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2011.11.23 

  이 시대의 고등학생들은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갓 제대한 ‘아저씨’들의 허풍보다 더 긴 읊조림, 더 거센 성토를 쏟아내지 않을까? 그런데 가끔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는 근래 들어 고통을 견디지 못해 고귀한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해마다 이맘쯤이면 우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조금만 더 견뎌보지.”라는 생각은 인생사의 각종 풍파를 겪은 어르신들이 늘 하시는 한탄이다. 나고 죽는 것이 신이나 운명, 혹은 사랑의 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고 판정이 난다고 한들, 한창 내일의 내일을 기대할 꽃다운 생을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무모한 결단이란 말인가. 나는 얼마 전 <한겨레>의 오피니언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는 자살을 구조적 문제라 결론지은 뒤, 문제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한 학생의 주장이 실려 있었다. 지인이 겪은 일을 복기하며 적은 글이라 그런지 유독 상기되어 있던 그 학생은 관심을 넘어선 ‘연대’가 해결방안이라 했다. 연대(連帶)라. 죽음 앞으로 두런두런 학생들이 모인다. 칼 같은 경쟁사회의 첨탑 앞으로 웅성웅성 학생들이 발표를 기다린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여럿이 모이면 특정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기대한다.”고 했지 그것이 실효를 거둔 적들이 현명하게 헤아려진다고 한 적은 없다. 강준만氏도 말한다. 입시전쟁 앞에서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것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장담한다. 그리고 나 역시 부족하게나마 고찰해보건대 전쟁은 오히려 더욱 심화될 것이다. 내가 거치고 올라온 어떤 지뢰밭을 다음 해에는 또 다른 학생들이 거쳐 갈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이 판에 공생(共生)이란 없다. 100점 받은 이가 50점 받은 이에게 25점을 나눠주진 않는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점수비교를 하다가 “5점만 꿔줘라.”, “뭐? 옛다. 점당 천 원.”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정말 돈 받고 1점씩 꿔줬으면 나는 그때 경찰서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경찰서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대체로 대학교에 갔다. 안 간 사람은 다음 해에 갔다. 그 다음 해에 간 사람도 있다. 그래도 안 되면 군대부터 가는 것이다.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 평화로운 라다크 전통사회를 보며 행복해하다가 오늘 강준만氏의 책을 접했다. 극명한 비교는 문제의식을 각성시키는 주동력 중 하나이다. 잇몸에서 피가 많이 난다고 진료를 부탁하면 치과의사는 “피가 나는 곳을 더 많이 닦으세요. 피가 나도 계속 닦으세요.”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도 피를 많이 흘리는 부위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위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며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서울 이곳저곳에 뚫려 있는 하수구 구멍에서 솔솔 피어나는 ‘환상적인’ 악취가 나은 모양이다. 이러한 방기(放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늘 지적되어 왔지만 진중권氏류의, 강준만氏류의, 혹은 박노자氏, 아니면 홍세화氏류의 따끔한 충고들이 매번 ‘재탕’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방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행동하는 지성들에게는 일명 ‘좌파’라는 딱지가 붙기도 하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에게는 “뭐 하러 저래?”라든지 “뭘 바라는 거 아니야?”와 같은 소시민적 망언들이 붙는다.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됐는가? 나는 교육의 ‘부위’에서 해괴망측한 픽션들의 발단을 찾아봤다. 강준만氏의 책 <입시전쟁잔혹사>가 많은 도움이 됐다. 

  EBS는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 소개한다. 여기서 ‘백년’은 “장구한 세월”과 같은 말이다. 어떤 일이든, 그리고 어떤 업적이든 단기간에 쌓아 올린 것이라면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나, 특히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늘 신중하게 쌓아올린 탑이 되어야 한다. 낮은 탑이어도 괜찮다. 건강한 모토를 가지고 착실하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이면 된다. 사상의 압제와 잘못된 제도로 만든 탑은 그 누구도 우러르지 않는다. 정말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강준만氏는 조선시대부터 시작해 각 시대별로 교육의 변천사를 설명해주는데, 큰 맥락을 놓고 본다면 작금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악화되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기초가 부실한 탑임을 아는 사람들마저도 그 탑을 우러르고 있다는 것이다. 돈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군부의 통치 시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았고, 나의 부모님 세대가 그 시절에 공부를 하셨다. 당시보다 지금이 교육적 취지들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양새가 영 좋지 않다. 얼마 전에도 5.18 민주화항쟁과 6월 민주항쟁의 역사 교과서 누락문제를 놓고 교육계와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다행이도 교육부에서 재차 수정을 했는데, 이와 같은 ‘국민의 눈’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대체로 잘 알고 있는, 쉽게 말해 ‘경찰노릇’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근래의 문제는 뭘 배우느냐가 아니다. “배우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세계 교육의 변천사는 교육의 방법이 획일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비슷하게 배운다. 조금 더 많이 배우고, 배움을 ‘속성(速成)’으로 처리하려면 과외를 받곤 하는데, 지금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사교육은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근절하겠다고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뿌리 자르지 못한 악습이다. 원하는 이들이 많으니 과외를 일컬어 ‘악습’이라 부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사회가 된 것이다. 우골탑, 소위 “소 팔아 대학 보내기”가 최선의 ‘자식사랑’처럼 비춰지던 세태가 이어져 지금은 “집 팔아 대학 보내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유행이 되었다. 학생들은 “죽더라도 대학 가서 죽자.”라고 하다가 때론 정말 신입생 때 만취상태로 교정 연못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3은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더라. ‘학력 우생학’에 따라 서울의 주요대학에 입성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선 탓이다. 나는 일산 백석고 출신이다. 공부를 잘 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예전에, 소위 경기도 4대 명문이라 불리던 세대의 바로 뒤를 이어 ‘뺑뺑이’ 1세대로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명문의 분위기는 이어졌다. 선생님들은 대학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최대한으로 상기시켜주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으셨다. 한 영어선생님은 “여러분. 여러분은 1000번 버스를 타야 합니다. 우리 모두 1000번 버스를 탑시다.”라고 자주 격려하셨다. 1000번 버스는 일산에서 신촌, 광화문, 그리고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광역버스이다. 신촌에서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Y대가 있다. 중하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SKY의 입성을 꿈꿨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때문에 Sonata의 S자를 떼면 S대에 갈 수 있다는 괴담이 돌면서 각 학교의 선생님들 중 Sonata를 타고 다니는 분들이 피해자(?)가 되는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학생들의 러쉬는 간절했다. 이러니 사교육이 근절될 수가 없다. 강준만氏의 말이다.
  “과연 공교육의 경쟁력이 사교육의 경쟁력을 능가하는 게 가능할까? 이는 공기업의 경쟁력이 사기업의 경쟁력을 능가하는 게 가능하냐는 물음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공교육의 본질이자 장점은 경쟁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경쟁력을 아무리 높인다 해도 사교육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줄지 않을 것이다. 대학입시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경쟁은 자본주의 시대가 엮어놓은 당연한 순리이지만 그 역사는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되었고, “앎으로써 경쟁”하는 것은 비단 개인의 차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이 아는 국가가 한 발자국 더 먼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건 영주, 군주, 혹은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위 ‘병법(兵法)식’ 생존을 위한 공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공부는 자기의 계발이다. 모름지기 이것만이 정도(正道)라곤 할 순 없어도 자기를 계발하는 것은 자기와 타인을 아는 것이고, 나아가 도덕에 입각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할 지적 용기를 닦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러나 학교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이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실질적으로도, 그리고 학생들이 흔히 체감하는 면에서도 부족하다. 이러니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시험범위 내에서만 설명해주기를 원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인생교육을 하려고 하면 귀를 닫아버린다. 최근 들어 학생들의 무례가 인권위의 ‘보호’ 하에 확장되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다툼’이 만천하에 공개된 일도 소위 ‘문제아’를 보듬지 못하는 학교제도의 결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교사는 ‘시험’과 각종 잡무에 얽매이고, 학생은 긴밀한 사제관계가 주는 정서적 안정이나 인생 공부 등 소중한 경험들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게 된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인권위는 그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발표했으나,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것에 대한 조례는 발표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유감이라 하겠다. 

  더 큰 문제는 입시전쟁 이후의 대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다. 심도 있게 배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 대부분의 길은 ‘취업전쟁’으로 이어지며, 얼마 전 김어준氏가 인터뷰 중에 말했던 것처럼 “청춘만 힘든 것은 아닌” 치열한 삶이 또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발로는 공존의 삶이 아닌, 경쟁의 삶에 있다. 대다수의 아기들은 첫 울음과 함께 ‘예비 경쟁자’라는 호칭을 받는다. 

  해결책은 없을까? 이상적 대안은 많으나, 마땅한 대안이 드물다. 강준만氏의 진단처럼 우선 “기존 학벌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요지부동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 체감하기 훨씬 쉬운 진단일 것인데, 평등주의의 함정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빠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단 ‘학벌’이라는 것이 점진적으로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독점적 이익이 다수에게 골고루 뿌려지면 이익은 적어 보인다. 더군다나 (이 점은 매우 예리한데) 사실상 ‘하향평준화’이니 ‘포퓰리즘’이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엘리트이다. 현실적 대안이 없는데도 “타도”, “타파”를 외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학벌을 강화시키는, 즉 선전하는 결과를 낳는다. 

  EBS는 지식e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통해 주요 선진국들의 교육정책과 교육에 임하는 태도를 인상 깊게 소개한 적이 있고, <세계의 아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교육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그림 한 장으로 각종 분야를 통합해서 가르치는 시범학교가 운영된 적이 있는데 국제적으로 평판이 아주 좋았고,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와 사뭇 다른 ‘성공’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심한 학벌 경쟁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이 새로운 교육 대안을 찾고자 주장하는 바는 일단 우리나라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그 실효성 부분에 있어서도 월등히 뛰어나다. 출세의 길로써 교육의 경쟁 코스를 부단히 따라가야 하는 이 나라의 토양은 벌써 반세기의 역사를 지녔고, 관념 역시 서구와 판이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상기 국가들의 이상적인 교육 대안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부분적인 대안들은 분명 있어 왔고, 대부분은 틀렸으며, 대통령들의 공약들은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근본부터 바꾸자는 말 역시 이 사회에서는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로 통한다. 

  이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할 말이 참 많다. 그러나 대학생들도 할 말은 많고, 그런 대학생들에게 “아니다. 우리도 할 말이 많다.”는 사회인들은 더 많다. 그간 달려온 거리, 넘어져 까진 상처와 그것이 아문 자리에 남은 영광의 흔적들. 많은 이들이 지쳤기 때문에 내일도 누군가가 역경 속에서 뛰어갈 것이나,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고, 접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더 불행하다고들 한다. 배움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린다는 소식을 고대의 철학자들이 사후세계에서 듣는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나는 부끄러운 세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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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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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나는 문명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 그리고 문명을 비판할 만큼 반(反)문명적 실천행동들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오래된 미래>를 읽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은 서구식 ‘낭만하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농촌에서 살아보지도 않은 도시인이 농촌에 대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의 낭만적 통념에 별 무리 없이 승차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태도로 글을 쓴다는 것은 거짓부롱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천행동들을 이끌 의식의 변화와 조우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거짓부롱은 차라리 양심을 선물하는 기부자가 아닐까? 타인의 경험과 비판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책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다. 그 기능을 길벗으로 삼아 거짓에서 진실로 나를 한 걸음씩 옮겨본다. 

  <오래된 미래>는 사실 ‘티벳’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읽었다. 왜 내가 티벳을 그토록 동경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참 웃을 때 대체 내가 왜 웃는지 분명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뭔가를 산에 빗대어 사유하기를, 그리고 산의 웅장함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티벳에는 산이 (엄청) 많다. 아니면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좋아해 수도 없이 돌려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단순하고도 사소한 이유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나 실은 그 중 무엇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그들의 순수한 삶이 마냥 부러웠다. “순수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은 애당초 거치지 않고, 그들이 그냥 순수해보였다.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있다면야 언제든 그곳에 가 내적 삶에 전념해보겠노라 벼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나에게 덧입혀진 ‘문명의 색깔’을 얼마나 지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방송프로그램, 인터넷, 문명화된 사람들과의 교우, 온갖 루머와 사태 등을 접하며 사실상 더럽혀져왔으며, 또한 누군가를 더럽혀왔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결론을 쉽사리 내릴 수는 없겠지만 감정적으로 내가 현대문명에 반동적 정서를 갖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 역시 소위 말하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온갖 호사 다 누리고 하는 배부른 소리라 해도 좋다. 돌이켜봤을 때, 호사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호사는 대부분 그냥 ‘사(事)’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삶의 정신적 호사를 누리며 깊고도 밝은 미소를 마음껏 구사하던 비(非)문명권 사람들이 문명의 세례를 받아 “우리는 가난합니다. 도와주세요.”와 같은 열등감을 갖는 사례들 앞에서, 나의 가슴도 덩달아 무너졌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차라리 재미라도 있지, <오래된 미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비극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슬픔에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방법을 찾는다. 

  <오래된 미래>는 현대인이 라다크에 들어가 자신이 현대인임을 자각하고, 한편으로는 라다크가 서구화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글이다. 라다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곳의 삶이 변화하는 쓰라린 과정을 목도한 헬레나는 라다크의 사례에서 전 지구적인 질문을 뽑아낸다. 우리의 삶은 정상적이냐는 것이다. 행복하냐는 것이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사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항상 웃고,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며,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를 북돋아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면 “글쎄요?”라고 갸우뚱한다. 몸에 익은 것이다. 현대인들이 자기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서점가에서 자기계발 도서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멘토’라는 단어가 다시 유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모두 현대인들이 대체로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왜 그런가?”에 대한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사회를 떠나 홀로 살기를 실천하기도 한다. 주변 상황이 우리를 병에 걸리게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래서 불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수 천 년 전에 등장한 종교를 대하며 서양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 붓다의 가르침이 ‘역발상’이란다. 우리가 가르침에 역(逆)한 것임에도 말이다. 모든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오래된 사고를 외면했던 사회의 병폐가 이제 고대(古代)의 메시지로 치유될 분위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도시가 아닌 비(非)문명화의 영토를 찾는다. 아니, ‘문명’이라는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이렇게 바꿔본다. 순수한 영토. <오래된 미래>는 이에 관한 내용이다. 

  헬레나의 세심한 관찰과 뜻밖의 깨달음, 그리고 동화(同和)는 읽는 이에게 한 권의 계발 도서과도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좋은 문장, 예사롭지 않은 문장 등이 곳곳에 실려 있어 나는 이 책에 수많은 밑줄을 그어 놨다. 가령 이런 것들이 마음을 울렸다. 라다크 사람들이 시간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말들 중 ‘공그로트(어두워진 다음 잘 때까지)’, ‘니체(해가 산꼭대기에)’, ‘치페(해뜨기 전에 새들이 노래하는 아침시간)’ 같은 단어들, “말을 백 마리 가진 사람이라도 채찍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와 같은 속담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달이 호수로 옮겨간 일이 없는데도 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친 것과 같음을.”과 같은 격언(<사마디라자수트라(月燈三昧經)>)들은 마음을 청명하게 만들고, 생각의 방향을 알려준다. 이따금 헬레나가 직접 찍은 듯한 라다크 사람들의 함박웃음은 금방 내게 전염되었다. 아, 이렇게 웃어보니 마음이 참 가벼워지는 것을. 헬레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큰 시련 앞에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불행할 게 뭐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즘 들어 참 좋아하는 ‘쿨’한 태도이지 않은가. 겉으로만 ‘척’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이다. 

  하지만 2부 ‘변화’에서부터 에필로그까지 읽으면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라다크 사람들이 서구화되어가는 과정을 접하며 독자들은 순수가 말살당하는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를 목격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보면 근래 들어 이런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와 쥐만이 다닐 수 있다는 가늘고 험준한 상로(商路) 조로서도를 넘나들던 마방들이 멍하니 서서 발파작업을 바라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중국정부가 야심차게 시행 중인 ‘시짱자치주(티벳) 중국화’의 일환으로 4~5천m급 고산지대에 도로가 건설 중인 광경 말이다. 반년은 족히 걸리는 윈난-티벳-네팔의 무역여정은 분명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과거 중국 왕조들의 핍박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촘촘히 얽힌 생의 ‘고리’를 잡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두거나 남에게 돌려줬다. 지금은 다르다. 물가는 누가 조정하는지 모르겠고, 가뜩이나 물가가 전반적으로 올랐는데도 유류세가 또 오른다니 어떻게 해볼 방도도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지만 버스비와 택시비는 무섭다. 이러니 행복할 수가 없다. 헬레나의 주장은 결국 마르크스를 복기한 것과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상호협력 대신 멀리 떨어진 곳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내릴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모든 수준에서 수동성과 심지어는 무감각이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오래된 미래>의 129쪽에는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 중 하나가 적혀 있다. 헬레나가 인터뷰한 ‘체왕 팔조르’라는 사람이 1975년에는 “여기는 가난 같은 건 없어요.”라고 말했다가 1983년에는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라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대체 라다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라다크 사람들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서구화의 오만은 문화의 피(被)침투자에게 엄청난 수준의 열등감을 선물한다. 서구화는 가속된다. 사람들이 ‘나이키’ 모자를 쓰고,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켈빈클라인’ 짝퉁 청바지를 입는다. 돈이 사람을 야비하게 만들고, 지역사회는 찢어지며, 평화롭게 공존하던 종교들이 서로 비방하다가 결국 장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서구화의 세례는 이렇듯 잔인하다. 왜 이런 역사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일어난 것일까? 헬레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새로운 빠른 기술이 결국은 시간을 절약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하기보다는 서두른다. 매우 바쁘나, 비(非)역동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명병’이다. 우리에게 이런 분석은 케케묵은 반찬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마다 않고 먹는다. 

  서구식 개발의 ‘한국 버전(?)’은 북한에서 구호로 사용하는 이른바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나는 일산에서도 서쪽 외곽에 사는데,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산에서 파주 쪽으로는 거의 다 논이었다. 경의선 하나만 딸랑 있고, 군데군데 야트막한 지붕의 마을들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전벽해이다. 가장 크다는 호수공원(가온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들어서는 중인데, 문자 그대로 ‘가관’이다. 고개를 90도를 꺾어야 지붕 끄트머리가 겨우 보이는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대나무처럼 솟아 있고, 아직 입주하지 않은 아파트들이 이곳의 앞날, 그 ‘복작복작’거릴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예고하고 있다. 광역버스들도 하나 둘 노선을 연장시켜 들어오고, 분당과 함께 신도시 경쟁을 하던 이곳 일산을 곧 있으면 가뿐히 뛰어넘을 기세이다. 각종 문화시설들도 입점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후면 이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가족과 함께 구경삼아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일산 두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으면 얼마나 징그러울까? 이곳은 사람도 많고, 돈도 많고, 따라서 탈도 많은 나라가 아닌가.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는데 괜스레 목이 갑갑해졌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선진문명과 기술의 포화를 기꺼이 반기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개그맨 최효종氏의 말마따나 우리나라에는 그나마 통용되는 미덕이 있어 “쇠고랑을 차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넉넉한 인심이 오고 가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발도상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현대화의 피해를 마냥 TV뉴스나 신문, 혹은 인터넷기사를 통해 접하며 방관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집’에도 불이 나 있다. 불신, 갈등, 편견, 못된 권력, 인공적 결핍,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한 절망감, 깨진 결속, 오만한 잣대, 스스로 거만해지는 방법을 통해 애써 수동적 인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나친 아집, 사치. 이렇게 순서 없이 뒤죽박죽 적어 봐도 쓴 것보다는 안 쓴 것이 더 많을 정도로 더러운 것들이 넘쳐나는 ‘우리집’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대하다. 아니, 헬레나의 말마따나 그걸 ‘방기(放棄)’한다. 나쁜 것들이 노크를 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동요를 부르며 내쫓아도 시원찮을 판에 우리는 환경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올라가는 GNP의 ‘승리’를 보며 “아, 우리는 잘 사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법륜 스님의 말마따나 다 우리 잘못이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고 닦아” 마침내 ‘균질화’되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서구화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살 길을 모색한다. 어찌 보면 파렴치한 행동이다. 아니, 파렴치한 행동이 맞다. 라다크 사람들이 이전의 삶을 돌아가는 일은 헬레나의 말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라다크에 있었던 때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지금 라다크에는 문명화된 채로 태어난 내 나이 또래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낙후된 곳이라고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더러 올바른 생각을 갖고 예전의 삶을 고수하려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형세는 큰 파도를 앞에 둔 작은 돛단배와 같다. 헬레나가 책을 마무리하며 내리는 결론은 단 하나이다. 조화를 위한, 즉 ‘공존’과 ‘공생’을 위한 대안으로써 라다크의 옛 모습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녀는 당시 책을 쓸 때,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았는지 “아직 기회는 있다.”고 거듭 역설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해도 희망의 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비관론이 더 현실적이라는 역공을 받는다. Discovery Channel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뉴욕의 기상캐스터가 환경파괴와 재앙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결코 절약을 하지 않을 거예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자연재해로 뉴욕 전체가 날아가 버리면 됩니다. 그때 즈음이면 모두 놀라서 콘센트에 꽂힌 코드들을 최대한으로 빼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려고 하겠지요.” 문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편리한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복기가 허공의 메아리로 남지 않고자 하기 위해서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창피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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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은 후다닥- 이렇게 책을 읽는건가, 히히히. 저 이거 사놓고 읽다가 팽개쳐버렸어요. 이상하게 좋으면 자꾸 팽개치거나 나몰라라 하거나 그렇게 돼요. 왜 그렇지;;

탕기 2011-11-23 17:1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었던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는 중이고, 지금 읽는 책은 따로 있어요. 어제까지 <입시전쟁잔혹사> 읽었는데 귀찮아서(!) 잠시 정리를 멈췄죠. 미술블로그 할 때에 제가 언급드렸던 책들도 언제 한 번 모아서 미술 페이퍼로 만들어 보려고 조금씩 리스트도 정리하고 있답니다.^^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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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나에게 있어 양서(良書)란 무엇일까? 많은 책을 읽은 것도, 문장에 능통한 것도, 혹은 저자를 비판할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조심스레 생각해보건대 나는 어떤 책이 ‘양서’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직감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책 읽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양서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 물론 몇 가지 대원칙은 있다. 건강하며, 균형 잡혀 있고, 사실에 충실하며, 또한 문장을 잘 다룬 책이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양서의 기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홍세화氏가 그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프랑스의 토론문화에 빗대어 비꼰 양비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일단 저울의 두 손에 동등한 무게의 의견을 올려 독자가 비교하게끔 하는 것이다. 어느 쪽에 자신의 타당한 의견을 보태어 저울이 기울어지게 할 것인지는 순전히 자기 훈련을 거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양비론이라고 해서 모두 건강한 글은 아니다. 홍세화氏가 비판한 ‘양비론’도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악취 나는 글’이다. 독자가 (회의론을 가져) 저울의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한 쪽에 의견을 싣는데 그것이 감정에 치우친 오만, 오해, 혹은 기만에 기초한 것이라면 저자는 실패한 것이 되고, 그 자신은 나쁜 저자가 된다. 여러 의견들을 비교해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수준의 지성들은 건강한 양비론을 먼저 접하는 것이 좋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원제를 풀이해보면 “신앙은 망상이다.” 정도가 된다.)>은 종교와 과학의 양쪽 입장을 모두 이해한 사람에게만 양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무조건 멀리하고, 자신의 자유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지상주의자들이 많이 양산되는 요즘 대중들은 ‘도발적인 의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킨스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도킨스 자신은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읽어 자신의 뜻을 헤아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종교를 바라보는 눈’이지만 세이건의 주장처럼 종교의 순기능을 대체할 개념은 인류가 여태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 고유의 기능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지상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과학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미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다. 과학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이들은 그들이 “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대립한다.”고 비난하는 종교의 태도를 바로 자신들이 취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맹목적 비난은 상대방을 거의 모를 때에 일어난다. 그리고 사실 도킨스도 과학의 모든 것을 대변하진 못한다. 일부 종교가 과학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처럼 일부 과학 역시 종교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이 책을 접하기 전, 나는 BBC 다큐멘터리로 도킨스의 의견을 미리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만들어진 신>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대학교에서 여름 계절학기를 들은 후였다. 그 학기동안 종교와 평화,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유익한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개신교도이지만 뮌헨에서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한 뒤 종교학자가 된 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해줬다. 그것은 칸트의 절대선과 연결되어 있다. 교수의 주장은 원래 종교들은 모두 궁극의 도덕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매개를 거쳐 왜곡되면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종교의 폐쇄성을 낳았고, 대체적으로 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우리가 믿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맹목적 논리와 수많은 정치, 외교, 역사적 변수들이 융합된 편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교수는 가령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맹렬한 역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가장 흔하고, 뚜렷한 흔적일 것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낮은 수준의 공방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근거로 <꾸란>이 폭력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 중 <꾸란>을 소위 ‘각 잡고’ 읽어본 이는 거의 없다. “알라는 유일한 신이다.”라는 구절을 그들이 읽는 순간 얼마나 큰 종교적 모욕감을 느낄지는 뻔하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지하드(Jihad)가 존재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독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마치 극우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남을 죽이지 말라. 하지만 그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면 죽여라.”라는 <꾸란>의 대목을 인용해 “미국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라고 비난하며, 미국과 기독교, 그리고 서구 전체를 동일시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오해는 대부분 남아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수는 나에게 모든 종교적 충돌의 역사는 ‘무지(無知)’로 쓰였다고 가르쳤다. 하물며 종교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종교 경전들이 뜻하는 바를 자기 식대로 판단하기에 바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고귀한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웃’을 고르는데 열중인 종교인들로 변질되었다. 간디나 마더 데레사,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처럼 예수의 뜻을 제대로 판단하여 직접 행동에 옮긴 사람은 드물다. 예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잘못한 것일 뿐이다. 

  나는 집안의 내력에 따라 가톨릭 신자이지만 내가 알게 되어 많은 깨달음을 얻은 종교는 불교이며, 나를 굽혀 신을 믿기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지닌 겸손한 진리추구의 자세로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끊어짐이나 비약 없이 연결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강요된 ‘진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번복과 수정이 가능하다. 거의 매번 바뀌는 믿음의 요동 앞에서도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 위안을 얻기도 한다. 자기 판단은 끊임없는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물론 세이건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한 말처럼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은 대단히 편향적인, 상대적인, 그리고 비전문적인 존재가 된다. 특히 유일신이 그러하다. 나는 선민사상을 매우 저급한 태도라 본다. 그것은 사상적 우생학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근거 역시 내겐 없다. 진화론을 배웠고,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우주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도킨스의 말마따나 설계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신이 없다면 어떻게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생겨났겠느냐는 이론 말이다. <Book of Life>, 소위 ‘생명의 서(書)’라 불리는 아미노산 조합방식(유전정보) 중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단 20개의 아미노산 조합방식만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많은 형태의 생명체들이 다양한 지구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나머지 44개를 다 사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궁금해 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를 설계한 지적 존재의 초월적 ‘현존’을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래의 가설임에도 ‘낡은 가설’의 새로운 도전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낡은 가설’이란 최근 들어 재조명된 바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2009년은 <종의 기원>이 15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설계논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근거로써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도킨스가 인용한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말처럼 “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오랜 관념들은 “신이 왜 그랬을까?”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다윈의 편을 끝까지 들어준다. 

  여기에 온건한 칼 세이건도 한 몫을 보탠다. 그는 과학은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하면서 사실 복잡한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도킨스도 같은 말을 한다. “무엇인가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고 그냥 선언하지는 말라. 세세한 사항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거나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양자적 입장을 또한 밝힌다. 과학의 입장에서 교조적으로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일까? 과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고, 혹시 또 모를 ‘환원 불가능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정적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건강한 태도이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해박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만약 진정 그렇다면 여전히 “나는 모른다.”라며 무지로써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 그것을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 증거로 만들어버린다. 

  종교인들 중 일부는 매우 개방적이며, 여러 가능성의 뜻과 다양성의 공존을 이해하기 때문에 내가 종교에 대해 마땅히 거부감을 느낄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 사고와 면밀한 관찰을 지향하는 나에게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매우 봉건적 사고, 혹은 전근대적 사고로도 충분히 비춰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론자들의 논리가 진화론자들의 근거 앞에서 몇몇 무너진 사례들을 보고 즐거워하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양비론은 특히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순기능을 추려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창조론자들은 ‘신’에 집착하지만 그들의 종교에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집착은 지금껏 인류가 저지른 (잠시 푸코를 빌리자면) ‘광기의 역사’를 다시금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맹신주의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과학은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명백한 근거로써만 가설을 세우고, 사유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되, 지나치게 자연에게 자신을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 사유에 있어 일모의 오만이라면 범하게 된다면 공존관계는 다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연과 공존하자.”라는 말은 서양의 과학계보다 동양의 종교계가 수 천 년은 앞서 주장한 바이다. 

  종교인들은 읽기 거북스럽겠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라는 챕터는 종교인들이 알아야 할 종교의 이면이 여과 없는 표현으로 실린 대목이라 이 책의 가장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교의 역사 중 (나는 몇몇 사람들의 주장처럼 ‘거의 모든 역사’라 부르진 않겠는데) 일부가 비도덕적 행위로 쓰였다는 것은 어린이 역사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전쟁, 코소보 내전, 9.11테러, 체첸 내전. 그 중 나는 개인적으로 체첸 내전에 대해 평소보다 심도 있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어 종교전쟁의 형태들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종교 근본주의가 지닌 엄청난 파괴력을 알게 되었다. 급진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에서 ‘도덕’을 쏙 빼놓고 얼마든지 ‘근본이 아닌’ 사상으로써 사람들을 매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듯하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유전적 ‘도덕문법’조차 매도한다. (흔히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난 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진화론자들은 “도덕도 유전된다.”는 주장으로 설명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이어 ‘이타적 유전자’로써 말이다.) 그리고 종교인들의 도덕과 진화론자들의 유전적 ‘도덕문법’에는 차이가 없다. 즉, 도덕은 하나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오독과 극단적 행동은 그들이 종교를 들먹거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교는 도덕과 같다. 하지만 일부 오해된 도덕을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문제이다. 만약 도덕이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된다면, 쉽게 말해 “신을 믿습니까?”라는 투의 “믿으라.”라는 강요로써 주입된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표현대로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궁지에 처하게 된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선할 수 있다.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킨스의 논리이다. 

  종교에서 도덕을 제거한 형태의 처사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차라리 종교를 버리고 도덕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세이건처럼 아직 종교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아직까지 내가 보기에 종교와 과학, 이 두 거인은 서로 비교되어 인간에게 최상의 도덕을 상기시키기 좋은 짝꿍이기 때문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원작자 댄 브라운은  한 추기경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현대적 진리 하나를 알려준다. “과학과 종교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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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

종교가 없어도 도덕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저도 동의해요. 저 또한 그러니까. 신이 무서워 나쁜 일을 안한다거나 좋은 일을 더한다거나 이런 게 일련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드물기도 하구요.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 이게 대다수라고 생각해요. 타종교도 마찬가지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만 조금 읽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종교나 과학은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어쩐지 이론이 뒤섞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껴둔 건데..( '')

오늘 하루 굿 데이^-^

탕기 2011-11-22 17:09   좋아요 0 | URL
종교와 과학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일단 세이건의 책을 읽고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논리적이면서도 온건한 태도로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거든요. 도킨스는 강한 문장을 자주 쓰기 때문에, 신심이 굳은 사람들에게는 비판이 아닌 공격처럼 비춰지기도 하죠. 아이리님도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2011-11-23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V.S. 네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차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름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난 3년간 네이버 블로그에 나만의 미술공부를 연재해오면서 소설책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다행이도 늘 벼르기만 하던 문제를 등하교 시간(대략 3시간이 조금 넘는다.)을 쪼개 해결하자는 계획이 지난 학기에는 꽤 잘 실천되었던 것 같았다. 소설에 잘 집중하지 못하던 예전과는 달리 솔제니친도, 쿳시도, 위화도, 그리고 카프카, 레싱, 흐라발, 사라마구도 한 권 씩 다시 읽었고,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도 그 중 한 권이었다. 개인적 취향 탓인지, ‘재미’로만 점수를 매겼을 때는 <미겔 스트리트>가 단연 으뜸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사실 글이라는 것은 동일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더라도 “어떻게 표현되는가?”로써 현격한 수용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재미’ 역시 글의 큰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다. 희극도 아니다. 블랙코미디이다. 독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단 한 대목도 독자들을 웃길 수 없을 것이다. 나이폴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을 트리니다드의 한복판에 떨어뜨려놓은 뒤, “그들(소설 속 인물들)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독서의 호흡이 유난히 긴 독자라면 책을 덮은 뒤 “여기는 어디이지?”하며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나이폴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건 분명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일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 모른다는 것, 즉 “그걸 다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고, 때론 격정적이며, 루머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전해 오는 기준이 없는 자유에 기댄 자기 확신은 있어 줏대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지 모른다. 쉽게 말해 그냥 이러니 저러니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런 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가족을 패면서도 “원래 그랬어.”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은 물론이고, 공부 잘 하는 이를 시기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도 있다. 이들의 판단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종’되었다. 나이폴은 그런 트리니다드의 1930~40년대의 삶을 그렸다. 

  별로 어렵지 않으니, 축구에 비유해보자. 흑인들은 운동신경이 유독 좋다.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축구를 시작해 재능이 있으면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는다. 그래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 만약 재능을 놓고 보자면 아프리카는 축구 선진국들로 넘쳐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축구는 개인이 하는 운동이 아니다. 팀을 구성하는 선수들과 재원을 대주는 구단주와 협찬 기업들, 구단을 감독하는 이사진들, 그리고 팀을 응원하는 팬들과 광고업계가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단합을 할 정신적 ‘응결점’이 있어야 한다. 역사도 필요하다. 때문에 유독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전문가들은 “흑인들은 단결심이 없다.”는, 가히 인종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진단을 내놓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온라인 댓글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빈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기비하적 발언으로도 이어지곤 하는데,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도와줬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국민들의 생각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들의 스펙트럼은 큰 편차 없이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열등감이다. 

  요컨대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Give me Chocolate”라는 영어는 알았다는 우리나라 전후(戰後) (그들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미겔 스트리트>와 우리가 일견 닮은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있다. 소위 욕된 말로 “양놈, 양년”이라는 표현으로 타민족의 경시하는 태도가 있는 반면, 스스로 한국적 자부심을 벗어던지고 “이깟 나라”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너무 격양되어 극우로 빠져나가기 일쑤인 민족주의자이며, 후자는 근본 없는 이국주의자이다. ‘우리’라는 말은 극도의 공감, 혹은 경멸이 가득 담긴 어조로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이 책을 덮으면 “나는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에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내적 성찰에 이르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만약 이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겔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도덕적 쾌락’, 쉽게 말해 ‘알코올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중독자들은 도덕적 계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올바른 방법을 사회적 계획안에 새겨 넣기 위해 구성원들은 수많은 고민과 자기반성을 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판단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기준 중에는 지금 사용하지 못해 버려야 할 것들과 앞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만약 이 판단을 타인에게 유보한다면 우리는 뭔가 얻어 탄 편안함을 당장이야 느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회피할 기회나 도피할 장소를 궁리할 수밖에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된다. 남을 때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누굴 죽이거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폴은 분명 트리니다드의 역사를 말해준다.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명백한 역사의 한복판이고,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바이다. 그것을 소위 “‘영국물’을 먹었다.”는 작가가 비판적 시선을 통해 “그대로 노출”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소름끼치게도 우리의 상황과 그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대개 흑인이고, 우리는 대개 한국인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미안과 도덕의식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리라. 하지만 그 차이가 “막 식민지에서 탈피해 아무런 민족의식과 전통도 없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그들”과 “세계 11대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의 차이여야 할, 소위 ‘낙후된 곳’과 ‘문명화된 곳’ 사이의 차이라고 흔히 인식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겔 스트리트>를 일컬어 ‘블랙코미디’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문명 우월론은 따위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차별적 발언, 우생학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진리라 여긴다. 하지만 돌아보기에 우리가 “우리는 다르다.”라고 자부하는 사회의 일면에서 “대체 뭐가 다른데?”라고 반문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진다. 고칠 것이 많은 사회 앞에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모름지기 ‘배운 자’의 도리임은 알지만 이 사회를 끝까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자연스러운 점, 그 사실의 생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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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2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나에게는 되도록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때문에 책날개가 별도의 커버에 붙어 있고, 그곳에 저자소개가 있는 책이라면 보통 뒷날개에 있는 해당 출판사의 여러 추천도서목록들만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짝 옮겨 적어놓고, 커버는 버린다. 책 읽을 때 거추장스럽게 덜렁거린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나는 독서에 앞서 되도록 저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나’를 책과 대면시키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생각을 지지하여 요런 내용을 썼고, 결론은 고로 이렇소.”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한 번 접한 작가의 성향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의 책을 연이어 읽을 때에는 위의 노력이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판단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것이라 배워온 나에게 저자소개와 서문은 항상 맨 마지막에 접해야 하는 정보 즈음이 된다. 브랜드 이름만 보고 옷을 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서일까? ‘홍세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한겨레’가 어떤 성향의 언론인지도 몰랐을 때, 내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고, 사회를 포용하고자, 혹은 판단하고자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던 탓에 홍세화氏가 한국과 프랑스 사회를 비교하며 펼쳐놓은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문화집단 사이를 비교할 만한 판단능력이나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고등학생 무렵, 나는 시드니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낯선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이도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문화에 중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야 우리나라의 위상이 보인다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당시 득세하던 백호주의, 풀어 쓰자면 ‘백인 호주사람 우월주위’의 냉담한 시선 탓에 상처받은 것은 지금도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데.”라는, 정에 이끌린 판단을 하는 우를 범했고, 한국에 돌아와 훗날 홍세화氏, 진중권氏, 박노자氏, 그리고 강준만氏의 신랄한 책을 읽었을 때에 그 ‘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도타운 정보다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민족’은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언급된 극우주의자들의 득세가, 발매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어제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어떤 시기와 상황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치와 파쇼는 사실상 히틀러처럼 “우리민족의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다며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잘 선전할 수 있는 달변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어제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보고서들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위험수준에 돌입했다는 잠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정말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타락이 벌어졌고,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하며, 극우주의와 전체주의가 각 국가의 불편한 경제상황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중이다. 지젝은 월가 시위대들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의 ‘극강 공산주의’를 재차 주장하며, 실패한 사회주의의 전략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시금 세계의 조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월가’는 건재하다.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돈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요와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써의 삶을 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까닭은 “원칙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회의적 평화주의 때문이다. 반면, 극우주의와 전체주의는 분명한 타겟과 방법을 지닌 명확한 행동을 한다. 히틀러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런 진단들을 여러 칼럼을 통해 읽어봤다. 독일에서 최초의 공화정이 실패하고, 온갖 정당들이 루머와 자기고집으로 집권하려고 했을 때, 그 때 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아니 “독일인만의” 움직임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다시 말해 극우주의자들이 나치를 반복하려고 한다는 거센 비난이 독일 사회 전면에서 제기되면서도 그들의 활동은 현 정권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고집쟁이가 극우주의를 만나, 만약 노르웨이의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면 오늘날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떤 저항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원칙에 입각한 판단을 견지하며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상대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책이다. 박노자氏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그럼에도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줬다.)”이라면 홍세화氏의 이 책은 “한국에서 타국으로 나간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런데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로 봐도” 한국사회와 문화에는 우리가 자부하는 것 자체마저도 비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잘못된 코드, 혹은 DNA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홍세화氏는 특유의 명료한 문장과 신랄한 주장, 그리고 되도록 양비론을 지양하는 태도로써 독자들이 ‘쎄느강’과 ‘한강’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한다. ‘쎄느강’을 마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문에 만약 그가 프랑스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면, 비유컨대 그 글은 프랑스인들이 읽은 ‘박노자氏의 책’이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홍세화氏는 프랑스문화에서 본받을 것들을 추출해서 이 책을 엮었다. 겨냥된 독자가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긍정적인 면들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개성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회, “어떤 돈인가? 어떤 권력인가?”에서 ‘어떤’이 자주 생략되는 사회, 사람이 아닌 직분을 만나는 사회, 토론문화가 퇴보된 사회(우리나라 정치인들 토론회 하는 것을 한 번 보라. 이따금 대학생 토론대회라고 방영하는 케이블방송의 TV토론회를 보라. 그러나 정작 창피한 것은 나 자신도 토론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해본 적은 거의 없고, 배운 기억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홍세화氏는 프랑스 방송편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줄이고 토론 프로그램을 살린다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리’와 ‘인권’ 등을 주장하며 반대하겠지만 토론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분명 좋은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잘못된 언어생활과 ‘언어’의 수능화로 점차 떨어지는 한글사랑,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론이 정말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었던 사회, 언론의 양비론과 부족한 윤리의식, 상(賞)이 갖는 권력의 재확인,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회, 좌우편향이 심해 지진이 일어나는 사회, 세대 간 공유되는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사회. 

  작금의 수치스러운 세태들이 괜스레 오늘날 사회 이곳저곳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니 토론이 없고, 윽박지름만 있으며, 안철수 교수가 말한 “문제인식의 공유”는 세대 간의 차이, 좌우의 차이, 혹은 강남과 강북, 대학교 이름, 아니면 지역 간 차이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문제제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심각성에 대해 추호의 고찰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가 출판된 때가 20세기였다는 것을 고려해 봐도 우리 사회는 뭔가 나아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 있는, 쉽게 말해 사람은 같은데 옷만 바꿔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체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혹은 기술적 조류에 맞춰 “트렌디한 것”을 마치 ‘선도’하는 나라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면 민족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회개혁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며 목덜미를 후려친 할머니가 어디 이 나라에 단 한 명이겠는가?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권을 부마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의 인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지나치는, 나귀를 탄 양반 같은 이들도 있다. 

  몇 년 만의 재독인데도 여전히 나 자신은 그대로이고, 문제제기는커녕 뭘 하느라 그리 바쁘고 어지러웠는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 있다. 홍세화氏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책들은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의식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세화氏의 글에서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회의적 인식이나, 혹은 여전한 편향적 인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갔는데 도저히 오늘 나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친구에게 물어본다. “오늘 머리 괜찮아?” 그러면 친구는 “괜찮아.”, “앞머리가 조금 이상해.”, “왁스를 너무 많이 바른 것 아니야?” 등등 의견을 말해준다. 이 의견은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해준다. 남이 좋다고 하니 하루를 당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어디가 이상하다면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손질해본다. 조언과 수정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라는 수준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대개 아파트 위층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의 아들딸은 몇 살이고, 집주인의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를 허상이 아닌 ‘실체’로써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 이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와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절반 남은 대학생활 중 얼마나 많은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특히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내가 그런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재확인했다는 것이고, 홍세화氏의 책이 많은 독려를 해줬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과 같은 역량, 용기, 그리고 집요함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의 유일한 꿈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마땅히 곁에 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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