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_장하빈

 

 

새가 날개 접으면 새의 주검 되듯

밥그릇 엎으면 하얀 사리 무덤 되듯

붓을 꺾으면 생의 불꽃 사그라지네

붓끝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까닭이네

 

-장하빈, 신의 잠꼬대(시와 반시, 2021)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정도의 마음이어야 글을 쓸 만한 걸까. 글을 쓴다는 게 뭘까. 신의 잠꼬대가 끝나면 저절로 절필이 될까. 시인에게 절필은 하얀 사리 무덤 같은 걸까. 몇 달 전 만났던 노시인이 당신은 늘 옆길로 샜다고, 아니 옆길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그 옆길이 직장이었다고. 그러니까 생계가, 생활이 옆길이고 시와 문학이 본길이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살아서 시인이 되었을까. 시인이 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붓끝에서 불꽃이 피어나야 살아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 장하빈 시인도 그런가 보다. 절대로 절필할 수 없다는 절필의 시를 쓰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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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벚꽃이 피었다는 뉴스를 봤다. 조금 있으면 대구도 피겠네, 했는데 바로 오늘 집 앞에 벚꽃! 깜짝 놀랐다. 매년 피는데 매번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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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22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ㅋㅋ벚꽃 대구에도 피었군요! 서울에도 아주 드물게 피었는데 본격적으로는 아직이예요. 덕분에 기대중입니다.매일 산책길 벚꽃나무들 감시중!🤓

이누아 2021-03-22 19: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봄이면 꽃 피는 게 당연한데도 벚꽃은 늘 갑작스럽게 피는 것처럼 느껴져요. 서프라이즈 선물처럼요.

바람돌이 2021-03-23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과 대구는 같이 가는군요. ㅎㅎ 아침 출근할 때마다 벚꽃잎 휘날리는 거 보며 가고 있습니다.

이누아 2021-03-23 19:06   좋아요 0 | URL
대구는 아직 휘날리진 않아요. 정말 신기한 게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질 때가 되어야 져요. 꽃이고, 잎이고. 태풍이 불어서 나무가 뿌리까지 뽑혀도 잎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우리 동네 벚꽃은 꽃샘바람 불어도 한 잎도 안 떨어지고 있어요.^^
 

모래시계

_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

 

 

아침에 인간극장을 봤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 이야기다. 그 아버지가 그런다. 나는 열 몇 살이었는데 지금은 아흔이 넘었다고. 가짜로 나이를 먹은 건지, 가짜가 아닌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런 말이었다. 그 아버지는 열 몇 살이던 자신이 어떻게 아흔이 된 것인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파도는 언제부터 그 노인의 몸에서 시간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내 몸에는 얼마만큼의 모래가 남아 있을까. 내게서 흘러나간 모래는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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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도 독서

 

 

우치다 타츠루의 구조주의 강의서를 읽었다. 읽기 시작할 때부터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구조주의 이론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고, 이 책의 주요 부분도 아니지만.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까뮈의 정직함에 대한 부분이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서로 다투는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 절대적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고 사르트르는 그 상식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알제리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판정을 내리기 힘들다. 양쪽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라고 정직하게 말한 프랑스 지식인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알베르 카뮈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일로 카뮈는 당시 거의 고립무원이 되었조.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 p.26.

 

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구조주의 맛보기 책이다. 이 책이 쉽게 이해된다고 열광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구조주의를 이미 접해 본 사람이 아닐까. 무언가를 쉽다고 느끼려면 어려운 걸 접해 봐야 한다. 철학자 한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철학자의 이론을 한 권에, 그것도 쉽게 적으려면 아무래도 핵심만 적게 된다. 그런데 이 맛보기용 철학서에서 철학 내용만 전달해도 모자랄 텐데 자꾸 사르트르를 데리고 온다. 사르트르만 데리고 오면 되는데 까뮈도 데려온다. 까뮈와 구조주의가 무슨 상관이지?

 

어쨌든 위 구절에 마음이 걸렸다. 아마도 내가 한국인이고 저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일 것이다. 프랑스가 일본으로, 알제리가 조선으로 보이는 것은. 까뮈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어서 카뮈가 정직하게 양비론을 펼쳤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알제리인이 나오는 까뮈 책이다. 이방인. 프랑스인 뫼르소가 알제리인을 죽인다. 감옥에 갇힌다. 재판 중에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 부각된다. 알제리인을 죽였다는 데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뫼르소 역시 엄마 생각도 하고, 애인 생각도 하지만 죽은 알제리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을 살짝 바꾸면 일본인이 조선에서 조선인을 죽였는데 조선인 죽인 것보다 자기 엄마 장례 때 슬퍼하지 않은 걸로 심판 받는 거다. 소설은, 삶은 훨씬 더 복잡하겠지만 여기에선 프랑스와 알제리만 본다. 까뮈가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정직하게 말했을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왜 정직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구조주의 이야기도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꺼낼까.

 

우리는 모두 고유한 역사적 상황에 휘말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로부터 전쟁의 책임에 대해 추궁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이 나라가 반세기 전에 저지른 행위에 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결부되어 있으며, 그에 대해 사죄를 하든 무시를 하든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관계가 없어요. 나는 중립입니다라고 우는 소리를 해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참여라는 사태입니다. -같은 책, p.155.

 

그 참여라는 사태를 부르짖은 사람이 사르트르고,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분쇄되었다고 한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에 승리했다고 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니까 나는 다 믿어야 할까. 사르트르와 까뮈는 같은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나. 왜 자꾸 사르트르와 까뮈의 논쟁을 이야기에 끼어 넣지? 이 간단한 책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될 만큼 구조주의와 긴밀한가? 이 내용은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여러 철학자를 소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몇 페이지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이겼다고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역사를 이해하는 옳은 방법인가? 정말 이상하다.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다.

 

어차피 맛보기용 책이니 이렇게 따지기도 뭐하지만 혹시 저자가 일본과 일본이 식민 지배했던 나라 양쪽 중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판정 내리기 힘들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사르트르와 까뮈와 레비스트로스를 데리고 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는 정말 교묘하게 교활한 사람이 된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 어쩌면 식민 지배를 받았던 후손의 피해망상일 것이다. 지독한 오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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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1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는 프랑스 본토의 부르조아 지식인 출신으로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만 충실할 수 있었던 출생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알제리 독립운동에 대해서 프랑스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할 수 있었죠. 하지만 까뮈는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 빈민가 출신이에요. 자신이 함께 자랐던 고향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 독립운동으로 인한 프랑스의 분쟁의 틈에서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햇었던듯해요. 까뮈에게는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이라는 이중적인 기준이 있었던 거죠. 물론 이것은 역사적인 판단으로는 옳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요. 알제리인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무언가 문제를 해결하기를 고민하고 고군붙우했던게 까뮈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저는 까뮈의 생각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 책의 지은이의 입장은 사르트르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역사적 비판이나 반성에 대해서 더 명확한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요.

이누아 2021-03-21 21:46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와 까뮈 이야기가 비교적 앞부분에 나왔다가 레비스트로스 부분에 다시 등장해요. 저는 사르트르와 까뮈의 의견은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했어요. 까뮈가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했다고 받아들여야 하나 싶게 말이에요.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냥 마음에 걸려서요. 입문서에서 이 부분이 강조될 이유가 있었나 생각하다... 까뮈에게 정직하다는 판단을 한 게 눈에 띄었어요. 그러면 누군가는 정직하지 않았단 말이잖아요. 저자는 왜 특별히 까뮈를 정직하다고 평가했을까. 까뮈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은 게 있나, 생각하다 이런 글까지 쓰게 됐어요.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어요. 별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이겼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싶기도. 무식하니까 읽다 마음에 걸리는 것을 살펴기도 쉽지 않네요. 하아.

바람돌이 2021-03-21 21:46   좋아요 1 | URL
이누아님 말씀대로 딱히 관련없는 이야기를 저토록 중요하게 끌어왔다면 뭔가 다른 의도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누아님의 오독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을 듯.... 책을 안 읽은 저로서는 이정도 얘기밖에 못하겠네요. ^^ 저도 저자의 의도가 궁금해서 저 책을 봐야 하나? 하다가 아 철학은 너무 힘들어. 난 다른 책이 더 보고 싶어하면서 그냥 꼬리를 내립니다. ^^

이누아 2021-03-21 21:55   좋아요 0 | URL
‘저토록 중요하게도‘ 아닌데 그냥 제 자격지심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까뮈 말대로 프랑스와 알제리가 연방정부를 이루었다면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식민 지배국과 식민지가 수평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기도 해요.

서평이 아주 좋아서 읽었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여기 있었다는 증거

 

 

저는 청소를 하고, 요리를 돕고, 불을 피워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거나, 더러워지거나, 불에 타서 없어져요. 하루가 끝날 때면 제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안 남아요.” 리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치마 끝단에 놓인 자수를 어루만졌다. 자수는 내가 관목 가시에 걸려 치마를 찢어먹었을 때 리지가 꿰매준 부분을 가려주었다.

제가 놓은 자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예요.” 리지가 말했다.

이걸 보면 왠지...... 글쎄, 단어를 모르겠네요. 제가 언제나 여기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필 윌리엄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엘리, 2021), pp.60-61.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쓸쓸해져.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철학자가 그랬어. 나는 나를 볼 수 없다고,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거울 속 나는 가짜라고, 가짜인 나밖에 볼 수 없다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나의 탄생을 내가 알 수 없다는 생각. 나는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어. 그 말을 들으면 무언가 안쓰러워. 무엇을 증명하려고 미치려고 애쓸까. 미친 사람들은 그냥 미쳐서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만 미치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고 미친 척하는 건 우스꽝스럽지 않니? 미치는 건 그냥 미치는 거지. 미쳐야 된다니. ‘미쳐야보다 미친다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도달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걸 좀 봐 줬으면 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조금 다른 빛깔로, 조금 다른 강도로 대부분 다 가지고 있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리지와 같은 마음이라고,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안됐어. 우리 모두 그대로 있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걸까. 나는 여기 있었다는 증거로 지금 네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더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까.

 

불쑥 너에게 말을 걸어. 봄이니까. 봄에게 말을 걸 듯이.

 

 

 

평범한 하루

_변영현

 

 

느슨한 공간을 돌고 도는 시계 소리

수북하던 설거지는 말갛게 씻어두고

빨래는 햇볕을 찾아 탈탈 털어 넌다

 

단정한 일상을 지탱하는 수고로움

헛바퀴 같아도 쉼 없는 물레방아

오늘도 거친 시간을 곱게 빻고 있다

 

기대도 후회도 없는 밤을 뒤척이며

제자리 걸음에도 내 몫을 살고 있다고

묵묵히 가는 하루를 다독여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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