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19
 


  내가 ‘리프킨’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보건대 고등학생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 중 한 명이 “리프킨의 책 같은 걸 읽고 싶어. <소유의 종말> 같은 책 말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멋도 모르고 맞장구를 쳐줬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개 그렇다. 막연한 관심으로부터 여러 가능성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는 대학생이 되면 대개 깨닫게 된다. 지대한 관심을 애초부터 가졌던 이들은 강의 토론시간에 낭중지추가 된다. 다른 학생들이 어느 정도 위화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전공과목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며 쩔쩔 매던 나는 함께 다니던 너덧 명의 친구들과 함께 “걔는 아마 사회학 전공일 거야.”라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안이한 태도였다. 

  제대 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뭐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나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문제들에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다시 읽은 진중권, 박노자의 책이 마중물이 되었고, 보다 거시적 시각들이 필요했을 때에는 우연히도 교내 독서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벼렸던 것이 도움이 되 <자유론>과 같은 원칙적 고전을 읽을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사실 추천이라기보다는 “맹렬한 비판과 비추” 탓에 호기심을 갖고 읽은 것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건 리프킨의 <엔트로피>였다. 

  따지고 보면 리프킨은 훌륭한 저자가 아니다. 중복되는 표현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어찌 보면 괜한 내용 부풀리기를 위해 비슷한 주제를 가진 내용을 챕터별로 나눈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았다. 쉽게 쓰고자 한 그의 전략이 오히려 적절한 예시에 대한 그 나름의 코멘트를 가볍게 보이게 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통독한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서 리프킨은 성공한 저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교수의 ‘비추’의 근거는 리프킨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 

  과학에 정통한 이들 중 대부분은 리프킨이 과학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사회과학에 적용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그른 것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는 자연중립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수는 “타분야의 사람이 자신이 전공하지도 않은 분야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할 때는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책”이라며 한 권의 과학 도서를 위해 300여 권의 예비독서를 한 빌 브라이슨의 노력과 비교하며 리프킨의 안이한 태도를 비꼬기도 했는데, 그 강의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 날 집에 돌아와 강의 리뷰를 썼던 기억에 오늘 그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 역시 리프킨을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읽지도 않고 비판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말이다. 

  교수의 말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사회로 끌어온다는 것이, 문학으로 지차면 일단 ‘비유의 오류’를 범한 셈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과학의 통계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들은 대개 “통계를 산출할 대상 집단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에서 비판의 근거를 찾는데, 리프킨의 <엔트로피>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가령 이렇다. 사회과학계에서 엔트로피가 포함된 열역학 법칙을 그들의 분야에 가져다 쓰기 위한 시도는 1960~70년대에 거의 세계적인 붐으로 일어난 바 있다고 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 자체가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걸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인간은 ‘투영의 동물’이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저무는 인생을 논하는 오래된 문학적 관습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뉴턴 이래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온 바에 따르자면 자연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우주에 걸친 법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삶을 ‘법화(法化)’시키는 원칙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아마 이 점이 <엔트로피>의 가장 큰 오류일 것인데, 인간의 집단인 사회는 열역학에서 다루는 통계집단인 분자보다 훨씬 작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우는 통계가 다룰 수 있는 최대의 숫자는 고작 70억이다. 반면, 열역학에서 다루는 분자집단은 천문학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한다. 간단한 예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종이컵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물의 최대량에는 대략 10의 23승이나 되는 물 분자들이 존재한다. 10의 23승이라는 숫자는 태양이 초당 발산하는 에너지를 kw로 환산했을 때나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인간들을 물 분자 정도 크기로 줄여 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얄팍하게 깔릴 것이다. (70억은 10의 9승이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규모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엔트로피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통계가 열역학의 법칙을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형’이라는 문제가 있다. 평형이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겉으로는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열적 평형이다. 평형은 ‘equilibrium’으로 보통 균형, 즉 ‘balance’로 오역되곤 하는데, 균형은 좌우의 개념이 있어야하는데 반해 평형은 그렇지 않다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컵 속의 물을 보자. 컵 속에는 H2O라는 물 분자가 앞서 말한 것처럼 10의 23승개나 들어 있다. 물이 증발한다는 것만 예외로 하면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다. 아니, 증발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외부에서 관찰이 가능한 ‘닫힌계(clossed system : 물질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의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넣었다고 하자.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실제 물속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 분자는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분자끼리 부딪혀 서로 수소나 산소 원자를 바꿔치기도 하고, 물 분자 입장에서는 마치 우주와도 같을 수조 안을 우주선처럼 열심히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없으나, 내부는 활발한 상태”라는 뜻의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시스템들은 대단히 어지럽게 움직이는 내부를 가졌으나, 결국 육안으로는 평형을 이루고 있는, 즉 이모저모 다 따져 봐도 평형인 것들이다.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회과학이 어려운 것이겠으나) ‘사회’라는 것은 육안으로 봐도 끝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상태이다. 지난 봄, 서울 지하철역 보관함에 폭탄을 넣어두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당시 시리아에서는 연일 끔찍한 폭력적 탄압이 계속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주검으로 거리에 나뒹굴고 있고 있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대략 천 여 개 안팎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지구’라는 것도 모자라 지금은 ‘제 2의 지구’를 찾기 위해 몇 개의 도구를 손으로 삼아 우주공간에 내보내고 있다. 인간의 사회는 결코 평형 상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엔트로피의 평형 개념을 무시한 채 인간 사회의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로 엔트로피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점들이 <엔트로피>의 ‘불성립’을 주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과학적 근거이다.   

  사회과학적 주장은 정확한 근거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주장들은 분명 <엔트로피>를 읽을 미래의 독자들, 혹은 읽었던 독자들이 생각해봐야 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리프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했고, 그것은 전(全)지구적 차원의 각성을 호소하는 글이었으며, 사람들이 열역학을 대체로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열역학 법칙의 사회과학 적용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인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메시지에는 총체적인 시대의 경고가 들어 있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봤으니, 이번에는 리프킨의 주장을 들어봐야 할 차례이다.

  <엔트로피> 초판이 나온 해가 1980년이다. 리프킨은 당시를 ‘기계의 시대’라 정의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류의 사고를 점령했을 때, 서양에서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이 이뤄졌었다. 그 결과 ‘운동하는 물체’만을 고려한 편향적 발전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완성한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뉴턴이며, 이것을 국가의 패러다임에 적용한 이는 로크, 그리고 경제를 설명할 때 사용한 이가 아담 스미스이다. 로크는 “개인 생산물이 늘어나면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른바 ‘트릭클-다운(trickle-Down)’을 주장하며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했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강조하여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하는데 일조했고, 실용주의 경제사관을 건축했다. 리프킨은 이들을 ‘근대의 적’으로 지목한다. 

  열역학 법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워낙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 일일이 게재할 사항은 못 되는 것 같아 리프킨이 왜 엔트로피를 이용해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적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열역학 법칙이란, 쉽게 말해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한데, 엔트로피의 총량, 즉 무질서의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에너지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하며, 형태만 변화한다. 인간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를 무용한 에너지로 만드는, 즉 ‘오염’을 뜻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우리보다 더 ‘오염된’, 즉 “에너지가 적은” 세상을 살게 된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보다 빨리 변형되면 진보도 더욱 빨라질 것이고,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되며, 따라서 시간은 절약된다.” 리프킨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갈한다. 

  리차드 윌킨슨은 그의 저서 <Poverty and Progress>에서 “구하기 쉬운 원료에서 어려운 원료로 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처리 및 생산기술을 이용해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에너지 발전사를 통시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가령, 리프킨이 예시로 든 것처럼 나무를 원료로 사용했을 무렵, 석탄을 이용했을 무렵, 그리고 원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지금을 서로 비교해보면 인류는 점점 수집하기 어려운 자원을 이용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마치 진보를 이루는 것처럼 광고되어도 정작 근로자 계급은 그들이 공장에서 만드는 양모로 된 옷을 전혀 입지 못한다는,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를 묻게 되는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리프킨은 엥겔스의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를 참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The Technological Society>의 내용 발췌를 통해 알려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에너지 대란이 점차 현실화되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갈수록 높아지는 유류세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최근 KBS는 우리나라의 해외 원전 개발 사업의 ‘자랑스러운’ 청사진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준 적이 있다. 중국에 비하면 한참 뒤쳐져 있지만 언젠가는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라는 잠재적 국가경쟁력의 선전인 셈이었다. 한편, 중국,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국제 에너지 세력판도의 변화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으며, 이로써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포감이 확산되어 있다. 각 나라들의 ‘덩치’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비해 사용가능한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악의 상황이 가까워지자 예년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는데도 왠지 수확을 덜한 것 같은, 이른바 ‘수확체감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미국이 이 현상의 가장 큰 피해국이라 알려졌다. 다국적 기업과 엄청난 규모의 중앙정부관료 체제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슈퍼 아메리카’의 맹점이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리프킨은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에 미국이 또 하나 있다면 지구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발명하고 개발한 것들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광고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현대식 화장실의 상관관계(질소화합물과 관련이 있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새로운 에너지 생산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도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새 에너지가 나오나보다.”고 생각할 뿐, 에너지 생산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결국 자유시장의 전체적인 물가를 인상시킨다는 경제의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못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량과 거의 24시간 가동을 중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에 현혹된 사람들은 발전소를 돌리는 돈이 우리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춰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리프킨은 “결국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은 납세자이다.”고 단언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컴퓨터, 보건 등 각 분야의 엄청난 수준이 ‘낭비’와 ‘오염’을 고발하는 리프킨의 주장은 1980년에 이미 제기된 것이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인들로 실체화되어 있다. 리프킨이 로마를 예로 든 도시화 비판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당시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도시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 주요도시들에 비유된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들은 인근 지역의 에너지 환경이 갖고 있는 생산용량을 훨씬 초과해버렸기 때문에 일단 국내 및 해외의 에너지 기반이 한계에 달하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I♡NY’이라는 테마로 방영한 KBS의 한 다큐멘터리가 갑자기 기억났다. 뉴욕의 신화를 설명한 영상이었는데, 리프킨의 주장을 듣고 보니 저 거인이 얼마나 많은 식량을 빼앗아 먹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뉴욕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서울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한 학자(Herman Daly)는 위의 문제점을 낳은 서양식 발전 모델이 지구의 미래를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세계 광물자원의 약 1/3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수준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다. 자원 생산량이 현대재로라면 미국과 동일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세계 인구의 18%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2%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으로, 나는 미국인들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세계의 기아인구 10억 명이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비유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이는 에너지 독점이다. 리프킨은 이러한 독점이 엔트로피의 법칙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현재의 사고 개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원이 0이 될 때까지 남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전쟁”을 치룰 것이며, 기아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태양 에너지가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으므로 리프킨은 그것이 대안이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는데, 그것은 태양 에너지를 사용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이 보유한 효율이 지극히 낮다는 것에 근거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운용대비 효율이 좋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세계의 인식이 바뀌면서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했고(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특별하다. 우리나라는 원전 폐쇄의 트렌드를 따라갈 대체 에너지 개발이 부족하나, 독일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지의 땅을 구입해 태양열 발전소를 직접 세워 그것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 여러 대체 에너지가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가장 원전의존률이 높음에도 트렌드에 맞춰 정치적 전략들이 제기되는 곳이다. 지금껏 태양열 에너지로 소위 ‘재미를 본’ 나라는 없다. 미국은 화력 발전소의 천국이고, 중국은 사상 최대의 원전 보유국이 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리프킨의 ‘전 인류적 호소’는 사실상 힘을 잃은 듯하다. 

  리프킨이 제시한 대안들, 아니 ‘혁신’들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원칙적이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원칙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참담한 현실을 씁쓸하게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인구의 전면적 감소와 농촌의 활성화, 민주적 기업조직,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소비 최소화, 세계 인구의 큰 감소(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불성설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등이 리프킨의 대안이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남긴 최악의 유물들을 거둬내기 위해 필요한 고통과 희생의 방안들은 이 정도의 무모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대안들은 그가 내리고 싶었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궁극적인 도덕률이란 가능한 한 에너지를 적게 쓰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독자들은 리프킨의 호소문이 아주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근검절약’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절실한 실천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프킨이 경계했던 낙관주의자들, 즉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전기와 물을 낭비하고 사치와 오염을 일삼고 있다. 이 책이 시대의 경종을 울려 많은 이들의 손에 들려졌었지만 종소리는 얼마나 오래 울리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창피함과 곤혹스러움에 한숨을 쉬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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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2011.11.18
 


  주요 석학들이 늘 하는 말처럼 비판의 글들은 모름지기 주제에 대해 언제나 성실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일부 집단의 이익을 대원칙인 도덕의 비호를 받는다고 설명하거나, 혹은 그것을 사익에 가져다대는 글들은 예리한 독자들의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에는 문제를 긁어 애써 부스럼으로 만들기보다는 문제를 그대로 직시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요즘 일부 칼럼들은 ‘공격과 방어’라는 단순한 메커니즘을 갖고 가볍게 던져지는 듯하다. 이런 글들은 대원칙을 훼손시킨다. 가령, 최근 정치관련 칼럼들은 ‘좌파 실종’이라는 전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아내는 힘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상대방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경향을 갖는다. 읽는 이에게 회의감을 주며, 그들은 대안의 실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대안의 텃밭인 대원칙에 대해 조금씩 불신을 보낸다는 것이다. 

  비판의 글이 가져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성질은 시의적절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띄워 그것들에 독자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하는 것, 즉 ‘공감성’이다. 이는 대체적으로 잘 지켜지는 듯하며, 여러 문제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관심 가질 것을 요구하는 글들이 많다. 특히 우리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주민에 대해 ‘보편인권’을 호소하는 글들과 여러 포럼들이 개최돼 근본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최근의 흐름은 매우 건강하다. 물론 칼럼과 포럼들이 실제 국민들의 행동에 즉각적인 변화를 형성할 수는 없겠지만 SNS과 블로그 등 자유로운 소통의 기반을 통해 인식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판의 글 특유의 차갑거나 뜨거운 분위기를 얼마간 사람의 ‘지적 체온’이 익숙한 온도로 유지시키는 위트가 들어 있으면 좋다. 특히 비유에 위트가 숨어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비유에 대해서는 장정일의 지젝 관련 서평 중 서문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자격을 갖춘 비판의 글들은 지식인들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탈바꿈시켜준다. 이 양심들은 구멍 난 사회의 옷을 꿰매어주고, 불붙은 뒷산의 화마를 진압해주며, 수술 도구도 없이 사람들의 지병을 서서히 치료해준다. 그런 점에서 일부 뜻있는 이들은 좋은 비판의 글들을 접해보기를 염원하는데, 나는 박노자氏(그의 조언대로 이제 타인을 언급할 때마다 뒤에 氏를 붙이는 것을 생활화해보고자 이렇게 적어본다.)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야말로 시대의 반성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몇 세대에 걸쳐 읽혀야 할 고전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초판 1쇄가 찍힌 지 이제 갓 10년이 되가는 책(올해 크리스마스이브이면 딱 10년이 된다.)을 일컬어 ‘고전’이라 부르면 터무니없는 소리라 하겠지만 이 책은 다소 특별한 점이 있다. 

  박노자氏는 외국인이었다. (얼마 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진보신당 입당을 위해 원서를 쓰려고 했는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그의 ‘교포 귀화인’이라는 특이한 신분이 현실적으로 많은 짐이 된다는 술회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제 3자’가 봤을 때, “한국이 왜 이렇지?”라고 생각되었던 부정적 측면들을 우리의 오래된 낡은 서랍에서 굳이 꺼내어 펼쳐 보인 책이다. 한국인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책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장터에 내놓을 만큼 ‘상도(商道)’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잘 안 팔리는 것은 둘째 치고, 왜 이런 물건을 장에 내놓았느냐고 쏘아붙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치부를 만인 앞에 드러낼 용기를 가진 이들이 적을뿐더러, 그것을 드러냈다고 한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질문들에 답할 마땅한 대안을 스스로 찾아내기 무척 어려웠다는 것이다. 일단 스스로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늘 어렵다. 

  예로부터 두 사람이 싸우면 둘과 전혀 상관없는, 즉 제 3자가 싸움을 조율해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했다. 객관이 도움이 되는 때는 많다. 박노자氏는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반성하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리가 반응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해보거나, 혹은 오만에 찬 부정을 하며 쳐다보지도 않는 것. 둘 중 하나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울은 어디를 향해 자신의 고개를 기울여줄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니, 나는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이 책이 시대의 고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챕터(3, 4부는 주제상 하나로 묶어도 됨직 하나 분량 상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들을 통해 박노자氏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이 사람 대하는 법에서부터 잘못되었다.”로 귀결되지 않나 싶다. 세부적인 내용을 파고드는 박노자氏의 예리한 눈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더라도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작위적 인식은 대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우리’라는 강력한 정서로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듯하다. 

  원인 중 하나는 한국의 현대성을 극찬한 공교육이다. 교육은 EBS의 모토대로 백년지계(百年之計)이며, ‘바른 사람’, ‘행동하는 지성’, 그리고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승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용되면 ‘세뇌’라는 불명예스러운 말로 불린다. 박정희에 대한 우리의 전근대적 생각이 그러하다. 나는 군생활 중 한 후임이 박정희의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한 번은 그와 함께 야간 보초를 설 기회가 있어 “왜 박정희를 좋아하느냐?”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경제개발과 베트남전쟁파병을 예로 들며 (경계근무 중에 물론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몇 십 분이고 작은 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열변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전 세대로부터 마치 ‘거룩한 성물(聖物)’이라도 물려받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베트남전쟁파병을 통해 대외적인 폭력을 보란 듯이 행한 우리나라의 ‘일제식 군국주의’가 찬양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역사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칼럼과 역사책들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설명을 읽고, 박노자氏의 표현대로 ‘일그러진 현대성’이 어디서부터 발원되었는지 알게 된 나는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표의 박정희 동상 방문을 두고 한 트위테리언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논하며 조용히 숨어 있는 ‘공주’가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동상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고 강력한 비난의 글을 올린 이유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살에 와 닿는 공감은 ‘아직도 폭력이 충만한 사회’를 통해 박노자氏가 우리나라 군대의 현실과 제대한 예비군들이 겪는 외상에 대해 비판한 부분이었다. 어제 집안 제사가 있어 친척들이 모였을 때, 내년이면 신검을 받고 군대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사촌동생에게 나는 “할 수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해줬다. 겸손하고 현명한 자는 2년이라는, 혹자들이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긴 시간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겠고, 때문에 그것을 변으로 삼아 핑계 대는 것은 호소력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내가 직접 겪고, 내가 일면 배웠던 일명 ‘갈굼’이라는 폭력에 사촌동생이 물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군대는 사회와 완전 별개인 집단이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 입대자를 물들여 병장 즈음 돼서 제대할 때에는 사람의 인성을 거의 180도 변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대체적으로 군필자들은 그들 나름의 ‘패거리 정신’을 갖고 있다. 정신적 고통을 견뎌 어떤 인격적 승화를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하는데, 이 얼마나 쓸데없는 행위란 말인가. 

  ‘역사 속의 교훈들’이라는 조그마한 제목의 글에서는 얻는 바가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최근 읽은 기사와 칼럼들 중 여기에 보태어 생각할 것들이 있어 귀중한 부분이 되었다. 평소 ‘보편인권’이라는 대제(大題)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근래 들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어떤 실천적 대안(대안이라고 할 것까지 있겠는가 싶지만)을 고려해볼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차에 어제 <한겨레> 신문에서 ‘2011 아시아 미래포럼’의 논의 내용들을 소개해 준 대목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중 나는 ‘이주민에 대한 방송보도 패러다임’을 눈여겨봤는데, 복기해보자면 이렇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아시아판 전 편집장이었던 패트릭 스미스가 말하기를 “아시아 국가들이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자세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언론사부터 편집인에서 기자들까지 스스로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대학 교수가 적절한 답을 준 것 같은데, 그는 “국내 언론은 한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더 확대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넓혀 생각해보면 상업성에 물든 언론들이 중립적 감각을 잃고, 사람들이 별 관심 없어 하는 인권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요즘 한류에 유독 열광한다. 나르시스를 보는 듯하다. 나도 얼마 전 BBC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메인 화면에 한류열풍관련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뿌듯해하긴 했고, 한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들을 여럿 리뷰하기도 했는데, 박노자氏는 이미 이를 예측했는지 10년 전에 지금의 ‘환상’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미등록 체류자 인권’이라는, 김창보氏의 오피니언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역시 최근 들어 문제가 된 교과서 집필 누락 사건인데, 이는 사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한 국회의원이 안철수 교수에 대한 정치적 반격을 위해 안 교수가 언급되어 있던 교과서의 내용을 삭제했다는 기사는 사실 빙산의 일각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화항쟁의 내용을 앞으로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소식이다. (다행이도 이 글을 쓸 무렵과는 달리 최근 교과부는 상기 내용들을 누락시키지 않도록 조치했다.)이에 대해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잘못된 교과서 집필기준은 검열이며,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교과부가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집필기준에서 뺐다. 강요된 집필기준에 따른 자기검열과 교과부 검정을 거쳐야하는 위기에 놓였다.”며 열을 올렸다. 나는 이미 교과과정 중 배운 내용이고, 그와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들이 공영방송을 통해 충분히 방영되어 왔음을 알고 있던 터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지만 “어떻게 그걸 뺄 생각을 다했지?”라는 경악스러운 질문을 허공에다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국가가 어떻게 타국의 역사왜곡을 민족의 힘으로써 저지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분명 도덕에 입각해 그 대원칙에 준하는 진보를 이룩해야 함이 옳다. 그를 위해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주변을 돌아봐야 하는데, 우리가 2002년 월드컵을 응원하며 내뱉었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구호가 실은 우리 나름의 ‘우리식 환상’을 뒷받침하는 탄탄하면서도 강력한 초석이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믿기 힘들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부패가 실은 자긍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긍심을 잃으면 민족적 열망과 추진력도 사라지리라 누구나 예상하기 때문에 부패를 자긍심을 통해 기꺼이 가려왔던 것이 현실이라고 박노자氏는 말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도덕적 원칙이 있으나, 서해교전 시 우리나라의 막강한 화력에 격침당해 물귀신이 된 북한 병사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냐는 그의 말은 열렬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백 번 옳고 바른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우리라고 과연 백의민족 속에 감춰진 폭력과 부당함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의 추궁은 이어지는 장에서도 계속된다. 대학생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퇴폐한 상아탑’으로써의 대학, 특권집단으로써의 대학,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해 기업으로써의 대학도 비난을 받고, ‘우리’라는 감수성 짙은 담론을 통해 은폐되어 온 사건들이 드러나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는 1999년 8월의 ‘도의원이 인터걸 사업’이라는 <중앙일보>보도를 인용하고 있는데, 수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는 사건이었다.) 하고, 미국 등 우방을 위해서라면 역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행태도 파헤쳐진다. 마지막으로 바트자갈의 비극적인 사건(불법체류자를 착취한 영세 자본가들의 행태이다.)은 우리나라의 소름 돋는 ‘인종 서열주의’를 보여준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통과된 차도르 착용 금지 법안이 세계적인 논쟁으로 떠올랐을 때, 각 유럽의 극우파들은 자국의 경제사정도 좋지 않은데 귀화한 외국인이나 외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원리로 심지어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한 최악의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의 색이 옅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 비열한 사건의 발생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심리학계의 이론에 빗대어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냉혈안적인 시선이 “나는 불법체류자다.”라고 국내 체류 외국인들이 스스로를 각인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위의 칼럼 소개로 하나 짤막하게 대신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한 외국인 노동자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대체법안이 나왔는데, 그 법의 보호자는 ‘미취학 아동’뿐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현대적 지성을 상징하는 루쉰이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이런 구절을 적었고, 박노자氏가 그것을 서문과 뒤편 책날개에 옮겼다. <광일일기> 소제목 ‘9’의 인용구이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
  루쉰이 하고픈 말은 이은 소제목 ‘10’의 한 부분에 교묘히 숨겨져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이것은 아마도 벌레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될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겁니다.” 

  박노자氏는 이것이 한국의 현대사회가 지닌 모습이라고 했다. 대가 렘브란트가 한국의 초상화를 그려줬다면, 우리는 어떤 걸작을 보며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었을까. 다양성과 평등을 외치며 어딘가 사회의 각박함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의 물꼬가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여전히 좋은 일은 간혹 나오고, 좋은 사람들은 강호에 숨어 소리 없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인생을 옭아매는 여러 부차적 ‘주체’들에 휩쓸려 다니는 ‘객체’가 되어 가고 있고, 판단력은 흐려져 정치하는 이들이 국민을 쉽게 우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자긍심을 믿어 도처에서 일어나는 악행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그것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이르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럴 무렵에 박노자氏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가 타지에서 책과 사상을 통해 사랑하던 조그마한 나라의 실제 모습은 달랐다. 뼈아픈 역사 속에서 신음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동안 우리가 누구를 죽여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잠재적 살인자였다는 것을, 그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단한 용기로 적힌 책이라, 곁에 두고 오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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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15
 


  얼마간 읽을거리들을 쌓아놓고 보니, 최근 들어 나의 주제가 ‘인간’으로 좁혀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대략 일곱 권인데, 새벽을 꼬박 새는 부지런을 떨면 몰라도 다음 주까지 일일이 정리하며 통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독서의 씨줄과 날줄을 제법 촘촘히 해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책들에게 기대를 해봄직도 하다. 조만간 읽을 책이란 (재독까지 포함하여)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 1999), 노암 촘스키의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시대의창, 2005),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 강준만의 <입시전쟁 잔혹사>(인물과사상사, 2009),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001),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 2007),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다. 

  그에 앞서 지난 여름방학을 틈타 천천히 읽었던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자유론>(책세상, 2005)을 재차 읽었다. 후에 그의 <공리주의>도 접해야겠다고 벼렸기 때문(<자유론>에서 밀이 개인의 차원을 사회와 대비하여 서술했다면 <공리주의>는 사회윤리이다.)에 언젠가는 재독하고자 한 터였다. 미리 정리해놓은 바가 있어 읽기에 큰 불편은 없었지만 그의 고민이 담긴 문장은 곱씹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많아 여러 번 접한다 해도 술술 읽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주 얇은 책인데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무려 한 세기도 더 된 이 책의 위력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숙원은 먹지 않을 홍어처럼 그저 삭혀지고만 있는 것일까. 나는 대중들이 그들의 삶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듯 이 시대가 분명 변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행동’되는지 확고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직감하기 시작했다. 유명 저자들과 논객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세계는 분명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유의 포석을 밀의 <자유론>에 두고자 했다. 결국 나머지 일곱 권의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원칙(그런데 이것이 과연 흔히 말하듯 고리타분한 것일까?)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관도 한 몫을 했다. 때문에 이번 독서는 조금 길게 복기해본다. 마치 차서한 사람마냥 조바심 내며 읽었던 이번 여름의 기억이 아쉬웠기 때문이리라. 

  밀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은 자기 보호를 위해 타인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나, 다른 이유로는 불가하다.”는 말로 일축된다. 복기해보건대, 이것은 그가 말한 효율(utility는 곧 항구적 이익(permanent interest)과 같은 개념이다.)이 도출되는 원리이다. 쉽게 말해 “남에게 참견하기 위해서는 나의 참견이 반드시 남에게 유익해야 한다.”는 win-win의 원리이다. 바꿔서,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다.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경우에 사회는 간섭하면 안 된다.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명제로부터 밀은 ‘인간 자유의 기본 영역’이라며 세 가지의 경우를 언급한다. 그 전에 그는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바로 각 개인이다.”라고 못 박는다. 이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세 가지 기본 영역 중 첫 번째는 ‘내면적 의식’, 즉 속마음이다. 많은 이들이 역사를 회상하며 전제정치의 획일성 앞에서 치를 떤다. 오웰의 소설 <1984>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구절로 독자들을 옭아맨다. 이러한 역사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의사표현의 자유는 얼마만큼 허락되는가를 물으면 결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드니 로베르가 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의 서문에 적절한 예시가 나와 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아마 아주 유명할 것인데, 1970년대 말, 리옹 대학의 프랑스문학과 교수 포리송이 나치옹호발언을 했다가 옷을 벗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촘스키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자 프랑스인들은 촘스키를 나치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해명이 필요했던 촘스키는 자유가 무엇인지 프랑스인들에게 일러줬는데, 로베르에 따르자면 그 해명은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 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볼테르의 유명한 경구를 연상시키는 글이었다고 한다. 이는 밀이 말한 ‘자유’이다.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가 뭘 좋아하고 바라는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또한 결사의 자유도 갖는다. 무려 15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밀은 “사회가 설정한 성공 기준에 맞게 살도록 강하게 종용받고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개탄을 마지않았다. 우리는 ‘성공 기준’이 무엇인지 암암리에 알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그 기준에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수많은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리글리가 <나쁜 사회>에서 말한 ‘마태 효과(Matthew Effect)’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는 생존의 투쟁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 사회가 일종의 강제수용소와도 같다는 항간의 판단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개그콘서트(KBS)의 한 코너에서 모녀의 대화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사윗감으로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딸에게 어머니는 “너만 좋아해주는 남자면 좋지.”라고 운을 뗀 뒤, 속마음을 드러낸다. 둘째 아들에,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 키는 183cm에, 얼굴은 이병헌. 밀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다름 아닌 사회이다.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개인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왜 그런가?”라 묻는 것을 두려워하고, 혹 묻더라도 질문의 끈을 쉽게 놓아버리게 된다. 

  밀은 뭔가 말하려는 우리의 입을 잠시 막아놓는다. 그리고 두 가지 논리를 펼친다. 첫째, 만약 우리가 말하려는 의견이 진리인데 침묵을 강요당할 경우, 둘째 그 의견 중 일부만이 진리인데 역시 강압적으로 입이 틀어 막힌 경우이다. 여기서 밀은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서 파헤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자주 오류를 범하므로 판단에 있어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철저한 부정과 비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타파하라 호소한다. 관습적 사고란 믿음과도 같다. 루이스 월퍼트는 <믿음의 엔진>에서 그 ‘믿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고발한 적이 있다. 자유롭고 싶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통제와 압력 속에서 욕구를 이루지 못하면 점점 용기를 잃고 퇴화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채로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믿음에 자신의 신념을 맡기게 된다. 이에 밀은 말한다. 

  “전도유망한 지성인들이 소심해져서, 비종교적 또는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용감하고 씩씩하게 독립적인 생각의 날개를 펼칠 엄두를 못 내게 될 때,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도 복기해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밀은 자유가 용기의 산물이라는 시각을 철저하게 옹호한다. 

  두 번째 경우, 즉 우리가 하려는, 하지만 애당초 발언을 차단당한 말이 일부만 진리일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수학은 정답이 있는 학문임으로 예외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밀의 말처럼 ‘종합적 판단’으로써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는 이미 정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 혹은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 중 과연 충분한 토론을 거치거나 사유를 해 기존의 결론들이 합당한 것인지 고찰해본 이가 몇이나 될까. 이는 의지의 실종이기도, 혹은 각박한 삶의 피로일지도, 아니면 종용되는 기준에 합승하고자 하는 소시민적 DNA의 유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작업을 할 최대의 적격기인 대학 생활의 대부분이 취업준비로 와전되어 있는 상황을 가장 먼저 개탄해야 할 점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밀의 말마따나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하니, 오히려 튼튼한 근거를 가지고 서로 치고 박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것이리라. 다만 이런 풍토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비방과 인신공격이 자주 토론장에 등장하는 우리의 ‘정치적 언어 속성’을 결단내야 할 것인데, 밀도 “언어폭력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우리나라 10대들의 언어생활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이 ‘욕’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는 한 사회통계조사를 주목해봄직하다. 욕이 정감과 친분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욕의 속성은 타인에 대한 언어적 공격에 있다. 이는 도덕률에 어긋나는 것이다. 밀은 “악의나 비방의 정도가 너무 심한 사람이나 타인의 감정에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낸시랭이 비난받는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아직도 ‘파격’이라는 개념을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혐오의 어느 즈음에 놓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행동은 옐로우페이퍼들의 소위 ‘먹잇감’으로 다뤄지기 쉽다. 도발이 그녀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에 독설로써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도발에 대한 방어를 그들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 사실 현대예술의 신랄하며 노골적인 퍼포먼스들이 국내에 (조금 늦은 감은 있으나) 지속적으로 소개된 이후, 그것을 오판하는 이들은 그나마 많이 줄어들었다.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와 같은 종류의 학자적 성찰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의 가치나 사회적 효용을 묻거나, 그것으로부터 창의적 사고의 전형을 뽑아내는 서적들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자명하다. 현대미술 전시장에 들러 작품을 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교양을 위해, 혹은 지적 호기심을 위해 그것을 찾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의 소위 ‘식자(識者)’층들은 개념상으로나마 현대예술의 여러 특징들을 흡수하는 중이다. 하지만 국내 유명인사들 중 파격의 대명사라 불리는 낸시랭의 행동들은 항상 도마 위에 오르고, 상당한 공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우리나라 특유의 보수성이 지닌 맹점이라 진단하기에도 무리는 있다. 돌이켜보건대,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낸시랭 같은 이들이 비단 그녀 한 명 뿐이었던가. 그런데 밀은 이 ‘파격’을 옹호하며, 심지어 그것이 “인류에게 큰 봉사”의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주장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호소력을 가지는가? 

  밀의 원칙은 이렇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은 어떠한가? 한 세기하고도 반세기 전의 밀이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설명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우리는 항상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지인에게 “으레 그러한 것”의 전형적인 규범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먼 산에 있는 나무가 몇 그루나 되는가 짐작이라도 해보려는 심산으로 ‘창조’, ‘천재’, 혹은 ‘파격’에 대한 여러 일화들을 찾아 읽는데도 시간을 기꺼이 소비한다. 모순되는 두 태도 중에서 밀은 기꺼이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은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일찍이 모더니즘의 업적을 일컬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건이 좋지 않거나, 혹은 그럴 기회를 조기에 박탈당해 그런 삶은 사치일 수밖에 없는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기 식대로(his/her own mode)’라는 문구는 아직 소원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밀이 보기에 그것은 교육의 확대, 교통과 통신의 발전, 상업과 제조의 발달, 그리고 여론의 성장 등에 있는데, 사실 이런 현상들은 현재 활발히 진행 중에 있으며, 우리와 뗄 수 없는 현대사회의 특징들이다. 개별자들은 똑똑해도, 그들을 모아놓고 나면 바보가 된다는 속설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와중에도 관습적 사회의 모습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이 호소하는 바의 절절함이 대중매체의 여러 소식에 가려 들리지 않고, 여성들이 “예의 그랬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종의 사회적 ‘절차’들이 인정되면서 그들 스스로의 비판, 부정, 일상의 조소, 어쩌다 한 번의 반항 등이 기성 남성들에게 저항할 무기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낸시랭과 같은 이가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왕성한 정력, 강렬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미약하고 허약해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식자들이 갖고 있는 궁극적인 멜랑콜리라는 밀의 주장이 나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것은 일상의 도발이며, 현실과는 요원한 말이니만큼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 호소한다. 개인이 이처럼 자유를 가질 권리를 추구한다면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밀이 말하는 이상적 사회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용납하지 못하는 행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각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는 사회”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는 일부 반(反)종교적 성향을 지닌 이들에게 “종교가 없는 사회”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협소한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밀 역시 그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행동은 도덕에 어긋난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신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다.”라는 추론으로부터 나온다면 그것만큼이나 강력한 권한을 발휘하는 진단은 없다고 밀은 말했다. 그러나 종교가 설파한 진리 중에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그리스도교), 타인과 나로 이뤄진 사회의 그물(불교) 등 ‘자유’의 현대적 개념을 은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므로 뭔가를 “신의 이름으로” 하고자 하는 종교적 왜곡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종교는 사실상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세이건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이런 생각을 내비친 바 있다.) 

  그러나 밀의 <자유론>은 5장 ‘현실적용’에 이르러 여러 난관에 부딪힌 자유의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밀이 오늘날 태어나 이 부분을 다시 쓴다면 19세기보다 훨씬 큰 장애물들을 실감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밀이 각 부분들, 가령 독약 판매, 국가의 주류세 인상 혹은 인하, 간음과 포주의 문제, 이혼, 여성과 자녀의 자유, 교육, 무조건적 자유, 정부 권력의 분산 등은 여전히 여러 논쟁거리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상기해봄직한데, 밀은 여전히 그가 서두에 밝혔던 자유의 관점을 굳건하게 밀고 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교육 밖에 없다는 뉘앙스도 남겨놓는데, 이 부분에서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유독 교육열이 높다는 이유로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당한 열위에 놓여 있다. 암기식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필자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열린 교육’이라든지 ‘창의적 교육’과 같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들이 실행된 바 있었고, 오늘날에는 대안교육의 긍정적 부분들이 자주 소개되면서 “내 자녀를 과연 현 교육시스템에 맡겨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학부모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나는 교육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런 문제들을 부모님으로부터 자주 접하곤 했는데, 사실 그럼에도 문제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의 방법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는 귀추를 주목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어떠한가? 오늘날 대학교들이 전(全)인문화 과정이 통한 대학생들의 전인화를 꾀하지만 정작 대학생들은 취업을, 고등학생들은 대학진학이나 고졸 후 취업을 목표로 하게 된다. (기업이 예비기업인을 낳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형국이다.)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든 그것이 향한 결과는 같으므로 교육을 통한 인식 향상의 질은 나아질지 몰라도 결과적 상황은 비등하다. 예부터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이 사회에 양산되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떠한 변화를 시도했는가는 미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대중이 문화전체주의에 빠져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참신한 ‘자유의 시도’들은 대개 폄하되기 일쑤이고,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free not to be free, 이는 노예에 대해 쓰는 말이다.)를 쫓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밀은 “최소한(any tolerable amount)의 상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상식이 있다. 배우는 것도 많다. 하지만 ‘내면의 힘(inward forces)’은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자유는 목적 그 자체로써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몇 안 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행복을 위한 자기발전은 인간의 생명원리를 구성한다고까지 밀은 역설한다. 그리하여 그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는 유명한 유행어를 남겼다. 

  모든 것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노래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며, 때론 자유를 말살시킨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삶의 주체라고 여긴다면 우리의 자유가 강탈당하는 현장을 보고 그것에 대해 묵인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가 실종되는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미온한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양심의 추락(Disgrace of conscience,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에서 인용해봤다.)’ 말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사회와 개인에게 요구되는지 나는 아직 질 알지 못한다. 다만 생각해보건대, 이는 대체 어느 부분 있어서 우리의 양심이 부족한가를 먼저 알아보는 고통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반죽도 안 만들었는데, 맛있는 김치전을 어떻게 만들겠냐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심한 용기를 일으켜 몇 권의 책을 더 읽기로 했다. 밀은 그 방향을 알려줬다. 150년 전의 고전이 도저히 고전으로 읽히지 않은 것이 많은 반성을 하도록 하며 말이다. 그가 바란 희망을 우리가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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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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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별안간 우주를 공부하고 싶어졌을 때, 교보문고에 달려가 잘 모르는 과학서적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수많은 책들을 기웃거리다 고른 책이다. 이것과  미치오 카쿠 박사가 진행과 내레이션을 맡아 인상적이었던 <Time> 4부작(BBC)을 기억해낸 탓에 그의 <불가능은 없다>도 함께 샀다. 그나마 대중적인 우주과학 입문서인 (교수의 추천으로 산 것이지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도 다 읽지 못했는데, 무턱대고 “세이건의 책이다!”라며 집어든 까닭에 후회는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다. 그런 책들이 책장에 몇 권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기우가 많은 편이다. 

  이 책은 도킨스와 궤도를 같이 하면서도 공전궤도는 조금 긴, 쉽게 말해 에둘러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인으로써 꼭 주목해야 할 논제의 성찰들이 현실과 논리,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한복판을 지나가며 잇달아 세이건의 검증을 받는다. 그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으리라 판단되는 어떤 의견에 대해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입을 틀어막는 몰상식한 저자가 아니다. 두 눈 중 하나는 우주에, 다른 하나는 지구에 둔 과학자의 입장에서 세이건은 우리, 즉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앞으로 사람들이 어떤 접근방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내다본다. 특히 그는 종교를 말한다. 항간에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널리 시판되는 책 중 종교를 언급하지 않은 책이 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의 트렌드이다. 재미있는 것은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국내에 초판된 것은 작년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가 1985년 스코틀랜드에서 한 강연의 일부를 엮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후대 사람들인 우리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연 세이건이 말한 문제들이 얼마나 해결되었으며, 그의 호소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곱씹어볼 좋은 기회와 진배없다. 

  얼마 전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을 접했을 때에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인간이 하는 행위 중 일부(혹은 전부)는 도무지 믿을 바가 되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위해 착각을 하며, 그것에는 진화학자들이 “믿음의 DNA적 요소”라 부르는 특징적인 속성들(세이건도 그 중 ‘충성’이라는 요인에 대해 이 책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이 있는 듯하다. 종교가 그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월퍼트의 논점은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에게, 혹은 지성인들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수용되지만 인간의 창조 앞에 뭔가가 더 놓여 있다는 고증을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도발 그 자체이다. 도킨스가 그것을 종교의 병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양극으로 끌고 나가기까지 했는데, 사실 근거를 갖춘 논리로써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종교 특유의 감정적 조응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논제를 “신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닌 “신은 존재한다.”는 제 1원리의 구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셀무스를 위시한 중세의 대(大)신학자들이, 오늘날에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간단히 입증한 것처럼 보였던 일과는 논리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의 권위는 강력하고, 그것의 인기는 점점 높아진다. 과학이 도덕과 윤리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닌 반면, 종교는 과학이 지닌 단점의 반대 방향에서 그것을 장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때론 염세적이라 비판까지 받는) 지식보다는 데카당스와 같은 현 상황을 타개할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지각 수준에서 모든 것을 결론짓는 것은 안이한 태도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이건이 결국 주장하고픈 바가 여기서 도출되겠는데, 만약 난관에 봉착한 우리가 비관적인 상황의 분위기를 전조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명확한 근거”를 갖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주를 비롯한 인간, 그리고 지구와 ‘존재의 개념’을 근거에 입각한 ‘사실’로써 인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를 통해 우리는 수 백 년 전의 사람들보다 더 확실하게 세계의 구조를 알게 되었고, 우주를 바라보며, 그리고 수많은 종들의 진화를 확인하며 “멸종이 대세이고, 생존은 오히려 예외이다.”라는 자연계의 진위를 발견했다. 그 결과 현재 인류가 행하고 있는 행위 중 ‘멸종’과 관련된 급박한 문제들은 진정 “급박한” 문제로써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이건은 그 문제들 중 하나로 핵문제를 든다. 그 때가 1985년이었는데, 그로부터 (정확히 필자의 나이에 1년을 더 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과연 해결되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세이건은 2장인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에서 소제목과 같은, ‘지구중심설을 주장하려는 이들의 논점들’이 어떠한 근거로써 반박되어 왔는지 다음 장인 ‘유기 우주’에서도 여러 사례를 통해 소개한다. 실험과 실측, 그리고 과거 사실들을 반박하는 새로운 추론들은 적어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스킵(skip)’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에 입각해 원인의 원인, 그리고 그 원인의 또 다른 원인을 통해 결국 모든 결과들을 낳게 되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처럼) 대(大)원인을 찾아가는 무모한 여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근거는 적어도 “왜 그것이 근거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주석을 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과학이 밝힌 바를 반론하려는, 주로 종교의 의미를 우주에서 애써 찾으려는 사람들은 세이건의 말마따나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은데서 연유한 오류”로부터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결론으로 반드시 끌고 가려는 절대목적론을 견지한 자세(나쁘게 표현하자면 억측)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 그 자체로써의 자세이다. 과학은 근거가 없는 한 신이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반면,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 자세를 세이건은 매번 확인시켜준다. 

  이어 세이건은 ‘외계의 지적생명체’와 ‘외계인 민간전승’이라는 재미있는 챕터를 통해 “감정적 경향이 작동”한 인간의 특성들을 다채로운 사례와 재기 넘치는 비유로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종교를 짚고 넘어가고자 하여 미리 깔아놓은 포석이다. 우주과학자들은 외계의 지적생명체와 최소한 교신이라도 주고받기 위해 여러 작업을 수행 중에 있고, 아마 세이건도 당시(1985년)에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오늘날의 연구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겠지만 조만간 우리는 언론매체의 보도와 NASA의 발표를 통해 “지구의 외부(이는 주로 타행성을 의미하며, 대체로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명체가 살 수 없으리라 기대되지만 대기는 존재하는 행성이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지구에서 발견했다.”라든지, “수퍼지구를 발견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우주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지적존재가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모두 과학이 밝혀낸 것이다. 우리의 ‘우주적 기대’는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세이건은 “그렇다면 종교란 어떤가?”를 언급한다. 그는 묻는다. “왜 하느님은 극히 제한된 장소에만 제한하는 걸까요?”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처럼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지극히 편협하고 소심하다.”고 찔러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면 종교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는 최소한의 회의를 내비친 것은 확실하다.  

  ‘외계인 민간전승’에서의 논리는 더욱 강력한데, 그 이유는 UFO 일화들이 갖지 못하는 결정적인 성립 조건, 즉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과 “이른바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UFO 목격자가 나타나면 그것이 보도된 이후 너도나도 UFO를 봤다는 제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며, 그런 경우에는 귀신, 화이트노이즈 등 일종의 ‘예언류’, 혹은 ‘기적류’의 사건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그리고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와 같은 심리학 서적들)에서 충분한 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이 종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자명하게 알게 되었다. 즉, 우리는 누구나 한 번 쯤은 거짓말을 했고, 그것이 경우와 정도, 그리고 규모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개 “틀리거나, 옳지 않지만”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믿기 위해 열성적인 노력을 투자하곤 한다. 신앙이 이런 방식으로 상호 보조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스스로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빌미로 일어난 비극적, 혹은 비상식적 사건들의 폐해를 몇 가지 언급한 뒤,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초월적인, 윤리와 도덕에 관한, 세계의 기원에 관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제들을 다룰 때에도 최소한 회의적이며 엄밀한 음미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여섯 번째 챕터에서 세이건은 본격적인 종교적 가설들을 논리적으로 고찰해본다. 학자들 중에는 신의 존재를 악착같이 부정하는 이들도, 혹은 아인슈타인처럼 “우주의 물리 법칙의 총합”을 신으로 여기는 이들도, 혹은 세이건처럼 논리를 바탕으로 그 존재에 대한 가능성은 인정하되 역시 반대의 가능성을 갖고 약간의 회의를 던지는 이들도 있다. 세이건이 제안하는 논리와 고찰 방식은 대단히 건강하다. 그는 과학자의 태도를 견지하며 항상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양방향으로 모두 소통한다. 종교가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의 뜻으로부터 도출하며 열린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순기능과 비교하자면 매우 안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이건은 이 챕터에서 여러 가설들을 소개하고, 그 가설들이 묻지 않는 질문의 원천에 신이 있으며, 그것을 묻는 것은 거의 금지되거나 기피되며, 특히 “신학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어떤 논제를 검증하기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실험이란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때론 그 가설들 중에는 앞서 말한 안셀무스의 경우(“하느님은 완전하다. 존재라는 것은 완전함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한다.”라는 논증인데,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는 “완전함이란 무엇인가?”라고 바로 물을 수 있다.)처럼 ‘말장난’인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적 논지들의 대부분에 대해, 만약 우리에게 열렬한 신앙이 없다면, 확신을 갖지 못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경험’이라는 제목의 일곱 번째 챕터는 그 경험(특히 그리스도교의 경험)이 화학(여기에서는 약물이다.)적으로 일어나는 가능성, 그리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경우 등을 근거로 언급하며, 교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고찰하는 장이다. 재치 있게도 세이건은 이반 투르게네프를 인용한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든지 간에, 인간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셈이다. 각각의 기도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다음과 같은 뜻이다. ‘위대하신 하느님, 2 곱하기 2는 4가 아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더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수학시험능력평가에서 등급이 7밖에 되지 않는 학생의 학부모가 “제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새벽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다. 사실 종교적 특성상 기도의 기능은 통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이건 역시 현명하게도 그것의 기능적 측면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각자의 몫에 만족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곧 기도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기도가 반드시 그래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래온 역사는 종교가 정치와 어떻게 엮여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세이건은 말한다. 아니, 요구이다. 중요한 대목이라 통째로 옮겨본다.
  “어마어마한 불의가 이루어질 때, 공권력과의 충돌에서 종교 - 특히 기성 종교 - 가 앞장서는 경우는 얼마나 드뭅니까. 반면 종교 지도자들이 안전한 길을 택하거나 우물쭈물 사태를 관망하고, 내세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흥분을 가라앉히자고 하거나, 또는 이것은 종교의 적절한 기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흔합니까?” 

  이에 대해 “그건 아니다.”고 반박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종교가 사회에 깊이 침투하려는, 혹은 개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때론 부정적 시선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따지기 좋아하는 “보수이냐, 진보이냐?”의 선상에서도 종교의 사회개입은 대체적으로 곱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지난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앞장 서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가해서 시민들을 독려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종교의 기능을 폄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그들처럼 한편으로는 그동안 가려진 종교의 역사와 일부 신도들의 맹목적인 ‘숭배’, 그리고 신앙의 강요 등 부정적인 행태들을 보아왔던 터이다. 하지만 종교가 병에 걸린 사회에게 투여할 수 있는 치료제들은, 다시 말해 그것의 순기능은 자명한데도 단지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해 세이건의 호소에 반대되는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것은 역시 일부 종교인들 못지않은 맹목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이건은 말한다. “종교는 매우 현저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신비적인 올가미조차도 없이, 어른들에게는 윤리적 표준을, 아이들에게는 이야기를, 사회 구조에는 청년들을, 우울한 시기에는 위안을, 과거와의 연속성을, 미래에 대한 믿음을 제공해준다.” 

  단, 여기서 세이건은 이어지는 두 장, ‘창조에 반하는 범죄’와 ‘탐색’을 통해 조건을 단다. ‘창조의 반하는 범죄(crimes against Creation)’란 신학자들이 “인류의 자멸”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로 세이건은 그것을 핵전쟁으로 좁혀 사용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종교가 그것을 제어할 힘을 가진, “사회의 다른 영역들은 대개 수행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영역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종교를 지지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지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뭔가 거대한 힘을 - 교육적인 힘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힘까지도 - 지닌 것”이라는 것을 종교가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종교적 메시지를 통해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자연을 이해하라는 메시지를 그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남긴 바가 없다.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이 지켜야할 계율들을 강조했을 뿐이다. 아니면 신화적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반면 과학은 다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모든 것을 가설로 부치되 기존의 가설은 새로운 가설이 반박하지 못할 경우 잠정적인 사실로써 언급될 권리를 갖는다. 종교는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종류의 지적 능력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종류의 지적 능력을 아는 데에만 해도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세이건이 하고 싶었던 말이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재고해야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 세이건은 우주학자로서 상당 부분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 역시 가능성이나, 진화론은 현재 사실상의 진실로 취급되고 있다. 종교가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나는 혹시 종교에 집중하지 않은 지성 중 진화론을 비판하여 세이건의 주장을 약간 비틀어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작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 논점을 가진 학자는 없는지 궁금했었다. 그런 차에 마침 좋은 정보를 찾아냈는데, 노문학자 이현우의 도서 블로그에서 얼마간 데이비드 스토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밑의 글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은 후 접한 그 글에 대한 짤막한 수기이다.

  진화론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도 있다. (나는 그것을 로쟈 이현우氏의 알라딘 서재에 인용되어 있던 기사문을 읽어 알게 되었다.) 호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스토브가 쓴 <다윈의 동화(Darwinian fairytales)>이다. 그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높게 산다.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밝힌 DNA의 기본적 속성, 즉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이기심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스토브는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타심이 유독 강한가?”를 묻는다. 내가 알기로 이타심 역시 자연선택을 위한 협동, (니체와 혼돈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다시 말해 “때론 이타심을 발현하는 것이 생존에 있어 유리하다.”는 것을 인간은 진화상 인식하고 있다. 스토브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스토브는 인본주의를 말한다. 인간을 이기심 넘치는 기계적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과연 어떤 인식적 도움을 주겠냐는 것이다. 물론 스토브에게 우리는 “진화론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겠지만 진화론 자체가 우리에게 윤리적 의식을 심어주진 않는다. 진화론은 그저 과학계의 이론 중 하나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항상 가설로써 말한다. 그것을 진리로 대하진 않는다. 아마 스토브가 하고 싶었던 일은 점차 실종되어가는 인간의 존엄성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으리라. (이현우氏가 서재에 올린 글이 스토브의 입장을 잘 견지하고 있어 옮겨본다. “단지 그는 진화론이 ‘현재에 우리 종에 대해 잘못 그려준 초상화에 바보처럼 속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질 따름이다. 그러니까 대안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가 그의 포지션이다.”) 사실 나는 철학자도, 생물학자도 아니기에 스토브가 ‘다윈류’의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얻을 수 있는 호소력의 가능성을 확신하진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추세를 여러 과학서적들을 통해 살펴보건대, 아마 대다수의 지식인들도 동의하겠지만, 스토브의 논리는 증거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사유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과학이 역으로 비판하기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노(老)학자(그는 1994년 타계했다.)의 언변 너머의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좋으리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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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엔진 - 천사, 귀신, 부적, 종교, 징크스, 점성술......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 믿음에 관한 진화론적 탐구
루이스 월퍼트 지음, 황소연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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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대학교 초년생 무렵, 떠올려보건대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것은 KBS의 다큐멘터리 <마음>이었다. 이문세氏가 내레이션을 맡아 친숙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뇌와 마음, 그리고 믿음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이 이성적 수단으로 거부할 수 없는 파괴력(좋게 말하면 추진력)을 가졌는지를 설명하는 과학 기획물이었다. 그 중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는 워너비(wanna-be) 환자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싶어 하는 환자들을 지칭하는 ‘워너비’는 의사들마저 당혹스럽게 만드는 정신질환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의사이고, 누군가가 찾아와 간절하게 애원하며 “저의 팔다리를 잘라주세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들은 조작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 진정으로 안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행복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섣불리 정의내리지 못하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워너비 환자들의 삶을 알게 된 뒤, 나 역시 어떤 일상적 질환으로 불행을 느끼는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은 개인이 성취하는 것이다.”는 강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성공을 꿈꾸며 젊음을 가능성으로 채워가는 대학생 중 한 명으로써 그 공통된 기준이 못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어떤 것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그 답을 알기 위해 나는 두 권의 책을 더 읽었다. 하나는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다. 둘 모두 과학적 근거와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편찬된 책으로 우르반은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그리고 월퍼트는 생물학자이다. 믿음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 앞에 내가 객관적인 과학을 사유의 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고, 또한 자명하다. 그들의 연구를 통해 나의 주관적 믿음의 특정한 근거와 원인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은 요컨대 ‘믿음의 엔진’ 자체가 진화 속에서 발달한 인과적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과학도서이다. 그리고 월퍼트는 인과적 믿음이 바로 도구의 사용에서 기원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믿음의 힘을 인정하고, 그가 말미에 인용한 베르길리우스의 경구처럼 “사물을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열린 자세를 겸비해야 한다는 월퍼트의 주장은 과학과 종교, 혹은 과학과 일상의 첨예한 갈등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귀를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일단 월퍼트는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상태에 있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근거로 설명한다. 상식도서들을 많이 접한 현대인들에게 그의 주장들이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음>, <인간의 두 얼굴>, <동과 서> 등 믿음이나 인지와 관련된 좋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바 있어 평소 관심이 있었다면 준(俊)전문가 수준의 이해를 가진 이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믿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말뚝과도 같다. 말뚝이 박힌 깊이는 분명 사람마다 다르다. 학습, 강제, 문화충격 등 외부의 힘이 개입해 그것을 뽑으려고 하면 말뚝의 깊이가 깊은 이일수록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반면, 말뚝을 스스로 뽑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어느 날 한 신자가 갑작스럽게 “신은 없다.”고 선언하는 일은 없다. 

  믿음이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오랜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시간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종교의 태초보다 훨씬 이전이다. 그것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생존의 시험대에 오른 순간부터를 가리킨다. 즉, 월퍼트는 믿음은 “유전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추론에 근거한 그의 주장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에는 심리학자들이 인간이 착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착각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지키고, 그로부터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 그들의 근거이다. 인간은 대부분 거짓말쟁이이며,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조작하는 작화증(confabulation)의 달인이다. 아이들이 곧 드러날 가벼운 수법을 써서 부모들에게 더 혼나는 비근한 일을 생각해보자. 나는 초등학생 무렵,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은 나머지 부모님께 “오늘은 피아노 학원에 사람이 많아서 선생님이 오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껏 한 거짓말 중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기보호와 자기기만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러한 ‘조작’을 가능케 하는 유전적 믿음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논리상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월퍼트는 아이가 학습을 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의 행동원리가 대개 일정시기마다 발현되며, 그것은 믿음과 관련된 숨겨진 메커니즘을 드러낸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든 근거가 바로 ‘거짓말’이다. 월퍼트의 말처럼 거짓말은 “자신이 믿는 것과 타인이 믿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해야만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질문들도 믿음의 형성을 파악할 근거가 된다. 질문은 사고의 메커니즘을 구축해가는 인간 특유의 수단이다. 다만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을 때에는 아이들처럼 마법을 믿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주변을 돌아보면, 굳이 학자들의 충분한 검증을 근거로 삼지 않아도 “믿을 수 없는 일”이거나 “믿기 싫은 일”, 혹은 “감성적 충격을 주는 일(끔찍한 살인, 비극, 괴담 등)”들이 우리에게 그다지 튼튼한 근거 없이도 특정한 사고를 지지하여 끝내 믿게끔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오해를 부르긴 하지만 “추론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겸비한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경험한다. 

  그렇다면 월퍼트는 왜 ‘도구’를 믿음의 진화와 연결시킨 것일까? 과학이 밝히는 진화와 믿음을 단순히 연결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월퍼트의 말에 따르면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이 필요”하며, 이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들을 반론으로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월퍼트는 ‘동물’이라는 챕터를 별도로 마련해 인간과 동물의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를 충분히 설명해놓았다. 단, 이것을 인간의 우월의식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이다. 이 ‘개념’이 실행되어 도구를 이용한 다른 도구(제 2차 도구)를 만들 때 인간의 인과관계 추론능력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하지만 도구의 발전 과정은 알다시피 매우 더뎠다.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원인은 도구개념의 공유와 협동에 있다. 이를 통해 뇌는 활발히 사고했으며, 용량이 커졌다. 특히 인간의 뇌 중 가장 빨리 성장한 부분은 전두엽의 운동전영역(premotor area)이다. 이곳은 동작의 통제를 담당한다. 이어서 복잡한 도구가 인간의 언어발달과 함께 등장했다. 언어는 인간의 관계를 대변한다. 언어의 발달을 통해 인간의 뇌 중 80%를 차지하는 신피질도 발달했다. 신피질은 ‘사회적 기술’을 서로 연결시켜 타인과 소통케 하는 두뇌 영역으로 인간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진화는 도구, 언어, 관계를 통해 이뤄졌지만 그것이 인간의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이유를 제우스의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는 근거에 기초한 사유가 아닌 믿음의 전형적인 도출과정 때문에 생긴 것인데, 월퍼트는 이것이 부정적인 이유를 “권위의 과신이나 우연에 대한 지나친 강조, 증거의 왜곡, 순환논증, 일화의 사용, 과학의 배척, 오류를 포함한 논리상의 문제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믿음은 관성을 갖게 된다.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열렬했던 신학적 논쟁을 차치하자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믿음의 관성’을 드러낸 가장 인상적인 픽션 중 하나였다. 관성은 앞서 비유한 말뚝과도 같다. 그리고 이 관성은 휴리스틱스(Heuristics)의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더욱 견고해진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 이유는 그것을 믿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 “전형적(일반적)이기 때문”, 그리고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쉬우면, 즉 용이하면 믿음의 관성이 생긴다. 뒤에서 월퍼트가 지적했듯이 과학이 믿음보다 약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과학은 대단히 어렵다. 대중들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책과 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불가능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일상을 쪼개 과학자들처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빅뱅이론은 그나마 그 대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만 학창시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시험문제에서 봤을 대중들이 정작 상대성이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행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신 종교적 믿음은 대체로 전통에 힘입어, 그리고 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용이함을 등에 업고 지금껏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수많은 리서치들이 방증하는 것처럼 종교는 과학보다 훨씬 ‘대중적’이다.  

  전형성은 바넘 효과와 같다. 나는 천칭좌인데, 천칭좌 사람들은 예지력이 있다고들 한다. 때문에 만약 내가 점성술을 믿는다면 나 역시 스스로 예지력이 있다고 여기고, 그런 듯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은 바넘 효과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사고방식이다. 점성술은 천칭좌 사람들을 묶는다. 인종을 인종별로 묶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모기와 말라리아의 연결을 그 초반에는 전혀 믿지 못했던 것과 같이 과학은 쉽사리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대상들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일반인들이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마지막으로 고정성은 “믿음은 반증되지 않고, 주로 입증된다.”는 인간의 보수적 사고로써 설명된다. 신자들은 신을 부정하는 증거를 모으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가 과학을 격렬히 반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도는 다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이어 월퍼트는 드디어 ‘거짓’에 대해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는데, 사실 어떤 독자든지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다. 거짓말은 매력적인 사고이다. 자신을 방어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 때문에 거짓말의 논리는 훨씬 견고해진다. 덕분에 “말 잘하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는 속설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이리라. 다큐멘터리에서 버라이어티에 이르는 수많은 TV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미 대중들에게 인간의 거짓말은 새빨갛게 드러났지만 그 누구 하나 정직하게 살고자 거짓말을 근절하는 사람은 없다. 착각도 거짓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무렵에 이미 이성은 착각에게 굴복한 뒤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사소한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박증, 식이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조병, 통제망상, 최면 등도 포함된다. 

  믿음과 가장 가깝게 연결된 단어는 종교일 것이다. 월퍼트는 챕터의 도입부에 자신의 생각을 미리 견지한다. “인간의 인과적 믿음이 도구와 관련해서 먼저 진화한 후, 언어의 진화가 이어졌다. 그 후 질병에서부터 기후변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의 원인을 알고 싶은 욕구가 필연적으로 생겼을 거라는 점이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무지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것은 종교적 믿음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종교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은 ‘죽음’을 설명한다는데 있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에서 여러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죽음은 인간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며, 따라서 그 앞에 굴복해야 하지만 결코 굴복하기 싫은 존재 중 하나이다. 때문에 타인을 제압하려는 권력은 늘 죽음을 이용해왔다. 그러나 종교는 내세를 제시한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종교는 그대로 수용한다. 천국, 지옥, 열반, 발할라 등 월퍼트는 그 세계가 개념상 존재해왔다는 것을 과학자의 입장에서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적 믿음은 단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대체적으로 부활을 믿지만 티벳에서는 환생을 믿는다. 부활과 환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2009년 EIDF 대상과 시청자상을 휩쓸며 화제의 다큐멘터리로 국내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았었던 나티 바라츠 감독의 <환생을 찾아서>는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아이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담고 있다. 불교에는 신이 없다. 단, 세상을 순환적으로 바라보고, 선행(종교학자들은 이 ‘선행’의 개념을 창조적 삶으로 이해한다.)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종교에 대한 불신(사실 월퍼트가 설명한 것처럼 종교 자체가 불신으로 성립된다. 나의 신은 믿지만 다른 신은 믿지 않는 것은 믿음과 불신의 통제이다.)이 있다는 면에서 종교적 믿음의 부정적 측면은 공격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니체와 도킨스가 있다. 특히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롯해 BBC 다큐멘터리에는 왜 종교가 비난받아야 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도 종교의 순기능을 괄시하진 않는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종교를 비하한 듯 보이나, 실은 “억압된 본성의 징후”인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믿음이 형성되고 지원을 받는 여러 원리와 상황들은 분명 비논리적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강박관념증이라 불렀다. 그러나 월퍼트가 주장했듯이 “종교활동은 심적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감과 낙관론을 고취시킴으로써 심장에의 부담 같은 신체상의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데 일조”하는 등 실제 생활에 육체적, 정신적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자신이 타인의 믿음에 동조하거나 반대한다는 ‘인식의 위치’가 정립되는 것은 정말 큰 위안이다.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무의식 세계를 일반화시킨 것은 사실 위에서 밝힌 ‘믿음의 전형성’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둘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재차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형성에 비춰 생각하면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덧붙여 설명하게 되는 작화증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만약 그 발언이 문제가 된 까닭에 여러 분쟁이 생기게 되면 사람들의 작화증과 자기 확증은 부딪혀 싸우게 된다. “마법에 대한 믿음은 희생양을 만드는 과정으로 악용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개인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그 예를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실행된 바 있는 마녀사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작화증 자체, 그리고 허황된 믿음이 주는 안도감과 신비함 자체로부터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일례로 월퍼트가 자신의 책에 제시한 근거인 <신들의 전차>는 M사의 한 TV프로그램에서 소개돼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그 책의 저자 에리히 폰 데니켄은 소위 ‘역기술론’이라는 음모론을 전 세계에 어필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계인이 인간의 초기문명을 도왔을 것이라는 이론은 퍽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주는 긍정과 부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 것일까? 월퍼트는 근거로써 생각하는,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모른다.”며 믿음의 영역을 지키는 지식인들의 관용을 재차 강조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믿음의 맹목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책이 아니다. (만약 그런 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널리 읽히진 못했을 것이다.) 그릇된 믿음의 사례들 사이사이로 월퍼트는 그것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과학은 윤리와 도덕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에 입각한(아마 우리는 이즈음에서 칸트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인데) 믿음을 가질 도구로써의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믿음의 수많은 가지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자료들을 제공한다. 믿음도 판단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지녀야 하는 겸손이다. 다른 이의 믿음이 판단되고, 그로 인해 이해가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종교적 분쟁은 점점 줄어드는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도 권리이다.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월퍼트는 그것을 이해하자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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