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바람이라고 부른다. 뜨거운 바람이라 부르고, 차가운 바람이라 부르고, 시원한 바람이라 부른다. 느끼는 대로 부른다. 바람이 분다. 나무는 이 바람을 무어라 부를까. 누군가 나를 부른다. 어떤 이는 냉정한 사람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따뜻한 사람이라 부른다. 느끼는 대로 부른다. 누군가 부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든다. 그러나 모든 부름에 답할 필요는 없다. 바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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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더러운 용수철을 서로 갖겠다고 서로 당기다 꽈당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피로 물들었던 것을. 닦아도 피는 멈추지 않고 손에는 피가 떨어졌다. 5살이었던 나를 업고 7살 오빠가 집까지 왔다. 엄마는 집에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피를 닦아주셨다. 다 닦아내고 보니 상처는 엄지손가락에만 났는데 퐁퐁 샘솟듯 그곳에서 피가 나왔다. 손이 피로 물들었을 때는 공포 때문에 입을 벌리고 울어댔는데 상처를 보고나니 더 이상 그렇게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일할 때 송년회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2차를 가는 대신 야간 개장한 롯데월드에 갔다. 평소 놀이기구 타는 걸 즐기지 않는데 우리 부서사람들이 모두 함께 타기에 나도 탔다. 긴 의자처럼 생긴 곳에 바를 내리고 앉으면 막대 같은 그 의자가 아래로 위로 요동을 친다. 처음엔 무서워서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다 눈을 뜨니 무섭지 않았다. 눈을 뜨니까 안 무섭다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도 눈을 뜨라고 소리 질렀다.

 

두려움이란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 뱀이라고 무서워 소리쳤지만 그게 뱀이 아니고 그냥 끈이라는 걸 알면 웃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뭘까? 그것이 알고 보면 작은 상처이고, 눈만 뜨면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닐까. 오랜 질병 같은 답답함도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하는 무엇 때문일까? 피를 다 닦아내기 전에는, 눈을 뜨기 전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없다.

 

대선 후보들을 보면 자기 견해를 말한다. 소신 있게 말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한다. 나는 소신 있게 살고 싶지만 삶 전체가 엉성한 느낌이다.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눈치를 보게 된다. 대선후보들처럼 저런 토론의 자리에 앉으면 나는 얼마나 어설플까.

 

티벳에서는 수행자끼리 계속해서 큰소리로 문답을 한다. 선문답 같은 게 아니고 교리에 맞게 자기 생각에 맞춰서 얘기를 한다. 그렇게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 소리쳐 몇 시간이고 문답해 보고 싶다. 피를 다 닦아내듯이 내가 두려워하는 갖가지 얘기들을 목이 터져라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 보면 조그만 두려움이 얼마나 얇게 퍼져서 내 삶을 흐리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운 것에 대해 말해보자.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까봐 두렵다. 엄마 역할이란 게 뭘까?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나 자신으로서 문득 모든 걸 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지친다. 무언가 억지로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실하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러나 진실이란 뭘까?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진실일까? 내 사랑이 두렵고, 불쑥 튀어나오는 우울이 두렵고, 작은 고통조차 두렵다. 억지를 쓰면서라도 내 두려움에 대해 오래고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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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 등잔 밑 어두운 곳(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오늘 제 머릿속에서 등불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네요. 어제 오늘 알라딘에서 불을 당겨주는 글들을 연이어 발견하네요.

2017-12-2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마트폰

-어느 청년 구직자의 하루


누구나 갈 수 있는 화려한 세상 여기 있다
가벼운 터치로 매끄럽게 빛나지만
검색한 평균의 삶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

무음의 면접장에 홀로 서 있으면
꽉 낀 정장 안에는 초조한 심장의 진동
이번엔 들을 수 있을까 합격의 벨소리

적막으로 변해 버린 기다림을 등지고
네모난 고시원방, 엄지가 바쁘다
무선(無線)을 타고 달리는 단선(斷線)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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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어머니와 친구와 나. 셋이서 일년 가까이 산 적이 있다. 내가 얹혀 산 거였는데 식구처럼 잘 지냈다. 친구가 결혼하고 힘든 일이 생겨 친정에 왔을 때 어머니를 뵀다. 그때 친구 어머니가 그러셨다.

˝너랑 우리 셋이 살 때 고스톱 쳤잖아. 그때가 제일 좋았어. 그때가 내가 살면서 제일 좋은 때였어.˝

한번씩 이 말이 생각이 난다. 셋이서 고스톱 칠 땐 내 친구 결혼 늦다고 걱정을 그렇게 하시더니 그때가 제일 좋았다고.. 지금 어떤 근심이 있어도 어쩌면 하찮은 일이거나 시간이 해결하거나 걱정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일 지 모른다.

그래,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특별한 일 없이 지나는 오늘이, 몇 번이고 웃을 수 있는 하루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친구 어머니 그 말씀이 생각이 났다. 조금 더 자주 떠올리고 싶어 여기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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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깨어있으면 무언가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개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거나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말할 수 없는 얘기... 아직 밖은 차다. 어둠이 몰고 다니는 서늘함.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는 하나마나한 얘기일 수도.

언젠가 오빠가 한 말이 생각 난다. 내가 스트레스 용량이 적다고. 그러니 그때그때 비워내라고. 나도 담대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어른의 옷을 입은 아이다. 일상에 능숙한 듯 생활하면서도 속으론 때로 버겁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나 같을지도 모른다. 모두 쉬쉬하고 있어서 서로 모르는 것일지도.

아무 일도 없다. 강박증 환자나 실제보다 몇 배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처럼 내가 힘든 건 가상일 뿐이다. 마음이 지어내는 것, 습관이 지어내는 것, 업이 지어내는 것.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처럼 마음이 지은 허상은 무시하는 것 외에 뾰족한 답이 없다.

자야겠다. 뇌와 눈에게 휴식을 줘야겠다. 잠들 수 없는 심장에게 깨어있는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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