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엄마 맞아? (반양장) - 웃기는 연극 움직씨 만화방 1
앨리슨 벡델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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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당신 엄마 맞아?: 웃기는 연극>이다. 웃기는 연극의 의미를 모르겠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회고록 형식이지만 <펀홈>은 20대 초반까지, <당신 엄마 맞아?>는 그후의 작가의 회고록 같다. 그림 색도, 내용도 전편보다 무거운 느낌이다.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눅눅한 지하실을 수리하다가 실수로 나오는 길을 막아 버렸다. 두려웠다. 거미줄 친 작은 창문을 비집고 나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개울을 따라 걸으며 건널 만한 길을 찾아본다.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있다. 물은 깊고 탁하다. 날씨는 따뜻하다. 몸에 걸친 것 중 젖으면 안 될 것은 없다. 물이 더러운 게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그렇다고 물속에 온몸을 내맡기는 느낌이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니다. - P8

성인이 된 이래 나는 거의 항상 심리 치료를 받아 왔지만, 엄마에 대한 강렬한 감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지금의 상담사 캐롤을 만난 지는 십 년째다.

제 인생은 엉망진창이에요. 안정된 연애를 못한 지 팔 년이 됐고... 자꾸 다른 사람에게 끌리곤 해요. 아버지의 자살을 다룬 회고록을 쓰고 있는데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두 문장씩 지워요. 늘 망할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마치 두 다리가 묶인 것처럼 말이죠. 아닐 수도. 제가 다 꾸며 낸 생각인지도 모르죠. 모르겠어요! - P24

모든 것이 단조로워요. 어떤 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고 욕구도 잃었어요. 모두에 대해서요. 인생이...고단한 노력을 지속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 P57

나는 벽장 뒤쪽이나 식당 구석에 몸을 숨기고 그림을 그렸다. 보이지 않고 침범당하지도 않는다는 감각은 일종의 환희였다. 위니캇은 ‘존재의 지속‘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모든 아기, 실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오로지 방해받지 않고 존재를 지속하는 것뿐이라는 개념이다. - P136

엄마의 반응에 기가 질렸다. 아버지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보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엄마를 더 괴롭힌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엄마의 거부감이 향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것도 알았다. - P188

우는 것을 들키지 않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묵하다가 나는 별안간 뭔가를 선명하게 깨달았다. 내가 엄마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다만 엄마에게 있지 않을 뿐이었다.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걸 엄마로부터 끌어내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은 아니다. 엄마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걸 내게 줬다. - P234

엄마를 실망시킨 것 같았죠. 엄마는 온갖 요구에 시달렸고...엄마가 제가 요구한 단 하나는 제가 엄마한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거였으니까요."

*엄마가 제가 요구한->엄마가 제게 요구한
마침표 뒤에 따옴표는 없어야 한다. - P266

배를 발로 걷어 차인 기분이었다. 나는 우리가 정말 사소한 스킨십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 순간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 아주 잠깐이라도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압력으로 감싸이는 기분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 P277

로시 갤러거가 쓴 글이야. ‘작가의 일은 혼란스러운 인생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자신의 이야기에 복무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가족도, 진실도 아닌 이야기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그래, 가족 따윈 얼어죽을! 이야기에 복무해야 하는 거야.

서점 직원한테 내 딸의 책이 곧 나온다고 말해 뒀다. 무슨 내용인지 묻기에 "내 얘기!"라고 말했지. - P290

엄마의 배우 생활을 떠올리면 우리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인물을 연기하는 대신, 나 자신을 연기할 뿐이다. 안다. 엄마는 내가 당신 자신에 관한 책을 안 쓰길 바란다. 아이러니한 것은 만약 엄마가 창조성의 위험을 감수하는 본보기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 글을 쓰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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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04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읽고, 이누아님이 제목으로 뽑으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두었어요. 작가가 그렇게까지 갈등하고 고민하고 끝까지 찾고 싶어했던 답을 명시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준것 같기도 하고, 또 어머니와의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는 점에서.... 전 정말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누아 2020-06-04 20:19   좋아요 0 | URL
피터 엘보의 <힘 있는 글쓰기>에 ˝사람들이 진짜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힘에서 달아나기 위해서다. 원래대로 강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에는 뭔가 무시무시한 면이 있다. 그것은 훨씬 더 큰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책을 읽을 때 그 구절이 생각났어요. 진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예요. 말씀대로 대단해요.
 

 쓸모없는 이야기

 

 

지금 나는 카페에 와 있어. 코로나19 때문에 편안한 곳이 없지만 오늘은 여기 와 있어. 방금 카운터에 가서 따뜻한 물을 가지고 왔어. 여기 있는 사람 거의 다 아이스커피나 차가운 주스를 마시고 있어. 따뜻한 커피를 마셨는데도 나만 추운 것 같아. 모두 뜨거운가 봐. 펄펄 끓나 봐. 컴퓨터와 책을 앞에 두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들 사이 이렇게 일없이 네게 편지를 써.

 

대학 때 절에 가서 몇 달을 지냈어. 선방 스님들 봉양하는 허드렛일을 했는데 보통 그렇게 절에서 지내면 고기가 먹고 싶다거나 짜장면이 먹고 싶다거나 주로 먹는 게 생각이 많이 난다는데 나는 그때 커피숍이 생각났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떠들던 공간,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 괜스레 죽치고 앉아 있던 곳. 어릴 때 숙제했던 기억보다 장난쳤던 기억이 더 잘 나듯이 쓸모없이 즐거웠던 게 가장 그리운 걸까.

 

까페에 앉아 있으면 이곳이 내가 그리워하던 곳이라는 게 떠올라. 그래서 더 흡족해져.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건 기쁨이 섞여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도서관에서 콜레트의 소설을 빌려 왔어. 어제는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의 콜레트(2018)*를 봤어. 앨리슨 벡델의 펀 홈(움직씨, 2017)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라서 찾아봤거든. 다른 책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먼저 내 손에 들어온 것부터 읽고 있어.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 와도 되고 안 와도 되는 까페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음악에 젖어 있어.

 

비 소식은 없지만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야. 미리 장을 봐두길 잘했어. 밥솥도 예약 버튼을 누르고 왔어. 여기 좀 더 앉아 있겠다고. 조금 후엔 갈치를 굽고 멍게를 씻고 있겠지. 예보와 달리 비가 올지도 모르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쓸모없는 이야기

_진은영

 

 

종이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쓸모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_진은영,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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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6-0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레트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펀 홈>을 읽어봐야겠어요. ^^

이누아 2020-06-03 08:34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작가예요. 천천히 알아가려구요.^^

서니데이 2020-06-04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카페에선 좋은시간 보내고 오셨나요.
시간 있을 때 카페에 가서 책 읽고 시간 보내는 것도 하고 싶은데,
요즘엔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조금 아쉬워져요.
며칠 사이에 날씨가 많이 더워졌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이누아 2020-06-04 20:23   좋아요 1 | URL
예. 시절이 이래서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면 조심해야 해서 자주 가긴 어렵지만 날이 더워지면 더 가고 싶어져요. 그래도 자제해야겠죠.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오은영의 화해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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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다. 당연한 말을 듣고 또 들어야 겨우 내게 당연해진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 육아서를 화장실에 두고 읽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마음이 좀 부드러워졌다. 육아야말로 끊임없는 격려가 필요하다. 요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 화내고 협박하는 시간이 지나면 자책의 시간이 온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에 이 책을 읽었다. 읽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역할로만 인정받는 그런 작은 존재가 아닙니다. - P95

‘해야 한다‘에 몰두하다가 정작 ‘아이‘를 놓칩니다. - P124

인생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되, 문제가 생기면 극복해 나가면 됩니다. 극복한다는 것은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하지 않고 끝까지 겪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겪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장담할 수 없는 너무 먼 미래는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오늘을 살면 됩니다. 예상할 수 있는 오늘을 살고, 또 오늘을 살고, 또 오늘을 살면 그게 인생을 잘 겪어 내고 있는 거예요. - P158

아이 앞에서 화내지 마세요. 쉽게 "순간 욱해서 그랬어"라고 말하지 마세요. 욱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는 변명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잠깐의 욱이고 화였는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이 됩니다. 아이는 살면서 그럴 때가 가장 힘이 듭니다. 상처가 돼요. - P204

부모에게는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육아는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편안한 육아예요. 육아 앞에서 너무 비장해지지 마세요. 괜찮아요. 그 정도로 하늘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잘못되지 않습니다. - P230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뭘까요? 이 아이의 인생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와 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내 아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P251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용서보다는 반성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묻는다면 "원래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은 없어요."라고 대답할게요.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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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 홈 : 가족 희비극 (페이퍼백) 움직씨 만화방 2
앨리슨 벡델 지음, 이현 옮김 / 움직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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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님의 페이퍼를 보고 읽었다. 읽고 나서 저자의 다른 만화와 이 책에 나오는 소설 몇 권도 주문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그릴 수 있다니 멋지다. 책 내용과 관계없지만 마지막 페이지에서 본 책임편집자 이름이 기억에 남는다. 나낮잠이다. 기분좋게 웃었다.  

사실 이 집의 정교한 빅토리안 인테리어 자체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 P26

사고사든 자살이든, 어느 모로 보나 ‘어리석은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있어. 나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이젠 영영 진흙 속에 갇힌 거야. - P60

프루스트가 소설 전체에 걸쳐 장치한 메타포가 있다. 화자의 가족이 산책할 때 갈 수 있는 두 갈래의 길, 스완네 집 방향과 게르망트 방향이다. 두 길은 처음에 서로 대조적인 것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부르주아 대 귀족, 동성애 대 이성애, 도시 대 시골, 에로스 대 예술, 은밀함 대 공공연함. 한데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두 갈래 길이 실제로는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밝혀낸다. 길은 처음부터 크고 넓은 ‘횡단선의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 P108

또 다른 사진에선 스물 두 살의 아버지가 방수포를 깐 학생회관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사진 찍어 준 남자는 아버지의 애인이었을까? 내 스물한 번째 생일날 건물 비상구 앞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준 여자가 내 애인이었던 것처럼? 건물 외부라는 배경, 가슴 저미는 미소, 구부린 손목, 심지어 얼굴에 드리운 그늘 각도까지. 아빠와 내 사진은 마치 잘 옮긴 번역문처럼 꼭 닮았다. - P126

주님의 뜻 따윈 없어요! 아버진 조울증 걸린 벽장 게이고요, 요 지긋지긋한 마을을 일분일초도 더 참을 수 없어서 자살한 거라고요! - P131

또 하나, 내 상상이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벽장‘ 밖으로 나왔다면, 그래서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될까? - P203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율리시스> 소식에 반색해서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도 아버지 관심을 받는 건 반가웠다. 간접적인 관심이라곤 해도 그리웠던 것이다. 나도.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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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01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제 페이퍼 보시고 이 책을 찾아읽으셨다니 반가운 마음입니다.
저는 <당신 엄마 맞아>도 좋았어요. 그림이 주는 힘이 큰 책이라 생각했는데, 올려주신 문장만 읽어도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네요. 읽었는데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에요. 다른 책 리뷰도 기대하고 있을께요^^

이누아 2020-06-02 15:40   좋아요 0 | URL
작은 방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아요. 책을 읽고 싶게 하는 책이에요. <당신 엄마 맞아>와 프루스트는 내일쯤 도착할 것 같고, 도서관에서 콜레트의 책도 빌려 왔어요. 다 읽을 수 있겠죠. 언젠가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리뷰는 잘 안 쓰는 편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뭔지도 모르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졸아본 적 있어? 나는 졸고 있어. 커피를 더 마시기에도, 잠을 자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야. 잠을 깨려고 자판을 두드려. 곧 저녁이 오고, 나는 저녁에 할 일이 있거든. 그리고 잠들 수 없는 밤은 너무 많은 것을 데려와 놀자고 해. 그게 놀자고 하는 걸까?

 

그저께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기억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거야. 어릴 때 다리를 건너고 싶은데 겁이 나서 다리 앞에서 번번이 돌아섰어. 학교가 다리 너머에 있어서 입학하면서 그 다리를 건넜어. 오빠가 오빠 친구와 나란히 걸으면 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어. 오빠 가방만 쳐다보면서. 아버지가 양복을 입는 거야. 배에 복수가 찼는데도 양복이 맞네. 달성공원에 가자고 하시더니 양복을 입은 채 앉아 있다가 그냥 벗으시는 거야. 그런 기억들이 화산재처럼 나를 덮었어.

 

근데 기슭아, 그건 내 기억 속에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내 기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서 가던 오빠가 자기 가방을 볼 수도 없는 거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해줄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게 꿈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엄마 등에 업혀 있는데 엄마가 머리에 이고 가던 달걀을 쏟아 다 깨버린 장면이 가끔 떠올랐어. 얘기했더니 엄마가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대. 내가 돌 지나기 전에. 오랫동안 난 그걸 꿈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꿈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모두 혼잣말이야. 기억도 꿈도 어쩌면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들도. 요즘 이야기할 때 그런 느낌이 들어. 혼잣말 같은. 친구는 친구 혼자 말하고, 나는 나대로 말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어. 모르는 게 이것뿐이겠어. 그래도 졸음은 다 사라졌네.

 

햇볕은 좀 진해졌는데 아직 바람은 선선해. 여름이 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올여름이 무척 더울 거라고 해. 예보가 틀렸으면 좋겠어.

 

 

 

나무를 모르는 나무

_황성희

 

 

바람이 몹시 분다.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서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았다.

 

저 멀리 벌판 끝으로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들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반짝반짝 글썽인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무는 생각하는 법도 모르면서

제목도 모르는 책 앞에서 턱을 괸다.

 

위층 어딘가에서

웅얼웅얼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익숙해질 거야.

살아서 잠드는 일에 대해

살아서 깨어나는 일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벌판의 낯선 태양과

살아서 마주치는 일에 대해.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두려움 없이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아온 것처럼.

 

눈동자들은 벌판의 끝으로 굴러가 있고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반짝반짝 글썽인다.

 

-황성희, 앨리스네 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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