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병

 

 

 

아침에 눈을 뜨니 오른쪽 눈이 빨개. 나아지겠지, 하며 나갔어. 한 달에 한 번 있는 독서모임에 다녀왔는데 눈이 더 빨개졌어. 혹시 옮기는 건가 싶어 안과에 갔더니 애매하대. 이틀 안약 넣고 나아지면 오지 말고, 안 나아지면 다시 오래. 그 사이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내일 일정이 있었는데 눈 덕에 쉬겠다, 싶어.

 

눈병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조심스러워.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 누를 때도 왼손으로 누르고, 엘리베이터 숫자 누를 때도 손등으로 누르고. 오늘 내가 만진 물건 만진 사람 없나 기억도 되감고. 다행히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손도 자주 씻었고. 아무에게도 옮기지 않고, 쉽게 나았으면 좋겠어. 빨간 눈이 낯설어.

 

오늘 아침 빨간 눈보다 더 놀란 일이 있었어. 아파트 광장에 벚꽃이 활짝! 어제까지 기미도 느끼지 못했는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이렇게까지 환해 보이지 않을 텐데 아파트 광장 양쪽 길에 쭉 늘어선 꽃들이 일제히 핀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밝혀줘. 오늘부터 눈이 호사를 부려도 좋을 텐데 눈병에 집에 있게 됐어. 너무 들뜨지 말라고 눈에 일침을 맞은 듯.

 

오늘은 눈을 일찍 쉬게 해야겠어.

 

 

 

 

초록빛 
_천상병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신체검사를 받았더니

내 시력이 0.5였다.

이것을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언제나 초록빛을 많이 보아라'였다.

그래서 초록빛을 많이 보았더니

 

중학교 2학년때

신체검사에서는

0.8이 되었었다.

 

초록색은 이렇게도 눈에 좋으니

눈 나쁜 사람들은

모름지기 초록빛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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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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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4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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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웃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 들려도 왕래하지 않는 곳그래도 만족하는 마을, 그곳이 이상향이라고 노자가 말했지. 난 그런 삶이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했어. 더 이상 무언가 갈망하지 않는 상태가 아닐까 하고.

 

난 어릴 때 지금 사는 동네에서 강을 건너면 있는 곳에 살았어. 근데 초등학교가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 있어서 집에서 3,40분을 걸어 학교를 다녔어. 그 때문에  마을의 어제를 나는 알아.

 

한쪽 팔만 벌려도 서로 닿는 대문들이 뱀처럼 이어져 누군가 모두 다 죽자고 소리치면 정말 모두가 죽을 수 있는 골목. 거기엔 간질에 걸린 친구가 살고 있었어. 아파서 자주 결석을 했어. 어느 날 우연히 만나 그 친구 집을 갔어. 너무 좁은 골목에 놀랐던 기억이 나. 그 친구가 담임선생님이 아무도 모르게 자기에게 주신 학용품을 보여 줬어. 훌륭하신 선생님이야. 학기가 끝났을 때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더 마음 아프게 기억나.

 

친구의 골목 가까이 사람으로 출렁거리는 시장이 있었어. 시장을 지나려면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쳐야 했지. 시장은 이 부근에서 가장 번화가여서 영화관도 있었어. “코리아 극장”.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온 적도 있었어. 그때 귀신 영화가 한창이었어. 무덤에서 튀어나온 그 귀신이 밤마다 내 목을 졸랐지. 아버지와 함께 본 첫 영화였어. 내게 맞지 않는 영화였지만 아버지와 영화를 볼 수 있는 난, 골목의 사람들보다 마음으로나마 여유가 있는 셈이었지.

 

너무 낡았던 걸까, 너무 좁았던 걸까? 삐걱대던 마을은 순식간에 사라졌어. 재개발로 친구의 골목은 20, 시장은 40층 아파트가 되었어. 무너진 마을 위에 세워진 어쩌면 무너질 마을에 나는 살아.  쌍둥이를 낳고 친정과 가장 가까운 동네를 찾다 보니 이곳이었어. 아이들이 11살이니 10년 이상 살았지그러나 한 번도 그 친구를 만난 적 없어. 어디로 갔을까? 재개발 때 이곳을 떠났을까? 문득 궁금해져. 그 애의 이상향은 어떤 곳이었을까?

 

 

 

 

_강현덕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도 길이 되었다

 

햇살 잘 들던 내 방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채송화 붙어 피던 담 신호등이 기대 서 있다

 

옛집에 살던 나도 덩달아 길이 되었다

 

내 위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며 가고

 

시간도 그 뒤를 따라 힘찬 페달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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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어떤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 아주 중요한 일도 아니고, 생활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데도 말이야.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벽에 걸린 풍경화처럼, 꿈속처럼.

 

노을이 지고 있었어. 19세기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년이 통을 매단 막대를 들고 서 있었어. 그곳은 중국 남경이었고, 나는 상해에서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어. 누군가를 마중하러 나가 있었어. 보도엔 아무도 없고 소년과 나만 있었어. 귀뚜라미를 파는 소년이라고 생각했어. 20년 가까이. 근데 오늘 생각해보니 그때는 가을이 아니었는데 그 소년이 팔고 있던 게 귀뚜라미가 맞나 모르겠어. 어쨌든 난 그때 귀뚜라미를 팔고 있다고 생각했어.

 

소년은 귀뚜라미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그저 행인처럼 길에 서 있었어. 노을을 보며. 그 소년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느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어. 그 소년도 나를 쳐다봤지.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사라고도 하지 않았고, 사려고도 하지 않았어. 서로 빤히 쳐다보다 노을을 봤어.

 

그것뿐이었어. 이 장면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다음 장면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 소년이 어느 방향으로 걸어갔는지, 상해에서 온 버스에서 누가 내렸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아무 일도 아니었어. 소년을 다시 만난 적도 없고,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일도 없었지. 그런데도 간혹 이 장면이 떠올라. 내가 선 자리에서 바로 아득해지는 느낌. 아무 까닭 없이 그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어. 그러면 나는 잠시 꿈속에 들어가 있다 나오는 기분이야.

 

이제 나는 20대가 아니고, 그 소년은 소년이 아니겠지. 내 인생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 중요하지 않는 장면... 기억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 이런 것이 내 기억의 방 어디에 걸려 있어. 쓸모없고 아름다운.

 

 

 

 

소년

_김춘수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고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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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큰애가 반장이 되었어. 큰애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학급선거에 나갔어. 한 번은 자기만 자기 이름을 써서 1표를 받은 적도 있고, 또 한 번은 3차 투표까지 가서 부반장이 되었는데 규정이 2차에서 생일 빠른 친구가 선출되는 거라 선출이 취소된 적도 있어. 나 같으면 낙담해서 선거 같은 데는 나가지 않을 것 같은데 선거일만 되면 단상에서 할 말을 적어서 가방에 넣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어. 몇 번이나 머리를 빗고 씩씩하게 학교에 가.

 

큰애는 어려서 또래보다 늦었어. 아기 때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어. 4살이 되었는데도 말을 하지 않았어. 기다리면 된다고, 괜한 짓 하지 말라고 친정 식구들이 말렸는데 난 언어치료를 시켰어.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너무 빨리 해서 또래인 동생만 친구가 있고, 큰애는 늘 혼자 있더라고. 치료 후에 아이가 정말 밝아졌어. 그 효과가 얼마가 컸는지 지금도 친정 엄마는 아이들이 마음에 힘든 일이 있으면 심리치료나 언어치료를 받으라고 하셔.

 

작은애가 쉽게 하는 걸 큰애가 어렵게 해내는 게 안타까웠어. 큰애가 쉽게 하는 건 관계에 필요한 게 아닌 것 같았어. 큰애는 지도 보기와 길 찾기를 비상하게 잘해. 작년부터는 혼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녀. 길을 잃지 않아. 처음 간 장소나 건물에 대해 도착 즉시 파악해. 입학한 날, 학교 전체 학급 배치도를 그리고 있더라고. 그런 게 친구를 사귀는 데 무슨 필요가 있나 싶었어. 아이의 친구들은 관심이 없어. 서울로 가는 데 기차로는 어떻게 가고, 차로는 무슨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지. 모두 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작은애는 보드랍고, 친절하고, 공감을 잘해. 사람들은 늘 아이가 배려를 잘 한다고 이야기를 해. 나는 다행이라 여기고 마음을 큰애한테 더 썼어. 입학해서 큰애가 내 염려보다는 괜찮게 그럭저럭 적응하자 작은애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어. 상담을 했더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거래. 내가 큰애한테 마음이 쏠려 있어서 작은애가 응석을 부릴 자리가 없었다는 거야.

 

아이가 어릴 땐 아이에게 엄마가 너무 큰 존재야. 나도 엄마가 처음인데, 특히나 나는 맏이가 둘인 거나 다름없어서 아이들이 불편한 점이 많아.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그 아이들이 아닐지도 몰라. 큰애가 낙담할까 염려했지만 큰애는 툭툭 털고 일어서고, 작은애는 뭐든 잘해낸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엔 부담과 불안이 있었어.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길 찾기는 큰애에게 자신감을 준 것 같아. 계획하고 일정을 짜고 떠나는 게 즐거운 큰애는 아무도 자신을 찍어주지 않아도 선거를 하나의 여행쯤으로 여겼나 봐. 인기 많은 작은애가 관계를 망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고.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확신을 버려.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구나. 때로 내가 안다고 착각하면서 뭐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내가 조금만 아는 존재라서, 대개는 모르는 존재라서 불안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해.

 

 

 

그대가 아이들처럼 되려고 애쓸 수는 있지만

아이들을 그대처럼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시오.

왜냐하면 삶은 되돌아가지도 않고

어제에 머물러 있지도 않기에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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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절

 

 

기슭아, 네 이름을 부르니 너는 아주 멀리 있구나. 20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야 거기 네가 있어. 꿈속에서야 언제든지 볼 수 있었지만 그건 나만의 시간이지, 우리의 시간은 아니잖아. 아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기억이란 건 시간의 물결에 너무 잘 씻겨서 아예 사라지기도 하고, 빛이 물에 굴절될 듯 다르게 그려지기도 하니까 우리의 시간이란 건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

 

어긋난 기억을 경험한 적 있어?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집에 어려움이 생겼는데, 그걸 친구의 친구가 나한테 얘기해줬대. 근데 왜 나는 다르게 들었을까? 친구는 내가 알면서도 자신의 어려움을 모른 척해서 섭섭하고 화가 났어. 난 까닭도 모르고 그 친구의 짜증과 무시를 받았어. 1년이 지나 화해를 했지.

 

서른 살이 넘어서 친구가 그 얘기를 했어. 그때서야 알았어. 친구가 화낸 까닭을. 나는 몰랐어. 내 기억 속에는 친구의 친구가 말했다는 그 장면이 없어.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 나는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나를 오해하면서 어떻게 화해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자기 스스로 마음을 풀었다는 거야. 그 친구와 나는 마치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을 보낸 것처럼 느껴졌어.

 

우리도 만나면 그런 이야기가 있을까. 밤에 화왕산 산장에 간 적이 있었지. 거기까지 함께 오를 때 그 뚜렷한 어둠이, 어둠 속의 별이 내게는 동화 같은 기억인데 혹시 네게는 그 어둠이 두려웠던 기억일까?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기억도 못하는 거 아냐? 

    

물결이 아득해. 물에 비친 내 얼굴이 반듯했다 일그러졌다 사라졌다 또렷해지기도 해. 시간이 흐르고 있어.

 

 

   

굴절   

_이승은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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