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잎들이 아래로 위로 날갯짓하듯 떨려. 날 것만 같은데 나무 곁을 날아가는 건 비둘기. 몇 주 전까지 하얗게 피어 있던 벚꽃들은 흔적도 없어. 나무의 껍질은 늘 얼기설기해. 곤충들이 탈피하듯 나무껍질도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새 껍질이 생겨나. 그러면서 조금씩 굵어지고, 내가 모르는 어느 시간에 나무는 하나둘 나이테를 그려내겠지.

 

아파트로 둘러싸인 광장을 에워싼 벚나무. 이곳에 심어졌으므로 이곳에서 살아내는 나무들을 보면 인간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솔깃해져. 어떤 인과가 있어서 여기에 이 나무들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게 느껴져. 어느 때 나는 이 광장이 있는 줄도 몰랐어. 이 아파트에 살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지. 어쩌면 나는 내가 모르는 삶을 살아내고 있어. 게슈탈트가 말했어.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기치 않게 무엇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그럴 때 내가 나라고 느낄 수 있는 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일거야.

햇살이 좋아. 바람이 부네. 광장 바닥의 먼지와 쓰레기를 쓸어내면서. 꽃이 있었던 자리, 이제 잎이 넘실거려. 순식간이야.  내게 일어나는 일도 이렇게 다가왔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해와 해를 가리는 구름, 구름을 움직이는 바람이 서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가 그냥 겹쳐지고 흩어지는 것이 아닐까. 안으로 하나둘 새겨지는 나이테는 나무가 베어지기 전에는 볼 수가 없어. 잎의 무성함만으로, 꽃의 풍성함만으로 나무를 평할 수는 없어. 내 안엔 어떤 나이테가 새겨져 있을까?

 

벚꽃이 없는 벚나무를 봐. 그 나무 사이로 유모차와 자전거와 비둘기가 가로지르고 나는 여기에 앉아 있어. 모두 괜찮아.

 

 

 

 

 

괜찮아

_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괞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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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기슭아, 지금은 새벽이고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어. 낮에 마신 커피가 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탓인가 싶어. 뒤척이고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어. 투르베르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는 구절이 반복되어서인지 그 구절이 맴돌고 있어. 자꾸 들었더니 조금씩 내 안으로 들어와. 그리고는 아주 오래 전으로 나를 데려가.

 

나는 산으로 갔지. 그때 왜 갔느냐고 많은 사람이 물었어. 나는 그때마다 무어라고 대답했지만 오늘 누가 묻는다면 세상한테 져서 갔어, 라고 대답할거야. 어쩌면 세상한테 져서 갔어, 라는 말도 할 수 없어. 세상에서 지려면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나는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지금도 세상에 져서 세상에 살아. 내가 이기고 싶은 게 뭔지 말도 못하면서.

 

몸은 얼마나 작은지, 커피 한 잔에도 이렇게 깨어있으니. 이렇게 작은 몸속에 지나간 일은 얼마나 많이 있는 건지. 흘러가자, 흘러가라. 몸이 창고가 아니라 통로였으면 해.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갔으면.

 

비가 오래 오네. 노래가 듣기 좋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_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노래 : https://youtu.be/EEPODasDS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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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취미

 

 

난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컴퓨터 앞에 앉기도 싫어졌어. 정말 게으른 취미야. 시간이 나면 침대에 가. 시집과 노트, 볼펜, 커피를 들고. 기대앉아 시집을 읽어. 어떤 시집은 벌컥벌컥 마시고, 어떤 시집은 전혀 소화가 되지 않아. 꼼꼼히 읽는 건 아니고 쭉 읽고, 특별히 맛있는 페이지를 만나면 한 번 더 읽어보는 정도야. 그러고 있으면 충만한 느낌이 들어. 쓸모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이랄까, 세상에서 혼자 도망가 놀고 있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신해욱 시인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산문집을 내면 친구들에게 선물하지만 시집은 선물하지 않는대. 한결같이 너무 어렵다고, 못 알아듣겠다고 해서. 나도 못 알아듣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가 많지만 시집 전체에서 몇 편은 이해할 수 있고, 몇 편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좋아할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내가 시집을 낸다고 해도 지인에게 주려면 망설일 것 같기도 해. 산문은 육체 같고, 시는 영혼과 비슷하게 느껴져.

 

대구는 오늘 낮 기온이 20도야. 벚꽃은 모두 다 졌어. 순식간에 여름이 성큼 다가와. 오늘은 아이들 옷장 정리를 해야 할까 봐. 옷도 좀 사고. 겨우 계절에 맞추고 시간에 맞추며 지내면서 시집을 읽는 건 약간 호사스런 느낌이 있어. 시는 가장 가난한 예술품이고, 시인은 가장 가난한 직업인데 어째서 시를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까?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로 도망가고 싶은 한낮, 약속이 있어.  날씨가 좋다.

 

 

 

 

도망

_장정일

 

도망가서 살고 싶다

정일이는 정어리가 되고

은희 이모는 은어가 되어

깊은 바닷속에 살고 싶다.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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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4-0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도 대구에 사시는가 보군요. 요즘 날씨가 좋아서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이누아 2019-04-10 09:26   좋아요 0 | URL
벚꽃 필 때 벚나무 근처에서 책을 읽으려고 앉았는데 바람은 차더라고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겠어요. 낯모르는 사람을 보면 내 이야기를 듣는 서재지인이라고 생각하고 친절하게 대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어요.

2019-04-08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0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휴거

 

     

오늘 신미나 시인의 싱고, 라고 불렀다(창비, 2014)를 읽다 안식일이라는 시에서 휴거 생각이 났어. 휴거가 뭔지 알지? 예수 재림 때 믿음 있는 자들이 예수와 함께 하늘로 들려지는 거, 다시 말하면 믿음 없는 자들이 이 땅에 남겨져 고통받는 것.

 

중학교 3학년 때는 책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봤는데 그때 휴거라는 책을 봤어. 너무 오래돼서 작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휴거의 날을 그린 소설이었어. 휴거라는 말을 처음 봤는데, 그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다음날 눈을 뜨면 나만 남겨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 엄청난 충격이었어. 나는 그 책의 내용을 8절지 두 장에 요약 정리해서 복사했어. 새벽에 학교에 가서 한 반에 한 부씩 아무 책상에나 그 종이를 넣었어. 내가 휴거가 안 되더라도 이 내용을 알려야겠다 싶었거든.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어. 천국과 지옥이라는 게. 뭐가 이상한 건지 정확히 집어낼 수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를 읽고 좀 선명해지는 부분이 있었어. 소설 속 프란치스코는 궁금해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의 가족이, 이웃이, 친구가 지옥에 가 있는데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런 연민과 사랑이 없다면 천국에 가 있을 자격이 있는 걸까?, 하고 말이야. 이 책도 너무 오래전에 읽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

    

한때 몇 월 며칠에 휴거라 있을 거라고 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적이 있었지. 모르겠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날짜를 정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는지. 그런 주장을  했던 목사 부부가 텔레비전에 나온 적이 있는데 자신들이 주장했던 그 날짜가 달라졌을 뿐이라며 그때도 역시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어. 글쎄...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후회와 두려움으로 과거나 미래에 마음 쓰는 것보다 현재에, 지금 여기 발을 딛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적절한 기다림이 아닐까 싶어.

 

 

 

 

안식일

_신미나

 

 

여름 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옷장을 열었다가 그냥 닫고

교복 치맛단을 접어 입었다

 

매미 껍데기가 나무에 붙어 있었다

칼로 가른 듯

등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서울에서 온 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 했다

그것이 믿음이라 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

신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엄마한테 얘기했지만

쪼그려 앉아 마늘만 깠다

물에 불린 마늘 껍질이 쏙 빠졌다

 

우리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 천국은 얼마나 멉니까

 

동생이 혀를 동그랗게 말아

침방울을 날리는 사이

여름이 갔다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창비, 2014),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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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이야기 하려고 앉았는데 시간이 많이 늦었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왠지 시간이 아깝고, 나만을 위한 걸 하고 싶어져. 그런데 이럴 때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벌써 잘 시간이 다 되었네.

 

한시를 읽다 궁금증이 생겨 국어사전, 한자사전, 중국어사전, 고한어사전...사전이란 사전은 죄다 찾아봤어. 꽂힌 거지. 한 글자 때문에. 책에 적힌 해석이 옳다고 무조건 생각하지 않으리라, 권위에 눌리지 않으리라, 하면서. 한 글자 뒤져서 한 줄의 싯구를 해석하고 나니 1시간이 지났네. 한자 한 자에 한 시간이라...오랜만이야. 이렇게 열심히 사전 찾으며 읽어본 게. 재밌고 즐거웠어.

 

시간이 많으면 늘 할 것 같지만 시간이 없어서 더 재미있게 느껴진 건 아닌가 싶기도 해. 벚꽃도 짧게 피어서 더 아쉽고 아름다워 보이는 건지도. 우리 집 앞 광장의 벚꽃은 이제 제법 꽃잎이 날려. 꽃잎은 젖지 않는 눈 같아. 이 이야기를 하니까 눈부신 꽃비가 떠오르고 입가가 저절로 올라가. 이래저래 즐거워. 잘 잘 것 같아. 너도 잘 자.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마쓰오 바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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