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기슭아, 두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 벌써 3월 마지막 날이야. 집 앞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해가 드는 곳에 있는 벚꽃은 꽃눈이 되어 흩날리고 있어. 그런데도 시간이 빠르게 달리는 것 같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 겨우 걸음을 뗀 아기가 마스크를 하고 나무 아래 서 있는데 그 모습을 아기 아빠가 찍고 있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생에는 고단함이 있어서 벚나무도 겨울을 견디느라고, 꽃을 피우느라고 애썼겠다. 다행히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와 무관하게 제자리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어. 덕분에 거리가 환해졌어. 그런 무심한 한결같음이 비상한 삶을 일상으로 만드는 힘이 아닐까.

 

우리도 벚꽃 나무의 벚꽃 같겠지. 필 때가 되면 피고, 질 때가 되면 지겠지. 홀로 여름을 맞는 꽃이 없듯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벚꽃 하나가 지면 그 나무의 꽃들이 떨어질 거라는 걸 알 수 있듯 작은 방에 앉아 있어도 전 세계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요즘 세계 주요 도시들의 하늘이 맑아졌다고 해.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먼지였나 봐. 먼지 같은 우리가 지구에서 너무 주인 행세를 하며 지냈던 건 아닐까.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이후 아이들과 집에 머무는 시간에 제법 적응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좀 답답해. 답답할 수도 있지. 평온하지 않은 기분이 일어날 때 따라오는 낭패감을 툭, 털어버리려 해. 벚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 먼지가 일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시간이 오고 가는 것처럼 내 기분도 그저 오고 가는 거겠지.

 

 

 

모순1

_조은

 

 

삶의 갈래

그 갈래 속의 수렁

무수하다

 

손과 발은 열 길을 달려가고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덤불은

수만 길로 뻗는다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 진창에서는

바글바글 애벌레가 기어오른다

 

봄꽃들 탈골한 길로

단풍 길 쏟아진다

 

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내 몫이 아닌 흙이여

 

-조은, 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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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웃어야 봄이야

 

 

 

전염병으로 세상이 어수선해도 날짜는 꼬박꼬박 지나고 있어. 2월이 다 가네. 229일, 4년 만에 딱 맞는 네 생일이야.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너를 생각하면 당황하거나 놀란 모습, 화난 표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담담했던 모습만 생각나. 정말 네가 그런 사람인지 내 기억 속에서만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이 떠오르는 게 좋아. 힘든 상황이 와도 네가 적절히 대처하고 있을 거라 믿게 되거든.

 

내일은 3월이야. 3월이면 봄이 되는 걸까? 그냥 빙그레 웃어 봐. 입가에 봄이 맺힐지도 몰라. 기슭아, 어디에 있든 너 자신을 잘 돌볼 수 있기를, 너와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편안하기를 빌어. 생일 축하해.

 

 

 

봄-너에게

_김선우

 

 

네가 웃으면 봄이다

 

네가 웃어야 봄이야

 

-김선우, 댄스, 푸른푸른(창비교육,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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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햇살이 거실에 들어와 있다 돌아갔어. 햇살을 따라 아이들은 신천에서 잠시 자전거를 타고 왔어.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너무 오래 집에만 있어서 아이들도 지치고,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 보냈어. 아무 데도 들르지 말고, 운동기구도 만지지 말고, 자전거만 타다 오라고 당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인사보다 먼저 30초 손 씻기부터 하라고 말하게 돼.

 

예전에 서당 선생님이 무사(無事)가 행복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 특별히 좋은 일이, 기쁜 일이 있는 게 행복한 게 아니고 아무 일 없는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대구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대구 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안 되고, 간다고 해도 모두 밀어내지. 누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바이러스로 취급당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대구 안에서도 일 때문이 아니라면 아무도 만나지 않아. 어제는 언니가 반찬을 해서 집 앞에 두고 가고, 오늘은 친구가 빵 사러 나왔다가 내 것까지 샀다고 현관에서 건네주고 갔어.

 

서로를 피하는 게 서로를 위하는 일이 되었어. 병을 얻을까 걱정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병을 옮길 수 있어 더 조심하게 돼. 서로를 피해야 하는 오늘에서야 우리가 얼마나 접촉하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어우리가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우리와 닿아 있어. 우리 중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돼.

 

이렇게 2월이 다 가네. 3월이 와도 이 비상(非常)한 시간이 계속되겠지만 좀 더 부드러워진 햇살과 바람이 창을 두드리겠지.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서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으로선 기대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나저나 우선 수요일에 오겠다던 택배가 오늘 늦게라도 현관문 앞에 있었으면.

 

 

 

흐림

_배연수

 

 

어제 쨍한 햇볕에 나를 말리고

오늘 흐린 날씨에 젖어버린다

 

옥상에 올라가면 눈을 막는 산

좋을 때 나는 눈물이 흐른다

 

지금 안전해 보이는 이 생활도

풀린 올 하나 때문에 변형되는 옷처럼

작은 틈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질문은 바람이 어디로 부는가를 묻는 것 같다

바람이 제 가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듯이

너무 크게 울지는 말자

 

사랑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가족, 친구, 그와 그녀들

서로 얼굴도 모르는 먼 사람들

 

두 시간 먼저 비가 내린다

 

이 걸음도 언젠가 멈추겠지만

여기까지 온 가장 적당한 말이 뭐냐고

누가 물어준다면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배연수,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시인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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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27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이누아 2020-02-27 19:3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독감 이후 감기가 낫지 않았어.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옮길까 봐 집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지내고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어. 이제 좀 나은 것 같은데 나갈 곳도 없게 됐어. 잔기침이 남아 있어 나가기도 그렇지만.

 

기슭아, 너는 잘 지내? 오늘은 안부를 묻고 싶어지네. 뉴스에서는 계속 코로나19에 관한 뉴스가 나와. 대구에 확진자가 폭증해서 지역 뉴스는 온통 그 이야기뿐이야. 우리 마을도 병원 두 곳과 약국 두 곳이 폐쇄되더니 오후에는 이마트와 꽤 큰 마트가 폐쇄되었어. 학원은 휴원, 방과후수업은 휴강, 대구에 있는 모든 도서관은 휴관했고, 개학은 연기되었어.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어. 적막하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

 

사람이 바이러스로 의심받고, 감염된 사람은 이름을 잃고 숫자가 돼. 확진자 숫자는 수백 명이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번호로 불려. 집에 앉아 적막한 마을을 내려다보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중앙방송, 지역방송 여기저기 특보가 쏟아져. 불어나는 숫자가 해일처럼 밀려올 것 같은 느낌이야. 마을의 어느 곳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왠지 위축되고, 마음이 어수선해져. 

 

이럴 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톡에서 근거도 없이 정부를 비방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글이 올라올 때가 있어. 거짓말을 해서 타인을 감염시키는 사람도 있고. 불편과 불안이 불평과 짜증이 되기는 쉬워. 그렇지만 불평과 짜증이 불편과 불안을 더 길게 할 뿐이야. 한마디 거짓말이 힘껏 막아내는 사람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고.

 

포털 뉴스 댓글에 혐오의 표현도 보여.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이 이렇게 급한 일인가 싶어. 잘잘못을 따질 일이 있으면 이 위기가 지난 뒤에 해도 될 것 같은데. 혐오는 대상을 바꿔 가며 커가는 것 같아. 마치 바이러스가 숙주를 찾아다니며 전염시키는 것처럼. 어쩌면 이런 게 질병보다 더 전염성이 강할지도 모르겠어.    

 

내일이 되면 얼마나 더 숫자가 불어날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또 누구를 비난하는 손가락질로 바뀔까?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잎도 없는데 바람이 보이는 걸 보니 바람이 거센가 봐. 저 가지에 잎이 돋고 꽃이 피면 이 황량한 시간이 끝날까? 

 

 

 

 

불길한 새

 _김성규

 

 

눈이 내리고 나는 부두에 서 있었다

육지 쪽으로 불어온 바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지고 있었다

 

바닷가 파도 위를 날아온 검은 눈송이 하나,

춤을 추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은 몸을 웅크리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다

 

눈송이는 점점 커지고, 검은 새

젖은 나뭇잎처럼 처진 날개를 흔들며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해송 몇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그때마다 놀란 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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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시면서

 

 

요즘은 아이들 봄 방학이야. 아침부터 장난인 듯 싸움인 듯 부딪히는 소리가 칠판 긁는 소리처럼 듣기 싫어서 오후에 가려던 병원을 오전에 다녀왔어. 약을 먹고 잠을 잤어.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멍하게 있다 자판을 두드리니 손끝에 닿는 딱딱한 느낌이 깨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가고, 아침에 잠시 날리던 눈은 흔적도 없고, 회색 구름 사이 태양은 창을 뚫고 나를 쏘아보고 있어. 내가 쳐다보지 않으면 해가 쏘아볼 일도 없겠지만.

 

해열진통제를 계속 먹고 있어서 열이 온전히 내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의사는 계속 약을 먹으라고 해. 다행히 폐렴도 아니고, 낫고 있는 거라는데 기침이 그치지 않아. 따뜻한 물도 너무 많이 마셔서 이제 입에 머금고 있어. 그러면 기침이 덜 나거든. 겨우 감기일 뿐, 어쨌든 낫겠지만.

 

내일은 어머님 제사야. 평소에 큰집이 경기도라 아이들 학기 중에는 제사에 못 갈 때가 많아. 어머님 제사는 봄 방학이고, 제사 중에 큰 제사이기도 해서 꼭 가는 편인데 이번엔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야 할 것 같아. 제사 때까지는 다 나을 줄 알았는데... 제때 할 일을 못 하는 느낌이야. 이래저래 불편해.

 

언젠가 큰애가 자기가 하나님과 부처님께 다 기도해 봤는데 기도가 안 이루어지더래. 다 거짓말 같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도한다는 건 원하는 걸 얻으려는 게 아니고,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평온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네. 짧게라도 명상하고 경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좀 낫긴 나았나 보다. 뭐든 하고 싶은 게 생긴 거 보니.

 

밖을 보니 해는 건물 뒤로 넘어가서 보이지 않아. 시간은 흐르고, 차가운 바람도 부드러워지겠지. 기슭아, 네게 이야기하다 보니 내게도 봄이 온다는 걸 새삼 깨닫게 돼.

 

 

 

투병일기

_변희수

 

 

의사는 물을 많이 마시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물이 흘러갈 수 있는 곳이라면 안심이 되었다

 

아가미처럼 부푼 턱뼈 사이로 밀린 비가 내렸고 누가 사월이라고 말했다

풀이 자랐고 나무가 자랐고 꽃이 피었다 물오른 곳마다 흰 가운을 걸친 새들이 바쁘게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면 짙어진 풀빛 아래 누렇게 뜬 각질들이 버리고 간 처방전처럼 나부꼈다 호전好轉적인 풍경이었다

 

물을 마시면서 그리운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건조하던 이름들이 반짝거렸다 젖다가 스미다가 천천히 번지면, 흡수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부쩍 자란 기분이 되었다

 

넘치면 다시 울음이 될 거라고 했지만 목구멍으로 물 넘어가는 소리가 전생의 음악소리처럼 투명하고 맑아서

 

당신이 오면 양호한 사람처럼 웃었다

 

-변희수, 아무것도 아닌, 모든(서정시학,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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