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A

_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다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긋는다는 것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정이 있다 긍정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하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변희수,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시인동네, 2020)

 

 

한 서재지인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사람의 이야기. 몇 번이나 그 서재를 서성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담담히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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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로 시집을 영 덜 읽는다. 읽어도 건성건성 읽게 된다. 시가 짧아서 바쁠 때 읽기 좋다지만 시집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라야 시에 집중이 된다. 산문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읽을 수 있는데 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그 탓인지 산문을 좀 더 읽게 되었다. 2학기에는 전일 등교를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한 번에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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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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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한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못 한다거나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안 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짧은 소설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긴 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친 탓일까.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그가, 떠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감옥에 가는 그가, 식사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죽어 버린 그가,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약간 미친 것"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 P25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고?"
"안 하는 편을 택한다고요" - P41

"어째서죠? 별나군요. 그렇죠?"
내가 서글피 말했다.
"약간 미친 것 같소."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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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7-30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틀비, 책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흥미롭게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도 어떤 면에선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누아 2020-07-30 23:03   좋아요 1 | URL
짧아서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바틀비가 안돼 보이지 않고 용기 있게 보이는 게 변명이나 핑계 없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걸 밝히고 안 하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또 우리가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바틀비가 자유롭게 보이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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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가게 사장님이 어떤 책이 재미있냐고 하시기에 이 책을 얘기했다. 앞 쪽에 4페이지나 이 책에 대한 각계의 찬사가 적혀 있어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다 읽고나니 그런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에 비유하자면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배경까지 다 채색된 아름다운 책이다. 꽉 찬 느낌이다. 자연이 배경이 된다는 게 이런 힘이 있나 보다. 관계는 하나의 세계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의 세계를 연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소녀, 카야가 있다.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녀의 습지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남매는 조용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아무 기억도 하지 않으려 하면서. - P299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 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 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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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30 0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 풍경 묘사가 아름다운 책이죠 ㅎㅎ카야라는 소녀도 정말 특이한 캐릭터였어요. 모글리 미국 버전 같은...그나마 주변에 착한 사람’도’ 있어서 더 나은 쪽으로 살아남는...

이누아 2020-07-30 15:42   좋아요 1 | URL
주변의 착한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고, 카야 자신 때문이기도 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라진 관계도 여전히 살아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는 사라졌지만 습지를 탐험하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 아궁이를 남겨 두고, 엄마처럼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결단을 내리기도 하잖아요. 인간은 어쨌든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사라진 관계와도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카야를 돕는 사람들이 어둠 속 반딧불이 같았어요.

반유행열반인이 무슨 뜻인지 볼 때마다 궁금했는데... 유행은 떠도는 것? 열반인은 불교적 의미? 혼자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반유행열반인 2020-07-30 17:09   좋아요 1 | URL
카야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뭔가 쿵 하고 가요. 나새끼가 잘해야 해...하는 ㅋㅋㅋ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도 새겨듣고 갑니다.
반딧불이 나오는 장면 이누아님 말씀 듣고 나니 막 하나둘 불켜지는 느낌처럼 살아나네요.
제 닉네임은...고등학교 때 퀴즈푸는 게임 아이디 그냥 가져다 붙인 게 어쩌다 살아 남았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한 어떤 브랜드 광고에서 nirvana against the fads- 하는 문구를 보고 오오! 두둥! 하고 제 마음대로 한자?한글 번역해서 지은...중2병 돋는 이름입니다...귀찮아서 안 바꾸고 있어요...너바나니까 확실히 불교적인 거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답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이누아 2020-07-30 23:00   좋아요 1 | URL
답이 되었습니다. 제 예상과 살짝 빗나갔네요. 멋진 닉네임이에요. 독특하기도 하고요.

반유행열반인 2020-07-31 06:43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누아님!
 

누군가의 색깔을 정말로 결정하려고 해 보라. 한 사람의 백인은 하얀색인가? 확실히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광대의 하얀색뿐인데, 머리에 분칠을 한 이 광대는 크고 빨간 코를 주요 속성으로 하는 동료 오귀스트에 비해 약간 어리석은 양식을 재현한다. 실제로 무한히 많은 등급을 거쳐 지나가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가상의 흑인보다 창백한 누군가를 '백인'이라고 부른다. 이때 몇몇 스웨덴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사람들 몇몇을 거쳐서 모리타니 사람들을 살펴 보자. 다른 한편으로 어떤 타밀 사람은 분명 여러 '검은' 아프리카인보다 피부색이 짙지만, 이들을 흑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많은 아프리카인의 피부색이 짙은 편이지만 검다고 말할 수 없고, 많은 유럽인이 백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저 노란색이라고만 간주되는 아시아인들(그런데 누구의 피부가 노란색인가? 간염 환자?)은 대체로 많은 수의 남유럽 사람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보이며, 검은 물감이나 석탄 조각과 비교할 경우 가장 피부색이 짙은 사람도 곧바로 검은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략-

인간 동물의 가장 객관적인 표시는 어떠한 색깔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동물이 검은색일 수 없고, 정말로 검은색일 수 없는 만큼이나 흰색일 수도 없으며, 하물며 노란색이나 붉은색일 수 없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 [검은색](민음사, 2020), pp.124-125.

 

 

주로 주체와 타자의 논리에서 이분법이 대등한 A와 B의 관계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나머지 세상만 묘사한다. 나는 백인 문화가 다른 인종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은 색깔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유색 인종(color of people)'이라 부르는 것을 비판한다. 한편 구한말 조선 사람들도 갑자기 나타난 서양인을 보고 자신의 몸과 다른 점을 기준 삼아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렀다. 검은 눈동자도 분명히 색깔이므로 이 단어는 인종 차별적이다. '유색 인종'과 '색목인'의 사회적, 언어적 지위는 같지 않지만 구성 원리는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지위는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가 정해지면, 자신과 외부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인식의 절차이자 과정이다.

 

 -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pp.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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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1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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