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신부 전집 - 전5권
G. K. 체스터튼 지음 / 북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삼자대면은 멋진 일이다. 도중에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는 사람이나 죄를 짓고도 교묘히 빠져나가 비열한 미소를 흘리는 사람만 없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데 이토록 좋은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검사는 정의실현(죄를 지은 자가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변호사는 억울한 자를 대변하는 동시에 (피해자든 가해자든) 인권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기는 대리자이며, 판사는 이 모든 과정을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감시하고 법전에 적힌 법조항을 사건에 가장 올바르고 정확하게 적용해 사회의 형평을 맞춘다. 그런데 법이 언제나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법을 다루는 이들이 형평을 지키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거기다 법은 벌을 받고나서도 거의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인간으로 인해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법이라는 최소한의 테두리는 진실을 추적할 때만 이용되면 좋겠다는 법조인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상적인 법조인의 경우, 특히 판사는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자리를 부담스러워했고, 대부분 어렵게 버렸다. 그래, 같은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할 권리는 없다. 그것이 필요하게 된 계기는 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서로 속고 속이는 데서 시작된 이상, 법은 여전히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할 때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동아줄을 잡은 이들의 마지막 희망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면서 누구든 구원할 수 있다는 듯이.

 

2013년은 브라운 신부 팬들에게는 최고의 해이다. 최근 BBC에서 마크 윌리엄스가 브라운 역을 맡아 시리즈가 진행중이다. 구할 수 있는 한 영국 드라마는 거의 보려고 하기 때문에 반가운 일이다. 가톨릭계의 유명한 탐정 브라운 신부는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해번쩍 서해번쩍 나타나 온갖 사건의 해결사 노릇을 한다. 사건은 유산 다툼일 때도 있고 살인사건일 경우도 있으며 신분위장인 때도 있다. 자극적인 묘사는 없다. 다만 사실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이며, 대부분이 일이 일어날 즈음의 상황묘사와 캐릭터에 주목한다. 브라운 신부는 추리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추리가 아니라 관찰이다. 냉철하고 온정어린 눈으로 상황을 들여다보고 진단하는데 그 사실이 생각지도 못한 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마치 진찰은 의사가 하지만 약은 약국에서 판다는 듯 뒷일은 독자에게 맡겨버리는 식의 지적 게임같다. 우리가 탐정소설에서 찾는 것이 정의실현 보다는 사건 발생과 해결 사이의 역경과 짜릿함이라면 적어도 판사 보다는 형사가 더 낫고, 형사 보다는 추리소설의 독자가 되는 게 더 낫다. 피비린내 나는 응징이 아니라 진실을 고스란히 재현해내는 데 주목하는 점에서 범죄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범죄자는 모두 악인들이라 정의하는 기존의 선악구도를 뛰어넘는다. 이쯤에서 브라운 신부 시리즈 다섯 권이 출간된 시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종교에서 더이상 신성함을 찾아볼 수 없는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 초반 가톨릭의 영향력이 빛나던 시기- 각각 1911년, 1914년, 1926년, 1927년, 1935년- 에 나온 작품이라는 점 말이다. 또 하나의 근대 탐정 브라운 신부는 영국의 위대한 탐정 셜록 홈즈의 뒤를 잇는다. 브라운 신부의 명성을 이어간 탐정은 포와르이며, 이를 만든 추리작가는 크리스티 여사다. 영국은 이렇게 세 명의 근대 탐정으로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어떻게 신부가 탐정이 될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어리석다. 브라운 신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짐작해보면, 응징보다는 자비에 관심을 두는 종교인이기에, 감싸안아야 하는 인간의 불우한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은 왜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나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상황을 들여다보는 관찰력으로 인해 브라운 신부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뒤이은 인기탐정이 될 수 있었다.

 

체스터튼은 미술학도로서 미술평론가로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한 사실적 묘사가 가능했던 것도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브라운 신부의 모델이라고 밝힌 존 오코너 신부는 캐릭터 설정과 브라운 신부가 세상을 보는 사상이나 추리로서의 사건전개 면에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손꼽히며 명성을 얻었다. 신부라는 신분과 당시 종교인이 가졌던 느리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브라운 신부가 섬세한 관찰로 사건의 정중앙부를 날카롭게 파헤쳐 재현하는 역설과 반전의 논리가 쉽게 연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잔잔하게 흐르는 사건에 들어있지 않거나 제3자로 무심히 서있다가 비로소 등장하여 짠하고 해결하는 스타일에 개연성이 없다거나 무난하다거나 하는 비평을 내놓을 수도 있다. 아서 코난 도일과 크리스티 여사가 그런 것처럼 체스터튼 또한 인간의 숨겨진 상처를 읽어내고 거기서 질투, 분노, 우울, 슬픔 등을 찾아냈다. <브라운 신부 전집>은 100년 전에 씌었고, 10년 전에 번역되었다. 결백/지혜/의심/비밀/스캔들 이라는 각 제목 안에 낱개의 제목을 단 수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앞서 출현한 아서 코난 도일의 홈즈와 크리스티 여사의 포와르가 그렇듯 끔찍하고 선정적인 범죄장면 묘사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깊이 묘사하는 데 훨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범죄소설에 길들여진 나는 처음에는 늘 지루함을 느낀다. 거기다 세월차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서서히 물들어간다는 점에서 닮았다. 브라운 신부의 말 속에서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감각들을 음미할 수 있다.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며 준비한 트릭 속에서 억울한 자가 죽은 에피소드를 두고 인간 내면에 숨겨진 사악한 재치를 맛보기도 하고, 일부러 어질러놓은 집안 가구의 배치 속에서 고의와 선의를 간파해내는 탐정을 두고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에서는 가장 천하고 악한 남편이 바깥에서는 제일 좋은 남자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인간에게는 한 모습만 존재하는 게 아니므로. 심지어 감정이란 더 많은 형태로 분리될 수도 있는 가장 신비롭고도 다채로운 보배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모를 죽인 자식은 나쁘다. 동시에 부모를 버린 자식도 나쁘다. 수없이 쏟아지는 기사 속에서 죽이거나 버린 이유를 알고나면 이 끔찍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낸 야유의 목소리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이다. 늘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이제 시대에 걸맞지 못하다는 평판에 부딪치지만, 아들이 친구를 때렸다면, 무조건 때리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왜 때렸는지 묻고, 왜 때리면 안되는지 가르쳐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운 신부는 부모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범인의 사정 또한 주의깊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체스터튼의 문학은 인간적이다. '어떻게' 보다는 '왜'에 초점을 맞춘다. 어제는 선한 사람이 내일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황의 즉시성 혹은 현실과 내면의 불일치 때문이지, 특정인에게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거나 태어날 때부터 그랬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와 인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 변수를 잘 다독이는 것만이 범죄의 질을 낮추고 양을 줄이는 방법이다.

 

실제로 브라운 신부가 밝혀낸 트릭은 앞서 우리가 놓쳤던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이야기를 사연으로 끌어내는 것에 불과해서 오늘 날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무릇 범죄란 발생하기 전에 막으면 좋을 일이지, 범죄에서 명언을 얻거나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현재에 비추어 보면 무리가 있는 발상이다. 신분제도에 기인한 범죄나 총보다 칼이 사용되는 범죄, 의외로 욕심 많은 사람들이 귀족의 지위에 있다는 것 등 적어도 어떤 범죄라는 것이 단 한 가지 이유로 촉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 범죄의 다양한 모습과 거기에는 인과응보식의 대응도 필요하지만,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경우도 있다는 사실에 너그러워진다. 무엇보다 법적 처벌만으로 이 세상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법과 판사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다. 누구를 속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사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본다면, 그래서 죽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면 어떨까. 우리의 욕심과 눈먼 질투, 약간 꺾인 자존심, 갑자기 툭 튀어나와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 많고 많은 사소함 중에 단 하나로도 인간의 삶 아니 유리 같은 마음은 악에 저당잡힐 수 있다. 악은 몰라도 범죄는 순간적이다. 악은 전염성이 강해도 범죄는 개인의 것이다. 적어도 범죄자 중에 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는 극소수 중에 극소수이지 않을까. 범죄는 선과 악으로 구성되는 양날의 칼 속에서도 의외로 복잡한 구조와 형태를 갖는다는 것, 그래서 범죄로 인해 끊임없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근본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지치지 않게도 문학으로 재탄생되는 갈등과 대립의 구조가 늘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홈즈와 브라운 신부와 포와르가 읽히는 것도, 선과 악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와 권선징악을 향한 정의,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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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1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는 사실 여기에서 처음 보는데, 신부가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이라니 꽤 재밌겠어요. 신부는 아무래도 종교인이니까, 종교인의 시선에서 범죄와 범죄자를 보는 것은 또 다르겠죠. 아무튼 인간의 모든 범죄는 아주 다양한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지니까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거고, 범죄소설, 추리소설도 계속 새로운 얘기를 쏟아내겠죠. 근데 TV에서 하는 범죄 얘기를 봐도, 사실 상당수의 범죄는 거대한 악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별 것 아닌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

아이리시스 2013-02-15 22:05   좋아요 0 | URL
설상가상 제가 하지 말라는 것도 곧잘 해서 일을 잘 치는 편이긴 하지만 어제 파더 브라운 다운받다가 맥북이 맛이 갔어요. 외장하드를 인식못하는 상태로. 그런데 초성능 좋은 데스크탑 본체를 얼마 전에 들였거든요. 동생이 엄마 하시라고 사드렸는데, 덕분에 매일밤 대박맞고에 푹 빠져있어요. 이상하게 홈즈는 좋은데 크리스티는 푹 빠지게 되지 않았는데 브라운 신부는 첫장부터 재밌게 읽었어요. 단편이라 연결의 부담도 없어서, 그런데 책이 절판이란 건 몰랐어요. 이거 쓰고나서 알았어요. 대체로 미스터리 범죄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악이라는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추리소설 많이 읽어서 내일까지만 읽고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갑니다. 히히히.

stella.K 2013-02-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드라마로 방영해요? 봤어요?
근데 이책 절판이네요.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 아직도 못 읽다가
결국 절판되는 모습을 보게되는군요.
새로 안 나올까요? 헌책방 발품 팔아야 하려나요?ㅠㅠ

2013-02-19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9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3-02-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 넘 재미있지요.브리운 신부는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었는데 국내에선 홈즈에 비해 영 인지도가 낮더군요ㅜ.ㅜ

아이리시스 2013-02-19 01:19   좋아요 0 | URL
홈즈가 1인자여서 영화나 시리즈로의 전환이 많고 빨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카스피님. 넘 재밌어요. 디테일한 묘사로 시작하는 초반부에는 늘 또 어떤 사건으로 뒤통수를 칠까 두근두근. 그런데 왜 한 번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여러 모로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ㅜ.ㅜ

transient-guest 2013-02-2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다 읽었는데, 리뷰는 이렇게 쓰지는 못했어요..ㅎㅎ 브라운 신부의 추리는 확실히 통찰력 같은걸로 사건의 본질이나 사람의 중심을 뚫어보는데 있지, 홈즈나 포와르식의 사실과 논리에 입각한 방식하고는 틀리죠. 작품자체도 서술형이고, 뭐랄까, 편안하게 스토리를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는 조만간 구해봐야겠네요.

아이리시스 2013-02-28 16:53   좋아요 0 | URL
포와르는 제가 어릴 때 읽다말아서, 다시 시작한다고 지난 여름에 읽다가 놔뒀는데(뒷심부족), 사조영웅전,의천도룡기,신조협려도 죄다 그 상태--; 트란님 따라서 저도 삼매경 해야겠어요. 웬만큼 재밌지 않고는 반전과 추리와 마무리를 한 번에 하는 브라운 신부의 구성은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갑자기 왜 이게 나와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없어서 홈즈나 포와르식과는 확실히 달라요. 홈즈를 좋아했는데 브라운 신부도 좋아요. 누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2013-02-23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3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세상, 세상 대 세상, 국가 대 국가, 이 싸움들 중에서도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게 '나 vs 나'인 것 같다. 잘난 작가들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문학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교훈이 된다. 전쟁문학을 추렸다. 추렸는데 읽히지가 않아서 여기가 끝이구나 했는데 무심하게 할퀴고 지나가는 어떤 감정들이 느닷없이 상처투성이 전쟁문학 속 주인공들을 돌아보게 한다. 누굴 위하여 종을 울리는 지도 모른 채 무조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전장에서도 가해와 피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리기 어렵다. 전쟁 뿐인가, 노조나 복수극에서도 매번 마주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들. 신에게 맡겨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 옳고 그름의 잔인한 판단. 오히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용되기도 한다. 왜 싸워야만 하는가. 세계는 '왜'라는 물음에 마침표 대신 필연성을 부여한지 오래다.

 

태초부터 엄청난 규모와 빈도의 전투가 있었다. 적어도 전쟁을 과거에 벌어진 한낱 다툼으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20세기의 화두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비롯,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이름의 전쟁이 이후 문학작품들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에 서야 하도록 만들었는지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전쟁문학은 살아남았다. 전우애, 사랑, 그리움으로부터 오는 감정소모는 끊임없이 회자되며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아 잔인함과 감동을 거듭 교차시키며 세상으로 밀려나온다. 무력이라면 차라리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명분이 버젓이 상대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사, 선과 악 혹은 광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희생양 매커니즘과 광기를 예술가의 것으로 치환해 이해하곤 했던 나는 히틀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니까 아렌트가 나치즘을 향해 쏟아낸 울분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이 비무슬림을 향해 갖고 있는 적대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관련 문제들은 언젠가부터 관심주제에 등극했고, 뿌리없는 가지처럼 단편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터지는 폭탄에 사지가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거나 우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전쟁과 재난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의도의 유무라고 보기에 잘잘못을 따지기에 너무 많은 연결고리들이 줄기차게 엮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잘 모를 때는 겁을 낼 이유가 없다. 두려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알게 되기 시작할 때다. 삶이 두렵지 않은 이는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얘기다. 전쟁문학에 대한 깊이 없는 고찰.


 
















전쟁통에 폐허가 된 이탈리아 마을의 한 야전병원에 홀로 남은 간호사와 남자환자를 오랫동안 상상했었다. 왜 버리고 가질 못하는가. 살아야 의미가 있지 않나. 내 물음은 허공을 맴돌았고, 답을 찾을 수도 없고, 찾아지지도 않았다. 잿더미 위의 불씨같은 희망처럼 서걱거리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질식해 호흡을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이 아연한 문장들을 대하자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욱 비현실처럼 여겨졌다. 디테일한 묘사는 때로 독처럼 쓰고 두려웠다. 암흑 속 절망과 붉은 노을 위의 하얀 집 같은 것들이 생생히 대비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존재를 감췄지만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 내 눈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그렇게 불렀다. 없는 듯 존재하면서 존재감이 적지도 크지도 않은 사람. 온 절망이 대부분의 희망을 꺼뜨리는 곳에서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반드시 내 곁에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 하지만 언제 안녕해도 좋을 사람. 영화 속에서 한나가 읽어주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바흐의 아리아와 함께 시린 기억을 찾아가는 실마리로 기능한다. 저 책은 필독서지만 두께가 만만찮아 엄두도 못내는데 인용된 부분마다 좋다.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쓴 후 폭발적 반응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지만 나치스 지배 하의 독일에서 작품의 반전적 내용(시각) 때문에 193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가, 9년 간의 미국망명 후 다시 스위스에 거처한다. 첫 작품 이외에는 대부분 망명생활 동안 집필했기에, 망명작가로 불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그늘진 낙원>, <리스본의 밤>은 망명소설 4부작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독일군이 소련의 대평원에서 잠복중인 현재진행형으로 시작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새파란 참전병사의 눈으로 본 세상과 체험을 서술해나간다. 죽고 죽이는, 시시각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진군 중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독일은 패전의 내음을 진지하게 맡기 시작한다. 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접경선으로 후퇴하면서까지 상대 영토 쑥대밭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이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땅이 얼고 녹는 동안 흙구덩이를 파헤쳐 부지런히도 묻었다. 오랫동안 전쟁의 끝을 바라온 병사들의 소원은 원인 모를 병이라도 걸려 제대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2년을 전장에서 보낸 노련한 병사 그레버는 3주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간다. 어렵사리 달려온 고향마을은 이미 몇 차례의 공습과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 폐허더미에서 주소를 더듬어 집을 찾아헤매는 한편, 부모님의 생사를 수소문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속출하는 지옥같은 잿더미 속에서 그들의 생사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방방곡곡 묻고 찾다가 어릴 적 친구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옥불마냥 활활 타오르는 대지에서 울부짖으며 타죽어가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전쟁통에 사랑과 결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귀한 것이 누군가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나가며 위로받고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다. 전장에서의 결혼은 절차가 간단하다는 말에 휴가 막바지는 온통 그녀와의 혼인신고와 미래에 대한 꿈, 유예된 행복 앞에 바쳐진다. 마침내 복귀일이 다가온다. 그레버는 여전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제 나라도 불바다가 되긴 마찬가지인 전쟁 앞에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소음과 절망과 파괴, 혹은 그 모든 것이 계속될 때, 그들의 작별은 결코 유예되지 않을 것이다. 


레마르크의 문장은 리얼리즘 혹은 사실주의에 가까운 묘사로 구성된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노래는 없지만 단 한 번의 사랑과 임시로 지어올린 집 안에서 지속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소망이 모인 것만으로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잔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젠가 이 상황도 끝날 거라는 기대감이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도살장 같은 화염과 통증과 증오가 곧 증발할 거란 잔혹한 기다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이전에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의 배경 또한 스페인 내전이다. 간단한 리뷰를 쓰면서 차마 역사적 배경까지 서술할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압박받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줘서는 안되는 강압과 같은 간섭을 스페인 내전상황 치하와 파시즘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다. 난 단지 전쟁통에 비수용적이고 광기어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남녀로 쓰는데 그쳤지만 배경이 좀 더 복잡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멜로드라마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차라리 르포에 가깝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비하면 자진참전한 경험을 살려 그 현장을 생생히 복기한 체험수기 한 편을 가장한 소설이지만, 전달하려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적으로 비틀지 않은 구성이 오히려 고맙다.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싶었던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오웰의 모든 문학은 차라리 현실 비틀기로 읽힌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을 오웰의 작품에서 찾는다면 없는 게 없을 정도. <동물농장>이 그랬고 <1984>가 그랬듯. 오웰과 헤밍웨이의 건조함과 차가움은 닮고 싶은 점이다. 그들의 작품은 치렁한 장식도, 미사여구도, 뻔한 수식어도 뺀 상태에서 문학이 된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이상한 전쟁. 영국 식민지 인도 출신의 외국인. 아무런 준비도 훈련도 없이 대강 교육시킨 이방인조차 투입시키는 어떤 싸움. 오웰은 어떠한 상상과 극적 전개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시간 순서에 따른 생생한 체험만을 기록했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대한 환멸의 기록이라 칭한다. 이 소설에는 현대 정치가 다투는 모든 이념 전쟁이 모두 들어있다. 전쟁을 배우기에 오웰의 작품들은 더없이 알맞다. 매순간 적절한 깊이와 놀라움을 안겨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파견된 장교, 간호사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소재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공통된 전쟁문학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장교와 간호사가 전장에 있는 건 당연하다보니 예상 스토리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초점은 자연스레 내용보다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문체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레마르크는 병사들의 무의미한 대화와 기다림, 그레버와 엘리자베스가 꿈꾸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렸다. 얼마나 더 깊고 간절히 혹은 생생하게 그려낼 것인가. 묘사나 문체, 기호에 판단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정적이라든가 관조적이라든가 하면 전장의 서걱거림을 담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승화라면 모를까, 전쟁에 대해 미화하는 것도 그 반대도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의 장편들은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다는 점에서 소재에 걸맞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헤밍웨이를 읽으면 배가 고프다. 실제 여자관계가 그랬듯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마초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칵테일조차 소다수와 설탕을 적게 넣는 대신 럼을 많이 넣어 독하고 차갑게 즐기는 게 취향이라니. 이쯤되면 내면에서 타협이 너울댄다. 그의 작품에서 남자에 비해 여자가 단조롭게 그려지는 것도 그의 성향과 관계가 있을까. 오웰과 헤밍웨이, 물론 레마르크도, 시대의 전장에 선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전쟁은 한낱 감정문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겪은 고통과 이미지로 환기되어 온 고통은 다른 것이다.

 


 

 



 


 





 

 

 

전쟁과 사랑. 또 하나의 빠질 수 없는 작가는 시배스천 폭스다. 2003년 BBC에서 조사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20위 안에 <새의 노래>가 들면서 위력을 증명했다. 영국 작가지만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 전쟁의 상흔, 고독 같은 것들을 주제로 경건한 서사시를 펼쳐낸다. BBC 동명드라마가 있다.


1차 대전 중의 프랑스가 배경으로, 전쟁중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스티븐이 상처극복을 위해 전장으로 들어간다. 전쟁이 사랑보다 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폭스는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자들이 잊혀져가는 것이 두려워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53년생인 그가 1993년에 발표해 일약 스타작가 덤에 올린 작품으로, 전쟁 전과 전쟁 중, 이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던 스티븐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자, 전쟁에 참여한 그는 참혹하고 잔인하게 그 시간을 겪어낸다. 포탄이 날아다니고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사람의 시체 냄새마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그 와중에도 이 상황을 타계하여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스티븐의 의지가 눈물겹다. 몸과 마음, 영혼마저 잃을 만큼 처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또 견디는 참전 병사들의 생생한 고통과 고뇌를 만지듯 느낄 수 있는 사실적 문체라는 점에서 헤밍웨이와 결을 같이한다.

 

 

 

 

 

 

 

 

 

 

 

 

 

 

 

 

문학은 문학이라서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사실적이지 않고, 사건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꼬마나 제3자 혹은 해설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이질적인 문체와 낯선 개연성, 다 맘에 든다. 초반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것이고, 기대 가득한 읽기 속에서 끝을 보기가 아쉬웠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떠올랐지만 서정적인 내용과 소년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이 소설 속에서 건진 <나의 투쟁>을 찔끔찔끔 보기 시작한지도 몇 달이다.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히틀러의 세계사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설마 히틀러가 글을 얼마나 잘쓰는지 보자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그즈음 손대는 문학마다 히틀러가 등장했다. 지나면 또 기억을 못해서 동생한테 읽어놓고 왜 모르냐는 얘기를 듣고, 1년에 한 권 읽는 너랑 1년에 100권 읽는 내가 어떻게 같겠냐고 했더니 말이 안된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서 왜 읽어도 기억을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권 내키는 대로 돌려읽기의 제대로된 폐해일 수도, 기억력이 원래 나쁠 수도 있다. 아니면 버려야 또 들일 수 있는 뇌구조로 자동설계 됐을지도.

 

실제로 제3국의 종족학살 같은 건 문학으로는커녕 언론기사로도 발화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소설이 뉴스가 무슨 힘을 갖는가. 내 땅의 전쟁 보다 남의 땅의 전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진과 동영상, 언론에서 전해주는 뉴스화면과 기사로 엿본다고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절반이라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옆집 싸움과 울음소리 신고에도 설마하다 결국 안하게 되는 게 실상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문학이 현실 같을 수 없고, 모든 문학이 현실이어야 할 리도 없지만, 전쟁이란 것을 겪었기에 위의 문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이보다 더 나약할 수 없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대단한 힘을 갖는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의 의미와 상태를 생생히 전달한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유럽의 좌파가 형성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군부와 우익 진영이 일으킨 내란, 뭘 어떻게 정의해야 간단해지는지 도통 모를 것 같은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여전히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구분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한낱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현상을 두고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린다. 한마디 더 보태서 상처 주느니 그냥 내가 상처 입고 말겠다. 언젠가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떠났고, 나는 친구를 이미 보내고 난 후였다. 한 번도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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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님. <잉글리쉬 페이션트> 너무 좋아해요. 레마르트의 <개선문>도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읽어보지 못했어요.<새의 노래>에 관심이 가네요. 전쟁문학으로 이렇게 정리해서 한 편의 잘 정리된 페이퍼로 보니 더 알차게 다가옵니다.

아이리시스 2013-02-02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요. <개선문>도 읽어보고 싶어요. 어딘가 비슷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많아서 레마르크를 바로 또 읽을 엄두가 나질 않아요.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부전전 이상없다가 출판된 것은 아직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어요.하지만 이미 우익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었죠.그가 망명한 이듬해인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합니다.

요즘 아이리시스 님이 제 블로그에 방문이 뜸해서 서운해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6:31   좋아요 0 | URL
풉 저도 노자님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어요=33333333333

왜 뜬금없이 바이마르 공화국 얘기를 하시지, 노이에자이트님은 항상 뼈가 되는 말씀만 해주셨는데 저 얘기가 중요한가..왜 바이마르 공화국 나왔지, 라고 곰곰 생각하다가요, 저는 똑똑하니까요(!) 발견했지 뭡니까. 오류를(!!) 그러니까 베껴도 좀 알고나서 베껴야 하는 건데, 푸핫 하하하 하하하(민망)

그래서 손 안대고 코를 풀었지 뭡니까! 문장 순서를 한 번 바꿔봤어요. (감쪽같죠?)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말이 안되는 짓을 제가 본문에 떡하니 적어놨지 뭡니까. >.< --;;;;;; (__) 이건 인사예요. 고맙다는.

아니, 노자님은 제 방문이 뜸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고.. 움화화홧. 갑니다, 댓글을 못 쓸 뿐.

댈러웨이 2013-02-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문학 몰아서 보고 있다더니 드디어 올라왔네요. 그게 언제였더라. 우힛. 별 걸 다 기억하는 댈러웨이! 아직 이 페이퍼는 안 읽었어요. 미리 잘 읽겠다고 갑자기 댓글을 다는 이유는...서운하다고 말씀하시는 노이에자이트님이 귀엽게...여...여...겨져서... =333 =33333 =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3-02-02 16:37   좋아요 0 | URL
맞아, 전에 제가 얘기 했었죠. 소문냈어 막. 페이퍼가 좀 오래 묵었어요. 전쟁 페이퍼가 세 개나 있었는데 그건 차차--;; 이상한 거 있죠.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니까 그 글을 왜 시작했는지 내가 쓰고자 했던 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아요. @.@@@@@@@@

아, 그리고 댈러웨이님, 댈러웨이님이 절 위해서 번역에 도전하실 책을 하나 발견했어요(무슨 소리지;;).

2013-02-02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3-02-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요? (폰인데 연결 댓글 기능이 없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8:40   좋아요 0 | URL
행진의 끝Parade’s End, 포드 매독스 포드.

transient-guest 2013-02-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몇 권 보이네요. 제가 가진 해원에서 나온 옛날판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같이 들어있었지요. 어린 나이였었고 해서, '서부전전 이상없다'의 속편인줄 알았어요.ㅎㅎ 지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action, 그리고 유대계 주류의 여러 이슈들 때문에 덜 공감하지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6 18:01   좋아요 0 | URL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에 그 책 맞나요? 제가 [동유럽의 조각들]이란 페이퍼에 넣었던 책이랑 제목이 같아요. 그 책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기록이었죠, 아마. 소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 두 작품이 같이 있는지 신기해요. 레마르크는 다 비슷비슷해보여서 한꺼번에 읽는데에 무리가 따라요. 저는 한 작가를 쭉 읽어내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불가능해요. 트란님 요즘은 어떤 책 읽고 계세요? :)

transient-guest 2013-02-14 04:01   좋아요 0 | URL
레마르크도 theme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저는 위의 두 작품들하고 '사랑할때와 죽을때'까지는 잘 읽었는데, '개선문'은 조금 그랬구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읽으면서, 국경과 국경을 방황하는 운명의 당시 유태인들 생각에 좀 짠한 기분이었구요. 그래도 비교적 happy ending이라는게 좋았어요.ㅎ

아이리시스 2013-02-14 19: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빌리러 도서관에라도 가야겠어요. 레마르크는 한 권 봐서 궁금하지 않지만 유태인이라니, 관심사라서요. 해피엔딩 원어로 쓰니까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트란님. 멀리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0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에게 나를 맡기다 - 영혼을 어루만지는 그림
함정임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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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개인적인 공간이라 여기는 곳에 사적인 단상을 끄적거리다가 비로소 불특정다수가 읽을 수 있는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머릿속에 'Love, Art, Trip'이라는 세 키워드를 담고 있었다는 걸 언젠가 말한 적 있는 것 같다. 유려하지 않은 관심사와 형편없는 몰입도 탓에 시작도 못하고 이만큼이나 지나버렸지만, 적어도 'Art'라는 관심사가 미술사와 미학, 철학과 사상사, 음악과 문학을 칭한다는 건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20대 초반 블로그 지도가 이 분야들이라면, 지금은 세계사, 경제, 요리 정도가 더 포함될 수도 있을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나이를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넓고 깊어져야 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로 깊이와 넓이가 설명된다면, 연장자가 가장 전문적이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고, 진단은 자기분열을 하든 자아성찰에 빠지든 각자 알아서 해보면 된다. 내가 이렇게 넓이도 깊이도 전무한 책읽기에 리뷰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드는 대신, 계획을 밀고 나갔다면, 그래서 전문성과 개연성은 없어도 열정 하나만으로 운좋게 책이 되었다면 이와 비슷한 그림 에세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정임쌤도 내가 알기로는 미술이나 미술사를 전공하신 적이 없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 많은 것에 나만의 계보가 없던 시절, 그녀에게서 '폭풍의 언덕'과 '묘지기행'과 '불문학'의 플로베르,발자크,스탕달을 배웠고, '마담 보바리'의 김화영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 모네와 마네와 르누아르와 램브란트를 만나고, 모네의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을 들여다보며 당대를 회상하는 시간을 내공화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이런저런 시들. 행여 그녀의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졸업했거나 그녀의 전공이 불문학이 아니라, 노문학이나 영문학이었다면, 플로베르와 보들레르 보다 도스토옙스키나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더 좋아했을까. 영문학에서 샐린저는 늘 사랑했었다. 그를 예외로 하고도, 예술의 황금기는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는 걸, 파리로 몰려들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설렘으로 무장된 표정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대학 때 '카피작성론' 수업의 학기 말 과제는 광고카피 100개를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었다. 창조는 아니었고, 모방에서 창조하라는 거여서, 매일 미친듯이 잡지를 뒤적거리며 오리고 붙여서 기존 카피를 비틀거나 변형해야 했다. 그림 에세이를 읽는 것도 처음이 아니어서 <그림에게 나를 맡기다>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그림 에세이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욕망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따라온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주일에 한 편 그림 에세이 쓰기. 역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시작은 오직 열정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 아는' 구멍이 숭숭 뚫린 미술사 지식, 제대로 구입 한 권 못해본 화집, 이어가지 못하는 화가 연대기는 어쩔 수 없이 자괴감처럼 따라붙는다. 뭣모를 때나 루브르에 가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만 같았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단숨에 읽어내린다고 웬만해선 메워지는 지식이 아니란 것도 너무나 명징해서, 자료가 정보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가공 즉, 학습과 시행착오, 암기와 재검토의 시간을 타당화 시켜준다. 

 

그렇게 짠-하고 내가 쓴 글 공개하면 좋겠는데 에세이는 고사하고 그림구경 안한 지도 제법 오래돼서 그저 읽었다. 잠들기 전 어쩌다 한 편씩. 부담이 없어 좋고 단편적으로 지나가는 지식들을 고스란히 적어두지 않아도 될 만큼 그때그때 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터너를 만났다. 루브르와 퐁피두, 테이트 갤러리와 내셔널 갤러리에 갔었다. 전부터 그림에는 관심이 있는 편이었는데도 남들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는 없는 게 그즈음 내 실력이었다. 터너의 그림 중에 '황금가지'라는 작품이 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같은 제목. 사실 영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역사학자 토인비와 인류학자 프레이저인데, 책이 사전이다. 두께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렇다. 작년에도 <역사의 연구>에 열 몇 번의 시도를 했고, 프레이저는 아직은 뭐 어쩔 재간이나 작정 따위 없다. <황금가지>는 종교의 기원과 진화과정에 대한 신화학이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과학은 주술이 진화한 것. 종교를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해, 인간의 문명이 미신, 주술에서 종교로 그리고 종교에서 과학으로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터너, <황금가지>, 1834

 

터너가 그린 '황금가지'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삽화로 실린다. 그리고 <아이네이스>는 르 귄이 쓴 <라비니아>의 탄생에 기여한다. 디아나의 거울이라 불리던 네미 숲 조그만 호수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터너의 '황금가지'는 황금색 위엄을 있는대로 드러내며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터너의 그림에서 촉발된 열세 권짜리 인류학의 보고이며, 테이트 갤러리는 영국의 자랑 터너의 그림들로 특별실을 만들어 그의 그림을 걸어두고 있다.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가 터너의 그림 속에는 눈부신 황금빛 색채가 두드러지며 추상성을 극대화시킨다. 1825년 영국 철도가 처음 개통되자 새로운 교통수단의 힘과 속도에 압도된 이들이 여럿이었으며, 터너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달리는 열차의 속도와 풍광을 느끼기 위해 관찰한 끝에 '빛, 증기, 속도'라는 그림을 그렸다. 윤곽과 형태를 뭉개고 검은 증기기관차가 육중한 속력으로 다가오는 순간 포착. 대기와 속도,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감각적 에너지와 빛나는 힘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다.

 

윌리엄 터너, <빛, 증기, 속도>, 1844 

 

그리고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모네의 '수련'과 '생 라자르 역'을 지나 네덜란드 황금기 17세기를 살았던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를 만나러 간다. 인간을 둘러싼 상황, 즉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 사적 생활의 영역으로 파고들던 시대의 예술.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브렐의 <도시의 모퉁이>는 뚜렷한 회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와 흐름의 이미지가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프리다 칼로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마리 로랑생 등 세계 여성 화가의 역사 또한 만만찮다. 그림을 이어봤다면 사진에 대해서도 잠깐 시작해볼까. 헬뮤트 뉴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등의 사진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사진이라는 장르가 언제부터 회화처럼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사진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사진은 예술이자 일상 속으로 침투한 또 하나의 현재다.

 

'현대'라는 시간성에 사로잡힌 예술가치고 사진을 간과한 사람은 드물다. '현대성'의 창시자로 불리는 19세기 상징주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 샤를 보들레르가 그렇고, 보들레르에 열광해 아예 파리에 와 살다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파리에 관한 매혹적인 책까지 쓰고, 결국은 나치의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눈을 감은 발터 벤야민이 그렇고, 보들레르와 벤야민과 같은 대문자 B의 성을 가진 20세기 주목할 만한 문화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렇다. (pp.184-186)

포착이라는 단어의 순간성. 대상의 실물이 의식 사이로 끼어드는 순간의 재현. 그것은 '내가 본 것'인가 '내가 봤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상징성을 굳이 끼워넣지 않아도 브레송이나 케르테츠의 사진집을 한 번 들춰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속에 고스란히 투여된 사진가의 시선과 내 자부심과의 간극 혹은 차이를.

 

이 책 속에 가장 마지막 등장하는 화가는 고흐. 사실은 브뢰헬이라는 화가인데 또렷한 겨울 눈 속 풍경을 그린 꽤 맘에 드는 작품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화가라서 마지막은 내게 고흐다. 고흐로 끝난다. 이제 아무리 뛰어난 언변의 누군가가 말해도 기존의 말 속에 기존의 말을 또다시 섞을 뿐인, 그림 에세이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는 화가. <꽃핀 편도나무 가지>와 <해바라기>. 예전에 고흐의 그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리스트에 정물화는 없었다. 주로 풍경화이거나 자화상이었다. 이제는 정물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이 있다면 그 반대의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그림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99센트>, 1999

 

현대미술을 거의 모르고 사진도 잘 모르지만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찾아냈다. 2006년 필립스 경매에서 $2,480,000(약 24억 원)에 낙찰되어 전후 사진으로는 최고 낙찰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사진 설명은 구구절절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겠지만 한 장 정도는 각자 혼자 생각해보도록 하는 게 좋겠고, 이 사진을 본 이후 급격히 배가 고파진 내가 한 일은 나만 아는 걸로 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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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1-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파리, 몽파르나스》를 보았을 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미셸 우엘벡 소설의 지향점이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것들이 구르스키의 사진과 오버랩 되더라구요.

아이리시스 2013-01-30 22:57   좋아요 0 | URL
위에서 찍었는데 건물 아파트처럼 보이는 그 사진이 <<파리, 몽파르나스>>인가요, 드림아웃님?(이라고 묻고 찾아보지는 않는다..귀찮;;) 네, 저는 이렇습니다ㅋㅋ

미셸 우엘벡을 한 권도 못 읽어보고 [소립자]를 영화로 본 적은 있는데, 그것도 언뜻이라, 소설이 궁금하면서도 구르스키의 사진과 오버랩이라니 어쩐지 이해될 것도 같고 그래요. 그러고보면 저 굉장히 스펙트럼 넓네요, 안봐도 이해가 막 되고요--; 움화화홧. 이게..이렇게 자화자찬으로 끝나면 안되는데, 긁적긁적..

꿈꾸는섬 2013-01-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그림에세이, 넘 좋아요. 저 요새 그림도 안 보고 살았구나, 하고 자책하고 있어요.
올 해는 그림도 더 열심히 봐야지...하고 지금 생각하고 있어요.^^
보고 싶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30 23:00   좋아요 0 | URL
꿈섬님이 돌아오신 데는 저도 한몫합니다,ㅋㅋㅋ 오늘 왜 이러지..( '')
그냥 보면 되지 뭘 더 해야하나 싶다가도 잘 모르는 분야 글 한 편 쓰려면 진이 다 빠져요. 제가 썼다기 보다는 다 책에 있어요. 푸핫ㅎㅎㅎ

미술관에 가고 싶어요. 미술관! 미술관! 여기도 미술관 있는데 고흐는 안하잖아요. 그쵸그쵸. 고흐 보고 싶어요. 보겠다고 암스테르담에 갈 수는 없는 일 아닐까요..시무룩.

완전 보고 싶었어요^^

2013-01-3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3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3-01-3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에 비하면, 나는 진짜 지루한 수업만 들었어...뭐야, 카피작성론은(흑흑). 근데 뭔가 신기해요! 엊그제 페이퍼 쓰면서 넣으려고 했던 그림이 시슬레가 아니고 브뢰헬이었거든요(브뢰헬인가 브뢰겔인가 표기법이 뭐죠?^^;). 저도 현대미술에는 엄청 취약하고; 인상파나 초현실주의에 끌리는 편인 것 같아요. 클레나 루오도 좋구요.

<황금가지>는....도서관에서 빌려서 들고 오다가 울 뻔 했어요(아님 집어던지던가..). 이렇게 무거운 책은 <우울과 몽상>이후 처음... 근데 1/3도 다 안 읽어다는 것!(큭...) 저는 최근에 읽은 것 중에선, 이주헌씨의 <지식의 미술관>이 제일 재밌었어요 :)

아이리시스 2013-01-31 15:59   좋아요 0 | URL
원래 그렇게 높은 줄 모르고 광고회사 들어가는 게 그때는(!) 나머지 꿈이었어요. 신방과 수업에 광고도 살짝 같이 있지 않았어요? 광고론 위에 피알론 그 위에 카피작성론. 광고관련 수업이 꽤 있었어요.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닌 걸..쳇쳇. 책에는 브뢰헬이라고.. 아..저 방금 이 댓글 보고 샤이닝님 서재 갔는데 시슬레 그림이에요? 나 시슬레는 좀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름.. 아, 책에서 브뢰헬도 비슷한 분위기였어요. 우리 올해는 현대미술 마스터 합시다!(큭..) 읽겠다고 빌려오는 게 대단해요. 저는 실물도 못 봤어요(..) 언젠가 황금색 표지를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역사의 미술관>은 실망이었어요.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람들 모아놓고 그림교양 가르치는 듯해서. 이전에 나온 <지식의 미술관>은 좋다는 얘기 들어서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마녀고양이 2013-01-3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나는, 여행가고 싶어서 환장한게 틀림없어,
흐릿하고 몽환적인 색상만 봐도, 동동 어디 떠나가고 싶은 생각만 드니 말이예요,
황금가지 그림을 보면서 그 생각했어요... ㅠㅠ. 프레이저의 사전과 같은 책은 나두 시도만... ㅠ.

마지막 그림 말이죠, 음, 참 좋네요. 뭐라 할 수 없으나 저는 맘에 드네요, 물론
거실에 걸어놓고 싶진 않지만. 근데 배는 안 고프네, 넘 달아보여서리.. ㅋ

아이리시스 2013-01-31 16:06   좋아요 0 | URL
그러면 음..어디가고 싶은지 일단 말로 갔다옵시다, 달여우님. 그런 담에 함께 루트를 짜고 갔다와서 갔다온 걸로ㅋㅋ 겨울에는 추워서 좀 별로이긴 한데, 가장 먼저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초콜릿 사진 같아서 저도 우웩..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요@.@

여행 한 번 다녀와서 프레이저 사전 읽을까요?ㅠ.ㅠ

맥거핀 2013-02-0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함정임 작가의 소설이 들어있는 것을 봤는데, 미술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으시군요. 저 위의 <빛, 증기, 속도>라는 작품 아주 좋네요. 글을 읽다보니 최근에 미술관에 간지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7:39   좋아요 0 | URL
맞다, 이상문학상에 계셨죠. 몇 번째 보는 것 같은데 제가 수상집을 안 읽어본지가 오래되어서.. 수업시간에 그림 많이 보여주셨어요. 친한 언니가 미학전공으로 진학하고 싶어했는데 졸업 후 연락이 끊겨서 대학원에 갔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 영향으로 회화에도 관심이 생긴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추천도서로 읽었던 <미학 오디세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미술을 못하고 싫어하는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못 그리는 걸 그려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런 거 진짜 싫었거든요. 저도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주로 끌려요.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현대미술관도 많이 간 것 같지만 고흐 보다 좋지 않아요.

어느 미술관에 가면 어떤 그림을 볼 수 있는지 맥거핀님이 저 좀 알려주세요.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미세한 입자로 흩어지는 시대적 불화, 근대와 현대가 교차되던 찰나를 중인 이하 하층민의 삶을 통해 비춘다. 소설이면서 삶이고, 19세기 후반의 것인 동시에 21세기 현재의 것이기도 하다. 1894년 갑오개혁, 공식적으로 노비가 해방되고, 신분제가 금지된다. 이 개혁은 근대 봉건 사회 제도의 청산으로 여겨지지만, 친일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되면서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도 몇 백 년간 굳건하게 이어진 신분제는 온 나라 구석구석을 갉아먹으며 막강한 신분계급을 유지시킨다. 이면에는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양반관료 무리가 있었다. 법으로 양천제가 시행되면서 과거는 양인 이상에게 허락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반상제가 통용되어 양인은 양반/중인/상민으로 구분되었다. 중인(서얼과 기술관)에게는 무과만이, 상민은 농사나 장사로 그마저도 시간내어 공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행여 급제하더라도 주요관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흔했고, 신분에 의해 세습되는 직이 워낙 많아 자리가 부족했다. 글공부를 하고도 양반의 대리시험을 치러주거나 지레 포기하는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권리는 철저히 박탈당하고 조세, 공납, 역의 의무는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받는 계급 또한 이들이었다. 꿈을 꿀 권리조차 상실한 이들은 대체로 입에 풀칠하기 바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세상을 향한 울분과 절망을 표출시키며 세상이 달라지기를 희망한다. <여울물 소리>는 서얼 출신, 하급 관리, 잔반, 기술관을 비롯한 중인들의 울분이 표출된 임오군란에서 갑오개혁까지의 시대상을 다룬다. 기생, 노비, 무당, 소리꾼, 광대와 같은 하층민의 생활상 또한 상세히 밝힌다.


그저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문 채 먹고 입고 자면서 살아갔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늘 그래온 것처럼 평온한 나날들이 계속되는 한, 유교가 강조하는 불평등 세상은 바뀌지 않았겠지만 싸우다 죽어간 귀한 목숨들을 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형이나 아우가 천지교도라는 이유로 대신 끌려가 처형당하는 일도, 억울한 감옥살이도, 실컷 일하고 급료를 받지 못하는 관료나 군인도, 사람의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사고팔 수 있다는 어이없음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위험한 구호는 임금과 신하, 양반과 노비,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형과 제 등 모든 상하관계를 깨부수려는 시도였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신호탄이었다. 적어도 삼례 집회, 교조신원에 대한 서울복합상소, 보은 집회, 금구 집회. 굵직한 봉기만 수 차례, 동학농민운동은 청일전쟁에서 갑오개혁까지 안팎으로 흉흉한 시대상과 연합적으로 발기하고 또 진압되었다. 동학을 천지교로 픽션화했지만 처형당한 최제우와 뒤를 이은 최시형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감으로서 모든 일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소.

 

하는 이신통의 말이 야속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방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나는 그 밤을 오롯이 이 서방과 함께 보냈다. 엄마는 새 이부자리를 들인다, 방의 군불을 지핀다 하며 내놓고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사흘 동안 묵었는데 칠팔 명의 동행이 와서 앞채에 들었다. 그들은 그믐께에 강경을 떠나 삼례로 출발했다.

 

기나긴 세월 속에 문득문득 떠오르고 간혹 그리워지는 대상이다가, 궁금하다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비로소 참지 못하고 내뱉는 사내의 무심한 듯한 목소리. 쿵 내려앉는 여인의 마음 한귀퉁이에 불이 붙는다. 누구의 자식, 아비, 손주, 제자, 아우, 그들은 어째서 버려두고 떠났나. 길을 서성이게 하고, 불덩이를 치밀어오르게 한 주체는 무엇인가. 시대가 그러했으리라. 급격한 물살에 휩쓸린 이들의 전쟁같은 사연을 대할 때면 나는 멀찌감치 있어야 했다. 고작 백 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잊혀져 가는 삶. 어쩌면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삶. 말해지지 않은 삶들이 미열처럼 들떠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 여백이 남긴 기다림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 그 기다림의 끝이 어디일지 미리 볼 수 없어 애가 탔다. 즉흥세계에 발붙이고 사는 것들을 까무룩하게 만드는 덩어리. 멀리보고 멀리듣고 멀리가는 이들. 그들은 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으며, 증발하고 또 증발해야 했으며,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갈 수가 없었나. 왜 아무 곳에 제 존재를 뉘이거나 어느 끈에도 매일 수 없었나. 매순간 아픈 역사지만, 아래로부터 가장 치열하고 가열차게 싸워야 했던 밑바닥 것들의 날. 개혁과 혁명이라는 말에는 가늠할 수 없는 온도가 만져진다. 

 

이신은 서자여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광대이면서 소리꾼이었으므로 한곳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시대를 거스르거나 뛰어넘고자 했던 이들이 흔히 그랬듯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아무 곳에 닿지 못했을테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지라 그들은 자꾸만 떠난다. 연희패와 천지교. 소리꾼과 광대. 그것이 연옥의 사랑, 신통의 이름이다. 짧고 불 같았던 하룻밤과 오랜 기다림과 헤맴, 또 다시 반 년, 연이은 기다림과 헤맴. 티끌같은 희망. 연옥은 가세를 돌보며 오지 않는 사내를 기다린다. 찾아나설 때마다 그의 과거와 소식을 마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치이고 매이던 아랫것들이 저항과 혁명을 구상한다고 했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워 세상을 뒤집으려 할 때, 천지교도들은 '주자의 성리학'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세무민의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어갔다. 수차례의 천주교 박해,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제물포 조약), 갑신정변,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으로 시국이 시끄러운 즈음이었다.

 

한국사의 근대 막바지가 생생히 재현된다. 모두는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이신통과 서일수, 김만복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돌진한다. 누군가는 처절하게 생을 다해가고, 또 누군가는 굳건한 심지로 생을 태워간다.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마침내 도달한 그의 생애. 그가 거쳐간 천지교도를 비롯한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의 일생. 그를 찾기 위해 그가 간 길을 차곡차곡 밟아가며 제 발자국을 남기는 이 시대의 강인한 여인. 눈물겨운 시국을 제대로 살아내려던 이의 마지막 목소리. 거기서 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탄생과 소멸이 뒤섞이는 100년. 시공간의 교차.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아랫것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이들은 세상을 입맛에 맞출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제자리다. 약한 자는 억압당하고, 가진 자는 점점 더 많이 가진다. 미묘하게 나빠지기도 좋아지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1%에게는 좋아지고, 99%에게는 나빠지는 걸테지만. 그들은 사람이 오직 사람으로, 물이 오로지 물로서 존재하기를 바랐다. 돌은 돌이고, 강은 강이고, 부모는 부모인 것이 무엇이 나쁜가. 온갖 것들이 제 바른 이름을 찾아가는 것 어디에 비틀린 욕망이 있기에 이토록 존재를 다하기가 힘든가. 단지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대접을 받고, 능력에 따라 평등히 대우받는 세상을 바랐을 뿐이다. 지금과도 다르지 않다. 

 

가질 수 없는 문관직 일찌감치 내려놓고 시전에 파는 서책을 사서 글 모르는 이들에게 읽어주며 시국을 견디는 신통은 실력확인차 과거 보러 한양에 갔다가 서일수와 김만복을 만난다. 불의에 항거하고 세상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이 모처럼 같은 자리에서 만나 활활 타오른다. 유춘길과 유영길, 박인희와 박도희, 임효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한 눈물겨운 사연이 시대를 대변한다. 한데 뭉쳐진 마음이 비로소 곧은 소리를 내고, 단단한 세상에 균열을 가한다. 여울은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게 흐르는 지점이다. 한국사에서 진정한 근대는 일본과 청,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외세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고종의 섭정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종식하고, 왕권강화와 쇄국을 위해 애썼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진정한 근대화를 늦추고 왕좌에 대한 권력욕을 끝내 놓지 못한 것이나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세 다툼으로 인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 단단하지 못한 왕조는 제 뜻을 펼칠 때마다 늘 일본과 청의 힘을 끌어다쓸 수밖에 없었는데, 안팎으로 흉흉해져 백성의 고통은 심해지고 결속력도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외세에 국력을 잃고,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식민시대를 맞는다. 그만큼 근대화의 물살은 빨랐다. 간절할 수록, 목표가 좁고 깊을 수록, 여럿이 힘을 합할 수록 더 빠르게 개혁의 물살이 트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기저기 갈등의 씨앗을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사상이 다른 배다른 형제가 신분차별로 서로를 미워하다 기어이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 이런 극단의 사태는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얼굴 모르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미래는 또 어떠한가. 불의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와 불의에 맞서싸우다 죽는 아버지. 거기에는 세상을 점점 더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이 포함되어 있을까. 과거를 통해 현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메시지는 뚜렷하다. 어리석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가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잘난 누군가의 손에 내 미래를 맡기기 보다는 조금 더 원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철저히 검게 변해갔지만 욕할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될 줄 몰랐듯 나도 후일을 장담하거나 선연히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찾지 못할 뿐더러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 이 시대에 바치는 완연하고 정갈한 오마주. 오마주 투 코리아. 그렇게 읽힌다. 얼만큼 흐를 것인가, 과연 흐르고는 있는가, 어디로 얼만큼 흐르거나 누가 멈추게 할 것인가. 이 순간에도 역사는 흐르는 동시에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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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 책 엊그제 샀어요!
기대는 별로 안 하고 있는데... 그래서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읽어봐야지!
아이님 안 자고 뭐해요. 나는 노다메 칸타빌레 다시 보는 중... 요새 또 클래식에 심취했잖아요 ㅎㅎ
이제 영단어 외우러 가야지. 원래 총통각하 다 읽고 리뷰 쓰려했는데 귀찮고 피곤해서 그만뒀어요.
영단어... 슬프네....

아이님 굳밤 :)

아이리시스 2013-01-14 00:37   좋아요 0 | URL
응, 소이진님이 이 책 산 거 봤지롱. 저는 나오자마자 사가지고 몇 번 처음부터 읽다가 또 읽고 여튼 힘들었어+_+ 재미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의미가 깊은 작품인 건 확실해요. 황석영 작가가 아니라면 이 책이 많이 읽힐까 싶기도 하고. 저는 원래 근현대사 배경을 좋아해요. 원래 세 시쯤 자는데 이렇게 여기서 라이프스타일을 얘기하려니 너무 부끄러워ㅠ.ㅠ 밤에 티비를 꼭 봐줘야 살아가는 재미가 있는 것 같거든요. 나비부인 다친 거 알아요? 보고 자려고요. 사실 방금까지는 7080 봤어요.

노다메 저도저도 완전 무한홀릭인데. 반짝반짝작은별~ 모차르트! 요즘은 마나짱이 드라마에 안 나와요? 에이타짱은? 일본드라마 본 지 한참 됐네요. 소이진님은 신작도 봐요?

내일 학원가는데 벌써 12시 넘었는데 이제 영어단어 외우러 가는 거임?(장하다..) 총통각하는 다 읽긴 읽었고요? 어쨌거나 500개 외워서 쪽지셤 치면 점수 알려주기. 홧팅!!

이진 2013-01-14 00:57   좋아요 0 | URL
저 나비부인을 10화부턴가 안보다가 저번주에 보는데 재밌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주엔 교회 가 있느라 어제 놓치고 오늘은 깜빡해서 놓쳤네.
토렌트 가동해야 겠어요. 슬슬 산으로 가는... 막장의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영애누님과 정아누님의 일품연기 하나만 믿고!

저는 책도, 드라마도, 영화도 신작은 잘 안보는 편이예요. 마나짱은... 쉬고 있으려나? 비교적 최근에 마나짱나온 영화 개봉했었잖아요. <토끼 드롭>. 에이타야 뭐... 워낙에 인기 있고 여러 작품에 나오니까 뭐 하는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크크... 일본 배우는 노다메때가 전부 외모가 빛이나요! 타마키 히로시도 그렇고 주리도 그렇고 우리 후쿠시도 그렇고! 에이타도 그렇고!!!

나 영단어 외우러 간다했구요. 사실 안 가고 베토벤 들었답니다... 후후

아이리시스 2013-01-14 16:18   좋아요 0 | URL
안 갔을줄 알았어ㅎㅎ 나는 갔었어요--;
오늘 아직 학원은 안갔어요?(간섭)

맥거핀 2013-01-1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지교가 천도교 말하는 거죠? 저는 맨처음에 천지교라고 쓴 것을 보고 '천주교'를 잘못 쓴줄 알고 오타 지적해야지 했는데 아마도 책 중에서는 천지교라고 나오는 모양이군요. 참 돌이켜보면 근대화의 시기도 그렇고, 일제가 끝나던 시기도 그렇고 조금더 제대로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실패로 돌아가고, 어떻게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같은 패악을 부리던 자들이 또 상당수 기득권을 차지하고, 약한 자를 밟고 강자에 아첨하던 자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지배권력이 된 것 같아서 참 우리역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요즘 드라마 <마의>를 봐도 그렇고, 가진 자들은 늘 어떻게든 더많이 가지려 하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은 늘 여러모로 곤경에 처하는 것 같아요..아 마의 얘기한 김에 한마디 더하면 제 컴퓨터는 치종청에 가지고 갔더니 수의영감이 안계셔서 할 수 없이 의생에게 외과술을 받기는 했는데, 과연 살아날지 어떨지..지금은 할 수 없이 노트북으로 쓰고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14 00:43   좋아요 0 | URL
네. 맥거핀님 똑똑해+_+ 그거 지적받는 거 디게 창피할 것 같아 으악으악@.@ 우리가 만약에 그 시대에 기득권을 가진 양반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요? 난 뭐 좀 달랐을까요?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가진 게 많으면 나도 그걸 놓기가 겁이날 것 같아요.

<마의> 본 지 한참 됐는데 우리 마의께서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나요? 거기서부터 못본 것 같아요. 치종청은 어디..수의영감은 누구..의생..외과술.. 웩! 컴퓨터도 있고 노트북도 있는 그런 분이였어요? 저는 하나 뿐인데. 게다가 이거 제가 약정으로 사가지고 고장날까봐 모시고 살아요. 폰은 아직 2G인 주제에 노트북은 3년 약정으로 계약했어요. 2년2개월째라서 모시고 살고 있어요.미쳐@@@@@@@@@@@@@@@@@@@@@@@

맥거핀 2013-01-1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걀걀 실시간 댓글 달아드리죠. 마의님 출생비밀 이미 제대로 밝혀졌구요. 수의영감은 하늘나라 가셨고, 새로운 멘토가 등장했스요. 마의 지겨워서 이제 안보려고 했는데, 새로나온 멘토와 여제자 콤비가 너무 귀여워서 또 멍청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 노트북이 얼마전까지 3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최근에 한대는 팔아서 이제는 노트북이 두 대라능..이라는 왠지 오타쿠스러운 얘기를 하고 있군요.-_-;;

저는 이제 자러갑니다.ㅋ 내일 간만에 일찍 나가야 해서..^^

아이리시스 2013-01-14 16:22   좋아요 0 | URL
저는 대놓게 본 게 아니라서 수의영감도 모르겠고 이름 말하면 하나도 모르겠지만 대충 누군지 알겠어ㅎㅎ 새로나온 멘토와 여제자 콤비 확인해야지, 귀여운지 안 귀여운지--;

그게 뭐랄까, 좀 미친 거, 덜 미친 거, 새 거 이렇게 세 대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집에도 막가는(맛이 간) 데스크탑, 노트북은 하나씩 더 있거든요. 오타쿠 맞아맞아+_+ 오타쿠야, 내 곁에 오타쿠가 있어;;

안녕. 좋은데 가셨을라나..^^

프레이야 2013-01-1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저는 아직 이신이 과거 보러 서울 가서 이야기꾼으로 인기 날리는 대목 녹음 중이에요. 어서 읽고싶어요. 방각본 읽어주는 대목을 멋지게 해야되는데 그게 한계라는ᆢ ㅎㅎ 아이님, 좋은하루보내세요. ^^

아이리시스 2013-01-14 16: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장끼전! 그런 부분은 목소리를 달리해야 하나요, 어떻게 하나요? 우왓, 그러고보니 이 소설 녹음은 정말 대단한 일일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도 좋은 하루요^^ (하루 다 지나간다..)

Shining 2013-01-1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신간평가단 책으로 받았는데, 제가 황선생님 글을 잘 못 읽거든요ㅠㅠ 엉엉.. 아이님 리뷰 몰래 배낄까봐요(이봐이봐). 흑흑, 가뜩이나 물리적 시간도 없는데 마음까지 막막하네요;;

아이리시스 2013-01-14 16:27   좋아요 0 | URL
베껴베껴. 못 읽는다는 것도 어쩐지 알겠고, 이 책이 베스트가 되고 많이 읽혔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그렇게 되는 이유도 알겠고 어쩐지 다 알 것 같아요. 저도 황선생님 책을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읽은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오래된 정원>이랑 <삼포 가는 길>은 좋아했어요. 음..이 책은 역사소설에 가까워서 중년이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재밌는 역사교과서로 읽히기도 하고 그래요. 그..그..뭐더라, 저는 이인화 좋아하는데 <지옥설계도>는 재밌어요? 놓쳤어, 놓쳤어ㅠㅠ

Shining 2013-01-15 11:12   좋아요 0 | URL
저 오타난거 봐요ㅋㅋㅋㅋㅋ 아이패드 쓴지 이제 좀 되가는데도 오타는 여전;; 오타가 많으면 아이패드로 쓴거라고 양해 해주세요.. 라고 쓰는데도 또 오타가; 전 손님, 이 처음 읽은 책이라 좀 데인 기억이 있어요ㅠㅠ 결국 읽다 포기했지만;; 그리고 그냥 왠지.. 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아이님이 김애란 작가 그러듯이 저는 왠지 잘 안 읽게 되고 안 찾게 돼요. 근데 중요한건 지옥설계도도 완전 몰입 안되는거 있죠ㅠㅠㅠ 엉엉 큰일났어, 괜히 한다고 했나봐요(입 삐죽).......

아이리시스 2013-01-17 16:06   좋아요 0 | URL
오타 어디-_-;; 타이핑 해도 오타는 언제나 내 친구+_+ 근현대사 배경 안좋아해서 그래요, 샤이닝님? 그런데 좋아하는 작가도 저는 다 좋지는 않더라고요. 김애란 작가도 첫작품 밖에 읽은 게 없는데 이분은 약간 희생양(?)인 게 저는 그 세대 전체가 그렇게 읽히거든요. 시시해요. 그중에 제일 똑똑하고 잘난 작가죠, 이분은. 그러니까 샤이닝님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그냥 왠지..도 동감이에요. 그냥 왠지..별로인 게 세상에 꽤 많아요! 이번 게 재미없을 수도 있죠, 그분은 이야기꾼으로서의 모습이 좋은데 몰입이 안된다니 알 것도 같;; 하지만 역시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입견을 취향으로 퉁치지 않으려면..

엉엉 큰일났어, 그치만 담번부터는 모두 다 샤이닝님이 좋아하는 소설이 올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2013-01-1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9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1-23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리뷰는 노자님의 서재에서 먼저 접했는데, 여기서 다시 보네요. 그럴수록 자꾸 궁금해집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책들은 일제강점기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만큼 가슴이 아리게 하네요.

아이리시스 2013-01-24 02:02   좋아요 0 | URL
제가 정통사극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판타지사극이나 퓨전사극은 취향에 맞는 것 같고,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배경 이야기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대를 건드리는 국내작품들은 결국 우리 것이고, 알아야 할 역사고, 가슴이 아파요. 쉽게 감정이입하는 법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이 시대에 사셨고, 이 어려움을 다 뚫고 살아난 계보에서 나도 있는 거란 걸 자기객관화 해보는 거예요. 이신통의 삶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생애일 수도 있으니까요. 마음이 아픈 이야기예요. 정해진 결말을 놓고 달려가는데 그걸 끝까지 봐야 하는게 슬픈..

transient-guest 2013-01-24 02:31   좋아요 0 | URL
'정해진 결말을 놓고 달려가는데 그걸 끝까지 봐야 하는'슬픔이 제 가슴을 아리게 하는 부분인가 봅니다. 왜 전 이런 멋진 표현이 나오지 않는거죠??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1-29 21:38   좋아요 0 | URL
트란님은 다른 부분이 멋지신 거겠죠?ㅎㅎㅎ

페크pek0501 2013-01-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작가의 소설은 저도 좋아하는데, 이 책 읽었군요?
발 빠르게 움직이시는 님을 배워야겠어요.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고민이에요.

(나도 이렇게 푸짐하게 글을 쓰고 싶당~~) ㅋㅋ

아이리시스 2013-01-29 21:4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오랜만이에요. 글은 종종 보는데 댓글은 오랜만인 것 같아요 :)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고민이에요2 저는 별로 빠르지 않은데, 사고 싶은 책 반의 반도 안 사는 편이고, 안 사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보다도 당장 읽을 것도 많은데다 당장 읽지 않을 책을 사들이지 말자는, 그냥 돈으로 갖고 있자는(ㅋㅋ) 이유에서예요.

페크님 글도 좋아요. 재밌어요. 괄호 안은 그냥 인사성 댓글이죠?ㅎㅎ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죽음 자체나 죽음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언제나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만이다. 누구 하나 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모여 속닥속닥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의 입장 외에는 들어있지 않다. 산 자들이 말하는 것에 죽음의 본질이 들어있을 리 없다보니, 그 어떤 말도 공허하고 피상적으로 들릴 뿐이다. 사후세계에 관한 얘기들에도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관념으로서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으면 저 세상에서도 가족들과 잘 살 것 같다. 심지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 우리 부모님 말고는 다른 가족을 떠올릴 수가 없지만 그래, 철없이 아직도 그런 걸 믿는다. 루크레티우스처럼 내가 '없던' 과거와 내가 '없을' 미래를 나는 받아들인다. 부모님은 내가 '없던' 세상을 살았고, 내 자식은 내가 '없을' 미래를 살테니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파헤치고 논의하고 듣고 싶어하는 심리에는 해보지 못했다는 것과 할 수 없다는 것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죽고나면 어떨지 궁금해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여기부터 잠시 경건해져야겠다.

 

지난해 2월, 외할아버지를 시골집 뒷산에 묻을 때, 입관식에 참석한 나는 멀찌감치 지켜보며 서있었다. 대통령 선거직전, 형, 곧 따라갈게, 했던 유난히 사이가 좋으셨다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예전과 같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지 않은 것은 그가 내 직계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무원 외삼촌을 비롯한 회사원은 직계가 아니라 허용되지 않는 휴가 때문에 퇴근 후 몇 번이고 오갔다. 그때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낮에는 부모님 손잡고 가서 투표했는데, 밤에 부모님은 장례식장에, 나는 집에 덩그러니, 그날은 그랬다.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도 했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작스런 비고와 생각대로 되지 않던 선거결과에 나는 이성의 초주검 상태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거결과가 중요하다니. 산 자의 이기심이란, 손녀의 되먹지못한 도리란. 그날 밤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지키던 아빠는 취한 탓에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유명한 세대. 다른 선택이란 이유로 쏟아지는 눈초리. 빨갱이 공산주의자 소리까지. 소수의 정치성향으로 가는 곳마다 어떤 테두리에서 거부당한 부모님. 처음부터 얘기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반대진영 편드는 말도 듣기 싫더란다. 그래서 말해버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고. 지거나 약한 쪽이 목소리가 큰 법이라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아빠는 한동안 말을 잃으셨고, 엄마는 참석해야 할 대부분의 송년모임을 접었다. 신경질난다고 탈퇴하라던 카톡의 대화창에는 '박정희 5.18 박근혜 51.8%'의 정보가 동창과 사촌들로부터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카톡에 재가입하지 않았고 친구로부터 오는 전화를 거부하고 계신다. 장난 반 진심 반이지만 지켜보는 일은 더없이 착잡하다.


우린 살아서 선거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할 수 있었다. 며칠간 나는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분노와 한탄, 순응과 체념이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찾아올 때면 미칠 것 같긴 했어도 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죽음과 삶의 거리는 정말로 멀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자가 말할 수 있는 죽음이란 것은 아마 입관식을 보며 고개를 돌리거나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다만, 살아있음을 통해 죽음을 비추어볼 수 있을 뿐이다. 셸리 케이건이 강연하는 죽음에는 '오직 육체로서의'이란 말이 생략된다. 내가 다치거나 누군가를 잃음으로서 찾아올 고통이 두렵지, 죽고나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대체 어떻게 죽음이 두렵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인데, 없는 것이 '없는'데 어째서 '다 있'는 거냐던 말장난의 논리같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 하고, 살고 살아서 사람이라 한다던 우스갯소리. 말은 늘 이승에 남은 자의 것이어서 영혼이 실리지 않는다. 내뱉어진 말이 갈 곳을 제대로 찾기란 어렵다. 허공에 떠도는 냄새 없는 말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가시기 며칠 전을 회상해보면 외할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셨다. 사흘 전에도 정정하시던 외할아버지가 검사차 계시던 병원에서 자꾸만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면, 가족들은 힘든 검사실과 좁은 입원실에 간병인과 눕혀놓는 대신에 고향집으로 모시고 갔을까. 가끔 생각한다. 평생 마주앉아 식사하던 옆지기가 단 사흘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걸 보고 외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두 분께 죽음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었을까. 작은 외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가셨다. 갑작스레 쉬어지지 않는 숨, 알아챌 틈도 없이 주무시는 상태에서 그렇게. 나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반드시 죽음이 두려움이었을까. 하지만 내게는 두려움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살아있는 내게 죽음은 단지 그것이다. 내가 죽으면 모두와 헤어지는 것, 내가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없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되겠지. 말이 반복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의 죽음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산 자가 말하는 죽음이다. 지독한 슬픔도, 끔찍한 고통도, 실체적 두려움도 모두 반사된다. 죽음은 육체가 소멸하는 것이고, 죽고나서도 한동안은 육체가 존재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죽은 후에 영혼이 남는다면, 죽음을 육체가 소멸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게 과연 옳은가. 


새로운 주장 하나 없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각도에서 보는 반론을 추가하여 죽음의 이론을 역설하는 소거법 형태를 띤다. 실제 소거법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죽어보지 못한 자가 죽음을 얘기하려면 한 면에서 볼 수밖에 없고, 다양한 시각에서 시도하더라도 한계를 갖게 된다. 육체의 멈춤이나 사라짐이 죽음이라면 영혼이 떠난 후에도 한동안 남아있는 육체나 뇌사자, 식물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육체의 소멸 다음은 영생이다. 영혼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죽음이란 게 없는 것인가. 어쩌다보니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을 획득하게 된 뱀파이어, 늑대인간, 드라큘라는 또 고통이나 회의가 없겠는가.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던 카프카의 말 속에 든 삶의 유한성과 그 진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반복되지 않는다. 그로인해 누군가의 삶이 더욱 악착같아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얼만큼 살 것인가'보다 중요해지는 지점에서 인간과 동물을 가를 수 있을 것 같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을 착실하게 거치는 것 또한 인간, 주어진 생에 거의 대부분의 선택권을 갖는 것 또한 인간이다. 어떤 인간도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나라는, 내가 하나라는 증명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내가 육체로서의 나인지, 영혼으로서의 나인지 해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졸지 않고는 이어갈 수 없는 지리한 강의록이다. 


죽음에 대한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죽음은 미스터리가 아니고,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의 본질이 나오고, 이로서 죽음이 곧 나쁘거나 두려운 것으로 인식된다. 이로서 '박탈이론'은 절대성을 갖지만, 에피쿠로스의 입장은 수긍을 이끌며 혼란스런 문제를 제기한다. 죽음은 나쁠 때가 없다는 것. 죽기 전의 인간은 모두 존재하여서 비존재하는 순간이 없는가라는 역질문.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절망으로 살거나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는 이들의 속내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태어나기 전이나 죽고난 이후가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은 전혀 아쉬워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죽음은 나쁜 것으로 매도하고 두려워하는가. 현대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말한다. 1944년에 태어나는 것보다 1954년에 태어나는 것이 내게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더 일찍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나쁜 것인가?"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p.306)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는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아주 환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나이를 먹는 동안 서서히 노화하고 쇠약해져서 정신은 희미하고 몸은 허약하고 정신은 병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위프트는 영생을 끔찍한 형벌로 묘사한다. 몽테뉴 역시 노년의 고통과 비참함에 종지부 찍어주는 죽음을 축복이라고 말했다. 태국음식을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수천, 수백만, 수십억, 수조 년간 매일 먹어야 한다면 그건 고통이다. 노는 것이라고 다를 바 없고, 퀴즈풀이나 영화감상과 독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수십억 년간 매일 같은 것만 해야 한다면 그건 차라리 죽음보다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스 USA 대회의 한 참가자가 남겼다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영원히 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할 테죠. 하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거예요. (p.351)


삶에 있어 행복(쾌락)과 고통의 지수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낙관론자, 비관론자, 중간론자나 쾌락주의자, 도덕주의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로인해 삶의 질을 매길 수 있다. 쾌락의 지수가 높다면 살만하다고 여기는 반면, 고통의 지수가 높으면 자살에 닿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죽하면이라든가 웬만하면이라는 말 속에 담긴 끔찍한 일회성 충고를 나는 거부한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아야 하는 건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자 책임으로 여기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향해 이런저런 말들이 떠도는 세상이 끔찍하다. 자살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논하기에는 우리 모두 삶의 비참함과 고통을 너무도 잘 알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계속 살겠다는 의미이다. 헤어질 걸 알기에 사랑하고, 다 나올 걸 알지만 일단 먹고, 죽을 걸 알기에 더 의미있고 보람차게 살아가는 것. 죽음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을 곁에 두어야 한다. 유한한 시간을 무한히 사용하기 위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의 강의에는 강요와 주장이 없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입장을 모두 대변한다. 철학자와 문학가, 작품과 주장을 적절히 사용하여 가만히 죽음 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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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오랜만이에요.
저는 일주일간 서울에 있다가 다시 제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역시 집이 최고죠... 흑
죽음이라. 죽음을 정말 놀랍도록 갑자기 찾아오는 것인 걸 저는 벌써 알았어요.
그것이 나에게 갑작스레 닥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직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배명훈의 단편을 읽었는데 놀랍더군요...

아이리시스 2013-01-13 02:39   좋아요 0 | URL
이번에는 서울대공원 안갔어요? 아닌가 서울랜드인가. 다른덴가. 저는 서울을 잘 몰라서ㅎㅎ 놀이기구 타러 한여름에 갔잖아요ㅋㅋㅋ 타죽을 것 같을 때도 갔으니 얼어죽을 것 같을 때도 한 번 가야 공평하죠. 으하하. 역시 집이 최고라는 말을 늙은이처럼 하는 애기라니! 귀염둥이. 소이진님 앞에서 죽음얘기 하기 싫어요. 뭐랄까 제가 뭘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죽음이나 헤어짐은 늘 갑작스러워요. 그치만 조금 더 늦게 알고 싶은 것들이죠. 책이 좀 딱딱해서 재미가 없다가 다시 읽고 또 읽으니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리뷰를 써봤어요. 가까운 이의 죽음이래야 제 삶과는 그다지 영향이 없는 분들의 죽음을 겪은 게 다라서 늘 조심스러워요.

배명훈의 단편은 어떤 책일까나. 저는 한국문학 통 모르겠어요.

이진 2013-01-13 03:21   좋아요 0 | URL
롯데월드! 늦은 시간에 안 자고 뭐했어요.
늦은 건지 이른 건지... 하여튼 지금 깨어있는 시간도 어중간하긴 하네요.
차를 오래 타도 피곤한데... 10시에 피곤하다고 책장을 덮었는데 지금까지 컴퓨터하고 있는 건 뭐지?
배명훈은 저도 처음 접해보는데 꽤 재밌네요. 신경숙이 다른 별에서 써 가지고 온 것 같은 참신한 서사라고 평을 내렸는데 그게 딱인 거 같아요. 개그콘서트 같은 느낌이랄까. 정치적인 부분에 막힘 없이 비유적으로 직설적이에요...(무슨 말이지)

나도 요새 좀 질려요.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ㅠㅠ

아이리시스 2013-01-14 00:47   좋아요 0 | URL
아, 무식하다 롯데월드! 사실은 서울대공원이 놀이공원 아닌 것 같아가지고 검색해서 서울랜드 찾아냈는데. 못산다..( '') 비유적으로 직설적인 거 나 알아요, 저 알아요, 똑똑하니까+_+

지난 크리스마스에 저도저도 배명훈 소설 한 권 선물 받았어요. 저는 단편(아, 옴니버스 연작!)에는 관심이 좀 없고 일단 그 책 읽고나서 다시 얘기합시다ㅎㅎ

소이진님은 한강 사랑ㅎㅎㅎ 그거 하면 질린 마음이 제자리를 찾을 거예요! <희랍어 시간> 다시 한 번ㅋㅋㅋ

마녀고양이 2013-01-1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주위 사람의 자살을 최대한 막아야만 하지만,
자살 역시 인간이 가진 고유의 선택 중 하나라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만 합니다. 지난번에
평생 알콜 중독이었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입원을 반복해야했던 분이 자살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의 아버지였지요. 알콜 중독의 경우도 알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워낙 고통스럽기 때문에 감금 비슷하게 격리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치료받는 분들은 매우 끔찍해하지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할 정도로요. 물론, 외국 유명 연예인이 가는 비싼 치료소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결국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우리는 영생의 존재도, 윤회의 가능성도, 영영 사라지는지도 알 수 없는거지요. 다만 알고 있는 것은 아이리님의 말씀대로, 하나의 종결이며, 혼자 맞이해야 하고, 그리고 다들 공평하게 맞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동의 관심사이자, 어떤 면에서는 간단한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음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죽음이 있기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냥 주어진 삶 자체를 봐야겠다고, 이 주어진 삶을 의미있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아이리님........ 쪼옥~

아이리시스 2013-01-14 00:5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자살을 선택권이라고 하면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더군요. 사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알콜 중독의 격리치료가 죽는 게 나을 정도라니 상상하기도 버거워요.

리뷰는 최대한 책내용에서 끌어냈어요. 죽음에 대해 평소 저는 별다른 생각을 거의 못하거든요. 저도 주어진 삶 자체를 의미있게 살고 싶다는 소망 정도가 다랍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니까.

굳나잇굳나잇♡

2013-01-1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4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