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_박건호

빗소리를 듣는다
밤중에 깨어나 빗소리를 들으면
환히 열리는 문이 있다
산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빗소리
현실의 꿈도 아닌 진공상태가 되어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눈을 감으면 넓어지는
세계의 끝을 내가 간다
귓 속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는 빗소리
이 순간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까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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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_류시화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론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서
한 그루 나무처럼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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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_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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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 등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여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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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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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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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_이면우

나무 아래 나무 둥치 두 팔 벌려 잡고 고개 쳐들어 우듬지께 보며 나무야, 나무야, 불러봤습니다 누굴 이토록 간절히 불러보기가 얼마만입니까 고개 젖혀 누구 환하게 올려다보기가 또 얼마만입니까 그때 바람결엔가, 수십백천만 잎사귀 일제히 흔들며 나무가 대답했습니다
큰 걱정 말라고
때 맞춰 비도 내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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