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

 

 

벚꽃이 만발해. 따로 행사가 없어도 꽃이 핀 곳은 모두 축제 같아.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환하고, 웃음을 줄 수 있는 이가 있어.

 

오늘은 청도에 가서 엄마와 언니네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꽃구경을 했어. 조카 내외가 아기를 데려왔는데 꼭 활짝 핀 꽃 같아. 아기가 눈을 뜨면 모두 다 둘러앉아 웃고 있어.

 

꽃처럼 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엄마가 했던 그 기도가 생각났어. 만나는 이들마다 우리 가족을 꽃처럼 보게 해달라던 기도 말이야. 나도 내가 만나는 이들을 다 꽃처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얼마나 자주 기쁠까.

 

날씨가 조금 쌀쌀했는데도 마음이 환해지는 날이었어. 여리고 작은 것들이 내뿜는 빛으로.

 

 

 

 

 

꽃과 나 

_정호승


꽃이 나를 바라봅니다
나도 꽃을 바라봅니다

꽃이 나를 보고 웃음을 띄웁니다
나도 꽃을 보고 웃음을 띄웁니다

아침부터 햇살이 눈부십니다

꽃은 아마
내가 꽃인 줄 아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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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2015)을 보면 허크 혼자 모험을 하지 않아. 달아난 흑인 노예, 짐과 함께 여행해. 짐은 누군가의 재산이지. 허크는 짐을 신고하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려. 신고하려고 편지까지 쓰지만 결국 편지를 찢어. 그러면서 자기는 지옥에 갈 거라고 해. 짐은 이미 고락을 나눈 그의 친구인데, 친구를 신고하지 않은 죄책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민음사, 2012)에서 자베르 경감은 자살해. 어릴 때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간추린 책을 봤는데, 그땐 자베르 경감이 집요하게 선량한 인간을 쫓은 걸 후회해서 목숨을 끊은 줄 알았어. 그런데 본 책을 보니 형사로서 죄인인 장발장을 보고도 잡지 않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죽은 거였어.

 

죄란 뭘까? 한 여인이 간음하면 어느 시대에는 돌에 맞아 죽고, 어느 시대에는 감옥에 보내지고, 어느 시대에는 배우자와 이혼만 하면 돼. 같은 행위에 대해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건 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겠지.

 

예전에 어느 여배우가 섹스 비디오 때문에 외국으로 달아났어. 그땐 다 그 여배우를 손가락질했어. 그 비디오를 찍고 퍼뜨린 상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지. 지금은 젊은 남녀가 성관계하는 게 손가락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비디오를 찍어 사랑했던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람에게 더 분노하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민음사, 2008)에서 오비에리카는 자신이 내다 버린 쌍둥이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해. 쌍둥이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라고, 대지의 여신이 없애라고 명령했대. 저주가 두렵고, 그곳에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을 버렸지. 하지만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던 거야. 오비에리카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쌍둥이를 버리지 않겠지

 

죄라고 규정한 틀 속에서 그게 왜 죄가 되냐고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유가 확장되는 건 아닐까? 죄는 조이는 거잖아. 조이는 것에서 자유가 나올 수는 없지. 같은 사람인데 흑인이 왜 재산이 되어야 하냐고, 가난한 사람은 왜 작은 잘못으로 큰 벌을 받아야 하냐고, 같은 행위에 대해 왜 한 성별만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냐고, 어떻게 한 존재가 모독이 될 수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야 해. 그래야 남도 자기 자신도 덜 조이게 되지 않을까?

 

나를 조이는 건 뭘까? 나는 누구를 조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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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새벽에 깨서 한참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었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멀리서 벨소리가 진동처럼 건물을 흔드는 느낌이 들었어. 커튼 너머로 불길의 어른거림이 보이고, 뭔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어. 난 큰애 방에 자고 있었는데 남편이 안방 문을 열며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도 얼른 일어나야겠는데, 몸이 안 움직여.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아. 뻣뻣하게 굳은 몸이 움직이려고, 움직이려고. 어서 아이들을 깨워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겨우 눈을 떴는데 불길도 경보음도 없었어. 서늘한 아침이 창에 와 있을 뿐.

 

고요한 아침과 격렬한 몸부림 사이 멍하니 앉아 있어. 슬며시 내 손이 내 손을 잡아. 내 몸이 겪은 거야, 내가 정말로 그렇게 경험했다고, 이 평안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슭아, 내가 실재한다고 믿는 고통이 이런 걸까? 가위 눌린 것처럼 진짜 같은데 가짜인, 가짜 같은데 진짜인.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있지도 않는 불길 속에서 달아나려고, 달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을까? 거기서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구해야 한다고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웠을까?

 

감각을 믿을 수 없는 아침.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誰是孰非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夢中之事  모두 꿈속의 일이로다

 北邙山下  북망산 아래 

 誰爾誰我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경허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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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상담

 

 

다행히 눈병은 전염성이 없는 걸로 결론이 나서 어제 예정대로 학교에 상담하러 갔어.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라 아이들 이야기를 상담하면 30분 중에 25분을 큰애 얘기만 하고, 5분 정도 급하게 작은애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다른 반이 되니 작은애 이야기도 잘 들을 수 있게 됐어.

 

작은애 반에 먼저 갔는데 선생님은 뵙기 전부터 좋은 인상이 있었어. 학교에서 준 서류가 있었는데 나는 분명히 사인해서 작은애에게 줬는데 작은애는 기억이 없나 봐. 선생님이 전화하셔서 학기 초에 서류가 많으니 그럴 수 있다고 아이에게 뭐라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아이가 이해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어. 선생님도 우리 아이 또래 자녀가 있어 아이들을 잘 이해하신대.

 

작은애 반 아이들은 대체로 차분하대. 작은애는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잘 돕는대. 노점에서 장사가 안 되는 할머니를 보면 나보고 물건을 사주라고 하는 애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 엄마에게 인삼을 사달라고 한 적이 있어. 인삼 파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보여서. 근데 엄마가 진짜 사셨어. 먹기 싫은데 내가 사달라고 한 거라 조금 먹었던 기억이 나.

 

큰애 반에 갈 때는 긴장이 돼. 1학년 때 선생님은 큰애를 정말 힘들어하셨어.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그게 선생님이라고 예외가 아니었거든. 2학년 때 선생님은 1학년 때 일로 내가 걱정하자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 하시고, 실제로도 아이가 스트레스 없이 1년을 보냈어. 3학년은 그 중간 정도였는데, 올해는 반장이라 더 마음이 쓰였어.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인상도 복잡했거든. 선생님은 벌점 제도를 운영하셔. 아이가 숫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제도가 아이의 성향을 강화할까 염려도 되고, 선생님의 오해로 벌점을 받은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큰애가 학교에서 상처받을 만한 말을 들었다고 따로 전화해서 위로를 해주셔서 마음이 따뜻한 분인가도 싶었고.

 

생각과 만남은 정말 달랐어. 내가 사전 조사서에 우리 애가 공감능력이 좀 부족해서 혹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설명하면 이해하고, 잘 받아들인다고 썼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아이가 하는 행동을 관찰하셨나 봐. 나에게 예를 들어가면서 우리 애가 공감능력이 떨어지지 않다는 걸 증명하셨어. 누가 엄마인지 모르겠더라고.

 

3월은 주로 내가 아이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을 듣고 왔어. 선생님께 듣는 아이의 모습은 정말 훌륭했어. 내가 부족하다고 걱정하는 부분도 많이 좋아졌고. 무엇보다 놀란 건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선생님이 아이를 이렇게 유심히 관찰했다는 거였어. 그리고 선생님 실수로 아이에게 벌점주신 것도 이야기 하시고. 솔직한 분이라 아이와 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아이들 각자와 잘 어울리는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세계가 될 때가 있어. 특히 어릴 때. 올해 아이들이 만난 새로운 세계가 흥미진진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 선생님들도 너무 힘들지 않고, 유쾌하게 아이들을 만나실 수 있으면 해.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한 기도가 있어. “스스로 평화롭고, 타인을 평화롭게 하기를”이야. 모두들 그랬으면 좋겠어. 아이들과 아이들의 친구와 선생님이 모두 평화롭고 즐거운 한 해를 보내기를.

 

 

 

 

선생님
_정세기

 


우리 할머니는
엄마 대신 나를 길러 주신다.
오늘도 뒷산에서 뜯은 산나물
보따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신 할머니
늦게 오시는 할머니를 위해
나는 저녁밥을 짓는다.

-선생님도 엄마 없이 자랐단다.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살려무나.

내가 일기장에 쓴 글 아래에
써 주신 선생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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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으며

 

 

눈병이 옮을까 손을 자주 씻어. 손이 안 닿는 데가 없어. 나도 모르게 눈에 손을 댔을까 싶어 자꾸 씻게 돼. 안경을 밀어 올리고 나서도 혹시, 싶어 씻어. 그러면서 결벽증에 걸린 사람들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난 내 병균이 옮을까 염려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물에 묻은 균이 옮아올까 걱정이 되는 거지. 버스 손잡이를 나처럼 눈병 걸린 사람이 만졌을지도 모르잖아. 어떤 사람이 코를 후빈 손으로 손잡이를 만졌을지도 모르고. 순간순간 그런 생각이 들면 손을 안 씻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얼마나 힘들까.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쯤 이웃집에 간 적이 있어. 모델하우스보다 더 깨끗하고 정돈된 집이었어. 깨끗한 집은 많이 봤어도 그런 집은 처음이었어. 책장에 책들은 모두 번호대로 키를 맞춰 서 있었어. 삐죽 튀어나온 책은 물론 한 권도 없었어. 나는 너무 구질구질하게 사나, 싶을 정도였어. 살짝 주눅이 들어서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뭐했어. 어느 아침에 그 이웃을 만났는데 약국에 간다는 거야. 두통이 심하대. 좀 쉬라고 했더니 무언가 어긋나 있거나 흐트러진 걸 보면 참지 못해서 괴롭다는 거야. 아픈 것보다 정리 안 된 무언가를 보는 게 더 괴로워서 아픔을 참고 정리를 한다고. , 완벽한 건 없구나.

 

청결한 건 좋은 거지. 정돈된 건 좋은 거지. 하지만 지나친 건 부족한 것과 같다고 하지. 청결에 사로잡히면 자기만 청결한 게 아니고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어 해. 균과 싸우고, 먼지와 싸우느라 매일이 투쟁인 사람들을 생각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다던 말이 생각나. 균과 먼지에 대한 무감함으로 나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지금도 책장엔 얹힌 책이 보여. 네게 하는 이야기가 끝나면 읽을 거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결벽증을 이야기 했지만 나도 나도 모르게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나만의 굳은 습관이나 생각이 있을지 모르겠어. 남의 티끌은 보여도 자기 들보는 안 보인다고 혹시 내게 그런 게 있는 게 네 눈에 보이니? 눈병이 났는데 손이 바쁜 시간이야. 손을 자주 씻으니까 손 크림을 발라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이 금방 건조해져. 적당한 게 뭘까? 무언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에 관해 생각하게 돼. 우리가 조금 어설퍼도 평온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먼지에 대하여 

_서연정

 

 

될 수 있으면

틈을 보지 마라

머리카락이나 보푸라기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기 쉬운 곳

집주인의 비밀이 묻어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살비듬에는

다닥다닥 이야기가 붙어 있다

닦아낸 그 자리에 다시 앉는

먼지 닦아내면 또 앉을 먼지

제 몫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안고 있는 먼지

 

억지로 떼어내면 금방이라도

빨간 피가 묻어날 것처럼

치열하게 달라붙는다

 

틈이 많은 삶

그런 곳의 먼지에 대하여

쓸쓸해지는 날

이해하라 용납하라 때론

딱지 아래 핏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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