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한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려고 두 달 동안 난리가 난 것처럼 시끄러웠어. 그래서 드러난 건 교육의 문제, 검찰의 문제, 언론의 문제 등이었지. 너무 거대해 보여서, 해결 불가능해 보여서, 파헤치면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워지는 게 거슬리는 이도 있어 파헤치면 묻고, 파헤치면 묻었던 일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묻을 수 있던 일들. 어둠에 가려진 그 허물을 비춘 불의 불쏘시개였던 사람이 오늘 사퇴를 했어.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도를 이루기도 그와 같다.’ 숫타니파타에 있던 구절이었던가? 이 말이 떠올라. 검찰을 개혁한다는 건 면도날을 밟는 것 같다는. 발에 피가 나도 밟을 수는 있는 거구나. 어쩌면 국민들이 신발이 되어 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 얼마간이었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건 언론 문제였어. 날마다 기사가 쏟아지고, 어제 단독이던 기사가 오늘 오보가 되는 걸 지켜봤으니까. 저번 달에 한 신문에서 기사를 냈는데 그 기사가 잘못되었다고 검찰이 확인해줬어. 명백한 오보였는데 정정 기사 대신 그 기사와 다른 의견이 있다는 식으로 딱 한 줄을 덧붙여 놓았더라. 누가 확인하겠어. 이미 잘못된 정보는 다 퍼진 다음인데.

 

어쨌든 이제 누군가는 불을 피우려 하고, 누군가는 불을 끄려 하겠지. 불에 불을 더해서 허물을 벗게 할 것인지, 불에 물을 더해서 없던 일처럼 꺼버릴 것인지 남은 일은 그 두 달을 지켜본 사람들의 몫이 되었어.

 

기슭아, 이상해. 아는 게 힘이라는데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늘어나고, 세상은 드러나면 날수록 무섭게 느껴져. 저녁이 오고 있어. 그러나저러나 또 밥을 하고, 저녁을 먹어야지. 조금 허전하네.

 

 

 

매스미디어-부드러운 살인

_박연준

 

안개에 빠져 죽은 여자

그 시신을 건져 올리기 위해

전 세계 포클레인 기사들이 출동했다

기자들은 신이 나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에선

30년 동안 자라고 있던 칼이 발견됐다

사람들은 그녀의 머릿속 근사한 어둠을

서로 뽑아 갖겠다고 아우성이었고

안개에 빠져 죽은 여자

죽은 후에도 나를 벗겨먹는군!

머리통을 통째로 뽑아 던졌다

개들이 달려가 물어뜯었다

목 위가 허전해진 여자,

점선으로 그려진 얼굴을 달고

비로소 잠이 들었다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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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

 

죽여서 처리한다니, 살처분이라는 말이 섬뜩해. 그 방법밖에 없다니 안타깝고 안타까워. 어느 해는 300만 마리가 넘게 살처분되었대. 그 과정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이 과로사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지.

 

오늘 기사에 보니 한 마을에서 천 마리 넘는 돼지를 묻었는데 그 악취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 남의 밭을 헤집은 적도 없는데, 사람을 죽인 일도 없는데, 그 돼지들은 병들었다고 죽어야 해. 그만큼 죽었는데 돼지를 기르던 사람만 불편하다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모른다는 말을 문장 끝에 자주 써. 모르고 싶은 것인지도 몰라. 안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이며, 안다면 얼마나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싶은. 아니, 그보다는 아예 모르고 싶은 것인지도.

 

어딘가 악취가 풍겨도 거기 안 살면 된다고, 거기 살면 시간이 지나면 된다고 여기는 걸까. 다 묻어버리자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도 있지. 그럴 수 없는 이도 있지. 묻으려는 사람과 파헤치려는 사람이 섞여 살아.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모르겠다는 말로 모른 척하고 싶은 사람일까. 모른 척하다가 정말 모르게 되는 사람일까. 약하다는 이유로 돼지처럼 학살되었던 사람들이 떠올라. 돼지에 관한 생각이 왜 하필 그 생각으로 이어질까?

 

기슭아, 이런 생각들이 불편해. 불편한 게 당연한데... 불편한 일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 우리 마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할까. 세상이 이웃처럼 가까워졌는데...

 

 

 

그냥 꽃이나 심을까

_박소유

 

끝은 늘 흐리다

수백여 마리에서 수천여 마리, 아무도

끝까지 세어주지 않았다

 

뒷걸음질 몇 번 쳐보기도 했겠지만

어찌해 볼 도리 없이 따라가던

뒷모습

 

한해살이풀들은 몸이나 가볍지

눈 감으면 사라질 길이

오래 무거웠겠다

그 발자국

 

입만 벙긋하면 튀어나오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 금수 같은 강산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무는 자라고

꽃은 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을 텐데

귀에 들리는 건 우우, 바람 소리뿐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그냥 꽃이나 심을까

 

비 온 뒤

흙탕물 가라앉은 물웅덩이는 왜 이리 맑은가

그 맑은 눈동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냥 속아줄까 생이여

 

*201412월 충북 진천군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20154월 말까지 3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가축 173000여 마리가 살처분됐다.

    

-박소유,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시인동네, 2019),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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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4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저도 살처분이라는 말에 상상되는 장면이 있는데 키운 이들, 살처분을 직접 수행해야 했던 분들은 얼마나 오래 충격이실까요.
대안을 마련못하는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참 무력하고 무능합니다.

이누아 2019-10-14 18:11   좋아요 0 | URL
돼지들은 울 새도 없었을 거예요. 뭐가 뭔지 모르는 채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겠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땅 속에서 울고 있는 걸까요? 그 울음을 악취라고 부르고, 덮으려고 애를 쓰지요. 아주 오랫동안 악취가 나서 그 악취를 없애는 탈취제를 쓴다고 해요. 덮고, 덮은 것을 또 덮고. 살려고 죽여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2019-10-14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이누아 >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2005년에 쓴 리뷰-산에는 꽃이 피네

 

 

2005년이면 법정 스님이 살아계실 때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다. 이제 이 세상에 계시던 스님은 안 계시고 없었던 아이들이 있다. 인생에 가장 격렬한 체험인 생과 사가 멀리서 보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네, 또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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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노트북이 서비스센터를 다녀왔어. 사용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닫으려고 하면 모니터 케이스 부분이 갈라져 부서질 것 같았거든. 전에도 이래서 수리한 적이 있는데 또 이러네. 이렇게 전자 제품이 문제가 생기면 난 항상 수리 기사께 여쭤봐.

 

제가 사용할 때 부주의한 부분이 있나요?”

 

전자 압력밥솥이 고장 났을 때도, 로봇청소기 센서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노트북 CD롬이 열리지 않을 때도 물었어. 그때마다 기사의 대답은 한결같아.

 

아뇨, 고객님이 어떻게 사용하시든 전자 제품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자꾸 내가 뭘 잘못해서 물건에 문제가 생기는 것만 같고, 내가 뭘 잘못했어야 다음에 그 잘못을 안 해서 제품을 오래오래 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매번 같은 질문을 하게 돼. 답은 쓰던 대로 그냥 쓰면 된다는 건데.

 

전자 제품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생활에서 생기는 문제도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생기는 일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 그런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미신과 기복이 끼어들 여지가 생기는 게 아닐까.

 

몇 달 전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제사를 오빠가 지내게 된 것 때문에 사고가 생긴 건 아닌지 생각하시더라고. 나는 그 제사를 지낼 사람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다면 문제가 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정말 제사 때문에 사고가 난 거라면 난 아버지한테 따져야겠다고 말씀드렸어. 그제야 엄만 웃으시더라고.

 

우리 엄마만 그런 게 아냐. 습관 같아. 무언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내게 무슨 잘못이 있나, 돌아보게 돼. 특히 아이들에게 그래. 아이가 아플 수 있는데, 아이가 아프면 내가 마음을 덜 썼나, 다른 데 집중하고 있었나, 돌아보는 거야. 사람은 누구나 아프기 마련이고, 비를 맞고도 좋다고 뛰어노는 아이는 더욱 그러기 쉬운 건데.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큰애 때문에 마음을 많이 썼어. 그때 아이들이 쌍둥이여서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 태교를 달리할 수 없는 상황인데 태어나자마자 둘이 이렇게 다르니 이건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라면 유전자의 문제이지, 내 태도의 문제는 아니다, 라고. 그러니까 결국 내가 뭘 잘못했는지 여러 번 돌아봤다는 말이지.

 

엄마나 나나 자신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어. 어찌 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이나 존재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지도.

 

흔히 원인을 알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깊고 깊은 원인 따위가 없는 문제가 더 많을 수도 있겠다 싶어. 물론 모든 경우는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에 문제에만 집중해서 해결하는 게 단순하고 덜 피로하게 지내는 법일 지도.

 

 

 

나도 안타깝다 대답 없이

_페르난도 페소아

 

 

나도 안타깝다 대답 없이.

하지만 결국 내 잘못은 아니지

네가 사랑한 내 안의 딴사람에게

내가 부응하지 못하는 게.

 

우리 각자는 모두 여러 사람이지.

내게 난 내가 생각하는 나,

남들에게는-각자 느끼는 대로

판단하겠지, 그리고 그건 엄청난 착오지.

 

, 다들 날 좀 조용히 내버려둬,

날 꿈꾸지도, 딴사람으로 만들지도 말아.

나도 나를 찾고 싶지 않다는데,

남들이 나를 찾길 원하겠어?

(1930.8.26.)

 

-페르난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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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가 내린다. 내일 놀러 가는데 이 비가 내게 방해가 될까, 나를 시원하게 신 나게 할까. 무심한 비를 두고 이익을 헤아리는 건 오래된 습성 같은 것. 비 때문이 아닌데 비 때문인 척 가라앉는 마음을 물방울처럼 떨어뜨려 보는 것. 빗소리는 더 크게 들리는데 창문 안쪽에서는 무엇이든 생각해도 되지. 그렇지만 난 곧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 무슨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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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내리는 비는 유독 빨간 날을 좋아하네요... ^^;;

2019-10-0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