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친정 엄마처럼 의지하는 분이다. 외사촌 오빠는 나와 친정 오빠가 자취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마땅히 가야할 장례였지만 외사촌 오빠는 코로나로 아무도 못 오게 했다. 어쨌든 울적했다. 큰외숙모가 어떻게 사셨는지 엄마에게 여러 번 들어 마음이 안됐기도 했지만 혼자 사는 엄마가 큰외숙모를 생각하며 울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쓰였다. 결국 남을 염려하는 것은 짧고 나를 염려하는 것은 길다. 나는 돌아가신 분보다 엄마를 더 염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평안은 나와 밀접하다.

 

시골집 보일러 배관이 터졌다. 배관 공사도 하고, 보일러도 바꾸었다. 살다 보면 예정에 없는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천재지변, 사업 실패나 암 같은 큰병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사를 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갑자기 다치거나 하는 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사람만 그렇겠는가. 살아 있는 것들이 저마다 이런 번거로움을 겪는다는 생각을 하면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내고,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

 

문성해 시인의 시는 편안하게 읽히면서 시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대부분 새로운 것을 원하고, 새로운 것을 쓰려고 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 놀람을 주기도 하지만 피로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그에 비해 시인의 시는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 편안함 안에서 잔잔한 파문이 인다. 가만히 들여다 보게 된다. 시인의 다른 시집도 주문해 두었다. 

 

책이 어렵다기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혼돈스런 책이 좀 있었다. 그중 막스 피가르트의 책이 있다. [침묵의 세계]가 무척 좋았는데 [인간과 말]을 읽다 보니 침묵의 세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말의 선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첫 장에 있다. 말이 있기 전에 말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오르게 한다. 아이디어가 있고,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느낌은 그가 말하는 말의 세계에 이끌리지만 생각은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다음 주엔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단축 수업이긴 하지만 점심을 먹고 오니 내가 좀 편할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단축 수업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몰라도 시간은 간다. 벌써 3월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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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성해

산책하는 사람에게-안태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김희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땀 흘리는 시-김선산, 김성규, 오연경, 최지혜 엮음

로르카 시 선집-로르카

천 개의 아침-메리 올리버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정훈교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데이비드 실베스터

플러쉬-버지니아 울프

인상과 풍경-로르카

광기의 역사-미셸 푸코

헤테로피아-미셸 푸코

인간과 말-막스 피카르트

아직도 시를 배우지 못하였느냐-김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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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28 1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때문에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어머님도 너무 상심하지 않으시기를....

이누아 2021-02-28 20:43   좋아요 2 | URL
예. 그렇네요. 함께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축하 받을 일이 있어 마음과 몸이 분주했다. 새해가 되면 서재에도 자주 오고, 글도 좀 쓰려고 했는데 서재 지인들 글 읽는 것조차 제대로 못했다. 못해도 괜찮다, 소리내어 말해본다. 작년이나 올해나 하루는 하루다. 하루가 지는 저녁이다.

 

몇 년 전 모임에서 이규리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곧 터질 것 같은 슬픔, 슬픔을 에워싸고 있는 침묵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나는 좀 버거웠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지금은 버거운 느낌은 바래고 햇살만 남아 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시인의 목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시집이다.

 

[뿔바지]는 읽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준규 시인의 [삼척]에 '뿔바지'에 관한 글이 있다. 이게 뭔가 싶어 검색했더니 품절. 중고책을 샀다. 후반부를 읽다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글인 것 같은 느낌. 판권에도 지은이가 자끄 드뉘망으로 나와 있지만 번역자와 해설자를 보고 확신했다. 장난쳤구나. 자기들끼리 재미있었겠다. 나는 재미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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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이은규

우울은 허밍-천수호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삼척-이준규

아무는 밤-김안

뿔바지-자끄 드뉘망

 

밝은 방-롤랑 바르트

뭉크-유성혜

저항하는 지성, 고야-박홍규

독서의 궁극: 서평 잘 쓰는 법-조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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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31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이누아님 돌아오신것 반갑워서 별가루 *˝˝*.*˝˝*.*˝˝*.뿌리고 잘모르지만ㅋㅋ 추카 추카 *˝˝*.*˝˝*.*˝˝*.합니다 ㅋㅋ 뭉크저책 많이 우울해져여 ㅜ.ㅜ 이누아님 1월에 마지막날 따숩고 평안하게 보내세요.^.^

이누아 2021-01-31 22:38   좋아요 2 | URL
별가루까지 맞으니 서재에 올 기분 납니다.^^ 축하할 일이 뭔지 묻지 않고 축하해 주는 이런 배려가 좋아요.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1-01-31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뿔바지 같은 책도 있군요. 음 이런 책이 뭔가 정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시도이거나, 아니면 최고의 성취를 보여주거나 하는게 아니라면 모르고 읽는 사람은 정말 기분 나쁠 듯합니다.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일이겠거니 하고 살짝 축하인사를 건넵니다. ^^

이누아 2021-01-31 22:49   좋아요 0 | URL
뭔가 의미가 있는데 제가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약간 낚인 느낌이에요. 이준규 시인 시집에 몇 번 나오거든요. 이준규 시인이 해설을 썼더군요. 김태용 소설가가 진짜 지은이고. 모두 책 속에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고요.

살짝 건넨 축하인사, 건네 받아요. 고맙습니다.
 

이달에 읽은 책에 대해 몇 마디 하려고 앉았는데 입이 안 열린다. 쓰면 되니까 입 따위는 필요 없는데 입이 안 열려서 머리가 안 열리는 건지, 머리가 안 열려서 입이 안 열리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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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옹 파율, 돌의 부드러움

레옹 크노, 문체 연습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필립 로스, 전락

주노 디아스, 드라운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김경미, 카프카식 이별

김생,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

이승은,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박기섭, 오동꽃을 보며

-다시-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송현섭, 착한 마녀의 일기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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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30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옹 크노의 책은 74쪽 까지 읽다가
결국 못 다 읽고 오늘 반납했네요...

리스펙토르 작가의 책은 두 권이나
샀는데 언제 읽을 지 미정이고요.

주노 디아스의 <드라운>은 정말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마리옹 파욜 작가는 처음 들어 보네요.
내일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볼까봐요.

이누아 2020-12-30 18:06   좋아요 2 | URL
문체 연습은 앞부분이 좋았어요. 뒷부분도 다른 문체를 보여 주지만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의역(?)이 있어서...74쪽까지면 거의 다 읽으신 것 같은데요.^^

돌의 부드러움은 그림책이에요. 독특하고 묘해요. 아빠는 암으로 죽어가고 가족들은 그를 돌보는 이야기다, 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책이에요. 그걸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저는 맘에 들었어요.

scott 2020-12-31 12:07   좋아요 0 | URL
매냐님이 중도 포기 하셨다고 하시니 ,,,
문체 연습,,,
망설여지네요

하나 2020-12-30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멋있는 이웃분들이 계속 언급하시니 피할 수 없을 거 같네요. 이누아님이 읽으시자마자 문체랑 사유가 막 변신하시는 거 보고는 더 궁금해진 1인입니당. 올해 덕분에 서양미술순례와 오래 전에 사랑했던 시집들에 대한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누아 2020-12-31 21:29   좋아요 1 | URL
올해 그 멋있는 이웃 덕분에 저도 안 읽던 소설 몇 편 읽었어요.^^

내일이 새해군요! 내년에도 맛있는 책 시식하러 님의 서재에 어슬렁거릴게요. 책으로 즐겁고 글로 흥하는 새해 맞으시길!

scott 2020-12-31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2021년 복주머니 요기 놓고 가여 ㅋㅋ

해피뉴이어 !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이누아 2020-12-31 21:32   좋아요 1 | URL
신통한 재주를 가지셨네요. 알라딘의 지니 같아요. 복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몰랑몰랑하고 동그란 복이 만져지네요. 어떤 복일까요? 나눠주신 복만큼, 아니 그 이상 복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누아 2020-12-31 21:36   좋아요 1 | URL
문체 연습은 이렇게 쓸 수 있구나, 하고 즐겁게 읽고 지겹거나 재미없어지면 그만 읽어도 괜찮은 책이에요. 발상 자체가 책의 중요한 부분이라 문체를 달리할 때의 느낌을 알고, 자기 글에 적용해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끝까지 읽는 게 목표가 되지 않아도 돼요.

서니데이 2020-12-31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새해인사 왔습니다.
올해는 조금 남았지만, 새해는 그만큼 더 가까워졌습니다.
내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을 거예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날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누아 2020-12-31 22:02   좋아요 1 | URL
서재에 들어오면 님의 글이 있나 살펴보게 돼요. 꽃다발을 받는 느낌이기도 하고, 불 켜진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기도 했어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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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사람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상상하는 순간 정말로 불행해지기 마련이다.<마리> - P186

나는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했지. 동요와 불안도 느낀 적이 없어. 그 어떤 일에도 불안을 느낀 적이 없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하더군. 마치 유령을 대하듯이.<마리> - P205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스스로를 제어하기 때문에 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불안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물론 내가 환상을 꿈꾸고 있다는 건 나도 안다.<환상> - P243

오히려 고독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웃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억지로 웃거나 미소를 지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억지웃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가혹한 과제다.<철가면> - P283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인생은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내내 별 내용이 없을 거라는 확신은 뭔가 무한한 것을 느끼게 해준다. 무한한 것은 불가피한 최소한의 일만 하고 잠이나 자라고 명령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내가 이러고 있지 않은가.<헬블링의 이야기> - P386

그는 지루하고, 뭔가를 죽도록 갈망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기만 하면 좋으련만, 하고 그는 생각한다.<브렌타노(1)> - P430

동굴 아래로 내려가려니 당연히 겁이 나서 흠칫 물러섰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서 기분이 짜릿했다.<브렌타노(1)> - P437

아마 오전 열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렇게 홀로 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데, 누구의 손일까? 누군가의 몸을 어루만지고 싶은데,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툰의 클라이스트> - P441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아프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못하니까 아픈 것이다.<툰의 클라이스트>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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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3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2-24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2020년 마지막 달 행복 따숩하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V
트리 한그루 이누아님 서재방에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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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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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ry ..:+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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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 마스 ^.~

이누아 2020-12-25 09:36   좋아요 1 | URL
이모티콘이 없던 때, 문자에 그려보내던 그림 같아요. 나무 십자가 가지에 웃음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scott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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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저는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나는 바닥에 앉아 잠들 때까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눈 위에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여기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시에도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를 바랐다. 나는 눈 속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지만 사실은 거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크리스마스 이아기> - P24

게으름뱅이라고 오해받는 덕분에 획득한 부족한 존경심을 나는 즐긴다.<헬블링 이야기> - P29

특히 퇴근시간에 모자를 집어서 정수리에 살그머니 얹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고 기쁘다. 그것은 매일의 일과가 종결되는,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순간이다. 내 삶은 지극히 작고 사소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기이하고 놀랍다. 인류의 운명과 관련한 위대한 이상을 추종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 본성은 추종보다는 비판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일은 나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헬블링 이야기> - P37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 P74

이미 당신에게 밝혔듯이, 나는 전적으로 편한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상관하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 P75

진정한 시인은 먼지를 선호한다. 다들 잘 알다시피, 가장 위대한 시인이 소망하는 자리는 매혹적인 망각과 먼지 속이기 때문이다.<시인들> - P100

그렇게 흙과 대기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구슬프고도 불가피하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갇힌 가련한 죄수로구나,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은 결국 다들 마찬가지로 가련하게 갇힌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것은 오직 한 가지 길, 흙 속의 구멍으로 들어가서 눕는 길뿐,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무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산책>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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