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보문단지 밤길에 하트 모양 등들이 시시각각 빛깔을 바꾸며 길을 밝히고 있다. 여기저기 연인들이 셀카를 찍고,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다. 흐뭇하게 그들을 본다. 그때 나와 걷던 언니가 그들을 보면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갈 무거운 삶이 보인다고. 언니를 본다. 무겁구나, 언니야. 커다란 연을 만들어 언니를 태워 날리고 싶다. 괴성을 지르며 무서워하다 이내 함박 웃으며 구름이 누리는 가벼움에 익숙해지겠지.

혹시나 이 길이 생각나면 줄을 당겨. 사랑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 길 어딘가 서 있는 우리들 속에 사뿐히 내려 앉도록 바람이 데려다 줄거야. 그러니 걱정말고 가볍게 떠올라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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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밤나무 2019-03-2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가벼워졌단다^^
 

요즘 시를 읽는다. 시집 한 권을 다 읽도록 한 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어 놓을 수 없다는 듯 단숨에 읽기도 한다. 어떤 날엔 책을 덮으면 머리 어디가 찢기거나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간혹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새가 날고 햇살이 비친다. 그 새는 밖에서 온 것인지 머리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찢어진 틈이 안팎 경계를 무너뜨리나 보다. 밤이 오고 깊이 잠들면 어느새 새는 햇살과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설픈 바늘자국이 머리에 남는다. 무슨 조화일까.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시를 읽고 그런 어떤 날에 실밥은 뜯겨지고 다시 다른 새가 날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점점 헐거워지는 머리가죽에도 왜 머리는 가벼워지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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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도
-20150419세월호집회


어디로 가야 하나 서성이는 넋들아
돌아보지 말거라 어둠이 내려도
촛불로 배를 지어서 천상으로 보내리

벚꽃잎 눈처럼 쏟아지는 계절에
따가운 폭포가 머리에 꽂히고
봄비는 갈 길을 잃고 거리를 헤맨다

사람이 세운 저 벽, 세월을 누른다
흐르지 말라고. 옛 얘기나 되라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 어깨를 내리친다

베어진 나무들은 바람에 쓸려 가고
주저앉는 울음들 가진 것 없으니
눈물로 배를 띄워서 저어가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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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기 앉아 있다. 사람들은 어디로 저리 바삐 가는 걸까. 나는 갈 곳이 없어. 앉아 너를 생각한다. 한 웅큼 소음이 지나간다. 마음이 소리를 따라 움직이다 금세 지쳐 주저 앉는다. 이곳은 비었고 나만이 앉아 있다. 오르고 내리지도 않는다. 비상한 상황이 되면 비상한 문을 따라 사람들이 쏟아지겠지. 내일은 비가 내릴지 모른다. 모르는 것들 틈에 앉아서 편안한 무책임을 마신다. 조금 취하면 좋으련만. 눈이 감기고 지구를 뚫고 오른다. 우주면 대수겠는가. 어디를 가도 그곳엔 겁에 질린 내가 먼저 가 있다. 그 사이 네 생각이 대기권을 지났다. 잃어버리는 신발과 옷가지, 금이 간 건물, 가스폭발로 불타버린 집, 이런 것들이 떠다닌다. 닿지 않는다. 누가 사라졌는가, 긴장한 채 주위를 돌아본다. 어둡고 고요하다.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서늘함 사이로 잠이 쏟아지고, 잠 사이로 별이 쏟아지고, 쏟아지는 사이로 꽃들이 피어난다. 계절이 가만히 앉아 있다 조용히 피어난다.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꺼져가는 그림자. 빛깔도 없어라. 흑백으로 울리는 노래. 눈이 감기고, 잠이 쏟아지고, 꽃들이 눈처럼 날린다. 좀더 자라고? 깨어나라고? 울지는 않는다. 소음 속에서도 사람들이 오가고, 별들이 피어나고, 꽃들이 쏟아진다. 여전히 서늘한 아무도 없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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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잡고 있으면 내 것인 듯 네 것인 듯
따뜻함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부드러워.
살과 살이 닿아도 부끄럽지 않아

온종일 걸어도
손끝에서 솟는 작은 웃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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