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비에 꽃들이 씻겨 내리고 나무의 연두빛은 더 선명해졌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간다. 젖은 아파트 주차장에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차 바퀴에 깔리지는 않을까, 옮겨 놓을까 하다 그냥 지나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면 뭐하러 지렁이를 염려하나, 이런 건 염려도 아니지. 호기심일 뿐이지. 찜찜한 마음에도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를 읽는다. 책 제목을 듣고 친구가 크게 웃었다. 아마도 전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는다고 했던 게 생각났나 보다. 죽는 얘기를 하고, 죽는 책을 자주 읽다 보면 죽는 얘기도 유머가 될 수 있다. 책 제목만으로도 빵 터지는 거 봐. 햇살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빛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아주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딱 삶만큼의 무게일 것이다. 삶이 조금 더 익숙한 것일 뿐.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산 자들은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한 자들은 여기 없으니. 

 

벌써 목요일이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적이 없다. 왜 일까? 너무 많은 것들을, 유일한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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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다. 보이는 것들이 어둠에 묻히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스물스물 일어난다. 햇살에 선명한 먼지처럼 어둠에 또렷해지는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들.

어쩌다 사랑을 생각한다. 성숙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걸까. 사랑은 이성을 삼킨 게 아니란 말인가. 내 사랑은 모두 유치했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에 대한 애정마저 성숙하다고 할 만한 건 없었다. 어려서 어리석었을까. 사랑해서 어리석었던 걸까.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한때는 사랑이라 불렀던. 그 감정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후회와 부끄러움이 설렘과 기쁨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이젠 그 시절이 색 바랜 추억이 되었기 때문일까.

사랑한다. 엄마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고...여전히 돌아서면 후회할 시간들. 성숙한 사랑이란 게 뭘까. 지금도 내 사랑은 유치하다. 왜 내 사랑은 자라서 어른이 되지 못했나. 모르겠다. 요즘은 더욱 모르는 것 투성이다.

둔하고 무지한 내가 사랑을 생각할 정도로 어둡고 고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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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다. 너무 익숙한 길이라 주의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니 움직이지 않았다.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겨 앞바퀴가 돌아가지 않은 탓이다.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로만 끌고 수리점까지 가야 하나 난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퀴를 꽉 붙잡고 있는 브레이크 한쪽을 손으로 잡아 당겼더니 바퀴도 굴러가고 브레이크도 잘 되었다.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고서야 까진 손과 무릎이 보였다. 무릎을 구부릴 때마다 불편해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끌고서 집으로 왔다.

자전거 바퀴가 잘 굴러가는 것이,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이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어떤 행복과 불행보다 오늘 겪은 사소한 불편이 무사한 하루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특별한 일 없는 하루가 내가 찾는 평온과 평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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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갔다. 종일 비가 내렸다. 벚꽃은 어제보다 더 탐스럽고 환해졌다. 대구에 들어오니 벚꽃이 비에 떨어져 눈처럼 쌓였다.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은 더욱 피고, 만개한 꽃은 지고 있다. 비 때문이 아니었다. 필 때는 피고, 질 때는 지는 것이다. 봄비가 온 땅을 적셔도 꽃은 알맞은 때를 알아 제 삶과 죽음을 꾸려 나간다. 봄비가 내린다. 생과 사를 재촉하며 무수한 시간의 비가 지금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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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람들이 슬픔의 봇짐을 지고 내게로 온다. 울음을 터뜨리고나면 찾아오는 고요.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고 위로하지 않아도 스스로 눈물을 닦는 사람들. 나는 돌처럼 무감하여 오히려 담대하고 담담하다.

그러나 밤이 오면 하릴없는 두 귀를 타고 들어온 슬픔의 목소리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내 안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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