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뭘 시킨 적이 없는데 택배가 왔어. 보듬TV 구독자 100만 기념 이벤트에 당첨돼서 선물로 컵을 받았어. 100만 명이 구독하는데 준비된 선물이 100개라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추첨이 되다니! 이런 일이 내게도 생기는구나.

 

보듬TV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강형욱 반려견 훈련사가 대표로 있는 보듬 컴퍼니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야. 반려견도 없으면서 그 프로그램을 빠지지 않고 봤어. 방송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으로 옮겨져서 요즘은 재방송으로 보고 있고.

 

기질이라는 게 있어서 그 기질을 다 무시할 순 없지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개가 놀랄 정도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야. 강형욱 훈련사가 마법처럼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그분에 대해 궁금해져서 찾아봤더니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어.

   

중학생 때부터 훈련사 일을 배우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가서 학교 가는 시간을 줄여 훈련사 일을 계속하고, 제대하고 막일을 해서 번 돈으로 외국 훈련소에서 공부를 하고...타고 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때 우리에게도 저런 열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분처럼 강렬하고 끈기 있진 못했지만.

 

나는 깨닫고 싶었어.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살아지는 대로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계획하고, 염려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감내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마 널 만나기 전후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야.

 

낯선 절에 가서 지내기도 하고, 깨달은 분 이야기를 들으면 외국까지는 못 가도 외국에서 온 분들을 뵈려고 부산으로 서울로 가곤 했어. 근데 강연을 들으면 이상하게 끌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라서 내 뜻대로 했어.

 

요즘은 깨달음 같은 말을 멀리하고 있어. 담담하고 싶을 뿐이야. 아이들이 다투면 명상을 시켜. 3분에서 길어야 10분이지만 그 시간이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어. 그냥 생활이 있어.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나를 담담하게 해줘서 좌선이 좋아. 그걸로 충분해. 꼭 해야 하고, 되어야 하는 게 있다면 정말 피곤할 것 같아. 내가 너무 지쳐 있는 걸까.

 

그러나저러나 내가 추첨에 당첨되다니! 강형욱 훈련사가 키우는 개 중에 첼시라는 개가 있어. 그 개 그림이 그려진 컵이야. 손가락을 다쳐 병원에 다녀오고, 침까지 맞은 작은애에게 주기로 했어. 큰애와 엉겨 있다 손가락을 다친 터라 큰애도 양보했어. 작은애가 오늘 많이 울었는데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덩달아 나도 좀 나아졌고. 기분이란 게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그렇지?

 

 

 

_김기택

 

 

먹을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개는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고

내 몸 뒤 끝없이 먼 곳을

철망과 담 산과 구름과 하늘

먹을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뚫고

아득하고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깨끗하다

고막이 제거된 개의 눈 속에서

먹은 것은 남김없이 영양분이 된

영양분은 남김없이 살이 된

살은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된

개의 눈 속에서

生老病死를 넘어 어디에선가

먹을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개의 눈 속에서

  

-김기택, 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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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기분일 때

 

 

 

비가 와. 비가 와서 나는 좀 서늘한데 아이들은 속옷만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고 있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른 온도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아이들이 종일 컴퓨터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오전엔 학교 온라인 수업을 듣고, 오후엔 영어 학원 온라인 수업을 듣거든. 그 시간을 빼면 주로 다투는 데 힘을 써서 웬만하면 나가게 해. 마스크를 하고 자전거를 타. 어제는 작은애 자전거를 새로 샀어.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비가 온다고 아침부터 툴툴거리네.

 

큰애랑 장난을 치는 건지 싸우는 건지 뭔가 점점 격렬해지는 것 같아 그만두라고 말하는 찰나, 작은애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손가락이 부러진 것 같다며. 얼음찜질해 주고 병원에 가자니까 조금만 더 있어 보자고 안 가려고 하네. 창밖에 비가 있든 해가 있든 아이들은 불타오르고 있어. 찬물을 끼얹어 봐도 다시 살아나고, 살아나는 불덩어리. 살아나서 힘들고, 살아나서 다행이고. 손가락도 얼른 살아나서 막 움직이면 좋겠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먹어도 체중은 조금씩 빠지고 있어. 집에 있어도 평소보다 열량을 더 많이 태워야 할 정도로 몸이 뭔가 열심히 하는 걸까. 아니면 몸은 서늘해도 마음에 불덩이가 있는 걸까. 밖에 나가서 식히고 와야 할까. 얘기하는 사이 큰애는 벌써 나가고 없네. 나도 잠시 나가고 싶어. 엄마라는 자리에서.

 

 

 

불참

_김경미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미안하다 오후 여섯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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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코로나19 때문에 종일 아이들과 있으니 시간을 내어 책 읽기가 쉽지 않아. 어제는 산책하다 앉아서 책을 좀 봤는데 집에서 보는 것보다 잘 읽혔어. 요즘은 자기 전에 유튜브 채널에서 책 읽어 주는 걸 들어. 서문과 1장만 주로 읽어주는데 듣다 보면 그 책을 마저 읽고 싶어져.

 

우리 애들이 어릴 때 나는 매일 책을 읽어줬어. 그렇지만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나에게 책을 읽어주진 않았어. 당시엔 그런 문화가 없었던 것 같아. 그런 문화가 있었다면 부모님이 아니라 언니들이 읽어줬을 거야. 작은언니가 자기 전에 소리 내어 시를 읽긴 했는데 나를 위해 읽어 줬다기보다 언니가 읽는 걸 내가 함께 듣는 정도였어.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준 건 큰언니가 처음이었어.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이상 남았는데 쌍둥이 형제가 내 자궁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지. 출산일을 늦추려고 이완제를 맞으2주는 분만 대기실에서, 2주는 병실에서 지냈어. 일찍 출산하면 아이들의 폐와 심장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했어. 분만 대기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물도 마실 수 없었고, 초기엔 화장실도 갈 수 없었어. 그냥 똑바로 누워 있어야 했어.

 

큰언니가 자주 병원에 왔어. 하루는 병원에서 빌렸다며 책을 읽어 줬어.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였어. 커튼으로 만든 비좁은 공간에서 언니가 책을 읽어주던 모습이 그림처럼 남아 있어. 차갑고 꽉 닫힌 침대에 햇살이 비치는 느낌이었어. 기슭아, 사람이 햇살이 될 수 있어. 따스한 책이 될 수 있어. 평화로운 그 장면처럼, 담담한 에세이처럼 별 탈 없이 아이들이 태어났어.

 

대신 내 심장에 문제가 생겼어. 이완제를 너무 많이 썼던 탓일까? 그래도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장면이 다르게 기억될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이 아팠다 해도 그 상황에서 또 최선을 다했을 것 같아. 아마 언니가 책을 읽어주던 그 순간은 지금처럼 마음의 벽에 따스하게 걸려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 이전과 이후가 어떻든지 순간은 그 순간으로만 존재해. 나도 언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만히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고 싶어져. 순간과 순간으로 채워진 책을 말이야.

 

 

 

_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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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슬픔을 뭐라 할까

 

 

낮잠을 잤어. 꿈을 꿨어. 우리 4남매가 다 함께 안방에 있는 꿈이었어. 꿈 밖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작은언니가 목욕을 하겠다고 하는 것만 생각이 나고, 다른 내용은 기억이 안 나. 잠에서 깨고 나서 내가 예전보다 작은언니 생각을 훨씬 덜 하고 지낸다는 걸 알았어. 몸이 아플 때 오래 앓았던 언니 생각을 많이 했는데 내가 요즘 살 만한가 봐.

 

짧은 꿈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보고 나니 마음이 울컥해. 언니는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어.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떠났으니 시간이 많이 흘렀지. 그런데도 생각하면 왜 그때 그 마음이 되는 걸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요라는 영화가 있었지? 영화 이전에 인간극장에 주인공 노부부가 나왔었어. 그때 할머니가 여섯 살짜리 내복을 사는 거야. 도대체 누구에게 주려는 걸까, 했는데 여섯 살에 죽은 딸에게 그 내복을 태워주셨어. 잃은 지 60년이 지난 딸을 위해 내복을 사셨던 거지. 나도 팔십이 넘어도 언니가 떠났던 그 날 밤을 걷고 있을까.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사라진 과거가 오늘과 함께 숨을 쉬고, 경험하지 않은 미래가 지금을 좌지우지하기도 해. 너는 어딘가에서 잘 지내겠지만 어쩌면 지금의 내게는 존재하지 않잖아. 그런데도 너를 떠올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편해. 말을 건넬 때마다 과거의 네가, 지금은 내 앞에 없는 네가 나에게 살아나듯이 언니도 그렇게 살아날 때가 있어.

 

밖이 어둡네. 벌써 10시다. 작은언니는 불면증을 앓았어. 나와 함께 잘 때 언니는 불을 껐다가 내가 잠들면 다시 불을 켜고 새벽까지 깨어 있었어. 자다 눈을 뜨면 늘 방이 환했어. 피로한 불빛이었어. 언니는 깊은 어둠을 지니고 살았던 걸까. 자기 어둠이 너무 짙어서 밖의 어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낮잠을 자도 밤잠이 걱정 없는 나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살다가 언니는 더 먼 세계로 가버렸어. 작은언니를 생각해

 

 

 

미리 귀신

_김혜순

 

 

눈에서는 무엇이 나올까

나를 사랑하는 눈물 말고

 

눈동자는 무슨 맛이 날까

영혼의 맛이 이럴까

 

눈에서 나오는 빛을 빛이라 할 수 있을까. 눈에서 나왔다고 몸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눈빛은 미리 귀신일까. 아빠 가고 석 달 열흘을 울고 방문을 연 엄마의 눈빛을 뭐라 할까. 280일간 검은 물에 떠 있다가 생전 처음 컬러로 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내 딸의 눈에서 나오던 빛은 뭘까

 

우리는 영혼의 뒤꿈치로 보는 걸까

우리는 선 채로 꾸는 꿈일까

 

식기 전에 먹자면서 

생물의 시신을 나누는

가족의 눈에서 나오는

빛은 무얼까

 

바닥에 쏟아진

두 모금의 물이

되쏘는 빛은 뭘까

 

문 닫은 창 앞에서 서성거리는

별의 눈빛은 어떨까

 

죽은 다음에도 보는 일을 쉬지 않는

저 슬픔을 뭐라 할까

 

-김혜순,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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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기슭아, 두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 벌써 3월 마지막 날이야. 집 앞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해가 드는 곳에 있는 벚꽃은 꽃눈이 되어 흩날리고 있어. 그런데도 시간이 빠르게 달리는 것 같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 겨우 걸음을 뗀 아기가 마스크를 하고 나무 아래 서 있는데 그 모습을 아기 아빠가 찍고 있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생에는 고단함이 있어서 벚나무도 겨울을 견디느라고, 꽃을 피우느라고 애썼겠다. 다행히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와 무관하게 제자리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어. 덕분에 거리가 환해졌어. 그런 무심한 한결같음이 비상한 삶을 일상으로 만드는 힘이 아닐까.

 

우리도 벚꽃 나무의 벚꽃 같겠지. 필 때가 되면 피고, 질 때가 되면 지겠지. 홀로 여름을 맞는 꽃이 없듯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벚꽃 하나가 지면 그 나무의 꽃들이 떨어질 거라는 걸 알 수 있듯 작은 방에 앉아 있어도 전 세계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요즘 세계 주요 도시들의 하늘이 맑아졌다고 해.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먼지였나 봐. 먼지 같은 우리가 지구에서 너무 주인 행세를 하며 지냈던 건 아닐까.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이후 아이들과 집에 머무는 시간에 제법 적응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좀 답답해. 답답할 수도 있지. 평온하지 않은 기분이 일어날 때 따라오는 낭패감을 툭, 털어버리려 해. 벚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 먼지가 일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시간이 오고 가는 것처럼 내 기분도 그저 오고 가는 거겠지.

 

 

 

모순1

_조은

 

 

삶의 갈래

그 갈래 속의 수렁

무수하다

 

손과 발은 열 길을 달려가고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덤불은

수만 길로 뻗는다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 진창에서는

바글바글 애벌레가 기어오른다

 

봄꽃들 탈골한 길로

단풍 길 쏟아진다

 

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내 몫이 아닌 흙이여

 

-조은, 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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