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려면 
 _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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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의 치킨샐러드
_나희덕


더블린의 밤, 불 켜진 집이라고는
취객들을 상대로 한 패스트푸드점뿐이었다
커다란 체스판 무늬의 바닥은
방금 물청소를 끝낸 듯 반짝거렸고
나는 지친 말처럼 검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체스판 저쪽의 한 남자,
리본 달린 머리띠를 둘러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창밖을 바라보며
치킨샐러드를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들어왔고
치킨샐러드를 먹던 남자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울다 웃다 울다 웃다
두 남자는 마침내 끌어안고 키스를 길게 나누었다
남자의 혀와 남자의 혀가 엉기는 동안
침과 침이 섞여드는 동안
그들의 입속에서 밀려다니고 있을
닭가슴살과 양상추와 파프리카와 콘후레이크,
누르스름한 머스터드 소스,
서로의 혀와 팔에서 풀려난 그들은
남은 치킨샐러드를 먹어치웠고
정작 먹먹해진 것은 체스판 이쪽의 관찰자였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지만
한두 번 베어먹다 내려놓고 말았다
벽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11시에서 잠시 겹쳤다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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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아침
_강현덕 


열쇠를 찾아 들고 신발을 신는다 
현관을 나서기도 전 먼지들이 일어나고 
저 문을 열기만 하면 난 이제 내가 아니다 
듣다만 칸타타도 이제는 그들의 몫 
지폐 몇 장의 낡은 지갑만이 유일한 내 얼굴이다 
하루를 써버리기 위해 저 문을 열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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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_강현덕


내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수숫대를 어지럽히던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내 뼈의 중심으로 와 
날 갉아 먹는갑다 

아, 나는 삭을 것인가 툭툭 꺾일 것인가 
스멀대는 벌레들만 떼지어 웅성거리다 
어느 날 껍질만 남을 
바람 속의 빈 집처럼 

내 안에서 들리는 벌레들의 이 소리 
날 먹을 벌레들의 어이없는 이 장난 
기어코 주저앉을 낡은 집 
보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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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행로(狂人行路)
_심보선

 
길 위에서 나는 두려워졌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날 찝쩍댔다. 어젯밤 잠 속에선 채 익지 않은 꿈을 씹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병에 담아둔 꽃이 다 뜯겨 있었다. 신물 대신 꽃물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혓바늘이 돋았다. 걸음이 떠듬대며 발자국을 고백했다. 나는 두려워졌다. 아무 병(病) 속으로 잠적하고 싶어졌다. 마침 길가에 <藝人>이라는 지하 다방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전날 샀던 시집을 한 장 한 장 찢으며 넘겼다. 나는 두려워졌다. 종업원이 유리컵에 물을 담아왔다. 거기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맛을 보니 짭짤했다. 바닷물인가? 아님 너무 많은 이들이 코를 박아서 이미 콧물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내 안에서 줄담배를 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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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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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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