔서 리뷰 꼭 쓰셔서 당첨금 따세요~!

저요~사실은 안 쓸려고 했는데 아이리시스님 댓글보고 아이리시스님과 '미쓰테리의 계보' 연합 리뷰를 작성해 뭘 노려서 잘 된적이 없는 아이리시스님에게 같이 하면 된다는 태클을 걸고 싶네요!

우리 시합하기에요! 혼자 결정해서 죄송키는 하지만! 토요일 밤 12시까지는 우리 올리자구요! 에라이 모르겠다! 저 노릴꺼에요! 아주 노릴꺼에요! 같이 노리자구요! 세이초 선생께서도 그걸 바라실거에요!
우리 두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이에요!!!

아! 갑자기 스스로에게 감동이 밀려와요. 왠지 오늘따라 제가 마음에 드네요. 거울보고 저를 칭찬해야 겠어요. 푸하하하하!!

아이리시스 2013-01-11 17:41   좋아요 0 | URL
고양이 벌써 갔겠죠. 아님 아파트 뒤 어딘가 구석에 숨어있을지도. 고양이는 원래 동네에 많은데 추우니까 다 숨었는지 안보여서 멸치육수내고 그냥 버릴 때마다 고양이 생각했거든요. 어제는 육수낸 멸치가 없었는데 하필 고양이를 만나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근데 쥐잡아 먹었겠죠, 쥐잡았을 거야.

아이리시스 2013-01-11 18:12   좋아요 0 | URL
참! 근데 저 이제 루쉰님이 리뷰쓴다고 한 약속 믿게요, 안믿게요? 안믿어 안믿어--; 억지로 쓰는 글은 특출나지 않을테니, 입때껏 했던 장난은 다 잊으시고, 루쉰님의 멋진 글 새해에는 꼭 보여주세요. 소설쓰셔도 됩니다ㅎㅎ

근데 생각난김에 새해에는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를 비롯해 아큐정전 꼭 읽어봐야겠어요!(뜬금)
스스로에게 감동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거울보고 칭찬이라니ㅋㅋㅋㅋㅋㅋㅋㅋ

루쉰P 2013-01-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나저나 젤 중요한 말을 안 했어여!!! 새해 복 마니 마니 받으시고! 리뷰 대회 1등하시라!!! 이빠이 이빠이 빌어드릴께여 푸하하하

아이리시스 2013-01-10 00:41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나누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저한테 계속계속 행운을 보내주세요. 리뷰대회는 참가상(그런 게 없죠?)을 목표로, 사놓고 안 읽던 책을 억지로 읽고 리뷰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그치만 상 주시면 고맙게 보관해서 루쉰님 맛난 거 사드리겠습니다. 제 적립금은 원래 책 아니고 기프트용인데 알라딘에서 기프트랑 화장품을 없애버려서 슬프답니다ㅠ.ㅠ 적립금은 여전히 많아요--;

새해에는 저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 절대 없을 것 같아요. 이 더러운 동네ㅋㅋ

마녀고양이 2013-01-1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흑백에 관련된 책(?이라고 할 수 있나?)을 읽어서
같은 주제를 생각하는데, 아이리님 서재에서 보내요. 아아..... 사회적 타살 앞에서 비겁해지는. ㅠㅠ
참 슬픈 일이지요. 슬퍼요.

그래도 오늘 좋은 뉴스 하나 들어서 기쁘기도 했어요.

아이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쪼옥

아이리시스 2013-01-11 17:25   좋아요 0 | URL
사실은 나 하나 좋은 사람이기도 벅찬 삶이니까요. 세상의 편견이나 고질적 병폐에 맞서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새삼 더 대단해보였어요. 대선 이후로는 정말 그래요. 사실 자기 부모도 결국 설득을 못시킨거잖아요. 저도 그 뉴스 들었어요. 새해에는 좀 더 귀 기울이면서 살래요.

달여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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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다섯 살의 교사인 제이크 에핑은 친하게 지내던 레스토랑 주인 앨 다이너의 부탁을 받고 그의 식당으로 간다. 하룻밤새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의 앨은 의아해하는 그를 식료창고로 이끌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얘기를 시작한다. 바로 여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여행의 통로가 있다는 꿈에나 나올 법한 사실. 과거로 들어가 역사를 되돌려 미국의 대통령을 구해내고 전쟁을 막아 인류를 구하자는 앨에게 귀가 솔깃하면서도 믿지 못한다. 맞다. 스티븐 킹이 창조한 주인공 제이크는 또 한 명의 시간여행자이다. 이 소설은 그의 시간여행으로 이루어진다. 제목의 뜻을 1권이 끝날 때까지 몰랐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암호같은 건 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로소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잘생긴데다 젊기까지한 청년스러운 남자 철도직원이 유레일패스 개시할 때 적어주던 숫자가 이런 방식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연도를 저런 식으로 안 쓰거든. 뼛속까지 한국인인 어떤 여자의 비극적 문화충격이랄까.

 

<11/22/63>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 22일을 의미한다.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미국 역사상 선거로 뽑힌 최연소(43세) 대통령으로, 쿠바침공을 시도하다 흐루시초프와의 대결 끝에 소련과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한 외교경력을 가지고 있다. 케네디는 재위 3년(1961-1963)만에 오스왈드에게 저격당했고, 오스왈드 또한 케네디 암살 이틀 후 구치소 이송 도중 잭 루비에게 암살 당하면서 역사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졌다. 암살 이유나 배후에 대해서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시간여행자는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초능력을 지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가고자 하는 시대(시간)를 설정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시간여행자 제이크에게 주어진 여행은 많은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앨의 레스토랑은 조만간 붕괴될 위기인데다, 바로 그곳의 구석지고 어두운 '식료창고'를 통해서만 오로지 '1958년'의 토끼 굴로 들어갈 수 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나갈 경우에는 이전의 바로잡은 상황 전부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리셋. 어리벙벙한 제이크가 선택한 시범무대는 제이크가 근무하는 학교의 수위 해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 해리의 어린시절은 끔찍한 기억으로 얼룩져 있고, 그로인해 다리를 절고 말을 더듬는 장애인이 되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그의 레포트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이크에게는 해리가 겪은 모든 것이 죄악으로 여겨진다. 마침내 운명의 문이 열렸다. 케네디 암살을 막아내는 임무 돌입 이전, 제이크는 1958년의 토끼 굴로 들어가 해리 가족이 겪은 끔찍한 사건을 막아내기로 한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시기는 5.16 군사 쿠데타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때였다. 제이크가 살아야 할 1958년의 상황은 어떤가. 해방 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하던 이승만이 발췌개헌('52)사사오입개헌('54)으로 마구 해드시며 자리를 지키던 시절에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과 전 간부를 북한의 간첩과 내통하고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시킨 이른바 '진보당 사건'의 해이다. 2년 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하였다 실종된 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사체로 인해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항쟁인 4.19 혁명('60)이 일어나고 다음 해 쿠데타로 인해 우리 역사 또한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친다. 해리 가족을 구하러 돌아간 제이크의 얘기로 다시 가보자. 그는 해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현재 그는 없다. 그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건만 다리가 무사한 해리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제이크의 제자는커녕 수위도 되지 못한 채 젊은 시절 삶을 다한다. 딜레마는 바뀐 과거가 현재에 유리하거나 행복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과거의 저항력을 타당화한다.

 

과거가 변화에 저항했던 이유는 미래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해리를 터닝포인트로 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막으려 1958년으로 돌아간 제이크는 5년이나 과거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지만 곧 목숨을 놓게 될 앨의 과제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무려 15년 후에 자신이 태어나게 되는 세상에서 그가 만약 어떤 여자를 사랑하여 아기를 낳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시간여행자의 윤리는 이처럼 모호하고 덧없다. 1권이 제이크가 과거를 시험하는 무대라면, 2권에서는 과거로 들어간 제이크가 분한 '조지 앰버슨'의 삶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조지 앰버슨으로 지내며 한 마을에 녹아들고, 우연히 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함께 근무하는 여선생과 사귀는 일련의 과정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다. 5년 동안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5년이란 유예기간은 턱없이 길게 느껴진다. 미국의 당시 사정을 상세하게 묘사해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주관적 정치판단을 보류한 채 담담히 묘사되는 1958년-1963년까지의 상황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이다. 당시 남미 국가들과의 이런저런 대치상황 중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의 11일 동안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여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는 냉전시대를 설명하는 가장 큰 틀이 된다. 에잇, 스티븐 킹 읽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냉전시대' 그리고 미국과 남아메리카의 관계까지 알아야 하는 더러운 세상. 퉤! (가서 미국 현대사 몇 개 공부하고 옴 - 예를 들자면, 미국 역대 대통령 재임기간이라든지?)

 

무언가를 바꾸려는 것은 그 이상의 엄청난 희생을 예고하는 일이다. 조지(제이크)는 과거의 끈 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새디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했다. 그를 사랑하는 그녀가 기꺼이 선택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죽음과 맞바꾸어지는 것이 인류역사의 물꼬를 트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쉽게 그 길을 택할 지는 미지수다. 그가 멋지게 그 일을 해냈고 그로인해 좀 더 멋진 현재를 살 수 있다고 한대도. 마음이 왜 왔다갔다 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건 편협하고, 무작정 믿어주자니 뼛속까지 못미덥다.

 

선거 때 그 사람을 뽑지는 않았지만, 미국인이니까 그 사람은 그냥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대통령이에요.

 

*

나는 웬만해선 미래로는 안 가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긴 한데(이왕이면 젊고 팔팔한 게 좋지 않겠어?), 그렇다고 과거로 가서 무언가를 막을 힘은 없어. 에너지도 없고 그게 잘될 지에 대한 확신도 없어. 내가 언제나 확신하는 길로만 가는 신중한 겁쟁이는 아니니까 걱정마. 포기는 아니야. 체념이나 절망은 더더구나 아니고. 그냥 좀 지쳤어. 왜 그런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데 제이크가 시도한 시간여행과 역사 바꾸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물론 되살리고 싶은 사람도, 절벽에서 밀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래. 이번엔 먼저 가서 기다릴게. 나 쫓아오지 말고 이 세계 제대로 살다와서 조근조근 얘기해줘. 뭐가 좋았고 어떤 게 나빴는지. 딱 5년만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때 더 안 좋으면 어떡하냐고? 그런 생각을 왜 해. 아니, 그럼 그때 또다시 5년 먼저 가서 기다리지 뭐. 계속계속 그렇게 미래로 가는 거야. 그래, 나는 미래에서 사는 거야. 그럼 나는 일찍 죽겠지. 지구에서 최고 빠른 속도로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런 게 시간여행일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힘들 땐 날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살아. 그러면 우린 각자 어딘가에 살아있는 거야. 시간 다 됐다, 안녕. 미래에서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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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12-3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언제나.. 현재만 좀 제대로 잘 살았음 싶어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54   좋아요 0 | URL
맞아요..시간여행이라서 본 건 아닌데 시간여행만큼 허무맹랑한 얘기도 사실 없는 것 같아요. 현재를 잘 살아보아요, 드림아웃님.

2013-01-01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3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1-03 23:45   좋아요 0 | URL
오, 해변의 카프카로 시작이요. 오케이. 상실의 시대 먼저 읽어도 되겠죠?
아... 안돼 일본 작품은... 일단 피하고 ㅋㅋㅋ 카프카는 대학 들어가서 읽어야겠네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2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안녕.

먼저 읽어도 되겠죠ㅎㅎ 저도 하루키 시작을 열여덟살에 상실의 시대로 했어요. 이건 확실히 기억난다.. 그리고 잡문집 나오기 전까지 스물두세살 학교재학중일 때 거의 다 읽은 것 같아요. 근데 저는 하루키 작품 중에 그게 제일 별로.. 그때 한 번만 읽었는데 그땐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게 그때 베스트셀러여서 친구들끼리 돌려보고 그랬거든요. 이게 왜, 이게 뭐. 이랬던 것 같아요. 덜 컸었으니까. 다시 읽어야지 하고 있어요. 해변의 카프카부터 읽어보라고 전에도 얘기했는데, 내용이 더 훌륭했나 뭐 그런 건 전혀 기억에 없고 다만 주인공이 소년이라서요. 소이진님보다 어리지만, 그러니 더 잘 이해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새해에는 소이진님도 꼭 하루키 독파하기 바래요~!!

맥거핀 2013-01-0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앞으로 남은 5년을 생각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5년동안 사는 이야기를 선택을 하셨군요.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케네디의 암살을 막아내는지도 궁금하구요. 우리 역사에도 몇몇 과거로 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그게 아무래도 케네디의 암살인 모양이예요. 영화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끊임없이 소재가 되는군요. 아이리시스님은 우리 역사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52   좋아요 0 | URL
우와, 맥거핀님 첫문장 멋지네요. 아니, 내가 멋진 건가..( '') 미국인들에게 왜 케네디인가를 말하려면 역사를 좀 알아야겠지만 저는 링컨을 좋아하는데.. 아마 어느 대통령이었더라도 스토리는 같았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은 '그 날'을 막아내기 위해 달려가지, '그 날 이후'를 그리지는 않거든요.

저는 '언제' 보다는 '어떤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는데 시대를 고르자면 자유로운 시대요. 신라에서 고려쯤. 유교덕목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조선은 지긋지긋해요.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이라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사실 여자들이 살기는 지금이 제일 낫죠!ㅎㅎㅎ

transient-guest 2013-01-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놓고 읽지는 못하고 있는데, 흥미가 갑니다. 미래-과거, 그리고 나비효과는 언제나 단골주제인 것 같아요. 특히 이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포장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미래-과거에 대한 타임머신적인 궁금함보다, 그냥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할 때가 있는데, 이때의 저는 highlander처럼 지금의 젊음을 유지하면서 죽지않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머리가 잘리면 죽지요, highland도 -_-:).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39   좋아요 0 | URL
트란님은 원서로 사셨나요? 인사를 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근데 이제라도 하면 되죠! 저는 아직 달력도 다이어리도 가계부도 구입못했고 마침 볼펜도 안나와서 올해 개시도 못하고 있어요ㅎㅎ 그러니 늦은 게 아니랍니다. 트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지난해보다 더 좋은 일 많이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케네디를 살리고 좀 더 바뀐 미래를 그려줘도 좋았을 것 같아요. 정점에서 뚝 끊기는 느낌이 좀 들었거든요.

2013-01-02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3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3-01-03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오랜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주 오진 못했지만 늘 기억하고 있어요. 잊지 않고 인사 나눠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올 해는 자주 찾아 올게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9   좋아요 0 | URL
꿈섬님 저는 꿈섬님이 6개월 정도 후에 제 인사를 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다행이예요. 꺄악~! 감기 조심하시고 지금처럼 무탈하게 지내시다가 한 번씩 살아계신 표시 해주세요ㅎㅎ
 

 

 

 

침대 머리맡에는 그리스 기행서가, 거실에는 보스니아 배경의 문학이, 책상 위에는 비엔나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발칸반도의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인문서, 종일 검색하며 찾아헤매는 책은 터키사나 터키여행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건 보스니아 내전을 구성하게 된 오래된 역사와 발칸반도에 속하는 국가 그러니까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터키-이스탄불의 유럽 부분, 마케도니아 공화국 그리고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의 19세기-20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결국은 동유럽 전반에 걸친 교양지식이다. 쿠르드족의 수난 같은 건 덤으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걸 문학이 해줄 리가 없다. 문학은 언제나 작가의 눈으로 걸러진 세상을 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된다고 배웠다. 쉽게 흥미를 주지만 문학에서 멈추면 아무 것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바로 그 상반된 매력이 문학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읽어내린 <석양 녘의 왈츠>를 먼지 탈탈 털어 다시 들춘다. 지난 번에 헷갈리는 이름들만 확인하며 간신히 덮으며 내 머릿속 세계사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 책이다.

 

 

 

 

 

 

 

 

 

 

 

 

 

 

프레더릭 모턴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말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이질적인 난해함 대신 이해가 쉽도록 풀어쓴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클림트, 테오도어 헤르츨 등의 천재를 낳은, 1888~188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화려함과 황태자 루돌프의 사랑에 관한 비극을 그린다. 그가 특출나게 그리는 배경 역시, 출생답게 오스트리아 역사, 동유럽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로, <석양 녘의 왈츠>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사실 전쟁은 겉으로 밝혀진 가장 큰 불이었을 뿐, 그 전쟁의 밑바닥에 도사린 음모와 어긋난 거래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할아버지가 전장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하여 귀족이 된 트로타 가문 3대의 융성과 몰락에 초점을 맞춰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의 모순과 문제를 파헤치는 소설이다.

 

 

*

 

 

 

 

 

 

 

 

 

 

 

 

 

동유럽 구공산권의 붕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제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아르네 달의 <미스테리오소>에서는 비셰그라드라는 지명이 반복적 등장할 정도로, 스웨덴 대기업 성장과 구공산권 스탈린체제 붕괴가 맞닿아 사건이 진행된다. 소련과 독일, 구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배경으로 삼은 <밀레니엄> 시리즈는 한층 더 복잡하다.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책을 하나하나 사고 읽기 시작할 땐 스티그 라르손을 읽기 전이었고, 이제 완독한 상태다. 북유럽 추리소설에서 동유럽의 지명을 익히고,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발칸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린 삶을 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비셰그라드는 드리나 강과 세르비아와 접한다. 보스니아 내전 때 보스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을 초점에 놓고 그린, '발칸의 호메로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은 빽빽하고 막막하다.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 (위키백과 펌)

 

11개의 석공 아치, 길이 180미터, 1577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가 출세한 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의 지시로 완성한 다리.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다리. 인종과 종교 간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던 보스니아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의 배경이 되는 다리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유고슬라비아 대사였던 안드리치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감금되었을 때 쓴 '보스니아 3부작(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은 4년 후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보고 들은 것, 경험하고 느낀 것을 전설과 경험 속에 녹였다. 하지만 다리를 놓는다고 무조건 화해가 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이들의 상처는 여지껏 단단히 봉인된 채 호전되지 못하고 있다.

 

 

**

지구상 나라 없는 최대 민족 쿠르드족의 수난 역사와 억압 받는 현실에 대해 그려온 쿠르드족 출신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거북이도 난다]를 거쳐 2012년 BIFF에서 [코뿔소의 계절]이란 영화를 공개했다. 쿠르드족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이란을 떠나 터키로 망명해 만든 첫 영화라고 한다. 모니카 벨루치의 출연으로 올해 BIFF 제3세계 영화목록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해 보이는 영화였다. 한편 [디야르바키르의 아이들]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인 미라즈 베자르 감독이 쿠르드족 아이들의 암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쿠르드어로 만든 영화다. 디야르바키르는 터키의 지명이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어 있지만 이 영화는 터키에서 만들어졌으며, 감독의 결단어린 용기로 가능했다. 역시 BIFF의 쿠르드 특별전에 어렵게 허가받아 출품되었다. 중동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기에 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어린 남매의 현실수난을 그린다.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감독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으로, 터키에서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터키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는 통에 수감되어 쓴 시나리오 [욜]로 1982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쿠르드 영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일마즈 귀니 감독이다.

 

 

 

 

 

 

 

 

 

 

 

필요하다면 영화는 보면 되고 책은 읽으면 되는데(이보다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이 페이퍼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시키고 또 어디까지 좁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략 2500-4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족의 역사는 웬만한 국가사를 쓰고도 남을 만한 양이다. 이라크, 터키, 이란, 시리아까지 공간적 배경을 넓혀야 하고 무엇보다, 어렵다. 1970년대 이라크 정도가 쿠르드 자치구를 인정했고, 대부분의 국가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거나 부정했다. 가장 많은 수의 쿠르드인이 사는 터키가 중점이 되겠지만, 쿠르드족의 존재를 부정해온 터키와의 공존관계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뭐라 결론내기 어렵다. 유럽연합 가입을 손꼽아 고대하는 터키에게 유럽연합이 쿠르드 인권문제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 터키에서도 조금씩 쿠르드족에 대한 입장이 호전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 탄압받던 쿠르드족이 후세인 사망과 이라크내 미군부대 주둔을 환영하는 건 역평등에 기인한 일이다.

 

1차 대전에서는 영국, 2차 대전에서는 미국에 협력(이용)당하고, 현재도 국가,영토,지도자 없이 터키,이라크,이란을 오가며 외로운 전쟁을 벌이는 쿠르드족은 현재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 이용되고 있다. 2004년에서 2008년까지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아르빌 지역이 쿠르드자치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그들은 명백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던 어느 의원의 말이 이렇게 한참 세월이 흘러서야 떠오른다. 당시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훗날 이렇게 알게 되는 뜻도 있기 마련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쨍하게 만드는 울림. 여기서 서방 세계의 우상 살라딘과 십자군까지 운운하면 미친 페이퍼가 될 것이므로 까먹지 않도록 살짝 언급만. 잘 알지도 못하는 걸 말하는 건 여기까지. 그리고 네이버 포털에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쿠르드인 분포도를 표시한 지도를 찾았다.

 

 

빨간색 부분이 쿠르드인 분포 거주지다. 터키에 천대 받고 미국에 이용당하는 쿠르드인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이 구석진 곳에 단일민족이라 자랑하는 내 민족이 제 터전을 잡고 제 땅이라 부르며 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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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는 아브라함의 순례까지 거슬러 올라가 4대 문명의 발상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찍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휘감고 내려와 사도 바울과 헤로도토스의 국가 아나톨리아였다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티움이었다가 이웃나라 그리스와 앙숙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시아 땅 97%와 유럽 땅 3%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EU에 속하길 꿈꾸는, 그리스와의 로잔조약에서 에게해의 모든 섬을 내어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스탄불을 가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기독교와 이슬람이 융합된 복잡한 국가. 무스타파 케말이 아타튀르크의 칭호를 가진 나라.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가 유명한 나라. 푸르고 고즈넉한 곳.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그곳의 모든 것일 리는 없지만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많은 국가들이 포진해 있는 동유럽의 사정을 쓰자면 연재로도 모자랄 것이다. 더한 비극은 다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쓰고 있는 것 외엔 더 이상 파헤칠 여력이 없다는 것. 그래봐야 지금도 허우적대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마 이 두 사람을 알면 윤곽이 잡힐 지도 모르겠다. 모든 국가는 독재자로부터 시작되고, 민주주의를 획득했다고 믿는 순간 진정한 민주주의는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동유럽 역사가 증명해줄까. 나치스와 볼셰비키 없이 발칸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 주범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고, 케말 파샤(무스타파 케말)는 터키의 영웅이자 독재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롤모델로 여겨질 만큼 비슷하다. 그들은 오늘날의 근대화를 이뤄낸 걸로 각자의 나라에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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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와 헤르타 뮐러 외에 내가 아는 루마니아 출신이 있었나. 도나우 강을 여행다큐에서 봤거나 한창 피바다에 빠져 분노할 때 차우셰스쿠를 안 것 이상은 그야말로 백지에 가까워서 지인이 여행을 간다고 해도, 여행기를 들려줘도 아무런 실체적 관념이 생기지 않던 곳. 루마니아 음식은 신맛과 짠맛으로 양분되는데 맛있지만 우리 입맛과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드라큘라의 브란성과 요구르트로 구별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유명하지만 생소한 루마니아 출신의 게오르규가 쓴 <25시>는 제목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구상 존재하는 누구에게도 25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루마니아의 시골농부가 유대인 오명을 쓰고 붙잡혀 13년간이나 수용소를 전전하며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을 순차적 구성으로 그린다. 쿤데라의 <농담>과 닮은 스토리. 문명 아래 자행되는 이데올로기 다툼과 강대국의 전쟁에 휩쓸린 약소국의 힘없는 자들을 묘사한다. 희생양과 구원의 매커니즘. 혐오와 공포, 인간성 소멸을 파란만장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체코를 쿤데라와 카프카로 알고 평생 사는 건 자만의 오류다. 모두 아는 것 이상을 알아야 하는 게 현대인이 정보를 대하는 자세이다 보니까 그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세상이 왔다. 터키를 파묵, 루마니아를 뮐러로 배운 문학애호가들에게 우리도 동유럽 출신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작가에 이 정도 더 보태도 좋을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와 <외로운 남자>로 유명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브로흐,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와 몰나르 페렌츠, 폴란드의 여류시인 쉼보르스카, 체코의 이반 클리마와 보흐밀 흐라발은 내가 아는 동유럽 작가들이다. 더 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내년에 읽을 문학을 획득하는 관계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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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강타한 두 번의 세계전쟁과 그로인해 오랜 공산화를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동유럽의 암울하고 막막한 분위기는 문학 속에 살아숨쉰다. 때로 프라하의 카를교를 보며 다리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표현하던 누군가의 심정이 수긍된다. 그럼 비잔틴 제국에서부터 시작해볼까. 세상에, 이제서야 말인데 세상에는 왜 이렇게 읽을 책이 많고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안 읽는 걸까. 대체 가루로 흩어진 시간들은 뿔뿔이 해체되어 어디로 가서 쌓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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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12-3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에게 유용한 내용입니다.저도 관심이 많거든요.
나치 점령 하의 발칸반도도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특히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는 대학살로 악명을 떨쳤죠.옛 유고연방 지역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많은 시사를 해줍니다.티토 전기를 참조하세요.
터키에서 오르한 파묵과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야샤르 케말이 쿠르드 출신 소설가입니다.대표작<메메드>는 절판이지만 아직도 그 외 몇 몇 작품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12-31 17:3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세계사 분류별 강의 하시면 저는 손 들고 신청할텐데요 :) 뭔가 수준에 맞는 강의가 필요해요.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라는 악마도 있군요. 역시! 티토 전기도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김구,이승만,박헌영,여운형,김규식 같은 분들 얘기가 맞나요?(제가 제대로 알아듣는 건지..) 야샤르 케말은 처음 들어봐요. 쿠르드 출신 문학가 찾기도 재밌겠어요. 그런데 문학이 영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터라 제대로 읽어낼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뮐러와 파묵도 사실 먼 이야기..

노이에자이트님께도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새해에는 정체를 좀 드러내주시길..그리고 재밌고 유익한 글도 많이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또 뵈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8   좋아요 0 | URL
예.제대로 알아들으시네요.역시...유고연방에서 티토는 좌익 게릴라였는데 우익에도 게릴라들이 있었어요.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이들 중 누구를 더 지원할까 고심하죠.물론 티토로 결정났지만요.
우리나라에선...임정 쪽에서 루스벨트에게 면담을 여러번 신청하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무장세력의 규모가 너무 적고 분열되어있다고...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유고 조선의 좌우익 저항세력들의 제휴와 갈등을 비교연구해 보시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에요.아이리시스 님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정체는...음...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 흐흐흐...저를 여자로 착각하진 않았죠?

댈러웨이 2013-01-01 21:15   좋아요 0 | URL
저 이거 별찜한 페이퍼인데 안그래도 노이에자이트님께서 인정해주셨네요. 일전에 노이에자이트님께서 페터 한트케를 언급해주셔서 관심을 좀 두려고 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저는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정보 커버는 할 수도 없겠지만, 아이님 정리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노이에자이트님이 어떤 분이실지 정말 궁금한 사람중의 일인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3-01-03 20: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정말 헷갈리고 또 거의 몰라요. 노이에자이트님이 환기시켜주신 거예요. 빨리 더 읽고 공부해서 이 댓글의 정보를 몸소 흡수하겠어요ㅎㅎㅎ 그 당시 루스벨트가 대통령이었군요. 저는 이제 연대 조금 외웠는데..

하긴, 무슨 정체를 더 알겠습니까? 이런 정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여자로 착각은 안했지만 친구로 착각할 수는 있을 것 같... 그런데 어떤 책을 보면 될까요, 가능하면 추천도서 부탁드립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3 20:16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페터 한트케는 독일사람인 줄 알았어요. 비엔나 커피의 나라ㅎㅎㅎ 작가였구나. 당연히 독일작가라고 생각해서 저기 넣지도 않았어요. 그럼 혹시 페터 한트케의 작품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나오나요?(궁금궁금..)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말 소설 재밌어요.<메메드>가 제일 재밌는데 다른 것도 괜찮아요.쿠르드의 민담이나 풍속에 대한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고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0   좋아요 0 | URL
우와 책 두 권 나와요. 메메드는 간만에 원서로 독파해야 하는 건가요?ㅎㅎ 줄거리만 봐도 세상에, 재밌어 보여요.

댈러웨이 2013-01-0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뭐했는 줄 알아요? 전작하겠다던 오르한 파묵, 드디어 번역본 다 구입했어요. 올해 가열차게 읽으려면 배경지식도 좀 필요하겠죠. 이럴 땐 정말 머리 밀고 싶어요. --; 눈 많이 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7   좋아요 0 | URL
네, 잘했어요. 짝짝짝 도장 쾅. 다 합해서 몇 권이예요? 거짓말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새해부터 인증사진 한 장ㅎㅎ 부탁드려요. 그런데 파묵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궁극적으로 뭘까요? 이것도 알려주세요. 저는 도대체 뭔가요ㅠ.ㅠ 읽은 게 하나도 없어요. 창피해, 꺅=.=3

춥기만 진짜 춥고요, 눈은 안왔어요. 여긴 다른 곳 눈올 때 비가 내리거든요. 눈이 뭐 좋다거나 낭만적이라든가 하는 로망이 있는 건 아닌데도, 겨울에 한 번 정도는 발이 푹푹 빠지도록 쌓이는 걸 보고 싶어요.(이런 소심한 소원이라니!)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정부 연구로 주제를 좁히자면...백범일지가 필독서라 하지만 배경지식 없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이 당시 연합국과의 외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이승만과 김구로 독서범위를 좁히세요.임시정부는 상해시절보다는 중경시절이 외교사에서는 더 중요해요.
자세한 것으로 이승만 전기 두 편---정병준 것은 이승만에 비판적이고, 이한우 것은 이승만에 우호적입니다.중경임시정부 시절 외교에 대해 자세해요.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정식의 여운형 전기도 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0   좋아요 0 | URL
아..이 댓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백범일지, 중경시절, 이승만 전기, 여운형 전기 다 기억할게요, 노이에자이트님. 여운형 전기나 평전은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년에 계속 읽을까말까 하던 거라서 눈에 확 들어오네요^^

자, 이제부터 폭풍책검색과 장바구니 결제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트케는 자신을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밀로세비치 장례식에 참석해 찬반논란을 일으키죠.세르비아인들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자고 하는 게 한트케의 주장인데, 밀로세비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냐 하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나라에서 연극 좋아하는 사람은 한트케를 '관객모독'의 작가로 기억합니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5 19:14   좋아요 0 | URL
페터 한트케를 댈러웨이님도 지난해 내내 추천해주셨는데 한 권도 안 읽어봐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이 페이퍼 쓰고 제가 얻는 게 많네요.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밀로세비치까지요. 아 이번에 민음사 출간된 '관객모독' 말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소설 중 유고내전에 대한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다만 2차대전과 그 직전에 일어난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다룬 것은 <소망없는 불행>이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6   좋아요 0 | URL
하나씩 댓글 다 달아주신 고마움에 각각 댓글 다는 이런 성실함ㅎㅎㅎ 암요, 새해에는 성실해져야 합니다! <소망없는 불행>이 그런 내용이군요. 저 이 책은 추천도 여러 번 받아서, 더블린에 있는 제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ㅋㅋ 제목만 완전 잘 알고 있어요. 하긴 제가 제목만 알고있는 작품들이 참 많죠. 거의 다예요, 다.
 
심야식당 10 심야식당 1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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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던 여중생이 여고로 진학할 무렵 예정된 듯 하나둘씩 대여점이 사라진 후에 데이트코스로나 친구들과의 수다나 약속시간 사이 기다림 중간중간 만화방을 잠깐씩 들락거린 스무살 초반 언저리를 빼면 만화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호흡계통의 기관이 약하고 일 년 열두 달 환절기마다 비염과 축농증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체력 탓에 폐쇄된 공간이나 담배연기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게 만화책과 멀어진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스런 이별의 이유를 굳이 들으려는 언론을 향해 '성격차이'라는 뻔한 말을 늘어놓는 유명인마냥 지어낼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과정이나 이유 따위 불문한 채 그저 그림과 대사의 혼합으로 이뤄진, 사춘기를 함께 통과해 온 단지 그것뿐일 상징적 의식을 놓아버렸다. 만화책 읽기가 그런 거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를 죄악으로 여길 만큼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이나 로맨스나 판타지에 한 시절 바쳤던 조숙하고 되바라진 아이들에게나 허락될 법한 만화가 점점 그 수준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사정을 띠게 되었다. <심야식당>이 그런 만화 축에 든다면 이건 분명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하는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장르는 종이와 영상 가릴 것 없이 하루하루 멀어져만 갔으니, 이럴 수가. 책을 공수할 빠릿빠릿한 능력이나 부지런함이 내게는 없다. 만화는 붙잡으면 몇 권이든 동이 나야 잠이 들 게 뻔하고, 추리소설은 숨 놓는 날까지 끝없이 쏟아질테니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을 그것에 목매지 않은 건 내 마지막 자존심 아니,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나 왕성했고 시간은 부족했다 정도로 요약하고 넘어가자.

 

사실 드라마로 먼저 본 <심야식당> 역시 만화책은 오랫동안 뒷전이었다. 드라마를 만화책 보다 더 좋아하기도 했으니 굳이 찾아읽을 이유가 없었는데, 이 소박하고 쓸쓸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문득, 미친 듯이 그리워질 때가 온다. 이 세상에 나만 홀로 깨어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더없이 아득하고 막연한 순간이 살다보면 생기기 마련이다. 추운 겨울 밤, 마침 나와있던 만화책을 앉은 자리에서 후다닥 해치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10권인가 보다. 굉장히 반갑다고 하기에도 아쉽고 섭섭하다고 하기에도 언제나 이프로 부족하지만,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딱 그만큼 기다려온 이야기와 사람들. 심야식당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활짝 팔을 벌려 나를 맞는다. 그동안의 나는 꽤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로 그렇게 여전히 여기로 몰려든다. 자기 것을 모두 내어줄 것처럼 그렇게. 금세 뭉클하고 배가 따뜻해진다.

 

올빼미 기질로 밤에 늘 뭔가를 주워먹는 나로선 근처에 하나 생기면 좋겠다 생각하는 곳이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을 때와 누군가와 친밀하고 싶을 때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편안하고 따뜻한 가게, 꼽아보면 별로 없다. 돈과 자본이 잠식한 밥집이란 것의 대표적인 형태인 푸드코트, 셀프서비스, 패스트푸드와 테이크아웃. 일상 속 깊이 들어와 있는 간단과 편리의 식생활을 즐기게 된지 오래다. 대학가 앞 골목길을 파헤치고 들어가 두루치기와 된장찌개, 계란말이와 김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던 시절. 세월을 거슬러보면 아직 한 자릿 수일 뿐인데도 이토록 아득하고 아련한 까닭은 뭘까. 우린 무얼 얻었고 또 무얼 잃어버렸을까. 어디에나 그득그득 차 있는 식당과 화려한 간판의 카페가 반기지만 때로 현대인은 다 가졌으면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무주지 주민들처럼 갈 곳을 헤맨다. 정이 넘쳐 간섭과 충고가 난무하는 곳도, 정 없이 먹을 것과 돈이 바꾸어지는 곳도 잔인하고 서글프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야식당의 한결같은 영업방침은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처럼 정겹고 포근하다. 바로 그 흐뭇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 더없이 소박하면서도 추억이 생생한 음식을 몇 그릇이고 배부르게 먹고 나면 비록 간접이지만 흡족한 포만감이 들곤 한다. 누가 묻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은 가게'인 것도 감동이지만 아픈 사연과 즐거운 사생활, 어려운 고민을 두런두런 나누는 일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뒤섞인다는 건 거의 기적적이다. 모두들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토닥이고 울어주고 기뻐한다. 음식과 사람, 이 황홀한 조합이 웃고 울린다. 매번 미묘하게 달라지는 감동이다.

 

일본남성, 모두 그런 질문 합니다. 서니는 마음이 아주 깨끗한 사람. 그래서 눈도 깨끗하죠. 그렇게 깨끗한 눈을 한 사람, 나는 본 적 없습니다.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절망해서 울기만 하던 나를 서니는 조용히 지켜보고 손을 뻗어 주었습니다. 그 눈은 더 깊은 슬픔을 경험한 눈이예요.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第140夜 버터감자' 편에서)

 

간간이 웃음과 눈물을 흩뿌려 촉촉하게 적셔주는 와중에도 한 권 다 넘기는 동안 절대 가시지 않는 허기에 덮는 즉시 시장이나 마트 아니면 부엌으로 달려가야 한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누군가는 룸메이트가 실연과 외로움에 아플 때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재료를 꺼내 오코노미야끼를 해먹였다고 했고, 나는 오래도록 외국에서 먹은 간단한 두부김치와 소주팩을 잊지 못한다. 음식은 그런 것이다. 거의 모든 것. 잊혀진 시간과 추억을 폭풍처럼 몰고왔다가 단 1초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승화해버리는 황홀경. 같은 음식을 먹는 것 또한 그러한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것도 모두가 잠든 한밤 중에 함께 먹는다는 것은 현란하고 찬란한 일이다. 순간의 고독과 절망 혹은 기쁨의 시간, 희망과 열의를 다함께 나누는 축복의 파티이기도 하기에. 나는 또 잊겠지만 심야식당은 여전히 밤을 환히 밝힌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올해가 내년으로 넘어가는 날 해넘이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마스터를 떠올리면 나이 먹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음이 난다. 가야지, 어디로든. 먹어야지, 살기 위해. 멋지게 쓰고 싶었던 에세이는 이렇게 진부한 글로 마무리하며 날려먹고 만다. 뭐 이렇게 난감하고 의욕 떨어지는 시점에 힘을 내려면 먹는 수밖에. 으쌰으쌰. 도대체 겨울이 왜 이렇게 긴 거야. 밤은 또 왜 이렇게 길고. 싫증나게. 밤은 언제까지나 환희와 증오의 대상이다. 그래서 아름답기도 처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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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2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이님이다~
저는 요새 밤에... 배가 고파서 도저히...
나중에 대학다닐 때나 사회생활할 때 그래, 딱 심야식당처럼 혼자 가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곳 있었으면 좋겠어요.
술은 안 마실테니까, 음 포도쥬스? ㅋㅋㅋㅋㅋ

아이리시스 2012-12-29 19:0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은 먹고 싶은 걸 많이많이 먹어야 키 크죠! 참지 말고..( '') 소이진님은 술은 안 마실 것 같아요? 완전 좋아할 것 같은데.. 소이진님은 지금 맛난 거 많이 드시고, 열공도 하시고, 친구들하고 추억도.. 여기까지만 할까. 포도주스 한 잔 시원한 걸로 마시고 싶어요. 감기 들면 엄마가 더 못 견뎌하셔서 저는 겨울이면 급 몸 사리는 사람이 됐어요. 아프면 진짜 괴로우니까. 제가 이번 겨울에도 감기 몇 번 떨쳐냈는데, 아플 것 같으면 드러누우니까 올라다가 다시 가더라고요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12-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아이리님.
나보고 이름도 까먹겠다 하더니, 나만 뜸한 것은 아니었네요. ^^

나 며칠 전에, 만화책 질렀어요. 판도라 하츠 18권, 실버 다이아몬드 25권, 클램프의 X 18권...
이게 총 몇권일까요? 아하하. 물론, 중고로 질렀죠... 저걸 어찌 다 새것으로 사겠누?

심야식당은 다섯권 사놨는데, 코알라만 읽었네요. 나는 음식 만화 안 좋아해요, 배고파.
오코노미야키 해먹고 싶은 날이예요. 밖이 하얘요, 눈발이 엄청나거든요.

이젠, 나이 먹는 것도 좀 무심해진 나... 아직 아이리님은 생각이 많이 날 때이지요? ^^
(함께살기님께 배운 문구로) 고운 일 담뿍 누리는 새해 맞이하셔요.

아이리시스 2012-12-29 19:05   좋아요 0 | URL
헛, 18 더하기 25 더하기 18 = 61

맞다맞다, 달여우님이 만화책 좋아하신 거 기억나요. 여전히 중고로라도 구입하시는군요. 어릴 때 돈만 벌면 만화책으로 집을 채워야지 했는데 막상 커서는 만화책을 산 적이..[풀 하우스] 몇 권 있어요ㅋㅋ

오늘도 계속 눈이 오는군요. 1월1일에 봉하마을 가려고 하는데 인적 뜸한 시골마을은 눈이 다 녹지도 않았다는데 또 밤부터 눈소식 있어요. 저번에도 눈 왔는데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못 봤거든요. 아..그냥 펄펄 내리는 건 한 번 봤어요. 저는 쌓인 걸 보고 싶어요. 하얗게 소복히 쌓여서 인적이 없는 곳.. 미리 시골 가서 기다리는 건데 억울해하고 있는 중이에요. 눈은 싫지만 눈이 소복한 시골의 고즈넉한 밤에 군고구마 먹으면서 추리소설 읽는 건 해보고 싶어서요.

코알라는 잘 지내나요? 내년에 중학교 가는 게..맞죠? 안부 전해주세요. 저는 잘 지나가고 있어요. 제가 또 한 살 먹어서 조바심난 건 부모님.. 무엇보다도 일을 많이 안 만들려고 노력해요. 남과 나를 비교하는 일도 금기예요. 여전히 지금처럼 계셔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Shining 2012-12-2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이 책 + 드라마를 한 번도 안 봤어요.... 나는야 아웃사이더 외계인... 꼬맹이는 이제 사람이 됐는데
알고보니 외계인은 나였어ㅠㅠ 읽어야지, 생각만하고 왜 매번 못 만날까요? 며칠 전 오꼬노미야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덕분에 집에 와서 야끼우동 해먹었다는...(꼭 관련은 없구나;)

겨울밤이 길면 대신 따뜻한데 누워 오래오래 책을 읽을 수 있잖아요^^그리고 눈을 핑계삼아 술도 한 잔 더..(어머)
네, 밀크티도 있으니까요 :]

아이리시스 2012-12-29 18:54   좋아요 0 | URL
음..야끼우동..오! 아까 어제 해온 떡이랑 오뎅으로 칼칼한 오뎅탕 끓였는데 정말로 소주사러 갈까 하는 맘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래요, 귀찮고 춥고 또 술은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로.. 이상하게 추울 때는 찬 걸 못 먹어요. 배탈과 감기가 한 번에 나를 찾아와요. 나는 약골은 아닌데 겨울은 맥을 못 추게 해요. 오꼬노미야끼에는 정확하게는 뭐가 들어가나요? 샤이닝님이 해드신 오꼬노미야끼에는 뭐가 들어갔는지 궁금해요.

겨울밤은 지나치게 길어서 따뜻한데 누워 책 한 권 독파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더라구요. 신기하게^^ 어제는 존 르 카레와 함께했어요ㅋㅋㅋ

2012-12-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만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이님 관점으로 보니 왠지 더 좋아지는군요.
+ 이런 심야식당이 근처에 있고, 거기 그냥 갔는데, '우연히' 거기서 아이님 만나면 좋겠어요~~~. (부산이어도 갈 수 있는데~!ㅎ) ^^

아이리시스 2012-12-29 18:50   좋아요 0 | URL
우앗 섬님, 인사도 못하고 지나간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어요? 실생활에서 저는 이벤트의 날에 아주 무심한 편이고 저는 필요할 때 외에는 전화도 거의 안 받는 편이고 그런데 알라딘 식구들만큼은 사소한 댓글로 인사를 해온 것 같은데 이번에는 못해서 자책하고 있었어요.(인사 안해도 잘 계실 거야..)

이 만화 사실은 아주 싱겁잖아요. 에피소드가 반복되면서 더 그래요. 한 가닥 놓기 싫은 저마다의 감성 덕분에 이 만화가 읽히는 것 같아요. 긴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나와주면 그래도 그들은 거기, 저는 여기있는 느낌이 아득해서 좋아요.

제게는 친구나 애인의 친구가 하는 호프집이나 카페가 굳이 말하자면 그런 곳일 듯도 한데, 그런 곳에서 혼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개인일 수가 없으니까, 정말 이런 가게가 있고 거기 갔는데 섬님 계시면 섬님이 맛난 거 사주세요.(응?)ㅎㅎㅎ

댈러웨이 2012-12-2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나 스시나 알탕 놓고 소주 한 잔 하고 싶게 만들어요. 수면 밑에서 잠시 숨 쉬러. 뽀글뽀글.

아이리시스 2012-12-29 19:45   좋아요 0 | URL
이런 고품격 안주를 떠올리는 건 수면 밑에 너무 오래 계셔서 그래요. 뽀글뽀글 이만 끝내고 오셔서 여름 이야기 쓰실 차례입니다, 댈러웨이님.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_-V

프레이야 2012-12-3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위에 댈님이닷ㅎㅎ 아이리시스님, 전 만화는 잘 안보고 이 책도 안 봤지만 아이님의 글은 맛나요. 해넘이국수요? 말만 들어도 근사해요. 꼴딱 넘어가는 해보며 후루룩^^ 2012 마지막날 차분히 보내고 내일 봉하마을 잘 다녀오세요. 전 얼마전 올겨울에 한번 더 가봤어요. 단장을 새로 해놨더군요. 봉하쌀이랑 고춧가루 사서 왔지요. ㅎㅎ 새해에도 행복가득한 날 되세요~~♥

아이리시스 2012-12-31 17:00   좋아요 0 | URL
매일매일 갈 적마다 새단장을 하고 있어요. 내일 인파가 벌써부터 걱정되는데 오늘 만큼만 날이 포근했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님께도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웬만하면 제 첫 새해소원도 좀 이뤄주시구요ㅋㅋ 오늘 점심때 고기도 굽고 떡도 구워 먹었어요. 배는 부르지만 뭐랄까 허무가 찾아오네요. 프레이야님 댁에도 좋은 기운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안녕안녕. 해피 뉴 이얼~^^

blanca 2012-12-3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것 읽어보고 싶었는데, 읽으셨군요! 이런 식당이 집근처에 있으면 밤마다 달려갈 터인데 말이에요. 저도 밤이면 특히 겨울 밤이면 허기가 지더라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2-12-31 18:3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한 해 동안 블랑카님 글 멀리서나마 꼬박꼬박 읽을 수 있는 곳에 있어서 행복했어요. 저희 동네는 그야말로 정말로 편한 밥집이란 게 없어서 서운하기도 해요. 이 가게 좋지만 만화책은 클리셰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십대 내내 거의 밤에 먹는 게 아침과 낮의 두세배는 된 것 같아요. 블랑카님 떠올리면 늘 소녀같이 참한 언니가 연상됐는데, 그럼 새해소원은 블랑카님 얼굴 사진으로 뵙는 걸로 하고 싶어요. 분홍공주도 잘 있죠? 한 살 더 크면 더 예뻐지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구요^^

맥거핀 2013-01-0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드라마로 봤습니다. 일부러 심야시간에 아주 배고플 때 보니까 재미가 극대화되더군요. 읽다보니 저도 외국에서 먹었던 짜파게티+소주 조합이 떠오르는군요. 오늘 저녁에도 그거 먹어볼까...

아이리시스 2013-01-03 20:07   좋아요 0 | URL
짧고 임팩트가 강해서 훈훈한 맛이 있었죠. 짜파게티+소주=??? 그건 드셨습니까? 아..한 살 더 먹을 수록 밤에 먹는 음식이 고스란히 살로 가는 것 같아요. 겨울이라 움직이는 것도 싫은데 곰이 되어가고 있어요. 북극에 가서 북극곰으로 살면 엉엉엉 북극곰이 동동 띄워진 얼음 위에서 얼마나 무서울까요ㅠ.ㅠ 댓글이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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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페스트에는 목적이 없다. 과정만 있다. 페스트는 뻥하고 터지는 폭발이 아니고 폭죽처럼 파티의 시작을 알리지도 못하며 지리한 페스트가 언제쯤 사라지나를 기다리다가는 평생토록 카뮈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없이 카뮈를 말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니, 역시 고꾸라지거나 완주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몇 번을 읽어도 쓰레기더미로 떨어져 함께 구르는 듯한 기분이라니, 게다가 쥐, 이 쥐는 또 어쩔 셈인가. 구역질이 참아지지 않는다. 쥐를 박멸한다 해서 페스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해야만 하는 것이 도처에 널렸다. 진퇴양난과 좌불안석을 체험하는 이런 독서. 나는 카뮈를 적잖게 읽었고 한때 하고 싶은 얘기를 제법 많이 구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다. 카뮈를 평생에 걸쳐 보잘 것 없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다짐한 적도 있지만 구태함을 벗어날 길 없는 이 글을 시작으로 그 또한 깨질 것 같다. 당최 일관성 없는 결심과 계획이란 것은 언제쯤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머리는 계획표를 짠다. 이런 내가 내게는 페스트 같다. 페스트는 질병이자 전염병이고 재앙이지만 카뮈가 쓴 <페스트>가 단지 전염성 질병에 그쳤다면, 그렇게만 읽힌다면 그의 작품이 이토록 유명할 까닭이 없다. <페스트>가 부조리와 실존문학의 타당성을 높게 획득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되는 인간사 속에서 갑작스레 닥친 불안이나 불행이 아니라 늘 존재하고 있다가 특정 계기로 인해 일촉즉발하여, 무통에서 고통까지 경계없이 넘나드는 비극의 소용돌이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번 휩싸이면 웬만해선 제 힘으로 벗어날 자구(自救)가 없는 소용돌이.

 

지구 최후의 날을 그리는 '인류 대재앙과 종말(화산폭발과 지진 등의 자연재해나 핵폭발이나 전쟁으로 인한 징조)'을 소재로 하는 여러 영화가 떠오른다. [나는 전설이다]를 본 후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에 영 흥미를 잃었지만 지구상 누구도 종말을 체험해본 적 없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들이 빚어내는 상상력은 가히 칭송할 만한 것이다. 사실 그런 소재의 영화들과 <페스트>에는 그리 큰 공통점이 없다. 모든 것이 사라져 폐허로 변한 세상의 길을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걸으며 나누는 대화와 주변 상황의 묘사로 이루어진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의 끝. 그 끝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멈춰서 기다리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겪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페스트>의 페스트에는 아무 것도 명징한 것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온 구석진 구멍에서 쥐가 들끓고, 쥐가 죽어 나자빠져서 세상으로 기어나오고, 학습효과로 인해 페스트가 의심되고, 쥐의 것인 줄 알던 것이 인간의 것이 되고, 증상이 나타나 누군가 쓰러지고 죽어가는데 산 자들이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재앙 앞에 짐작으로 내려야 하는 결단은 덧없다. 누군가 죽어나가야 그를 통해 사태를 짐작할 뿐인 일의 증거를 잡는 일은 범죄가 발생해 신고전화를 받아야만 출동하는 지구대와 다를 게 없어보인다. 여기는 카뮈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면서 실제 알제리 오랑주의 주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랑이다.

 

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위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난, 절망, 전쟁과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맛보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 위험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가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그려진다. 놀랍다. 늘 놀랍지만 인간의 질긴 생명력과 가지각색의 반응, 집단 안에서 행해지는 위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의사인 리유는 아픈 아내를 다른 도시의 요양원으로 보내놓고 노모와 함께 지내며 갑작스런 위험군에 대처하려 한다. 의사로서의 임무와 인간으로서의 온정, 책임 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리유의 친구 타루는 앞장서서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인물로 페스트 실태조사와 민간 봉사대를 결성하는 행동파, 옛 연인의 그림자 속에서 글을 쓰며 시청에서 근무하는 그랑과 가난과 고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랑과 리유의 도움으로 살아난 코타르, 취재차 들어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시(마을)가 고립되자 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도피주의자 랑베르, 신이 모든 것을 돌봐줄 거란 기도로 이 상황을 타계하려는 회피주의자 파놀루 신부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주목해볼 수 있다. 행동대장인 타루의 제안으로 설립된 보건대는 위기 대처방안이었지 극복방안일 수 없었다. 세상에 온 순서, 가진 재산, 직업과 지위 등에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페스트가 소멸될 즈음 타루를 찾아온 것만 봐도 이 재앙은 공평한 동시에 공평하지 않다.

 

위험에 대처하는 다양한 자세를 통해 인간군상의 다사다난을 엿볼 수 있다. 역상황까지 생겨난다. 가난으로 고립되어 고통받던 코타르에게 페스트의 상황은 싫지 않다. 모두가 겁먹고 허둥대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가난과 무능력이 창피하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죄가 있어도 없어도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다시 살아난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이들에게는 페스트를 타개하려는 의지를 갖는 일보다 페스트를 없애줄 힘이 강한 자를 기다리는 일이 더 쉽다. 타루와 리유를 비롯한 이들이 힘을 합쳐 혈청개발에 성공하고서야 겨우 몰아내지만 정작 페스트가 자취를 감추려할 즈음 타루에게 찾아온 병마가 그를 데려가 버린다. 행동주의자, 도피주의자, 회피주의자의 최후는 각각 달랐지만 처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던 이들의 대처가 시간이 흐르며 한결같이 대항주의로 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페스트가 인간의 원죄 혹은 신의 섭리라 믿고 기도만 하던 파놀루 신부나 도시를 나갈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랑베르에게서 인간이 고통을 초월해 재앙에 대항하려는 자의 자세를 본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박제되지 않는 능동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설령 타루처럼 죽을 지라도 죽기 직전까지는 대항한다. 왜 살아있는가를 묻지 않으며 왜 대항해야 하는가 또한 설교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희망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페스트의 광란하는 바람을 막기 위해 프로방스에 건설한 거대한 성벽,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진흙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채 썩어 가는 축축한 침상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갈고리에 찍혀서 끌려 나가는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 나는 밤과 낮.

 

페스트는 많은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카뮈가 작품을 쓸 때 페스트의 상징은 프랑스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은 나치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다른 국가와는 달리 홀로 독립하지 못한 알제리는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에 고립된 이들'의 신세와 같았다. 페스트는 13세기 말 유럽과 아시아 일부지역을 죽음의 소굴로 몰아넣은 전력을 가진 인류 종말의 상징이다. 그래서 전쟁과 가난과 광기와 병마 등 온갖 재해로 해석가능하며 '현상 자체'로 대치가능하다. 부딪치고 짓밟히면서도 피어나는 꽃처럼 역동적이되 달콤한 향기로 형상화하는 일종의 미화된 묘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의 과정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오늘날처럼 발달한 시대에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전염병은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유명한 전염병 몇을 막지 않는 건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가난과 반란, 폭동과 폭력, 전쟁은? 허무에 허우적대는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 희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페스트는 카뮈의 시대에도 저만큼이나 많은 끔찍함으로 세상을 농락했었다. 카뮈의 시대가 아닌 지금 현재, 페스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더 많은 종류의 페스트가 세상 이곳저곳에 골을 파고 들어앉았다. 쥐를 박멸하고 성벽을 쌓아올려 바람을 차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시대가 되었고, 과학기술의 미흡으로 치부하려 했던 페스트의 존재는 더 강력하고 더 고약해졌다.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카뮈 그리고 <페스트>는 또 읽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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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게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from 너의 의미 2013-08-14 16:17 
    열 개의 거울 뒤에 숨은 카뮈. 눈으로 읽고 이해함으로서 만나는 카뮈, 카뮈, 카뮈에 대한 모든 것들.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흔 여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가 남긴 소설, 산문, 희곡, 철학적 에세이, 시평, 사적인 글 등 다양한 장르적 탐색은 김화영 선생님의 오랜 노고로 번역되어 있는 전집을 읽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의
 
 
이진 2012-12-1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카톡에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쓰고 댓글도 그 어디에든 안 달고해서 걱정했잖아욧!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부터~^^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아이리시스 2012-12-15 18:36   좋아요 0 | URL
절대 아무 일도 없어요. 지금 도토리묵에 새로 담근 김치 먹어요. 그냥 감기와 비염을 좀 달고 겨울잠을 잔 것 밖에는.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몰랐어요(겨울곰이 하는 인터뷰)."

소이진님 저 카톡에는 원래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썼고 댓글도 안 달잖아요. 쳇쳇쳇. 관심이 없어진거예욧? 소이진님 누나한테 한 번 말 걸라고 했잖아요. 바보짓 해서 계정을 새로 등록하고부터 소이진님 없어서 심심해 죽겠어요. 얼른얼른 아이디 알려줘요^________________^

p.s. 사실은 카스토리도 없어져서 시루스님도 사라짐.(이런 누나라서 미안해요ㅠㅠ)

2012-12-1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6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은 카뮈의 팬이었죠? 전집을 읽고 싶었던 유일한 작가, 라고 언젠가 말했잖아요. 저는 이방인과 작가노트, 밖에 읽지 않았지만ㅠ 아이님이 언젠가 까뮈에 대해 써주시면 제가 열심히 읽을 마음은 충분히 있어요....라고 은근히 부담주고 싶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12-17 23:36   좋아요 0 | URL
예를 들면, 하고 싶은 이야기, 추구하고 싶은 주제 같은 것들을 학생 때는 굉장히 많이 구한 것 같아요. 그때는 철학적 통찰 같은 것을 얻고 싶었거든요. 창작을 해야 하니까 빈곤한 독서력과 세계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퇴폐와 소외, 불안의 이미지를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그걸 하려고 했던 작가나 사상가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근데 샤이닝님은 그런 걸 기억하는 구나, 짱이야ㅋㄷㅋㄷ 저는 문학에 대한 탐구정신이 별로 없어서 아마 죽을 때까지 누구의 모든 것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읽기'가 목표라면 저보다 샤이닝님이 더 잘할 것 같고, 저는 그냥 <페스트> 읽었다고 자랑을ㅋㅋㅋ <열세 걸음>도 읽었는데 샤이닝님 페이퍼에 그 책 있었으니까 그 책 돼서 샤이닝님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추워서 다시 감기올 것 같아요, 흑흑.

맥거핀 2012-12-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뮈의 페스트'라고 작가와 제목을 외우기만 하고 정작 작품을 읽지는 못했군요. 페스트라는 게 예전에는 정말 인류의 종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위용이 거의 사라져버렸잖아요?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도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인류도 또 그렇게 다음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뜬금없이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봅니다. 물론 또 동시에 부정적인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와중에서 전대의 역사가 되풀이한 어떤 끔찍한 일들 - 예를 들어 흑사병을 마녀들과 연관짓는 것과 같은 것들 - 을 우리가 또 우리 시대의 무엇인가를 극복하면서 분명히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이겠습니다만...

요즘같이 하 수상한 시대에 '쥐를 박멸'이라는 위험한 제목을 달면 안돼요..^^

아이리시스 2012-12-17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쥐를 박멸한다고 쓸 때에 한 번도 그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금 이게 뭐지 이런 기분이었다는. 마음에서 대통령님 갈아치운지 이미 오래ㅋㅋ 시국이 좋지 않았다면 제가 글을 엄청 잘 쓰면 쥐를 검색하면 카뮈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음 제가 글을 그다지 잘 쓰지 못한 건 행운이랄까요. 의외로 되게되게 재밌고, 굉장히 지루한 설정에다 상황인데 절대 그렇지가 않거든요. 카뮈의 힘이죠. 그나저나 샤이닝님은 약속과 계획도 굉장히 잘 지키신다면서요? 저는 벌써 루소랑 프루스트였나, 묻지도 않으셨는데 혼자 말해놓고 뭐하는 짓. 맥거핀님 뵐 때마다 혼자 찌릿찌릿.

행여 내일 다시 끔찍해지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니게 된다고 믿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즘 희망을 말하면 뭔가 멍청하고 바보같고 얼간이 같은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