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동조시키는 진언의 힘

리딩 2823-3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상의 방법을 말하자면, ‘오~옴’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떨리는 소리에 마음을 동조시키도록 하십시오. 억양 없이 단조롭게 하지 말고, 그 소리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느껴 보십시오. 육체의 힘을 통해서 육체의 쿤달리니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다른 것들(일곱 차크라)을 정(淨)하게 합니다. 쿤달리니는 육체의 창조적 중심에서 잠을 깨어나 육체 여러 곳의 에너지 센터를 통과해 올라갑니다. 그것은 항상 ‘신이여, 저희 뜻대로 마옵시고, 언제나 당신 뜻대로 하롭소서’란 목적을 가지고 자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쿤달리니가 머리에 있는 일곱 번째 차크라에 도달하면 실체는 직관과 통찰력과 많은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케이시는 진언이 내부에 있는 이런 특성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를 내부에 있는 창조주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가 부언하기를 이기적인 동기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케이시는 이기적인 동기를 버리는 것이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했다.

물론 진언을 읊조리면서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동양 역사는 오랜 세월 동안 진언이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 산기슭까지 힘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진언을 처음 접할 때까지 나는 진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꼬불꼬불한 히말라야의 산길은 거대한 사원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사원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대여섯 명의 수도승들이 붉은 법복을 입고 가부좌를 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곧게 펴고 머리는 숙인 상태로 앉아 있었는데, 나의 출현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언을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 낭랑한 울림은 법당의 대들보를 진동시켰다.

그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 그 곳에 앉아 있는데 진언을 외우는 소리가 나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계속되자 나는 마치 바닥에서 위로 들어 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진언의 목적이 그것에서 울려 나오는 진동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었다. 모든 생명은 진동이다. 원자로부터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 조의 세포들, 그리고 우주 자체의 리듬과 맥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진동이었던 것이다.

명상을 하는데 있어서 만트라의 진동은 우리가 창조력에 동화될 수 있도록 돕니다. 나는 이 점을 그 당시 녹음했던 테이프를 듣고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녹음 테이프를 들으면 육체적 감정적 긴장 이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완은 케이시가 리딩 826-11에서 말했던 ‘내부에서 울려나오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상에서 명상의 활용에 대해서

고인이 된 휴 린 케이시 박사(에드가 케이시의 아들)는 심리학과 초심리학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 아버지의 리딩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의 명상의 활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리딩 1861-12에서 ‘명상을 해서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에드가 케이시는 위트있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어떤 정보라도 가능합니다. 당신은 낚시에 쓸 지렁이를 파내는 일부터 협주곡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휴 린 케이시는 명상이란 고요함 속에 침잠하는, 긴장의 이완과 느긋함을 추구하는 과정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항상 최우선의 목적인 무의식이라는 고차원의 영역을 열고, 자아를 창조력의 의지에 완벽하게 일치시킨다는 목적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명상을 진지한 수련이 끝없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에드가 케이시가 리딩 274-3에서 말한 것을 안도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주시해 보라.

“명상과 기도에 있어서, 오랫동안 그것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으며, 삶의 만족을 주는 주변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들이 마음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즐겁고, 친절하고, 사랑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분명 명상은 우리 내부의 신을 찾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중요한 질문들을 탐색하는데 있어서 명상의 기술은 여러 면에서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케이시가 보여주었듯이 명상은 우리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존G.풀러,『삶의 열가지 해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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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기에게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들을 세워두고, 관상가를 불러 말했다.
“그 애들의 얼굴을 잘 들여다보게, 장래에 누가 운이 좋겠는가?”
얼굴을 요모조모 살핀 관상가가 말했다.
“곤이 운이 좋습니다.”
기는 기쁘고도 놀라워 물었다.
“어떻게 좋은가?”
관상가가 대답했다.
“곤은 평생 정부가 주는 돈으로
고기와 술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자 기는 울음을 터트리며 슬퍼했다.
“불쌍한 것! 내 불쌍한 것!
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관상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궁궐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은총이 온 가족에게 미치고, 부모에게는 더욱 그러할진대
그런 운명을 어이 나쁘다 하십니까?“

기가 말했다.
“어찌 그런 운명을 좋다고 기뻐하겠는가?
고기와 술은 입과 배를 위한 것인데,
좋은 운명이라는 것이
그저 입과 배에 좋은 것이란 말인가?
왕의 음식이라니,
곤이 왜 그것을 먹는단 말인가?

나는 양치기가 아닌데
집안에 갑자기 양 한 마리가 태어나고,
나는 사냥터지기가 아닌데
뜰 안에 메추라기가 가득하다니,
이게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내 아들과 내 자신이
그저 하늘과 땅을 마음껏 떠돌며
자유롭게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소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오.

나는 내 아들과 내 자신을 위해
하늘의 기쁨과
땅의 소박한 열매 외에는
다른 기쁨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오.

나는 이익도, 계획도 꾸미지 않으며,
어떤 사업에도 관여하려 하지 않고
내 아이들과 도만을 구한다오.

나는 삶과 투쟁한 적이 없소.
그런데 한번도 추구하지 않은
이 이상한 약속이
좋은 운명이란 말이오!
모든 이상한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
나는 이런 운명을 겪을 짓을 하지 않았다오.
이건 불가사의한 벌이오.
그래서 내가 슬피 우는 것이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기는 아들 곤을 떠나보냈다.
도중에 곤은 도적들에게 잡혔는데, 그들은 그를 노예로 팔아버리려 했다.
그대로 팔 수 없으니까 그들은 곤의 발을 잘랐다.
도망칠 수 없어야 값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적들은 곤을 제나라에 팔았고, 곤은 중앙로의 문지기가 되었다.
그는 평생 나라가 주는 고기와 술을 먹게 되었다.
이것이 곤의 좋은 운명이었다!



『장자의 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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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도날드 월쉬, 조경숙 역, "신과 나눈 이야기", 아름드리미디어.

너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죽는 한이 있어도"라고 하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살아서 꼭"이라고 하는 게 더 멋지지 않느냐?       -p.13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자주 영상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운송수단을 쓰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이다.  -p.15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p.35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p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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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라는 표현을 즐겨 쓸 때가 있었다. 삶은 죽음 같았고, 그래서 목숨을 건다고 해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의로 가득찬 무엇을 본다면...아픈 것은 나쁘게 보이지만 몸이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몸부림이다. 몸에게는 어떤 악의도 없다. 악의가 없는데도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선의를 오로지 선의로만 본다면 그때도 앗아감이 있을까? 두려움 때문에 선의를 악의로 돌변시키고 있는 걸까?

나는 언젠가 영상으로 어떤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매번 그 영상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일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웠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것을 보지 않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없을까봐 두려웠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단 두 가지 감정으로 구분해야 한다면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느낌과 생각을 넘어선 영상과 체험이 있었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어두워졌던 게다.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간단한 것이냐. 복잡한 것은 행위로, 체험으로 드러날 수 없다. 단순한 것은 드러난다. 사랑 아니면 두려움...바로 이 순간. 아주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기준을 갖는 것은 행운이다.

사랑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구절은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 발가벗고 섰다. 당신이 내게 준 옷을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던 그 미치광이 성자를 생각나게 한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사는 용기를 모든 사람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그...그러고보니 그는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요"라고 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구나.

그러나 마음은 얼른 두려움이 뭔지, 사랑이 뭔지 니가 아느냐고 물으며 이간질을 한다. 아는 것보다 느끼는 쪽을, 느끼는 것보다 체험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나는 대답한다. 내가 사랑하는 노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성가가 요즘 입에서 흘러나온다. 화두가 일면 "사랑해"라는 말이 같이 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여전히 모르는데 왜 그 말이 아무 데서나 튀어나올 것만 같은가. 튀어나올까봐 두려워하는가. 마치 "사랑한다"고 말하면 수만 가지 문제가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두려움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탓일까?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못하고, 여기 중얼대는 자리에서 말하는 걸까? 사랑해.

이 말을 하기 위해 이런 변명들이, 혹은 신의 말을 빌어야 했을까. 말은 생각보다 느낌보다 영상보다 체험보다 더 왜곡되기 쉬운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애초에 나는 선의와 영상에 대해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덧붙이다 그 이야기로 흐른다. 어디서든 튀어나올 것 같은 그 "사랑해"가 여기서 그냥 튀어나와 버린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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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니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 아닌가 싶네요.

이누아 2006-12-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으로 하는가, 두려움으로 하는가...일을 할 때 생각해 보게 돼요. 벌써 한 해가 저뭅니다. 건강하세요.
 

삶에는 정답이 없다.

                                       -법정스님

삶에는 정답이란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심지어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너무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오답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메고 다니는 것이
습(習)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오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습니다.

결혼을 누구와 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것이며,
대학을 어디에 갈까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어느 직장에 취직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 때 그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그 때 또 그 때 ..한 없이 삶의 오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세요.

정답, 오답 하고 나누는 것이
그 분별이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지
우리 삶에는 그런 구분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어느 길이든 정답 오답 나누어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냥 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정답인 것입니다.

정답 아닌 정답이며, 오답 아닌 오답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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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것들


민들레의 밤하늘


산책

 

 

이철수 판화전을 다녀왔다. 그림은 누르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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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5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06-11-1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철수님 판화전을 하는군요. 저도 몇 년 전에 이철수 판화전에 가서 너무 감동 받아서 한 점 사가지고 온 적이 있습니다, 거실 한가운데 걸어두고 볼때마다 마음이 맑아져서 참 좋더군요. 좋은 그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_()_

낯선바람 2006-11-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것들 그림이 참 이쁘네요^^

잉크냄새 2006-11-1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들레의 밤하늘,,,너무 잘 어울리네요.

이누아 2006-11-1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러셨군요. 전 대구에 사는데...전시회를 여러 곳에서 하는 건가요? 같은 도시에 살지는 않는 걸로 아는데...첫인사처럼 인사하시네요. 아, 잊으셨군요.^^ 님이 결혼하시기 전에 제가 님의 서재를 들락거리며 몇 번 댓글을 남겼었습니다. 요즘은 가만히 보는 편이지만요. 그러고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군요. 그럴만해요. 님의 서재에 동무가 생겼지요? 아기요. 제 서재 들러서 댓글 남겨주셔서 반가워요. 평온하세요.

혜덕화님, 108배에, 금강경에, 삼천배에...제가 수행하는 것도 아닌데 왜 님의 수행 소식을 접하면 흐뭇하고 즐거워지는 걸까요? 마음 맑으신데 맑음을 더하시니 넘쳐 곁의 사람들도 다 맑아지겠어요.^^

사수자리님, 이번 판화전 포스터에 쓰였던 그림이에요. 이뻐요, 작은 것들.

잉크냄새님, 같은 걸 보고 함께 즐기니 맘이 흡족해요.^^

2006-11-16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11-1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 전시회하는 곳이 우리집과 가까워요. 영화처럼 님과 스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님과 스칠 장소로는 미술관이나 서점이 제격일 것 같아요. 저도 참 감사합니다. 님도 아가도 아가의 아빠도 모두모두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