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사람도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아빠와 아빠의 삶에 대해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 세상 부모들은 다 가여운 존재니까, 그래서 부모되기를 두려워한 이십대를 보냈지만 그 지독한 환멸은 사실 아이에 대한 나의 모자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진 주변인들의 뻔뻔한 자기과시로부터 올 때가 많았다. 물론, 아빠의 청춘에도 눈물 없이는 못듣는 사연이 제법 되지만, 그걸 글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경험보다는 생각을 담고 싶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희미한 체념의지를 느낀다. '영원한 청년작가'의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번 소설도 그 서정성을 한껏 드러낸다. 소금이 상처에 닿을 때의 쓰라림. 땀흘리며 일하는 늙은 등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땀자국으로 시큼해진 우중충한 색 티셔츠와 쪼글쪼글한 손바닥과 시꺼매진 손톱이 말하는 세월, 까칠까칠 촉감을 나는 아버지라 여긴다. 나쁘게 말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혹은 서정적으로 보려는 작가의 취향 혹은 의도이겠지만, 그래서 그를 현실적이거나 실체적이지 못하고 감성 안에 머무는 작가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끔 읽는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과잉의 애절함을 좋아한다.  

 

스무살 생일파티를 앞두고 디지털카메라를 사오기로 한 그가 언덕배기에서 되돌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할 줄은 몰랐다. 첫사랑, 청춘, 애착, 취미, 호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찾아서 뭘 어쩔 것인가. 왜 찾아야 할까. 찾아나서긴 했지만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통장잔고와 빈자리, 잊혀진 이름 세 글자로 뚜렷하게 남겨진 사람. 제 청춘과 시간을 잔뜩 바치고야 우리를 얻었던 사람. 유일하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사람. 평생 그래야 할 사람. 그래야 했던 사람. 그래서 당연했던 사람. 아무 것도 아니던 사람. 알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세상의 치사함과 더러움을 참아낸 사람. 이름만으로도 심장 한 조각이 뭉텅 잘려나간 듯 그리움이 차오르게 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알아. 그 양반이 당신의 꿈을 버리고 치사해져버렸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배우고 굶지 않았다는 거.

 

알까. 숨바꼭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숨겨버린 그로 인해 세상을 배웠다는 걸. 스무살 어린 딸이 서른의 어엿한 여자로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는 프린터 잉크를 갈아주기 위해 프린터를 들고 동네 문구점으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약국으로, 시골집에서는 갑자기 필요해진 생리대 패드를 사주기 위해 읍내로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다른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고, <인셉션>을 함께 보러간 남포동 극장에서 덥다며 하드를 함께 사먹고, 정작 상영중에는 뭔 영화가 저래, 라면서 계속 졸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가 특별히 살갑거나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아빠들 속에는 다 저런 마음이 있는 거였다.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릴 만들던 순간부터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덜 여문 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을 십 년간 찾아헤매는 이야기, <소금>은 자리를 뺏음으로서 비로소 이 시대, 이 가정, 이 관계의 아버지를 다시 써내려간다. 모든 부모들의 진혼곡. 그리고 소금. 바람과 햇빛의 밀도에 따라 그 맛과 형태를 달리하는 놀라운, 어렵게 얻어 더 소중한 한줌이다. 파도와 햇살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도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흰 가루. 자식처럼 공들여 키워내지 않으면 안되는 예민한 물질. 소금이 만들어지는 자연과 과학의 놀라운 조화와 그가 소금이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금이 음식에 그런 것처럼, 아버지에게 자식이 그렇다. 쓰게도, 달게도, 맵게도, 짜게도 하는 것. 그래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것.

 

우리나라 소금, 천일염은 향과 미네랄이 실종된 중국산과는 한없이 다른 건강염 그 자체라는 것, 그런 국내산 대신 강제적으로 중국산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슬픈 국제관계의 실상도 덤으로 알게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고하니, 이게 아직 협상단계인 FTA의 실상일리는 없고 대체 뭣때문이더라, 책을 좀 오래전에 속성으로 읽어서-_-)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감히 부르지 못하는 선.명.우. 그의 이름이다. 딸 셋에 억척스런 아내. 부잣집 딸이던 아내의 끈질긴 구애에 진짜 사랑하는 세희누나를 포기하고 체념처럼 결혼한 비운의 남자. 생산과 자본이라는 적 앞에 무력해진 아버지가 어째서 염전으로 걸어들어가 장애가족의 가장이 되었는지, 왜 끝내 돌아오지 않는지를 추적한다. 졸업식에 가기 위해 식사를 건너뛰고 소금을 길어올리다 쓰러져 눈감은 어떤 남자의 마지막을 가슴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려면 어떤 재주가 더 필요할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방법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삶 하나도 평온하지 않다. 큰딸 정애에게 장애를 가진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을 떠넘기듯 가버린 아버지는 방관자인 동시에 실패자다. 남자가 실패했으므로 여자 역시 행운을 비켜간다. 그런 시대였다.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 온 공기를 휘감은 뿌연 시대, 마지막 남은 선연한 광기가 비운의 주인공들을 타고 부유한다. 아버지가 가정을 내친데서 시작된 폭력은 한 가정과 개개인의 존엄을 연쇄적으로 망가뜨리며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철저히 유린한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가족이 세상의 위협에 대항하지 못한 채 적을 늘려가다 쓰러진다. 세계는 이 가족들을 일으켜세우지 않는다. 순애는 동네 남자에게 몹쓸 일을 당하고 죽었다. 같은 일을 당했지만 순애는 죽었고 정애는 살았다.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일련의 인과관계가 없다. 묘자와 정애는 여자 힘으로 먹고사는 허망함, 치사함, 생활의 억척스러움을 유일하게 나누는 존재들이다. 무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가난한 자들의 운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끝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이 새마을운동과 겹쳐지며 지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낸다. 목표도 없고 애착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관조도 낙관도 아닌 눈으로 비추는 작가의 문체는 해학적이면서도 뭉클한 상황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이들, 늘 희생자와 가해자가 바뀌지 않는 세상을 물색하는데서 오는 비극이 썩 편하지는 않다. 그조차 명랑과 쾌활로 통과하려는 의지가 눈물겨워졌다. 산다는 것은 반쯤 미치거나 미친 노래를 흥얼거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가난이 거듭 쌓이면 희망과 미래가 잊힌다. 삼켜지지 않는 울분이 구천을 떠돌며 미친 이들의 노래에 섞이거나 빗물을 가장한 눈물에도 섞였다.

 

어디로 가는지, 왜 왔는지 모르는 자들은 마지막 투혼으로 노래한다. 미치지도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노래할 수도 없는 자들은 하루하루 말라가며 시간을 통과한다. 대다수가 성지를 찾아나섰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세상을 통곡하거나 원망했다.

 

 

*

물국수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국수(고구마나 감자 아니고?)가 주식이라면 좋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국수 삶으면 막 맨국수에 김치 올려먹으면 맛있다고 시범 보여주시고 그랬는데, 라면이 그렇듯이 젓가락질 덜 배운 나는 국수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먹을 자신이 없;; 더군다나 후루룩 쩝쩝인데, 없어보여ㅠㅠ 그리고 캠핑, 태국관광 갔다오시고는 늙은이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 사라고 강요당하는 거 말고 인도나 베트남처럼 못사는(응?) 나라가서 직접 느끼고 싶다고 하셨다. 아빠ㅠㅠ 우리는 언어도 안되고, 특히 아빠는 길치잖아요ㅠㅠ 

 

참, 스타렉스 짐칸을 침대로 개조해 밤낚시를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왜 스타렉스냐면 캠핑카는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으니까. (아빠 이제 스타렉스 캠핑카 나왔는데요ㅠㅠ 낚시 몇 번 다니기에는 너무 비싸죠, 붕어를 사드시는 게 낫겠어ㅠㅠ) 그리고 바다보다는 계곡물 흐르는, 우리 외갓집처럼 계곡이 흐르는 산골짜기 방갈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아빠만 따르는 비글 닮았지만 비글은 아닌 짱이를 엄청 예뻐하신다. 아빠 닮아 생라면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귀여운 그 짱이 예전에 내가 만만한지 폴짝 뛰어오르기에 뒤로 넘어가면서 기함할 뻔했던 내가 아빠 안보실 때 몇 대 때려줬다 히히히.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3-05-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 아이리님.... 너무 오랜만이죠? ^^

<남포동>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쫄면을 생각해내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남포동과 쫄면은 정말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물국수도 아니구. ㅋ

아버님이 참 매력적이시네요. 울 아빠는 요즘 상추 농사 짓느라고 정신 없으심... ^^

아이리시스 2013-06-04 16:17   좋아요 0 | URL
남포동에서 쫄면을 드셨어요? 근처에 백화점이 하나 생겼지만 요즘 그쪽으로 상권이 다 죽어버려서 아쉬운 게 많아요. 저도 안간지가 오래됐는데, 부모님은 아직 그쪽을 더 편해하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갈치에서 회 한접시 먹고 그렇게 시내나들이 하는게요.

많이 바쁘셨구나. 보고싶었다는 말도 못하게 엄청엄청 오랜만인 거 알아요? 저희 아빠는 열무를 그렇게 심으세요..하하. 거긴 풍경은 안그런데 희한한 청정지역이라 뱀이 마당에도 출몰해요. 저희집 짱이가 짖길래 나가보니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했어요. 자연체험학습을 마당에서 할 수 있어요. 큭큭.

프레이야 2013-06-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짠한마음으로 읽었네요.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 이 글귀! 내일은 늙으신 아버지가 바람 쐬러 자주 가시는 양산천변으로 김밥 사서 동행할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3-06-04 16: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어릴 때 내원사 통도사 엄청 다닌 부녀 여기 추가요! 정말 많이 갔었는데 오히려 자가용이 없던 아주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앞뒤 배낭 매시고 동생하고 저 하나씩 챙겨서 대중교통 타고 걸어서 그렇게요. 예전에는 거기 취사,텐트가 다 가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은 환경이 워낙에..

벌써 주말 지났으니까 좋은 시간 되신 것 맞죠? ^^

2013-06-03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9 0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9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 다산책방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이 그날을 덮었다. 그럼에도 나는 밤이면

내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던

그 자리를 찾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달빛에 환한 베란다 지붕뿐. 그러나 나는 잊지 않으리

바로 저 달이 그녀의 젖은 눈시울 또한 비추었던 것을.

내 사랑은 떨리는 입술로 이별을 고하고 떠났다.

이 고통! 어째 씻어야 할까.

이 순결한 여인의 가슴에 번뇌를 불러일으키고

그녀를 내게 묶으려 했던 죄를.

 

 

당신은 곧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험에 동참하려면 기꺼이 영혼을 팔아야 한다. 구성과 문체의 특이, 형식과 스토리의 파괴, 서정성과 향토성으로 중무장한 고전의 향기,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지방 지주와의 조우, 마녀와 요정의 활약까지, 파우스트, 돈 후안, 아서 왕으로 대변되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구조에 환상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편지글 형식으로 구운 이 작품에 몰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 시도가 얼마나 새로운 것이었는지는 알 것 같다. 희대의 낭만주의자를 창조한 셀마 라겔뢰프는 라틴문학에서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이 등장하기 전 이미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의 독보적 여류작가가 된다. 자국 최초의 노벨상을 거머쥔, 그것도 노벨상 최초 여성작가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윤리와 구원을 바탕으로 자연과 도덕에 맞서는 인간의 호전적 성향과 베름란드 지역 특유의 색채를 조화시킨다.

 

미남의 노랫소리는 모든 여자를 홀린다. 1820년 스웨덴의 작은 시골마을 베름란드를 배경으로 시간적으로는 근대와 현대, 공간적으로는 도시와 시골의 비교를 통해, 지배와 예속, 소유와 경작, 보편과 특수를 초월하는 '선과 악'을 운명과 저주라는 파격적 형식으로 그린다. 몽환적인 문체에 녹아든 '전설의 원형'에 살을 붙여 만든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데 뇌가 아찔해질 정도의 현기증에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 를 실현한다. 영국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를 합친 한편의 모험담을 듣는 기분이다. 장원의 기사들은 교구의 세력가 에케뷔 소령 부인의 지배 아래 하나같이 술과 도박에 미친 한량의 비권력을 지향한다. 빼어난 외모와 달콤한 말솜씨로 가는 곳마다 여자의 환호를 받는 예스타 베를링 역시 그 중 하나다. 윤리를 소거하고 타락과 방종을 부추기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파스텔톤 입자로 부유한다.

 

 

"이 원고 안에서는 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그 중에는 사랑의 신도 빠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육체적 욕구 외엔 뭐랍니까? 어째서 육체의 다른 욕구보다 사랑이 고상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그렇게 치면 굶주림이나 피로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 또한 사랑만큼 가치 있는 욕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도 끝납니다! 진리만이 살아남을 겁니다!"

 

 

구전과 설화, 민담과 신화를 차용한 개성적 스토리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1820년대)를 사로잡았던 사랑과 모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을 짐작가능케 한다.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문학이 주가 되던 스웨덴 사회를 서서히 뒤흔들게 된 것 역시 낙관과 낭만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인간을 보는 방식이 특출났기 때문인데, 100년 이상 흘러버린 지금 그들이 이 소설에 보낸 환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새로운 문학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위치를 상정해볼 수 있을 듯하다. 1858년에 출생한 셀마 라겔뢰프는 태어나기 전인 1820년대를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을 1891년 발표했는데, 막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로, 1차산업(농장, 광산의 자급자족)이 2차산업(기계화)으로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던 때였다. 베름란드는 작은 시골마을이었으므로 그 변화가 도시보다는 조금 더뎠을테고, 지역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민간설화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흠투성지만 멀리서 보면 각자 사랑스러운 구석을 한두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을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놓고 지역 설화와 접목시킴으로서 유럽에서 제일 잘나가는 전설 속 영웅들을 재탄생시키고 문학사를 재배열하는 효과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사랑을 지상과 하늘이 벌이는 싸움, 천당과 지옥의 힘겨누기로 표현한다. 절대힘을 가진 숲의 곰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남자, 그 기회를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거부당하는 청년에게 넘겨주고 아쉬워하는 남자, 욕망과 허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내가 하면 영웅이 될테지만 불쌍한 저이를 위해 내가 영웅이 될 기회를 과감히 포기하겠어, 라는 거창한 선심. 곰을 잡고도 장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청년을 보며 괜히 기회를 넘겨줬어, 하는 알량함. 그 덧없는 순간의 자만을 도덕으로 착각하는 찌질함. 사랑은 또 어떤가.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상사병을 앓는 고상한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매력과 유혹이 어디까지 통할 것인지 시험하는 차원에서의 그것. 사랑의 부수물인 고통과 번뇌, 영혼의 흔들림을 오래된 수수께끼처럼 소중히 여긴다. '문학의 미적범주'로 따지면, 숭고미와 비장미, 우아미와 골계미가 고루 섞여 일련의 미적범주를 완전히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은 인간의 선한 본성과 과거와 미래를 향한 낙관으로부터 온다. 둘다 지독히도 근거가 없는데, 초자연적 현상의 미스터리를 초현실주의적 서술함으로서 한가지 해석과 이해를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니 파악이 어려울 밖에. 애초 그렇게 쓰여진 소설인데 왜 그렇게 썼냐고 따지는 건 조악한 평가다. 밤에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할머니의 회유와 협박이 사실은 사랑이었던 것처럼, 예스타 베를링의 시간 역시 작가의 독특한 배열 안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지점을 수두룩하게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쓰다보니 이렇게 쓰여진 게 아니라 철저히 의도하고 썼을 거란 짐작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독서로만 따지면 파우스트, 돈 후안, 아서 왕에 대해 읽은 기억이 없는, 유럽신화의 원형에 대해 거의 모르는 내가 말하기에는 여러 모로 해석의 힘이 딸리는 어려운 텍스트였다. 제아무리 노벨문학상인들 책 한 권 읽자고 고이 간직해온 영혼을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야, 너는 사랑을 했지만

더 이상은 사랑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리라.

영혼아, 한때 정열의 폭풍이 너를 뒤흔들었다면

이제는 안심하라, 안식이 찾아왔으니.

영혼아, 너는 더 이상 천상의 기쁨을 향해 날갯짓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안심하라, 안식이 찾아왔으니.

더 이상 고통의 밤 속으로 침잠하지 않아도 된다.

아,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이야, 너는 사랑을 했지만

더 이상은 네 영혼이 불길 속에 타오르지 않으리라.

불타버린 초원처럼

너는 한순간에 불꽃으로 채워졌다.

재와 연기가 만들어낸 숨 막히는 구름에

새들은 놀라 울부짖으며 달아났었다.

돌아오라. 이제 너는 더 이상,

더 이상은 불타지 않으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3-05-30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신화는 기독교 전파 이전의 유럽을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 하죠.특히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신이 많다고 합니다.

라게를뢰프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중편 <늪텃집 처녀>일 것입니다.정말 재밌게 읽은 작품입니다.요즘도 나오려나...워낙 오래전 것을 읽었거든요.

아이리시스 2013-05-30 18:15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정말로 안읽은 책이 없으시군요! 지금 읽고 계신 책이 뭔지도 궁금하고, 안보신 책이 뭔지도 궁금하고, 보니까 동화로도 유명하던데 저는 처음 들어서 역시 저는 멀었구나..싶었어요.

그래서 읽기도 어렵고 두발 담그기도 어렵고 리뷰쓰기는 더 어렵고 그랬군요. 북유럽 신화는 북유럽을 동경하면서도 이질적인 질감 때문에 읽지 않고 있었는데 정말 북유럽 신화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게임이랑도 연관되고, 기독교 전파 이전의 유럽을 알기 위해서도 중요하다면 더더욱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1.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간절한 구원을 바란 적도, 애틋한 감동을 갈망한 적도, 시기와 질투에 시간을 낭비한 적도, 타인의 기회를 뺏은 적도 없다. 하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잘못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시간의 구렁텅이에 한 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했고, 초강속으로 내려친 번개에 맞고도 무엇이 어긋났는지, 왜 그런 건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쟁이 지나갔다. 부모님을, 언니오빠를, 쌍둥이 동생을, 그것도 모자랐는지 기어이 꽃다운 시간 전부를 할퀴더니 인생 전부를 나락으로 처박았다. 시작부터 끝을 굳이 계산해도 고작 삼 년이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총알의 시간이 추억과 미래를 짓밟고 감정을 앗아갔다. 준이 물 대신 진흙을 오물거리다 더 견디지 못하고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 퇴역참전군인 헥터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 그에게 발견된 건 행운이었다. 슬프고 가혹한 운명으로 한걸음 더 들어갈지언정,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줄 기회.

 

 

 

 

 

 

 

 

 

 

 

 

 

 

나는 써야했다. 이 숨막히는 먹먹함을 서툴게나마 표현하는 게 오래도록 애정을 가졌던 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숭고한 빛줄기만으로는 아픔을 용서로 승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감 이상의 연민과 최소한의 예의를 가장하여 늘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박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영광은 견딘 자들에게 바친다. 여기서 꼼짝할 수 없는데 처절한 상황에 맞닥뜨렸고, 불가항력이 자꾸만 나락으로 떠미는데도 혼자 힘으로는 절대 살아나지도, 아니, 남의 손에 아직은 팔딱이는 나의 숨을 맡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인가. 무례한 질문이다. 그저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리겠는가. 당신의 어느 시절에 뜨거운 피와 심장을 넘겨준 적이 있던가. 특수상황은 말그대로 특수하다. 선택이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부모님을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처참하게 잃은 기억이 있는 실비는 그 후로 오랫동안 세상과 연결된 한가닥의 실조차 붙잡지 못한다. 1935년 만주에서의 필름 같은 기억은 눈물 없는 울음과 소거된 아우성, 육체에 대한 혐오로 무력과 허무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서서히 영혼을 갉아댄다. 피폐한 영혼으로 지친 실비를 더한 허무와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민다.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철저한 타락과 방종으로 일관, 쾌락조차 고통으로 다가오던 사랑, 선교사 남편에게 정착해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몇 년. 1950년대, 비탈에 세워진 자그마한 고아원. 

 

전쟁을 혐오하는 아버지를 향한 애증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게 했고,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하필 그때 전쟁이 진행중인 땅으로 온 건 죄책감 때문이지만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어서, 포로로 잡힌 소년을 죽여야 하는 상황과 만나 허리춤 수류탄을 빼앗기고는, 그나마도 살아있는 목숨과 관련없는 전사자처리반에서 일한다. 그조차 적응 못해 부대로부터 퇴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작은 고아원에서 보낸 시간, 쌓아나간 우정도 사랑도 아닌 희미한 의지는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하지만 같은 전쟁의 피해자들, 준과 실비, 헥터는 한곳에서 만난다. 번뇌에 사로잡히기 싫어 몸을 혹사하고, 지키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성향의 헥터와 준은 닮았다. 몇 번이나 유산을 거듭한 실비의 상처는 똑 소리나는 내조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봄으로서 상쇄되는 듯 보인다. 그녀가 가진 또렷한 흉터, 보이지 않는 외상이 극의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헥터가 실비의 과거를, 준이 실비의 관심을 갈구하게 되기 시작한 이후,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는 동시에 타인을 통해 나를 비춰본다. 필연적인 애상 아니면 자상 같은 안타까움으로.

 

중년이 된 준은 과거를 악착같이 붙든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은 기억을 시도때도 없이 회상한다. 마치 삶의 전부인양 복기하며 죽어가고 있다. 참상 중에 가졌던 애정,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순간을 그리워라도 하는 듯, 시간의 타래를 감고 또 감는다. 마약에 고통을 얹고, 헥터가 막 이룬 사랑을 산산조각 내면서까지 실비가 남긴 책, 고아원에서 그녀가 늘 끼고 다니며 읽거나 읽어주곤 했던, 그럴 때면 가녀리면서 총총한 눈빛이 아름다운 슬픔이란 걸 알게 하던, '솔페리노의 회상'과 함께 사라진 아들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솔페리노의 성당, 준과 헥터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슴 가득 들어찬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만주사변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원형으로 사용된 1859년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에서 일어난 참상은 앙리 뒤낭의 회상으로 실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전쟁과 합쳐진다. 상처가 그런 것처럼 회복이라는 말은 언제나 이르다. 지금 평온하다면 전쟁은 끝난 것인가. 끝난 전쟁이 왜 이다지도 누군가의 발목을 그악스럽게 붙드는가. 고아원에 치솟는 불길은 작별, 돌덩이같던 마음과 시간에 대한 복수같은 것이다. 솔페리노의 성당에서 준은 언제까지나 집나간 아들을, 잃어버린 가족을, 떠난 실비를 떠올릴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떠나온 고향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준 구원, 강박, 도덕, 의지, 인간애의 종말이다.

 

 

 

 

 

 

 

 

 

 

 

 

 

 

 

 

#2.

 

인도 바닷가 마을 방갈로에 살던 아할리아와 시타는 쓰나미에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된다. 도시로 가기 위해 차를 얻어탔다가 뭄바이 매음굴에 이른다. 지하, 칠흑같은 어둠과 퀴퀴한 냄새,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폭행과 강간의 현장. 자매는 미성년이어서 비싼 값이 매겨져 지하방에 갇힌다. 손을 타지 않아 특별관리된다.

 

한편, 워싱턴의 잘나가는 변호사 토머스는 휴직권고를 받고 아내 프리야가 사는 뭄바이로 온다. 새로 얻은 인권단체의 일자리는 매음굴의 성노예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은 곳.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 각지에서 행해지는 아동매매, 성노예 문제를 담아내는 소설로, 법의 사각지대에서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할리아는 운좋게 구조되지만, 마약이 담긴 콘돔을 삼킨 시타가 파리로 갔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추적은 언제나 한발 늦고, 악은 번식력 강한 효소처럼 뻗어나간다. 적발 위기, 시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인터넷 채팅 포르노 업체에 팔린다. 꼬리를 무는 악, 어린 소녀의 인생을 순식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 몰가치, 비도덕, 반인류적 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경찰, 무능한 정부, 만연한 무지와 악, 비사법제도는 아이들을 조금도 구해내지 못한다. 잘못을 따지기도 묻기도 불합리하다. 부조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곳에서 시타는 견딘다. 의연함과 끈기, 지칠 줄 모르는 용기를 보여준다. 빈번한 탈출 실패와 옥죄는 감금에도 초연한 기다림이 비로소 빛을 발한 건 시타 같은 행운아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레샴 법칙이 소설을 철저히 관통한다. 악은 쉽게 적발되지 않고, 낙관은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는다. 지하에서든 지상에서든 어른은 아이를 갉아 제 욕망을 채우는 악마의 존재들이다. 이런 순간조차도 아이의 낙관은 위대하다. 태양을 홀로 건너 저 너머를 비추는 빛처럼.

 

#3.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해발고도 2400미터에 세워진 나라의 고원지대 '미싱' 병원에서 1954년 늦은 오후, 죽어가는 엄마의 자궁을 빌어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다. 어떤 나라는 태양이 저만 비추는 것 같다. 3000년의 긴 역사, 독재와 내전으로 얼룩진 현대사, 핍진한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텼던 국민들의 질긴 생명력, 그런 곳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은 차라리 감동이다. 반복되는 폭격으로 폭삭 무너져내린 인프라, 꾸물대는 태동은 그럼에도 이 세상을 지구상 단 하나의 역동하는 아득함으로 비춘다.

 

인도에서 온 의사부부에게 입양되어 길러지는 매리언과 시바, 어떤 가족은 마치 선택된 것처럼 운명으로 엮어진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정치분쟁으로 피폐해진 이곳에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꽃피운다.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으로부터 정복당했다는 공통된 아픔을 가진 가운데 식민과 지배, 문명과 비문명, 탄생과 소멸, 사막과 오아시스 같은 반대적 물질을 모두 끌어안고 덤벼댄다. 사람이 칼을 들고 목숨을 구하겠다는 아이러니에서 탄생한 의학, 외과술은 숭고한 대서사시를 달려나가는 또다른 공통분모다. 발전이라는 환상을 명분으로 생명을 앗아가고,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고, 최소한의 보금자리조차 꾸리지 못하는 이들의 처절함이 여기저기 스며들면, 그제서야 여기와 저곳의 미묘하게 닮아있는 상실과 운명에 굴복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존엄과 열정은 어쩌면 목숨과 생존을 위협받는 극악무도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현되는, 무거운 질량의 것인 모양이다.

 

종교, 인종, 종족, 권력,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분쟁하는 현대인들이 이 광활한 자연을 향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 태동하고 빛이 저무는 일련의 진리 안에 머물기를 악착같이 거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의학의 발전은 죽음의 이유를 늘려주었고, 타당화했고, 존엄을 하락시켰다. 아이와 어른, 환자와 기아, 적군과 아군이 무슨 소용일까. 살아남는 게 사는 것보다 이미 백만배쯤 중요해진 세상에서. 탈선한 열차처럼 전복된 삶의 기구한 운명이 한데 모인들 어떤 역성혁명을 기대할 수 있나. 매리언과 시바가 가족을 만나 의사로 성장해간 것, 자라면서 아픈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와 혁명을 고스란히 겪은 것, 아버지를 찾아나선 것,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작은 땅을 단숨에 성소로 부상하게 한다. 죽음과 파괴의 전조가 가득한 세상에서 희생과 용서, 화해의 의미를 알아간다. 신화와 종교, 믿음과 광기 속에서 공포로 인한 섬멸을 만날 때마다 지나치게 담담하여 되려 두려워지는 이 책을 원망했다. 인정한다. 상당수는 내전의 땅 아디스아바바를 짐작하지 못하고 책으로 배우는 바람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겐 잔인한 곡해였을 거다. 아니면 생동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의 개척을 향한 환영이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식민과 의학의 상관관계, 현대사와 신화가 어우러지는 낯선 땅을 사랑했을지도. 인간은 운명보다 강하다.

 

*

저기 별이 걸어간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다. 별이 반짝인다. 아이가 비로소 뒤돌아본다. 달려오너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아이가 빛의 속도로 달려온다. 나는 엄.마.다. 신이 모든 아이를 지켜보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는 엄.마.다. 너를 지.켜.줄.게.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다. 오래 전 잊었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평화로부터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reamout 2013-05-2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만만치 않은 감정의 무게를 느낄 것 같은 작품들이라서, 읽기가 망설여졌는데..
하나의 포스팅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아이리시스 2013-05-28 02:52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영어힘들어-_-)님은 더한 책들도 후딱 읽으시는것 같은데, 뭘요!
저는 감정이입이 좀 덜한가봐요, 끔찍할수록 잘 읽는다는..^^

댈러웨이 2013-05-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의 지문이 묻어 있는 글이에요. 어디에다 내놔도 알겠어요.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 2013-05-28 02:50   좋아요 0 | URL
줄거리요약을 했으니까, 자족적인 글이에요. '어디에다 내놔도' 창피하지 않도록 노력해서 쓸게요!

2013-05-2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은 늘 굉장히 진지한 독서를 해요. (주제 면에서..) 놀라워요! -전 못 그러거든요.^^

아이리시스 2013-05-28 02:48   좋아요 0 | URL
상대적으로 그렇긴하지만 별로 어려운 소설이 아닌걸요, 섬님. 모두 관심키워드가 있는데 저는 아마도.. ^^

2013-05-2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세계지도 -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트렌드 45
댄 스미스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한눈에 보기에도 동그라미가 가장 큰 프랑스는 세계에서 입국 관광객이 제일 많은 나라다. 미국이 6000만, 스페인이 5200만, 이탈리아가 4300만인데 비해 월등히 높은 7700만이 2010년 이 아름다운 국가에서 입국도장을 찍었다. 공항을 통과하지 않는 기차이동객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면(로마로 입국해 밤기차로 파리에 도착한 경우 미포함) 통계는 더 커질 것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놀랍지도 않지만 의아한 점을 찾자면 바로 이것. '도착' 관광객은 철철 흘러넘치는데 '출발' 관광객은 최소. 유럽에서 가장 적은 수준. 너무 좋아서 국민이 자국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대답으로 엄마가 날린 돌직구는 이랬다. 게을러서 아예 놀러갈 생각을 안하는 게 아니냐. 일리는 있다.

오래 전 드레퓌스 사건이 정치투쟁으로 변화되었듯 근대로부터 시작된 높은 시민성을 가졌다는 상징이 짙다. 여행객이 불어로 묻지 않으면 대답을 안한다는 자국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친절과 예절을 요구하는 게 과연 무리일까. 아름다운 대지를 소유하였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꽃피게 한 영광의 대가로. 문화예술의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세계인구는 다행히도 계속 늘어나지만 지구전체로 볼 때 인구증가율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중국, 일본, 미국, 브라질, 유럽 대다수 나라가 1% 미만인데 반해 동남아시아가 1-2% 사이를 유지하고 있고, 빨강과 진주황 원이 표시하는 2-3% 이상의 인구증가율은 아프리카 대륙이나 중동 일부에서만 보이고 있다. 흑인과 무슬림의 무서운 성장이 예고되는 반면, 남한으로 표시된 우리나라도 1% 미만의 인구성장률로 여성출산율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2010년에 70억인 세계인구는 중간추정치로 잡을 경우 100년 이후에도 거의 증가하지 못하거나 약간 증가한다. 중국 13억 4100만, 인도 12억 2500만, 미국 3억 1000만, 인도네시아 2억 4000만, 브라질 1억 9500만, 파키스탄 1억 7400만, 방글라데시 1억 4900만, 러시아 1억 4300만, 일본 1억 2700만, 멕시코 1억 1300만.

이중에 인구의 연간 변화율이 높은 나라는 미국, 브라질, 일본 또는 중국처럼 소위 경제강국이나 떠오르는 국가가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멕시코처럼 높은 인구에도 불구, 성장이 미미해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은 국가들이다. 구소련 중에서 가장 대국인 러시아의 인구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일과 함께 심지어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중국,인도,미국 정도가 인구강국인줄 알았는데 인도네시아,파키스탄,방글라데시,브라질은 심지어 일본보다 많고 멕시코는 일본보다 약간 적다.



정치체제를 나타내는 2012년 자료. 현재 세계적 추세는 민주정이다. 에메랄드 색깔의 땅, 아메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대륙과 몽골,인도,남한 그리고 섬나라 일본,싱가포르,필리핀,타이완,인도네시아는 안정적인 민주국가 상태다. 이로서 1990년에 51개국이던 민주정이 2012년 88개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전히 민주국가 과도기에 있는 아프리카 대다수, 군주국을 표방하는 이란,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와 혼란상태에 있는 소말리아와 푼틀란드, 일당 통치 국가 북한,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알제리, 수단, 부르키나 파소가 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권력을 다수가 나눠 자유와 평등을 목표삼자는 민주정은 냉전종결 이후 끊임없는 유혈사태와 잔학행위의 대가를 치르며 진행되었다. 아랍의 봄, 민주화의 물결이 부패와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결시키고 정권을 교체하는데 성공한다. 여전히 피비린내 풍기는 내전이 계속되는 무서운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닌 건 감사할 일이지만 전인류적 관점에서 범지구적 문제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체 인구 중 48%의 국민이 민주정이 확립된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통계치에 의하면 절반 이상의 국민이 여전히 독재에 신음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국민을 대표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에게 위협이 되는 인권유린은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적신호를 나타낸다. 캐나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이나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하면 대체로 지구상 대다수 국가에서 난민이나 이민자에 대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대우, 경찰이나 교도관에 의한 학대, 임의적 체포와 구금 이상의 인권유린이 보고된다. 설상가상 멕시코, 브라질, 인도, 파키스탄,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자치구, 수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대륙 일부에서는 사법 절차 없는 처형 이상의 극심한 인권유린이 행해지는 걸로 알려졌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북유럽 다수국에서만 모든 범죄에 대한 사형이 법으로 금지되었고, 10년 이상의 관습에 의해 사실상 폐지된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여전히 일반범죄에 대한 사형제가 존속하고 있다. 특히 좌측 하단의 미국 주지도에 의하더라도 남부와 서부에서 사형제도가 존재한다. 더군다나 노예제도는 국제법상 엄연히 금지된 사항임에도 여성과 소녀들을 통해 성매매와 거부시 무참한 폭력과 협박으로 여전히 자행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이 도표는 무력분쟁 빈도와 추구하는 민주적 가치, 정부의 안정성, 대외 평화도를 측정해 만들었다. 같은 색깔이 동일한 평화도를 보이는 국가들. 세계일주가 꿈이라면 활용해도 될 만큼 눈에 쏙 들어온다. 특이한 점은 2008년-2011년 사이에 15계단 이상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여전히 평화의 둘째단계 '높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계속된 북한의 핵위협 때문이겠지만 북한이 다섯단계 중 매우 낮음에 속하면서도 하락추세인 걸 감안하면 꿋꿋이 우리를 잘 지켜온 셈이다. 평화 수준은 치안과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여행에 써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북유럽, 동서유럽,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 일부를 제외하면 평화 지수는 대다수 나라가 적신호다.

미국, 브라질, 중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처럼 인구수가 많은 나라가 중간수준이라는 점에서 보면 낮거나 매우 낮은 국가는 역시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 일부 남미대륙에 포진한 국가들이니 사실상 알고 있던 교양지식 수준과 큰 차이가 없다. 평화 수준이 높으면 군사비를 절약할 수 있고 국가이미지 고양에 큰 도움이 되며 관광객을 유치하기 편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를 차치하고도 필리핀, 버마, 인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캄보디아, 타이 등 어떤 문화를 가졌을지 궁금한 국가들이 대다수 매우 낮거나 낮은 평화 수준을 보이고 있는 게 아쉽다.



신앙으로 분열된 종교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분포도다. 수치에 의하면 기독교 21억 8000만, 그중에서도 가톨릭교가 10억으로 가장 많고, 다음에 개신교, 그리스정교, 독립교회 순이다. 캐나다,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서유럽과 남아프리카 일부가 가톨릭교를, 미국, 북유럽, 역시 남아프리카 일부가 개신교를 믿는다. 러시아와 동유럽 즉, 구소련 15국 다수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다. 이슬람교는 13억 4000만으로 추정되는 신도를 가지고 있지만 수니파가 11억이라면, 시아파는 1억 9200만으로 소수다. 북아프리카, 중동 다수가 수니파를, 이란과 이라크, 아제르바이잔이 시아파를 믿는다. 물론 각국에서 가장 많은 종교를 기준으로 색을 칠했으니 국민 전체가 한 종교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시아로 와서 인도와 네팔은 힌두교 신자가 많은데 9억 5000만, 2010년경의 통계다. 중국은 소수민족이 여럿 모인 국가답게 토착종교를, 홍콩, 마카오, 타이완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오만, 쿠바는 공식적으로 무교, 남한, 일본, 몽골, 베트남은 대승불교를, 버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는 소승불교를 믿고 있다. 불교 신도는 약 5억 정도다. 여전히 기독교 신자는 이슬람교를 능가하지만 중동과 아프리카의 인구증가율을 떠올리면 이슬람교 신도가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처럼 미국과 아랍국가들의 힘겨루기는 경제적,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종교내 갈등과 종교로 인한 세계 최악의 폭력과 유혈사태는 각 종교가 가지는 평화의 가치에 반하지만, 아무도 이를 묻지 않는다. 더하여 기독교에만 33800개 이상의 교파가 존재한다.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종교가 비물질적이고 비폭력적 가치로 돌아가 종교 특유의 정체성을 지킬 날이 올까.



국제적으로 뛰는 김연아가 빙상연맹에서, 박태환이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박지성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받는 연봉은 우리나라 GNP 수치를 높인다. 지금으로서 나는 못하는 일이다. 앞으로도 못할 듯. GDP는 국적불문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총생산. 네이버지식검색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GDP 순위는 2012년 기준으로 15위, GNP순위는 2011년 기준으로 31위다. 기준연도가 달라 비교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GDP 상위 국가 대다수의 선진국이 GNP 순위를 달리한다. 또 GDP 총량과 개인의 소득량에 차이가 심해 경제불균형이 심한 산업구조를 안고 있다. 명목 GDP와 실질 GDP를 고려하지 않은 수치라면 더더욱 왜곡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

한국처럼 성장과 개발, 무역으로 GDP/GNP 올리기에 목을 맨 결과, 좋은 점도 있다. 2011년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안에 남한 기업이 5개나 들어갔다. 무려 일본 기업 5개를 밀어낸 결과로. 주목할 부분은 중국 기업이 15개나 들어왔는데 미국 기업이 11개 빠지고 유럽 기업도 13개 빠졌다는 점이다.

***
1. 이 모든 수치와 통계는 2010-2012년 자료이며, 이 책은 1970년대에 영국의 펭귄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벌써 아홉번째 개정판을 냈다. 2013년에 보는 통계는 당연히 빨라야 2012년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시간에도 시분초 단위로 세계는 변화한다. 인포그래픽한 시각자료를 활용하여 인류와 지구가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2.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경제학을 공부할 때 이론적 수치는 측정하는 방식이나 이론에 따라 수만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고 배웠다. 수치와 통계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 모든 행동에 타당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 모든 해석은 이 책 안의 지도와 통계, 수치를 보고 읽어냈고, 내용은 무작위로 일곱가지를 뽑았다. 책의 후반에는 지구상 공식 국가들의 수도와 면적, 인구수, 수명, 교육율, 과체중 비율, 국민총소득, 정부 총 부채, 1인당 에너지 사용량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부패인식지수 등이 일목요연하게 첨부되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3-05-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자료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인포그래픽이 대세죠. 생각보다 책 분량이 얕네요. 이런 책 읽으면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의 지식이 되어버리죠. 하루 잠들어도 시대의 흐름이 금방 달라지고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세계를 천천히 느끼기에는 너무 빠릅니다. ^^;;

아이리시스 2013-05-26 21:22   좋아요 0 | URL
헉, 댓글쓰는데 컴터가 제맘대로 꺼지더니 혼자 도로 켜졌어요. 시루스님 글 많이 보는데도 막상 만나면 항상 오랜만인것처럼 느껴져요. 왜 그러지? 네! 페이지도 얇고 시시때때 변하고 있을거라서 염려스럽기도 하고, 이 복잡한 데이터를 한눈에 들어오게 정리했을, 물론 번역과정에 첨삭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책만듦새도 좋아요. 이 복잡한 이야기들이 지도로 쏙 들어온다니, 사실 이런 책인줄 알고 산건 아니지만 우연히 만난것치고는 알게된게 많은 책이에요. ^^;; 너무 빠르죠, 나이막 쑥쑥 계속 먹고..

댈러웨이 2013-05-2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에요, 아이님??? @@@@@@ 이젠 범위를 어디까지 넓히기로 한 거에요??? 영어시험보는 기분. 영어시험 중에 이런 인포그래픽 보고 분석해서 작문하는 게 있어요. 아이님은 그 시험 보면 정말 잘 보겠다. ㅎㅎㅎ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이님 손톱보고 더 반가웠어요. 간만에 나타나서는 쨘~ 깜짝 선물? :)


아이리시스 2013-05-26 21:28   좋아요 0 | URL
간만에 인문트렌드 분석을 한번해볼까 했는데 뜻밖에도 정말 신기한 책을 만났다능;;

영어시험에 그런게 나와요? 저는 영어를 읽을줄 모른다는거. 쟌님 댓글 대답하며 새로이 느낀건데 쓸때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나 잘했네, 이런 거. 어느정도는 확신도 있었고요. 근데 지금 보니까 틀린게 많을수도 있고 해석이 잘못됐을수도 있을것 같아요. 저기 인권문제가 저것만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그정도가 나타난다는 것도 간과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이 책은 엄청난 정보를 그림으로 전달하는 셈이네요. 컬러풀하긴하지만 책값이 비싸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ㅎㅎㅎ 손톱이 보이다니, 저거 나와서 새로 찍으려고 했었어요.으흙흙. 네! 우연한 선물입니다~

댈러웨이 2013-05-26 22:08   좋아요 0 | URL
치이.(급우울모드) 왜 내 답댓글은 이렇게 짧아요? 안와, 이제 안와!

맥거핀님이 사회과부도 말씀하셔서 정말 사회과부도가 생각났는데, 아, 저런거 어떻게 읽어요? 밑에 설명 막 나와있는 거죠? (ㅋ - ㅋ 막 이러기) 혼자 읽어낸 거면 기억엔 많이 남겠어요. 그냥 정보차원으로 풀어쓰여져 있는 거 읽게되면 쉽게 잊어버리기도 할 것 같은데. 어유. 오바마 대통령보다 아이님이 더 멋지다니까요!

2013-05-25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6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3-05-2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이 리뷰를 읽기 전에도 지구는 하나의 생명을 가진 유기체처럼 느껴졌는데 아이리시스님이 소개해 주시는 이 책을 구경해 보니 그런 느낌이 더 강해졌어요. 여행객 통계에서부터 호기심이 느껴졌는데 갖가지 색상과 도표로 나타난 여러가지 지수와 지표를 들여다보니,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정치적이라는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인권유린의 정도를 붉은색으로 나타낸 지도가 조금 궁금한데, 물론 이것은 저의 무지에서 나온 궁금증입니다만, 북미 대륙의 색깔을 들여다 보면 좀 높은 정도의 인권 유린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옳게 본것인지요? 아이리시스님이 사진을 찍어 보여주시는 저 지도를 보면 초록색보다는 붉은색 계열의 비율이 더 높거든요. 그건 이민자에 대한 대우 때문인지, 혹시 다른 부연설명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숫자와 통계는 늘 재미있으면서도 부담스러웠는데 이러한 설명을 접하니 친절한 안내를 받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05-26 20:50   좋아요 0 | URL
쟌님- 저 지도가 위는 [극심한 인권유린]을, 아래는 [합법적 살해-사형제도 존폐 현황]을 나타내거든요. 그러니까 펼친 지구본이 저 사진에는 두 개가 있는 셈이에요. 위 지도에서 빨간 부분은 멕시코와 브라질, 콜롬비아이니, 북미가 사법절차 없이 처형이 행해지는게 맞아요. 보라색이 고문과 임의적 체포와 구금이니, 러시아,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대다수가 되겠고요. 그 아래가 말씀하신 난민, 이민자 대우의 불합법성인데 연두색으로 표시된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이건 좀 의외)가 나타나네요. 호주는 워낙 이민자가 많기도 하겠지만, 색으로 나타난 부분이 순차적으로 이런것까지 행해진다 이런 뜻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보면 이민자에 대한 부당대우야 가장 가벼운 인권유린에 속하는거고요. 이 책 자체가 글이나 설명은 거의 없어서 지도는 제가 읽어냈으니 틀렸을수도 있겠지요.흙흙.

이렇게 본다면 결국 연두색으로 나타난 국가가 가장 인권유린이 최소화된, 잘된나라라고 보는게 맞겠죠. 빨간색 나라들은 법없이도 막 사람죽이고 고문하고 체포하고 구금하고 학대하니, 말할것도 없이 난민이나 이민자도 모욕적으로 대우하겠죠. 이렇게 설명드리면 될까요?

그리고 아래지도는 [사형제도 존폐현황]으로 빨간색 나라들은 존속하고 있다는 거예요. 폐지된 나라가 북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보시다시피 미국 주지도에서 동부이다보니, 이렇게 하면 그나마도 살기 좋은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븍유럽인거겠죠. 참, 위지도에서 노란부분은 기록이 없어 통계를 내지 못하는 거래요! 캐나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북유럽은 신고된 인권유린 기록이 없대요!!! 신고안됐다고 없을까요(고도의 의심). 근데 남한도 노란색이에요(사기인가봐요).히히히

Jeanne_Hebuterne 2013-05-28 15:39   좋아요 0 | URL
아, 아이리시스 님, 통계와 자료는 해석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을텐데 아이리시스 님은 이런 부분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자료를 대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듯 해요! 단순하게 보고 `응? 빨간색이네?'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질문한 제 댓글에 이렇게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남겨주시다니요! 어릴적 지루하게 보았던 이런 지도가 아이리시스 님의 눈을 거치니 재미있게 다가오기까지 해서 놀랐어요. 게다가 고도의 의심, 사기인가보다, 라는 괄호에서의 유머에 한차례 웃고 갑니다.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님!!


덧-그런데 사형제도 존폐 이 자체만 하여도 노란색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물론 중요한 척도입니다만 전부가 될 수는 없는데 종종 전부로 오인받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슬쩍 해보았어요.

아이리시스 2013-05-30 17:59   좋아요 0 | URL
잘썼어야 하는데 전달은 하고싶고 정리능력 딸리고 글은 길어지고 총체적 난국을 헤쳐 쟌님께 다가간 것 같아 기쁩니다. 박수ㅋㅋㅋ 여러 분야에 발담그고 계신 쟌님이라면 저로선 갸우뚱하긴 하지만 이런 거 어릴 땐 다들 참 재미가 없죠. 법이 있어도 전부인양 지켜지지 않는 것 역시 문제지만 지구상에 법절차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나라가 저렇게 많다니 신기하면서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어요. 사형제는 늘 양날의 칼이라 뭐라할 수도 없지만 말씀대로 일잣대로 봐서는 안될 것 같기도 하고요.

맥거핀 2013-05-2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말로 말 그대로 사회과부도군요. 저도 학교다닐 때 사회과부도 들여다보고 있는 거 되게 좋아했는데..다시 리뷰로 돌아왔군요. 사진도 많고 신경쓴 리뷰 좋아요. 진짜 이런 걸 보다보면, 정말 내가 아는 것은 세상의 극소수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3-05-26 20:36   좋아요 0 | URL
제가 이과반이긴 했는데 한국지리같은건 정말 쥐약이었던 게 생각나요. 공부를 잘하는애들은 원래 다 잘해요--; 중학교 사회과부도는 지도볼 때 좋았던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섬, 산, 절, 포구 같은걸 생각날때마다 정리해서 남편(응?) 생기면 주말마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구경다니고 싶어요. 요즘 생각하는데 제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안배웠잖아요. 거기 최소한의 법상식이랑 경제적 용어들, 의족수 같은 거 나오잖아요. 헌법공부하기 전에는 하나도 몰랐는데, 그게 고등학교과정이라는 것도요. 저는 화학2, 물리2를 배우면서 세계사도 못배우고. 학교다닐때 배웠다고 뭐 지금까지 도움이 됐을까 싶긴한데, 그걸 못 배운 게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에 대한 한없는 갈망과 뭔가 모르는 것 같은, 뿌리가 없는 것 같은, 기초를 탄탄히 세우지 못한 느낌이 있어요. 사실 정작 모르는건 과학일텐데 아예 모르는 건 내가 모른다는 것도 인식이 안되니까 그런것 같아요.

통계와 수치로 이런 분석 저 되게 궁금했거든요. 어떤 나라는 공무원이 몇 명인지, 대사관은 몇 개인지, 식당허가는 어떻게 내주는지, 슈퍼는 아무나 할 수 있는지 그런거요. 지구본 아무리 돌려도 알아지는거 아닌데다가 관광으로도 알 수가 없으니까. 여튼 재미난 책이에요. ^^

Shining 2013-05-2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이 책은 뭐예요? 어떻게 하면 이런 책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진짜로 신기해서요.
난 너무 편협하군 하는 절망감과 함께_-

맥거핀님 말씀처럼 사회과부도 같아요ㅋㅋ 사회과부도, 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발음해보네요.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할만큼요. 낚시 리뷰예요, 이 리뷰. 저도 이 책 사야겠어요. 완전 짱_-b

덧) 바쁘다고 미리 얘기해줬으니까 칭얼대지 않으려고 했어요 잘했죠?^_^ 잠시가 됐든 계속이 됐든
아이님 프로필 보니까 반갑네요, 글 읽으니까 더더 좋구요.

Shining 2013-05-26 14:30   좋아요 0 | URL
보니까 전자책으로도 파네요. 전자책으로 읽어도 괜찮을까요? 요새 아이패드 아까워서(하하;;) 몇몇 책을
구매해서 봤는데 책의 종류나 내용에 따라 좋고 나쁘고가 나뉘더라구요(실용적인 책들은 전자책으로 읽으니 쌓아두지 않아서 좋고 찾아보기 쉬워서 편하더라구요) 이 책은 어떨까요? 물론 아이님도 잘 모르시겠지만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쿡쿡.

아이리시스 2013-05-26 20:27   좋아요 0 | URL
안녕, Shining님. 그러니까 환상을 굳이 깨기는 싫은데 잘못산 책이요. 잘못;; 저는 국제관련 인문서인줄 알았거든요. 페이지수를 봤다면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텐데. 일단 사고나니까 이렇게 생겨서 급당황하다가 사실 내용은 넘 좋은 거예요. 이런 통계를 어디서 보겠어요. 혼자 낼 수도 없고 찾지도 못하는데. 그러고보면 특성이 확실한 책이고, 이런 거 한번쯤 보고도 싶었고, 막상 하나하나보니까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고 한눈에 쏙 들어와서, 알죠? 제 귀차니즘에도 불구하고 무려, 사진!(아아악 사진 진짜 귀찮았어--;;) 그래서 대충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이건 사진이 잘 보이지도 않겠지만 없으면 쓰지도 못해요. 그래서 했어. 완전 짱_-b 저도 좋은 것 같아요. 초큼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소설 두 권값이고, 엄청난 컬러풀이고;;

저도 전자책으로 이게 다 나왔네, 하고 괜찮을까 염려는 들었거든요. 넘기면서 한페이지씩 보는게 짜증나지는 않을까, 아이패드가 화면이 커서 선명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책보다 좋을까 우려는 들어요. 실용서나 가벼운 소설 쌓아두지 않아도 되서 전자책이 나을때가 있다는 거 완전 이해되거든요.

결론적으로 저는 전자책 반댈세! 근데 Shining님이 편협하다는거는 동의 못해, 절대 못해!!!

Shining 2013-05-29 11:40   좋아요 0 | URL
호오. 아이님은 실수도 이런 멋진 실수를 하신다니요! 쿡쿡쿡.
그렇구나, 전자책은 비추인거죠? 알겠어요 돈 생기면(흑흑..) 종이책 사봐야겠어요(씨익). 고마워요 :-)

덧) 제가 편협하다는데에 동의해주세요! (...뭐지;;) 근거를 댈까요? 이러기ㅋㅋ

아이리시스 2013-05-30 18:02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기다려봐요, 오늘부터 감사에 들어가서 발을 뺄 수 없는 증거를 찾아보도록 하겠어요. 선물주나요?
선물을 줘야할 거예요! ㅋㅋㅋ
 
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락방과 소공녀 이후, 책에 관한 두 번째 기억.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이 편의점으로 바뀌기 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날마다 새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친구들, 그러니까 친구가 몇 다스는 되는 유별난 인복을 가진 우리 엄마의 어린시절을 평가할 자격있는 이모들에 의하면, 내가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는 건 다 엄마의 피란다. 대체로 소설들, 종종 인문서나 실용서도 보였다. 인터넷 서점이 없던 그때는 학교다녀와서 엄마가 무슨 책 사오는지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5권짜리 연작인데 3권을 엄마가 읽고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기억나는 것중에 은희경, 양귀자, 김진명 그리고 퇴마록 시리즈를 읽을 때 나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누구나 책을 빌려갔고, 책들은 대체로 우리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책은 돈이 아니었고,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히거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세상이었다. 두 번 다시 책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책을 잃는 건 사람을 잃는 것만큼 싫었다. 세번째 기억은, 열여섯 살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서면의 동보서적 2층에서 선뜻 못 고르고 선 내게 솔출판사 토지 1권을 건네주던 엄마다. 구판이 그 두꺼운 열 권짜리였나 그랬는데 대하소설에 일가견있던 나는 순순히 받아들고 돌아왔다. 

 

그후로도 종종 한국소설을 고르기 위해, 피아노 연주집을 들추러, 시집과 일본소설에 미쳐 들어갔다 문예지를 사들고 나오곤 했다. 친구와의 약속, 꿈을 키우던 곳. 나도 그때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직업이 되면 둘도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줄 알았다. 사람은 북적대는데 정작 카운터 앞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나쓰메 소세키의 '소레까라(그후)'에 대한 사연으로 시작하는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 보니까 서점이 없어지면서 추억을 순장하게 되는 사연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책 속의 추억도 책을 읽는 이에게나 생기기 마련이니까. 내게 아무리 좋은 책인들 그 마음이 거기까지 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므로. 학창시절 애달팠던 몇 번의 연애도, 눈물겨운 우정도 곧 아무 것도 아니게 될거란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서점이 화려하고 눈부신 여성복이 진열된 의류매장으로 바뀐 후로, 다시는 그 건물에 들어갈 일이 없게 되었다. 그 아래로 들어가 지하상가 몇 구역을 더 걸으면 알라딘 중고서점이 나온다는 건 안다. 지상에서는 이제 그곳에서 제일 큰 교보문고도.

 

살아온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예삿일은 아니다. 시간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의 삶이란 게 사실상 청룡열차가 아닌 한 뒤집어지지도 않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 속에서 그것도 주인공 한 명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뿐이지, 그러고보면 또 수많은 이야기들중 상당수가 청룡열차가 뒤집어져 삶이 전복될만한 그런 사연을 갖지도 못한다. 그리 대단한 사랑도 없지만 매순간 사랑이 대단하지 않은 적 없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사랑이 불안한 게 아니라 세상과 내가 불안하다. 사랑에 결선을 그을 용기가 없다. 시간의 흔적은 날이 갈수록 물러터져 더이상 출렁일 것도 없는 뱃살 속에나 도장찍는다. 흔적은 사람이 남겨놓은 것에 의해 기억된다. 작가가 없는 세상에 등장한 처음 만나는 소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글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여 멀리가는가. <그 형제의 연인들>은 서른 여섯의 박경리가 쓴 연애소설로, 1962년 10월 2일부터 1963년 5월 31일까지 대구일보에 연재되었다. 오랜시간 존재가 잊혀졌다가 대구 도서관에 보관된 신문철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옛날 소설은 지루할 것 같은 근거없는 편견을 딛고 보란듯이 문체, 인물, 배경, 구어체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향수어린 시절로 돌려놓는다. 어릴 때 딱 한 번 가본 밀양 촌구석 어느 다방이 생각났다. 전혀 상관없는 소설은 급작스럽게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명절날 오후 차례지낸 후 외갓집으로 이동하던 중, 다툰 부모님이 울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들어간 곳에서 어린 나와 동생에게 사이다를 부어주고는 계속 다투던 캄캄하고 암담한 두려움. 어떤 소설의 이미지는 전혀 낯설게 생성된다.

 

개개인의 주관적 행복보다는 상자 속에 구겨넣어진듯 찌그러진 사랑에 대한 관습과 타성에 젖은 사회를 비판하고, 삶의 행로 즉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루어지느냐마느냐, 허락받느냐마느냐, 결혼하느냐마느냐 하는 티브이 속 흔한 사랑의 통속극이 아니다. 친한 친구의 누나이자 결혼에 실패한 혜원을 사랑하는 주성과 사랑하지 않는 현숙과 결혼해 자포자기한 삶을 살던 인성. 두 형제의 사랑은 온도나 질량의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허황된 사랑의 허무와 욕망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번민과 고뇌에 내비치는 내적갈등이나 심리요인을 되짚으며 인성과 주성 형제는 물론, 형제의 사랑을 받는 혜원과 규희, 그밖의 혜준이나 다른 인물들 감정을 짐작해나가는 재미가 있고, 시대에 걸맞는 독특한 구어체가 읽으면 읽을수록 멋스럽게 달라붙는다. 먼지묻은 옛날 영화 필름을 꺼내 털어보는 기분에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훔친다. 짜릿하고 비밀스럽다. 짧은 시간 꽤 많은 페이지를 읽어내렸다.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욕망과 질투다. 억척스런 현숙이 부리는 애욕과 기성의 권리가 주축이 된 질투, 생활력 강한 조강지처를 대하는 인성의 야비한 모욕, 행복없는 부부의 서로간 트집잡기, 측은하면서도 정이 붙지 않는 관계를 선뜻 끝내지 못하는 한톨의 책임감과 두려움이 생생히 전해진다. 낮에는 유치원 선생님, 밤에는 요부를 원하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같은 욕구를 지켜주기 위해 많은 밤 얼마나 많은 조강지처들이 서러운 울음을 삼켜야 했는가.

 

뒤마의 '춘희'에 나오는 아버지의 역할을 답습한 전통적 아버지상,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는 사랑의 사회상이 복합적으로 등장인물을 힘들게 한다. 애정과 세속적 타협 사이의 방황, 육욕과 소유욕을 능가하는 플라토닉적 사랑이란 물흐르듯 흘러 자연스레 서로의 그 어딘가에 닿는 일임을 그들은 모르지 않는다.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니라 해가 지는 것이다. 함께있지 않는데 매순간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신의 세계 그리고 당신의 세계. 무너뜨릴 수 없는 각자의 견고함이 사랑의 강을 만든다면 범할 수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설득되고 회유당한다. 혼자 황야에 서있듯 몸서리치게 젖는 열등감, 열렬한 포옹과 뜨거운 키스 뒤에도 멍한 눈으로 응시해야 하는 서로가, 다시 만날 날을 재촉하며 헤어진다. 별빛에 전신이 젖는다. 잊고 싶은 것을 가장 잊고 싶어 술을 마신다. 되돌아온다. 지금이 지나면 지금이 다시 오지 않으므로 결론은 하나다. 찾으러 가거나 잊거나. 마침내 사랑이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연인들은 연인들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근데 왜, 맨날 같이 있는 엄마가 더 보고싶지?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ne_Hebuterne 2013-04-30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이 리뷰를 읽으며 많은 이름을 떠올렸어요.

후겐두벨, 동보서적, 크시옹스카, 리더스 북스토어, 아직도 있는 영광도서와 이제 생긴 중고 서점 같은 이름들이오.

누구와 누구가 함께 섹스하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는 루이스 브뉴엘의 말도. 소설은 그것이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작가는 세련된 거짓말을 영리하게 꾸며내는 사람들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작가 자신일까? 라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 또한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허구와 진실 사이를, 인물과 플롯 틈새를, 작품과 나 사이의 간격을 독자가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야기는 진정성을 얻는다는 뜻일테니까요.

아이리시스 2013-05-01 00:44   좋아요 0 | URL
맞다, 여기도 영풍문고 매장이 없어졌죠. 동보서적이 없어지기 전에요. 사실 거기는 정말 아지트같은 곳이었는데. 시대적 특수성을 획득하지만 플롯 자체는 그리 독보적이거나 특별할게 없어져버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잊혀질뻔했다가 다시 만나게되었다는데에 초점을 두고 봐도 좋아요. 자기 자신일까? 라는 질문은 잊었었는데 서른 여섯이었다니, 관찰과 경험이 적절하게 맞물려 나온 소설이기도 하겠어요.

그런데 쟌님 댓글을 제 서재에서 보다니! 하면서 감격중입니다.. 으흙흙.

blanca 2013-04-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어요?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05-01 00:45   좋아요 0 | URL
활자중독 블랑카님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예전에 김약국의 딸들 읽으셨던 것 같은데, 맞죠? :) 가물가물.
(한줄에는 한줄 댓글로!!)

cyrus 2013-04-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박경리 소설 생소하네요. 뭐 한국소설을 잘 안 읽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01 00:46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인문책을 더 많이 읽으시는 것 같은데요. 한국소설은 꽂히는 시기가 따로있는것 같아요.
(한줄에는 한줄 댓글로2!!)

2013-05-0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5-0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로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다른 작품도 상당히 유명한 것 같아요. 저는 아직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까지만 봤네요.ㅎ 아끼던 서점들이 사라지는 것은 너무 마음 아프죠. 책 자체가 읽어야 하는 것, 수능용이 아니던 시절에는 문화의 하나였잖아요. 퇴근길에, 하교길에 들려서 책 구경을 하고, 맘에 드는 몇 권을 사면, 정성스럽게 포장까지 해주던 때가 생각나요. 그땐 서점을 운영하시면서 출판사로 확장하시고, 건물도 올리고 그랬던 분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대형서점 조차도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네요.

아이리시스 2013-05-22 15:44   좋아요 0 | URL
근데 트란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읽은 것만도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그걸 다 읽은 기억도 없는데요; 그때도 그랬다면 지금은 다이렉트로 끝까지 볼 가망이 희박해요. 출판사만 그렇겠어요. 이젠 뭘해도 자수성가는 소수의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 시대는, 뭘 하든, 벌기 보다는 현상유지가, 현상유지보다는 까먹기가 더 쉬운 것 같아요--;

잘 지내셨죠? 답글이 너무 늦었지만 답글은 아무리 늦어도 꼭 달 겁니다..(푸핫)

2013-05-1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2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2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