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p.127

 

에르노식 애도일기라고 해야 할까. 딸을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 이야기다. 지식인 딸과 노동자 아버지로 바꿔 말하려니 너무 딱딱하게 느껴진다. 남자로서의 아버지보다 그냥 아버지 이야기 같아 아버지의 자리가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글이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게 없어서 좋다. 책을 덮으면 다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을까. 나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유학자 아버지와 서울대생 아들을 둔 노동자. 에르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충실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러나 달리 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돌아가셨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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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시(哭詩)—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_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 김명순(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에 시달리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이 실린 잡지들.

 

 

-문정희,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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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30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는 구절이 확 와닿습니다.
남성우월주의의 극단적인 예를 보는 듯 우울하고 슬픈 시네요.

이누아 2021-04-30 22:55   좋아요 0 | URL
발표된 지 좀 됐고, 내용도 충격적인데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성폭행 사건 관련해서는 최근에 와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아서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무척 많았지요. 이 일은 문단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한국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무겁게 읽히고요.

독서괭 2021-04-30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알게 된 작가네요. 찾아보니 <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나와있군요.
정말이지 너무 처참하고 가슴 아픈 일이네요..

이누아 2021-04-30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이 나와 있다는 걸 아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어요. 시만 읽어도 잘 잊어지지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무거운 말

_신미나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온다

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신미나,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 2021)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홍역을 앓고, 학교를 한 달 이상 가지 못했다. 홍역이 나았지만 소풍을 갈 수는 없었다. 엄마는 오빠를 따라가야 했다. 엄마는 오빠의 소풍 가방과 똑같이 내 소풍 가방을 싸 주셨다. 집에 있더라도 김밥과 과자를 맘껏 먹으라고. 홀로 남겨진 나는 집에만 있지 않고 밖에 나갔다. 아마도 누워 있다 바로 나가서 헝클어진 머리에, 옷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아이가 쟤, 거지 아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쳤다. 그 순간 나는 고아고, 거지였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다. 말은 이렇게 무겁고, 무섭다. 그런 말은 한 인간을 불태우는 성냥개비, 라이터, 가스통이 되기도 한다. 불붙은 얼굴은 재가 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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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만 죽 늘어놓고 나가려다 쓴다. 피곤할 때는 피곤하다고만 말해야지. 피로는 햇살 속에 조용히 떨어지는 벚꽃잎 같을 때도 있고, 막힌 변기 같을 때도 있다. 도수 낮은 안경을 쓴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안개가 감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피로는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온다. 나른하게도 오고, 묵직하게도 오고. 요며칠 저녁마다 몸살기가 돈다. 미리 준비한 한약을 한 봉 먹고 살아나서 남은 오늘을 겨우 마무리한다. 춘곤증 같은 피로다. 꽃과 미세먼지가 뒤섞인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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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잠꼬대-장하빈
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황인찬 외 
자라-문성해
내가 모르는 한 사람-문성해
나의 9월은 너의 3월-구현우
십일월을 만지다-이면우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박판식
우리의 죄는 야옹-길상호
마음챙김의 시-류시화 엮음
이상 시집-이상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이상/박상순 해설
이상 전집1-이상/권영민 해설
이상-이승훈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핍 윌리엄스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장-릭 낭시
일인칭 단수-무라카미 하루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다시-
현대시작법-오규원
얼음의 자서전-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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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_황인찬

 

 

표기에 오류가 있었어요

여기 표기가 표고라고 되어 있어요

 

사무실에서 선생님이 내게 말한다

 

이런, 정말 그렇군요

나는 표고를 표기로 고친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요?

선생님이 묻지만 나는 그냥 머리만 긁는다

 

역시 영혼일까요?

 

정오가 지나면 점심시간도 끝이 난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일해야 한다

 

나는 회사를 나와 오류동 집으로 돌아간다

 

-2021현대문학상 수상시집(현대문학, 2020), p.39.

 

    

    

사무실에 팀장님이나 과장님이 아니고 왜 선생님이 있을까? 아마도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려 드는 자일 것이다. 잘못 썼다니까 고치지만 나는 정말 잘못 쓴 것일까. 선생은 나의 오류가 내 영혼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나는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집은 온갖 선생들이 오류라고 부르는 마을에 있다. 그 마을에서 살겠다. 한 인간을 오류라고 하는 자를 증오한다.

 

증오하면서 이렇게 담담히 글을 쓸 수 있다니. 원인이 성별이든, 피부색이든, 정체성이든, 신념이든... 인간 존재를 오류라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그를 증오하리라. 그러나 선생 앞에서는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을 이해한다. 나의 모습이. 그런데 누구를 증오하기에 내 마음이 이 시를 맴도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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