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게
_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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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지나온 길이
_조은

이제 막 지나온 길이
뻣뻣이 굳는다
니는 이 길의 근성을 알고 있다

옛날에도 나는 몇 차례
빠른 걸음으로
이 길을 지나갔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돌아 나오며
내가 흘린 눈물을

나는 알고 있다
협곡을 지날 때면 들려오는
슬픈 메아리
가지 못할 세계로 유골처럼 굴러가는
위태로운 생각들

멈추면 그 순간
서늘한 이끼가 몸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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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_김민부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遭遇)한다 
조락(凋落)한 가랑잎 
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 
찻집의 조롱(鳥籠)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 
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가는 핏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어떤 날은 숨 쉴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은 내 영혼(靈魂)에 때를 입히고 간다 
그래서 내 영혼(靈魂)은 늘 정결(淨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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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실망
_최재목

태어난다는 것은 참 실망스런 일이다.
당장에 무슨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쓸쓸한 날을 거리에서 보내고
또 자면서 보내고, 술을 마시거나
수 없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
삐걱거리는 하늘을 떠나
먼발치 내 마음 가슴 뼈 부근으로
떠 있는 별들,
날 밝으면 그냥 그 아름다운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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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못자국
_박소유

배색 잘 된 일상이 나란히 걸린
평온한 벽이 되었을 때도 있었지.
사랑, 추억, 지나면 그리움이 되는
때묻은 통속
우울한 날
쉽게 걸쳐 입고 나서는
부끄럼 모르는 내가
견딜 수 없어
뽑아 낸 깊은 벽의 상처
내 것이 될 줄도 모르고
단단히 쳐 놓았던 푸른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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