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드는 사람들

 

 

우리 동 앞 인도(人道)가 좀 꺼져서 벌써 며칠 전부터 그쪽 길이 통제되었어.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우연히 아래를 봤더니 네 명이 거기서 일하고 있었어. 한 사람은 모래와 시멘트 포대를 나르고, 또 한 사람은 모래와 시멘트를 바닥에 섞어 깔고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정사각형의 큰 타일을 공사 공간에 딱 맞게 만들려고 길이를 재고, 타일을 자르고 있었어. 그리고 또 한 사람 있었지. 이분은 일하는 걸 보고 있었어.

 

집안일을 하고... 다시 창문을 내다보니 금방 다할 것 같았는데 아직 4분의 1도 못했어. 며칠 전에 시멘트로 길은 다 정리하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붓고 타일을 까는 작업을 하는 건데 이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 줄 몰랐어. 쉬지 않고 일하고 있어.

 

내가 밟고 다니는 길이 다 저렇게 만들어졌다니 새삼 놀라워. 돈이면 길도 건물도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돈이 만드는 게 아니고 사람이 만드는 거였어. 기계가 사람 일을 다 하는 세상이 온다지만 많은 사람이 개미처럼 일하고 있어. 개미는 잘 안 보이잖아. 길을 만들고, 물건을 배달하고, 생선을 손질하고...

 

직접 본다는 게 아주 다른 느낌이야. 환경미화원이 새벽에 나와 길을 치우고 우리는 무감각하게 그 거리를 더럽히지. 우리가 직접 치우거나 미화원이 일하는 모습을 본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적어도 지금 공사하는 길을 걸을 때는 이 사람들이 생각날 것 같아. 어디에나 무엇에나 사람이 있어. 이제 점심하러 가셨네.

 

 

 

야간 도로 공사

 _김경후

 

  

오랫동안 짓밟힐 길을 깔기 위해

오랫동안 짓밟힌 길을 파낸다

 

이 길에서 나는 몇 글자나 바꾸었나

열대야 두시

이 길에서

 

팔월의 부글대는 검은 타르와 역청

부글대는 증기와 거품

아무리 많은 글자를 바꿔도

열대야 두시

이 길에서

 

후진하고 또 후진하는

파내고 또 깔리는

오랫동안 짓밟히고 짓밟힐 자들

오랫동안 짓밟힐 글자들 글자들

 

이 길엔 이길 수 없어, 아무것도

 

이 길에선 말이지

바꿀 게 없어, 한 글자도, 이 길에선

언제나 야간 도로 공사 중

 

눈부신 타워라이트

롤러차가 뜨겁고 무겁게 굴러가고 있다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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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9-28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마을 도서관이 있어서 요즘에 자주 가요. 그 동네에 갈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요. 동네에 새로 지어진 집들과 새로 만든 길을 보면 이 동네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쉬지 않고 발전했다는 걸 느껴요. 동네도 숨 쉬는 인간처럼 느껴져요. ^^

이누아 2019-10-02 12:39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살던 동네를 지날 때가 많아요. 아주 어려서 살던 동네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전혀 없어요. 지금 사는 동네도 그렇고. 다른 곳에 사는 것 같아요. 옛 모습과 좀 섞여 있으면 숨 쉬는 인간처럼 느껴질 텐데... 전생처럼 느껴져요.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간이죠. 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사람의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실감하는 며칠이었어요.
 

태풍과 집

 

 

태풍이 온다고 해. 아직 오지 않았는데 태풍 소식만으로 저녁 운동을 가지 않았어. 태풍 하면 떠오르는 게 학술 반에서 지리산으로 MT 갔을 때야. 태풍이 와서 산 아래 숙소에서만 지냈잖아. 쫙쫙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너랑 달리기했는데... 또 다른 기억은 2003년 태풍 매미 때였어.

 

태풍 매미는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거야. 추석 명절 인사드리러 서당 선생님 댁에 갔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선생님이 자고 가라고 하셨어. 남편이 집에 창문을 열어놓고 와서 가야 한다고 하고. 선생님이 화까지 내셨지만 우리는 선생님 집을 나왔어. 도로엔 우리 차뿐이었어. 신호등은 붉은색만 깜빡이고 폭포수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거리에 물이 쏟아졌어. 우리 차는 달리는 것인지 물 위에 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왔어. . 집에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아. 하늘이 찢겨서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이 다 쏟아져도 안락할 것 같은 집. 전에 지진이 났을 때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운동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생각나.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려 해. 문을 닫고 자궁처럼 포근한 방에 불을 켜려고 해. 그런 곳이 집이지.

 

집이 있는데, 다시 집을 찾는 사람도 있어.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다시 여기로 와 엄마를 찾아. 집에서 쫓아낸 사람을 찾아. 이해한다고 말해. 정말 이해하는 걸까? 너무 들어가 보고 싶어서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엄마가 집이기도 하지.

 

중학교 때 가출하는 친구들이 있었어. 걔들은 집 밖에서 무얼 했을까? 어쩌면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가려고 용을 썼을지 몰라. 어디서든 자야 하니까. 여행자들은 어떨까? 그들은 대부분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사람, 집이 있는 사람이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당당함이 있어. 노숙자는 다르지.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 집이 없지.

 

오늘 엄마가 오셨어. 태풍 온다고 우리 집에 주무시라고 했더니 그냥 가셨어. 문단속해야지, 태풍이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그렇게 엄마는 닫을 문이 있는 엄마의 집이 있어. 닫을 문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어디서 밤을 지낼까.

 

 

겨울밤

_황인숙

 

뺨에 쩍쩍 들러붙는 삭풍의 채찍질

걸음을 재촉하네

내 고양이들은 예제서 뒹굴고

보일러는 자주 기척을 내겠지

따끈따끈 바닥이 달궈진

방이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

 

달의 고드름 아래

뱃속까지 얼어서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길의 사람들

길의 고양이들

밖에 두고 문을 닫네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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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07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태풍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부는 밤입니다.
이누아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이누아 2019-09-09 11:38   좋아요 1 | URL
예,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언제 태풍이 지나갔나 싶게 해가 비치는 월요일입니다. 아번 주에는 명절이 있네요. 추석 잘 보내세요. ^^

서니데이 2019-09-11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내일부터 추석 연휴 입니다.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명절 보내세요.^^

이누아 2019-09-11 22:40   좋아요 1 | URL
예.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추석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뻔뻔한 얼굴

 

 

오래전 지인이 고위 공무원에 임명된 적이 있어. 청문회를 해야 하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대통령과 동향이어서 언론에서 검증이 좀 있었어.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작은 뉴스였겠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기사가 눈에 띄더라고.

 

갖고 있던 부동산이 문제가 되었어. 지방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몇 채 합쳐야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 있는 괜찮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집이었어. 어쨌든 투자용으로 의심을 받아 지인이 해명했어. 그 집은 할머니 때부터 살던 집이고, 본인이 장남이라 상속받은 건데 지금은 노모가 살고 계셔서 팔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기자가 어머니는 어머니 명의의 집이 있는데 왜 그 집에 살겠냐고 해명을 믿기 어렵다는 투로 기사를 썼어.

 

뭐지? 이 기자? 기사를 서류로 쓰나? 난 의아했어. 그분 집안에 사정이 있어 어머니 집에는 다른 형제가 살고 있었거든. 지인 명의의 집과 그 어머니 명의의 집이 같은 동네라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만 봐도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인데 해명까지 한 일을 추측만으로 다시 기사를 쓰다니.

 

다 자기 일로 바쁜데 일일이 신경 쓰고 확인하는 사람이 몇 있을까? 기자들이 잘 취재해서 우리에게 알려 준다고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보기엔 기자들이 더 바빠. 인터넷에 기사를 띄워야 하니까 무조건 빨리 써야 하나 봐. 그게 뭐라도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으면 사실이든 추측이든 의심이든 일단 쓰는 거지. 그래도 기자잖아. 누구 딸이 특례로 입학했는지 일반으로 입학했는지 알아보면 알 수 있는 거잖아.

 

의혹만 가득 적은 기사들이 유령처럼 포털을 떠돌아. 하느님만 아실 수 있는 일도 기사가 돼. 가서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일들도 많은데... 열심히 하는 기자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제 유령이 너무 많아서 진짜 사람을 갖다 놔도 누가 유령인지 누가 사람인지 모를 지경이야.

 

 

 

방부제가 썩는 나라

_최승호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최승호, 방부제가 썩는 나라(문학과지성사, 2018),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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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우리 집에는 토정비결이 있었어. 소설책 말고 진짜 토정비결. 신년에 얇은 빨간 책자만 사면 두고두고 운세를 볼 수 있는 책이지. 엄마는 값싸게 신년운수를 볼 수 있다고 그 비결’(秘訣)을 애용하셨어. 그 책을 본 이래로 엄마의 운수는 나빴던 해가 한 해도 없었고, 아버지의 운수가 좋았던 해가 한 해도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 집은 엄마의 운으로 겨우 살아갔던 걸까?

 

그러던 어느 해, 드디어 아버지의 운이 좋은 해가 왔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엄마는 내심 기대를 하셨대. 그해 아버지는 부옇게 살이 올랐어. 왜 그런지 자꾸 가래떡을 달고 사셨지. 속이 안 좋다는 아버지를 끌고 엄마가 병원에 가셨는데 이미 말기였어. 그때가 생각나. 엄마는 오진일 거라고 믿으셨지. 병명을 받고 한 달 반 만에 돌아가셨으니 토정비결에서 운이 좋다고 한 바로 그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어.

 

시어머니는 여든 한 살에 돌아가셨어. 평생을 고생하시다 살 만해지셨을 때지. 어머님은 5년만 더 살았으면 하셨어. 요즘은 장수하는 분들이 많으니 큰 욕심은 아니었는데 결국 바라는 대로 되지 못했어. 친정엄마가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어. 그러나 몇 년 후 사돈은 그때 참 잘 돌아가셨어!”라고 했지.

 

어머님이 그렇게 더 살고 싶어 했던 5년이 지나기 전에 둘째 아주버님이 돌아가셨거든. 자식을 잃어본 엄마는 자식이 죽는 걸 보느니 먼저 죽는 게 낫다고, 그깟 몇 년 더 살아도 지옥이라고. 엄마는 아직도 이 세상과 지옥을 오가고 계시는 걸까?

 

모르겠어. 기쁜 일이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이 슬픈 일인지. 매일 매일 모르는 것 앞에서 하루를 시작해. 몰라서 기도를 하나 싶기도 해. 간구했는데 간구한 대로 주어지면 감사하고, 간구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깊은 뜻이 있겠구나 하고. 나는 모르지만 누구는 다 알아서 갈 길로 나를 제대로 인도해주고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평안할까?

 

몇 해 전 지진이 났을 때를 생각해. 사는 게 그런 것 같아서. 멀쩡하던 땅도 흔들리는데 무슨 일이 못 일어나겠냐 싶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어. 그래, 어떻게 다 모르겠어. 아는 게 있다고 믿으니 사는 거지. 모르는 게 너무 커서 아는 것이 좁쌀 같아. 좁쌀을 먹고 나는 새처럼 아주 조금 아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어. 광대한 모름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원경(遠境)

_권혁진

 

 

땅 위에 내려

조알을 세고 있는 새

손바닥만한 땅 위

조알을 하나씩

부리로 세고 있다

몇 개 조알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르고

새를 따라 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권혁진, 프리지아꽃을 들고(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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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窓)

 

 

대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 기억나는 건 사진이야. 그 친구가 거의 2년 만에 만나면서 사진을 들고 나왔어. 어수선한 교실에 창을 보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찍은 거였어. 그 아이가 나라고 했어. 사진 속 뒷모습이 나라는 것보다 휴대폰도 없던 때, 사진기를 학교에 들고왔다는 게, 하필 뒷모습을 찍었다는 게, 2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어. 근데 그 사진을 나한테 줬던가?

 

어쨌든 창을 내다보고 있는 건 나였어.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늘 창문 가까이 있었어. 사진은 교실 창문이었지만 복도 창문에 더 자주 나가 있었어. 중학교 때 한 친구는 내가 도대체 왜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나와 바깥을 보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쳐다봤다고 했어. 그래서 뭘 보고 있었더라?

 

기억이 안 나. 내가 본 게 뭔지. 운동장이나 학교 옆 저수지나 뒷산에서 본 건 기억이 나는데 창문으로 본 건 모르겠어. 어쩌면 그저 교실에 있기 싫어서, 여기가 아닌 곳을 보고 싶어서 창을 내다봤는지도 몰라. 자주 가슴이 답답했거든.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강렬하지 않지만 창문을 보면 여기가 아닌 곳이 가까이 있어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 시절 내게 창문은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를 벗어나게 해주는 책 같은 것이었을까?

 

쓰다 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멀어. 그래도 겹치는 장면이 있지. 나는 지금도 창을 내다봐. 독서실과 교회와 가로수와 하늘과 바람이 있어. 창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어. 시원한 바람이네.

 

 

 

_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김현승, 김현승시선집(민음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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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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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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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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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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