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성듬성 나무에 붙은 저 잎들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떨어져 죽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남김없이 다 떨어지고 하늘 외에는 비출 것 없는 마른 가지가 되고서야 겨울이 왔다, 고 말하리라. 화려한 빛깔은 지고, 순백의 날도 오지 않았다. 거리에는 미처 두터운 외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이 계절에 아름다운 풍경을 찾는 이 없다. 모든 틈들 중에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한 때. 가을과 겨울의 사이가 아닌 오로지 이 한 때가 가져오는 고요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 눈은 곧 익숙해진다. 어둠 속에서도 보인다. 보려는 마음도 없는데 몸은 조건에 반응한다. 낮을 생각한다. 생각에는 빛이 필요하지 않다. 코스모스를 사랑한다. 길가에 핀 꽃에게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 사랑 때문에 꺾이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그 꽃도 어둠 속에 있겠구나. 차가운 바람이 그 꽃을 춤추게 할까, 떨게 할까. 꽃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일 뿐일까. 계절이 바뀌면 꽃은 질 것이고 여러 해가 바뀌면 내가 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사라질 것이라 소중한가, 사라질 것이라 부질없는가. 어둠은 고요와 어울린다. 어두운 방에 앉아 너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작은 메모를 남기고 몇 차례 버스를 갈아 타고 먼길을 갔다. 가본 적 없는 곳에서 입어본 적 없는 옷과 불려본 적 없는 이름을 갖고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다르고 새로운 삶 속에서도, 익숙한 생각과 그 삶에 익숙해지려는 애씀이 하루를 가득 채웠다. 존 카바진의 말처럼 어디를 가든 거기엔 내가 있었다.

멋진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에게 편안한 마음과 좋은 이웃이 있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어떤 풍경도 사람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아이가 "엄마"하고 부른다. 순간 나는 엄마가 된다. 다른 삶이 펼쳐진다. 아이는 매일 자라고 매일 새롭다. 아직도 나는 엄마라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른 삶이라는 것도 사람에게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다른 삶.

그럼에도 간혹 목소리마저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역에 닿자 친구들, 기다린다.
길을 헤매다 먹는 점심,
음식은 혀로 먹는 것이 아니구나
벗으로 사람으로 먹는 것이구나
입맛이 없다던 내가 거기 없다

골목골목 속에 히든 갤러리
친구의 전시회, 심소心素
벗의 마음이 단정히 걸려 있다
그 마음 사이에 앉아 깔깔댄다
웃음의 절반은 열 아홉 그때의 재잘거림

인사동 거리에 손을 잡고 가는 연인들
사랑하는 것들은 사랑스럽기도 하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6-28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내놀이터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따라 다닌다. 멈출 줄 모르는 아이들을 풀어놓으려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이 짜증을 씻어낸다. 가볍기도 하지, 짜증. 미칠 것 같은 기분도, 죽고 싶은 마음도 순간순간의 조건에 맞춰 넘실대겠지. 미친다. 정신병원에서 오래 일한 간호사가 그랬다. 참 더러운 병이라고. 살아서는 자신과 주위 사람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죽어서는 남은 사람이 죄책감 속에 살도록 한다고. 내게 우리는 가족이잖아, 하고 말했던 친구의 진짜 가족이 입원을 했다고 했을 때 나는 내가 확실한 가짜라고 생각했다. 괴롭고 죄책감에 시달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친구다. 나는 간혹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아니다. 군대에서 상관을 구타했다는 후배가 간 곳은 영창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다. 미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만나는 자들이 그를 견딜 수 없어 한다면 그는 미친 것이다. 누구의 심기도 건드려선 안 된다. 미친 것의 판단은 내 몫이 아니라 저들의 몫이니까. 그 후배가 자작시를 읽어주었다. 유치한 시였다. 유치한 시를 읽는 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 어디에도 미친 기색이 없다. 군대라는 조건에 그의 미침이 넘실댄 걸까. 미친다는 건 경계가 없다. 그녀는 미쳤을까. 마트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 들고 약간 입을 벌린 그녀, 뭔가 이상하다. 마트 안 사람들의 활발한 움직임 속에 어색한 몸짓. 계산대. 계산할까요, 점원의 말. 계산하라고 돈 줬잖아요, 하는 크고 화난 음성. 그냥 예 하면 될텐데. 웩 하고 한 아이가 토한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아이의 구토물을 피한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 토한 아이를 둘러싼다. 토한 것뿐이야. 아픈 거지. 나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누가 구토물을 뒤집어쓰고 싶겠어.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는다, 로 시작되는 이상의 시가 떠오른다. 그는 때로 미친 것 같아 보인다. 칼로 죽지 않고 병으로 죽었지만 마음에 찔러댄 상처로 몸은 만신창이였을지 모를 일이다. 모를 일 투성이다. 모르는 것의 한 가운데 서서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새 아이들은 집에 가자고 한다. 다시 더위 속을 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미쳤냐고? 미친 것에 대해 미친 듯이 말하는 나는 누가 나더러 미쳤다고 할까 두렵다.타인의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면 할수록 타인이 결정한 미침의 영역에 서게 된다. 타인이 나를 결정하게 둘 수 없다. 최대한 타인과 같이 웃어라. 어떤 타인도 내게 관심이 없을테니 알아차릴 자, 없으리라. 죽고 싶고, 비밀을 말하고 싶고, 울부짖고 싶은 자들. 모두 안녕. 토하지 마. 아프면 멀리서. 홀로 미칠 수 있을까, 모든 미친 이들은 홀로지. 홀로라 미치기도 하고. 다시한번 안녕. 폐쇄병동의 문에는 창이 있다. 벨을 누르면 병원관계자가 그 창으로 방문객을 확인한 후 문을 열어준다. 그 폐쇄 안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산다. 작은 창으로 외부인을 감시하고 받아들이며. 누가 누구를 가두었는가. 긴장된 삶이 여기에 있다. 그의 긴장을 누그러뜨릴 약을 처방하는 의사는 지쳐 있다. 지친 사람이 여기저기 미친 사람을 피해다닌다. 때이른 더위와 거리의 선거벽보를 지나쳐 간다. 미쳤거나 지친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걷는다.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재빨리 활기를 찾는 그는 미쳤을까, 지쳤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미쳤는가 지쳤는가. 차라리 지친 척하며 잠이나 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