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었다는 증거

 

 

저는 청소를 하고, 요리를 돕고, 불을 피워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거나, 더러워지거나, 불에 타서 없어져요. 하루가 끝날 때면 제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안 남아요.” 리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치마 끝단에 놓인 자수를 어루만졌다. 자수는 내가 관목 가시에 걸려 치마를 찢어먹었을 때 리지가 꿰매준 부분을 가려주었다.

제가 놓은 자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예요.” 리지가 말했다.

이걸 보면 왠지...... 글쎄, 단어를 모르겠네요. 제가 언제나 여기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필 윌리엄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엘리, 2021), pp.60-61.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쓸쓸해져.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철학자가 그랬어. 나는 나를 볼 수 없다고,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거울 속 나는 가짜라고, 가짜인 나밖에 볼 수 없다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나의 탄생을 내가 알 수 없다는 생각. 나는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어. 그 말을 들으면 무언가 안쓰러워. 무엇을 증명하려고 미치려고 애쓸까. 미친 사람들은 그냥 미쳐서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만 미치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고 미친 척하는 건 우스꽝스럽지 않니? 미치는 건 그냥 미치는 거지. 미쳐야 된다니. ‘미쳐야보다 미친다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도달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걸 좀 봐 줬으면 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조금 다른 빛깔로, 조금 다른 강도로 대부분 다 가지고 있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리지와 같은 마음이라고,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안됐어. 우리 모두 그대로 있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걸까. 나는 여기 있었다는 증거로 지금 네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더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까.

 

불쑥 너에게 말을 걸어. 봄이니까. 봄에게 말을 걸 듯이.

 

 

 

평범한 하루

_변영현

 

 

느슨한 공간을 돌고 도는 시계 소리

수북하던 설거지는 말갛게 씻어두고

빨래는 햇볕을 찾아 탈탈 털어 넌다

 

단정한 일상을 지탱하는 수고로움

헛바퀴 같아도 쉼 없는 물레방아

오늘도 거친 시간을 곱게 빻고 있다

 

기대도 후회도 없는 밤을 뒤척이며

제자리 걸음에도 내 몫을 살고 있다고

묵묵히 가는 하루를 다독여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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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친정 엄마처럼 의지하는 분이다. 외사촌 오빠는 나와 친정 오빠가 자취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마땅히 가야할 장례였지만 외사촌 오빠는 코로나로 아무도 못 오게 했다. 어쨌든 울적했다. 큰외숙모가 어떻게 사셨는지 엄마에게 여러 번 들어 마음이 안됐기도 했지만 혼자 사는 엄마가 큰외숙모를 생각하며 울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쓰였다. 결국 남을 염려하는 것은 짧고 나를 염려하는 것은 길다. 나는 돌아가신 분보다 엄마를 더 염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평안은 나와 밀접하다.

 

시골집 보일러 배관이 터졌다. 배관 공사도 하고, 보일러도 바꾸었다. 살다 보면 예정에 없는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천재지변, 사업 실패나 암 같은 큰병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사를 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갑자기 다치거나 하는 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사람만 그렇겠는가. 살아 있는 것들이 저마다 이런 번거로움을 겪는다는 생각을 하면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내고,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

 

문성해 시인의 시는 편안하게 읽히면서 시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대부분 새로운 것을 원하고, 새로운 것을 쓰려고 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 놀람을 주기도 하지만 피로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그에 비해 시인의 시는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 편안함 안에서 잔잔한 파문이 인다. 가만히 들여다 보게 된다. 시인의 다른 시집도 주문해 두었다. 

 

책이 어렵다기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혼돈스런 책이 좀 있었다. 그중 막스 피가르트의 책이 있다. [침묵의 세계]가 무척 좋았는데 [인간과 말]을 읽다 보니 침묵의 세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말의 선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첫 장에 있다. 말이 있기 전에 말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오르게 한다. 아이디어가 있고,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느낌은 그가 말하는 말의 세계에 이끌리지만 생각은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다음 주엔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단축 수업이긴 하지만 점심을 먹고 오니 내가 좀 편할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단축 수업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몰라도 시간은 간다. 벌써 3월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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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성해

산책하는 사람에게-안태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김희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땀 흘리는 시-김선산, 김성규, 오연경, 최지혜 엮음

로르카 시 선집-로르카

천 개의 아침-메리 올리버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정훈교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데이비드 실베스터

플러쉬-버지니아 울프

인상과 풍경-로르카

광기의 역사-미셸 푸코

헤테로피아-미셸 푸코

인간과 말-막스 피카르트

아직도 시를 배우지 못하였느냐-김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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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28 1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때문에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어머님도 너무 상심하지 않으시기를....

이누아 2021-02-28 20:43   좋아요 2 | URL
예. 그렇네요. 함께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축하 받을 일이 있어 마음과 몸이 분주했다. 새해가 되면 서재에도 자주 오고, 글도 좀 쓰려고 했는데 서재 지인들 글 읽는 것조차 제대로 못했다. 못해도 괜찮다, 소리내어 말해본다. 작년이나 올해나 하루는 하루다. 하루가 지는 저녁이다.

 

몇 년 전 모임에서 이규리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곧 터질 것 같은 슬픔, 슬픔을 에워싸고 있는 침묵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나는 좀 버거웠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지금은 버거운 느낌은 바래고 햇살만 남아 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시인의 목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시집이다.

 

[뿔바지]는 읽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준규 시인의 [삼척]에 '뿔바지'에 관한 글이 있다. 이게 뭔가 싶어 검색했더니 품절. 중고책을 샀다. 후반부를 읽다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글인 것 같은 느낌. 판권에도 지은이가 자끄 드뉘망으로 나와 있지만 번역자와 해설자를 보고 확신했다. 장난쳤구나. 자기들끼리 재미있었겠다. 나는 재미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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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이은규

우울은 허밍-천수호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삼척-이준규

아무는 밤-김안

뿔바지-자끄 드뉘망

 

밝은 방-롤랑 바르트

뭉크-유성혜

저항하는 지성, 고야-박홍규

독서의 궁극: 서평 잘 쓰는 법-조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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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31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이누아님 돌아오신것 반갑워서 별가루 *˝˝*.*˝˝*.*˝˝*.뿌리고 잘모르지만ㅋㅋ 추카 추카 *˝˝*.*˝˝*.*˝˝*.합니다 ㅋㅋ 뭉크저책 많이 우울해져여 ㅜ.ㅜ 이누아님 1월에 마지막날 따숩고 평안하게 보내세요.^.^

이누아 2021-01-31 22:38   좋아요 2 | URL
별가루까지 맞으니 서재에 올 기분 납니다.^^ 축하할 일이 뭔지 묻지 않고 축하해 주는 이런 배려가 좋아요.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1-01-31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뿔바지 같은 책도 있군요. 음 이런 책이 뭔가 정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시도이거나, 아니면 최고의 성취를 보여주거나 하는게 아니라면 모르고 읽는 사람은 정말 기분 나쁠 듯합니다.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일이겠거니 하고 살짝 축하인사를 건넵니다. ^^

이누아 2021-01-31 22:49   좋아요 0 | URL
뭔가 의미가 있는데 제가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약간 낚인 느낌이에요. 이준규 시인 시집에 몇 번 나오거든요. 이준규 시인이 해설을 썼더군요. 김태용 소설가가 진짜 지은이고. 모두 책 속에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고요.

살짝 건넨 축하인사, 건네 받아요. 고맙습니다.
 

이달에 읽은 책에 대해 몇 마디 하려고 앉았는데 입이 안 열린다. 쓰면 되니까 입 따위는 필요 없는데 입이 안 열려서 머리가 안 열리는 건지, 머리가 안 열려서 입이 안 열리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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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옹 파율, 돌의 부드러움

레옹 크노, 문체 연습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필립 로스, 전락

주노 디아스, 드라운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김경미, 카프카식 이별

김생,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

이승은,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박기섭, 오동꽃을 보며

-다시-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송현섭, 착한 마녀의 일기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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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30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옹 크노의 책은 74쪽 까지 읽다가
결국 못 다 읽고 오늘 반납했네요...

리스펙토르 작가의 책은 두 권이나
샀는데 언제 읽을 지 미정이고요.

주노 디아스의 <드라운>은 정말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마리옹 파욜 작가는 처음 들어 보네요.
내일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볼까봐요.

이누아 2020-12-30 18:06   좋아요 2 | URL
문체 연습은 앞부분이 좋았어요. 뒷부분도 다른 문체를 보여 주지만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의역(?)이 있어서...74쪽까지면 거의 다 읽으신 것 같은데요.^^

돌의 부드러움은 그림책이에요. 독특하고 묘해요. 아빠는 암으로 죽어가고 가족들은 그를 돌보는 이야기다, 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책이에요. 그걸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저는 맘에 들었어요.

scott 2020-12-31 12:07   좋아요 0 | URL
매냐님이 중도 포기 하셨다고 하시니 ,,,
문체 연습,,,
망설여지네요

하나 2020-12-30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멋있는 이웃분들이 계속 언급하시니 피할 수 없을 거 같네요. 이누아님이 읽으시자마자 문체랑 사유가 막 변신하시는 거 보고는 더 궁금해진 1인입니당. 올해 덕분에 서양미술순례와 오래 전에 사랑했던 시집들에 대한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누아 2020-12-31 21:29   좋아요 1 | URL
올해 그 멋있는 이웃 덕분에 저도 안 읽던 소설 몇 편 읽었어요.^^

내일이 새해군요! 내년에도 맛있는 책 시식하러 님의 서재에 어슬렁거릴게요. 책으로 즐겁고 글로 흥하는 새해 맞으시길!

scott 2020-12-31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2021년 복주머니 요기 놓고 가여 ㅋㅋ

해피뉴이어 !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이누아 2020-12-31 21:32   좋아요 1 | URL
신통한 재주를 가지셨네요. 알라딘의 지니 같아요. 복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몰랑몰랑하고 동그란 복이 만져지네요. 어떤 복일까요? 나눠주신 복만큼, 아니 그 이상 복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누아 2020-12-31 21:36   좋아요 1 | URL
문체 연습은 이렇게 쓸 수 있구나, 하고 즐겁게 읽고 지겹거나 재미없어지면 그만 읽어도 괜찮은 책이에요. 발상 자체가 책의 중요한 부분이라 문체를 달리할 때의 느낌을 알고, 자기 글에 적용해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끝까지 읽는 게 목표가 되지 않아도 돼요.

서니데이 2020-12-31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새해인사 왔습니다.
올해는 조금 남았지만, 새해는 그만큼 더 가까워졌습니다.
내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을 거예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날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누아 2020-12-31 22:02   좋아요 1 | URL
서재에 들어오면 님의 글이 있나 살펴보게 돼요. 꽃다발을 받는 느낌이기도 하고, 불 켜진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기도 했어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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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이다. 나는 중얼거리고 있다. 6개월 간 청소부의 방이었던 공간에서,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니었던 공간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갔지만 정리할 것이 없다. 하려고 했던 것이 사라진 시간에 옷장에서 바퀴벌레를 본다. 문을 닫아 바퀴벌레를 짜부라뜨린다. 나는 기쁨으로 불결해진다. 바퀴벌레의 몸에서 흰 내용물이 고름처럼 흘러나온다. 이것은 엄마의 젖 같다. 중립적 사랑을 생각한다. 바퀴벌레의 흰 덩어리를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토한다. 포기한다. 포기는 계시다. 낮고 겸허해진다. 그리고 바퀴벌레의 질료를 입안에 넣는다. 마침내 내 껍질은 깨어졌고, 나는 한계가 없다.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였다. 내가 하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 글의 줄거리를 이해해도 될까? 혹은 오해해도 될까. 중얼거리지 말고 날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해 봐요. 작자는 관심이 없다. 초인적인 무관심. 그 무관심 속에서 책을 읽는다. 한 문단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 했다가 다음 문단이 맘에 들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면서 다 읽었다. 다 읽었지만 다 읽었다고 해도 될까. 책은 알록달록 포스트잇으로 뒤덮여 있다. 너무 많은 표식은 없는 것과 같다. 포스트잇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 책이 좋았나. 책을 덮고 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이런 책이 좋다. 이해를 지연시키는 책. 무언가를 보고 나면 이해하고자 한다. 약간씩의 이해가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 못한 느낌. 그 미완의 기분으로 나는 계속해서 읽게 된다. 읽고 있는 중이다. 읽지 않는 순간에도.

 

옮긴이 배수아 작가는 만약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꼈다면, 그는 이것을 읽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읽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낀다. 어쩌면 그 고양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바퀴벌레를, 바퀴벌레의 고름 같은 흰 덩이를 보고 있는 사람의 중얼거림을, 방에 혼자 앉아 듣고 있는 것뿐이다. 그뿐이라도 이 책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읽어야 한다. 비록 읽지 못하더라고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닌 공간이. 내 생각이면서 내 생각이 아닌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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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한 거 읽고 계시네요ㅋㅋㅋ지독했어요 진짜...다 읽어도 뭔말인지 몰라...

이누아 2020-12-27 12:56   좋아요 2 | URL
다 읽었어요.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같기도 하고, 제 마음속에서 계속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열반님 서재에서 보고 따라 읽은 거예요. 저는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읽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저는 약간 혼란스러운 책이 좋나 봐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 볼까 해요.

*아까 댓글 달았는데 갑자기 이전 페이지로 가면서 사라져서 다시 썼어요.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제 없는 글인데. 이제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요.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종류의 중얼거림이 일어나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58   좋아요 2 | URL
네 저는 단편 쪽이 그나마 더 나았어요 ㅎㅎ아주 가끔은 서사가 잡혀서요ㅋㅋㅋ그러게요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도 눈으로 글자 좇았으니 바퀴벌레 알만큼 내장만큼이라도 어디 모를 곳에 박히지 않았을까요 ㅎㅎㅎ

이누아 2020-12-27 13:26   좋아요 2 | URL
허기가 불러서 다녀 왔어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반드시 찾아 와요. 그렇다고 안 먹으면 죽겠죠. 먹은 것들은 몸으로 가든 몸 밖으로 가든 사라져요. 그 사라지는 것들로 나는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바퀴벌레나 나나 바퀴벌레의 흰 고름이나 엄마의 젖이나, 까지 닿게 될까요. 중얼중얼. 계속 흘러나와요. 흘러가요. 근데 이런 이야기 하다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군요. 서사가 잘 안 잡히는 글을 읽으면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서사를 채우거나 구성하게 되지 않나요? 그런 면에서 서사가 잘 안 잡히는 책이 소설가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열반인님의 소설을 읽고 싶어요. 바퀴벌레가 나오든, 안 나오든.^^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3:29   좋아요 2 | URL
헤헤 언젠가 이누아 님께 닿을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뻗어 보겠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야 밥 안 먹어도 안 죽고 바퀴벌레 내장 집어먹어도 살지만 우리는 밥을 먹고 힘내야죠 ㅋㅋㅋ밥도 먹고 책도 먹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