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개학한 후로 거의 책을 못 읽었다. 컴퓨터도 오랜만이다. 개학하면 시간이 날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 가서 방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도 않는데 더 바쁜 느낌이다. 왤까?

 

8월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막스 피가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 2010)였다. 말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된 느낌이랄까? 책을 빌려 읽는 중에 주문했다. 그랬으면 다시 읽어야 하는데 리뷰도 못 썼다. 8월에는 몇 권 안 읽었지만 읽은 책이 거의 다 마음에 든다.

 

비 온다. 갑자기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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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A

_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다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긋는다는 것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정이 있다 긍정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하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변희수,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시인동네, 2020)

 

 

한 서재지인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사람의 이야기. 몇 번이나 그 서재를 서성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담담히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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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로 시집을 영 덜 읽는다. 읽어도 건성건성 읽게 된다. 시가 짧아서 바쁠 때 읽기 좋다지만 시집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라야 시에 집중이 된다. 산문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읽을 수 있는데 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그 탓인지 산문을 좀 더 읽게 되었다. 2학기에는 전일 등교를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한 번에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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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색깔을 정말로 결정하려고 해 보라. 한 사람의 백인은 하얀색인가? 확실히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광대의 하얀색뿐인데, 머리에 분칠을 한 이 광대는 크고 빨간 코를 주요 속성으로 하는 동료 오귀스트에 비해 약간 어리석은 양식을 재현한다. 실제로 무한히 많은 등급을 거쳐 지나가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가상의 흑인보다 창백한 누군가를 '백인'이라고 부른다. 이때 몇몇 스웨덴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사람들 몇몇을 거쳐서 모리타니 사람들을 살펴 보자. 다른 한편으로 어떤 타밀 사람은 분명 여러 '검은' 아프리카인보다 피부색이 짙지만, 이들을 흑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많은 아프리카인의 피부색이 짙은 편이지만 검다고 말할 수 없고, 많은 유럽인이 백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저 노란색이라고만 간주되는 아시아인들(그런데 누구의 피부가 노란색인가? 간염 환자?)은 대체로 많은 수의 남유럽 사람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보이며, 검은 물감이나 석탄 조각과 비교할 경우 가장 피부색이 짙은 사람도 곧바로 검은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략-

인간 동물의 가장 객관적인 표시는 어떠한 색깔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동물이 검은색일 수 없고, 정말로 검은색일 수 없는 만큼이나 흰색일 수도 없으며, 하물며 노란색이나 붉은색일 수 없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 [검은색](민음사, 2020), pp.124-125.

 

 

주로 주체와 타자의 논리에서 이분법이 대등한 A와 B의 관계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나머지 세상만 묘사한다. 나는 백인 문화가 다른 인종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은 색깔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유색 인종(color of people)'이라 부르는 것을 비판한다. 한편 구한말 조선 사람들도 갑자기 나타난 서양인을 보고 자신의 몸과 다른 점을 기준 삼아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렀다. 검은 눈동자도 분명히 색깔이므로 이 단어는 인종 차별적이다. '유색 인종'과 '색목인'의 사회적, 언어적 지위는 같지 않지만 구성 원리는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지위는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가 정해지면, 자신과 외부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인식의 절차이자 과정이다.

 

 -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pp.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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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1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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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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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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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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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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