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단축 수업이긴 하지만 매일 등교하는 게 나에는 여유를, 아이들에게는 규칙적인 생활을 가져왔다. 요즘은 낮에 걷는다. 밤에는 반려견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더 쓰지 않아도 되는 여백을 걷게 된다. 낮에는 저녁 준비나 아이들과의 약속이 있어 시계를 봐야 하지만 해가 있다. 해가 내 어딘가를 살균해 주는 느낌이 있다. 어제 보니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자 그 바퀴에 휩쓸려 뒹구는 잎들. 어쩐지 쓸쓸해진다

 

오랜만에 시를 읽다 웃었다배수연의 '청혼'. ' 너의 외투 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그 새의 둥지를 부수지 않고/너를 꼭 안아 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이들 마음의 둥지를 부수지 않고 안아 주고 있는 걸까. 떨어진 잎이 아니라 이제 막 피는 싹 같은 청혼이라 흐뭇해지는 걸까.

 

창밖의 나무들이 움직임 없이 서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흔들림이 나무껍질을 뚫고, 잎을 떨어뜨리고, 쉼 없이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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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에 9월 이야기다. 겨울 방학이 안 끝난 느낌이다. 아이들이 격일로 학교를 가기는 하지만 일찍 온다.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인데 그때 집안일을 하게 된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이래저래 여유가 없다. 책은 읽는다기보다 그냥 본다. 북플로 서재지인들의 글을 틈틈이 읽었는데 북플이 자주 앱에 문제가 있다면서 닫힌다. 지우고 다시 깔아야 할까?

 

9월에 읽은 책을 떠올려 보니 제일 먼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9)가 떠오른다. 조용히 앉아 숙고해 보진 않았지만 몇 년 전부터 기억이란 주제가 늘 맴돌고 있는 느낌이다. 서재지인인 피은경 님의 <톡톡칼럼>(해드림, 2020)을 읽으면서 이 책처럼 정식으로 출판을 하지 않더라도 서재에서 쓴 글 중에 싸이월드처럼 날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글을 엮어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접속할 마음의 여유도 없지만. 시는 틈틈이 읽으니 틈이 생긴다. 시집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야 뭔가 느낌이 오는데 토막토막 한 두 편을 보니 흡수가 안 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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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들이 개학한 후로 거의 책을 못 읽었다. 컴퓨터도 오랜만이다. 개학하면 시간이 날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 가서 방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도 않는데 더 바쁜 느낌이다. 왤까?

 

8월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막스 피가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 2010)였다. 말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된 느낌이랄까? 책을 빌려 읽는 중에 주문했다. 그랬으면 다시 읽어야 하는데 리뷰도 못 썼다. 8월에는 몇 권 안 읽었지만 읽은 책이 거의 다 마음에 든다.

 

비 온다. 갑자기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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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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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p.139)

 

이 책의 제목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다. 자기 자신의 순례. 서양미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작자는 이 순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본다, 보여준다. 고흐를 통해 '생활'을 생각하고, 피카소의 게로니카에서 5월 광주를.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에서 감옥에 있는 형들을 떠올리며,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을 통해 자신의 누이를 본다. 낯선 호텔방에서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고... 오랫동안 이 책이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집을 만나는 것, 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를 자기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순례가 아닐까.

 

작자의 뒤에서 함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작자를 통해 그림을 만나고 그림을 통해 작자를 만난다. 고야의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작자는 개가 고야 자신이라는 걸 알지만 이 그림을 볼 당시에는 자신이 그 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을, 혹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덩어리를 대신 나타내 주는 작품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p.109)

 

 

돌아보지 마라, 하고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돌아보면 훌쩍 사라져 버릴는지 모른다. 그건 서운한 일이다.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같이 여겨졌다. 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시다가 반년 전에 돌아가셨다.
창 밖에는 검고 그로테스크한 탑, 달에는 커다란 달무리.
이런 데까지 오셨습니까, 보세요. 여기는 스트라스부르예요...... 등뒤의 아버지에게 말하듯 중얼거려본다.
대답은 없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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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8-10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올려주신 조각도, 그림도, 뭉클합니다.
나 자신이 순례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순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군요.

이누아 2020-08-10 22:54   좋아요 0 | URL
예. 글도 그림도 뭉클해요. 읽고 나서 오래 여운이 남아요.

바람돌이 2020-08-10 2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다른 분의 리뷰로 만나니 반갑네요. 덕분에 이 책을 다시 보고싶어지는 밤입니다.

이누아 2020-08-10 22:56   좋아요 1 | URL
다 읽고나서도 자꾸 뒤적거리게 됩니다. 아마 우리 다 다시 읽게 될 거예요.^^

하나 2020-11-04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이누아님 덕분에 다시 보게 되네요. 이런 밤에 다시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

이누아 2020-11-04 21:44   좋아요 1 | URL
하나님 서재에서 글 읽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반유행열반인님 서재에서 뵀는데 서재에는 오늘 처음 가 봤어요. 진작 가볼 걸 그랬어요.^^ 반갑습니다.

하나 2020-11-04 20:5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운 책을 여러 권 이누아님 서재에서 다시 만나서 신나고 있었어요 :) 저녁 운동 다녀와서 또 놀러 올게요! 시집 리뷰들 너무 아름답네요. 저도 덕분에 이 계절에 시집 몇 권 새로 들여야겠어요. 반갑습니다. ^^

이누아 2020-11-04 21:02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님 서재에서 제가 읽은 책을 아직 못 만났어요. 독서량이 많지 않거든요. 모르는 책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따라 읽게 되기도 하고. 님의 서재에 들어가니 틈틈이 읽을 글이 많아져 신나요.

하나 2020-11-04 23:20   좋아요 1 | URL
제 서재에서 이누아님께서 같은 책을 못 찾으신 이유는, 제가 그 책들을 읽었던 시간을 묻어둬서 그런 것인데요. 음, 서경식은 옛날에 친했던 친구 y가 알려준 작가인데, 그때는 제가 되게 슬퍼하던 때여가지고 막 그 사람의 슬픔에 제 슬픔을 포개가지고 울면서 보던, ˝당신도 언젠가 (그 미술관에 그 그림을 보러) 가게 될 거야.˝ 라는 말을 어딘가에 옮겨 적던 게 기억났고요. 독서량이 많지 않으시다는 건 지나친 겸손이신 듯합니다. 저야말로 오늘 덕분에 잊고 있던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 여기서 이렇게 읽고 계셔 주셔서 감사드려요.
 

목소리A

_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다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긋는다는 것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정이 있다 긍정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하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변희수,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시인동네, 2020)

 

 

한 서재지인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사람의 이야기. 몇 번이나 그 서재를 서성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담담히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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